|
단치히 대학살 - 폴란드계 유태인에 의해 자행된 독일인 학살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burigb&logNo=100114366510
만행사진은 PP215~249 을 확인 (매우 잔인함)
왜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는가?
</BLOCKQUOTE>
2차 세계대전은 단치히 통로를 두고 발발했는데, 그 통로는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그것이 폴란드에게 제공되기 전까지는 독일의 일부였다. 베르사유 조약은 노란색으로 칠해진 서쪽 영토를 폴란드에게 넘겨 주었다.
1918년, 베르사유 조약
1차 세계대전 종전 조약이 독일을 황폐시켜, 불황이 야기되었고 유대인들이 엄청난 양의 독일 산업을 사들였으며, 그리하여 독일인들에게 쓰라림만 남았다. 베르사유 조약에 참여한 사람들의 80%가 국제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국제 유대인사회는 독일에게 자신의 영토 일부분(단치히 통로)를 폴란드에게 넘겨주도록 강요하였다. 또한 폴란드 단치히는 90% 이상이 독일인이었고, 동프로이센 영토로 가려면 이곳을 꼭 통과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Edward House
에드워드 하우스는 유대사회의 지도자였으며, 로스차일드 가문에 고용된 사람이었는데, 그는 그에 앞서서 연방준비제도를 창설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BLOCKQUOTE>
1937
히틀러는 폴란드에 동프러시아에 있는 그들의 지방에 1마일 접근을 허가해 줄것을 탄원하고 있었다. 양국은 그에 관해 교섭하고 있었는데, 1939년 폴란드가 갑자기 모든 협상을 파기하였다.
</BLOCKQUOTE> |
1938년
루즈벨트는 처칠에게 미국이 독일에 대한 전쟁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보장하였다.
1939년 3월 31일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방어를 보증하고 있었다. (영불보장조약)
Rydz Smigly ㅣ lgnacy Moscicki
폴란드 육군원수 ㅣ 폴란드 대통령
폴란드가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하다.
루즈벨트와 처칠의 보증에 용기를 얻어, 폴란드 군 사령관인 Rydz Smigly와 폴란드 대통령 lgnacy Moscicki는 무력시위를 하였다.
Smigly는 말하였다.
리츠-스미글리 폴란드 육군원수 “폴란드는 독일과의 전쟁을 원하며 독일이 원치않더라도 독일은 이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 The Daily Mail, August 6, 1939
그는 독일을 3일 안에 황폐화시킬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1933년 당시 폴란드의 독재자였던 필수드스키가 독일로 하여금 베르사유 조약의 무장해제조항을 준수하도록 강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합동으로 군사행동을 하기도 하였다. 즉, 말하자면 폴란드가 우선 프랑스에게 '예방전쟁'을 제안하기도 하였지만 벨기에와 프랑스가 이를 거절하였다.
또한 폴란드는 전통적으로 중부유럽의 육군 강국이었고 몽골로부터 배운 차기병은 오랫동안 유럽최고수준의 전투력을 갖추고 있었다. 폴란드는 당시 이러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러시아내에서의 혁명에 따른 혼란과 중부유럽에서의 독일의 패전에 따른 힘의 공백을 틈타 몇 번이나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예프까지 점령하기도 하였다. 이때 소련은 굴욕적으로 많은 영토를 내주고나서야 폴란드와 강화 협정을 맺을 수 있었다. 이 뿐만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 폴란드를 소련에게 그랬던 것처럼 국경침범와 월권행사로 독일의 국민감정을 모욕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폴란드는 전쟁을 위한 도발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1939년 단치히 대학살
폴란드 볼셰비키들은 단치히 지구에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앞두고 58,000명의 독일인들을 무참히 살해했다. 폴란드 군대와 독립적인 볼셰비키들은 단치히 지구에서 독일 국민들을 살해했다. 수천명의 민간인 독일인들이 민간인 및 러시아 NKVD 유대인에 의해 살해되었는데, 그들은 폴란드가 빠른 시간내에 독일군을 격퇴하리라 확신했었다. 많은 사람들이 독일의 농장과 사업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좋아했다.
폴란드인들은 최소한 1939년 4월 이후부터 독일인이라면 누구든지 모두 닥치는대로 죽였고, 작은 사건은 일차대전 직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여러분은 그런 내용이나 이런 잔인함이 독일의 폴란드 침공의 주요 원인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대중매체로부터 들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하다. 그 당시 2차 대전에 세계 유대인 언론들이 그런 소문은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독일은 국제연맹에 수십차례 항의를 하였으나 응답이 없었다.
이 상황은 카르타고와 로마의 전쟁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카르타고와 로마가 대립할 시기에 사르데냐 섬으로 카르타고의 반란군들은 도망쳤다. 그런데 하필 그 지역은 제 1차 전쟁에서 진 대가로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었는데, 그 조약의 내용은 반란군들이 시위하는 사르데냐 섬을 넘어가게 되면 로마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이 때 사르데냐 거주 외국인들은 카르타고의 이 약점을 알아차리고 사르데냐 섬에서 카르타고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사르데냐는 그들의 소굴과도 같았다. 이에 카르타고는 그들의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술에 참다못해 결국 사르데냐 섬을 침공하여 반란군들을 몰아내었다. 그러나 예상대로 로마가 조약에 위반된다는 구실로 결국, 이 사건으로 카르타고는 막대한 배상금을 로마에 물어주었고, 그 뒤 한니발이 나타나 로마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제 3차까지 로마와 전쟁을 하게 된다.
어떤가, 히틀러의 단치히 상황과 거의 비슷하지 아니한가?
위와 같이 히틀러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폴란드 침공을 하게된다. 그러나 프랑스와 영국의 선전포고에 히틀러는 평화협정을 제안하지만, 결국 거부당하고 전쟁은 시작되게 된다. 히틀러의 1939년 9월 19일 화요일 연설에 잘 나타나 있다. <U>speech</U> ← 히틀러의 연설 (밑에 일부분이 나와있음)
브롬버그의 피의 일요일
어느날, 폴란드 유대인들은 폴란드 군대의 보호아래 작은 독일 마을을 공격하여 악랄하게도 5500명의 독일인을 무참히 살해했다.
피의 일요일에 5500명의 독일인이 살해당하다.
브롬버그의 피의 일요일은 아마 가장 잘 알려진 것일 것이다. 폴란드 유대인들은 그들이 독일에게서 이길 것이라 확신하고 피의 욕망에 말릴사람이 없는 광란을 계속했다. 볼셰비키 무리들도 Ponz, Warsaw, Lodz가 그 마을로 다가가서 외곽에 잇던 농부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헛간에 가두고, 여자들은 강간한뒤 도끼로 쳐죽였으며, 남자들은 그 자리에서 죽였다.
① ② ③
① Ladovitch ㅣ ② Karpinski ㅣ ③ Weis
① Ponz ㅣ ② Warsaw ㅣ ③ Lodz
폴란드 바르샤바 볼셰비키 유대인 그룹 지도자 (학살 주모자)
브롬버그의 피의 일요일에, 수천명의 독일계 인종들은 다수인 '폴란드인'들에게 골목에서 돼지처럼 도살당했다.
브롬버그
베르사유 협정에 의해 폴란드에 주어진 한 평화로운 작은 시
브롬버그가 도살장이 되다.
피에 굶주린 볼셰비키들은 여자들을 강간하고 나서 그들을 죽였다.
그들은 강제로 독일인들을 교회에 들어가게했다.
볼셰비키들은 328명의 독일 민간인들을 산채로 태워 죽였다.
</BLOCKQUOTE>
그밖의 올리지 못하는 잔인한 사진들
(19세, 심장이 약하신 분은 자제해주시기 바랍니다.)
<U>Pictures from that day</U> ←
누구에게 이득인가?
유대인 스탈리과 볼셰비키들은 현재 그들의 전쟁을 하고 있고 영국인, 프랑스인, 캐나다인, 미국인 등의 피가 독일을 괴멸시키고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스탈린의 사기행위에 세계를 개방하여 공산주의의 씨가 전 유럽에 뿌려질 것이다.
히틀러의 제국의회 연설 (1939년 4월28일)
“독일-폴란드 관계에 대해서는 긴 말이 필요없습니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도 역시 베르사이유 평화조약은 독일에 가장 고통스런 상처를 남겨놓았습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말입니다. 폴란드에 해상접근로를 제공하기 위해 매우 기이한 형태로 조성된 ‘단치히 통로’는 그 무엇보다 폴란드와 독일 사이에 우호선린 관계가 수립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미 말했지만 이 ‘단치히 통로’는 우리 독일이 해결해야만 하는 가장 고통스러운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폴란드 역시 해상접근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적이 없으며 두 나라가 서로의 이웃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진 이상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하고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같은 생각을 가졌던 이 전의 필수드스키 원수(Marshal Pilsudski)는 그러므로 두 나라의 이익이 관련된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전쟁을 배제하자는 독일과 폴란드의 불가침 조약에 참여했던 것입니다. 이 협정에는 폴란드에 대한 독일의 양보라고 할 수 있는 한 가지 예외조항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에 폴란드가 프랑스와 맺은 전시 상호지원조약에만 해당될 뿐 이 협정이 조인된 이 후에 폴란드와 프랑스가 맺을 수도 있는 조약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독일과 폴란드의 합의가 유럽의 긴장을 괄목할 수준으로 완화시켰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과 폴란드 사이에는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습니다. 바로 독일도시 단치히(Danzig) 문제 말입니다. 단치히는 독일의 도시이며 독일에 속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이 도시는 폴란드와 계약을 맺고 있습니다. 그들도 인정하듯이 이 계약은 베르사이유 조약의 실세들이 단치히 시(市)에 강요한 것입니다. 더욱이 분쟁을 심화시키는데 혈안이 되어있는 국제연맹에 해법을 기대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국제연맹의 그 고등판무관이란 인물은 참으로 대단한 술수의 소유자였습니다. 본인은 이 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이 유럽의 긴장을 최종적으로 해소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는 이 문제의 해결은 일부 정신나간 전쟁광들의 선동이 아니라 실제적인 위험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개월 전 단치히 문제와 관련하여 수 차례의 논의를 거친 뒤 본인은 폴란드 정부에 구체적인 제안을 내놓았습니다. 본인은 이 제안이 무엇이었는지를 여러분께 알리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이 제안이 유럽의 평화를 위한 최대한의 양보인지, 아닌지는 여러분께서 직접 판단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언급했던대로 본인은 폴란드도 해상접근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은 적이 없으며 항상 이러한 사실을 신중하게 고려했습니다. 나는 민주주의 국가의 정치인이 아니라 국가사회주의자요 현실주의자입니다. 본인은 폴란드가 해상접근로를 원하는 것만큼 독일 역시 독일의 동부영토에 대한 접근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바르샤바 정부에 분명히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 모두는 참으로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폴란드 정부가 알아야 할 것은 독일이 이런 문제들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들은 베르사이유의 농간꾼들에게 그 책임이 있습니다. 악의적인 의도에서였건, 생각없음에서였건 그들은 유럽에 꺼뜨리기 힘든 도화선이 달린 100개의 화약통들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이 문제들은 과거의 사고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새로운 방법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단치히 통로’라는 폴란드의 해상접근로와 이 통로를 가로지르는 독일의 단치히 접근로는 그 어떤 군사적인 중요성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통로의 중요성은 오직 상징적이며 경제적인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교통로에 군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군사문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본인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1) 단치히는 자치도시로서 독일제국에 귀속된다
(2) 독일은 독일과 단치히를 연결하는 도로와 철도부설권을 얻으며, 이들 시설에 대해서는
폴란드 정부가 단치히 통로에 대해 행사하는 것과 동등한 치외법권적 권한을 누린다.
이에 대해 독일은;
(1) 단치히에 대한 폴란드의 모든 경제적 권리를 인정한다.
(2) 폴란드가 원하는 목적과 규모의 자유항구를 단치히에 보장한다.
(3) 독일과 폴란드의 현재 국경을 받아들이며 최종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4) 본인의 생애를 초월할 유효기간 25년의 불가침 조약을 폴란드와 체결한다.
(5) 독일은 폴란드, 헝가리와 공동으로 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보장하며 이 지역에 대한
독일의 일방적 헤게모니를 포기한다.
폴란드 정부는 나의 제안을 거부한 반면 첫 번째로, 국제연맹의 분쟁중재 고등판무관을 다른 인물로 교체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는 것과, 두 번째로 독일의 단치히 도로 및 철로 부설에 대한 타당성 여부를 검토해 볼 의사가 있다는 답변을 전달해 왔습니다. 본인은 폴란드 정부의 이러한 납득할 수 없는 태도에 유감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 자체는 그리 결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가장 우려스러운 일은 1년 전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국제적 전쟁선동꾼들의 대대적인 거짓말 공세 하에 폴란드가 군대동원령을 내렸다는 사실입니다. 비록 독일은 단 한명의 병사도 징집하지 않았으며 폴란드에 무력으로 대응할 생각조차 않고 있었던 상황에서 말입니다. 이미 말한 것과 같이 폴란드의 이러한 행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유감스러운 일임에 후세의 사람들은 본인의 제안을 그들이 거절했던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이었는가를 판단할 것입니다. 본인이 그러한 제안을 했던 것은 독일 국민에 민감하게 작용하는 문제를 독일과 폴란드 양국 모두의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해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본인의 믿음에 의하면 단치히 문제에 대한 해법에 있어 폴란드는 주는 쪽이 아닌 받는 쪽에 서 있습니다. 왜냐하면 단치히는 결코 폴란드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려한다는 국제언론의 망동은 영국과 프랑스의 소위 폴란드 국경보장 선언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에 의해 폴란드 정부는 프랑스나 영국이 독일과 전쟁에 돌입할 경우 폴란드 역시 독일에 대해 군사적 행동을 취해야 할 의무를 지게 되었습니다. 폴란드가 받아들인 이러한 의무조항은 본인이 수년전 필수드스키 원수와 맺은 불가침조약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이 협정에는 당시 폴란드와 프랑스 사이에 존재했던 상호간의 의무사항이 명시되어 있는 바, 이 의무사항들을 자의적으로 연장확대하는 것은 독일-폴란드 사이에 체결된 불가침조약의 의무조항들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만약 당시 상황이 지금과 같았더라면 본인은 그 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느 한 쪽에 그토록 많은 예외조항을 허락하는 불가침조약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당사국들의 무력사용을 근원적으로 배제하는 명백한 합의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오직 집단적 안보, 아니 집단적 안보불안과 끊임없는 전쟁의 위험만이 상존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인은 필수드스키 원수와 체결했던 조약을 다시 검토한 바, 이 조약은 폴란드의 일방적인 위반에 의해 파기된 것으로 간주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뜻을 반영하는 전문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이러한 대응방침 수정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의 해법에 대한 본인의 원칙적인 시각에는 변함이 없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본인은 두 나라의 선린관계를 위해 폴란드의 새로안 제안에 언제든 귀를 기울일 것이며, 또한 독일은 동등한 조건 하에서 합의된 의무사항들을 철저하게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요제프 베크 폴란드 외무상
"폴란드 외무장관인 요제프 베크는 다섯 개의 공을 가지고 노는 무모한 게임을 하는,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제3의 유럽’을 위한 야심만만한 계획을 추진함으로서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는 동해에서 다다넬스 해협까지에 폴란드가 주도하는 중립적인 세력권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폴란드를 위해서는 히틀러의 공격적인 정책에서 이점을 얻으려고 하였다... 대외적으로 조심스러운 그의 친독일 정책은 속으로는 ‘원칙적으로 도이치 사람들의 오류를 강화’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단치히를 폴란드 영토에 조건없이 귀속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동프로이센 전체, 슐레지엔, 포메른... 그렇다, 우리의 포메른’까지 노리고 있었다. 그런 말은 점점 더 자주 공개적으로 등장하였다... 베크가 히틀러의 제안을 뜻밖에도 냉담하게 거절하고 도전적으로 몇 개 사단을 국경지역에 배치한 일은 폴란드가 가진 은밀한 대국의 꿈이 그 배경이었다. 엄격하게 사태를 바라보면 그는 독일의 요구를 불공평하다고 생각지도 않았던 것 같다. 폴란드에게 단치히는 오직 상징적인 의미만을 가진다는 점을 그는 시인하였다. 그러나 어떠한 양보도 모든 폴란드 정책의 가장 깊은 내면의 의도를 완전히 뒤집는 것과 마찬가지 작용을 할 것이다." - 히틀러 평전, 요아힘 페스트, 안인희 역
ZENTRALVERLAG DER NSDAP
“이러한 상황들의 전개와 함께 폴란드 문제로 인한 긴장은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총통은 1월 5일(1939년) Obersalzberg에서 베크 폴란드 외무장관을 영접했다. 그는 단치히가 독일 도시임을 주지시키는 한편 독일-폴란드 관계의 개선을 위한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러한 제안들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런던과 파리가 이날의 만남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보면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에 보호령이 설치된 직후인 3월 31일, 증오로 가득찬 런던의 일부 일간지들은 독일군대가 폴란드 국경에 집결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보도했다. 체임벌린은 하원에서 영국-폴란드 관계와 관련하여 영국의 폴란드국경 보장을 선언했다. 그러므로 런던의 전쟁광 써클은 바르샤바 정부에 그들의 의지대로 도발을 감행할 수 있는 자유행동권을 선사했다. 런던의 플루토크랫(Plutocrat, 金權정치가)들이 비밀리에 노렸던 것은 그들이 오랫동안 고대해왔던 제국에 대한 군사적 제재(制裁)의 빌미를 제공해줄 독일과 폴란드의 무력충돌이었다. 바르샤바 정부는 이를 이해했다. 4월부터 폴란드 국경내에 살고 있는 독일거류민들에 대한 테러와 가혹행위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4월 13일에는 단치히 국경부근에서 다수의 독일인들이 폭도들에게 살해되는 일이 발생했으며 이러한 테러행위는 폴란드의 다른 지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사건들은 독일이 폴란드와의 관계개선을 위한 노력을 시작한 이 후에 더욱 늘어났다. 독일 영사관은 셀 수도 없이 일어나는 이러한 사건들을 매일같이 베를린에 보고했다. 5월 8일에는 300명의 독일주민들이 뉴토미셸 郡에서 강제 추방되었다. 5월 9일에는 브롬베르크 소재 독일극장이 강제 패쇄되었으며 5월 15일에는 로드시에서 두 명의 독일주민이, 5월21일에는 칼트호프에서 단치히 시민 한 명이 폴란드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러한 추세는 5월15일 폴란드의 카스프리즈키 국방장관이 비밀회담을 위해 파리를 방문했다는 사실과, 5월 8일경부터 폴란드의 서부국경이 Beuthen, Oppeln, Breslau, Stettin, 그리고 Kolberg를 넘어 독일영토로 확대된 것으로 표시된 지도들이 폴란드 도시들에 배포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단치히를 둘러싼 긴장은 폴란드 정부의 압박 하에 더욱 고조되었다. 6월15일 독일대사는 총통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와 비방에 대한 공식적인 항의서한을 폴란드 정부에 전달했다. 6월과 7월을 통해 국경침범을 비롯하여 反독일주민 테러사건들이 계속 증가했다. 8월4일 폴란드 정부는 단치히에 상주하는 폴란드 세관원들과 관련된, 확인되지 않은 낭설에 근거하여 그들의 요구에 불응할시 도시 외부로부터의 식료품에 의존하는 단치히의 국경을 봉쇄하겠다는 내용의 무례하며 도발적인 최후통첩을 단치히 시정부에 전달했다. 8월7일 단치히는 이 최후통첩을 거부했고 독일정부는 8월 9일 이와 관련하여 폴란드 정부에 우려를 표시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막 아래서 오만해진게 분명한 폴란드 정부는 8월 10일 불성실한 답변서를 보내왔다. 이에 8월 18일 단치히 방어를 위해 친위대 방위군에 동원령이 발동되었고 일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영국의 돈 많은 전쟁광들은 이 모든 일로부터 손을 씻고 무죄를 주장하여 그들이 원했던 전쟁에 대한 도덕적 알리바이를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눈이 먼 사람조차도 영국이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세관 문제를 둘러싼 단치히 市와 폴란드의 협상은 폴란드 정부의 무리한 요구탓으로 8월 24일 아무런 성과없이 결렬되었다. 그러자 폴란드는 예비병력에 대한 확대동원령을 발동하고 국경에 대한 도발을 가중시켰다. 8월 25일 폴란드군은 국제영공을 비행하고 있는, 제국의 각료가 탑승한 비행기에 발포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반응은 누구도 오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8월 25일 영국은 폴란드 보호동맹에 서명했고 바로 다음날 150만명의 폴란드인들이 징집되었다. 8월27일 제국의회 연설에서 총통은 양국의 평화를 보장하는 선에서 단치히, 단치히 통로, 그리고 폴란드와의 관계개선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고 천명했다. 이로인해 8월28부터 31일까지 베를린, 로마, 런던, 파리에서는 분주한 외교적 움직임이 있었다. 이에 더하여 총통은 폴란드 정부로부터 특사의 파견을 기대한다고 발표함으로서 다시 한번 평화적 해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폴란드는 이에 대한 응답으로 8월 30일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8월 31일 폴란드 국영라디오는 양국간의 문제에 대한 독일의 해결책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했다. 독일 영사관은 8월 25일부터 31일까지 55건의 독일주민들에 대한 테러행위를 보고했으며 폴란드군은 8월 31일 중대한 국경도발 행위를 감행했다. 이에 맞서 독일은 9월 1일 폴란드와 개전했다. 이날 총통은 제국의회 연설에서 힘에는 힘으로 대응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같은날 또한 단치히는 제국과의 연합을 선포했다." (Jahreswechsel 1939/40. Sylvesteransprache an das deutsche Volk, Die Zeit ohne Beispiel, 1941)
1939년 9월 독일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상실한 舊영토를 둘러싼 분쟁 끝에 폴란드를 침공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의 국경을 보호하고 나치독일로부터 유럽의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분 하에 독일에 선전포고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과 동시에 동부로부터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고, 1939년 11월 소련이 다시 핀란드를 침공했을 때에도 양국은 무반응으로 일관했다.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철회해달라는 히틀러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은 독일의 서부국경에 병력을 집결시켰고 1940년 봄 독일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통해 英-佛 연합군에 선제공격을 가하여 영국군의 덩케르크 탈출을 끝으로 두 주만에 프랑스를 함락시켰다.
Harold Nicolson (British MP) 가 1940년 3월 14일, 파리에 있을 때 쓴 일기로 들어가면
"폴란드에서 있었던 잔학행위는 믿을수가 없다. 그들은 모든 독일 젊은이들을 죽이고, 나이든 사람들을 들판으로 내몰았으며, 여인들을 임신못하게 해버렸다. Bob의 스위스 친구와 저녁을 함께 했던 독일군 대령은 식사도중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껏 폴란드에서 본것으로 인해 슬픔과 분노, 그리고 충격과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제 2권, Harold Nicolson의 편지와 일기, 전쟁시대, 1939-45, Bom은 Nicolson의 친구 Bob Boothby를 말한다.
폴란드를 점령한 직후 한 마을에서 발견된 독일시민들의 시신을 독일군들이 한곳에 모아놓은 처참한 광경
무너진 총리 관저에서의 히틀러 (마지막 사진)
"독일에서 나 또는 누군가가 1939년에 전쟁을 원해다고 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나는 독일-폴란드 전쟁 발발 3일전 다시 한번 자르지구에서 했던 경우와 유사한 방법으로 독일, 폴란드 문제를 해결할 것을 베를린 주재 영국대사에게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 히틀러의 유언
http://pann.nate.com/b200308239
첫댓글 잘 봣슴니다..
폴란드가 그렇게 독일을 괴롭힌 강대국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네요.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역사는 최후승자에의해 만들어진다는것을 실감하게되느눈요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