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두커니(외1편)
박남희
무 밭에 이르러
나를 우두커니 세워두고 무가 되었다
이파리만 푸르고 희디흰 몸은 맵거나 달았다
무는 뿌리로 말하는 것이라고 누군가 말했으므로
나는 뿌리를 키웠다
이상하게도 뿌리 위로 이파리가 무성해져갔다
이파리에 무꽃이 달리고 나비가 날아들었을 때에야
그리운 허공이 나비가 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오래전부터 허공이 무를 키우고
무의 이파리들이 허공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무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다닌다는 것도 알았다
그때까지 무의 속살은 연하고 부드러웠지만
무꽃에 씨앗이 영글고 나비가 사라질 때쯤이면
무의 속살에 단단한 심지가 박힌다는 것은
무 자신도 잘 모르고 있었다
나는 요즘 나를 우두커니 세워두고
연하게 해방시키곤 한다
그러면 날아갔던 나비가 다시 날아오고
사그라졌던 꽃대궁이 푸르게 피어난다
침묵하던 허공이 다시 무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무는 뿌리가 온몸이라고 허공이 말해주었으므로
처음으로 부끄럽던 뿌리가 자랑스럽다는 것도 느끼게 되었다
나를 우두커니 세워두고서야 나는 비로소 온전한 무가 되었다
그동안 내 뿌리를 감싸고 있었던 것이
흙의 커다란 자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늘에는 태양이 우두커니 서서
때 없이 굵어지고 달달해지는 무의 속살을 지켜보고 있었다
—《시사사》2014년 11-12월호
바벨의 언어로 시 쓰기
여기서는 하늘을 바다라고 말해도 된다
새가 물속을 날아다니고 어둠이 밀가루처럼
뭉쳐져서 달이 되었다고 말해도 된다
어차피 공중의 언어는 시와 산문에 구별이 없으니까
끝내 모래처럼 부서질 말의 탑이니까
말의 형식에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와르르 무너져 내릴 때를 대비해서
스스로가 모래의 상상력을 가지고 있으면 된다
여기서는 구름처럼 말이 가벼울수록 좋다
한꺼번에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 아프니까
사랑도 빨간 풍선처럼 가볍게 불어
적당히 말랑말랑해지면 공중으로 날려 버리는 게 좋다
풍선의 형식은 둥글지만
어차피 터져 버릴 말의 형식은 자유로운 것이므로
호흡에 너무 힘을 주어 핏대를 세울 필요는 없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풍선을
아름다운 상상력이라고 착각할 필요도 없다
때로 바닥에서 물이 나고 꽃이 벙글지만
무너지는 말이 너무 무거우면 비딕이 아프다
공중에 무너져 내릴 것들이 너무 많아
바닥은 늘 불안하다
바닥은 늘 폐허를 준비한다
높이 쌓았던 바벨탑이 무너질 때 시는 탄생한다
시는 폐허의 자식이다 말은 공중의 형식을 버리고
지상으로 무너져 내릴 때 시가 된다
낯설던 말과 말의 새로운 소통이 이루어진다
—《문예바다》2014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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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희 / 1956년 경기 고양 출생. 1996년 경인일보, 199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폐차장 근처』『이불 속의 쥐』『고장 난 아침』. 현재 계간《시산맥》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