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도시아키(田中俊明)에
의하면 초기의 고구려의 방어체계, 특히 강력한 경쟁세력이 있던 서북부의 방어체계는 관애(關隘)가 중심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왕도였던 집안을 중심으로 그 중기까지 관애의 존재가 확인된다.[1]관애에는 두 가지의 유형이 있는데
방어대상의 통로를 차단하는 유형, 그리고 방어대상이 되는 통로로 들어가는 별도의 골짜기에 통로와 평행한
상태로 쌓는 것이다.[2]여기에서 주된 방어기능을 담당하는
것은 전자인 관문(關門)형이라고 할 수 있다. 관애는 산지를 통과하는 도로의 협소한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방벽을 만들었고 그 넓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축조시의 노동력과 비용이 경감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고구려는 초기에 산지에 산성을 구축하였는데
이는 위난(危難)시 도피를 위한 시설이며[3]이후 요하를 따라 구축하였던
강고한 석성의 네트워크와는 성격이 다르다. 직접적인 자료가 부족하여 초기의 관애를 쌓은데 어느 정도의
노동력이 소요되었나를 알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후대의 자료를 참조할 수 밖에 없었다.
조선의 <세종실록>에는
명신(名臣)이었던 양성지(梁誠之)가 <평안도편의십팔사>에서
나오는 구성(龜城)을 북방의 요지로 삼아야 한다며 구주를
목(牧)으로 승격시키고 그 이북을 모두 속하게 해야한다고
한다. 구성은 그 둘레가 4075보(약 7.3km)이며 돌로 쌓은 석성이다. 세종 3년에 도성수축도감(都城修築都監)이 전국의 성 보수방법에 관하여 세종에게 올린 상소문에 따르면 석성이 허물어진 곳 1척마다 5명의 노동력이 투입이 되어야 하다고 보고되어있다.[4]국내성의 주변에 있는 관애시설은
그 길이가 120-150 미터 (關馬墻)[5], 750미터 (望波嶺關隘)[6], 259 미터 (北溝關隘)[7]등이 있다. 물론 4세기와 15세기간에는 축성술은 물론 건축재료등의 요소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있지만 위의 조선시대 자료를 통하여 어느정도
추정은 가능하다. 관마장의 경우 조선시대의 척(尺: 30cm)을 기준으로 약 400-500척에 해당하니 2000-2500명의 노동력이 소요된다. 관마장보다 큰 북구관애는
척수(尺數)로 약 860척이니 4×860=3440명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 가장 큰 망파령관애는 2500척이니 1만명의 노동력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망파령관애는 산의 척량부(脊梁部)에 쌓아올린 까닭에 실질적으로 산성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하여
후기 고구려 요동방어망의 중요 요새중 하나인 신성(新城)으로
비정되는 고이산성(高爾山城)은 둘레가 약 4km인데[8]이를 조선 척(尺)으로 환산하면 13000척에
해당한다. 1척에 5명이 소요되는 조선시대의 계산법을 기준으로
약 65000명의 노동력이 요구된다. 요하선(遼河線)보다는 내륙이긴 하지만 역시 요동방어망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오골성 (현 중국 요녕성 鳳城의 봉황산성으로 추정)은 둘레가 7525미터[9], 즉 25000척을 넘고 있어 125000명이라는 인원이 동원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