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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21일 화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마태오 9,9-13) As Jesus passed by, sitting at the customs post.
he saw a man named Matthew
He said to him, “Follow me.”
And he got up and followed him.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공동체에게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라고 권고한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 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라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를 부르시며 “나를 따라라.”고 하신다.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른다. 바리사이들이 이의를 제기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 마태오는 세리였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에는 곤란하다는 것이 당시 많은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만큼 세리는 사람들이 기피하는 직업이었습니다. 세리는 로마의 앞잡이로 인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세관장인 마태오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고 하십니다. 당시 세관장(세리)은 돈이 많고 권력까지 지녔지만, 죄인 취급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자기 백성에게 세금을 거두어 로마 제국에 바쳤기 때문입니다. 백성의 고혈(膏血)을 짜내어 로마에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안위를 보장받았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어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기까지 하십니다. 바리사이들이 이의를 제기해 보지만,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십니다. 사람을 보시고 대하시는 시각이 세상의 잣대와 확연히 다른 주님이십니다.
마태오는 행운아입니다. 난생 처음 그를 인간으로 대해 주신 분이 주님이십니다. 이후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릅니다.
우리는 주님을 만났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 또한 행운아입니다. 문제는 마태오처럼 우리도 철저하게 주님을 따라나서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라도 마태오처럼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따라나서는 삶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
로마는 반대 세력을 세금으로 묶었습니다. 그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해 탈세를 유도하고, 반항의 기미가 보이면 세무 사찰로 협박하였던 것입니다. 그 하수인이 바로 세리였습니다. 그러한 직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마태오는 다른 세리들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곧바로 응답한 것이 이를 말해 줍니다.
“나를 따라라.” 예수님의 이 부르심에 마태오는 즉각 따릅니다. 그가 세리라는 직업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을까요? 아니면 새로운 직업을 열망하고 있었을까요? 아무튼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러나 마태오에게 어찌 고뇌가 없었겠습니까? 두렵고 불안한 마음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과감히 털고 일어납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부르심이 있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망설이지 말고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마태오가 그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물 한 방울! -이난호- 일본의 고승 양관선사는 화를 내지 않는 걸로 유명했다. 장자인 그가 출가했으므로 그의 아우가 집안의 대를 이어야 했으나 그에게도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였는데 이자가 이만저만 망나니가 아니었다. 참다못해 파양을 논의하는 문중회의가 열리고 양관선사도 불려간다. 그러나 선사는 문중 사람들이 이구동성 파양의 이유를 꼽는 내내 침묵한다.
정체성 찾기 -전삼용신부- 제가 이번 여름에 한국에 들어온 첫 번째 이유는 귀의 이명을 치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백하는 것이지만 귀가 조금 들리지 않고 또 이명이 들리는 것은 외적인 핑계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구체적인 이유가 없었다면 공부 중간에 들어와 쉬게 해 달라는 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이명이 계속 들리기 때문에 3개월을 낭비한 것 같지만 사실은 지금 매우 만족하여 참 잘 들어왔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들어오고 싶었던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사제로서의 저의 정체성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신학생 때는 몰랐던 것이었는데 사제가 되고 다시 공부하러 나가니 한국에서 2년 동안 했던 사제로서의 삶이 너무 그리웠습니다. 저는 이런 감정이 사제로서 대접받고 인기 있었던 것들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닌지 적지 않게 걱정하며 묵상하였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런 이유만은 아니었음을 느낍니다. 저는 다시금 사제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렇게 힘을 얻었고 이제 돌아가 열심히 공부할 힘이 생긴 것 같습니다. 사제가 되어 2년 동안 행복했던 시절들을 돌아보면 사실은 매우 피곤했었습니다. 심지어 첫 본당에서 하루에 미사 다섯 대를 하다가 마지막엔 너무 기계적이 되어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라고 읽고 무심코 성작을 들어 올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수면 시간도 부족하여 성당에 성체조배하려고 앉기만 하면 잠이 들기 일쑤였고 나중에는 병원에 링거를 맞으며 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었습니다. 그렇게 너무 힘들어서 그 성당을 떠나기 한 달 전부터는 표정관리가 안 되어 항상 웃고 다녀 신자들을 섭섭하게 하였습니다. 결국 제가 떠나는 날 아무도 울지 않으셨습니다. 한 분이 우셨는데 딸이 이혼한다고 해서 우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힘든 2년을 보냈지만 유학을 나가서 이때가 그리워 6개월간은 책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고생했던 시절이 그립고 또 그것을 다시 느끼고 싶었을까요? 아마 제가 사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학 나가서, 미사도 신자들과 하지 못하고 고해성사도 주지 못하고 강론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가 자주 던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사제라는 것을 느끼고 싶어서 들어온 것이고 지금도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처럼 아무 하는 일 없지만 사람을 만나느라고 잠 잘 시간도 부족합니다. 그냥 만나는 것만이 아니라 고해성사도 주고 미사도 해 주고 강론과 강의, 상담을 해 줄 때도 있습니다. 3개월간 매일같이 바쁘게 살아서 주위 분들은 오히려 병을 고치러 화서 병을 얻어가겠다며 걱정하시지만 저 나름대로는 사제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고 그래서 이번 휴가를 한국에서 보내게 된 것에 대해 크게 만족합니다. 사제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는 역시 ‘신자들’을 만나야합니다. 사제는 신자들을 위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의사가 병자들을 위한 사람인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의사라 하더라도 환자들을 만나지 않고 골방에 혼자 있기만을 원한다거나 건강한 사람들만 만난다면 의사로서의 정체성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생이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큰 죄인이었던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들의 친구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이것을 본 바리사이들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님을 나무랍니다. 그러나 의사는 병든 이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근거를 들어 당신이 구원자로서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당연함을 설명해 주십니다. 사실 죄인들이 없다면 구원자가 무슨 의미를 지니겠습니까? 성자께서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과 함께 있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인간의 육체를 취하셨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정체성은 혼자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자신을 창조하신 하느님 앞에서가 아니면 찾을 수 없고, 남자라는 정체성을 여자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생각할 수 없으며, 자녀가 없는 부모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신자가 없는 사제도, 병자가 없는 의사도 없으며 죄인이 없는 구원자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대로라면 신앙인은 누구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요? 바로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 신앙인임을 느끼고 싶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 속으로 가야 합니다. 그래서 선교는 선택이 아니라 신앙인의 본질적 모습인 것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저는 며칠 뒤에 신앙이 없는 대학 친구들과 함께 짧은 여행을 할 것입니다. 저도 한 사제를 떠나서 한 명의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사제로서의 제가 필요한 곳은 신자들 가운데이고 한 명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있어야 할 곳은 믿지 않는 사람들 속입니다. 혹시 우리들은 우리들과 같은 부류 안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지 않습니까? 왕따 당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우리가 가장 먼저 다가가야 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의사가 병자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처럼, 돈이 가난하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가야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나’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하며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새벽을 열며 아메리카 어느 인디언 부족의 성년식 때, 이 부족에서는 성년이 된 소년, 소녀에게 바구니를 들고 옥수수 밭을 걷게 한다고 합니다. 긴 밭고랑을 걸으면서 가장 크고 탐스러운 옥수수를 딱 하나만 골라 바구니에 담게 한다는 것이지요. 단, 이때 이미 지나온 길로는 절대 되돌아갈 수 없으며 이미 딴 옥수수를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없다고 합니다. 정말로 마음에 든 옥수수 딱 하나만을 골라야 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빠다킹신부 떠나기
-김인한 신부- 서품을 받을 때 제게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모든 성인호칭기도 때 자신의 우리는 모두 죄인 -변진흥- ◆“일이 힘든 것보다도 심부름하는 사람들이 미워서 도와주기가 싫다.” 이 말은 1980년대 말부터 북한을 방문하고, 지금도 평양과 사리원 등 몇 군데에 국수공장을 세워 북한을 열심히 도와주고 있는 어느 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사실 대북 지원에 나선 실무자들의 공통된 심정이라고도 합니다. 우리가 어렵게 그들을 돕는데 당연히 북한에서 외부 지원을 담당하는 일꾼들이 이를 고맙다고 하고, 또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자기들 입장만 내세우는 등 어떤 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비협조적이어서 “대체 우리가 왜 이 고생을 하는 거야?”라고 혼자 분을 삭일 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강이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양승국신부- 세리 마태오의 인생은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보편적이지 않았습니다. 통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팍팍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침(浮沈)을 거듭하던 굴곡 많은 인생이었습니다. 엄청나게 먼 거리를 돌고 돌아 나중에야 하느님을 만난 마태오였습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굴곡 많은 인생, 멀리 돌고 돌아가는 인생,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음의 글을 읽어보시면 굴곡 많은 인생, 멀리 돌고 돌아가는 인생이 결코 나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몽골 초원을 여행하다보면 강을 자주 만난다. 초원에 흐르는 강은 많은 굴곡을 만들며 굽이굽이 흘러간다. 이 강이 가는 방향이 있다. 바로 낮은 곳이다. 강은 낮은 곳을 향해 가며 평원의 파인 곳 사이를 누비면서 흘러간다. 강기슭에는 항상 푸르름이 있다. 강 주변에는 풀과 나무가 자라며,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강이 돌아가면 갈수록 초원의 많은 지역이 푸르러진다. 돌아가면 갈수록 강을 통해 축복의 지역이 더 넓어지는 것이다. 하느님과 동행하는 삶은 초원의 강이 가는 길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목적을 이루는 것보다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돌아가면 돌아갈수록 우리의 주변은 풍성해진다.”(이용규, ‘내려놓음, 규장) 마태오 복음사가는 참으로 오랜 세월 돌고 돌았습니다. 굴곡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오랜 방황과 좌절, 갈등과 죄의 나날을 마무리 짓고 오늘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 역시 다시 그분을 만나야겠습니다. 비록 돌고 돌았지만, 비록 숱한 죄로 얼룩졌지만, 비록 오르락내리락 수많은 부침을 거듭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세리라는 직업의 특성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극단적 이기주의’, ‘극단적 자기중심주의’입니다. 그들의 지상과제는 어떻게 해서든 세금을, 고리대금을 받아내야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각적인 납부라는 자신들의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그들은 폭력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세리들은 세금을 거둘 대상의 편의나 처지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이 굶어죽든 말든, 병에 걸려 세금을 낼 형편이 못되든, 세금을 내기 위해 딸을 팔아야할 처지든 말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낼 때 까지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마태오 복음사가 역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그가 오늘 예수님을 만납니다. 은혜롭게도 그의 삶은 예수님을 통해 180도 바뀌게 됩니다. 이기주의에서 이타주의로, 자기중심주의에서 하느님 중심주의로 바뀌게 됩니다. 나만 생각하는 극단적 이기주의, 자기중심주의로부터의 극복이 곧 구원의 문이라는 진리가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의 인생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것’ 없이는 죽을 것 같은 것을 누구나 한 가지씩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우리는 바로 ‘그것’ 때문에 생명을 얻지 못합니다. 충만한 구원을 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장 중요시여기는 바로 ‘그것’ 때문에 우리 인생이 쫄딱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놓을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언덕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자유 -조욱현 신부-
의인이 된 죄인 마태오 복음사가 - 이기양 신부- 주님의 부르심에 곧장 응답한 마태오 -경규봉 신부-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거든
친교의 삶 -최혜영 수녀- 음식을 함께 나누며 담소를 나눈다는 것은 친교의 표시입니다. 잔치에 음식과 술이 빠질 수 없는 것은 기쁨을 표시하는 가장 직접적인 표시이기 때문입니다.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김덕진- 예전에 비해 교도소 시설과 환경이 많이 나아졌고, 교정 공무원들의 인권 의식도 향상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죄인이나 전과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달라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전히 ‘불쌍한 사람들’ 아니면 ‘무서운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그들을 위해 돈을 낼 수 있는 사람은 많겠지만 그들과 함께 밥 먹고, 한 공간에서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에수님이 마태오를 부르시는 것처럼
-이회진신부- 어느 날 저녁 시간에 본당 수녀님이 묵상을 하려 성당에 들어갔더니 어둑한 성당 한편에서 자매님 한 분이 울면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슬픈 일이 있는가 보다 하고 수녀님은 따로 앉아 기도를 했는데, 그 자매가 하도 오래 앉아 울며 기도하는 바람에 수녀님의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그러나 기도 하는데 중간에 끊을 수가 없어서 참고 한참을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 자매가 집에 가려 일어섰을 때 수녀님이 다가가 물었습니다. “자매님, 무슨 힘든 일 있어요?” 어둡고 무거운 얼굴을 하고 말없이 서 있는 자매가 안스러워 수녀님은 그 자매를 수녀원에 데리고 가서 차나 한 잔 하자고 초대했습니다. 괜찮다는 자매를 몇 번 권유해서 수녀원에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차를 한 잔 나누다 보니 그 자매가 입을 열었습니다. 이래도 죽을 수밖에 없고, 저래도 죽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어려움에 처해 있어서 죽을 결심을 했는데 집에 남겨 논 아이들이 눈에 밟혀 그렇게 성당에 앉아 울고 있었다고 말을 하더랍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위로하고 격려하였지만 수녀님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 자매의 집까지 함께 갔습니다. 아이들이 있다고 해서 수녀원에 있던 과자며 과일을 아름아름 봉지에 담아서 갔죠. 오늘은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도둑놈이라고, 날강도 같은 놈이라고 욕을 먹던 세리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교회의 복음서라고 하는 마태오 복음서를 쓰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서에 “교회 공동체의 사랑”과 “형제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던 그가 공동체 안에서의 사랑과 형제애에 대해 마음을 다해 고백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요? 마태오는 누구보다 돈이 많았고, 남들은 손가락질을 하건 어쨌건 그래도 그를 이해해 줄 “죄인”인 동료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마태오를 변화시킨 것은 그가 가진 재산이나 지위나 동료들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으로 그에게 다가가 그를 부른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를 변화시킨 것은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이고, 예수님은 하느님의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녀님은 그 후로도 가끔 그 자매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 자매 역시 죽을 결심을 한 것은 잊고 열심히 아이들을 위해 살게 되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살리는 것은 어떤 큰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고 사랑해 주시듯, 우리 역시 있는 그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옆에 서 줄 때, 그들은 자신의 삶의 어려움을 털고 일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체험한 삶의 기쁨을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그렇게 어려운 이들, (내가) 버려둔 이들의 곁에 서 있어 주시지 않겠습니까? “자비하신 주님, 당신 제 사랑이 되어 주셨듯이, 제가 귀찮아서, 미워서 멀리했던 이들에게도 제가 사랑이 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소서. 아멘.”
사랑의 눈빛 - 조성풍 신부- 예수님은 다양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들을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복음서라는 사랑 고백서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양승국신부- <'그냥' 일어서는 사람> 오늘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마태오의 성소여정은 아주 짤막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무척이나 극적이고 감동적입니다. 마태오, 오늘 복음에 표현된 대로라면 얼마나 ‘화끈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한 번 한다면 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보통 부르심을 받았을 때 사람들은 어떻게 대응합니다. 일단 멈칫합니다. 앞뒤전후를 따져봅니다. 일단 시간을 벌고 생각할 여유를 찾습니다. “좋지요. 그렇지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부모님과 가족들과 상의하고 말씀 드릴께요.”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대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저 같은 사람이!” 그러나 마태오의 태도를 눈여겨보십시오. 어떻습니까? 마태오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앞뒤 재지 않고 ‘그냥’ 일어섭니다. 손에 들어 있던 고액권들과 세금장부들을 그대로 둔 채 지체 없이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마태오의 행동 하나 하나는 얼마나 예수님을 기쁘게 해드렸는지 모릅니다. 어두웠던 지난 과거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 출발하는 그 첫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마태오는 기쁨과 감사의 잔치를 벌입니다. 이 세상과 결별하는 송별회도 겸했겠지요. 마태오는 이 송별회에 예수님과 제자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동료들, 세리들, 죄인들을 초대합니다. 마태오가 그들을 초대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자랑하기 위해서? 친구들과의 헤어짐이 슬퍼서? 그래서 그들과 마지막으로 한 잔 하기 위해서? 절대로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친구 세리들, 죄인들도 생명과 구원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만나 새 삶을 찾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들을 초대한 것입니다. 마태오 한 사람의 회개는 그 날 당일로 또 다른 수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의 동반 회개로 이어졌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우리들과는 달라도 철저하게 다른 예수님의 관점, 사고방식을 묵상해봅니다. 마태오, 당대 사회에서 철저한 죄인이었습니다. 되 돌이킬 수 없는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동족들의 피를 빨아먹고 자기 배를 채우던 고리대금업자였습니다. 수전노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던 로마의 앞잡이이자 매국노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냥 제자가 아니라 최측근 제자, 후에 당신의 행적을 성실하게 기록할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그 옛날 하느님 앞에 늘 부족하고 부끄러웠던 마태오를 부르듯이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잘 나서, 우리가 똑똑해서, 우리가 흠도 티도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부족해서, 안쓰러워서, 죄인이어서, 병자여서, 답답해서, 안타까워서 부르십니다. 오늘도 부족한 저희를 생명에로 부르신 자비의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 부족한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 구원사업을 계속하시는 은총의 하느님, 영광 받으소서.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김병환 신부 - “혹시, 저더러 따르라는 말씀입니까?”- 변화의 시작 - 박상대 신부 -
사실 제가 강의를 많이 다니기 때문에 저를 알아보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저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분들도 많고, 함께 자리하길 원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또한 본당에서도 그렇게 인기 없는 편도 아닙니다. 하지만 저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그분에게 보이는 제 모습은 ‘이상한 남자’였나 봅니다.
그러면서 저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하게 됩니다. 그냥 외적으로 보이는 내 모습은 ‘이상한 남자’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저와 이야기하고 함께 하길 원하셨던 분들은 제 외적인 모습을 보고서가 아니라, 바로 제 안에 계신 예수님 때문이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즉, 이렇게 대접받으며 잘 사는 것은 내가 잘 나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종종 착각 속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제일 잘난 듯이 내 뜻을 고집스럽게 굽히지 않았을 때도 있었고, 남에 대한 비판도 꽤 서슴지 않고 많이 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그래도 이 정도 살고 있는 제 자신을 바라보면서 교만과 착각 속에 빠지지 말자는 다짐을 기도 중에 많이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제 글(새벽 묵상 글)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겠다고 말했으며, 영명축일 행사 같은 것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요. 그리고 저의 주보성인이신 마태오 성인을 더욱 더 본받는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태오 성인은 오늘 복음에도 나오지만 세리 출신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에게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었던 로마에 낼 세금을 걷는 사람이 세리였지요. 그래서 돈은 많았지만, ‘매국노, 죄인’이라는 소리를 늘 들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이에 곧바로 자신의 모든 부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사실 이렇게 예수님을 따랐다고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죄 지은 사람에게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것처럼, 마태오를 향한 사람들의 색안경은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유지시켜주는 기득권을 모두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이처럼 순종과 용기와 인내를 보여주는 성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성인을 주보성인으로 모시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했음을 다시금 반성해봅니다. 그리고 오늘 축일을 맞이하면서 마태오 성인을 닮겠다는 결심을 감히 여러분 앞에서 합니다.
마침내 집안의 큰어른인 양관선사에게 최후 결정의 한마디를 재촉하는데 선사는 대꾸는 않고, 이제 그만 절로 돌아가야겠다며 마루 끝으로 가 걸터앉는다. 이때 예의 망나니가 파양 운운에 침묵으로 일관한 선사가 고마웠던지 그의 발에 짚신을 신겨준다. 툭! 짚신 끈을 묶는 망나니 손등으로 뜨거운 물 한 방울이 떨어진다. 망나니가 고개를 드니 흠뻑 젖은 노인의 눈이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다. 물 한 방울! 그것이 온 문중이 손 뗀 망나니를 바른길로 돌려세웠다.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을 때 말없이 땅에 글자를 쓰시던 모습이 그려진다. ‘나를 따라라.’는 한마디에 따라나선 세리와 죄인들을 당신의 식탁으로 불렀다가 바리사이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만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과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시며 의연하던 분, 예수님은 자비 때문에 2천 년 동안 매달릴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때때로 매달린 모습에 울화가 치민다. 왜 자비인가? 꼭 저래야만 했나. 어물쩍 묻고 있다. 설마 나는 자신을 의사가 필요 없는 ‘튼튼한 이’로 착각하고 느긋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오싹해진다. 내가 갈팡질팡할 때 그분의 단호한 한마디 ‘나를 따라라.’를 나는 얼마나 많이 놓쳤을까? 다시 오싹해진다.
그렇다면 다들 어떤 옥수수를 골랐을까요? 소년, 소녀들의 바구니는 비어있거나 맨 마지막에 급하게 딴 초라한 옥수수 하나가 담겨 있기가 일쑤였다고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 소년과 소녀의 위치에 섰다면 정말로 크고 멋진 옥수수를 고를 수 있겠습니까? 아마 저 역시 이 소년과 소녀들처럼 빈 바구니를 가지고 오거나 아니면 초라한 옥수수 하나만 담고 왔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보다 더 크고 멋진 옥수수를 고르겠다는 욕심 때문인 것이지요.
아무튼 좋은 것을 다른 것과 끝까지 견주다가 결국 놓치고 마는 것. 충분히 좋은 것임에도 끊임없이 비교하려는 욕심 때문에 좋은 것을 놓치고 사는 우리들은 아니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들은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고서 “나를 따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마태오를 만나게 됩니다. 마태오 사도는 당시 세리로써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요. 또한 많은 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식사를 하는 등 사교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면을 보입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사는데 있어서 부족한 면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는 것이 능사가 아님을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아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욕심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마태오 사도를 바라보면서 지금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혹시 인간적인 욕심들을 버리지 못해서, 결국 무엇보다도 중요한 주님의 구원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앞서 빈 옥수수나 초라한 옥수수 하나만 담을 수밖에 없었던 성년식을 맞이하는 소년, 소녀처럼 말이지요.
어제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신부님은 도대체 못하시는 것이 뭐에요?”
그래서 저는 곧바로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럼……. 제가 잘 하는 것이 뭔데요?”
이에 그분께서는 “글 잘 쓰시죠. 음……. 자전거도 잘 타시죠. 음… 음… 음… 또……. 방 잘 어지럽히기?”라면서 더 이상 말씀을 잇지 못하시더군요.
그렇지요. 사실 저는 그렇게 많은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잘 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단지 주님을 따르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좋은 평가를 받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 똑같지 않나요? 사실 별 것 아닌 재능과 능력인 것이지요.
그런데도 인간적인 욕심만을 채우시겠습니까? 주님을 따르는 길이야 말로 성공의 비결입니다.
오늘 하루만큼이라도 인간적인 욕심을 갖지 맙시다.
부족함을 절감하고 자신을 가장 낮은 자세로 낮춘다는 의미로 바닥에 엎드려
있을 때였습니다. 엎드리고 있는 서품자들을 위해 모든 신자들이 다함께 무릎
꿇고 기도하는 순간, 이 부족한 이를 위해 모든 이가 기도하고, 나를 온전히
주님께 바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감동한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 번 엎드리는 낮아짐의 행위를 끝으로, 한평생 많은 이들 위에 군림하는
사제가 되지 말라던 선배 신부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다른 이들 위에 나를 세우는 것을 포기하고 다른 이들 사이에, 다른 이들 아래에
자신을 내놓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스스로가 서 있음을
포기할 때 주님을 따를 수 있음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절대 떠날 수 없다는 것을
포기할 때 비로소 주님을 따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깊은 뜻을 정확히
헤아릴 수 없으나 주님은 정작 떠나야 하는 곳에서 부르시고,
버려야 하는 그곳에서 시작하길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마태오가 부르심 받은 곳은 세관이었습니다. 절대 떠날 수 없었던 자신의
책상자리였습니다. 그런 그가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만약 주님이 지금 이 순간
나를 부르신다면 내가 박차고 일어설 삶의 자리는 어디이고,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점차 지나면서 그 이유를 조금씩 알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보통사람이 군대와 같은 조직사회의 독특한 생리와 구조를 이해하기 힘든 것처럼 북한사회야말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조직구조와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달리 외부 세계와 접촉이 없었다는 점과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서로 지원할 때 국가 간에 정책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실무자들이 서로 고맙다고 얘기할 만한 여지가 없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아는 것이 죄’이고, 그들은 ‘모르는 것’이 죄였던 셈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우리는 모두 죄인이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하고,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주님의 말씀이 더욱 은혜롭게 느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본래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다. 이 직업은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매국노와 같은 미움을 받는 직업이었다. 세리였기 때문에 미워하고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착취당하는 그런 처지였다. 이러한 세리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 마태오는 60-90년 사이에 마태오 복음서를 아람어로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하였다. 마태오는 동방으로 가서 순교하였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나 페르시아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 진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관에 앉아있는 마태오를 부르신다. 그러니까 마태오는 즉시 예수님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마태오는 자기 집에 예수님을 모셔서 음식을 대접하였다. 여기에 마태오는 지금까지 함께 일하며 사귀었던 친구들도 함께 초대하여 식사를 하였던 것 같다. 아마 그들을 부른 것은 주님을 따라 나서기 전에 그들과 인사를 하는 기회를 만들었을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고 또 그렇게 된 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비난하고 나선다. 제자로 삼는 것도 너무나 큰 죄인인 세리를 뽑고, 노는 것도 그런 부류하고만 논다는 것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한 마디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있건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모두가 당신의 자녀로서 살기를 바라시고 부르시고 계시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응답이 마태오처럼 즉시 일어나서 그분을 따르듯이 응답을 할 것인지 아닌지는 각자 인간의 의지적인 응답에 달렸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 자신이 부족하고 죄스런 인간임을 느끼는 것이지만, 그것을 물으시는 주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항상 주님의 가르침으로 되돌아가는 삶, 회개하는 삶이 있다면 그것으로 주님께서는 기뻐하시는 것이다. 마태오와 같이 세관에 있는 것이 지금까지 편안하고 안정된 것이었겠지만, 용감하게 그 자리를 떠나 전혀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려고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든지 이렇게 첫 발을 내딛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착각 때문에 우리
는 이를 실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이러한 생각을 버리고 과감히 일어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시 한번 잘 알 수 있고, 또 변화되어 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님의 뜻 안에 머무르려 노력할 때,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마태오 사도와 같이 매 순간 용감한 결단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며 이 미사를 봉헌하자.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이면서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 마태오 사도 축일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전혀 다른 흐름으로 변화시킨 책을 찾으라고 한다면 단연 ??성경?‘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신약성경의 첫 번째 권이 마태오 복음서입니다.
예비신자 교리를 가르치면 재미있는 일이 많습니다. 성경을 읽으라고 매번 이야기를 하고 확인도 하는데 열심히 따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지는 사람이 있고 아예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자기 방식대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서 중에 한 권만 읽고 그 다음으로 건너뛰는 사람이 있습니다. 내용이 비슷비슷해서 하나만 읽었다는 겁니다. 예비신자인 그의 눈에는 비슷하게 보일 수도 있지요. 그러나 각 복음서의 내용은 엄연히 다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이라는 저자가 각각 성경을 쓸 때는 연대도 다르고 염두에 둔 독자들도 다 달랐습니다. 읽을 대상이 달랐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대목입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지금 제주도를 설명한다고 할 때 이곳에 제주도가 고향인 사람들도 있고 또 제주도라는 곳을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도 있으며 수시로 다니는 사람도 있을 수가 있습니다. 제주도가 고향인 사람들에게 제주도를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교통편이나 날씨, 도로 등을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지요. 최근에 변화된 모습과 지금 내가 설명하고자 하는 주제만 이야기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제주도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할 때는 상황이 달라지지요.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설명이 들어가야 합니다. 비행기를 타면 얼마나 소요되고 기후는 어떠하며 도로 사정은 어떻고 그 지역 방언은 어떻다 등 여러 상황들을 자세히 설명을 하고 내가 의도한 바를 이야기해야 이해가 빨리 될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지금 저는 제주도를 아는 사람이나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또 가 본 사람이나 안 가본사람에게나 똑같이 제주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다를 뿐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요한은 그 방법이 달랐을 뿐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에는 일치합니다. 설명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지요. 예수님과 같이 이스라엘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굳이 이스라엘의 기후나 풍습, 또 구약에 관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구약성경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설명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었지요.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인 그들이 구약의 내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터키나 그리스 지방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잘 모르고 하느님도 잘 몰랐으며 이스라엘이 어떤 곳인지도 몰랐습니다. 당연히 설명이 필요했지요. 하느님은 어떤 분이고 이스라엘에는 어떤 관습이 있는지 그리고 율법은 무엇이며 구약성경의 내용은 어떤 것이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 해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설명하는 방법이 달랐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라는 이 메시지만은 같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은 마태오는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는 유다교에서 개종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위하여 글을 썼습니다. 그래서 마태오 복음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설명하고 있지요. 마태오 복음 첫머리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가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구약시대 전체를 통해 예언되고 있는 이분이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지요.
루카 복음에도 똑같이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지 않고 아담과 하와로부터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서도 루카 복음서가 유다인을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님을 알 수가 있지요. 유다교 신자가 아닌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으므로 아브라함이 아닌 아담과 하와에서부터 시작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루카 복음 경우는 병들고 소외 받은 사람들을 받아들이시는 예수님을 중점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태오 복음이 다르고 마르코 복음이 다르며 루카 복음과 요한 복음이 다릅니다. 이들 네 복음서는 내용이 비슷한 것 같아도 독자에 따라 그 방법론이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은 한 목소리로 똑같았지요. 각기 가는 길을 달랐지만 도착지는 같았던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예수님과 동족인 유다인들에게 좀더 하느님을 잘 설명하기 위해서 구약과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설명하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쓴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없는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세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혼자 방에 틀어박혀서 글만 써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 마태오의 글은 이 세상에 참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고 사람들은 세리인 그와 함께 있는 것조차도 싫어했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이렇게 말할 정도였지요.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만나는 것 자체로도 부정을 탄다고 사람들이 생각했던 이 세리 마태오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지요. 마태오가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지탄을 받고 손가락질을 받은 이유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은 순간 마태오가 이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렸다는 사실입니다. 목숨을 빼앗겨도 돈만은 내놓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움켜쥐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운 삶으로 옮겨갔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반드시 결단을 요구합니다. 나의 과거를 그대로 짊어지고 전진할 수는 없지요. 이렇게 모든 것을 놔버리고 예수님을 전하는 일에 헌신한 사람이 바로 마태오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는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하느님을 증언해야 합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 주셨습니다.?“(에페4,11)
오늘 독서의 말씀입니다. 이렇게 각 사람에게 주신 은총을 나와 가정과 하느님을 위해서 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만을 위해서만 쓴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시인으로서의 영감과 소설가로서의 재능을 주셨다면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화가로서 예술적인 재능이 있다면 성화나 조각을 통해서 더 크게 하느님의 섭리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가수들은 대중적인 인기만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성가를 만들고 노래를 부르며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하고, 운동 선수들은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해 승리자로서의 결실을 이루며 하느님께 감사 드리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하느님의 현존을 많은 사람들에게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한 모임 자리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어느 한 분이 개신교 신자가 운영하는 기업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주말이 되면 회장이 직원들에 묻는다고 합니다.
?’혹시 신앙이 있습니까??“
없다고 하거나, 있었는데 냉담 중이라고 하면 회장은 주일에 어김없이 운전 기사와 차를 그 직원에게 보내 자기 교회에 나오게 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재능을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서만 쓰고 만다면 얼마나 아쉬운 일이 되겠습니까?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헌할 때 그 재능은 더 큰 축복으로 꽃 피우게 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가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는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돈이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같은 민족들에게 버림을 받아도 버리지 않고 움켜쥐고 있었는데 하느님을 알게 된 후에는 그것을 놓고 하느님을 따랐고 자기의 고유한 특징인 글 쓰는 재능으로 하느님을 세상에 증언하였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복음을 전해줄 것입니다.
오늘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제일 중요한 것은 건강이나 자녀교육, 돈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자이신 주님을 알고 믿고 체험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을 올바르게 봉헌하는 것이고, 더 큰 축복으로 나와 세상을 화려하게 꽃 피울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성 마태오(하느님의 선물이란 뜻)는 가파르나움에서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세리였으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가 되었다. 그는 갈릴래아 태생이며 레위 지파 사람으로서, 60-90년 사이에 기술된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로 알려져 있다.
전승에 따르면 마태오는 유대아를 순회하며 전교하다가 동방으로 갔으며, 로마 순교록에는 그가 에티오피아에서 순교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페르시아에서 순교했다는 전승도 있다. 그는 은행원과 장부 기장자의 수호성인이다.
당시 세리는 로마에서 부과한 일정액을 유다백성에게 할당하여 세금을 걷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세리들이 로마에 납부해야 할 금액 이상으로 많은 세금을 걷어 착복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회에서 세리들은 죄인의 대명사로 불리었다. 적국인 로마에 빌붙어서 그들을 위하여 세금을 걷는 앞잡이 노릇을 하는 것도 죄일 터인데, 하물며 많은 세금을 걷어 착복함으로써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고 있었으니 흡혈귀 같은 악한 죄인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세리와 상종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세리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 그것도 사람들이 없는 가운데에서 조용히 부르신 것이 아니라, 만인들 앞에서 세관에 앉아서 세금을 걷고 있는 마태오를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부르신 것이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마태오의 집에 가셔서 다른 세리들 및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드셨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했다.
스승이요 예언자로 존경받던 예수님, 율법을 가르치며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매국노이며 사람을 등쳐먹고 사는 세리와 어떻게 함께 어울릴 수 있을까? 세리와 어울리는 예수님이 겉으로는 의인인체 하는 랍비지만 속으로는 부정한 사람으로 이중인격자가 아닌가?
그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것이오?” 하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그들은 예수님이시기에 참고 참으며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라면 굳이 그렇게 질문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저 무시하고 지나치고, 상종하지 않으면 그만일 따름이다. 예수님을 그만큼 존경하기 때문에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당시 흔히 사용되던 속담을 들어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하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배워라.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하고 말씀하셨다.
병든 자만이 의원의 도움이 필요하므로 의원은 병자들 곁에 있어야 한다. 이처럼 영혼의 의원이신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구하려고 오셨으며,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이 당신의 임무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지 않다.
예수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안타깝게 여기고 절망에 빠져 있는 자들에게 필요한 분으로서 그들과는 언제나 함께 계신다. 그러나 자신을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함께 계실 수가 없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당신을 반가이 맞이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가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들에게 가셨던 것이다.
“올바른 사람은 없다. 단 한 사람도 없다.”(로마 3,10) 다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 그래서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사람과 자신이 죄인임을 알지 못하고 의롭다고 여기면서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지 않는 사람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마태오는 비록 세관에서 세금을 걷는 로마의 앞잡이였지만, 자신의 죄를 알고 뉘우치며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느님을 간절히 열망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자마자 세관을 박차고 일어섰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자신의 죄를 보고 인정하며, 주님의 자비와 은총을 간구하는 신앙인이 되자. 주님께서 상종하지 않으시는 의인이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 어울려 음식을 나누는 죄인이 되자.........◆
- 권경렬 신부-
+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갈릴레아 호수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뒷날 마태오 복음서를 썼고, 전승에 따르면 동방에서 신앙을 전파하였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사가와 예수님의 첫 만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멸시와 비난을 받던 인생이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 인생으로 변하였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요즘 나오는 티브이 광고에 이런 게 있습니다. ‘알고 있는 사람의 전화번호는 많다. 그런데 정작 전화를 걸 사람은 없다. 삶을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오늘 성서는 세리였던 마태오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다시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돈은 많이 벌지만 멸시와 비난을 받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마도 틀림없이 면전에서는 굽신거리며 비위를 맞췄을 것입니다. 마태오 앞에서는 세금을 낮춰달라고 굽신거리며 아양을 떨고, 뒤돌아서서는 멸시와 비난을 했을 것입니다. 세리였기 때문에 멸시와 비난은 받았지만, 세리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대접도 받았을 것입니다.
마태오 자신도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자기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알고 지내는 사람은 많은데 정작 마음을 털어놓고 지낼 사람은 없었을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버는 소위 잘 나가는 직업과 좋은 집, 갖가지 호화로운 가재도구들을 갖추고, 먹고 입고, 하고 싶은 것 다하고 살고 있는데, 마음은 행복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건듯 부는 바람에도 가슴 저 밑바닥까지 쓸쓸해지고, 외톨이로 살고 있는 자기 삶에 대한 회의가 물밀 듯 찾아오곤 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대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 삶이 얼마나 허탈한 지...삶에서 진정한 것들은 돈으로는 살 수 없음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마태오 그는, 축 늘어진 어깨, 촛점 없는 눈동자, 어둡고 우울한 얼굴로 세관에 앉아서 소문으로 듣던 예수라는 젊은이를 열광하며 폭풍처럼 몰려오는 군중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그런 그를 보시고 부르십니다. 그는 서슴없이 따라 나섭니다. 그리고 예수와 동행하며, 삶에서 진정으로 찾아야 할 것을 보고 듣고 느낍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세상 그 너머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는 때때로 찾아들어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그 절망감이 행복감으로 바뀌는 걸 체험합니다. 어둡고 무거웠던 마음이 밝아지고 가벼워지는 걸 체험합니다. 자유로움, 해방감, 행복이란 자신의 움켜 쥔 손을 펴는 것이라는 걸 체험합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것을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가진 것을 다 내어 놓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 줄 알게 된 사람이 가는 길로 걸어갑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자신의 가진 것을 내어놓습니다. 자기에게 억울함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뉘우치며 배로 갚습니다. 삶을 깨우치며, 자신의 가진 것을 다 내어놓음으로써 그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마태오는 예수의 행적을 기록하고, 진정한 해방이 무엇인지 자유가 무엇인지 행복이 무엇인지, 자신이 보고 듣고 깨친 것을 사람들에게 전합니다.
우리들이 변화되는 때는, 이미 오래 전부터 들려오던 내면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대답하는 때일 것입니다. 이런 저런 일들을 통해 오래 전부터 우리를 부르시며 말을 걸어오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예‘ 대답을 하는 순간이 우리에게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비로소 열리는 순간일 것입니다. 앞으로만 달려가던 우리가 머리를 들어 비로소 하늘을 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참삶이란 무엇일까 고뇌하는 그 순간이 새 삶이 열리는 시작일 것입니다.
"주님의 목소리가 들려오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드물게 찾아오는 어떤 획기적인 일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늘 만나는 자잘한 일상들에 얼마나 예민하게 깨어있는가? 나와 내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나의 마음을 얼마나 열어놓는가? 그것이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열쇠이며, 결단을 내려 하느님의 것을 선택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마태오의 삶처럼 변화될 것입니다...........◆
혼자하는 식사만큼 밋밋하고 재미없는 것은 없습니다. 그저 끼니를 채우는 것이지 사랑을 먹고 생명을 나누는 잔치의 즐거움은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당신의 식탁에 초대하셨다는 것은 그들을 친구로 대접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시혜(施惠)의 대상이거나 그저 마지못해 만나야 하는 타인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성향의 사람, 나에게 호의를 가진 사람과의 만남은 쉽지만, 남에게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 나를 불편하게 하는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출신이었던 마태오를 당신 제자로 삼으셨다는 것은 그 누구도 예외없이 당신의 제자로 받아들이심을 의미합니다. 그 누구에게나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앉을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바로 나도 그 자리의 일부입니다.
내 스스로 모든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에라도 그들을 받아들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모든 인간을 친구로서 받아들이는 일, 이 일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중점을 두고 노력해야 할 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죄인이라 부르는 사람과 함께 밥을 먹고, 제자로 삼으셨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하게 여겨 단지 밥 한끼를 함께 먹은 것이 아니다. 그들을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 자신과 똑같은 ‘인간’으로 인정하시며, 그들에게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세리’들은 그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감옥에 있는 동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결심을 매일 새로이 하며, 마침내 법이 정한 형벌을 마치고 다시 사회에 돌아오는 그 수많은 ‘세리’들…. 그러나 많은 세리들이 새롭게 살아가기 위한 일터는 물론, 고단한 몸을 편히 쉴 작은 공간조차 없다. 그렇게 견디다 견디다 다시 죄를 짓고 감옥으로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더 많이 가졌기 때문에, 내가 더 많이 누리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시작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인권운동은 모든 사람은 똑같이 소중한 존재이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수없이 고백한다. 예수님이 부자나 지식인이나 죄인들이나 다 똑같이 여기셨던 것처럼 ‘세리’들을 식탁으로 초대해 함께 밥 한끼 먹을 수 있는 마음이 예수님을 따르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겠다.
그중에 마태오 사도는 세리였습니다. 오늘날에는 직업에 귀천이 없다고 하지만, 당시에 세리는 이방인의 앞잡이, 민족의 배신자인 죄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오는 직업에서 오는 죄의식과 더불어 소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태오는 다정한 사랑의 눈빛이 자신에게 머무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도 싫었지만, 자신도 누군가의 눈을 바라보고픈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사랑의 눈빛에 끌려 마주칠 수밖에 없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자신을 나약한 한 사람으로 바라보아주는 예수님의 눈빛에, 자신이 불리고 받아들여짐을 느낍니다.
지금껏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사람 대접을 못 받던 처지와는 다른 상황을 맞이한 것입니다. 마태오에게 머문 예수님의 사랑의 눈빛은 그를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우리 삶 안에 비추어진 예수님 사랑의 눈빛을 찾아 떠나보면 어떨까요?
-강영구신부
결실의 계절입니다.
달고 향기로운 사과와 배, 향긋한 포도가 가을의 풍요로움을 더해줍니다.
이른 봄부터 한 여름 내내 농부들의 부지런한 손길과 따가운 햇볕을 받았던 사과나무는
달고 향기로운 사과를 열매 맺습니다.
무엇이든지 사랑받는 것들은 열매를 맺게 마련이지요.
우리는 사과를 먹으면서 달고 향기로운 하느님의 사랑과 농부의 정성과 노력을 함께 먹습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마태오라는 세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천덕꾸러기였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가 나타나거나 가까이 다가가면 사람들은 멀찌감치 몸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나자렛의 목수 예수님은 그를 불러 제자로 삼았고 사랑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은 상처받은 그의 가슴을 어루만져 낫게 해주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으로부터 사랑 받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마태오로 하여금 ‘복음서’라는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 대한 마태오의 사랑 고백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마태오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이제는 우리가 ‘나의 복음서’를 써야할 차례입니다.
당신의 오늘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받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오늘은 성 마태오 복음사가 축일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신약성서에서 토마스와 함께 나란히 명단에 나오는 것 외에는 다른 정보가 없다. 다만 마태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 갈릴래아에서 헤로데 안티파스를 섬기는 자였으며 세관원으로 일했다. 그의 의무는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이었고, 어업이나 공산품에 대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세금을 부과하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부정한 면면이 드러나는 지탄의 대상이었다. 따라서 마태오의 직업인 세관원은 당시 어느 곳에서나 불신과 멸시를 받았다. 마태오 역시 부를 누리면서 살았지만 지탄을 받는 죄인의 대표적 표상이었고, 같은 민족에게 따가운 시선과 멸시를 받았다. 그래서 마태오는 자신의 그릇된 삶에 대해서 몹시 괴로워했던 것 같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나를 따라오라”고 부르시자 즉시 따라 나선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다는 것은 그릇된 삶과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뒤를 이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마태오는 세상의 부귀영화보다는 진리를 따라 사는 자유와 해방을 더 그리워했다. 마태오는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자유와 해방과 구원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진리를 위해 과감하게 세상을 포기할 줄 아는 큰 사람이었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만나자 밝은 빛을 보게 되었고, 찌들고 어둔 삶에 생명수를 얻게 되었다.
우리 역시 물질의 풍요로움 속에서 부당하게 재산을 모으고 그릇된 삶을 사는지 모른다. 그리고 자만심과 이기심으로 자신의 삶을 정당화하면서 불완전한 생각과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태오는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모든 그릇된 삶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찾는 결단을 내린다. 그리고 자유와 해방의 큰 기쁨을 맛본다. 참으로 행복한 결단이며 모습이다. 이는 주님의 큰 은총이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은총과 축복이 주어지기를 기도하자.
교회는 오늘 사도이자 복음사가였던 마태오 성인의 축일을 기념한다. 마태오의 죄인에서 성인에로의 길은 어느 날 자기 동네 어귀에서 한창 세관업무를 보던 중에 예수님의 부름을 받는데서 시작되었다. 마태오는 갈릴래아 지방 가파르나움 출신으로 12사도들 가운데 자신이 집필한 것으로 전해오는 마태오복음서 때문에 누구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전직(前職)인 세리는 당시 유대사회에서 죄인과 다름없는 직업이었다. 그가 오늘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제자로 따라 나선 것이다. 세리 마태오의 소명사화와 예수께서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눈 이야기는 마르코와 루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다.(마르 2,13-17; 루가 5,27-32) 마르코와 루가는 여기서 마태오를 ‘레위’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 마르코는 그를 일컬어 ‘알패오의 아들’로 좀 더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12사도 명단에는 그냥 ‘마태오’로 적고 있다.(마르 3,18) 따라서 마태오복음의 원저자는 마르코복음의 두 부분을 참조하여 ‘레위’라는 이름을 자신을 지칭하는 마태오로 바꾸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승에 의하면 마태오는 동방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선교하다 42년경에 순교하였다고 한다.
“나를 따라 오라.”는 예수님의 한 말씀에 즉각 따라 나선 마태오다. 단 한 구절의 간략한 이 대목은 사실상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가파르나움 도읍의 나들목에 자리를 잡고 로마제국을 위해 각종 세금을 거둬들이는 세리 마태오는 이미 당대의 상업적 죄인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만약 내가 세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이 설마 나를 향한 말씀이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 본인 스스로가 죄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복음의 이 대목을 기록한 마태오복음사가 스스로가 자신을 죄인의 부류에 넣고 있다. 그러나 “나를 따라 오라.”는 우렁찬 낯선 이의 목소리에 도대체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을 것이다. 아무도 반응을 보이지 않자, 마태오는 자신을 가리키며 “혹시, 저 말입니까?”하고 반문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태오의 반신반의(半信半疑)가 믿음으로 기울었다. 이미 여러 제자들뿐 아니라 무리를 거느리고 다니시는 예수께서 분명히 자신을 지목한 것임을 알았던 것이다. 드디어 기회는 왔다. 언젠가는 그만 두어야겠다고 생각한 세리의 직업을 벗어 던지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그래서 마태오는 아무런 미련 없이 예수를 따라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마태오가 보인 예수추종의 두 번째 행동은 예수와 제자들, 그리고 다른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식사에 초대한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를 두고 트집을 잡은 일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의 불평과 트집을 통하여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되는 일에 ‘죄인’이라는 굴레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음을 가르쳐 주신다. 더욱이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절)는 말씀으로 예수 자신의 죄인을 위한 파견사명을 밝혀 주셨다. 뿐만 아니라 유대사회에서 약하고 소외되고 고통 받던 사람들에게 ‘율법의 굴레’를 씌워 죄인으로 취급하고, 자신들은 율법이 규정하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거룩하다고 자처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호세 6,6)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선포하셨다.
하느님께서 예수와 함께 예수 안에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신다. 하느님의 말씀과 행동의 핵심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사람들과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대한 자비와 용서이다. 이로써 예수님 시대에 죄인으로 분류되었던 세관원이 제자의 반열에 들게 된 것이다. 이 땅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신 이래로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되었다. 걸어 다니시고 말씀하시며 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자연과 마귀와 죄 위에 군림하는 최고의 권위로써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선물을 이 땅에 선사하시는 것이다. 남을 부정(不淨)하다고 하여 자신이 정(淨)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남을 죄인으로 규정한다고 자신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다. 세리 마태오와 같이 오직 스스로를 죄인으로 여기며 ‘나를 따르라’는 거룩한 부르심을 추종하여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스스로 실천할 때 하느님 앞에 거룩한 자로 변화되어 가는 것이다. “나 야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레위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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