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원정은 좁은 뜻에서는 1419년(세종 1) 6월에 이종무(李從茂)를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여 정벌한 일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이보다 앞서 있었던 고려 창왕(昌王) 때와 조선 태조(太祖) 때의 정벌까지도 포함한다.
대마도는 조선과 일본 양국 사이의 해협에 위치하여 중개역할을 하는 특수한 사정도 있거니와, 원래 토지가 협소하고 척박하여 식량을 외부에서 충당해서 생활하여야 하므로 고려 말부터 우리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공(朝貢)의 형식을 취하여 그 대가로 미곡(米穀)을 받아 갔으며, 조정에서도 그들을 회유하기 위하여 대마도를 우대하여 주었다. 그러나 대마도에 기근이 심할 때면 그들은 해적으로 돌변하여 해안을 약탈하므로 조정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이를 정벌하였다.
① 1389년(창왕1) 1월에 박위(朴葳)가 병선 100척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여 왜선 300척을 불사르고 노사태(盧舍殆)를 진멸하여 고려의 민간인 포로 남녀 100여 명을 찾아왔다.
② 1396년(태조5) 12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김사형(金士衡)이 오도병마처치사(五道兵馬處置使)가 되어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③ 1419년(세종1) 6월에 다시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1418년(태종 18) 대마도도주(島主) 소 사다시게[宗貞芽]가 죽고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가 뒤를 이었는데, 대마도에 흉년이 들어 식량이 부족하게 되자 왜구는 대거 명나라 해안으로 향하던 중, 비인현(庇仁縣:舒川) 도두음곶(都豆音串)과 해주(海州) 해안을 약탈하였다.
조선에서는 왜구의 창궐과 행패가 새 도주 소 사다모리의 선동에 의한 것이라 하여 이종무를 삼군도제찰사로, 우박(禹博)·이숙묘(李淑畝)·황의(黃義)를 중군절제사(中軍節制使), 유습(柳濕)을 좌군도(左軍都)절제사, 박초(朴礎)·박실(朴實)을 좌군절제사, 이지실(李之實)을 우군도절제사, 김을지(金乙知)·이순몽(李順夢)을 우군절제사, 도합 9절제사에게 삼남(三南)의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을 주고 마산포(馬山浦)를 출발하게 하여 대마도로 진격시켰다.
당시 일본에서는 규슈[九州]의 제후(諸侯)를 총동원하여 대마도를 방어하게 하였으므로 원정군은 대마도 전체를 토벌할 수 없었으나, 그들에게 큰 타격을 주고 그해 6월에 회군하였다. 이 해가 기해년이었으므로 이 정벌을 일명 기해동정(己革征)이라고도 한다.
그다음 대마도 정벌 2편은 내일 올릴게요.
첫댓글 우리나라에 몇 안되는 침략의 역사..
침략이란 정당한 이유가 없이 쳐들어감을 말하는데 대마도 원정은 미쳐날뛰는 왜구를 소탕하고자 한것임으로 침략이 아닌 방위전쟁이죠
침략이 아니라 해적 소탕이죠
그런 점도 있는건 맞는데, 죄 없는것도 아니고 해적소탕하러 간건데 방위전쟁이 더 알맞을듯
몇 안되진 않지요(...)
고구려만 봐도 교과서에 '약탈경제'란 표현을 쓸 정도니까요.
중국한테 싸대기도 날리고 아웅다웅거리다 고자킥도 맞고 그러니까요;;
고구려 초기인 모본왕과 태조왕 때, 중국 북방 지역까지 쳐들어 간 적도 있었습니다.
침략이라고까지 할수 있을려는지 모르지만....
조선시대 내내 북쪽의 여진족은 심심하면 털어댔다능 ㅠㅠ
허 대마도에서 끝난게 아니고 규슈 제후군이 동원되었었군요 이들을 지휘한건 오우치일족일까요?
조선에 첨저선이 있던가요? 영상에 왠 배들이 서양배 모습을..
원래 옛날에 조선배들이 저렇게 생긴걸로 암
그런데 실제 항복문서 바친건 약간이후의 일입니다.
실제로도 저렇게 배에서 함포사격을 퍼부었을까요? 멋지긴 하군요
용의 눈물인 줄 알았는데 무슨 드라마지요? 용의 눈물에서는 왜군 갑옷이 앞치마였던 기억이.. ㅡㅡ
대왕세종 같은데요.
대왕세종 그 깔끔한 사극에 왜 엉뚱한 불멸 OST를 가져다 붙인건지 몰겠넹;; 그냥 써도 괜찮았을텐데..
더 낳잖아요.
소드마스터영상..ㄷㄷ
세종때 태종의 명으로 출발한 대마도 정벌이 과연 정벌이라는 단어를 붙일정도일지는....-_-
규슈제후군이 동원되었다고 하는데 글쎄요;; 조선왕조실록이나 송희경의 일본행록에 小二殿(少弐쇼니씨)가 자기가 다무찔렀다고 막부에 '보고'한 사실이 기록이 되어있고, 일본측의 칸몬일기看聞日記에 처음에는 오오토모(大友)씨와 소우(宗)씨가 싸워서 물리쳤다고 했다가 나중에는 쇼니,키쿠치(菊池)씨까지 싸워 이겼다고 '보고'를 했다는 것이 기록이 되어있는데...... 이 사람들이 보고한 내용이 하도 뻥을 튀겨논내용이 많고(규모가 배가 8만척;;) 사태파악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내용이라(조선과 몽고군이 쳐들어왔다고 보고를 함....그래서 이게 몽고습래의 재래라는 인식까지;;)신빙성이 떨어집니다.
무엇보다 보고가 들어간 날짜가 7월, 8월인데, 이때는 이미 조선군은 대마도에서 철수한 상태였죠;; 어느쪽 사료를 믿을지는 자유입니다만은 저의 입장은 조선이 대마도에 쳐들어가서 규슈쪽에서 대응을하려고 하다가 조선이 먼저 철퇴를 하였고, 규슈 다이묘들이 보고를(자기들의 허위전공을 첨가해서)한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만......
뭐 어찌되었던 그 이후에 공문서 위조와 날조 및 국가간 대사기극의 외줄타기를 성공적(?)으로 수차례 감행한 대마도 소 가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