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0년 9월 29일 수요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교회는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년)를 통하여 천사들의 존재를 신앙 교리로 선언하였다. 하지만 천사들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유권적인 해석을 내리지 않았다. 다만,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이외의 다른 천사의 이름은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천사에 대한 축일도 ‘세 천사 축일’(9월 29일)과 ‘수호천사 기념일’(10월 2일)만 지내도록 하였다.
☆☆☆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Amen, amen, I say to you, and descending on the Son of Man.”
(요한 1,47-51)
you will see heaven opened
and the angels of God ascending
말씀의 초대
다니엘 예언자는 자신의 환시를 통하여 사람의 아들 같은 이에게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지는 것을 보았다. 또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고 예언한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자주 사용하신 ‘사람의 아들’이란 호칭이 처음으로 등장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고 하신다. 이어서 또 그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
나타나엘은 놀랍니다. 자신의 지난날을 아신다는 말씀에 놀랍니다. 스승님께서는 ‘더 놀라운’ 일을 볼 것이라 하십니다. 하늘이 열리고 주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모습입니다. 미구에 닥칠 종말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천사는 영원히 살아남을 존재입니다. ‘천사의 행동’ 역시도 영원히 기억될 행위입니다. ☆☆☆ 미카엘 대천사는 천사들의 지도자입니다. 성화에서는 흔히 칼을 들고 있는데, 이는 용과 싸우는 모습입니다(묵시 12,7-8 참조).
천사는 하느님의 심부름을 하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성경에서는 많은 천사들이 등장하지만, 교회에서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천사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존재뿐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초감각적인 존재, 곧 영적 존재들도 창조하셨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존재들이 주로 하느님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을 우리는 천사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참된 이스라엘 사람,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십니다. 나타나엘은 주님을 뵙고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거짓이 없는 사람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자기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나타나엘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사람에게 당신 나라의 모습을 보여 주시고 초대하십니다.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 ‘천사의 행동’입니다. 한순간 감동을 주었더라도 ‘순간의 천사’입니다. 지금도 감동을 주고 있다면 ‘영원한 천사’입니다. 한 번이라도 천사의 역할을 한 사람을 주님께서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진짜 천사들’이 그를 찾아올 것입니다.
‘장기려 선생님’은 `6·25 전쟁 직후,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평생을 불우한 이웃들에게 헌신하며 살았습니다. 이산가족이었던 그는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을 기억하며 독신으로 지냈고, 평생 ‘집 한 칸’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때까지 병원 옥상에 마련된 사택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춘원 ‘이광수’는 그를 두고 “성자 아니면 바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968년 국내 최초로 ‘의료 보험 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이들이 쉽게 병원을 찾도록 했습니다. ‘의료 보험 제도’의 전신인 셈입니다. 1995년 성탄절 새벽에 그는 하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비문에는 ‘주님을 섬기다 간 사람’이라는 짧은 글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 역시 천사였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알렸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알린 천사도 가브리엘이었습니다(루카 1,26 이하 참조).
라파엘 대천사는 토빗기의 여러 군데에서 의인 토빗을 도와주는 젊은이의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누군가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도움의 손길로 다가왔다면 어찌 천사로 기억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주위를 돌아보면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막연히 잊고 살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입니다.
남몰래 시작한 좋은 일이 돈 때문에 겉돌고 있을 때였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을 즈음에 전혀 생각지도 않은 분이 찾아와 좋은 일에 쓰라며 돈을 두고 갔습니다. 꼭 필요한 만큼의 금액이었습니다. 그분께 참으로 감사드리며, 살아 계시는 하느님, 살아 움직이는 천사를 분명하게 느끼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다른 천사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습니다.
천사는 결코 이론 속의 존재가 아닙니다. 늘 우리 곁에 있는 다정한 이웃입니다. 우리 역시 따뜻한 모습으로 이웃에게 다가간다면 누구나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천사> -양승국신부- 탄탄대로와 외진 산길, 향기로운 오솔길과 거친 들길,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쉼 없이 교차되는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게 되는 가장 큰 행운은 어떤 것일까요? 행운 중의 행운은 아마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일일 것입니다. 만나기만 하면 너무 좋아서 설레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게 만드는 그,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해도 세상의 시름을 잊게 만드는 그, 한없이 부드러운 눈길로 단번에 내 깊은 슬픔을 치유시키는 그, 언제나 느껴지는 따뜻한 환대와 자상한 배려에 천국을 느끼게 하는 그... 그래서 천국의 향기를 온몸에서 풍기는 그, 말이 아니라 삶으로, 온 몸으로 천국을 증거하는 그, 그는 어떤 면에서 이 시대 또 다른 천사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분의 대천사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얼마나 충실했던 하느님의 전령이었던지 그냥 천사도 아니고 대천사(大天使)입니다. 천사들은 항상 ‘골골하는’ 빈약한 우리 인간의 영적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유출되는 에너지이자 능력입니다. 나약한 우리 인간의 구원과 성장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영적도우미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놓여있는 영적 사다리와 같은 존재입니다. 이렇게 설명 드리는 저부터 정말 알쏭달쏭한 존재인 천사란 존재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어디 먼 다른 하늘에서 천사를 찾을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천사를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 사제들인 우리, 수도자들인 우리, 본당 단체장들, 다양한 단체의 봉사자, 지도자들, 오래 사셔서 많은 연륜을 쌓으신 어르신들이야말로 천사처럼 살아가야 될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 사람들, 뭐라고 말들을 합니까? “천주교 신자가 저래도 되? 믿는 사람들이 더해요!”가 아니라 이런 말들이 그들의 입에서 터져 나와야겠지요. “천사가 따로 없네!” “정말 날개 없는 천사네!” 어르신들, 저물어가는 인생이 못내 아쉽겠지만, 그럴수록 더욱 분발하셔서, 후손들이 “뜨는 해도 아름답지만 황혼의 아름다움에 비교할 바가 못 되는구나!”라는 감탄사를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봉헌생활자들, 살아가는 일이 결코 만만치 않겠지만, 때로 내 몸 한 몸 챙기기도 벅차겠지만, 그래도 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나’란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서 세상과 이웃과 시대의 아픔에 온 몸으로 투신하는 또 다른 천사로 거듭나면 좋겠습니다.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 이난호- 새벽 산책길에서 가끔 마주치던 노동자풍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치히, 치히, 하는 큰 숨소리가 마치 구호처럼 들려 우스웠지만 우직하리만큼 진지한 표정으로 달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느 날 그의 오른팔에 깁스를 해 ‘ㄴ’자로 꺾여 있었다. 그 팔을 목에다 붕대로 걸어 매고 예의 구호도 없이 슬금슬금 달리는 게 안쓰러웠다. 혹 끼니 걱정은 안 할까? 부양가족이 많지는 않을까? 절로 쾌유를 비는 화살기도가 나왔다. 얼마 후 깁스가 풀린 그를 보자 하마터면 ‘축하합니다.’ 소리칠 뻔했다.
당쇠 김 찬선 천사? -김찬선신부- 天使는 하늘의 사신이라고 풀어 이해해도 좋을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일꾼들 -전삼용신부- 저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아, 영혼과 육체가 깨어지는 첫 번째 모습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사탄을 거짓의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진실함은 하느님의 본질 중 하나입니다. 어렸을 때 처음으로 지우개를 훔쳤을 때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리고 깨끗한 영혼에 처음으로 상처가 간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반응을 일으키는 것은 양심의 가책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어렸을 때는 양심이 매우 예민하여 작은 잘못을 해도 예민하게 느꼈지만 나이가 들면서 이것이 점점 무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어린이의 깨끗함을 잃어 하느님과 점점 멀어짐을 뜻합니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사회에 살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기가 쉽지 않은 것을 느꼈습니다. 군대 제대하고 한 공장의 운전기사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습니다. 일을 다 마치고 저녁 약속이 본당 신부님과 있었는데 공장이 좀 늦게 끝나 제 시간에 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다 내려주고 교통신호도 무시하며 달렸습니다. 그랬더니 경찰이 저를 잡았습니다. 아르바이트라 얼마 받지도 않는데 당시 칠만 원을 벌금 무는 것이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운전병으로서 군대에서 배운 것을 써 먹기로 했습니다. 저를 딱지 떼면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공장 운전기사입니다. 지금까지 벌점이 많아서 이번에 딱지떼면 적어도 삼십일 면허정진데 그럼 저 회사에서 잘립니다. 갓 결혼해서 애들도 있는데 ...” 저는 손가락에 군대에서 함께 맞췄던 반지를 끼고 있었고 그 경찰은 그것을 그대로 믿고 다음부터는 조심하라고 하며 저를 보내주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거짓말보다 이 십분 동안 한 거짓말이 더 많았던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것은 그렇게 거짓말을 하면서도 하나도 떨리지 않았고 그것이 잘 먹혀들어가니 묘한 쾌감도 느껴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타나엘을 보시며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을 의미하며 결국 하느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거짓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인간관계에 있어서 거짓말은 독과 같기 때문입니다. 거짓말하면 믿지 못하게 되고 믿지 못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 사랑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서로 믿는 관계가 되어야하는데 결국 거짓말하는 사람은 그 관계를 스스로 저버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백성인 나타나엘에게 당신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즉시 예수님께서 야곱의 사다리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이 도망치는 도중 베델에서 꿈을 꾸었는데 바로 그 곳에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가 놓여있고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베델은 ‘하느님의 집’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하느님 집으로 통하는 문이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다리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쨌든 ‘진실, 솔직함’에 대해 말씀하시다가 하늘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는 이유는 천사들의 깨끗함을 지닌 이라야 그리스도라는 사다리 위에서 하늘과 땅을 오가며 하느님나라를 세상에 전파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하느님은 ‘하늘’에 사십니다. 땅에서 살지만 마음이 하늘처럼 깨끗한 사람은 이미 하늘나라에 도달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에 도달한 이라야 하늘과 땅을 오가며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재의 역할을 하는 사제직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대천사들은 하느님의 종으로서 하늘과 땅을 오르락내리락 하며 하느님의 일을 도와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란 이 세상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란 곧 하늘나라의 맛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도 천사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의 일꾼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우선 죄인은 그리스도인 야곱의 사다리를 탈 수 없게 됩니다. 야곱의 사다리인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사람만이 그 사다리로 오르락내리락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늘과 땅을 이어주신 유일한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거짓과 양립할 수 없는 분이고 또 그 분을 따르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거짓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라야 하느님의 충실한 종이 되어 이 세상에 천사들의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종들이 되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을 천사들처럼 깨끗하게 만들기를 결심하며 특별히 구체적으로 거짓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새벽을 열며
신학생 때의 일 중에서 기억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대학원 1학년 때의 일로 아마 총장배 체육대회 중에 있었던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체육대회는 신학교의 큰 행사 중 하나로 각 학년은 자기 학년의 명예를 걸고서 정말 열심히 경기에 임합니다. 당시 저희 학년은 전 종목에 걸쳐서 우수한 성적을 얻었고, 특히 포기했었던 농구가 결승에 오르는 아주 이례적인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천사 축일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그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빠다킹신부
이 시대 천사 -양승국신부- 인간은 자신도 모르게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그리도 자주 불평불만을 털어놓게 될까요? 기대치가 너무 높아서 그렇습니다. 남을 너무 의식하다보니 그렇습니다. 남보다 못한 내 모습이 불만족스럽고, 기대보다 못한 현실이 괴롭다보니 불평불만이 늘어가는 것입니다. 불평불만이 내부를 향해 방향을 바꿔, 스스로를 개선시키는 에너지로 승화되면 가장 좋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불평불만은 밖으로 튀어나와 세상과 남을 향합니다. 내 삶에 대한 불만족이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문제가 아니라 상대나 세상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내 자존심을 지키려는 미성숙한 자기방어수단이 불평불만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불평불만 없이 살 수 없습니다. 적당한 불평불만은 정신건강을 위해 필요합니다. 문제는 그 정도입니다. 어느 정도여야 하는데, 입만 열었다 하면 불평불만이 수돗물처럼 ‘콸콸’ 쏟아져 나오는 분들이 계십니다.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분들과 함께 있으면 에너지 소모가 상당합니다. 스트레스도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닙니다. 계속되는 불평불만에 아무런 응대 없이 가만히 있기도 힘들지 않습니까? 본의 아니게 위로 차 함께 불평불만에 동조합니다. 덩달아 ‘불평꾼’으로 변해갑니다. 반면에 만났다하면 기쁨을 주는 분들이 계십니다. 기쁨의 도구는 바로 칭찬이며 격려입니다. 활짝 핀 미소입니다. 균형 잡힌 유머감각입니다. 요즘 웃음치료가 유행입니다. 자꾸만 웃음을 잃어가는 이 시대, 참으로 바람직한 시도입니다. 웃음을 준다는 것은 건강을 준다는 것입니다. 웃게 한다는 것은 생명을 선사한다는 것입니다. 미소를 짓게 한다는 것은 구원을 주는 것입니다. 이웃들의 얼굴에 미소를 감돌게 하는 사람들, 이웃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은 사람들, 이웃들의 등을 기분 좋게 두드려주는 사람들, 그들은 어쩌면 이 시대 천사들입니다. 발길 닿는 그 어디든 하느님의 향기를 풍기는 사람, 그 사람 생각만 해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그런 이웃관계를 조성하는 사람, 맑고, 풍요롭고, 충만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사람, 그들은 어쩌면 이 시대 천사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분의 대천사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천사란 어떤 존재입니까?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위치한 영적 존재입니다. 천사는 말마디 그대로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하느님의 사자(使者)입니다. 이 존재의 역할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일입니다. 한 정당의 대변인이 자신의 말만 늘어놓는 것 보셨습니까? 대변인은 오직 당 대표의 말을 전하기만 합니다. 당을 대신해서, 당의 입장에서, 당의 뜻에 맞게, 당을 위해서 말을 전하는 것입니다. 천사는 어떤 면에서 하느님의 대변인입니다. 하느님의 오른팔, 하느님의 분신이 천사입니다. 오늘날 이 천사의 역할은 누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늘을 아무리 올려다봐도 날개달린 천사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천사의 역할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천사의 역할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바로 내가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천사
-김인한 신부- 천사를 소재로 다룬 ‘베를린 천사의 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곁에서 천사가
참된 위로 -변진흥- 선천적으로 싸움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싸우려면 가슴부터 뛰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말도 잘 안 나오고 겁부터 나는 것입니다. 천성이 착한 것인지 아니면 겁쟁이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모르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천사들을 본받아 사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김병환 신부- 나타나엘은 필립보와 친분이 있는 사람이었고, 필립보의 안내로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이다. 필립보가 먼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나서 나타나엘에게 가 그를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을 보시고 극찬을 하셨다.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을 당시에 보기 드문 거짓이 없는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셨다. 그리고 나타나엘 역시 필립보가 찾아오기 전에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던 사실을 알아맞추시자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다. 그리고 즉시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시라고 고백한다.
하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조욱현 신부-
천사들과 함께 주님께 영광을
- 김주현 신부- 오늘은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입니다. 교회는 천사의 존재를 제 4차 라테라노 공의회와 제 1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신앙교리로 선언하였지만, 천사들에 대한 여러 학설에 대하여 어떠한 유권적인 결정을 내린 일이 없습니다. 다만 교회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천사의 이름 외의 다른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습니다.
성서에 의하면 천사(天使)들은 하느님의 심부름꾼들이다.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천사들은 모두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로서 결국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꾼들이다.(히브 1,14) 천사들은 ‘거룩한 자들’, 또는 ‘하느님의 아들들’로 불리기도 한다. 그 중에는 ‘천사들의 무리’를 가리키는 ‘케루빔’과 ‘세라핌’이 특별히 부각되는데, 이는 구약성서에서 ‘거룹’(Kerub, Kerubim; 창세 3,24; 출애 25,18-19 등 71번)과 ‘스랍’(Seraf, Serafim; 이사 6,2; 6,6)으로 불린다. 천사들 앞에서 당신께 노래하오리다 -이기양 신부-
하느님의 천사 -최혜영 수녀- 일본의 저명한 철학자 이나가키 료스케 교수의 <천사론>(김산춘 역, 성바오로,1999)을 읽어 보면, 천사는 신화나 동화, 혹은 문학이나 예술의 영역에 속한다는 기존의 관념과는 달리 토마스 데 아퀴노의 천사론을 바탕으로 학문적으로 천사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인간 이해를 위해 원숭이 연구가 버젓이 학문의 세계에 시민권을 취득했는데 천사에 대한 연구가 왜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느냐는 것이 저자의 반박입니다. 저로서도 별로 생각한 바는 없었지만, ‘신체 없는 정신’ 곧 인간 지성보다는 상위의 지성적 존재로서 순수한 정신적 존재인 천사에 대한 연구가 원숭이에 대한 연구보다 중요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는 것 같습니다. 성경에서는 천사의 존재가 종종 등장을 하는데, ‘천사’(그리스어로 ‘앙겔로스)라는 말은 ‘사자(使者)’ ‘고지자(告知者)’로 번역될 수 있으며, 하느님 말씀이나 뜻을 전하는 자, 곧 하느님께 봉사하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인간에게 전하며 하느님의 명령을 실행에 옮기는 천상적 존재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천사들은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계획과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누가 그리스도인일까? -김덕진- 한국의 대표적 인권운동가로 꼽히는 P씨는 많은 인권활동가들의 스승이자 가장 절친한 친구이다. 그가 가진 사회 전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가끔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하고, 엄청난 독서량을 바탕으로 한 그의 글들은 쉽고 이해하기 빠르고 명확하다. 구금시설·군·경찰·검찰 등 공권력의 인권침해, 과거사·의문사 진상규명, 집회·시위의 자유, 국가보안법 폐지, 반전과 평화, 장애인 인권, 사회복지시설 생활인의 인권문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문제, 이주 노동자 인권까지 그가 함께하지 않았던 한국 사회의 인권 이슈는 아마 없을 것이다.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 - 지병철 신부 - 오늘은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 오는데 요한 복음을 보면 이런 비슷한 경우는 또 있습니다. 만약 내가 예수님이었다면 오늘 복음에 나온 필립보나 안드레아의 입장이었다면 한번쯤 첫 번째가 아닌 것은 또 있습니다. 만고 제 생각이지만 억지스럽게 이야기한다면 대신 이 두 번째의 영성도 한번 묵상하면 좋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언제나 첫째가 되려 하는 이 세상에서
<하늘이 열리고, 보게 될 것이다.> -윤경재 -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요한 1, 50.51.)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밝혀주는 세 대목이 있습니다. 모두 ‘보다(horao)’라는 동사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밝힙니다. 첫 번째 1,18절에서 복음서 저자의 입을 빌어 말합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두 번째 1,34절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어 말합니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 그리고 1,50.51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보게 될 것이다."라 말하시고 직접 당신의 정체를 밝히십니다. 요한복음서에서 쓰인 ‘보다(horao)’ 동사의 의미는 ‘본질을 꿰뚫어 통찰하다’라는 깊은 뜻으로 사용됐습니다. 그저 외면적으로 슬쩍 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보았어도 그 실체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지요. 하느님께서는 우주 만물에 창조주를 깨달을 수 있는 흔적을 남겨두셨습니다. 사실은 조그만 흔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부가 하느님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는 그것을 알았기에 새와 여우와 의자와도 대화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19-2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피조물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피조물이 지금까지 다 함께 탄식하며 진통을 겪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이 모든 실상을 꿰뚫어 통찰할 수 있는 눈을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신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안에 감추어져 있던 내용들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계시(apokalypsis)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28,11-19절에 보면 “야곱이 그곳의 돌 하나를 가져다 머리에 베고 그곳에 누워 자다가, 꿈을 꾸었다. 그가 보니 땅에 층계가 세워져 있고 그 꼭대기는 하늘에 닿아 있는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그 층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 머리에 베었던 돌을 가져다 기념 기둥으로 세우고 그 꼭대기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고는 그곳의 이름을 베텔이라 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제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인간이 꿈꾸어 왔던 하느님을 뵙는 것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베델이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 바로 하늘의 문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몸이 하느님의 집이며 그 안에 천사들이 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몸을 사다리 삼아 위로(ana), 아래로(kata) 오르내릴 것입니다. 그 천사들은 아래서 위로 올라갈 때 인간의 요구와 이기주의를 하느님 앞에 가져갈 것이며, 또 천사들은 위의 질서를 아래로 가지고 내려와 세상에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를 보여 줄 것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과 달을 보며 우리는 많은 꿈을 꿉니다. 어둔 밤에 나가보면 제일 밝게 맞아 주는 것이 달입니다. 그 달을 보며 우리는 많은 사연을 이야기 하고 눈물짓기도 합니다.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기도 했고, 절망에 빠져 괴로울 때 한결같이 나를 따라오며 웃음 짓는 달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 달은 그저 달이 아닙니다. 나의 친구이며 위로자이며 스승이었습니다. 달이 변한 것이 아닙니다. 천사의 모습을 달에서 발견한 것입니다. 이제 그는 달과도 스스럼없이 대화할 수 있습니다. 이제 피조물 모두와 대화하게 됩니다. 피조물이 탄식하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는 나가야 될 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를. 하느님은 물고기가 헤엄칠 수 있는 바다를 만드시고 나서 지느러미가 달려있는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먼저 새가 날아다닐 수 있는 대기를 만드시고 나서 새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을 충족시킬 하늘나라를 만드신 후에 영원한 생명에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을 만드신 것입니다. 인간만이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해서 하느님의 아드님마저 보내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천사들(messengers)은 우리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부지런히 움직이며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우리 곁에서 지켜주고 있습니다. 성령에 눈 뜬 자들은 이 모든 것이 보일 것입니다.
<날개 없는 천사> -양승국신부- 한 젊은 부부의 애틋한 사연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보았을 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숱한 난관이 버티고 있었던 사랑이었지만 사랑의 힘은 더욱 강했습니다. 마침내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지요. 너무나 각별한 사랑이었던지 운명의 여신은 그들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신혼의 달콤함은 너무도 짧았습니다. 끔찍한 교통사고의 와중에 목숨만 겨우 건진 남편은 기약도 없는 투병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고가 워낙 큰 것이어서 남편은 회복의 희망도 거의 없이 침상에 누워 지내게 되었지요. 만만치 않은 치료비 마련을 위해 아내는 닥치는 대로 일을 찾아야 했고, 만만치 않은 병수발에 신경을 잔뜩 써야만 했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회복되리라는 희망도 없는 상황에서 세월은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청춘의 아내는 점점 시들어갔습니다. 보기가 너무 안타까웠던 주변 사람들은 말도 많았습니다. "젊은 사람이 한 평생 병자 뒤치다꺼리하며 보낼거냐? 7년 동안 했으면 충분하다. 이젠 시댁 쪽에 맡기고 새출발하는 것이 좋지 않겠냐?" 그럴 때 마다 젊은 아내의 대답은 한결같았습니다. "어떻게 얻은 사랑인데, 제가 여기서 포기하겠습니까? 만일 제가 침대에 누워있다면 그이도 마찬가지로 절대 저를 포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한번 선택한 이 소중한 사랑을 끝까지 지켜나가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세분의 대천사 축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어떤 존재를 지칭합니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하느님의 사자(使者), 즉 심부름꾼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보내시는 도우미,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을 영원히 찬미하는 영적인 존재 등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반드시 날개가 달린 천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날개는 없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 소리 없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며 겸손되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또 다른 의미의 천사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 하느님 대신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사람들 역시 날개 없는 천사들입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그 한 가운데서도, 꿋꿋이 견뎌내며 희망을 잃지 않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천사들입니다. 오늘 하루 서로가 서로를 진정으로 지지해주고 서로를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하는 날개 없는 천사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길 빕니다. 이 세상은 아직 희망을 걸고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란 것을 알게 해주는 서로를 위한 천사로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나로 인해 상대방의 인생이 더욱 의미를 지니고, 빛을 발하게 되길 기원합니다. 나로 인해 이웃들이 새로운 힘을 얻고 다시 한번 힘차게 새 출발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하늘과 사람 사이를 오가는 천사 +정말 잘 들어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늘을 마주 대하는 세상 -박상대신부- 요한이 보도하는 제자들의 소명사화는 공관복음의 그것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님의 첫 제자는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였다.(1,35-40) 두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두고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한 것에 힘입어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 두 사람 중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이나, 다른 하나는 누군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아마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으로 추정된다. 요한복음에서 특이한 점은 한 제자가 다른 제자의 소명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안드레아가 자기 형 시몬을 예수께 인도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소명을 받은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께 인도한다.(1,41.45) 나타나엘은 공관복음의 바르톨로메오와 같은 인물로 추정된다. 나타나엘은 예수께 가기 전에 필립보를 만났다. 필립보는 그에게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들이 기록한 메시아이며 요셉의 아들로서 나자렛 출신의 예수를 만났다고 증언한다. 예수께서 나자렛 출신이라는 말에 나타나엘은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하지만 곧바로 예수님을 만나서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눈 후 그분을 ‘하느님의 아들’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고백한다.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의 메시아 고백을 인정하고, 그가 지금까지 체험한 것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더 큰 일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장차 드러내실 자신의 영광과 하늘나라에 관한 표징과 기적이다. 오늘 복음의 말로 표현하자면, 하늘이 열려있고, 하느님께서 계신 하늘과 땅에 내려온 사람의 아들 사이를 하느님의 천사들이 왕래하는 것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야곱의 사다리를 연상케 한다.(창세 28,10-17) 결국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잇는 역할을 맡은 셈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하늘과 땅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느님의 천사들을 나타나엘이 스스로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천사들은 하느님을 보필하는 영적인 존재이므로 비가시적(非可視的)이다. 물론 천사들도 하느님께서 특별히 허락한 사람과 경우, 즉 토비아, 즈가리야, 마리아, 다니엘과 요한의 환시, 요셉과 동방박사들의 꿈속에서와 같이 가시적(可視的) 형상을 취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천사들은 비가시적인 모습으로 하느님과 사람의 아들 사이의 중개역할을 담당한다. 이것은 사람의 아들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이 땅에 현존하심을 말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세상은 열린 하늘과 마주 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곧 예수님의 도래와 강생으로 인간세상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을 의미한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요한 1, 43-51) -유광수 신부- 지난번 피정 때 나는 어느 형제분과 인사를 하면서 "아무개 아니냐. 만나서 반갑고 이 피정에 와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였다. 그 형제는 내가 자기를 어떻게 아느냐고 말하면서 매우 놀라는 모습이었다. 사실 그 형제와 나는 한번도 만난 적은 없다. 다만 그 형제가 말씀 학교의 직원이 지도 하는 묵상 나누기에 매우 열심히 나오시고 아주 충실하게 준비하신다는 말을 듣고 나는 나대로 그 형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기회가 되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리라고 생각했었다. 그 형제에게서는 뜻하지 않았던 일이었던 것이다. 우선 신부님이 자기를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 놀랬고 그것이 무척 고마웠던 모양이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지금도 가끔"신부님이 자기를 알아보았다."는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레 이야기하곤 한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알아 준다는 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인가 보다. 그것도 전혀 예기치 못한 사람이 평소에 자기가 존경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한다는 것은 놀랠만한 일인가 보다. 왜 그럴까? 자기의 존재를 인정받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준다는 것은 그 사람한테 사랑을 받고 있고 자기가 그 사람한테 관심의 대상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오늘 나타나엘이 예수님한테 처음으로 갔을 때 "보라, 저 사람이야 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는 칭찬을 듣고 감격하여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예수님께 묻는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는 말씀을 묵상하자. 생각해 보았다면 과연 그 때의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알고 계신다면 나는 과연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나에 대해서 아는가? 내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나와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나의 모습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등 여러 가지 질문이 일어난다. 여기서 몇 가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묵상해보자. 이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네 구역"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Jonari(요나리) 창이라고도 부른다. 첫째는 나에 대해서 나만이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부분이 있다. 둘째, 나에 대해서 나는 모르는데 다른 사람이 알고 있는 부분이 있다. 셋째,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 부분이 있다. 넷째, 나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모르고 오직 하느님만이 아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부분이 결코 많지 않다. 어쩌면 나 자신도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부분이 더 많은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가 나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남을 알겠으며 또 내가 안다고 한들 얼마나 알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양,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양, 말하고 판단한다.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가? 무지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했던가? 그렇다. 나는 나 자신을 알 수 없다. 왜 그런가?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만들지 않았는데 어떻게 나를 알 수 있는가? 나를 아는 분은 오직 나를 만드신 창조뿐이시다. 따라서 내가 나를 알고 싶으면 나를 만드신 하느님을 알아야 하고 그분을 통해서만이 나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나의 원형이시고 나를 만드신 분이시다. 그래서 시편작가는 이렇게 노래한다. 주여, 당신은 나를 샅샅이 보고 아시나이다.
어제 새벽, 성당 문을 열기 위해서 사제관 키를 먼저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제관 문은 자동으로 문이 잠겨서 카드키가 있어야만 다시 들어올 수 있거든요. 하지만 어디에 붙어있는지 도대체 보이지 않습니다. 옷 주머니를 뒤져보고, 책상 위도 찾아보았습니다. 한 10분 이상을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았지요. 왜냐하면 제가 성당 문을 열어야 새벽 미사 오신 신자 분들이 성당에 들어올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결국 두꺼운 책 사이에 끼어 있는 카드키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카드키가 새롭게 보였습니다.
사실 평소에는 이 카드키에 대해 반갑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카드키에게 고맙다고 말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에는 카드키가 너무나 반가웠고, 지금 내가 찾을 수 있게 되어서 너무나도 고마웠습니다.
문득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예전 학창 시절에 ‘Love Is....’라는 글이 적혀 있는 책갈피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참 다양한 사랑의 정의를 볼 수가 있었는데요. 저 역시 어제의 카드키 찾기를 통해서 ‘사랑이란 발견이다.’라고 정의를 내리고 싶습니다. 평소에 카드키의 중요함을 몰랐던 저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급할 때 발견하게 되면서 카드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지요. 마찬가지로 사랑은 이렇게 발견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만납니다. 사실 나타나엘은 나자렛 출신인 예수님에 대해서 별로 긍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말할 정도로 그는 예수님을 그저 그런 분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서 그는 예수님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의 지난날을 아시는 예수님,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이제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변화됩니다. 왜냐하면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조금씩 조금씩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일상 삶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변화될 수 있으며, 가정, 일터, 더 나아가 이 세상이 변화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말씀하셨던 더 큰 일을 우리 역시 보게 될 것입니다. 즉,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사랑을 조금씩 발견하면서 동시에 이 세상을 변화시킬 때, 그만큼 하느님 나라가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어느 날 새벽, 힘찬 군가와 함께 저만큼에서 그가 달려오는 걸 보았다. “…저희 죄를 요옹서어 하아시이고오….” 세상에나, 군가가 아니라 주님의 기도였다. 하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듯이’의 다음 구절이었다. 속이 좁아 남을 용서하는 게 힘든 나는 매번 그 구절에서 걸렸다. 그의 뒤에 대고 속으로 ‘고맙습니다.’ 하고 말했다. 그건 바로 그에게 주님의 기도를 부르짖게 하신 분께 드리는 감사였다.
나타나엘이 “스승님은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하고 고백했을 때 나는 대뜸 그 중년 남자가 떠올랐다. 그라면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는 순간 망설임 없이 예수님을 고백했을 것이고 예수님은 그를 어여삐 보시고 나타나엘에게 하셨던 언약을 주셨을 것 같았다. 나는 아직도 기분에 따라, 상황에 따라 그분을 당겼다 밀쳤다 변덕을 부리며 별로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잠깐 우쭐했던 걸 고백한다. ‘혹 그 중년 남자가 몇 번의 화살기도 때문에 주님의 기도를 부르짖게 된 건 아닐까?’ 우리가 드린 기도는 언제 어디서든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며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을 자세히 보면
주님도 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사명을 받은 듯이 보입니다.
어떤 사명일까요?
라파엘은 하느님 치유의 사명이고
미카엘은 하느님 보호의 사명이고
가브리엘은 하느님 말씀 전달의 사명입니다.
아무튼 이런 전달자 천사의 존재를 인정함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중간자의 역할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접 치유와 보호와 말씀을 내리시기도 하지만
천사와 같은 중간자를 통해서 내리시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가장 완전한 중간자, 중개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바로 중간자, 중개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도 천사이고 풀잎도 천사입니다.
주교 앞에서 옷을 홀딱 벗어 아버지에게 옷을 돌려준 뒤,
그리고 육신의 아버지와 결별을 하고
하늘의 아버지를 아버지로 섬기겠다고 선언한 뒤
프란치스코는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납니다.
강도가 “너는 누구냐?”고 프란치스코에게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위대하신 하느님의 사신이요.”하고 답합니다.
갑작스런 출현과 질문에도 즉시 이렇게 답하는 프란치스코는
자기 신원의식과 사명에 대한 인식이 아주 뚜렷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사람들에게로 가는 존재.
이것이 프란치스코의 신원이고
파견되어 말씀과 치유와 보호의 행위를 통해 주님 사랑을 전하는 것,
이것이 프란치스코의 사명입니다.
우리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대천사들뿐 아니라
수많은 천사들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해 받았고
이제는 우리가 천사가 되어 주님 사랑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오늘 천사들의 축일을 지내며 다짐합니다.
천사 당쇠 김 찬선.
좀 어색한가요?
여러분은?
학부 3학년과 대학원 1학년인 우리 반의 농구 결승전. 누가 봐도 실력 차이가 현저했고, 당연히 학부 3학년이 우승할 것이라고 예상했었습니다. 결승전이라고 전교생과 학교 교수 신부님들이 관람하고 있는 가운데 결승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작과 동시에 점수가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팀에서는 봐주면서 하는 것 같고, 우리 팀은 이 정도만 되어도 성공했다는 듯이 즐기면서 농구를 합니다.
저는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때 제가 승부욕이 엄청나게 강했거든요. 따라서 이러한 모습을 그냥 볼 수가 없었지요. 점점 과격해지면서, 상대방의 약한 파울에도 과민하게 반응하면서 교수신부님들과 전교생이 보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큰소리로 욕을 하며 화를 내었지요.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의 승부욕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저희 학년이 우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뒤의 일입니다. 저랑 농구를 할 때면 사람들이 피하는 것입니다. 우리 반의 승리를 가져오는데 보탬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의 이미지는 바닥을 치게 된 것이지요.
요즘 같은 경쟁사회에서는 자신의 뜻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공격적인 사람들에게 ‘성공한 사람’이라는 호칭을 붙여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들의 성공은 늘 단명으로 끝나지요. 반면에 그들이 저지른 해악은 자신과 남에게까지 널리 미치는 것 같습니다. 경쟁이 지나치면 결국 여러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고, 자신도 불쾌해지며, 욕을 먹게 되고, 정작 해야 할 일은 엉망이 되는 것입니다. 대학원 1학년 때의 저처럼 말이지요.
반면에 경쟁심을 버린 사람은 세상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습니다. 자기 식을 남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안절부절 못하면서 속상해하거나 움츠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바로 천사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요? 이러한 사람들이 우리 곁에는 참으로 많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천사야.”라는 말을 자주 하지요. 그런데 문제는 나 스스로는 그 천사와 같은 모습을 갖추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즉, 천사 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면서도, 스스로는 자신의 뜻을 타인에게 강요하는데 더 익숙해 하면서 천사와는 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입니다. 대천사 축일을 맞이해서 우리 역시 천사들의 모습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천사는 하늘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함께 하고 있으며, 나 역시 내 이웃의 또 다른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생각을 들어주며 함께 아파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홀로 있음을 느끼는 경우도 많지만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이가, 함께 마음 아파하는 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어찌 보면 천사란 나와 함께 아파하는, 그리고 나와 함께 기뻐하는
하느님의 또 다른 모습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을 잉태하리라는 소식을 전할 때,
그것은 기계적으로 우리가 늘상 받아보는 세금고지서나 전화비 통지서 같은
전달이 아니라 성모님과 함께 마음 아파하고 마음 부대낀
그런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천사란 또 다른 모습으로
이 자리에 함께하시는 주님의 모습임을 잊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천사란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어머니의 눈입니다.
그런 눈이 우리에게 늘상 머물러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소중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천사들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어도. 천사가 받지 못하는 존귀의 관까지도 우리에게 내리시는
주님을 찬미하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A 역시 그런 사람에 속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에도 싸움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동네 꼬마대장 노릇을 한 기억이 있는데, 그 기억 속에서도 한 학년 밑의 아무개가 싸움을 걸어와 개천까지 내려가게 되었지만 결국 싸움을 못하고 대장 자리를 넘겨주고 말았습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다른 사람에게 해코지를 하거나 싸움을 걸거나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삶은 평탄치 못했습니다. 30년에 걸친 그의 사회생활을 헤아려 보면 한 곳에 있지 못하고 직장을 다섯 차례나 옮기게 되었습니다. 평균 3,`4년 만에 직장을 떠나게 되었고, 길어야 5,6년이었습니다. 그나마 제 뜻으로 직장을 떠난 적도 없습니다. 항상 직장이 그를 떠나게 만들었습니다.
그를 가장 슬프게 만든 것은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마음으로 도왔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오히려 등뒤에서 그를 격렬히 헐뜯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아무도 그를 두려워할 필요를 느끼지 않기에 오히려 마음껏 짓밟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슬퍼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타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며 하신 말씀, 곧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는 말씀을 듣고 위안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천사의 존재를 신앙교리로 선언하였다(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 1차 바티칸 공의회-1870년). 그러나 천사의 본질과 역할, 계급과 사람마다 수호천사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 등에 대하여서는 아무런 유권적 결정도 내리지 않았다.
또한 교회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천사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고(745년, 라테란 공의회), 삼대(三大) 천사의 축일과(9월 29일) 수호천사의 기념일(10월 2일)을 제정하여 천사공경을 장려하고 있다.
미카엘은 ‘누가 하느님과 같으냐?’란 뜻으로 구약성서에 2번이 등장하며(다니엘 10,13이하; 12,1), 신약성서에도 두 번 언급되었다(유다 1,9; 묵시록 12,7-9). 이 천사는 외경에서 더 많이 등장하는데, 주로 천상 군대의 장수, 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보호자, 특히 임종하는 이들의 수호자로 나타난다.
미카엘 대천사 공경은 처음에 프리지아에서 발단되어, 서방교회로 확산되었고, 교황 젤라시오의 재임기간에(492-496) 북이탈리아의 가르가누스 산에 발현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져, 발현 장소에 기념 성당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흔히 미카엘 천사는 악랄한 용과 싸우는 칼로 표현되며,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은 로마의 살레리아노가에 세워진 미카엘 대성당 봉헌 기념일이고, 1970년에는 그의 축일이 가브리엘과 라파엘의 축일과 합쳐진 것이다.
가브리엘이란 ‘하느님의 강함’ 또는 ‘하느님의 사람’이란 뜻으로 가브리엘 천사는 다니엘이 본 환시와 예언을 설명해 준 대천사이다(다니엘 8,16-26). 그는 즈가리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였고(루가 1,11-21),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소식을 마리아에게 전하였다.(루가 1,26-38)
라파엘은 하느님의 치유자란 뜻이다. 주님 앞에 서 있는(토비트 12,12-15) 일곱 대천사 중의 한 분인 라파엘 대천사는 토비아와 사라를 위하여 하느님에 의하여 파견되었다. 라파엘은 이 땅을 치유하는 천사로 알려져 있다. 요한복음(5,1)에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구절의 ‘주님의 천사’가 라파엘 대천사라고 한다. 라파엘 천사는 맹인의 수호천사이다.
9월 29일은 로마의 살레리아노가에 세워진 미카엘 대성당 봉헌 기념일로서 미카엘 대천사의 축일이었는데, 1970년에 가브리엘, 라파엘 천사의 축일까지 통합하여 지내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감각의 대상인 세상만을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감각을 초월하는 영의 세계도 창조하셨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심부름을 하는 영적 존재들이다. 이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하느님을 찬양하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하느님을 예배하고, 시중드는 존재들이다(묵시 5,11-12; 8,3.4). 또한 땅 위에서는 주님을 위하여 심부름하며 하느님의 일을 행한다(민수 22,22; 마태 13,41).
뿐만 아니라 천사들은 하느님의 명에 따라 신자들을 인도하며(사도 8,26), 돕고, 보호한다(1열왕 19장, 다니 6,22). 그리하여 천사들은 하느님이 모든 것의 중심이시며, 창조된 모든 것은 곧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함이라는 점을 가르쳐준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며 돕는다.
그러므로 오늘 대천사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천사들처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신앙인이 되자. 우리 삶의 중심에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인이 되자...........◆
나타나엘은 누구인가? 나타나엘은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으로 바르톨로메오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가나 지방 출신이었으며 나자렛에서 메시아가 나올 가능성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인 생각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타나엘은 필립보의 인도로 예수님을 만난 이후 나자렛 예수님을 메시아로 보았고, 즉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였다. 그리고 훗날 나타나엘은 티베리아 호숫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요한 21,2)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처음 뵙고 믿음을 고백하였는데 그 신앙고백은 사실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예수께 “선생님,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라고 하였다. 나타나엘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심으로 보았지만 그분을 이스라엘에 국한시켰다. 곧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느님의 아들로 보았다.
이에 예수께서는 “앞으로는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하시고 나서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훗날 있을 당신의 부활과 승천을 암시하시면서 인류를 위한 하느님 아들이시며 메시아이심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나타나엘을 통하여 당신은 인류를 위해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사람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하신다. 따라서 나자렛 출신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왕이시다. 우리는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왕이신 예수께 깊은 믿음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해야 한다.
천사는 하느님의 사자들이며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능력들이며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이다(히브 1,14). 성서는 자주 이들을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가 하느님께서 갖가지 모양으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는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
미카엘 천사는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두 번 언급되었는데 "누가 하느님과 같은가?"라는 뜻을 지닌다. 미카엘 천사는 주로 천상 군대의 장수, 악에 대한 수호자, 임종자의 수호자로 등장한다.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란 뜻이며 다니엘이 본 환시와 예언을 설명해준 대천사이며, 즈가리야와 마리아에게 각각 탄생을 알린 하느님의 사자이다. 그리고 라파엘은 "하느님의 치유"라는 뜻이며, 토비아를 위해 파견된 천사이며, 맹인들의 수호천사로 공경을 받고 있다.
이 천사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 존재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 하느님께 감사드려야 하는 것은, 그들 천사들까지도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셨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천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지고 계신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이제 더욱 인간을 위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느낄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도 그러한 사랑을 우리 안에 담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제 천사가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오가며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전하는 존재라면, 이제 우리도 다른 사람에게 하느님께로부터 사랑과 그분의 뜻을 전할 수 있는 천사의 모습을 가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오늘 복음의 나타나엘이 예수님께로부터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조금도 없다"하고 칭찬을 들었듯이 우리 자신이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갖는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갖춘 다면, 오늘의 이 복음 말씀을 올바로 사는 것이며, 우리의 모습이 진정 다른 사람들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이러한 삶의 노력을 주님께 바쳐드리며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자.
-김정호 신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예수께서는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너희는 하늘이 열려 있는 것과 하느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사람의 아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하셨습니다. 평화방송 가족 여러분! 오늘은 천사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성서에 이름이 명시되어 있는 세 분의 대천사를 공경하는 날입니다. 성 미카엘 대천사와 성 가브리엘 대천사, 그리고 성 라파엘 대천사, 이 세 분입니다. 우선 이 대천사들의 이름이 나오는 성서의 대목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가브리엘 대천사부터 보겠습니다. 7 대천사 중의 한 분인 이 분의 이름,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을 지니는 말마디인데, 성서에서는 모두 3곳에서 나타납니다. (1)처음 나오는 곳은 구약성서인 다니엘서 8,15-9,27까지의 대목입니다. 환시를 보면서 그 뜻을 몰라 애쓰고 있는 다니엘 예언자에게, 가브리엘 대천사가 나타나서 그 환시의 의미를 깨우쳐 줍니다. 그리고는 장차 언제쯤 메시아가 오실 것이며, 그 분이 어떤 일을 겪게 되는 지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2)그 다음으로는 신약성서 루가 복음 1,11-21까지에 걸쳐 나타납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던 사제 즈가리야가 비록 늙은 나이이지만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정하라고 일러주는 대목입니다. (3)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시 루가 복음 1,26-38까지에 나오는 예수의 탄생 예고 장면입니다. 나자렛에 살고 있는 한 시골처녀인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장차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낳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라파엘 대천사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지요. 라파엘! “하느님께서 치유하신다”는 뜻입니다. 이 이름이 명시된 성서는 구약의 토비트서가 유일합니다. 토비트와 그의 아들 토비아는 포로로 잡혀가서 아시리아의 니느웨에서 귀양살이를 하지만, 하느님께 충실하면서 의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눈이 멀게된 토비트로 하여금 눈을 뜨게 해주고,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여행을 떠난 아들 토비아를 지켜주고, 그의 아내가 된 사라를 치유해주었습니다. 이 토비트서 12,11-15까지 보면, 라파엘 대천사에 대해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대천사는 우리 인간을 수호하고, 우리 인간의 사정을 하느님께 전하고, 하느님 앞에 머물면서 그 분의 시중을 드는 7 천사 중의 하나라고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신약성서인 요한 복음 5,1-4까지 보면,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 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다”고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물을 휘젓는 주님의 천사가 바로 라파엘 대천사라는 믿음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서에 묘사된 라파엘 대천사의 모습을 통해서, 교회는 그 분을 치유하는 사람의 수호자, 맹인의 수호자, 그리고 모든 여행자의 수호자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미카엘 대천사가 등장하는 부분을 찾아보겠습니다. 미카엘이라는 이름처럼 “하느님처럼 구는 자가 누구냐?”하고 소리치면서, 악마의 무리를 모조리 지옥으로 쫓아내고, 악마에게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해주는 분입니다. 구약성서 다니엘서 10,1-21에는, 다니엘에게 힘을 북돋워주고 유다를 침공하는 나라에 맞서 싸울 때 지켜주고 있습니다. 같은 다니엘서 12,1에서도 다니엘과 그 겨레가 일찍이 없었던 어려운 때를 당할 때 그들을 지켜주면서 슬기로운 지도자들이 밝은 하늘처럼 빛나게 하겠노라고 다짐합니다. 신약성서인 유다의 편지 1,9에서도 모세의 시신을 악마로부터 지키는 미카엘 대천사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고, 묵시록 12,7-9에는 악마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세계를 속여서 어지럽히던 늙은 뱀인 큰 용을 미카엘 대천사가 격퇴시킴으로써 하늘나라를 수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9월 29일은 원래 미카엘 대천사를 기념하기 위해서 로마에 건축한 성 미카엘 대성당을 봉헌한 날인데, 교회는 바로 이 날 세 분의 대천사를 함께 기리면서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성서에 나타나는 가브리엘 대천사, 라파엘 대천사, 그리고 미카엘 대천사는 항상 하느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지켜주고 힘을 줍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우리 인간 속에서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늘 지켜보면서 전달해 줍니다.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며 이 현세를 걸어가는 나그네 인생인 우리 곁에 머물면서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사들의 보호를 받아 언제나 구원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천사들과 사람들을 부르시어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니, 하늘에서 주님의 영광스런 모습을 뵈오며 주님을 섬기는 천사들을 보내 주시어, 세상에 사는 저희를 모든 위험에서 지켜 주소서. 저희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기리며 천사들과 함께 노래하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나이다. 아멘.”
성 아우구스티노의 학설에 따르면 천사는 하느님의 심부름을 하는 육체를 가지지 않은 영적인 존재로서 '천사'라는 말은 직책의 이름이지 본성의 이름은 아니며, 천사는 그 존재 전체가 하느님의 봉사자이며 전령입니다.
구약성서에서 천사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중개하는 존재로서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파견되어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인간을 보호하고, 인간을 도와주고,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께 기도하고, 때로는 사람을 처벌하기도 합니다. 또 그들은 하느님을 모시는 신하요 군대로 인식되었으며 때로는 하느님의 발현이라고 생각되기도 하였습니다.
신약성서에서 천사는 하느님의 사신으로서 인간에게 파견되고, 꿈에 나타나고, 흰옷을 입은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은 창조된 영적인 존재이며 하느님의 군대이며, 그리스도를 섬기고 사도들에게 봉사하고, 어린이들을 보호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천사세계의 중심이시며 천사들은 그분에게 속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천사들을 당신의 구원계획을 알리는 전령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천사들은 더욱 그분께 속한 존재들입니다.
천사들은 창조 때부터 구원 역사의 흐름에 따라 이 구원을 멀리서 또 가까이서 알리고, 이 구원 계획의 실현을 위해 봉사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구약에서 천사들은 인류의 선조들이 타락하여 낙원에서 쫓겨났을 때 지상낙원의 문을 닫았으며, 소돔의 멸망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보호하였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몸종 하갈과 그녀의 아들 이스마엘을 구하였으며, 하느님의 명령으로 자기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는 아브라함의 손을 멈추게 하였으며, 율법을 전해주는 직무를 수행하였으며,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였으며, 판관 기드온에게 그의 소명을 알려주었고, 판관 삼손의 탄생을 알렸으며, 예언자 엘리야와 이사야를 도와주었습니다.
신약에서 천사들은 세례자 요한의 탄생과 예수님의 탄생을 알렸으며, 어린 예수님을 보호하였으며, 40일간 사막에서 단식하며 기도하신 예수님께 봉사하였으며, 번민에 싸여 겟쎄마니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께 용기를 북돋아 드렸습니다. 결국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신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위하여 중요한 일을 하실 때마다 천사들을 보내셔서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대천사 3명도 각기 고유한 임무를 가지고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였습니다. 먼저 미카엘 대천사는 '누가 하느님 같으냐?'라는 뜻으로 주 임무는 하느님의 백성을 보호하고 악마를 쫓는 것입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하느님의 사람', '하느님은 강하시다.', '하느님의 힘'이라는 뜻으로 주 임무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사신의 역할입니다. 성서에는 가브리엘 대천사에 관한 내용이 3번 나옵니다. 첫 번째는 다니 9, 21-27에서 구약시대에 다니엘 예언자에게 나타나 장차 메시아가 오실 것을 전했습니다. 두 번째는 루가 1, 11-19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을 준비를 하도록 보낸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그의 부친 즈가리야에게 예고했습니다. 세 번째는 루가 1, 30-33에서 마리아에게 파견되어 성령의 잉태하심으로 구세주를 낳을 것임을 알렸습니다.
라파엘 대천사는 '하느님께서 치유해 주셨다.', '하느님의 묘약', '하느님의 의사'라는 뜻으로 위협과 악마의 손에서 구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토비트 3, 17에서 라파엘 대천사는 구약시대의 의인 토비야의 아들 소 토비야가 무사히 긴 여행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래서 라파엘 대천사는 여행자들의 수호천사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오늘 축일을 지내는 대천사들까지도 인간의 구원을 위한 당신의 도구로 쓰셨습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천사들도 빼앗아 갈 수 없을 만큼 크십니다.
오늘 하루 천사들까지 동원하여 인간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느껴 보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교회는 천사들의 존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 1870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 그러나 천사에 대한 학자들의 학설은 다양하다. 다만 구약과 신약성서에서 이름으로 언급된 미카엘(다니 10,13; 10,21; 12,1; 유다 1,9; 묵시 12,7), 가브리엘(다니 8,16; 루가 1,11.19.26), 라파엘(토비 5,4; 6,5; 6,7) 천사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원래 대천사들의 축일은 미카엘을 9월 29일, 가브리엘을 3월 24일, 라파엘을 10월 24일에 지냈으나, 1970년부터 오늘 9월 29일 미카엘 천사의 축일에 합쳐서 지내게 되었다. 다른 천사들에 대한 공경은 10월 2일을 따로 정하여 수호천사들을 기념하고 있다.
대천사 미카엘(Michael)은 ‘누가 하느님과 같은가?’라는 뜻으로 특히 외경에 자주 등장하는데 천상(天上) 군대의 장수, 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보호자, 특히 임종자들의 수호자로 나타난다. 미카엘 대천사는 단지 구약의 다니엘서(10,13.21; 12,1)와 신약의 유다서(1,9)와 요한 묵시록(12,7-9)에만 언급된다. 미카엘 대천사 공경은 처음에 프리지아에서 발단되어, 서방교회로 확산되었고, 교황 젤라시오의 재임기간에(492-496) 북이탈리아의 가르가누스산에 발현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 발현 지점에는 기념 성당이 건립되었다. 9월 29일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은 로마의 살레리아노가에 세워진 미카엘 대성당 봉헌 기념일에서 유래되었다. 이 대성당 입구에는 요한묵시록(12,7-9)의 기록에 따라 칼을 들고 용과 싸우는 미카엘 대천사의 상이 세워져 있다.
대천사 가브리엘(Gabriel)은 ‘하느님의 힘’, ‘하느님의 영웅, 용사’의 뜻으로 하느님 계획의 전달자, 환시와 예언의 설명자로 나타난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구약의 다니엘이 본 환시와 예언을 설명해 주었으며(다니 8,16-26), 즈가리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출생을 예고하였고(루가 1,11-21), 하느님의 놀라우신 구원계획과 그리스도의 탄생을 마리아에게 알려주었던(루가 1,26-38) 하느님의 사자이다. 아울러 요셉에게 약혼녀 마리아의 동정잉태를 설명하고 아들의 이름을 ‘예수’로 명명하도록 지시하고(마태 1,20-21), 헤로데 대왕의 박해를 피해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난시켰다가 헤로데의 죽음을 알려주고 이스라엘로 다시 돌아가도록 지시한(마태 2,13.19-20) 주님의 천사도 가브리엘 대천사로 추정된다.
대천사 라파엘(Rafael)은 ‘하느님이 치유하신다.’라는 뜻으로 치유하는 자, 맹인의 수호자로 나타난다. 라파엘 대천사는 하느님의 일곱 천사들 중 하나로서 구약의 토비트서에 무려 42번이나 언급되는데, 그는 토비트와 그의 아들 토비아와 토비아의 아내 사라를 위하여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예루살렘 베짜타 못가의 병자를 치유하신 대목에서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 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다.”고 전한다.(요한 5,4) 여기서 ‘주님의 천사’는 라파엘 대천사를 가리킨다고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에 날개를 가진 사람을 천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주 착한 사람을 ??천사 같다??고 표현하지요. 천사는 사람과 교회를 지켜주고 하느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상징적인 존재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데 요즘은 천사의 이미지가 교회에서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대신 젊은 남녀들 사이에서, 또 일부 장사꾼들이 ??수호천사??라고 하여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주는 의미로 천사의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지요. 천주교회에서는 천사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는 반면에 세상에서는 살아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과연 존재하는 인물일까요? 우리 천주 교회에서는 이 천사의 존재를 어떻게 가르치고 있으며, 역사 속에서 천사는 어떤 변천사를 밟아 왔는지, 또 요즘은 왜 천사를 보기가 어려운지를 오늘 대천사 축일을 맞이하여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천사는 창세기에서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도와주는 심부름꾼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심부름을 하는 영적(靈的)인 존재를 일반적으로 ??천사??라고 표현했지요. 성경에는 천사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에는 하느님이 심부름꾼으로 천사들이 많이 파견되고 있는데 몇 가지를 찾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창세기 16장에 주인의 박대를 견디다 못해 도망치는 하가르 앞에 천사가 나타나 도움을 줍니다.
??주님의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너의 여주인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여라.??주님의 천사가 다시 그에게 말하였다. ??내가 너의 후손을 셀 수 없을 만큼 번성하게 해 주겠다.????(창세 16,9-10)
또 창세기 19장 1절-22절에는 멸망하는 소돔에 천사들이 나타나서 도움을 주며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고, 24장에는 늙은 아브라함이 며느리감을 얻는데 천사의 도움을 구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한편 천사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뿐만 아니라 처벌하는 일도 하였습니다. 사무엘 하권 24장에는 백성을 치는 천사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요.
??천사가 예루살렘을 파멸시키려고 그쪽으로 손을 뻗치자, 주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을 후회하시고 백성을 파멸시키는 천사에게 이르셨다. ??이제 됐다. 손을 거두어라.?? 그때에 주님의 천사는 여부스 사람 아라우나의 타작마당에 있었다.??(2사무24,16)
그밖에 하느님을 모시는 군대로 천사들을 인식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천사의 역할은 신약성경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둘러싸고 처녀 마리아를 찾아오고(루카1,28), 약혼자 요셉의 꿈에 나타난 분은(마태1,20) 가브리엘 천사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메신저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천사는 꿈에 나타나 에집트로 피신할 것을 일러주는 가 하면(마태2,13), 흰옷을 입고 예수님의 부활을 알려주며(마르16,5), 심판 때에는 그리스도를 옹위하여 나타날 것이라고(묵시22,6) 성경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경 곳곳에서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는 전달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요.
천사에 대하여 교회의 학자들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람이 디오니시오 성인입니다. 성인은 성경을 바탕으로 하여 9품 천사에 달하는 천사의 계보를 만들었습니다. 9품 천사란 천사의 등급을 치품(Seraphim), 지품(Cherubim), 좌품(Thrones), 권품(Dominantes), 능품(Principatus), 역품(Potestates) 주품(Virtus), 대(大)천사(Archangelus), 천사(Angelus)로 분류한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은 아니고 천사에 관한 디오니시오 성인의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그렇다면 천사에 관하여 우리 신자들은 무엇을 믿어야 하는 것일까요? 믿어야 할 것은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과 감각을 초월하는 영원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바로 그것입니다. 천주교회는 745년 라테라노 공의회 때까지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이라는 이름 이외에는 다른 천사의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에서 천사의 존재를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지요. 천사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과연 각 사람에게 수호천사는 존재하며, 천사의 등급이 또한 존재하는지에 관하여서는 권위 있는 해석을 유보한 채 다만 천사의 존재만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이 증명해주듯이 예전에는 천사들의 활약이 돋보이고 천사의 존재에 관한 가르침도 확고했는데, 왜 우리 시대에는 천사의 존재가 희미해지고 믿어야 되는지 믿지 말아야 되는 지도 모를 정도로 천사의 존재가 퇴조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천사는 주로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해주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하느님의 뜻, 즉 계시(啓示)의 원천이 성경에 그대로 다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느님의 뜻을 새롭게 전달해 줄 이유가 없어진 셈이지요. 성경 안에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에게는 그 성경을 해석하고 설명해주는 성직자,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옛 예언자들이 사라진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구약시대 많은 예언자들이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은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주는 성경이 집대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계시의 원천인 하느님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지면서 이제는 더 이상 예언자들의 역할이 필요 없게 된 것이지요. 예언자들은 사라지고 성경을 해석해주는 율법학자들이 존재하게 됐던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같은 맥락이지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또 성경을 해설해 주는 성직자와 수도자, 교리 교사들이 많아지면서 비교적 쉽게 하느님의 뜻을 전달받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하느님의 말씀을 전할 천사들이 필요 없게 된 것입니다. 시대에 따라 계시의 방법도 달라집니다. 이제 계시의 방법이 ??천사??에서 ??성경??으로 변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천사의 역할이 많이 퇴조해 있지만 분명한 것은 라테라노 공의회의 가르침대로 천사는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에서는 천사에 관한 축일로 오늘 9월 29일을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로, 또 10월 2일을 ??수호천사 축일??로 정하여 공경하며 장려하고 있지요.
오늘 축일은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입니다.
미카엘 대천사의 이름은 ??누가 하느님과 같으냐???라는 뜻을 지닙니다. 미카엘 대천사는 악의 세력과 싸워 승리를 거둔 천상 군대의 지도자로 소개됩니다. 요한 묵시록 12장에 미카엘 대천사가 나옵니다. ??그때에 하늘에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미카엘과 그의 천사들이 용과 싸운 것입니다. 용과 그의 부하들도 맞서 싸웠지만 당해 내지 못하여, 하늘에는 더 이상 그들을 위한 자리가 없었습니다.??(묵시12,7-8) 우리는 미카엘 대천사를 악마의 유혹으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구하고, 임종하는 사람들을 보살펴 주는 보호자로 여기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의 이름은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가브리엘 대천사는 다니엘에게 나타나 환시를 보여 주었으며(다니9,21 이하 참조), 무엇보다 즈카르야에게 나타나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그리고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나타나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해 주었습니다(루카1,26 이하 참조).
라파엘 대천사의 이름은 ??하느님께서 고쳐 주셨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구약 성경의 토빗기에 나옵니다. 청년 토비야를 먼 곳까지 안전하게 안내하여 아버지의 심부름을 완수하게 하고, 아내 사라를 맞이하게 도와주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대천사는 임무를 다 마치고 토비야에게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나는 영광스러운 주님 앞에서 대기하고 또 그분 앞으로 들어가는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인 라파엘이다.?? 우리는 라파엘 대천사를, 이 세상의 삶을 잘 마치고 영원한 천국으로 무사하게 순례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도와주는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매일 미사 9월호 참고)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뜻을 전달받습니다. 또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을 마치 ??천사 같다??라고도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담긴 성경을 자주 접하고 성경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천사 같이 사는 우리의 모습임은 말할 필요도 없지요.
오늘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을 지내면서 하느님의 말씀대로 착하게 사는 여러분이 바로 천사들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가브리엘(하느님의 사람·영웅·힘이란 뜻) 천사는 루카 복음서 1장에서 요셉의 약혼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역할을 하였고, 라파엘(하느님이 고쳐 주셨다는 뜻) 천사는 토비트 5장에서 늙은 아버지 토비트의 명을 받고 메디아로 여행을 떠나는 토비아에게 자청하여 동반자가 되어줍니다.
다니엘서 10장에는 미카엘(누가 하느님 같으랴는 뜻) 천사가 이스라엘인들의 수호자로 나타납니다.
그는 정부 고위직의 러브 콜도 많이 받았고, 운동을 벗어난 곳에서 그의 힘을 빌리려는 청도 수없이 받았다. 그러나 그는 40대 중반을 훨씬 넘긴 지금에도 여전히 가난하며 인권을 옹호하는 최전방에 서 있다. 보편적 인권 가치를 지키기 위한 싸움 중 반인권적 실정법에 항의하며 수없이 연행되고 구속되기도 했지만 그는 그때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웃으며 받아들였다. 그렇게 그를 가두었던 경찰과 검찰에서도 무슨 일만 생기면 그에게 자문과 협조를 구한다. 무수히 많은 성명서를 쓰고, 토론회와 집회 사회를 보느라 심신이 지칠 테지만 후배들의 시시콜콜한 어려움까지 다 자기 일처럼 나서는 자상한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다. 그러나 난 그를 보며 예수님의 삶을 목격한다. 예수님이 내게도 이렇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셨구나, 이렇게 살면 주님 보시기에 좋은 삶이겠구나 하며 생각에 잠긴다. 성당이나 교회를 다니기만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정하게 부와 명예를 챙기면서 입으로만 주님을 찬양하고 겉으로만 선행을 베푸는,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보다 P씨 같은 사람이 훨씬 그리스도인에 가깝다.
이상한 것은 예수님을 먼저 본 사람이 필립보이고
또 그 예수님의 참 가치를 먼저 알아 보고
그것을 나타나엘에게 전해준 사람이 필립보인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필립보에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으시고
나타나엘과는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신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먼저 오고 알아보았던 필립보에게는
의미심장한 말씀 같은 걸 안하시고
나중에 온 나타나엘에게만 말씀을 거셨을까...
시몬 베드로하고 안드레아인데
안드레아가 먼저 예수님을 알아보고
형 시몬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먼저 왔던 안드레아 한테는 아무것도 안해주시는 반면
시몬에게는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비록 안드레아가 베드로보다 먼저 예수님을 만났지만
예수님께서는 안드레아의 이름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안드레아의 이름도 뭐 거창한 것으로 바꿔줬을텐데 말입니다.
“예수님, 왜 제 이름은 안 바꿔주십니까?”나
“예수님, 왜 저한테는 말씀을 안 걸어주십니까? 너무 불공평합니다.
제가 먼저 예수님께 왔습니다. 왜 시몬에게는 이름을 지어주시고 나타나엘에게는 의미심장한 말씀도 해 주시면서 나한테는 안해주십니까?
나도 이름지어주시든가...뭔가 의미심장한 말씀같은 걸 해 주십시오.“
라고 했을법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질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천사들에 비해 늘 뒤지는 바로 우리 사람들이지요.
천사들 보다 못하게 만들어졌고
케루빔인가 세라핌인가 하는 천사들은 하느님 곁을 날아다니는데
우리들은 하느님 구경한번 못하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천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신게 아니라
늘 뒤처지는 우리들을 위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이지요.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먼저 보다는 나중에게 더 관심을 가지시고
무언가를 더 해 주시는 듯 합니다.
물론 우리들이 못 따라가서 그런거지
안드레아나 필립보나 대천사들이 나쁘다는거나
그렇게 먼저 예수님을 보면 안된다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첫째가 되기를 좋아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둘째가 되고자 한다면,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무언가를 해 주실 겁니다.
시몬은 둘째였고,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에게 반석이 되는 문제를 제시하셨고
나타나엘도 둘째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하느님의 집을 열어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천사들 보다는 못하게 만드셨지만 영광과 존귀의 관을 우리 사람들에게 씌워주셨습니다.
한번쯤은 느긋하게 둘째가 되어보심은 어떨런지요..
-강영구신부-
오늘은 대천사(大天使)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천사(天使)를 라틴어로 angelus, 희랍말로 앙겔로스라고 하지요.
천사(天使)라는 한자말은 angelus의 정확한 번역입니다.
하늘의 소식을 전하는 사자(使者)라는 뜻입니다.
성경에 그 이름이 명시된 대천사들은 모두 ‘엘’자 돌림의 이름을 지니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엘’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미카엘(묵시 12,7-9)은 ‘누가 하느님 같은가’, 가브리엘(다니엘 9,21-23. 루가1,13.30-31)은 ‘하느님의 권세’, 라파엘(토비트 5,4)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치유’라는 뜻입니다.
천사(天使)는 하늘과 사람 사이를 오르내리면서 하늘의 뜻(天命)을 전달합니다.
그러나 천사를 만날 수 있고 그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려는 열린 가슴을 지닌 사람들이 천사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나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은 천사가 귀에 대고 크게 소리쳐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자기를 비워 가난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천사의 손길을 감지하고, 천사의 이끄심에 따릅니다.
그러나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사람은 천사가 등 떠밀어도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천사(天使)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당신 곁에 있습니다.
천사의 소리를 듣고 그들의 손길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오늘도 천사들과 함께 하는 행복한 날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우리도 이런 경험을 많이 하였을 것이다. 어느 낮선 곳에 갔을 때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다가 와서 인사를 하거나 반갑게 맞아준 경우 말이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나에게 나가와서 아! 누구시군요, 나는 평소에 선생님을 존경했습니다. 제가 뭐 도와드릴 일이 없나요. 아무튼 누군가가 나를 알아준다는 것은 무척이나 기분 좋은 일이다.
나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몇 가지 질문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나타나엘을 보시고 금방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말씀하셨다면 과연 예수님이 아시고 계신 나는 어떤 사람일까? 예수님이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단 한번이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누군가가 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했을 때 반갑고 기분이 매우 좋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또 반대로 두렵고 떨리고 어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숨고 싶은 심정일 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나 말고는 아무도 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무척 당황스러운 일일 것이다. 내 어두운 과거가 다 드러날까 봐 두렵고, 나만이 고이 간직해왔던 비밀이 탄로 날까 봐 두려울 것이다. 우리는 그럴 때 나도 모르게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라고 당황해하며 질문할 것이다.
나는 나에 대해서 정말 얼마나 아는가? 내가 알고 있다고 하는 그것이 정말 나인가? 언젠가 텔레비젼에서 만덕 스님이 일년간 만행을 하고 나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다른 사람도 모르는데 내가 나를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라는 말이었다. 만행은 불교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앉거나 서거나 매양 나를 아옵시고, 멀리서도 내 생각을 꿰뚫으시나이다.
걸을 제도 누울 제도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위를 익히 보시나이다.
말소리 내 혀 끝에 채 오르기 전에, 주는 벌써 모든 것을 알고 계시나이다.
알으심이 너무나 놀랍고도 아득하와, 내 힘이 미치지 못하나이다.
당신의 얼을 떠나 어디로 가오리까, 당신 얼굴 피해 갈곳 어디오리까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주는 계시옵고, 지옥으로 내려가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새벽의 날개를 이 몸이 친다 하여도, 저 바다의 먼 끝에 산다 하여도
거기에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몸을 잡아 주시리다.
당신은 오장육부 만들어 주시고, 어미의 복중에 나를 엮어 내셨으니
묘하게도 만들어진 이 몸이옵기, 하신 일들 묘하옵기, 당신 찬미하오니
당신은 내 영혼도 완전히 아시나이다.
은밀한 속에서 내가 지음 받았을 제, 깊숙한 땅 속에서 내가 엮어졌을 제,
당신은 내 됨됨이를 알고 계셨나이다. (시편 1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