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만 환상곡 다장조 Op.17 Fantasia in C major Op.17
Robert Alexander Schumann 슈만(1810-1856)
R.A.Schumann/Fantasia in C major Op.17
이 곡은 슈만의 작품 중 가장 우수한 작품의 하나이다. 또한 가장 크고 힘찬 대곡으로서 구성과 악상도 웅대하여 정열에 차 있다. 이 작품이 작곡된 동기는 리스트가 본에 베토벤의 기념비를 건립할 계 획을 세웠을 때 그 자금을 모집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전해지 고 있다.
이 작품이 쓰여진 동기는 리스트가 본에 베토벤의 기념비를 건립할 계획을 세웠을 때 그 자금을 모집하는데 헙력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었는데 평소에 베토벤을 숭배하고 있던 슈만이었으므로 쾌히 곡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베토벤의 소나타를 닮은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의 대소나타>를 썼는데 그의 피아노곡 중 가장 커다란 구성과 정열적인 악상에 넘친악장으로 힘찬 통일감을 가지고 있는 이 곡은 나중에 <환상곡>으로 개정하여 리스트에게 헌정하였다.
베토벤의 죽음은 단순히 한 작곡가의 죽음이라는 의미를 넘어 그 뒤를 따르는 음악사조와 작곡가들에게 중대한 변화를 요구하게 했다. 베토벤말기부터 싹이 튼 낭만주의적 형태의 음악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곡에서도 보듯이 베토벤의 낭만적 경향은 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는데, 특히 슈만은 그의 독일적 낭만주의에 많은 자극을 받고 후에는 '음악신보'를 통해 독일 낭만주의를 선도했던 것이다.
베토벤, 슈베르트, 베버 등의 작곡가가 세상을 떠난 후 침체되어있는 독일음악의 전통을 되살리고 보수적이며, 속물적인 기존의 음악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낭만주의를 고무시키기 위해서였는데 쇼팽, 브람스 등의 작곡가들이 이 '음악신보'를 통해 소개되었음은 이미 알려져 있다.
슈만이 음악을 평가했던 기준은 19세기 미학이 요구하는 사항, 즉 독창성, 개인적인 표현방식 또는 슈만의 표현을 빌자면 '판타지 (fantasy)', '독창(Character)', '시적인 것(poetic)'에 있었다. 그러면서도 슈만은 합리적이고 분석가능한 요소, 다시 말해서 명료한 형식과 정확한 화상에 대해 집요한 검토를 잊지않고 있다. 이러한 그의 평가 기준은 그의 플로레스탄적인 면과 오이제비우스적인 면을 보여준다 하겠다. '음악신보'를 발간하여 편집장으로서 일하는 시기, 즉 1836년에서 1838년 사이에 발표된 이 판타지는 슈만의 작품 중에서 가장 우수한 작품이다.
Schumann Fantasy CM op.17
1. Durchaus Phantasticsch Und Leidenschaftlich Vorzutragen 2. Massig, Durchaus Energisch 3. Langsam Getragen, Durchweg Leise Zu Halten
슈만이 쓴 피아노곡 가운데서도 가장 크고 가장 힘찬 대곡의 하나이며 또한 고금의 피아노 명곡의 하나로 손꼽힌다.그 구성은 크나 악상도 웅대하며 열정에 넘치고 있다.
1836년 슈만은 베토벤의 고향 본에서 베토벤 사후 10년을 기념하여 베토벤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기부금을 모금한다는 것을 듣고 그 기념비를 위한 "오블루스(Obolus)-즉 그리스의 동전"로서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의 대소나타"를 작곡했다. 이 소나타는 3개의 악장으로 되어 있으며 각 악장은 제각기 "폐허", "개선문", "별의 관"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슈만은 이것으로 자신이 깊이 존경하고 있던 베토벤의 기념비 건립에 도움을 주고자 했다. 그래서 베토벤풍의 소나타 형식을 취한 것이다. 1st.mv. Durchaus Phantasticsch Und Leidenschaftlich Vorzutragen
Maurizio Pollini
클라라에 대한 고백적인 영탄을 베토벤풍의 소나타 형식을 빌어 전개 시키려고 했으나 주제의 시작도,전개도 지극히 슈만풍이며 낭만적이다.
2nd..mv. Massig, Durchaus Energisch
슈만이 처음에 구상했던 "개선문"이라는 부제가 그대로 어울리는 호방한 악장인데 연주의 기교가 필요하다. 에너지에 넘친 화음이 중심 테마를 이룬다.
3rd.mv. Langsam Getragen, Durchweg Leise Zu Halten
느릿한 템포로 어디까지나 정감을 위주로 하는 부드러운 악장. 전통적인 구성에서 보면 아쉬울 정도로 평안한 종결법이지만 그 결말이 남기는 여운은 확실한 슈만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Robert Alexander Schumann 슈만
슈만은 1810년에 독일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서적 출판을 하는 한편 문필에도 종사하는 문학가였다. 그는 음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모친은 그것을 불안해 여겨서 라이프찌히 대학에 보내서 법률을 공부시키지만, 그는 이 대학의 비크박사에게 피아노를 배우며 한층 음악에 힘썼다. 결국 어머니도 음악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만, 음악에의 열정이 지나쳐서 슈만은 그만 손가락을 다치고 만다. 그래서 연주가로서의 희망을 잃어버린 슈만은 작곡과 지휘, 평론 등에 길을 선택했는데, 그것이 그의 이름을 드높게 만들었다. 비크 박사와의 관계로 슈만은 그의 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지지만, 비크 박사는 두 사람의 연예를 반대한다.
하지만 결국 그 사랑은 승리를 거두어서 맺어지게 된다. 결혼문제로 오래 동안 비크 박사와의 다툼에 심신이 피로해진 슈만은 정신 착란증을 일으켜 라인강에 몸을 던지기도 한다. 1856년 7월 29일,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아내 클라라의 팔에 안겨 편안히 생애를 마쳤다. 교항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 많은 가곡이 있으며, 음악 평론집 "음악과 음악가"가 있다.
슈만은 피아노 독주곡에서는 수많은 걸작을 썼으나, 피아노 협주곡은 이 한 곡을 완성했을 뿐이다.
20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하여 30세가 되기까지는 피아노 독주곡만을 작곡했으며, 1840년에는 가곡을, 이듬해인 1841년에는 관현악곡을 중심으로 작곡했다. 이러한 변화는 클라라와의 결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 협주곡의 최대의 특징은 제1악장의 제1주제가 제2악장과 제3악장에서도 변형되어 활용되는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멘델스존에서도 찾아 볼 수 있지만 슈만에 의해서 다시 명확하게 된 것이다. 또한 피아노만을 중요하게 다른 것이 아니라 관현악과의 일체성 속에 피아노의 아름다움이 발휘된 작품이다. 낭만적인 향기가 감도는 이 곡은 피아노 협주곡 가운데서도 명곡으로 꼽힌다.
동일한 악기편성에 의한 모차르트 K.581(수타틀러 5중주)과 쌍벽을이루는 걸작으로서, 이 두 작품은 또한 클라리넷을 쓴 실내악곡 중에서 가장 빼어난 명작들이다. 이후 브람스와 뮐펠트는 함께 자주 연주회를 하게 되었으며, 뮐펠트는 넓은 지역을 다니며 브람스가 그에게작곡해 준 작품들을 연주하였다.
슈만은 24세인 1834년 무리한 연습 탓인지 오른손 중지와 약지에 마비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연주자로서의 희망을 서서히 접고 작곡, 지휘, 평론의 길을 모색해야만 했다. 전화위복이라고 할까 슈만의 명성은 이 쪽에서 빛을 보았다. 음악 비평가로서는 손색이 없었던 그는 쇼팽과 브람스의 음악을 세상에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이었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보급하는 데에도 힘을 쓰고 있었다. 그가 편집하고 있는 음악신보(Neue Zeitschrife fur Musik)는 거침없이 비판의 소리를 낼 수 있는 매체 역할을 하였다.
1838년 그는 빈의 슈베르트 묘지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에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의 집을 찾아갔다. 그 때 형은 동생이 남긴 미발표 작품, 교향곡 위인(Symphony No. 9 "The Great" D. 944 in C Major)의 초고를 슈만에게 주었다. 그리하여 이 아름다운 작품은 슈베르트 서거 10년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
슈만은 집중적이고 체계적인 창작 활동을 하였다. 40년은 가곡의 해로 그의 창작 활동이 극점을 이루는 시기였으며, 독일 낭만파 가곡의 대표적 작품들을 양산한 해이다. 이해의 첫 가곡집 '리더크라이스'도 하이네의 시로 작곡한 것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하이네의 시집 '노래의 책'의 시에 곡을 붙인 가곡집 '시인의 사랑'이다. 슈만이 18세 때 하이네를 만나 깊은 감명을 받은 후 하이네의 시로 많은 가곡을 썼다. 다음해인 41년은 교향곡의 해, 42년은 실내악의 해, 43년은 오라토리오의 해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이다.
슈만과 하이네의 인연은 지금도 뒤셀도로프에 남아있다. 하이네의 고향이며, 슈만 부부가 라이프치히와 드레스텐을 거쳐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다. 슈만이 살던 빌커슈트라세 15번지 노란 3층집 벽에는 '슈만과 클라라가 1852년 9월 1일 부터 1854년 3월 4일 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는 기념판이 붙어있다. 슈만의 집 길 건너에 하이네 연구소가 있다.
슈만의 집과 같은 길가인 빌커슈트라세 4번지에 슈만 협회가 있다. 슈만 협회장의 말을 빌리자면 슈만이 뒤셀도르프에서 시립음악단장을 역임하면서 말년의 창작생활을 하던 곳이기 때문에 이곳을 택했다고 한다. 슈만의 단추와 지팡이, 클라라의 양산까지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슈만을 추모하는 것만이 주임무가 아니라, 그의 이곳생활을 병마와 관련시켜서만 생각하는 잘못을 해명하고, 아직까지도 오류가 발견되는 슈만의 악보를 총 정리해서 원작대로의 전곡집을 출판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고 한다.
슈만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것은 1844년이다. 클라라와 함께 러시아로 연주 여행을 갔을 때, 현기증과 불안증이 심해져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귀국 후에도 독살의 불안, 금속성의 공포에 시달렸다. 거기에 청력 장애까지 나타났다. 1849년에는 건강이 많이 호전되어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의 장면들을 솔로, 합창, 오케스트라를 위해 30곡 정도 작곡하였다.
1850년 뒤셀도르프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초빙되었으나 단원과의 의사소통이 힘들고 지병인 류마티즘과 우울증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다. 환청까지 들리기 시작하여 1853년 가을 지휘자에서 해임되고, 10월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른다.
이제 클라라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그녀의 어머니는 한때 촉망 받던 소프라노였고 남편 비크의 제자였다. 클라라는 태어나기 전부터 위대한 음악가가 될 신동을 낳아 기르겠다는 부모들의 꿈의 대상이었다.
Goethe는 클라라를 여섯 명의 소년 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는 소녀(The girl has more power than six boys.)라고 극찬을 할 정도의 연주자였다.
슈만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클라라와 함께 연주 여행을 할 때면 클라라의 음악성에만 청중들은 갈채를 보냈다. 워낙 섬세하고 민감한 슈만으로서는 감당하기 괴로웠다. 아내에게서 받는 열등감도 그의 정서 불안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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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