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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일 토요일 수호천사 기념일 천사들의 본질적 소명인 하느님 찬양은 9월 29일 대천사 축일을 통하여 드러납니다. 천사들의 둘째 기능으로서, 사람의 친구이고 보호자이며 변호인으로 활동하는 천사를 찬양하는 일은, 수호천사 기념일을 통하여 경축합니다. 교회는 각 개인도 사는 동안 늘 수호천사의 보호를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호천사들의 존재를 암시하신 적이 있습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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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For I say to you that their angels in heaven
말씀의 초대 ☆☆☆ 오늘의 묵상 ☆☆☆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천주여, 하늘로부터 천사들을 보내 주시어, 이 집에 사는 모든 이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소서.” 피난 교우들이 즐겨 바쳤던 이른바 ‘천사 기도문’입니다. 가끔 ‘구교우’ 어르신들이 이 기도문을 외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 무시당하면 반발심이 생깁니다. 얕잡는 말을 하는데 가만있을 사람은 없습니다. 업신여김을 당하면 누구라도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깔보는 말을 예사로 합니다. 무시하는 행동을 쉽게 합니다. 왜 그럴까요? ☆☆☆ “돌아보니 발자국, 자국마다 모두 하느님의 은총이었네.” 어느 시인이 고백한 시의 한 구절입니다. 우리가 어려운 때를 어떻게 헤쳐 나왔는지를 돌이켜 보면, 신기하게도 주변의 도움을 받게 된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우리 삶 안에서 천사들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수호천사 역할을 하게 된 때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시는 데 여러 가지 방법과 존재들을 이용하실 수 있고, 또 이용하신다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를 언제나 도와주시는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 청명한 어느 가을날이었습니다. 휴가를 맞아 모처럼 친구들과 기차 여행을 떠났습니다. 달리는 기차 안에는 신문을 보는 사람, 선잠이 든 사람, 요기를 하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습니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수호천사는 자신이 맡은 사람들을 악마에게서 보호하고 죄지을 기회에서 안전하게 지켜 주기도 합니다. 또한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게 도와주고, 덕행을 더욱 잘 실천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며, 좋은 생각과 거룩한 염원을 갖게 해 줍니다. 특히 죽음의 순간에 우리와 함께합니다. “언제나 저를 지켜 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소서. 아멘.”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
(마태 18,1-5.10)
always look upon the face of my heavenly Father."
주님께서는, 길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백성에게,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고 하신다. 천사들은 주님의 일꾼들이므로, 주님의 명령을 차질 없이 수행할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를 당부하신다. 천사들이 지켜보고 있고, 하느님의 얼굴을 늘 뵐 수 있으며, 이들이 사람들 하나하나를 보호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복음).
오늘은 수호천사를 공경하는 축일입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사람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천사입니다. 수호천사는 사람이 가는 길마다 지켜 주고, 사람의 시중을 들어 주며, 사람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달해 줍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에 놓일 때마다 수호천사의 도움을 구합니다. 수호천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도록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일러 줍니다. 예로부터 신자들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하늘로부터 천사들을 보내 주시어, 이 집에 사는 모든 이를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소서.”라는 기도를 바쳐 왔습니다. 그만큼 수호천사는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 우리가 혹시라도 악마의 유혹에 걸려 넘어질 때, 우리 곁에서 우리를 붙잡아 일으켜, 다시 주님을 따라갈 수 있게 해 주는 고마운 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고, 당신을 받아들이며, 특히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작은 이들을 돌보고 있는 천사들이 하늘에서 그를 지켜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섬기면서 사랑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사람의 오른쪽 어깨에는 ‘수호천사’가 있고 왼쪽 어깨에는 ‘사탄’이 있다는 말씀을 종종 하셨습니다. 늘 흘려들었던 그 말을 가끔씩 기억하곤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 나이 들면서 말씀을 다시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든 ‘좋은 영’이 있고 ‘악한 영’도 함께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되어야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하십니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이 어린이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다만 ‘어린이의 마음’으로는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어린이가 부모를 믿고 의지하듯 주님을 믿고 따르겠다는 마음입니다.
우리 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수호천사가 있습니다. 그와 함께 있는 천사를 기억한다면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천사의 모습으로 다가가면 그의 ‘수호천사’가 도와줍니다. 선한 영께서 축복으로 감싸 주시는 것이지요.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한 탓입니다. 당하는 사람의 입장을 좀 더 생각한다면 쉽게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보고 있다고 하십니다. 하찮게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그를 보호하는 수호천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남을 무시하면 언젠가 나도 무시당합니다. 남을 업신여기면 언젠가 나도 업신여김을 당합니다. 늘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의 말과 행동을 수호천사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무시하는 말보다는 격려하는 말이 더 쉽게 나오도록 살아야 합니다.
“칭찬 한마디가 인생을 좌우한다.”고 했습니다. 기쁨을 주는 말과 행동은 서로를 천사로 만듭니다. 불만을 갖고 바라보기에 무시하는 감정에 휩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한다면 업신여기는 말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남자가 주위 사람들을 개의치 않는 큰 목소리로 떠들고 있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더 높아져만 갔습니다. “저 멀리 높은 하늘이 있고, 들판은 온통 누런색이야. 한가운데에는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도 있네. …… 아, 이젠 산이다. 아래에서부터 단풍이 들고 있어. 노란색, 붉은색……. 꼭대기에는 큰 바위도 있네.” 간간이 여자의 나지막한 소리도 들려왔습니다. “그러면 코스모스도 피었겠네. 많이 피었나요?”
처음에는 단순히 가을 풍경에 취한 사람의 대화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큰 목소리에다 자꾸만 반복되는 이야기가 귀에 거슬렸습니다. 주위의 승객들도 모두 그러한 낌새였습니다. 결국 승객 하나가 참다못해 일어나서는 소리 나는 쪽을 향하였습니다. 좀 조용히 하자고 말할 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승객은 이내 흠칫 놀라며 발길을 멈추었습니다.
알고 보니, 큰 목소리의 주인공은 시각 장애인의 남편이었습니다. 한 손으로는 부인의 손을 꼭 쥐고, 다른 손으로는 창밖의 풍경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승객은 그 자리에 서서 두 사람을 말없이 쳐다보았습니다. 부인이 볼 수 없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체험할 수 있도록 온몸으로 설명하고 있는 천사의 모습을 보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보호자요 도우미, 하느님의 선물, 천사 - 이요한 신부-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세상을 창조하시기에 앞서 영적 존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들을 우리는 천사라고 부릅니다. 천사들은 하느님의 여러가지 사업에 봉사하기 위해서 창조되었습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역할이 바로 우리를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수호천사다! -김찬선신부- 오늘은 수호천사 축일입니다.
수호천사 -전삼용신부- 제가 보좌 신부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한 중년의 자매님이 황급히 상담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이유인 즉, 아들이 귀신을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군대에 가서 자대에 배치 받았는데 한 명의 군인이 자신에게만 보인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너무 놀라서 군의관과 상담도 해 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래서 중대장은 탈영만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하며 살라고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매일 전화를 하는데 어머니도 그것이 힘든 것 같아 보였습니다. 마침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그 자매님께 전화가 왔습니다. 아들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 전화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아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은 즉, 그 귀신은 군복을 입고 있고 그 군복에 붙은 이름을 중대장에게 말씀드렸더니 몇 년 전에 자살한 군인의 이름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의 주도권은 바로 나에게 있습니다. 내가 문을 열지 않으면 예수님도 들어오실 수 없는 공간이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마귀까지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외로움 때문에 스스로 그런 것들에게 자신을 열어주기 때문임을 설명해 주고 혹시 그렇게 외롭거나 절망적인 상황을 겪은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군인은 사실 학생 때는 성당에서 학생회장도 했지만 지금은 그 때 만나서 사귀던 여자 친구와도 헤어져서 사실 큰 상실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청년에게, 인간에겐 아버지로서 하느님도 계시고 어머니로서 성모님도 계시며 아버지께서 인간과 영원히 함께 하도록 파견하신 예수님도 계시고, 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외롭지 않게 지켜주며 하느님나라로 이끌어 줄 수호천사를 붙여 놓았고 또 수호성인도 함께 계시기 때문에 사실 신앙만 있으면 세상에서 나 혼자뿐이란 생각이 들 때도 절대 혼자가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새롭게 신앙을 지니기로 결심했다면 외로운 티를 내지 말고 그 귀신을 무시하고 필요 없음을 보여주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에 어머니께서 다시 오셨는데, 아들이 귀신에게 반응을 안 보이자 귀신이 ‘흥 재미없어!’라고 하며 내무실을 나가더니 다음부터는 전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관계 맺고 사랑해야 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사람은 홀로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혼인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도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님 안에서 하나가 되듯이 사람도 남자와 여자가 성령님 안에서 하나가 되도록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 분이셔야 완전한 것처럼 사람도 관계 안에서 완전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표는 더 구체적으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사람을 지켜 줄 수호천사를 보내주셨다는 것에 있습니다.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우리 각자에게 관계를 맺어준 수호천사들이 있다는 것은 커다란 위안을 줍니다. 우리가 천사들을 잊고 살 때가 많지 그들은 한 순간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자신들에게 천사 하나씩 함께 하도록 보내주셨습니다. 그 분은 천사가 없어도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시지만 특별히 더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우리를 사랑하는 천사들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 천사들은 우리를 너무 사랑해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하느님께 그 모든 것을 잘 해결해주시도록 청원하기도 합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그 천사들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전구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성모님 이외에도 우리를 항상 사랑해주는 수호천사가 함께 있으니 우리는 외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은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하느님의 구체적인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외롭고 절망적인 사람은 결국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게 될 정도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어서 주위에 외로워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선은 우리들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수호천사의 역할을 해 주어야합니다. 가장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이 사실은 가장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신창원도 학창 시절에 누가 칭찬 한 마디만 해 주었어도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혼자라고 느꼈기 때문에 막나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남들이 다가가기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갈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 주위의 어떤 사람이 외로워한다면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던 나에게도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수호천사를 붙여주셨듯이 우리도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눈에 보이는 수호천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합니다. 오늘 특별히 주님의 말씀을 전달해 주고 또 그 분께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는 수호천사가 항상 옆에 있음을 고맙게 여기고 수호천사와 더 친해지는 하루가 되도록 노력해 봅시다.
새벽을 열며 이번 주일에 저를 당황스럽게 하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성당 옆의 아파트에 사시는 주민 한 분이 오셔서 성당에서 나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항의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작년 말에 부임해서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러한 항의를 받아본 적이 없어서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래도 성당에서 소리가 나가지 않는 것은 아니라서 사과를 하고 주의하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지요. 그런데 이분은 술을 많이 드신 상태에서, 다짜고짜 지금 당장 방음벽을 설치할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또한 제가 약속 시간(이 약속시간이란 9시 미사를 10시 넘어서 끝났다는 것이지요. 10시쯤 끝난다고 해서 10시 맞춰서 왔는데 10시 10분쯤 끝났다고 약속을 어겼다고 하네요)을 어겼다는 억지만을 부리는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수호 천사 -이수철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바로 수호 천사 신심의 근거가 되는 구절입니다. 수호 천사라는 말마디가 참
천사할머니 -김경숙 수녀- 어린아이는 욕심이 없고 걱정도 없으며 꾸밈이 없고 겸손하다. 과거에 집착하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표현한다. 허리를 좀 더 굽혀보게 -양승국신부- 오늘날 우리 청소년 교육 현실 진단과 쇄신을 위한 심포지엄에 다녀왔습니다. 총체적 교육의 위기 상황 앞에 돌파구는 없겠는가, 머리를 맞대었습니다. 가장 큰 피해자인 우리 청소년들의 숨통을 트이게 만들어줄 대안은 없겠는가,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대안으로 제시된 시도들 가운데 생태교육이 제 눈을 확 끌었습니다. 선구자적 안목을 지니신 교장 신부님께서는 최근 생태영성을 바탕으로 작은 대안학교 하나를 설립하셨습니다. 자연결핍장애로부터 아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계십니다. 아이들은 편안한 환경에서 잘 놀고 잘 먹어야 한다는 신부님의 말씀에 크게 공감이 갔습니다. 밤이 깊어가면서 점점 커져만 가는 계곡물소리, 우수수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의 별들, 때맞춰 날아오르는 무수한 반딧불이들의 비행... 세상이 멈춰진 것 같은 조용한 시골학교, 부럽지 않으십니까? 저 역시 요즘 시골생활에 점점 맛을 들여가고 있습니다. ‘땅에는 천국이 가득하다’는 누군가의 말씀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고, 그 대지 위에 땀 흘리는 것은 우리 자신을 원천에 도달하게 만드는 소중한 경험입니다. 농사(農事)란 단어의 첫 글자 농(農)자는 곡(曲:노래하다)자와 진(辰:별)가 합성되어 있습니다. 결국 농부란 ‘별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흙을 만지면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땅과 더불어 우리의 영혼은 ‘내면의 달빛’을 여행합니다. 흙과 더불어 지내면서 크게 배울 수 있는 교훈은 기다림이요, 경청이요, 순종입니다. 흙과 함께 살아가면서 겸손의 덕을 더욱 깨우칩니다. 땅과 더불어 지내는 사람들은 혹한이 다가와도 절대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한 겨울에도 땅속에서 아늑하게 잠자고 있을 씨앗의 희망을 생각합니다. 살을 에는 북풍한설에도 풍성한 결실의 장면을 꿈꿉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갖추어야할 첫 번째 조건으로 회개를 제시합니다. 회개는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은 상태에서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어깨에 힘을 빼지 않고서는 회개가 힘겹기만 합니다. 올라갈 때 까지 올라간 사람, 기고만장해있는 사람에게 회개는 요원합니다. 회개는 자신을 낮추어야 가능합니다. 어린이처럼 되어야 가능합니다. 단순해져야, 순수해져야, 눈빛이 맑아져야 가능합니다. 빨갛게 잘 익은 고추를 딸 때였습니다. 건성건성 따면서 밭고랑을 지나가는 한 형제의 바구니를 빈 바구니를 보며 제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후딱후딱 지나가지 말고 자세를 한번 낮춰보게. 허리를 굽히면 더 많은 빨간 고추가 보일 것일세.” 자세를 낮추고 바라보니 얼마나 많은 녀석들이 거기 숨죽이고 숨어있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허리를 굽히면 굽힐수록 세상만사 안에 깃들어계신 하느님의 오묘한 손길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작아지면 작아질수록 하느님께서는 더 가뿐하게, 더 손쉽게 우리를 안아주실 수 있습니다.
복음적 어린이 -권지호 신부 - 자동차를 타다보면, 그 차주인이 어떤 종교를 믿는지 대강 알수 있습니다. 운전대 앞에 염주같은 것이 있으면, 불교신자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토폴 또는 작은 성모상이 있다면, 가톨릭신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성물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인격적인 분이 우리를 위험에서 보호해 주고 있습니다. 바로 수호천사입니다. 성경을 보면, 천사는 순수 영적 존재입니다. 인간처럼 지력과 의지력, 그리고 자유가 있는 인격체이지만 육체가 없습니다. 이런 천사는 흔히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묘사됩니다. 하느님의 사자로서 특별한 사명을 띄고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특별한 사명을 띄고, 특별한 경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항상 같이 계시는 천사가 계십니다. 바로 수호천사입니다. 오늘 10월 2일은 특별히 수호천사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 전승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우리인간을 이 세상에 태어나시게 할 때, 우리 각자에게 수호천사 한분씩을 붙혀 주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수호천사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가 맡은 사람을 악에서 보호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런 수호천사 기념일에 들려오는 주님의 복음말씀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먼저 주님의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 주님께 질문을 합니다 :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복음적 어린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복음적 어린이가 바로 그와 같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살아가는 신앙인입니다. 복음적 어린이의 두번째 특징은 하느님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모든 자녀는 부모를 닮아갑니다. 이점은 생물학적으로 보아 당연합니다. 부모의 유전인자를 물려받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리적으로도 닮아갑니다. 부모와 끊임없이 감정교류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적 어린이도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은 어떤 분입니까? 요한 1서 4장을 보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합니다. 새벽을 열며 저는 미사가 끝난 뒤에 성지 설명을 합니다. 한 3~40분 정도 설명을 하는데, 저에게는 집중력을 무척이나 필요로 하는 시간이지요. 왜냐하면 미사가 끝나서인지 사람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하고, 시끄럽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많거든요. 따라서 집중을 하지 않으면 다른 말을 해서 꼬일 수도 있으니까 최대한 집중을 하기 위한 노력을 합니다. 빠다킹신부 작은 아기, 의탁, 큰 사람 -이성우-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서 우리는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길 잃은 강아지 -홍선미- 얼마 전 산책하다가 데려온 길 잃은 강아지가 내가 원하는 일을 해내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문제로 힘들어하고 있는 큰딸을 위로해 주는 일이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예측하지도 않고 판단하지도 않으며 오직 당신이 필요합니다 하는 표정으로 옆에 있어주기 때문일까? 그냥 서로의 존재감으로 행복해하는 강아지와 딸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도 그렇게 딸아이의 지친 맘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지만 나의 염려와 바람 때문에 쉽지 않다. 내 안에 있는 돌보지 않은 어린아이가 딸에 대한 염려와 바람을 만드나 보다.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이기양 신부-
“조신부, 왜 이렇게 살이 찐 거야? 요즘에는 자전거 안타나 보지?”
솔직히 지난 9월에는 너무나 바빴습니다. 강의도 많이 나가야 했고, 해야 할 일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운동할 시간을 낸다는 것도 힘들더군요. 운동할 시간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이번 한 달은 운동을 하지 않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하겠다고 결심했지요. 물론 한 달 동안 운동하지 않는다고 무슨 일이 있겠느냐는 안일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예상과 달리 한 달 동안 운동하지 않는 사이에 살이 많이 올랐습니다. 체중도 많이 나가게 되었고, 허리 사이즈도 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늦게나마 후회하게 되네요.
‘시간이 없어도 조금씩이라도 운동하는 건데…….’
안일한 마음가짐이 내 몸의 상태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이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즉,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면 내 마음의 상태가 망가질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치열한 당신 삶을 우리에게 전해주시지요. 딱 3년 동안의 공생활이셨지만, 얼마나 치열하게 사셨습니까? 정말로 바쁘고 정신없이 사셨고, 최고의 사랑을 전해주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의 나약함으로 인해서 우리들은 자주 안일하고 나태한 신앙생활을 지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의 상태가 망가지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부족한 인간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에게 수호천사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태어날 때부터 수호천사 한 분이 정해진다고 가르칩니다. 그리고 오늘을 수호천사 기념일로 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힘내어 살 수가 있습니다. 나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채워주시는 수호천사가 계시기 때문에 다시 힘내어서 열심히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통과 절망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포기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나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가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그래서 수호천사와 함께 이겨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긴 생각해보면 수호천사가 계속해서 지켜주고 계셨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많은 고통과 시련이 있었는데, 그 고통과 시련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시에는 도저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며 힘들어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모두 해결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수호천사가 도와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무엇을 두려워하고 또 무엇을 힘들어하십니까?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수호천사까지 보내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바로 이 역할 때문에 천사들은 큰 분열을 겪어야 했습니다. 바로 악마가 생긴 것입니다. 유한하고 부족하고 약점투성이인 인간에게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했던 엄청난 은총에 천사들 중 일부가 반대를 하게 됩니다. 우리는 그들을 악마라고 부릅니다. 이런 이유로 악마는 하느님께 반대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그것은 바로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악마다 가장 미워하는 존재는 하느님이 아니라 바로 우리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고자 하신 자유와 은총이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 항의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주신 자유와 은총을 철회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서 하느님 구원을 기다리며 하느님 선물의 위대함을 발견하기를 기다리십니다. 연약한 인간인 우리를 돕고 보호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천사를 도우미로 보내주십니다.
이 천사들은 감시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하고, 온갖 유혹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우리의 자유를 끝까지 지켜주시려는 하느님의 사랑 가득한 배려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우리와 항상 함께 있는 천사께 이야기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다고, 그동안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시고 기도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리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린다고요.
"저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저를 비추시고 지켜주시며 인도하시고 다스리소서,"
천사가 하느님 존재, 인간 존재와 같이
어떤 존재 또는 존재 상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서 역할을 하는 존재라는 것은 다 아실 것입니다.
악마와 같은 역할을 하지 않고 천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악마의 역할은 무엇이고 천사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악마의 역할이 죄와 악으로 우리를 이끄는 것이라면
천사의 역할은 그 반대일 것입니다.
죄와 악에서는 우리를 보호하고
선과 선행으로 우리를 이끄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바꿔 얘기하면
죄악에서 우리를 보호하고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역할입니다.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여 달라’고 매일 미사 때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고
그리고 이어서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시며
주님의 자비로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천사의 역할은
우선 외부의 악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외부로부터 오는
온갖 시련과 모든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의 악에서 우리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내부의 악에서 우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다름 아닌 죄악입니다.
온갖 욕망과 유혹에도 불구하고 죄에 떨어져 악에 기울지 않도록
우리를 끊임없이 안에서 지켜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외부의 악에서 우리를 보호한다는 것이
모든 시련과 위험을 아예 없애버린다는 뜻일까요?
죄에 떨어져 악에 기울지 않도록 안에서 지켜준다고 해서
우리 안의 온갖 나쁜 욕망을 아예 없애버린다는 뜻일까요?
만일 안팎의 모든 죄와 악을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천사의 역할이고
그리고 천사가 그 역할을 잘 수행했다면
나영이 사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천사의 역할이 만일 그런 것이라면
‘나도 못해먹겠다’ 하고 천사도 도망칠 것입니다.
천사의 역할은 우리가 그 천사의 역할을 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모든 사람을 다 지켜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당신 대신 우리에게 주셨다고 얘기하는데,
하느님께서는 마찬가지로
어머니라는 천사,
아버지라는 천사,
형제, 자매라는 천사,
선생님이라는 천사,
경찰관이라는 천사,
소방관이라는 천사,
의사와 간호사라는 천사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나쁜 길을 걸을 때는 질책하고
힘든 길을 걸을 때는 격려하여
자기들이 모시고 섬기는 하느님께로 함께 데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의 역할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그리고 서로
하느님께로 함께 가는 동반자요 도반이요 천사들입니다.
좋게 말을 하려고해도 술 취하신 분과의 대화는 잘 되지 않더군요. 따라서 저 역시 언성을 높이게 되었고,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졌습니다. 바로 그 순간에 언젠가 어떤 신부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미사 끝나고서 신자들과 인사하러 밖으로 나왔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는 내 멱살을 잡고 항의를 하더라. 그런데 이 사람을 말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야. 그냥 꼼짝 없이 망신을 당했지. 교우들에게 어찌나 서운하던지…….”
저 역시 이러한 상황에 놓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형제님들이 와서는 저를 막고 이분과 대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자매님들은 제게 와서 “신부님, 얼른 피하세요. 저런 사람 상대할 필요 없어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지켜주십니다.
역시 우리 본당 신자들은 달랐습니다. 그리고 우리 본당 신자들이 다 천사처럼 보이는거에요. 저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수호천사 말이지요.
오늘 우리들은 수호천사 기념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수호천사는 사람을 보호하는 임무를 맡은 천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천사는 단순히 날개가 달리고 새하얀 옷을 입고 있는 영적 존재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각자도 그 역할을 수행해 나간다면 또 하나의 수호천사가 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러한 우리가 되기를 바라면서 이것저것 계산하는 어른의 생각이 아니라,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서는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천사가 별 건가요? 나 혼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기쁘게 함께 나누려는 모든 사람, 어렵고 힘든 순간에 지켜주기 위해서 앞에 서 주는 분들이 바로 천사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곁에는 얼마나 많은 수호천사들이 있나요? 그런데 문제는 내 곁에 많은 수호천사가 있기를 바라면서 정작 나는 그 수호천사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다른 사람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수호천사가 되세요.
정겹게 느껴집니다. 예전에 써놓은 시 중에 ‘별’이란 시가 있습니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병이 된다 하지만/ 당신 향한 내 그리움은/
기도가 되고 별이 됩니다/ 당신 영혼의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어/
‘수호 천사 별’이 되어/ 언제나/ 당신을 비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이런 수호 천사 별 같은 이들이 있는지요?
과연 나는 누구의 수호 천사 역할을 하고 있는지요?
우리들 눈에 비록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이더라도 하느님 눈엔 다 똑 같이 귀한
자녀들입니다. 아무리 못난 사람도 그 어머니에겐 소중한 자식이듯 말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소홀히 대하거나 업신여길 수 있겠습니까?
수호 천사의 존재 유무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수호 천사는 바로
자비하신 하느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모든 이들
하나하나에게 미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화신과도 같은 수호 천사와 수호 성인이 나를 보호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얼마나 든든하겠는지요.
“언제나 나를 지켜주시는 수호 천사여, 인자하신 주님께서 나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나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소서. 아멘.”
우리 집에서 인기가 제일 많은 사람은 ‘천사’라는 별명을 가진 최남달 할머니시다. 할머니의 정신 연령은 다섯 살 정도인데,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할머니의 모습을 보며 모두가 즐거워한다. 요즘은 말을 배우는 중인데 상대방이 ‘소풍’ 하면 ‘가자!’ 하며 수줍은 소녀처럼 입을 가리고 호호 웃으신다. 비록 언어소통은 잘 되지 않지만 항상 웃으며 즐거워하는 할머니를 보면 우리도 덩달아 기쁘고 행복해진다.
할머니는 미사와 기도에 꼭 참석하신다. 거양성체 때 신부님이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 하시면 할머니가 큰소리로 “아멘.” 하신다. 덕분에 모두 웃음을 참느라고 애쓰며 분심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마리아구호소 가족들 모두 익숙해져서 그러려니 하고 지나간다. 할머니는 감수성도 예민해서 음악이 나오면 춤을 추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성모상 앞에서 또 거실에 모셔둔 성녀 소화 데레사 상 앞에서 두 손 모아 절하며 기도하신다.
할머니는 원내 자활작업으로 훌라후프에 자석 끼우는 일도 열심히 하신다. 나를 보면 당신이 일을 많이 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이봐, 이봐.” 하신다. 내가 웃으면서 “정말 많이 하셨네요.”라고 칭찬하면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이며 “꼬꼬, 요요. 가자!” 하신다. 돈 벌어서 통닭과 영양탕 사 먹으러 가자는 말씀이다. 지금도 구호소 가족들의 기도소리 속에 “아버지, 아멘!” 하는 최남달 할머니의 커다란 목소리가 한데 어울려 울려 퍼지고 있다.
이런 성물들은 보호받기 위해서 부착하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위험에서 보호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를 악에서 보호하시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수호천사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수호천사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시는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주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어린이처럼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대답하십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이 말씀이 뜻하는 어린이는 그냥 미성숙한 어린이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어린이의 특징이 있으면서도 성숙한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앙인을 가리켜 복음적 어린이라고 합니다.
복음적 어린이의 가장 큰 특징은 하느님께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독립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홀로 서기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부모와 같은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이는 부모에게 의지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맡기고 살기 위해서는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가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가난하지 않으면 하느님께 의지할 수 없습니다. 자신이 능력이 있고, 재산이 많으면, 다른 사람에게 기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힘을 믿고, 자신의 노력만을 믿는 사람은 복음적 어린이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적 어린이는 자신을 비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자를 바로 복음적 어린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적 어린이는 바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넓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고 용서할 줄 압니다. 온힘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도, 성모님처럼 겸손할 줄 압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사랑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복음적 어린이의 특징은 인간본성과 반대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노력만으로는 복음적 어린이가 되기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적 어린이는 끊임없이 자신이 가난하고 겸손할 수 있도록 주님께 매달리고 은총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실수가 있고, 부족한 점이 있으면 다시 시작할 줄 압니다. 이것이 겸손한 복음적 어린이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께 청하는 것은 매일 회개하여 복음적 어린이가 되어가도록 해 달라는 것입니다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우리에게 복음적 어린이가 될 수 있는 회개의 은총, 겸손의 은총을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내려주시길 청합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그때에도 성지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최대한 집중을 해서……. 그런데 어디선가 휴대전화의 벨 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지요.
‘아니, 이렇게 몰지각한 사람이 어디 있지? 휴대전화의 벨을 진동으로 맞추는 것은 기본 아닌가?’
이 사람은 벨 소리가 계속 울리는데도 전혀 조치를 취하지 않습니다.
‘도대체 누구야? 이 벨 소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런데 그 벨 소리가 상당히 낯익습니다. 맞습니다. 바로 저의 휴대전화가 주머니에서 신나게 울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얼른 한 손을 주머니에 넣어서 휴대전화 종료 버튼을 눌렀습니다. 잠시 뒤, 또 다시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합니다. 더 부끄러워졌지요. 결국 저는 순례객들에게 양의를 구해서 휴대전화를 꺼내서 전원을 껐습니다.
바로 그 순간, 저에게 전화를 했던 사람이 왜 그렇게 밉던지요? 사실 저와 평소에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제게 전화를 잘 걸지 않는 분이거든요.
설명 끝난 뒤에 무슨 일이 있냐면서 그분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랬더니만 그냥 안부 차 전화했다고 합니다. 이 말에 더욱 더 미워집니다. 별 일도 없으면서 전화를 해서 나를 망신시켰는가 라는 생각으로 그 사람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 날 저녁 성찰을 하면서 문득 이 일이 떠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제게 전화를 했던 분이 뭐가 잘못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전화한 것이 잘못일까요? 아닙니다. 그만큼 저를 걱정해주신다는 것이 왜 잘못입니까? 바로 나에게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성지 설명을 하는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것, 또한 그 벨소리를 바꾸지 않은 것……. 내가 조금만 조심했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을 그분에게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한심한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수호천사를 찬양하는 날인 것이지요. 그 수호천사는 누구일까요? 내 곁에서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면서 째려보고 있을까요? 어쩌면 내 곁에서 나에게 힘이 되어주고, 나를 지켜주시는 모든 분들이 내 수호천사가 아닐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복음에서 ‘작은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이들이 바로 나의 수호천사일 수 있으니까요.
문제는 바로 나입니다. 수호천사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눈, 오히려 나에게 해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들. 감사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얻으려는 욕심.
내 수호천사들을 떠올려 보세요. 가족, 친구, 직장 동료, 또한 내가 만나는 많은 사람들... 그들이 모두 나의 수호천사였고, 그래서 나를 철저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하자면, 이제 우리 역시 다른 이들의 수호천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수호천사가 가득한 세상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나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의지하고 의탁할 때, 아버지께서는 나를 통해 당신의 영광을 가장 크게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순간은, 내가 아버지 앞에서 가장 ‘작은 아기’가 될 때입니다.
‘작은 아기’가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아이처럼 아버지 앞에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솔직히 드러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생각과 감정과 행동에서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아버지와 나 자신 앞에서 겸손하게 드러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럴 때 성령은 가장 크게 활동하실 수 있으며 내 안에는 하느님이 가장 크게 자리 잡으시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 아버지로 가득 차게 되는 것보다 더 나를 크게 만드는 것이 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 하느님보다 더 큰 존재는 없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장 작은 아기가 되어 내 힘을 완전히 뺄 때, 내 안에 하느님께서 가장 크게 활동하시게 됩니다. 그럴 때 나는 내 삶을 최대한으로 살게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작은 아기처럼 수동적인 것은 내 삶을 가장 능동적으로 사는 것이고 가장 많이 내 삶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의탁할수록 나는 나로 온전히 살게 되고 나를 온전히, 충분히 나 자신으로 살게 합니다.
하느님 앞에서 가장 수동적인 것이 인간 앞에서는 가장 적극적인 삶이 됩니다.
하느님 앞에서 어린이가 될 때 인간 앞에서는 주체적인 어른이 됩니다.
오래전 방송되었던 연속극 주인공 몽실이가 어린 동생을 업고 있던 장면이 기억난다. 주변의 여건 때문에 나는 될 수 있으면 참아내고 웬만하면 내 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어느날 예수님께서 복음을 통해 나를 초대하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그 순간 내 안의 해결되지 않았던 바람이 ‘어린이’로 비춰졌다. 나 혼자라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겠지만 예수님과 함께였기 때문에 그 당시의 나를 이해할 수 있었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금도 계속 노력중이다.
나는 내 영혼이 만나는 최초의 인간이다. 내가 나를 받아들였기에 내 딸을 있는 그대로 위로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렇게 만화영화의 재미를 뛰어넘는 감동의 결과로 어렸을 때 착한 일을 하려고 노력했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오늘 수호천사 기념일은 선한 삶의 지향을 살아야 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원래 천사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하며, 한편으로는 사람을 지켜주고, 희망을 주는 역할을 한다고 교회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사에 대한 언급이 많아지고 우리 역시 성경과 교회 전통들을 통해서 다양한 가르침을 알고 있지만 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천사에 대한 교리는 꼭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천사는 존재한다?‘는 확인이지요. 즉 하느님께서 우리 감각의 대상인 세상과 우리의 감각을 초월하는 영의 세계도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천사의 존재를 신앙교리로 선언하였지만(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 Denz. 428, 1차 바티칸 공의회:1870년, Denz. 1783) 천사의 본질이 무엇인지, 역할이 무엇인지, 사람마다 수호천사를 가지고 있다느니, 여러 계급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등등의 학자의 주장에 대하여는 아무런 유권적 결정도 내린 일이 없습니다. 다만 교회는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천사의 이름 외에 다른 이름들을 사용하는 것을 금하였고(745년, 라테란 공의회), 삼대(三大) 천사인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과(9월 29일) 수호천사의 기념일(10월 2일)을 제정하여 천사공경을 장려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 나의 천사가 앞장서서 너희를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그들을 멸종시키겠다.?“(탈출23,20-23)
오늘 제1독서인 탈출기에 언급되어 있듯이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곳곳에서 우리는 수호천사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는 말씀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편91,11-12편에는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처럼 천사들이 사람을 지켜주는 장면이 나오고, 다니엘서에 따르면 바빌론왕 네부카드네자르는 자기가 만든 금신상에 절하지 않는 유다의 청년들을 불가마 속에 집어넣었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불가마 속에 이들 말고도 신의 모습을 한 이가 한 사람 더 있는 것을 발견하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다니3,28)하고 깜짝 놀라며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다니3,28)고 고백합니다.
이밖에도 하느님께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천사를 보내셨다는 사실은 토빗을 통해서, 또 유딧, 엘리야를 통해서도 알 수 있고, 신약성경에서도 천사가 사람들의 협력자라는 개념이 발견됩니다. 특히 마태 복음 18장 10절에 나오는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수호천사에 관한 교리를 형성시킨 중요한 원천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천사는 하느님의 메신저로 사람에게 파견되고(마태 1:20, 루가 1:!1, 사도 8:26), 꿈에 나타나고(마태 2:13), 흰옷을 입은 사람으로 나타납니다(마르 16:5). 그들은 창조된(골로 1:16) 영체이며(히브 1:14), 하느님의 군대요(마태 26:53), 그리스도를 섬기고(마태 4:11, 루가 22:43) 사도들에게 봉사하고(사도 5:19, 12:7-10), 어린이들을 보호합니다(마태 18:10). 마침내 예수님께서 천사들에게 옹위되어 심판하러 오시고(마태 16:27, 24:31), 모든 천사들을 지배하십니다(마르 13:32, 골로 1:16, 필립 2:10, 히브 1:5).
마태오 복음 18,10절을 근거로 인간을 수호하는 천사가 각 사람과 함께 동행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암시하였다고 공의회(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를 통하여 선언한 이후 천사에 관한 공경이 세계 각 국에서 있었지만 1617년 교황 클레멘스 10세가 10월 2일을 수호천사 기념일로 지정하면서 천사의 공경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의 가톨릭 교리서 역시 수호천사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사람은 일생 동안, 어린 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천사들의 보호와 그들의 전구로 도움을 받는다. ??모든 신자들의 곁에는,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 위한 보호자이며 목자인 천사가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제 336항」
이렇듯 가톨릭 교회는 성경과 교회 가르침에 따라 사람들을 보호하는 천사를 수호천사라 부르고 공경합니다. 수호천사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보호하고 죄지을 기회에서 안전하게 지켜주며, 넘어지면 일으켜주고 도와주며 좋은 생각과 선행을 실천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특히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달해 주며, 죽음의 순간에 우리와 함께 합니다.
수호 천사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크신 자비심을 다시 한 번 간절히 느끼게 됩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는 거룩한 천사를 우리의 친구요, 안내자요, 보호자로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부모를 통하여 자식을 기르고 스승을 통하여 학생을 가르치듯이 하느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수호천사 한 분을 지정해 주어 보호하게 하신 것이지요. 만일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항상 곁에 천사가 따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욱 선에 열심하고 악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악을 저지르려 할 때에 양심에 가책을 받는 것은 수호천사가 우리에게 간절히 전하고 있는 암시 탓인 것이지요.
오늘 수호천사 기념일을 지내면서 악의 세력에 기울기보다는 선한 일을 함으로써 수호천사를 기쁘게 해드리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듯 선한 삶을 사는 것이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임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
-이회진신부-
주일학교 교사 시절, 수호천사 기념일 즈음에 주일학교 담당 수녀님께서 교사 회합 중에
“마니또”를 정하자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수호천사 기념일부터 성탄 때까지 자신이 뽑은 종이에 적힌 한 사람의 수호천사가 되어
그를 마음에 담고 기도하며 말없이 도와주다가
성탄 때 “내가 바로 너의 수호천사였다.”고 고백하며
그동안의 기도와 작은 선물을 나누자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누구의 수호천사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비밀로 하고
이때부터 성탄 때까지 약 3개월 동안 동료 교사의 수호천사가 되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더 정이 가는 동료가 있었기에 그의 수호천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은 했지만
제가 뽑은 종이 위에 적힌 이름은 다른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조금 실망을 하긴 했지만 어쨌든 기도를 하며 그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 지 지켜보았죠.
그러다가 때로는 바쁜 일상 속에 잊고 살다 보니 성탄 때가 되어,
밀린 기도를 몰아치기로 하며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동안 한 가지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그를 전보다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3개월 남짓이라는 오랜(?) 시간 동안 관심을 갖고 기도하면서 알게 된 것은
어찌 보면 괴팍하게 보이고 느껴지기도 하는 상대의 행동에서 조차도
그 안에는 “그 사람의 사랑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조금은 보게 되었던 것이죠.
오늘날 현대인에게 있어 가장 무섭고 서로를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는
“무관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매 미사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성체를 “보라”고 외치고 있고,
주님은 거리마다, 사람들의 마음마다 십자가를 새기며 “보라”고 외치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신” 혹은 “자신의 관심”만을 쳐다보고 있거나,
다른 이들에게마저 자신 혹은 자신의 관심만을 쳐다보라고 강요하기도 합니다.
상처받기 쉽고 외로운 우리의 영혼은
사랑이 많이 필요한 어린이와 같은 작은 영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처럼 우리에게
“나를 받아들이듯이” 사랑이 많이 필요한 어린이와 같은 작은 영혼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
즉 올바로 성체를 모시고, 올바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작은 성탄 선물을 나누며, “내가 지난 3개월간 너의 수호천사였어.”라고 말하는 저나
“아! 너였어? 네가 내 수호천사였구나.” 하며 저를 받아들이는 동료와의 사이에는
이미 이전과는 다른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과 기준이 더 넓어졌다는 것이죠.
누군가를 더 많이 더 깊이 그리고 넓게 받아들이고 이해하기 시작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천사이자 서로의 수호천사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런 모습 가운데 우리들 사이의 “무관심”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게 되겠죠.
천사 눈과 천사의 마음을 갖고 천사처럼…
“주님, 아이의 맑은 눈을 보며 ‘천사다’하듯이, 사람들의 사랑의 마음을 보며 ‘당신이 주신 천사’를 보듯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양승국신부-
<번지점프를 하다>
요즘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가기가 팍팍한 세상,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지는 단어가 있습니다. "친구"란 단어입니다.
진정한 친구란 어떤 존재인지 다음과 같은 정의를 통해서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친구란 당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E. 하버드).
"진실로 그대의 친구라면 그대가 곤궁할 때 도와주며, 그대가 서러울 때 울어줄 것이며, 그대가 깨어있을 때 잘 수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심중의 온갖 슬픔을 그대와 함께 나눌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이 충실한 친구를 구별해주는 확실한 표지입니다."
그런데 좋아하고 사랑하고 친구가 되는 일은 한번 마음먹는다고 순식간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닌 듯 합니다. 함께 했던 오랜 시간들, 공통된 그 많은 추억들, 함께 겪은 고통들, 주고받은 마음의 상처와 불화들...그 모든 과정의 결과가 진실한 친구입니다.
더불어 진정한 친구 사이는 이해득실을 따지거나 손익계산을 위해 잔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는 사이입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그저 아무런 이유 없이 만나면 좋은 것입니다.
"번지점프를 하다"라는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입니다. 갓 국어교사가 된 주인공이 교무실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습니다. 그때 옆에 있던 동료 여교사가 "무엇이 그리 좋아 웃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냥! 아이들 노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요."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주인공은 이런 명언(名言)을 던집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는 것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라고."
참된 친구 관계는 우리의 의지만으로 인력만으로 형성될 수 없는 것인가 봅니다. 어쩔 수 없는 인연, 하느님께서 맺어준 인연 때문에 이루어지는 어쩔 수 없는 관계인 듯합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수호천사"의 의미는 어떤 면에서 "진실한 친구"란 개념과 일맥상통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소리 없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는 존재가 바로 수호천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진실한 친구, 우리의 영혼과 구원을 위한 도우미가 우리의 수호천사라고 생각합니다.
이 땅에 발을 딛고 삶으로 인한 우리의 부족함과 비참함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최악의 상황에까지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받쳐주고 있는 존재가 우리의 수호천사입니다.
우리의 오관이 무뎌져서 느끼지 못하지만 때로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반쯤 떼어 묵묵히 자기 등에 지고 가는 진정한 친구 중의 친구가 우리의 수호천사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살아야하는 삶이 영적인 삶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우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를 갖은 위험에서 지켜주며, 우리의 선익을 위해 하느님께 전구하는 우리의 친구 수호천사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어린이다운 삶
-오상선신부-
나는 어린아이처럼 되고 싶은가?
어른이 되고 싶은가?
아니면 젊음을 유지하며 그대로 있고 싶은가?
아마도 수련자들이나 젊은이들은 빨리 종신서원을 하고 어른이 되고 싶겠고
우리 종신서원 수녀님들이나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자매님들은 젊음을 유지하며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되도록 주님께로부터 촉구 받고 있다.
그럼 어떻게 되어야하는 것일까?
어린 아이다움에 대해 좀 생각해 보자.
1. 꾸밈이 없고 거짓이 없다.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 순수하다. 추함을 메꾸기 위해 화장을 할 따름이다.
나는 무엇으로 나의 추함을 메꾸려 하는가?
확대 포장하는 것이 곧 거짓이 아니겠는가?
2. 모든 것을 경이롭게 생각한다.
어린이는 머리를 굴릴 줄 모른다. 그가 만나는 모든 세상과 사람, 사물, 사건은
하나의 신비이다. 그 신비 앞에 경이로움을 느낀다.
어른이 될수록 자신의 경험세계에 비추어 판단하기 때문에 경이로움이 없어진다.
나는 나의 경험세계에 너무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가?
3. 잘 울고 잘 웃는다.
울고 웃음이 진실하다. 거짓된 울음도 만들어낸 웃음도 없다. 방긋 웃는다.
나는 잘 울고 잘 웃는가?
진실 되이 울고, 방긋 웃는가?
아픈 현실 앞에 그냥 순수하게 울고, 아름다움 앞에 방긋 웃는 나는 진정 순수하다.
4. 뒤끝이 없다. 그 때뿐이다.
케케묵은 사건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지 않는다.
대부분의 어른들, 특히 여성들은 여기서 해방되지 못한다.
왜 어제 일을 오늘에까지, 10년 전 일까지도 내 마음 속에 담아 두고 있는가?
어린아이의 유치함이 아니라 어린아이의 해맑음으로 돌아가자.
하느님나라는 이런 어린아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수호천사 -박상대신부- 1983년 3월 오스트리아 잘쯔부르그 신학대학의 페르티난트 홀뵉 교수는 ≪천사론≫이라는 저서를 출판하였다. 여기서 교수는 오늘날 가톨릭신자들의 일상(日常)에서 천사들에 대한 인식이나 의식자체가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을 두고 안타까워했다. 실제로 그렇다. 과거보다 현대에 들어 천사들에 대한 공경은커녕 언급조차 회피하고 존재마저 의심하는 경우가 많음을 본다. 이런 현상은 성전건축물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중세기부터 근대 이전에 봉헌된 유럽의 성전들에서 쉽게 볼 수 있던 천사들의 성상이나 성화들이 요즘 현대식 성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에만 의존하려는 유행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정서에도 벌써 스며든 것인가? 홀뵉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부제(副題)로 ‘천사들과 성인들의 통공’을 언급하고 있는데, 천사들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 계셨고 지금도 계시고 장차 오실 분이시다.” 하고 외치면서(묵시 4,8) 성인들과 함께 천상예배를 드리며, 지상에서도 수많은 영혼들과 함께 하여 그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며, 그들의 기도를 하느님께 올려 바치고 때로는 영혼들의 눈에 보이게 나타나기까지 한다는 확고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또한 수많은 성인들이 천사, 특히 자신들의 수호천사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공경과 사랑이 두드러졌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들과 친교를 나누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성인들은 천사의 현존에 대한 계시(啓示)된 진리를 직접 생활로 보여 준 사람들이다. 이미 1215년 제4차 라테란공의회와 1870년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천사의 현존을 교의상의 진리로 밝힌바 있듯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도 천사에 관한 진리는 교의상 최우선적인 진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처음부터 내려온 고귀한 신앙유산(Depositum fidei)임을 천명하였다. 이 신앙의 유산은 교회 스스로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성서(聖書)에 계시된 확고한 진리라는 것이다. 9월 29일 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에 언급하였듯이, 천사의 존재는 하느님의 사자(使者)로서 하느님을 섬기는 영적(靈的)인 존재들이며, 결국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꾼들이다.(마태 18,10; 히브 1,14) 신구약성서를 통틀어 볼 때 천사들은 하느님을 보필하는 천상에서의 역할 외에도 세상에 파견되어 인간을 도와주고 이끌고 지켜주는 등 하느님의 인간 세상에 대한 계획을 다양한 차원에서 수행한다. 특히 수호천사에 대한 공경과 신앙은 중세기 이후 급속히 성장하여 전례 속에 자리를 잡았고, 클레멘스 10세 교황(1670-1676)은 10월 2일을 수호천사 축일로 정하여 온 교회가 기념토록 하였다. 천사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 견해는 천사가 하느님으로부터 이성과 자유의지를 부여받아 하느님을 보좌하고 인간을 위해 수고와 도움을 주도록 창조된 순수 영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천사들의 숫자는 대략 세상에 사는 인간의 수보다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다니 7,10; 묵시 5,11) 수많은 천사들이 다 같지 않고 서로 다르며, 그 가운데 등급이 있다는 것이 통설이다.(토마스 아퀴나스) 실제로 천사들 사이에 계급이 있다는 것은 성서에 언급된 상이한 명칭들에서 드러난다. 거룹(Kerub, Kerubim; 창세 3,24; 출애 25,18-19 등 71번), 스랍(Seraf, Serafim; 이사 6,2.6), 천사(창세 19,1; 묵시 5,2 등 321번), 대천사(1데살 4,16; 유다 1,9), 권세의 천신과 능력의 천신(로마 8,38), 왕권과 주권과 권세와 세력의 천신(골로 1,16), 권세와 세력과 능력과 주권의 천신(에페 1,21), 케루빔 천신(히브 9,5) 외에도 이름으로 명명된 미카엘(다니 10,13; 10,21; 12,1; 유다 1,9; 묵시 12,7), 가브리엘(다니 8,16; 루가 1,11.19.26), 라파엘(토비 5,4; 6,5; 6,7) 등이 그것이다. 이를 근거로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디오니시오스(200-265년경)는 구품(九品)의 천사들을 3등급으로 나눈 천사계급을 상상하였다. 소개하자면 1등급에 세라핌, 케루빔, 좌품천사가 속하고 2등급에 권품천사, 능품천사, 역품천사가 3등급에 주품천사, 대천사, 천사들이 속한다는 것이다. 천사들이 부여받은 이성은 인간의 것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고도의 인지능력을 구사하며 사물의 본성을 직관하여 통찰한다. 그들의 자유의지 또한 인간의 것보다 틀림없이 뛰어난 것이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인간에서와 마찬가지로, 또는 인간에서보다 오용될 가능성이 높다. 성서에 등장하는 악마와 나쁜 영신들은 첫 인간(아담)의 경우와 같이 자신들의 자유의지를 오용하여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의 죄를 저지름으로써 타락한 천사들이다.(이사 14,12; 2베드 2,4; 제4차 라테란공의회) 스페인이 낳은 위대한 예수회 신학자 프란츠 수아레즈(1548-1617)는 하느님께서 천사들로 하여금 사람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당신과 똑같은 흠숭으로 섬기라고 했을 때 자신들의 교만함으로 이를 거부한 천사들의 무리가 사탄과 악령들이 되었다고 추론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인류를 구원해주신 것도 모자라 모든 인간에게 각자의 수호천사를 붙여주셨다. 수호천사들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꾼들이다.(히브 1,14) 천사들은 하느님의 파견명령을 절대적인 겸손과 순명으로 보필하면서, 그들이 섬겨야할 인간을 보호하고 지켜준다. 수호천사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인간들을 ① 위험과 화로부터 보호하며, ② 악마의 해로부터 지켜주며, ③ 선한 생각과 관심을 불어넣어 주며, ④ 사람을 위해 스스로 기도하고, 사람의 기도를 하느님 대전에 올려준다. 따라서 이런 수호천사와 함께 사는 어떤 사람도 세상에서 업신여김을 받아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마태 18,10) 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오늘 수호천사 축일을 맞이하여 모든 신자들은 이런 점들을 다시 한번 마음속 깊이 아로새겨야 할 것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셔서 죽기까지, 아니, 십자가에 달려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예수의 이름을 받들어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시라 찬미하며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이 어린이처럼>(마태 18,1-5) -유광수 신부- 우리의 목적은 무엇일까?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 큰 사람이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모든 것을 의존하는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어린이의 특성은 의존하는 것이요,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어른의 특성은 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독립하는 것이요, 독립하기 위해서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은 것을 더 좋은 것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른은 하늘 나라도 하느님께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소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이런 삶으로 익숙해진 어른이 어린이처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 해야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나의 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되는 것이다. 회개란 무엇인가? 회개란 지금까지 살아왔던 인생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이다. 가장 크고 높고 좋고 화려하고 힘있고 지배하고 많은 것을 지향하던 삶에서 가장 작고 나약하고 비천하고 가난하고 봉사하는 삶이 더욱 위대한 삶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크고 위대하다는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요, 눈 높이를 높은 곳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다.
회개란 나의 만족을 위해 살았던 사람에서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회개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사는 삶이다. 회개란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삶이 잘못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회개란 지금까지 내가 걸어온 길이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회개란 내가 원하는 삶이었지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개닫는 것이다. 회개란 지금 내가 이대로 살아가면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개닫는 것이다. 회개란 지금 내가 사는 방법대로 살면 결국 내가 그토록 바라는 행복한 삶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회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의와 용기가 필요하다.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창조적인 노력이다. 회개의 삶을 살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내가 무엇을 잘못 살아왔는지를 반성하고 그 내용을 파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회개의 삶을 살려면은 내가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깨우쳐 준 그 진리를 소중하게 여겨야 하고 그 진리의 빛을 놓치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빛으로 나아가는 노력을 해야한다. 그 빛은 곧 복음이다. 회개한 이는 시편작가처럼 "주님,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이오이다."(시편 118,105)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가시는 하느님(탈출 23,0-31)
-까따꿈바 묵상팀-
어떻게 하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그 방법을 제시하신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린이의 특성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모든 것에 있어서 타인에 의존하는 삶이다. 엄마가 돌봐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에 온전히 엄마에게 의탁하는 삶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은 이 어린이처럼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이요, 하느님의 돌봐주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요,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내 힘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생각과 하느님이 제시해준 어린이처럼 되는 삶의 한 중앙에 회개라는 말씀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셨다.
회개란 공동체 안에서 그 동안 내가 나를 위해 살려고 했기 때문에 나로 인해 상처받았던 다른 이들의 아픔을 위로해주고 봉사해주는 삶이다.
회개란 그 동안 나만을 위한 삶을 사느냐고 보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에 눈을 뜨는 것이요, 그 새로운 가치를 위해 나의 삶을 투신하는 것이다.
회개란 소유하려고만 했던 삶에서 가장 작은 것까지도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그 받은 선물을 나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다른 이를 위해 내놓는 삶을 사는 것이다.
회개란 나의 삶에서 그 누구도 소외되거나 차별화 당하는 일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은 사랑을 베풀어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회개란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어 주는 삶을 사는 것이다.
회개란 나 위주로 살아온 사람이었지 하느님을 위한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결국 회개란 새로운 세계를, 새로운 길, 새로운 가치관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삶이다.
어른이 어린이처럼 된다는 것은 결코 쉽게 이루어지는 작업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잘못 살아왔던 세월만큼 거슬러 올라가는 세월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이 되려고 쏟았던 정열과 시간과 희생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옛날 조선시대에는 100년이 지나도 생활 환경에 별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10년이 지나면 모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변해버립니다. 전혀 새로운 상황과 환경을 너무도 빨리 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급변하는 세대에 나의 앞길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을 것인가 하는 앞날의 두려움은 현대인들이 누구나 경험하는 무거운 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영상을 가지고 앞날의 목표를 향하여 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려면 해야 할 것도 많고 풀어야 할 것도 많고 넘어가야 할 것도 많고 정말 산더미 같이 쌓인 산적한 미래의 난제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헤쳐나가서 목표에 도달할 것입니까? 앞으로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앞이 캄캄해지기도 합니다.
언젠가 신문기사를 보니까 참 어처구니 없는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가석방을 세시간 앞두고 달아났다가 잡힌 20대의 수형자의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두려운 사회보다 차라리 교도소가 났다며 일부러 잡혀서 교도소에 계속 있겠다고 도망을 친 것입니다.
"4년 감옥생활을 한 후에 모범수로 가석방 대상이 되어서 2개월간 생활관에서 생활해 왔으나 막상 석방일을 맞고 보니 그 동안 면회 한번 오지 않았던 가족들이 나를 맞아줄 것인가? 직장은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인지? 만약 직장을 구하지 못하게 되면 등등 갖가지 두려움이 앞서 차라리 이곳이 나을 것 같아서 잠깐 일부러 도주를 했습니다." 라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아침 10시에 석방인데 6시 30분에 탈옥이라니요? 요즘 보기드문 무기수 탈옥도 생겼는데 또 참 이상한 탈옥수도 생겼습니다. 그러나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이 430년간 이집트에서 옥살이와 같은 이집트 땅 종살이를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제 탈출시켜서 새로운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도록 하셨는데 그 백성들은 광야길 가면서 앞날의 두려움 때문에 오히려 이집트로 돌아가려했던 적이 도대체 몇번이었습니까?
출소를 앞두고 사회에서 자기가 이겨 나가야할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들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고 오히려 감옥에 계속 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을 해서 일부러 탈옥하여 다시 잡힌 그 청년이나 앞날의 적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며 하느님을 원망한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뭐 다를게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그 땅을 주시리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땅에는 이미 들어와 있는 수많은 적들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땅을 목표로 전진하는 이 백성들의 마음속에는 늘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이처럼 앞길의 어떤 어려움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것을 민감하게 느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믿음의 영상을 바라보고 가는 사람들에게도 경험되어질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장애가 바로 이것 앞날의 문제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인생의 이러한 문제도 다 아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보십시요
(탈출 23,20) :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 (탈출 23,23) : "나의 천사가 앞장서서 너희를 아모리족, 히타이트족, 프리즈족, 가나안족, 히위족, 여부스족이 사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나는 그들을 멸종시키겠다." / (탈출 23,27) : "나는 나에 대한 공포를 너희보다 앞서 보내어, 너희가 쳐들어가는 모든 민족을 혼란에 빠뜨리고, 너희의 모든 원수가 등을 돌려 달아나게 하겠다." / (탈출 23,28) : "나는 또 말벌을 너희보다 앞서 보내어, 히위족과 가나안족과 히타이트족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게 하겠다."
하느님은 백성들의 가는 길에서 천사(사자)를 앞서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또 하느님의 위엄을 앞서 보내주신다고 했습니다. 말벌을 앞서 보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목표를 향하여 가는 이들의 앞날에 어려움이 많이 도사리고 있지만 하느님께서 이들에 앞서서 천사를 보내주시고 위엄을 보내주시고 말벌을 보내주시고 하셔서 이들이 걱정하는 모든 난관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이 전진하는 곳마다 가는 길이 열리고 문들이 열리고 어려운 적들이 도망가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순적히 그곳을 점령할 있도록 하느님께서 앞서서 가시면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 걱정하지 말고 믿고 전진하라는 것입니다. 내일에 대한 걱정들을 많이 하는 이 땅위의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해서 먼 앞길의 모든 난제들이 일순간에 다 없어져 버리고 그냥 우리의 길이 평탄 대로처럼 목적지까지 다 뚫려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앞서 보내신다는 것은 바로 앞서 보내신다는 것입니다. 전진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천사가 바로 앞장서서 그때 그때마다 도움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명 1,30) "너희 앞에 서서 가시는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이집트에서 하신 것과 똑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워 주실 것이다."...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가는 길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그 백성보다 한 발자국 앞에 가셔서 이스라엘의 적들을 물리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처리해 주시고 때가 닥치면 하느님께서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아직 문제가 그대로 건재하게 있지만 정작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직전에 앞서서 해결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전진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처음부터 끝까지 길을 다 뚫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가면서 계속 하느님께서 바로 앞장서셔서 길을 열어주시고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고 때가 되면 하나씩 도와주셔서 우리가 전진하는데 패배하지 않도록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책은 지금은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정작 때가 되며는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의 먼 앞은 아직도 어려움이 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행되어가면서 하느님께서는 나의 직전에 바로 앞에서 같이 행하시고 계시므로 때가 되어가고 진행되어감에 따라서 어려운 문제들은 풀어지고 목전에서 해결되어집니다. 그러므로 너무 먼 앞날을 미리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것 때문에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정말 신앙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또, 성경에 보면 바로 그 때에 도와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르 13,11) "사람들이 너희를 끌어다가 법정에 넘길 때, 무슨 말을 할까 미리 걱정하지 마라. 그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시는 대로 말하여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지금 안보인다고 지금 없다고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앞서서 보내시는 것은 성경 야러 곳에서 나타나는 하느님의 쓰시는 방법입니다. 성경 속에서 제일 파란 만장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요셉일 것입니다. 형제들에게 미움을 당하여서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버린 어쩌면 버림받은 것과 같은 요셉은 나중에 국무총리가 되어서 그의 형들이 요셉앞에 곡식을 사러 오게 되는 때가 있었습니다.
형들이 자기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전에 자기들이 미워하며 팔아버렸던 자기들의 동생 요셉인 것을 알고는 크게 두려워하자 요셉은 그 형들에게 말을 합니다. (창세 45,5)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창세 45,7)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 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시편 105,17) "한 사람을 그들 앞에 보내셨으니 종으로 팔린 요셉이다."
이와같이 하느님께서는 어떤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서 이렇게 한 인물을 앞서 보내시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광야의 길을 가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 얼마나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길을 갈 때에 그들 앞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항상 함께 하였습니다. (신명 1,33) "너희가 천막을 칠 곳을 찾아 주시려고, 또 너희가 갈 길을 보여 주시려고, 밤에는 불 속에서, 낮에는 구름 속에서 앞장서 가시는 주님을 너희는 믿지 않았다."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앞장을 서셔서 길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러한 하느님의 즐겨 쓰시는 원리를 알았습니다. (창세 24,7) "하늘의 하늘의 하느님이신 주님, 곧 나를 아버지의 집과 내 본고장에서 데려오시고, ‘내가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맹세하신 그분께서 당신 천사를 네 앞에 보내시어, 네가 그곳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올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바칠 때에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아산으로 갈 때에는 아직 수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사악을 하느님께 드려야 할 때가 되자,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수양이 그들의 눈에 보였습니다. 즉,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면... 때가 되면 하느님께서 앞서 보내셔서 천사를 보내시고 사람을 보내시고 도움을 보내셔서 결국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없이, 오로지 걱정하고 근심하고 답답해하고만 있다면 그것은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무언가 하느님께서 앞장서셔서 대책을 만드실 것을 믿기 바랍니다. 그 대신 우리는 때를 기다리며 믿음으로 기도하고 열심히 살고 있으면 우리 앞서서 목전에서 하느님의 위엄과 권능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신명 31,3) "주 너희 하느님께서 친히 너희 앞에 서서 건너가시고, 저 모든 민족들을 너희 앞에서 멸망시키시어, 너희가 그들을 쫓아내게 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여호수아가 너희 앞에 서서 건너갈 것이다.", (신명 31,5) "이렇게 주님께서 그들을 너희에게 넘겨주시면,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모든 계명대로 그들에게 해야 한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을 할 때에 '넘겨주신다'는 말이 참 많이 나옵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서 바로 앞서서 미리 가셔서 그들을 꽁꽁 묵어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여기 있다 내가 너희들 손에 준다 이젠 너희가 처리하라"고 넘겨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는 이 확실한 것, 성경이 보여주는 확실한 이 말씀을 의지하고 항상 기뻐하며 매사에 감사하면서, 단단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여정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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