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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
(루가 11,42-46)
Woe to you!
You are like unseen graves over
which people unknowingly walk.”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육의 행실로는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다고 경고한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육의 욕망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를 추구한다.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은 성령을 따라갈 것이기 때문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고 경건하게 살아가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불행을 경고한다. 그들은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외면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이웃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지 않고, 사랑과 의로움으로 사는 것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 가끔씩 사람들이 질문합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겠느냐?’고. 믿음의 길을 쉽게 갈 수 있는 방법은 없겠냐고 묻는 것입니다. 성당에 안 가자니 그렇고, 가자니 재미없다는 표정입니다. 어쩌다 기쁨이어야 할 믿음이 멍에가 되고 있는 것인지요? 대부분의 경우 끌려가는 신앙이기에 그렇습니다.
☆☆☆ 이스라엘의 한 역사 학자에 따르면,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약 육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오늘날의 유다교를 있게 한 장본인들입니다. 바리사이의 어원은 ‘분리하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 그들은 자신들을 분리시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첫째는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함에서, 둘째는 율법을 잘 모르는 대중으로부터 분리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성당에서 십일조를 바치는 교우들을 아직까지 본 적이 없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성당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대체로 헌금 삼십일조, 자선 헌금 삼십일조, 교무금 삼십일조 등을 합쳐서 십일조를 낸다는 말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온전하게 삼십일조를 정말로 바치는 것인지도 조금은 회의가 듭니다.
주님께서는 십일조를 내고 경건하게 살아가며, 율법을 가르치기까지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에게 책망을 하십니다. 사실 십일조를 바치는 행위 자체는 훌륭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십일조를 바치고 교리를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다른 사람에 대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의로움은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는 행위이고, 사랑은 주님의 계명을 실행하는 행위입니다.
만일 우리가 십일조는커녕 삼십일조도 제대로 바치지 않으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마저 부족하다면 주님께 어떠한 책망을 받겠는지요? 난감합니다. 신앙생활은 돈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 얼마만큼 주님께 의탁하고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간단한 변신은 기쁨으로 하는 주일 미사에 있습니다. 한 번이라도 억지로가 아니라 기다렸다는 듯이 열정으로 미사에 참여한다면 믿음의 새로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끌려가는 신앙’을 ‘앞서 가는 믿음’으로 바꾸는 것이지요. 누구라도 주일 미사를 건성으로 한다면 기쁨의 신앙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불행하여라. 십일조는 내면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다니!’ 복음 말씀은 경고입니다. 사랑의 십일조가 첨가되지 않으면 물질의 십일조도 소용없게 된다는 경고입니다.
그러니 하루 중의 몇 시간은 사랑을 위해서 떼어 놓아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주님과 가족을 위한 시간으로 남겨 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주일이면 손과 발을 절제해야 합니다. 꼭 가야 할 모임이 아니라면 참는 것이지요. 꼭 해야 할 일이라면 미사 후에 하는 것이지요. 물질의 십일조도 중요하지만 시간의 십일조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 지킬수록 그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문서이건 구전이건, 모든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키지 않는 통치자들과 마찰을 자주 일으키면서 박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율법 준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반 대중과 만나는 것까지도 꺼렸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들은 바리사이파에 속한 사람들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상당히 인정받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율법 연구에 헌신하여 정통한 이들도 나타났는데, 바로 율법 학자들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회심 전에는 바리사이파에 속한 율법 교사였습니다. 아무튼 바리사이들은 법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정작 하느님의 사랑에는 소홀함을 드러냈습니다. 사랑을 강조한 율법의 근본정신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경직성을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질책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질책을 피해 갈 수 있는지 깊이 묵상해 봅시다.
우리는 성령의 그룻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신앙인
올바른 스승 -전삼용신부- 제가 사제가 되어 처음으로 간 성당은 신자가 만 삼천 명이 넘는 성당이었습니다. 게다가 사제는 저와 본당신부님 단 둘이었습니다. 신학생 때 외국에서 공부하여 전례나 본당 실무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도 없는 상태에서 너무 큰 본당으로 왔던 것입니다. 본당에 처음 간 날 어떤 의사 신자분이 당신 병원으로 링거를 맞으러 오라는 것입니다. 건강한 제가 왜 링거를 맞느냐고 했지만 조만간 오시게 될 것이라고 하셨고 저는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러나 몇 달 지나고 너무 힘들어 그 병원으로 링거를 맞으러 갔습니다. 링거 맞으면서 쉬는 한 시간이 정말 꿀맛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에도 몇 번 링거 맞는 겸 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한 예로 성지 주일날 하루 동안 주임신부님과 둘이 고해성사를 준 숫자가 구백 명이 넘었습니다. 어떤 때는 밥은 고사하고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바쁜 날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쁘다보니 어떤 때는 좀 일찍 쉬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 교사들이 늦게까지 회합을 하는데 먼저 들어와 잔 때도 있었고 몸이 피곤하여 그렇게 살짝살짝 요령을 폈습니다. 그러다가 멜 깁슨이 나오는 한 전쟁영화를 보았습니다. 제목이 ‘We were soldiers’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미국과 베트남과의 전쟁 이야기였습니다. 때는 1965년, 미국은 하버드 석사 출신의 할 무어 중령을 비롯해 젊은 군인 395명을 베트남 아이드랑 계곡 X레이 지역에 투입합니다. 이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군은 무려 2000여명의 정규군. 험준한 정글 지형에서 벌어진 미국과 베트콩의 최초 전투에서 미국은 처참한 병력을 상실하며 가까스로 승전을 거둡니다. 이 전투를 진두지휘했던 할 무어 중령과 죠 갤러웨이 종군기자는 미국 전쟁사에서 잊혀진 72시간을 <우리는 한때 군인이었다>는 논픽션으로 집필했고 93년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을 읽은 렌달 월레스 감독이 영화화한 것입니다. 다른 것보다도 무어 중령의 역할을 맡은 멜 깁슨이 전쟁에 투입되기 전 젊은 군인들에게 설교한 내용이 저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모두를 살아서 집에 돌아오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다. 우리가 전투에 나감에 있어서 내가 땅에 발을 가장 먼저 내딛고 철수함에 있어 내가 맨 마지막으로 발을 뗄 것이며 어느 누구도 적진에 남겨놓지 않을 것이다 죽은 자건, 살아남은 자건.... 모두 함께 집에 온다. 신이시여 도와주소서!” 저는 이 말을 그냥 한 줄 알았는데 정말로 무어 중령은 적지에 가장 먼저 뛰어 내렸고 마지막에 헬기로 탈출 할 때도 자신의 남은 모든 부하들이 타는 것을 보고 마지막으로 헬기에 오릅니다. 적지에 처음으로 내리던 그 발과 마지막으로 헬기에 오를 때의 그 발이 저에겐 큰 무게로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봉사자들이 다 모였을 때에야 마지막으로 나타났고 봉사자들에게 일만 시켜놓고 먼저 살짝 빠지던 사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이렇게 꾸짖습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도 어는 정도는 짐만 지워놓고 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 했던 율법학자와 다를 바가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전에 어떤 신학생이 기도나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오락이나 영화만 보며 시간을 때우며 서품을 기다리고 있기에 “네가 그렇게 살면 나중에 서품을 받고서 어떻게 신자들에게 잘 살라고 할 수 있겠어?”하며 충고를 했습니다. 그 신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못 살아도 강론만 잘 하면 되지 않나요?” 이것이 아마도 당시 율법 교사들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모범을 보이는 것보다는 가르치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훌륭한 스승은 자신이 하는 말을 행동으로 증거 하는 사람입니다. 즉, 우리의 유일한 스승이신 그리스도는 ‘사랑’을 가르치셨고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수난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는 십자가는 당신이 3년 동안 가르치신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신 모습이고 그래서 참다운 스승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가르치는 입장에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아이들에게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고 하면서 부모인 자신들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서로 말다툼을 한 적은 없습니까? 아이들에게 공부하라고 하면서 텔레비전만 보고 있지는 않았습니까? 아이들은 주일학교에 보내면서도 정작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미사에 빠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아이들에게 거짓말이 가장 나쁜 것이라고 하면서 나는 가끔은 거짓말을 하며 살지는 않습니까? 언행일치를 이루지 못하면 참다운 스승이 될 수 없고 존경도 받을 수 없습니다. 제가 저의 교수님을 존경하는 이유는 다른 신학자들과는 달리 그 분은 가르치시는 대로 사시기 때문입니다. 옷을 주워 입을 정도로 검소하시고 남은 것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시며 사제관에 집 없는 이들을 들여놓고 함께 사십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마태 28,19)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가르치기만 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모범을 보이신 것처럼 모든 민족 앞에서 당신이 가르치신 사랑을 몸소 삶으로 보여주는 참다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이라는 뜻입니다.
지난 월요일에는 신학교 동창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식사도 함께 하고, 또 운동도 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지요. 그런데 저녁쯤 되어 동창 중의 한 명이 제게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입은 닫읍시다.
의로움
누구를 위한 행동인가? -김지영-
완덕의 길
의로움 -김귀웅신부-
율법의 준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김종엽 신부-
새벽을 열며 어제 아침은 괜히 기분이 조금 안 좋았습니다. 뭐 특별히 기분 나쁜 일이 생긴 것은 아니고요,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그냥 우울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특히 본당 일들을 생각하면서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힘에 부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성전 부지 마련도 해야 하고, 다음 달에는 사목회도 새롭게 구성해야 하고, 음악피정을 좀 더 짜임새 있게 구성해야 하고, 본당의 여러 행사들도 신경 써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곳곳에서 부탁하는 강의 준비도 해야 하고, 각종 원고도 작성해야 합니다.
세상 걱정을 잠시 덮어두세요. 빠다킹신부 진실과 겸손 -이수철 신부-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과연 참으로 행복한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배운 대로 살지 못해 죄송해요 -안성철 신부-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질책하시면서 그들의 행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이는 곧 가르치는 사람이 말만 앞세울 뿐 실천에는 소홀하다는 것을 깨우치고자 함이다.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양승국신부- <묵주기도 한번 때릴까요?> 지난 주일엔 평소보다 약간 일찍 산행을 나섰습니다. 미사를 끝내고 마당에 나와보니 선발된(지난 한 주간 열심히 산) 아이들 열 명이 벌써 봉고차에 빼곡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좋은 자리에 앉겠다고 서로 티격태격 다툰 두 명이 "짤리고" 다른 아이들로 교체되는 실랑이도 있었지만 일단 시동을 걸고 신나는 음악을 크게 틀었습니다. 단골로 다니는 산이 주로 가까운 관악산이나 이웃동네 뒷동산이었는데, 이번 주에는 좀 무리를 했습니다. 김포에서 강화방면으로 가다가 강화대교 건너기 직전에 오른 쪽에 보면 "문수산성"이란 삼림욕장이 있습니다. 바다를 낀 산성인데 주변 경관이 말로 다 표현 못할 정도로 빼어나기에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꼭 한번 가보시기를 적극 추천합니다. 입장료는 없고 얼마 전부터 주차료를 받기 시작했는데, 하루 주차비가 1,000원이며 주차요원들이 얼마나 친절하고 인사성이 밝은지 모릅니다. 한 시간 정도 올라가니 그리 힘들이지 않고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맑은 공기, 서서히 물드는 단풍, 손에 잡힐 듯한 강화도의 전경 등등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세속의 묵은 때가 다 씻기는 듯 했습니다. 아이들 역시 눈앞에 펼쳐진 절경을 내려다보며 다들 좋아했습니다. 그렇게 다들 산정에서의 성취감을 만끽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제게 "신부님, 정상에 올라왔는데, 단체로 묵주기도 한번 때려요!"라고 말했습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 사이에 묵주기도가 유행이거든요. 그 순간 제 머리 속이 갑자기 바빠지면서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럴까?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그런데 여기 정상에 사람들도 많이 있는데...좀 어색하지 않을까? 사람들이 의아한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 이 녀석들이 왠 일로 이렇게 오바들을 한다냐?"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엉겁결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애들아, 아이디어는 좋은 아이디언데... 여기 다른 등산객들도 많이 계시니 묵주기도는 나중에 돌아가는 차안에서 드리도록 하자." 저도 모르게 그 말을 던져놓고 나서 하산 길 제 발걸음이 참으로 무거워졌습니다. 왜냐하면 기회 있을 때마다 틈만 나면 아이들에게 신자들에게 제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증거하는 삶을 사십시오. 신자임을 떳떳하게 밝히며 사십시오. 기도하는 신앙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십시오. 공공장소에서 자랑스럽게 성호도 긋고 묵주기도도 열심히 바치십시오." 그렇게 외쳐놓고는 "하느님이 가까운 곳, 산꼭대기에 올라왔으니 묵주기도 한번 때리자"는 아이들을 만류했던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러워졌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혹독하게 몰아 부치십니다. "너희 율법 교사들도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다 민족 안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여러 부류의 집단 가운데 가장 순수한 혈통을 자랑하던 유다인들 가운데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6,000여명 정도의 수효를 유지하던 엘리트 가운데 엘리트들이었습니다. 한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 질책의 단골 대상이었지만 다들 정통 유다인들이었습니다. 율법에 지극히 충실했던 정예 유다교인들이었습니다. 기도생활에 하루의 많은 부분을 할애했고, 기도도 실제로 열심히 바쳤던 훌륭한 신앙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가지 치명적인 결핍요소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신앙을 삶으로 보여주지 못함"이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신앙, 열렬한 기도 생활, 하느님 공경, 이웃사랑의 실천 등은 주로 신체 윗부분(입술, 귀, 머리, 생각)만을 사용했던 지극히 비정상적인 것들이었습니다. 기도와 신앙을 가슴과 몸으로, 손과 발로 보여주지 못한 것, 그것이 그들의 가장 결정적인 흠이었습니다. 순교는 매일의 연습이다. -한 건 신부-
나는 내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이경식 -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며 (…)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강하고 엄격한 꾸지람인가! 그 말씀을 듣고 투덜거리는 율법교사에게도 화를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째서 예수님은 이리도 가혹한 말씀을 하시는가? 십일조를 내면서 열심히 사는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참 자유인의 길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화禍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 사랑만이 율법의 정신이다. -박상대신부- 예수께서는 어제 복음에서 정결예식의 참뜻을 내세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책망하시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자선과 봉사로 마음부터 정결케 할 것을 가르치셨다. 오늘 복음은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본격적인 불행선언을 담고 있다. 어제 복음을 통하여 언급하였듯이 마태오복음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을 함께 묶어 그들에 대한 7번의 불행을 선언한다.(마태 23,13-32) 불행을 선언 받는 자세한 이유를 보자: ①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는 열쇠를 가지고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가로막는다.(13절) ② 갖은 노력으로 한 사람을 개종시켜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든다.(15절) ③ 성전맹세는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나 황금맹세는 꼭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16-22절) ④ 십일조 율법은 철저하게 지키면서 정작 정의와 자비와 신의를 소홀히 한다.(23-24절) ⑤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닦지만 속에는 착취와 탐욕이 가득 차 있다.(25-26절) ⑥ 겉으로는 옳은 듯 하나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27-28절) ⑦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며놓고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한다.(29-32절) 루가복음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 셋과 율사들에 대한 불행선언 셋을 보도하고 있다. 우선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불행선언의 이유는 ① 십일조의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소홀히 한다(42절), ② 회당에서 높은 자리와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43절), ③ 사람들이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가는 무덤과 같다(44절)는 것이다. 율법학자들에게 내려지는 불행선언의 이유는 ① 남에게는 어려운 짐을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도 대지 않는다(46절), ②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면서 죽음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47-51절), ③ 지식의 열쇠를 치워버려 자신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막는다(52절)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바리사이들에 대한 세 가지 불행선언과 율사들에 대한 첫 번째 불행선언의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님 당대에 모든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율법학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통상 율사들은 바리사이들 부류에 속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이를 양심적이고 전적으로 따르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이라면 마지막 가장 사소하고 작은 것까지도 지키도록 요구하였고, 자신들도 지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다 보니 율법을 주신 하느님의 뜻과 정신은 사라지고 율법 자체가 그들의 목적이 되어버렸다. 결국 모든 인간에 대한 참다운 정의와 사랑, 즉 하느님 스스로가 율법을 떠나버리신 것이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율법은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런 빈 껍데기와 같은 율법에 신의를 건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는 율법과 사랑을 대립시키지 않으셨다. 그분은 오직 빈 껍데기 율법에 다시금 사랑과 정의를, 즉 하느님 스스로를 채워주시려 하신 것이다. 사랑만이 율법의 참 정신이며, 사랑의 실천만이 율법을 완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김찬선신부-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속한 이들은 자기 육을
그 욕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사는 사람들이므로 성령을 따라갑시다.”
제가 처음 수도원 들어 와서 난생 처음 피정을 할 때
피정 지도 신부님의 말씀이 지금도 생각이 납니다.
그릇은 그릇이로되
무엇으로 채워지느냐에 따라 천지차이가 난다는 말씀.
똥으로 채워지면 똥통이 되고
밥으로 채워지면 밥통이 되고
물로 채워지면 물통이 된다는 말씀.
똥통이 물통이 되려면 그 안에 가득 차 있는 똥을 비워내고
물로 채워야 한다는 말씀.
사람도 이런 그릇과 같아서
욕심으로 가득 찬 자신을 비워야지만
하느님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말씀.
대충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지금이사 이런 말씀 흔한 말씀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저에게는 너무나 신선하고 충격적인 말씀이어서
한 동안 저는 이 말씀만 묵상하며
제 안의 온갖 삿된 욕심을 비우려 애를 썼습니다.
같은 맥락으로 오늘 바오로 사도의 갈라티아서 말씀과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육과 성령의 대조적 관계를 얘기하고 있고
프란치스코는 육의 영과 주님의 성령을 대조적으로 얘기합니다.
우리말에서는 얼이 차기도 하고 빠지기도 하는 것으로 얘기됩니다.
그래서 얼빠진 놈이라는 말이 있기도 하고
군대에서는 빠진 얼을 차리는 기합으로 얼차려가 있습니다.
한자말은 정신을 차리기도 정신이 빠지기도 하는 것으로 표현되며
정신이 있다, 없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정신 있더라도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하다고도 얘기합니다.
정신이 빠져서도 아니 되고
정신이 나가서도 아니 되고
정신이 없어서도 아니 되지만
정신이 있어도 썩어빠진 정신으로 가득하면
그런 정신은 없느니만 못할 수 있습니다.
썩어빠진 정신,
이것이 오늘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육이요
프란치스코가 얘기하는 육의 정신 또는 육의 영일 것입니다.
육 또는 육의 영이 가득하면
우리 안의 그 못된 영은 우리로 하여금 못된 짓을 하게 합니다.
반대로 우리 안에 주님의 성령이 가득하면
세속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육의 영을 몰아내기에
불륜, 더러움, 방탕, 만취, 흥청대는 술판 대신에 절제를 하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대신에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영으로 나를 가득 채우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의지적 선택과 성령적 의지입니다.
의지적 선택은 육의 영과 주님의 성령 중에서
성령을 선택하는 최초의 의지이이고
이렇게 성령을 선택하는 최초의 의지에
성령적 의지가 은총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 성령적 의지가 성령과 함께 자기의 육을
그 육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경규봉 신부-
유대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알고 있으면서도 율법에 따라 살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받았으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기 때문에 더 큰 죄를 지은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면서도 뻔뻔스럽게 이방인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으니, 이는 곧 자신을 단죄하는 것이며,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사람의 판단은 한계가 있고 상대적이지만 하느님의 판단은 절대적이므로 심판하심이 당연하다. 이러한 하느님의 판단(심판)은 종말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아무도 이 심판에서 제외되거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에 우상숭배와 부도덕함,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교만의 죄를 지은 사람들을 보시고도 그들이 회개하시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포함한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하느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하느님의 자비와 관용과 인내하심을 업신여기고 무시했다.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소홀히 여겼다.
그들은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반대로 완고하여 회개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느님의 인자하심을 거부한다. 이처럼 완고함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으로 인하여 그들은 자기가 받을 벌을 더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이들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숨은 생각까지도 심판하실 것이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선을 행하면서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고, 세상 것에 대한 이익만을 구하여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벌을 내리실 것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그 행한 대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환란과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를 누릴 것이다. 하느님의 약속에 따른 축복과 징벌이 먼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듯이 심판도 유대인들이 먼저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편애하심이 없으시기에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심판하실 것이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법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니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함으로써 더 큰 죄를 짓는다.
그러나 하느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편애하심이 없으신 분이시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먼저 알고 당신의 법을 먼저 받은 사람들부터 먼저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의 행위뿐만 아니라 숨은 생각과 믿음까지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주님과 결함하여 꾸준히 선을 행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명예와 불멸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마태 7,1-2)라고 말씀하셨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며,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마태 7,3-5).
사실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나 주변 사람들의 죄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 그들의 죄는 나의 죄이다.
그러므로 이웃의 잘못을 판단하고 비난하기보다 그들의 죄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보는 신앙인이 되자.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감싸고 보살핌으로써 자신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신앙인이 되자. 그럼으로써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신앙인이 되자.............◆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대학원 2학년 때 방에 놀러 간 적이 있었어. 그런데 방이 너무나 지저분한거야. 그래서 내가 ‘어휴, 이게 사람이 사는 방이야? 방 청소 좀 하고 살아라.’라고 말했지. 바로 그때 나를 보면서 했던 말을 잊을 수가 없어.”
“글쎄……. 나는 네 방에 가면 미쳐 죽을 것 같아.”
그 친구의 방이 먼지 하나 없이 무척 깨끗했거든요. 그에 반해서 제 방은 솔직히 말해서 사람 살 만한 곳이 아니었지요. 청소를 하도 안 해서 먼지투성이였고, 책은 책상 위도 부족해서 방바닥까지 가득했었습니다. 그래서 깔끔하게 사는 그 친구가 보다 못해 제게 했던 말인데, 저는 ‘미쳐 죽을 것 같아.’라는 표현을 했다는 것입니다.
다행히 이 친구는 좋은 쪽으로 받아들였더군요. ‘사람들이 모두 자기와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제게 고맙다는 말을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이 말을 들으면서 반성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친구가 했던 말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생각해보세요. ‘네 방 가면 미쳐 죽을 것 같아.’라고 말하면 그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했던 말, 그러나 그 말이 상대방에게 깊은 상처를 줄 수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많은 말들을 내뱉고 있음에 한심함을 느끼게 됩니다. 즉, 마음은 열고 입은 닫아야 하는데, 거꾸로 마음은 닫고 입을 활짝 열고 있는 나였던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예수님께서 그토록 싫어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의 모습이 아닐까요?
이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보이는 것처럼 “불행하여라.”라는 선언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이렇지요. 의로움과 하느님의 사랑은 아랑곳하지 않기 때문에,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에,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기만 하고 스스로는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이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마음은 닫고 입을 활짝 여는 모습을 놓지 않는다면 어쩌면 영원히 주님으로부터 불행 선언을 들을이지 모릅니다. 따라서 이제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남의 말을 듣는 데 좀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합니다. 바로 그때 성령의 열매를 받아,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는 큰 행복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김귀웅 신부-
한자로 의(義)는 양(羊)과 나(我)를 합친 글자입니다.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을 대신해서 짐승을 제물로 바쳤는데, 바로 거기서 나를 대신하여 제물로 바쳐진 양과 같은 일을 행할 때 의로움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사실 의로운 일, 정의로운 일이라고 하면 자신의 처지,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더 많은 사람, 더 큰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의로움과 사랑은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이나 교회는 정의로운 일에 투신해야 할 당연한 소명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자리를 떠나 연약한 인간이
되시고, 그 인간이 다른 수많은 인간을 위하여 대신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데서 최고로 드러납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닮는 것이 정의라고 하겠지요.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하여 신앙을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각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희생되어 다른 사람이 평안을 얻도록 하는 것,
교회의 희생을 통하여 교회가 속한 사회가 하느님 나라를 닮도록 하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지만 스스로 희생자가 되지 못하는
개인과 교회는 불행합니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약하고 작은 사람들, 고통 받으며 사는 불쌍한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이 삶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그들에게 천국을 말하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이 때문에 성경에서는 화두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고, 또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마태 25,40)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에 따르면 교회는 당연히 약하고 작은 사람들, 고통을 안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 중심의 체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예전이나 지금이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개인의 영적 구원과 교회체제 유지는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웃 특히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라고 하십니다.
오늘날 교회는 대형화·물량화하는 추세입니다. 그러나 무릇 대형화나 물량화의 그늘에서는 약하고 작은 사람들, 불쌍한 사람들의 소외가 더욱 심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된 교회 내의 담론 구조에서는 처지가 어려운 이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또 이들에게는 교회가 대형화나 물량화하는 데 내놓을 물질이 없어 기여할 방도가 마땅치 않습니다. 결국 어렵게 살아가는 가운데 그나마 영적으로 위안을 받고 용기를 얻고자 찾아갔던 교회이지만 죄송해서라도 멀리하게 되지요. 이들 중 일부는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반겨주는 사이비 종교 집단으로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신도시처럼 아파트 밀집 지역이라면 교회가 대형화되지 않을 수도 없지요. 그러니까 대형화나 물량화할수록 교회는 스스로 더 경계하고 더 자성해야 하지 않을까요?
영혼의 구원은 기적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사람들이 하루하루 사는 일도 그 못지않은 기적입니다. 이들에게 힘겨운 짐을 지워놓고 ‘주님’을 찾는다면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하실까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고 하셨습니다.
-유해욱신부-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난 데레사 성녀는 가르멜 수도회와 영성의 개혁에 일생을 바쳤는데, 성녀의 개혁과 쇄신의 노력으로 마침내 가르멜의 고목에 새싹을 돋게 하였습니다. 성녀는 수도생활 중 수많은 편지와 책을 남겼습니다. 특히 많은 저서 중에 <완덕의 길> <영혼의 성> 등은 오늘날까지도 영성 문학의 고전으로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성녀는 여러 차례에 걸쳐 환시와 신비체험을 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영적 삶의 세계는 마치 다이아몬드와 매우 선명한 수정으로 된 성과 같으며, 그곳에는 많은 방이 있는 데 하느님과의 영적 합일에 이르는 완덕의 길을 7개의 궁방(宮房)을 거쳐 나가는 과정으로 묘사합니다.
복음을 보면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이 예수님께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사람들에게 힘겨운 짐을 지워 놓고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않습니다. 그들의 이러한 잘못된 교만한 삶의 태도가 결국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많은 성인들이 말하기를, 행복해지려면 거룩함에 이르는 길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그 반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데레사 성녀는 완덕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 길이 바로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며,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그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한자로 의(義)는 양(羊)과 나(我)를 합친 글자입니다. 옛날에 제사를 지낼 때 사람을 대신해서 짐승을 제물로 바쳤는데, 바로 거기서 나를 대신하여 제물로 바쳐진 양과 같은 일을 행할 때 의로움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사실 의로운 일, 정의로운 일이라고 하면 자신의 처지, 자신의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더 많은 사람, 더 큰 사회를 위하여 자신을 헌신하는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의로움과 사랑은 똑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이나 교회는 정의로운 일에 투신해야 할 당연한 소명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자리를 떠나 연약한 인간이 되시고, 그 인간이 다른 수많은 인간을 위하여 대신 희생 제물이 되었다는 데서 최고로 드러납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을 닮는 것이 정의라고 하겠지요.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하여 신앙을 찾는다는 것은 올바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각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희생되어 다른 사람이 평안을 얻도록 하는 것, 교회의 희생을 통하여 교회가 속한 사회가 하느님 나라를 닮도록 하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지만 스스로 희생자가 되지 못하는 개인과 교회는 불행합니다.
-서덕교신부-
어제 복음 말씀에 이어 바리사이파 사람 집의 식탁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하십니다.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지만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도 실천해야 하지 않겠느냐?’
‘너희는 회당에서 높은 자리를 즐겨 찾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한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일입니다.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훨씬 내면적인 문제로 쉽게 드러나지 않고 측량하기도 어렵습니다.
인간에게는 아주 근본적인 욕구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명예욕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구, 스타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명예욕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십분의 일을 바치고 정결례를 지키는 등 율법의 규정을 잘 지키는 일은 명예욕의 충족과 관련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구 충족을 위하여, 자기만족을 위하여 지킨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보고 사람들이 인정해주고 칭찬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내면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율법의 준수”라는 겉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행위, 그 내면에는 추한 욕구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겉과 속이 이처럼 다릅니다. 그러니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에서는 보다 더 신랄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왜 이렇게 심각한 오류에 빠졌는가? 왜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게 되었는가? 그들이 진리에 눈멀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이런 문제들을 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과 율법을 지키는 일, 곧 행위와 업적에 도취되어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욕망, 곧 착취와 사악으로 가득 차 있는 내면을 들여 다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속한 집단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그대로 수용해야 하는 입장에서 오류를 파악하기란 더욱 힘들었을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말씀대로 율법 그 자체는 영적인 것이고(로마 7,14)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주신 영적인 선물인 율법도 좋은 것이고, 그 선물에 대한 지식도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의 선물에 매달리는 한 그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시선을 돌리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들이 율법에 대한 지식에 매달리는 대신, 율법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께 눈길을 돌렸더라면 결코 진리에 눈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같은 이유로, 신학적인 지식은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에게 주시는 선물이고, 그 선물은 하느님을 지시할 뿐이지 하느님은 아닙니다. 그 지식으로 인해 교만에 빠진다면 오히려 없는 것만 못할 것이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고 필경 버려야 할 것입니다.
-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입니다. 하느님은 문자 안에 갇혀 계실 분도 아니고, 한낱 인간의 지식에 갇힐 분도 아닙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능력을 초월해 계십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능력을 포기해야 함을 뜻합니다. 행위와 업적으로 하느님께 도달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 가는 길은 버리면서 가는 길이지, 채우면서 가는 길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사람들이 좀 더 고상하게 여기는 지식까지도.......
그 때문에 하느님과 하느님의 선물을 구별하고, 하느님 아닌 일체의 것에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길이신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는 하느님 아버지께 갈 수 없고,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버리는 것은 곧 바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버리면 버릴수록, 혹은 바치면 바칠수록 불행해지고 궁핍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 풍요로워지고 행복해집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그 정욕과 욕망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제단에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오늘의 주제는 한마디로 "판단하지 말라" 입니다.
자신도 바르게, 옳게 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평가하고 가르치고, 따르게 하려는 우리의 나쁜 습성이 오늘 도마위에 오릅니다.
그런 기억이 별로 없으시다면 다행입니다만, 속상하게도 저는 그렇지 못합니다. 돌아서면 후회하면서도 어느 순간 또 다시 누군가를 못마땅하게 보고, 누군가의 행동을 비판하고 있는 제 모습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더군다나 그 당시에는 그 누군가때문에 일어난 일인 줄 알았는데, 지나고 보면 더 큰 원인이 나레게 있었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많이 실망하고 힘들어 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압니다. 넘어지는 것보다 더욱 나쁜 것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라고....
그리스 로마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외딴 곳에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지나가는 나그네를 자기집에 재워준다고 하고는 침대에 묶어 놓고, 나그네가 침대보다 키가 작으면 침대만큼 늘여서 죽이고, 큰 사람은 그 만큼 잘라서 죽이는, 정말 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테세우스라고 하는 전설적 영웅이 그 곳을 지나다 이 악인을 처단하게 됩니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실화라기 보다는 자기 생각에 맞추어 남의 생각을 뜯어고치려 하고, 남에게 해를 입히면서까지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는 횡포를 일삼는 인간의 한 단면을 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좀 더 우리 자신으로 들어와보면, 우리 마음속에는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자기만 옳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버려야 할 악한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타인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도 불행한 삶을 살곤 합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게 다는 아니더라구요. 우리 마음속에는 동시에 테세우스처럼, 나쁜 마음을 이겨내고픈 영웅의 마음도 있습니다. 미역할지라도 분명히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마음을 더욱 키워내라고 하십니다. 교만과 아집을 버리고, 정의와 사랑을 이웃을 향해 실천하라 하십니다.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못된 습성을 이겨내는 영웅, 곧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우리가 됩시다. 특히 오늘이 그런 하루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엄마들이 어느 날 문득 모든 것을 팽개쳐두고서 어딘가 가고 싶다고 하던데, 아마 저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렇게 걱정만 계속 생각하는 제 모습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성체조배실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얼마 전에 읽었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책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여러분은 사회활동가가 되려고 성직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삶, 복종하는 삶,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가운데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최선을 다한다면, 예수님을 만나고 그래서 항상 웃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던 것이지요. 제가 이렇게 사제로서 살아가는 이유는 사회활동가도, 멋진 본당신부도 또 유명한 신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가운데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제가 되었고, 이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일에 대한 많은 관심과 걱정으로 잊어서는 안 될 저의 소명을 잊었던 것입니다.
저에게만 이러한 소명이 주어진 것이 아니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역시 세상 가운데 주님을 증거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과연 어떠했는지요? 혹시 저처럼 주님을 증거하는 일보다 세상의 일을 생각하고 걱정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습니다. 사실 그들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613개나 되는 율법의 세세한 조항을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히 지키는 그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깊은 존경과 사랑을 보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두고서 위선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록 열심해 보이기는 하지만, 세상 가운데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증거하는데에만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칭찬받고 싶으세요? 아니면 꾸중을 받고 싶으세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아마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칭찬받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세상일을 걱정하면서 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세상 안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하여라’는 말씀을 무려 네 번이나 하십니다.
‘행복하여라’로 시작하는 산상설교의 행복 선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행복한 삶이냐 혹은 불행한 삶이냐는 나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복음의 제자들처럼 진실과 겸손의 삶을 살면 행복하고, 바리사이들처럼
허영과 교만의 삶을 살면 불행합니다. 어찌 보면 허영과 교만은 우리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 같기도 합니다. 하여 회당에서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만을 탓할 바가 못 됩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누구보다 율법과 계명에
충실했을지는 몰라도 결코 허영과 교만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똑똑한 것 같지만 실은 어리석은 삶을 살았습니다.
진실과 겸손은 행복의 열쇠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허영이 아닌 진실의 삶을, 교만이 아닌 겸손의 삶을 삽니다.
표리부동의 삶이 아닌 안과 겉의 모습이 같은 삶을 사는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의 날이면 수업 시간마다 불렀던 ‘스승의 은혜’다. 참된 인생의 길을 몸소 실천하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는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노래다. 이처럼 가르치는 모든 분들은 삶의 스승이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선생님은 많은데 스승은 없다고 한다. 스승의 첫 번째 덕목은, 어떤 가르침에도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 앞서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삶을 가르치기보다는 지식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삶의 덕목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거짓 스승이 많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참된 스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가르치면서 몸소 실천하신 참된 스승이시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 뒤를 따라가고자 하는 성직자들도 분명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참된 스승이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아 참으로 부끄럽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나누지 못할 때가 많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로만 떠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생각되는 것은 왜일까? 나 역시 언행불일치의 삶을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가 ‘바담풍’ 하더라도 자식은 ‘바람풍’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사제가 설사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실천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이 희망이 간절한 기도가 되는 이유는 내 삶이 부족한 탓이리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안티오키아의 성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우선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없습니다. 아마도 시리아 출신인 듯하며, 성요한의 제자이고 개종자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며 그는 베드로 사도에 의하여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임명되고 축성되어 40년 동안 교회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107년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안티오키아를 방문하여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배교와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때 이냐시오는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을 거부하여 결국 로마로 압송되어 맹수에게 던져지는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안티오키아로부터 로마까지의 긴 여행 중에 그가 쓴 일곱 개의 편지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는 맨 마지막에 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 주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라고 하소연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마침내 콜로세움에서 용감하게 사자들을 맞이하면서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순교, 죽음이란 단어는 발음은 쉽지만, 그 의미는 쉽게 우리에게 다가서지 않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쉽게 말은 하지만, 자신이나 가족에게 이런 일이 닥치면 한동안 그 가족은 야단입니다.
우화 한 가지를 소개하면, 어느 교구의 사제단이 전체 모인 자리에서 교구장 주교님께서, "지금 하늘 나라에서 주님께서 당신 사업을 사제 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전갈이 왔습니다. 지금 지원하시면 확실하게 천당에 가서 주님 곁에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지원하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신부님들을 처음에는 누가 하는가하고 얼굴을 두리번거리다가, 지원자가 나오지 않자, 서로들 고개를 푹 숙이며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의 지원자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 저 자신 우화 속의 한 사람이라도 지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교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없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저주를 내리는 율법학자들과 같이 형식화되고 제도화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순교는 매일의 연습이고 단련입니다. 매일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집이나 직장, 사회에서 신앙인이기 때문에, 아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절제할 줄 알고, 피해를 받을 줄도 알고, 심지어는 고통까지 참아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아가서는 어느 순간이라도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남에게 무엇인가를 줄 줄 알고, 남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훈련과 자세가 매일의 일상 생활에서 이루어질 때, 그 사람은 바로 순교를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순교는 결코 멀리 있으며, 우리와 관계없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주님의 뜻을 실천할 때, 결국에는 이냐시오 성인처럼 고백하면서 순교의 완성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 땅에서 순교한 약 만여 명의 우리 신앙 선조인 순교자들도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자했습니다.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는 매일의 삶에서 주님을 증거하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신유박해 200주년의 막바지를 보내면서 다시한번 우리 신앙 성조들과 이냐시오 성인의 순교자적 삶을 우리 삶으로 변화시켜 봅시다.............◆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품이 변화되어 누구든지 그분을 만나면 예수님이나 성모님을 만나듯 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특히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한테서 경직되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암으로 죽어가던 형제분이 생각난다. 그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자선활동도 많이 한 분이었다. 그분은 죽음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저는 주님의 축복으로 돈도 많이 벌고 교회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을 대면하면서 깨달은 것은 제가 행한 많은 자선활동이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그분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그후 죽음을 잘 준비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갔다.
나는 병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으며 항상 높은 자리에 앉곤 한다. 또한 부끄러운 말이지만 어려운 짐을 남에게 지워놓고 나는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때도 있다. 그것은 곧 사회적 지위가 나를 형식적으로, 외형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외형의 삶이 나를 교만하게 만들어 바리사이파 사람같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얼마나 조심하며 경계해야 할 일인가! 그러므로 나는 내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으로 변화되어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는지 스스로 물어보곤 한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바리사이파와 율법교사 같은 요소를 빨리 뽑아내지 않으면 나는 무덤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
-최영균 신부-
많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인간의 욕구 중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인간 삶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은 한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심지어 진정 내면에서 원하는 것을 억압하기도 합니다.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소외시켜야 합니다.
바로 이런 자기소외의 전형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증자가 죽기 전에 자기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들아, 내가 누워 있는 이불을 치우고 내 손과 발을 보아라! 유가(儒家)의 수장으로서 그 많은 규율과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사느라 내 손과 발이 꽁꽁묶여 있구나. 이제는 자유로울 수 있겠구나.”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인격적이고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 역시 이런 마음을 운명적으로 지닌 인간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 역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인정도 받고 존경도 받고 때론 사랑도 받았지만 진리를 따르기 위해 그렇게 강한 인간적 본능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자기 두려움과 욕망과의 싸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스승이 당신처럼 하라고 우리에게 그 자유의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영재 신부-
율법은 지키면서도 그 근본정신은 따르지 않는 마음 때문에,
명예와 권력은 추구하면서도 사람들은 존중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속으로는 악하다는 질책을 받습니다.
결국에는 마음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데에도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있으면 그 일을 행합니다. 그 뿐 아니라, 마음이 있을 때에야
그 일을 제대로 행 할 수 있게 됩니다.
법을 지키면서도 자기가 드러나고 대접 받기만을 바라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선한 마음이 없다면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똑같은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봉사를 하고, 선을 행하는 일들도 내가 하느님을 만나고자하는 마음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할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일이 되어집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 안에 하느님을 찾는 마음과 선한 마음이 쌓여져 갈 것이고,
가만히 차오르는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선행이 일치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성령의 열매가 자라 날 것이고
모든 일들이 하느님 안에서 좋은 결과로 작용 해 갈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선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하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강영구신부-
-강영구신부-
복(福)과 반대되는 것이 화(禍)입니다.
복(福)도 화(禍)도 하늘이 내립니다.
복(福) 담을 그릇에는 복(福)이 담기고, 화(禍) 담을 그릇에는 화(禍)가 담깁니다.
‘성유심문(誠諭心文)’은 제가 좋아하는 글입니다.
한 대목을 옮깁니다.
福生於淸儉 德生於卑退 道生於安靜 命生於和暢
憂生於多慾 禍生於多貪 過生於輕慢 罪生於不仁
복(福) 담을 그릇과 화(禍) 담길 그릇이 뚜렷이 대비됩니다.
맑고 검소한 그릇에 복이 담기고, 스스로를 낮추어 한 발 물러서면 덕을 쌓습니다.
부글거리거나 출렁거리지 않는 고요하고 안정된 눈에 가야할 길이 보이고
화목하고 따뜻한 곳에 생명이 자랍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화를 당합니다.
경솔하고 거만하면 잘못을 저지르고, 옹졸하고 어질지 못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일지라도(2고린4,7) 청검(淸儉)하면 복(福)을 받아 담습니다.
화려하고 값비싼 그릇일지라도 탐욕(貪慾)이 가득하고
경만(輕慢)하고 옹졸하면 화(禍)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늘 하늘이 거울처럼 내려다보고 있음(上臨之以天鑑)을 생각하면서
겉꾸미기보다 수신(修身), 세심(洗心)하기를 게을리 않으려고 다짐합니다.
복 받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바리사이...?
예수께서는 어제복음에서 어느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고 가셔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제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되어 갔다는 바로 그 사실, 예수님의 친구 가운데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또 그 초대에 응할만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의 기록에 대해 오늘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한바 있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이란 책이 있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적대자 중 제일 큰 적은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식사에 초대하고 또 예수님이 응하신 것으로 보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반대했거나 예수님이 그들을 도매금으로 위선자라고 규탄하지도 않았으리라는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예수님이 처음부터 서로 적의나 미움을 가진 불구대천의 원수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복음의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라는 불행선언의 발단은 어제복음의 식사 때 손씻는 문제로 시비가 걸린 연유인 것 만은 아닙니다. 성서 문맥상으로는 불행선언, 즉 바리사이에 대한 저주는 식사때 정결사건 다음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좀 더 깊이 묵상해보면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서 부터 바리사이들과의 적대적 관계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묵상은 연중 28주간 내내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묵상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바리사이
바리사이라는 말의 뜻은 '분리하다. 분리된 단체를 만들다'란 동사 '파라쉬(parasch)'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치적인 정당과 종교적인 성향 모두를 지칭하곤 했었다.
① 역사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제국을 그의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장군들 중 하나는 현재 터어키의 앙카라인 안티오키아르 수도로 시리아에 왕국을 세웠다. 후손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그리스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듬 법을 유대인들에게 강요하려 하였다. 그때 유대법을 철저히 지켰던 신앙심 깊은 사람들은 마타티아 마카베오와 그의 지지자들이 일으킨 폭동에 참여하였다.
유대인 폭동은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신앙심 깊은 이 사람들은 평신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중심지에서, 율법과 종교 의식을 철저하게 준수하려는 의도로 재회하여 하나의 그룹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바리사이들의 기원이다. 이들은 B.C. 63년 이후 로마의 점령으로 약화되긴 했지만, 그들은 의회의 구성원으로서 법정에서나 종교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었다.
② 사회적인 위치
바리사이가 되려면, 한 달에서 일 년 사이의 예비 기간을 거친 뒤, 정결례, 단식, 십일조와 그 밖의 다른 종교적인 관습들에 관한 이 단체의 규칙을 지킬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족했다(루가 18,11-12 참조).바리사이들의 이상은 이스라엘을 죄인들과 격리시켜 '사제들과 같은'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출애 19,6). 그들의 엄격한 계명(마르 7,3-4)들은 그들을, 죄인들이나 법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 이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하도록 만들었다. 예수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제거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마르 2.,15-17).
2. 율법학자
'율법학자(scribe)'란 말은 '쓰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scrivere'에서 유래한다. 율법학자들은 법학자들, 율법학자들, 성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적 귀족 계급을 형성하였다. 율법학자들은 처음에는 율법과 성서를 설명하고 해석할 의무를 가진 사제들이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성직자는 정치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시대에 율법학자들 속에는 평신도들과 소수의 사제들과 약간 명의 레위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율법을 주로 가르쳤는데, 그들의 법률적 능력이 판단을 내리는 데 적법자로 내세울 수 있게 되자 바리사이들은 율법학자로서 산헤드린(의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언자들을 대신하는 자들이고 현인들을 승계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종교의 전문가들이었다. 많은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존경의 표시에 맛을 들였고(루가 20,46), 선생님이 아니라 '랍비'라고 불릴 것을 고집하였다(루가 23,7-10).
3.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단죄
루가 복음 11,39-51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단죄하셨는데, 먼저 바리사이파들에 대해서는 이런 점들을 지적하셨다. 즉 그들은 겉은 경건하고 깨끗한 척 하지만 실상 속에는 착취와 사악함이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39). 그리고 그들은 십분의 일을 바치는 일은 중요하다고 가르치면서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42). 그리고 그들은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즐겨 찾고 장터에서는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43).
그리고 율법학자들에 대해서는 온갖 규정이나 규칙과 같은 견디기 어려운 짐을 남에게 지킬 것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위선적인 행동과(46), 그들이 죽였던 예언자들에 대한 피에 대한 책임과(48-50), 법률적 해석의 권한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 유리하게 적용시키고 백성들에게는 불이익을 주는 행위(51)들에 대해 단죄하셨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참으로 회개하여 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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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매일 들러서 복음을 묵상할 수 있도록 수고해 주신 주인님께 항상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