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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루가 13,22-30)
Strive to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for many, I tell you, will attempt to enter
but will not be strong enough.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공동체에게 서로 화목하라고 권고한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며, 서로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섬기라고 한다. 주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듯 서로 존중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야 한다고 하신다. 그러려면 불의를 일삼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불의는 하느님의 뜻과 반대로 행하는 삶의 태도를 말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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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의 최대 관심사는 주님께서 과연 우리를 구원해 주실까 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어떤 사람이 주님께 질문을 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그가 어떤 이유로 그 같은 질문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마을마다 다니시면서 가르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걱정이 되어서 드린 질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우선 불의를 일삼지 말아야 합니다. 의로운 사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고,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다른 이를 섬기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에서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이 결국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갈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좁은 문은 결코 좁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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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앙의 목적은 구원에 있습니다. 온갖 신학 지식과 이론도 결국은 구원에 대한 안내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구원에 대한 열쇠로 좁은 문을 제시합니다. 구원의 문은 좁습니다. 그러나 들어가기 어렵기에 좁은 것이 아니라, 작아지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에 좁은 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작아질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위대하심을 묵상하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그분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느낄 때 작아질 수 있습니다. 많은 죄와 큰 잘못을 아시면서도 크나큰 은총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점을 깨달을 때 작아집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자주 체험합니다. 슬프고 끔찍한 일도 당하고, 억울한 일에 말려들기도 하고, 예기치 못한 일로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일을 분노 없이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노력을 시작할 때 작아짐이 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은 위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는 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입니다. 사람의 능력은 대단하나 하느님 은총의 힘을 능가할 수는 없습니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래서 복음은 말합니다.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는 이들이 있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현실의 기준만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경고입니다
바뀔 수 있는 것과 바뀔 수 없는 것
-서인덕 신부-
매순간 결심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걱정하지 않기’입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 중 95퍼센트 이상이 필요 없는 걱정이라고 합니다.
걱정해봐야 가슴앓이만 할 뿐 걱정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있어 전철을 타고 약속 장소를 향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중간지점 정도
갔을까요.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일기예보에 비 소식이 없어서
몇 방울 떨어지다가 그치겠지 생각하고 가던 길을 갔습니다. 거의 목적지에
도착 할 즈음 빗방울이 굵어졌습니다. 그때 문득 밖에 널어놓았던 이불과
옷들이 생각났습니다. 이제부터 걱정이 시작됩니다. 널어놓은 이불과 옷들을
걷어달라고 할 사람도 없고, 다시 돌아가자니 약속시간에 늦겠고. 불편한
마음으로 약속장소에 가서 불편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불편한 마음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비가 오는 순간부터 밖에 널려 있던 이불과 옷가지는
젖었습니다. 어차피 젖은 거 어떻게 하겠습니까? 젖은 빨래에 대한 생각을
포기하고 즐겁게 만남을 갖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았을까요? 필요 없는 걱정
대신에 보다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생각으로 행동한다면 더 좋은 결과를
얻지 않을까요?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
-김인옥 수녀-
수녀원에 입회하기 전 내게 성소를 권하셨던 수녀님께서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하시도록 권해 보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나는 커다란 숙제를 받은 느낌이었고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다. 어쩌다 언니와 내가 함께 성당에 다니자고 하면 항상 펄쩍 뛰시던 어머니셨다. 그러던 어머니께서 일흔의 나이에 세례를 받으셨을 때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학교에 다니지 못한 어머니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기도문을 써서 집안 여기저기 붙여놓고 열심히 외우셨는데, 어느 날 전화를 해서 “아니, 내가 어떻게 외운 건데 그놈의 사도신경이 바뀌었냐?”며 흥분을 하기도 하셨다.
사람을 하느님처럼
좁은 문
그러던 어머니가 두 번의 고관절 수술과 폐암으로 임종을 맞게 되시어 병자성사를 받으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수도자로서 지상에서 얼마 남지 않은 어머니의 영혼을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겨우 ‘예수 마리아 요셉’ 호칭 기도를 바치시라고 말씀드렸더니 “예수랑 마리아는 알겠는데 또 한 명은 누구냐? 이름을 못 외우겠다.”라고 하셔서 언니에게 크게 써서 침대 옆에 붙여드리라고 말씀드릴 뿐이었다. 그해 연례피정을 떠나기 전 나는 시간을 내어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살이 빠져 반쪽이 되신 어머니는 치매 증세를 보이는 날도 있으셨다는데 그날은 정신이 초롱초롱하셨다. 더운 물수건으로 어머니의 몸을 구석구석 닦아드리니 매우 흡족해 하시며 “하느님이 왜 나를 안 불러 가시냐? 내가 죄가 많아 그런가 보다.”라고 하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엄마, 죽는 게 무섭지 않으세요?” 하고 말씀드렸더니 “무섭긴 뭐가 무서워. 죽으면 아프지도 않을 텐데.” 하셨다. 어머니의 말씀에서 오히려 내가 위안을 받았다. 어머니에게 영원한 생명에 관한 교리는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것 같았다.
연례피정이 시작되고 이틀 후에 어머니의 임종 소식을 들었다. 일흔이 되어 신앙생활을 시작하신 어머니는 12년간의 신앙생활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떠나셨다. 아마도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는 우리 어머니같이 소박한 신앙을 지닌 이들이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을 것 같다.
-김찬선신부-
“자녀 여러분,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아버지 여러분,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자녀를 기르십시오.
종 여러분,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두려워하고 떨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현세의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기쁘게 섬기십시오.
주인 여러분, 여러분도 종들을 이와 같이 대해 주십시오.
그들의 주님이시며 여러분의 주님이신 분께서 하늘에 계시고
또 그분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아 두십시오.”
오늘 에페소서의 말씀은
두 가지 밀접한 인간관계에 대해 가르침을 줍니다.
부모, 특히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
주인과 종의 관계.
이 두 유형의 관계의 공통점은 위-아래의 관계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살던 위계적인 사회에서는
이 위-아래 관념이 뚜렷하고 강했습니다.
이런 위-아래의 관계에서는 당연히
소유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군림하고 억압하는 관계가 있을 수밖에 없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위-아래 관계를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가르치고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관계를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자식은 부모의 자식이기 전에 하느님의 자녀이고
종은 주인의 종이기 전에 주님의 종이며,
부모 또한 자녀의 부모이기 전에 하느님의 자녀이고
주인 또한 종의 주인이기 전에 하느님의 종입니다.
그러기에 부모는 하느님과 같은 진정한 권위를 가지고
자녀를 가르치고 훈계해야 하고
자녀는 부모를 하느님께 순종하듯 순종해야 합니다.
주인 또한 종을 그저 종이 아니라 주님의 종으로서 대해야 하고
종은 주인을 그리스도 섬기듯이 섬겨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새로운 관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인이면서 세상의 보통 사람마냥
너 안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고
너와 나 사이에서 하느님의 관계를 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는
너는 너이고
나는 나입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너는 나의 너이고
나는 너의 나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너는 하느님의 너인 나의 너이고
나는 하느님의 너인 너의 나인 것입니다.
아내를 왕비처럼 대하면
나는 자동으로 왕이 되듯이
내 형제를 하느님처럼 대하면
나는 자동으로 하느님이 됩니다.
-장현우 신부-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선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인생의 큰 획을 긋는 큰 선택들뿐만 아니라, 일상 안에서의 아주 사소한 선택들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매 순간 순간이 선택들의 연속입니다. 이러한 수많은 선택의 기회에서 우리가 항상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당장 마음에 드는 것들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
물론 중요한 상황 앞에서는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서 선택을 하겠지만, 그러한 경우라 해도, 뒤늦게 후회하는 경우도 많고, 후회가 아니더라도 자신이 선택한 한 가지의 길 때문에 포기하게 되었던 또 다른 길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매 순간 순간을 이렇게 신중하게 고민하여 선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졌던 수많은 선택의 기회에서 선택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또한 모든 순간 순간의 선택은 그때마다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자하는 기본 방향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자신의 선택의 기본 방향이 전제되어야 일관성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선택의 기본 방향은 자신 안에서 선택의 내적인 원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여러분의 선택의 기본 방향은 무엇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받기 위해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해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없는” 문이 아니라, “선택하려 들지 않는” 문입니다. 좁은 문은 당장 초라하고 볼품없어 보이는 문이며, 불편하고 힘겹게 다가가야 하는 문입니다.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기에, 선뜻 손을 내밀기가 꺼려지는, 그러한 문입니다.
더구나 이 문이 닫혀 버린 후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즉 구원받기 위해 애써온 사람들이 닫혀버린 문 앞에서 문을 두들기며 주님께 문을 열어달라고 청하여도 거부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함께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면서 알고 지내왔지만, 이러한 인간적인 친분으로는 그 문이 다시 열리지 않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온 사람들, 주님을 직접 뵙거나, 인간적으로 알고 지내지도 못했던 이방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나 율법을 잘 지켰느냐, 얼마나 종교 활동을 열심히 했느냐, 얼마나 주님 앞에 얼굴을 자주 비추었느냐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을 보십니다. 신자로서 지켜야 할 세세한 규칙들에 얽매인 생활보다는, 그가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였는가, 얼마나 사랑을 가슴 속에 품고 살아왔는가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가장 큰 계명은 어떠한 율법들보다도 중요한, 사랑이라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향하는 좁은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의 길은 우리가 당연히 선택해야할 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리 쉽게 선택되어지지도, 쉽게 갈 수 있는 길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쉽게, 또 자주 사랑에 대해 말하곤 하지만, 진정 사랑은 너무나 어렵고 심오한 것입니다. 그냥 조건 없이 사랑하기도 힘들지만, 제대로 사랑하기란, 주님처럼 사랑하기란 더더욱 힘들기 때문입니다.
참 사랑은 희생과 고통이 따릅니다. 스스로가 상대방을 위해 녹아나고, 스며들어가야 합니다. 사랑의 절정이 주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나타났듯이, 이렇게 사랑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길이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 길을 좁은 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비록 좁은 길이지만 더 많은 이들이 이 길을 함께 갈 수 있도록 우리는 서로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이 좁은 길도 서로 사랑하면서 걸어간다면 그리 힘들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주님께서 함께 걸어가 주시기에 기쁘고 평화로운 길이 될 것입니다.
자신의 선택의 기본 방향을 하느님 나라와 구원에 맞추어 두고, 항상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한다면, 자신의 모든 선택들이 그리 후회스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일시적으로는 우리에게 이득이 되는 것이 없고, 나를 알아주고 인정해주는 이가 없을지라도, 꿋꿋하게 사랑의 행위를 실천하는 이에게는 그 좁은 길을 주님께서 함께 걸어주실 것이며, 결국 주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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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
-이압돈 신부-
학창 시절에 부모님으로부터 많이 듣던 말이 있습니다. “공부를 안 한거냐 아니면 공부하는 방법을 모르는거냐?” 제가 시험성적이 좋지 않으면 저를 앉혀 놓고 이렇게 질문을 던지곤 하셨습니다.
공부를 안해서 성적이 안좋은 건지, 방법을 몰라서 성적이 안좋은 건지. 공부를 안해서 성적이 안좋은 것은 학생인 제 잘못이고, 공부하는 방법을 몰라서 성적이 안좋은 것은 부모가 잘 못 가르쳐서 그런것이니 어떤 방법을 찾아보자는 말씀이셨습니다.
학생으로서 누구나 공부를 잘하고 좋은 성적을 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그 방법을 모른다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책상 앞에 오래만 앉아 있는다고 공부가 잘 되는 것은 아닙니다. 수학공식을 많이 외우고 있다고 해서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이해만 하고 있다고 해서 성적이 느는 것도 아닙니다.
물론 공부해야지 하며 생각만 하고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학생이면 누구나 공부를 잘하고 싶어 하듯이 사람이면 누구나 구원을 원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인간이 억압과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해방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통하여 얻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죄와 죽음에서 풀려나 하느님과 하나 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죄와 죽음에서 해방되는 것, 억압과 결핍의 상태에서 구원되는 것은 모두가 원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실 많은 사람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죄와 죽음으로부터 해방되고, 억압과 결핍에서 벗어나는 것을 모두가 원하지만, 그것을 실제로 얻기 위해서는 좁은 문을 통과하듯 너희가 그냥 알고 있는 방법으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 길은 많은 사람들이 가고 있는 넓은 문은 분명히 아닙니다.
인간이 지닌 어쩔 수 없는 한계상황인 죽음, 결핍과 같은데서 해방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그 방법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보통사람들이 선택하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많은 재산을 모으고, 만약을 위해 보험도 들고, 많은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며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여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많은 방법들을 마련해 놓는 일. 이런 방법으로 우리가 처한 어쩔 수 없는 결핍과 불안의 상태에 대처하다는 것은 인간적인데 기대는 것에 불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해방과 구원을 원하지만 그들이 쓰는 방법은 인간적인데 그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조차도 그런 방법을 사용합니다. 하느님과 어느 정도 관계를 유지함으로서 어려울 때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 왜 이러십니까? 구원의 잔을 함께 나눌 때 저도 거기 있지 않았습니까? 당신께서 가르치실 때 저도 그걸 듣고 있지 않았습니까?
저 모르시겠습니까? 저 좀 도와주십시오.”
이런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아쉽게도 “나는 너희를 모른다. 악을 일삼는 자들아, 모두 물러가라”는 말씀입니다. 어찌보면 많은 재산을 모아놓고, 어떤 어려움도 해쳐 나갈 것 같은 탄탄한 인간관계와 보험들 속에 있는 사람이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 보이나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될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재산이 많고 적고의 문제를 이야기 하는 건 아닙니다. 부자는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 못가고, 세상 것들을 전혀 추구하지 않는 사람이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문제는 좁은 문입니다. 좁은 문은 좁기 때문에 한가지 방법으로만 통과할 수 있습니다. 넓은 문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통과 할 수 있지만, 결국 구원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방법, 내 마음에 드는 방법 그래서 내 뜻대로 하면서 통과 할 수 있는 넓은 문은 구원에 이르지 못하지만, 단한가지 방법, 예수님을 닮는 것, 예수님과 같아져서 예수님께서 통과하신 그 모양으로 통과 할 수밖에 없는 그 좁은 문이 바로 구원으로 향하는 방법입니다.
이제 우리는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공부를 안해서 성적이 좋지 않다면 나의 책임이지만, 방법을 모른다면 내 책임이 덜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시어 우리에게 그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알기 쉽게, 사람이 되시어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그대로 따르는 일만이 남았습니다.
이제 그 문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노력을 안해서 그런 것이니 우리의 책임이 더 큽니다..............◆
새벽을 열며
한 가족이 차를 타고 놀러 가는데 5살 먹은 아들이 갑자기 아빠에게 묻습니다.
“아빠,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자 아빠는 학창시절에 배운 것을 기억하면서 아주 복잡하게 설명했지요.
“연료가 연소되면 발생하는 열에너지를 기계에너지로 바꾸어서 자동차가 움직이는데 필요한 동력을 얻는단다. 후륜의 경우 클러치-변속기-추진축-차동기-액셀축-후차륜 순서로 동력을 전달하여 자동차를 움직이지. 알겠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던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듣던 아들이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자동차 바퀴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러자 엄마는 단 한마디로 끝내 버렸습니다.
“응…….빙글빙글!”
엄마의 답도 틀린 것은 아니겠지요? 자동차 바퀴는 ‘빙글빙글’ 도니까요. 더군다나 어린 아들에게는 어려운 설명이 전혀 필요가 없겠지요. 따라서 엄마의 답인 ‘빙글빙글’이 맞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쉽게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들을 너무나 어렵고 힘들게 생각하고 판단했던 것은 아닌가? 그러면서 끊임없이 걱정 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생각을 한 번 해보세요.
갓난아기가 젖 먹는 것을 걱정할까요? 아니면 무엇을 입을까 걱정할까요? 아니면 남들과 달리 장난감 없는 것을 걱정할까요? 아니지요. 만약 이 갓난아기가 먹을 것 입을 것 또는 놀 것을 걱정하고 있다면, 아마 많은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하시겠지요.
“얘! 그건 네가 걱정할 것이 아니야. 네 부모가 걱정할 것이지…….”
어쩌면 우리 역시 하느님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갓난아기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들의 걱정거리가 모두 쓸데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걱정하고 행동하실 것이지, 우리들이 해야 할 몫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갓난아기가 젖 먹는 것, 입을 것, 놀 것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갓난아기가 엄마 아빠만 함께 있어도 편안해하면서 방긋방긋 웃는 것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서 함께 있다는 사실에 편안해하고 만족해야 하는 것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진리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걷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걱정과 욕심으로 인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님께서 제시하는 길의 정반대편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는 사람이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이 내세우는 세속적인 부와 명예를 따라서는 안 됩니다. 순간적으로는 행복해보이지만, 참 행복의 길로 우리를 인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의 좁은 길로 가고 있는 지 깊이 묵상해 보는 시간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마세요.
빠다킹신부
좁은 문
-이수철 신부-
멸망에 이르는 문은 넓고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다고 합니다.
대부분 편하고 쉽고 빠른 것을 선호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삶이
가볍고 얕아보입니다. 뭔가 뿌리 없이 떠도는 불안한 모습들입니다.
보이는 것이 전부이기에 보이는 것 너머를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없습니다.
이런 내적 삶이라면 결코 참 행복은 없습니다. 삶은 목표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할 수 있다면 편하게보다는 불편하게, 빠르게보다는 느리게, 쉽게보다는
힘들게 살면서 삶의 과정을 충분히 음미하며 사는 게 영성생활에는 유익합니다.
삶의 의미는 넓이에 있는 게 아니라 깊이에 있기에, 또 깊이에서 만나는
하느님이기에 이런 저런 좁고 험하고 더딘 길을 통해 삶의 체험을 깊이 하는 게
좋습니다. 영성생활에는 요령도 지름길도 도약도 비약도 없습니다.
주어진 길을 피하지 말고 직면하면서, 요구하지 말고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면서
늘 제로에서 새롭게 시작할 때 그 길이 바로 생명에 이르는 좁은 문이 됩니다.
그러나 밖에서 볼 때 좁은 문이지 실제 알고 보면 이렇게 사는 삶,
나날이 내적으로 깊고 넓어지는 구원의 문입니다
천국의 문
-노미화-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기 전, 젊은 동화작가 한 사람이 가난한 살림에 비행기 표를 어렵게 구해 이라크로 갔다. 그는 종교인이 아니었다. 단지 아무 힘도 없는 한 아이를 안아주기 위해서 간다고 했다. 그냥 그들 속에서 버티겠다고 했다. 결국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그는 이라크에 두고 온 아이들과 착한 사람들 생각에 지금까지 괴로워하고 있다. 나는 그를 옆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 괴로움을 덜어주지 못한다. 그저 공범이라는 생각만 할 뿐이다. 힘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전쟁 반대를 외쳐주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들은 그 비슷한 말도 하지 않는다. 슬프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기도하고 열심히 교회에 다닌다면 과연 천국 문이 열릴까?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한다면 지금 나의 신앙생활을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양심만 가지고는 안 된다. 관심만으로도 안 된다. 목숨까지 바쳐서 온몸으로 사랑하지 않고서는 들어가기 어려운 길이다. 아마도 천국 문은 이 세상을 가장 힘들게 살았던 사람에게 가장 먼저 열릴 것이다. ●
비록 세상에서 꼴찌일지라도 신앙에선 첫째가 되어야 하겠다.
-고병수 신부-
3년째 교구청에 근무하고 있다. 새벽 6시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7시 30분에 아침식사를 하고, 9시에 출근하여 점심식사 시간을 빼고 줄곧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본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살아간다. 유일한 낙은 본당 신부 때와는 달리 주일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괜한 걱정이 생겨나고 있다. 마냥 이렇게 살아도 될까, 세상의 직업인처럼 말이다. 그래도 본당에 있을 때는 영적으로 해이해질 때면 간절히 기도하는 신자나 혹은 한두 시간씩 성체조배를 정성껏 하는 신자들을 보면서 자극을 받곤 했다. 또 인간적인 실수를 할 때면 충고를 해주는 신자가 있어 일상을 되돌아보고 쇄신할 기회를 갖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회가 없다. 그래서일까, 한편으로는 참 잘사는 것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는 신앙적으로 꼴찌가 되어가는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신앙인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얼만큼 이루면서 잘 사는가?’ 하는 것보다는 ‘지금 이 순간 주님 앞에 다가와 그분과 얼만큼 하나 되어 살아가는가?’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적어도 세상에선 첫째이면서 신앙에서 꼴찌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비록 세상에서 꼴찌일지라도 신앙에선 첫째가 되어야 하겠다. 깨끗한 물도 한군데 고여 있으면 썩듯이 현세의 삶에 안주하며 살기보다는 주님의 일상을 돌이켜보면서 매순간 그분과 하나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다. 그럴 때 우리는 신앙의 진정한 첫째로 거듭날 것이 분명할 터이다.
한 아마추어
-최영균 신부-
인간은 누구나 가난하기보다는 부유하기를 바라며, 멸시받기보다는 명예롭게
존경받기를 바라며, 병마보다는 건강하기를 바랍니다. 늘 두 개의 축 사이에서
한쪽 축의 끝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한쪽 축의 끝으로
못 갔을 때 불평불만과 더불어 하느님께 등을 돌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쪽으로 일등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병들고 무시당하고 죄지은 사람들과 벗이 되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바리사이나 부자인 사람들을 무작정 싫어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첫째와
꼴찌의 축을 자유롭게 넘나든 분입니다. 대중의 인기와 지지를 한 몸에 받기도
하셨지만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을 들으면서
우리는 먼저 컴플렉스로부터 자유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특히 교회와 신자로서의 삶이라는 것은 영적으로 위로받고, 사람들과의 친교 안에서
행복을 맛보기 위한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은 바로 일등이 되기 위한 프로의 삶이 아니라 지금은 꼴찌지만?樗?즐길 수
있는 영원한 아마추어의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꼴찌의 삶이
가져다주는 두려움과 좌절과 고통이 바로 예수님의 삶과 가깝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꼴찌를 연습하는 삶이야말로 그리스도라는
목표점을 향해 일등으로 들어가기 위한 연습이 아닐까요?
-곽길섭 신부-
혹시 여러 명이 함께 모여 무엇인가를 기획하고, 그 기획에 맞추어 일을 추진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 많은 분들께서 나름대로의 기억 안에서 그런 체험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뭐 당장에 각 본당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행사와 일들의 대부분은, 결코 혼자서 기획하고 혼자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여러 명이 함께 모여 복합적인 생각들 안에서 중지를 모아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특히 그 안에서 마련된 행사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같은 목적과 같은 방향을 가져야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들이 많습니다. 이 가을에 준비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주님에 뜻에 맞는 일이시기를 바래봅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여러 명이 함께 모여 기획하고 추진하는 그런 일들에 대한 체험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면, 신학교 때의 일입니다. 신학교도 나름대로는 대학교라고 축제도 하고 그럽니다. 약간 일반 대학의 축제와 다르긴 하지만, 참 재미있고 즐거운 축제를 지냅니다. 물론 축제기간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마련됩니다. 한 번은 제가 그 프로그램들 중 한 코너의 기획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전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을 새롭게 기획해서 마련해야 하는 그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 많이 긴장되었고, 그 만큼 많이 노력 했습니다. 그런데 결코 저 혼자만 노력한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진심으로 각자 맡은 바를 충실히 이행하는, 그래서 너무나도 함께하는 모습으로 그 프로그램을 준비하였습니다. 결과 처음 시도한 일이었지만, 좋은 결과를 맛볼 수 있었고, 제가 듣기로는 아직도 그 프로그램이 신학교 축제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굳이 그 프로그램이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 내용은 어떠했는지 등등을 말씀 드리지 않는 이유는, 프로그램 자체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함께 하는 이들이 똘똘 뭉쳐서 공동의 지향점을 잃지 않고 각자 맡은 바를 성실히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안에 자신의 성향 내지는 취향과 맞지 않은 일을 담당하게 된 사람도 있었고, 그 맡은 바를 하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나도 부담스러웠던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는 함께 똘똘 뭉쳐 준비했고, 결과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겸손한 신학생들. 주님을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을 잠재울 줄 아는 신학생들의 아름다움이 절로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사도만의 고백이 아니라 저의 고백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시도와 결코 쉽지 않은 준비 일정, 결코 쉽지 않은 모든 상황. 그러나 그러한 때, 저희 작은 공동체의 모토가 되는 말씀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비록 뛰어 넘어야 할 산이 많았고, 헤쳐가야 하는 풍랑이 심했지만, 이 모든 것이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라면, 우리 한 번 해 보자라고 마음먹었던 그 시간, 그리고 각자에게 주어진 대로 책임을 다하며 임했던 모든 노력들. 결과는 차치하고 과정을 바라보면서 이미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일임을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이 첫째가 될지, 꼴찌가 될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첫째가 되기 위해 꼴찌가 되는 것도 알고 보면,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일 뿐입니다. 때문에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되겠지요?’라는 질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것이다’라는 말씀에 희망을 둘 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함께 좁은 문을 찾고 그리로 들어가도록 노력합시다.
인생의 마지막 이별주를 마실 때는...
-정태연 수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정신적·집단적 최면에 걸려 집단자살한 사이비 종교에 대한 기사를 심심찮게 보게 된다. 그런데 안타까운 사실은 그 신도들 대부분이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사회 저변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여기에서 비로소 사람 대접을 받았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마치 예수님 시대의 가난하고 초라한 군중처럼 그들도 거대한 기성종교의 조직 안에는 발붙일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초창기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가난과 신분 차별에 짓눌렸던 평민들은 차별없이 대해주는 신자 양반들이 고마웠고 장차 죽어서 갈 수 있는, 차별없는 하느님 나라를 갈망하며 살았다. 그래서 밧줄에 묶여 관아로 끌려가면서도 전교회장이 ‘주님의 천사가 우리의 발자국을 금자로 재고 있다’면서 외치는 소리에 희망을 가졌다고 한다.
오늘 주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좁은 문은 뚱뚱한 사람은 들어가기 어렵다. 머리를 숙여 겸손해야만 한다. 그래서 여보란듯이 으스대는 사람들은 절대 들어가지 못한다.
어쩌면 그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현실 삶에 아파하고 힘겨워하는 이들이 건네주는 ‘벗의 자격증’이 있어야 하지 않을는지.
좁은 문의 길목에서 서성이는 님들이여, 이고 업고 진 짐들을 조금씩만 벗읍시다. 우리 인생의 가을 들녘에 서서 이별의 약주 한잔할 그날에, 낟가리 하나 없는 선행의 텅 빈 들판을 어찌 보려고 그러시오. 지금도 늦지 않았소. 지금이 바로 자비의 때이며, 오늘이 바로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사실 많은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강영구 신부-
베들레헴에 가보신 적이 있습니까?
베들레헴의 예수성탄 성당은 종탑만 없다면 영락없는 요새(要塞)입니다.
광장에서 성당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좁을 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어린이가 아니라면 누구든지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야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지요.
작고 가난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성당에 어찌 뻣뻣하게 서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히는 겸손한 사람만 그 성당 안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성당의 입구가 처음부터 그렇게 작고 좁았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아치형의 큰 입구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십자군 이후 베들레헴을 점령한 사라센인들이 말을 타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입구를 좁고 작게 만들었습니다.
말을 타고 성당 안으로 들어가서도 안 되지만 오만한 자세로 들어가서도 안 됩니다.
좁은 문은 곳곳에 있습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을 해야만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거추장스러운 장식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고 겸손해야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습니다.
지위와 명예, 학식과 재물 따위로 자신을 치장하고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없습니다.
자신을 버리는 사람이 좁은 문을 지나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一明)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라.”
단죄와 구원의 기준은?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의 발걸음은 이미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9,51) 예루살렘을 향한 이 여정은 여행이긴 하지만 소풍도 아니고 관광여행도 아니다. 대부분 갈릴래아 지방 출신의 제자들을 서울구경 시키려는 수학여행은 더욱 아니다. 멀지 않아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배척을 받아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예고도 두 번씩이나 있었고(9,22-27; 9,44-45), 사마리아 사람들의 냉대로 말미암아 우회로를 택해야 했던(9,56) 고충을 감안한다면 이 여행이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발걸음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굳세기만 하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상경하고 계심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그 도중에 마치 어느 곳도 빼놓지 않으려는 의도로 여러 동네와 마을에 직접 들러 가르치셨다고 전한다.(22절) 세상의 심판과 구원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루가가 예수님 공생활의 마지막 종착역이 될 예루살렘으로의 상경을 재차 강조하고, 오늘 복음의 첫 부분을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관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23절) 하고 묻는다. 이 질문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관한 것이다. 동시에 질문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가 적을 것이라는 걱정을 은근히 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숫자에 대한 답을 주는 대신에 ‘좁은 구원의 문’을 언급하셨다. 이 말씀은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 계실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묻기보다, 묻고 있는 그 사람 자신의 구원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이다. 물론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에 따라 구원의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숫자보다는 좁은 구원의 문을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 노력하는 것이다.(24절)
여기서 노력한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회개는 당장 이루어져야 한다. 회개를 마지막 시간으로 미룬다는 것은 위험천만의 발상(發想)이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은 좁을뿐더러 문이 닫히고 나면 다시는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의 문이 한번 닫히면, 거기에는 어떠한 종류의 뇌물이나 억지는 물론, 끈덕진 요구도, 면식(面識)도, 친분(親分)도 통하지 않는다. 하느님이 심판에서 단죄와 구원을 판가름하시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구원의 문에 들지 못한 사람은 모두가 ‘악을 일삼는 자들’로 치부된다.(27절) 여기서 심판의 기준이 악행(惡行)과 선행(善行)임을 알 수 있다. 심판의 기준은 예수님과 평소에 식사를 함께 한 것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 것도,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선(善)을 따라 행동했느냐 않았느냐는 것이다. 줄을 잘 선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선(善)과 정의(正義)를 따라 실천하는 것이 구원받음의 조건이다. 구원은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는 자의 결정에 달려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예수께 “선생님, 구원받을 사람은 얼마 안 되겠지요?”(23절) 하고 질문을 던졌던 사람이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에 속한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심증을 굳힐 수가 있다. 그들은 자기들 소수만이 선택받은 자들이며, 그래서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꼴찌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첫째가 될 것이다.(30절) 성조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잔치에 이미 들어 있고, 사방에서 많은 사람들이 입장을 허락 받았으나, 그들 자신은 정작 문 밖에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구원에 이르는 문은 좁지만,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러나 문에 들 수 있는 사람은 당장 회개하는 사람이며, 회개의 표로 선(善)을 행하고 정의(正義)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
좁은 문으로(루가 13,22-30)
-유 광수신부 -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하시는 동안, 여러 고을과 마을을 자나며 가르치셨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책 중에 "예술가의 길"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보면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세 페이지의 아침 글쓰기'를 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무슨 생각이든, 말이든 상관없이 매일 세 페이지씩 쓰라는 것이다. 많은 사건들이 이 세 페이지의 글을 쓰는 동안 정리가 되고 해답을 찾을 수도 또 어떤 영감을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맞는 것 같다. 가능한 한 나는 매일 복음 묵상을 쓰려고 한다. 쓰다보면 새롭게 묵상되는 것들이 있고 또 정리가 된다. 그리고 매일 복음 묵상을 쓰기 위해서 하루 종일 복음을 묵상하게 된다. 그러니까 아침마다 세 페이지를 쓰라는 것은 단순히 세 페이지를 쓰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 페이지를 쓰기 위해 하루 종일 생각하게 되고 말씀에 몰두하게 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작은 것이라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생활하는 것 하고 아무 목적 없이 생활하는 것하고는 큰 차이가 있다. 어떤 목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은 늘 깨어있다는 것이다. 늘 생각하고 고민하는 데에서 예술가들의 어떤 창작품이 나오기 때문에 매일 아침 세 페이지를 쓰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골프 치는 사람은 하루 종일 골프 치는 것을 생각할 것이고 바둑을 두는 사람은 하루 종일 바둑판을 생각할 것이다. 고시를 준비하는 학생은 자나깨나 고시원에 들어 앉아서 고시 시험을 준비할 것이고, 야구 선수는 야구만을, 축구 선수는 축구공만을 생각할 것이다. 히딩크 감독이 자기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축구공을 가지고 논다고 말한 것이 기억난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노는가? 나는 자나깨나 무엇을 생각하는가? 돈 버는 일인가? 출세하는 길인가? 은행에 들어가서 돈을 가져간 강도는 강도 짓을 하기 위해 얼마나 생각하고 준비를 했겠는가? 무슨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가? 인간은 생각하는 것을 행하는 법이고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 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들어가려고 힘써야할 좁은 문이란 어떤 문인가? 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힘쓰고 있는가? 대입시생들이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가? 학생뿐만 아니라 고 3 학생을 둔 부모도 그 학생 뒷바리지 하느냐고 얼마나 고생하는가? 그들은 모두 돈, 시간, 희생을 바치면서 대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무진장 애쓴다. 왜그러는가? 대학교에 들어가는 문이 좁으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이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노력하지만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좁은 문이란 어떤 문인가? 나도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할 좁은 문이 있는가? 있다면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지금 나는 무슨 노력을 하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내가 노력하고 있는 것이 있는가?
좁은 문이란 구원의 문이다. 구원은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져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마치 대학교가 모든 학생들에게 개방되어 있지만 학생이면 무조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듯이 구원의 문은 모든 이를 위해 마련되었고 개방되어져 있지만 모든 이들이 다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을 쓰는 사람만이 들어간다.
구원의 문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을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 14)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구원의 문 즉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힘을 쓴다는 것은 회개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제시된 구원의 길을 걷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내 마음대로 길을 만들어서 걸어갔던 길을 버리고 예수님이 제시하신 길 즉 복음의 길을 받아들이고 걸어간다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복음에 제시한 것과 다른 것은 버린다는 것이다. 회개한다는 것은 복음에서 제시하는 길이 아닌 길을 걸었던 삶에서 이제부터 복음이 제시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마지막 날 나를 심판하는 것은 내가 만들어 온 길을 얼마나 열심히 걸어왔느냐가 아니라 예수님이 제시하신 길 즉 복음이 제시한 삶을 얼마나 실천하면서 살아왔느냐가 합격 불합격의 기준이 될 것이다. 따라서 구원을 받으려는 사람은 많지만 구체적으로 복음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날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복음의 삶을 사는 이의 삶은 항상 낮은 자리 겸손한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항상 꼴찌처럼 보이겠지만 마지날 날 구원의 문 앞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시험 문제를 다 맞춘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주님, 주님 한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셨듯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복음을 살려고 힘쓴 사람들이 구원의 문으로 들어 갈 것이다.
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위해 무엇을 힘쓰고 있는가? 내가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복음의 삶은 무엇인가? 오늘 내가 복음에서 벗어난 삶에서 회개해야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회개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로운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다. 내가 눈을 돌려 복음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것은 은총이며 선물이다. 어둠에서 빛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회개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회개의 삶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아야할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구원은 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제시한 그 길을 걸을 때만이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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