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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1월 2일 화요일 위령의 날
오늘은 연옥에서 고통 받는 영혼들이 하느님 나라로 빨리 들어가도록 기도하며 미사를 봉헌하는 날이다. 모든 사제는 3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할 수 있다. 이 특전은 15세기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전사자들을 기억하기 위해 모든 사제에게 주어졌다. 3대의 미사 중 한 대는 예물을 받을 수 있고, 두 번째 미사는 모든 연옥 영혼들을 위하여, 셋째 미사는 교황의 지향에 따라 봉헌한다. 교회는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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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마태오 5,1-12ㄴ)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말씀의 초대
욥은 밀려드는 고통 속에서도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살아 계심을 고백한다. 친구들이 그의 신앙을 의심하는 자체가 욥에게는 고통이었다. 그에게는 주님만이 유일한 희망이며, 그의 삶의 목적은 두 눈으로 주님을 뵙는 일이었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로마 신자들에게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전한다. 그 희망은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을 뿐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해 준다. 따라서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한다고 고백한다(제2독서). 참행복은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다만 참행복을 얻어 누리려면, 그분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전적으로 마음에 새기고 온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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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음력 10월이 되면 시제(時祭)라는 것을 지냅니다. 5대 이상의 선조들을 함께 기억하며 묘소에서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때 벌초도 하고 무너진 곳도 손질합니다. 먼 친족과는 오랜만에 얼굴을 맞대기도 합니다. 직계든 방계든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동양의 전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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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행복한지요? 행복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처럼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무슨 말을 해도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나는 행복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 ‘마음의 가난’은 어려운 말씀입니다. 아름답거나 화려한 말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힘겹고 두려운 표현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마음의 가난이겠습니까? 아무 욕심도, 아무런 욕망도 없는 마음이겠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런 마음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욕심으로 얼룩진 마음을 가난한 마음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참행복으로 초대하십니다. 참행복은 곧 당신 자신이시고, 당신의 말씀이십니다. 당신 안에, 당신의 거룩하신 그 말씀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고, 하느님 나라야말로 우리가 얻어 누려야 할 참행복입니다.
이미 우리보다 앞서 돌아가신 분들은 그분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 참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까지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연령들이 있다면, 하루빨리 주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우리는 기꺼이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참행복은 세상을 떠난 사람들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또한 마음을 비우고, 슬퍼할 줄 알며, 온유한 사람이 되어 평화의 일꾼으로 살아간다면, 우리도 이미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주님의 나라에 속한 사람이 결국 주님께서 주시는 참행복,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위령의 날’은 ‘서양의 시제’입니다. 앞서 간 영혼들을 기억하며 위령 미사를 드리는 날입니다. 사제들은 세 대의 미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중세 때부터 시작된 특전입니다. 더 많은 영혼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하라는 취지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대로 ‘살아 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라는 가르침입니다.
누구나 죽습니다. 때가 되면 누구나 하늘 나라로 갑니다. 그들과의 이별이 아쉬운 것은 애정 때문입니다. 그분들 역시 모두를 잊어버린 채 천국에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지상의 남은 이들을 위해 ‘반드시’ 기도하십니다. 죽음 저쪽에서 ‘행복을 누린다면’ 지상의 가족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습니다. 성인 반열에 오르신 분만이 통교의 대상은 아닙니다. 연옥 영혼들과도 친교를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앞서 간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면 그들도 기도해 주십니다. 각박한 현실에서 ‘행복과 기쁨’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기를 청해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좋습니다. 하지만 행복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가 남모르는 고통과 걱정 때문입니까? 아니면 재산이나 물질의 부족함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요? 그렇다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행복은 그러한 것과는 별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엄청난 고통과 산더미 같은 걱정 속에 있지만 행복하게 살고 있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고민이나 걱정이 전혀 없는 것 같은데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행복은 고통이나 걱정거리가 있느냐 없느냐 그런 것은 분명 아닙니다.
행복은 결과입니다. 정성을 드린 만큼 되돌아오는 꽃이며 열매입니다. 식물은 꽃을 피우기 위해 일 년 동안 온갖 정성을 다합니다. 나무 역시 열매를 맺기 위해 여름과 겨울을 견디어 냅니다.
복음 말씀은 ‘행복에 이르는 길’을 알려 줍니다. 마음의 가난입니다. 슬픔과 억울함을 참아 내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기억하며 평화를 위해 애쓰는 일입니다. 먼 곳이 아니라 함께 부딪치며 살고 있는 가족 안에서 먼저 실천하는 일입니다.
가난한 마음은 절제하는 마음입니다. 욕심이 솟구치고 욕망이 흔들더라도 그것을 조절할 수 있는 마음입니다. 본능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본능이 일으키는 충동은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능이 자기를 지배하는 것은 막을 수 있습니다. 그 능력이 절제입니다. 그런 절제를 지닌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다.
세상에는 행복의 조건을 갖춘 이가 많습니다. 객관적 기준으로 볼 때에는 행복해지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삽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절제를 실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능만을 따라간다면 그 누구도 진정한 행복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슬퍼하는 이도 모두가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주님 때문에 슬픔을 견디어 낼 때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온유하고 자비로운 사람도 그 원인이 주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함께하십니다. 참행복에 담긴 비밀입니다.
겸손한 사람 - 장동현 신부-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세상을 떠난 부모·친지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날입니다. 오직 인간만이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 뒤를 이을 사람들은 우리를 위해 기도할 것입니다.
영들을 위로하며 -김찬선신부- 우리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면
고마운 연옥 -전삼용신부- 요즘 신종 플루 때문에 전 세계가 난립니다. 이제 공공장소에 가면 어렵지 않게 손 소독기를 볼 수 있습니다. 또 저를 포함해서 많은 분들이 손 씻는 횟수가 많이 늘어났을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깔끔을 떨다보니 어렸을 때 감기에 자주 걸렸던 것이 지금처럼 청결하게 씻지 않아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유태인들 전통에는 항상 밖에 나갔다 오면 손과 발을 씻는 전통이 생겼었고 지금도 모든 식당 앞에는 손을 씻는 곳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되고 있기에 씻어도 되고 안 씻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씻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손과 발에 묻어있는 병균에 의해 걸릴 수도 있는 병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요? 어떤 때는 강요된다고 해서 불만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전통이 참 고마운 전통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도 깨끗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요한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 나라에 있는 의인들이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빨아 희게 한” 사람들입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작은 사람도 세례자 요한보다는 크다고 하십니다. 즉, 완전히 자신을 순결하고 깨끗하게 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나라에 들어올 수 없다는 뜻입니다. 어떠한 흠도 티도 하느님나라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이렇게 온전히 깨끗해져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요? 모두가 부족한 상태로 죽음을 맞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을 씻는 연옥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은총입니다. 연옥이 없다면 누구도 하느님나라에 들어가기가 합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성경에 연옥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연옥의 존재를 부정합니다. 한 번은 어떤 병원 영안실에서 신자들과 함께 연도를 하고 밖으로 나오는데 개신교 찬송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분들께 물어보니 개신교인들도 장례가 나면 죽은 영혼을 위해 기도를 하러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개신교는 연옥을 믿지 않기 때문에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 교리에 의하면 죽으면 천국이나 지옥으로 심판을 받고 그 심판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마 이것은 목사님들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인데 그래도 직접 와서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는 신도들이 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연옥이 없다고 가르쳐도 사람들 마음 안에서 울려 퍼지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올바른 도리’라는 양심의 소리는 잠재울 수 없는 것입니다. 개신교인들이 연옥이 없음을 주장하는 가장 큰 증거는 성경에 연옥이란 말도 안 나오고 그것에 대한 언급도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는 사실입니다. 천국이나 지옥은 수없이 나와도 연옥이란 말은 단 한 번도 나오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도 지옥도 아닌 곳이 내세에 있음은 여러 군데에서 발견이 됩니다. “사람의 아들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성령을 거역해서 말하는 사람은 현세에서도 앞으로 올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오 12, 32) 현세는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입니다. 앞으로 올 세상은 죽음 이후의 세상이나 세상 종말 이후의 새로운 세상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종말 이후의 새 하늘 새 땅의 세상은 이미 하느님나라이기 때문에 죄가 있는 사람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더러운 것도 하느님나라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묵시 21,27 참조).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죄가 용서 받을 수 있는 곳은 ‘이 세상’과 ‘죽음 이후의 세상’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이미 천당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용서 받을 죄가 없고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더 이상 용서 받을 수가 없는데 그렇다면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완전히 깨끗해지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누구를 의미하겠습니까? “그들은 숨은 일을 모두 드러내시는 주님을 찬양하였다. 그리고 죽은 자들이 범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면서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2마카베오 12,41-45) 연옥의 존재에 관해 이것보다 더 명확하게 나와 있는 구절은 찾아볼 수 없지만 안타깝게 개신교는 이 성경을 정경에서 제외시켜버렸습니다. 신약과 구약의 정경은 교회가 정한 것이지만 개신교는 신약은 교회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구약은 그리스도교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 경전을 제외시켰던 유태인들의 전통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구약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종교가 정한 것을 그대로 따른다는 뜻입니다. 또 그들이 내세우는 가장 큰 논거는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으로 사람들은 단번에 죄 사함을 받습니다. 단번에 죽으시고 단번에 모든 죄가 사해졌으므로 그것으로 인간의 죄에 대한 청산은 이미 이루어진 겁니다.”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죄가 완전히 사라지던가,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가던가, 둘 중에 하나라는 뜻입니다. 죄를 계속 짓더라도 믿음만 가지고 있으면 다 사해지니 죽을 때 믿음이 있는 사람은 완전히 죄가 용서된 상태에서 천국으로 바로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피는 죄를 용서하여 사람을 살립니다. 따라서 죄가 없이 죽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다 사해졌다는 것이 완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어린 아기는 죄가 없습니다. 그러면 아기 때 죽는 것이 제일 좋은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더 살도록 하시는 하느님이 조금 이상한 분이실 것입니다. 아기는 죄가 없지만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은 죄를 알게 되더라도 완전한 성인이 되도록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연옥이란 완전하지 못한 상태로 죽은 이들이 고통을 통해서 자신을 완전하게 성숙시키는 하느님의 자비로 만들어진 곳입니다. 쉽게 말하면 조금만 더 공부하면 낙제를 면하기 때문에 조금 더 공부하도록 나머지 공부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연옥이 없다면 바로 천당 갈 사람은 정말 드물 것입니다. 어렸을 때 부잣집 친구 생일잔치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신을 벗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양말에 구멍이 나서 엄지발가락이 튀어나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창피해서 계속 다른 발로 그 발을 밟고 있었습니다. 좋은 음식과 놀이들은 더 이상 좋아 보이지 않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하느님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가 완전한 성인들만 있는 곳인데 혼자만 어린 아기라면 본인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연옥은 벌을 주기 위한 곳이 아니라 하느님나라에 들어갔을 때 충분한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곳이기에 은총의 공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한데 합친 것보다 연옥의 아주 미소한 괴로움이 더 혹독합니다.” (성 치릴로) “연옥에서 일순간 받는 고통은 석쇠 위에서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의 고통보다 더 무섭습니다.” “현세에서 받는 모든 괴로움보다 연옥불은 혹독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
왜 죽은 뒤에 더 큰 고통을 겪어야 하냐면 죽은 이후에는 믿음의 공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선 믿음의 불을 통하여 우리 자신을 단련하지만 죽은 뒤엔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기에 그 고통이 더 가중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성숙시키는 것엔 고통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 연옥이 고통스러운 이유입니다. 우리는 최대한 이 세상에서 완전해져서 주님께 가야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완전해지라고 명하시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마태 5,48)
개신교의 말대로 믿음으로 다 해결된다면 이 세상에서 완전하게 되도록 노력하거나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용서되어도 그 벌은 남기 때문에 우리는 고해성사가 있어도 죄를 짓지 않으려고 힘쓰는 것입니다.
로마엔 연옥 영혼들에게 봉헌 된 성당이 하나 있습니다. 그 안엔 연옥 영혼에 관한 많은 기적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화재가 나서 새겨진 연옥에 있는 한 사제의 얼굴, 옷과 책상, 책 등에 손 모양으로 타 들어간 것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일 분이 일 년처럼 고통스러워 자신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나타나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손을 대어서 탄 자국들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이 세상의 공로는 믿음의 공로까지 합쳐지기 때문에 우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면 그들은 수백 배의 공로를 받게 됩니다. 그러면 그들이 또 이 세상에서 기도해주는 이들을 위해 주님 옆에서 얼마나 많이 청원해 주겠습니까?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늘에 좋은 친구를 두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미사가 가장 큰 기도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식사 후 기도만 잘 해도 그들에게 수많은 위로를 줄 것이고 우리도 그 사랑의 보답을 크게 입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하늘과 땅의 교류입니까? 이제 시작되는 위령성월, 연옥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조금 더 인간관계를 넓혀 봅시다.
<죽음연습> -양승국신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극진히 사랑했던 외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한 30대 부부가 있었습니다. 잊으려고 아무리 발버둥쳐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잊어보려고 두 사람 모두 휴가를 내서 해외여행까지 다녀왔었지만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것에 대한 안타까움, 미안함이 도저히 가시지 않았습니다. 잊을 때도 되었건만,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설 때도 되었건만 두 사람은 몇 년이 지나도 먼저 떠난 아이의 그 빈자리를 채우지 못해 언제나 허전해하고 방황하곤 했습니다. 그런 부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사별의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죽는다는 것 참으로 고통스런 일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수용하기 힘든 것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 곧 죽음입니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을 더 이상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가슴아픈 일입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했던 자식의 체취를 더 이상 느낄 수 없다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일입니다. 사랑했던 사람의 그 부드러웠던 음성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그 아름다운 미소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슬픔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참으로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더욱 겸손하게 주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더욱 고결합니다. 이런 면에서 죽음은 신비이며 진리이며 은총입니다. 무속 신앙인들이나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 피하고만 싶은 것, 껄끄러운 그 무엇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죽음은 아주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은 오히려 감사의 원천이요 은총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죽음은 죽음이 아니요 아버지께로 나아가는 관문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얼마나 겸손하게 만드는지 모릅니다. 이런 면에서 죽음은 가장 탁월한 해결사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일 죽음이 없다면 그 사악했던 인간들이 얼마나 더 떵떵거리며 우쭐대며 살아가고 있겠습니까? 죽음은 모든 것을 거두어가기에, 모든 것을 정리해주기에, 모든 고통을 씻어주기에, 모두에게 공평하기에 소중하고 값진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된 말이지만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늘 옆에 끼고 살아가야 할 가장 친한 친구여야 하겠습니다. 죽음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죽음을 늘 준비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그런 노력이야말로 아름답고 고결하며 준비된 죽음을 위한 가장 필요한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죽음의 준비는 바로 오늘을 충만히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거룩하게, 오늘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성실히, 최대한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가장 좋은 죽음의 준비일 것입니다.
진리와 사랑 -이재성 수사- 진리와 사랑이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아득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 배광하 신부- 마태 5 , 1~12ㄴ
후회 없는 신앙인 " -이기양 신부- '
‘연령을 위하여 빌으소서’- 주님의 사랑안에서 이루어진 은총 -수원주보- “성~000, 연령을~~위~하여~~빌으소서”
예수님과 진복팔단의 진수
-이인주신부- 예수님과 진복팔단의 진수
-서공석신부- 오늘은 위령의 날, 이 세상에서 살다 떠나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사실은 어제 ‘모든 성인의 날’이 그리스도 신앙의 초기부터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날이었습니다. 12세기 연옥에 대한 사상이 보급되면서 11월 1일은 모든 성인의 날이 되고, 2일은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로 분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영광스럽게 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오늘은 아직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분들을 기억하는 날로 남았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 두 개의 날이 분리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연옥 교리는 유럽 중세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런 유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제와 오늘 이틀을 이 세상에 살다가 하느님에게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는 날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 초기의 신앙에 충실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비를 본받아 발생한 우리의 모든 선한 삶의 순간들을 당신 안에 거두어들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참으로 계시하셨다고 믿는 초기 교회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인지를 설명한 말씀입니다. 이웃을 보살피고 사랑하기 위해 고생하거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인 우리의 시간들을 하느님은 당신 안에 소중히 간직하신다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뇌리에 기쁨으로 남는 것은 그 사람의 자비로웠던 모습, 관대하였던 모습들입니다. 우리의 시선을 굴절시켰던 이해관계가 시간이 흐르면서 여과되어 사라지면, 우리의 뇌리에 남는 것은 떠나가신 분의 자비롭고 관대하였던 모습들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기쁨과 감동을 줍니다. 그것이 하느님 안에 거두어들여진 그분들의 삶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와 유명(幽明)을 달리하신 우리의 부모님, 조부모님, 그리고 친척 친지 모두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분들은 이 세상에서 우리와 잠시 혹은 길게 인연을 맺고 사셨습니다. 돌아가신 모든 분을 위해 기도하는 오늘, 우리가 그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하느님 안에 우리 모두가 함께 살아있다는 사실을 새삼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현세에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세상을 떠난 분들도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분들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에게 관대하셨던 분들입니다. 시간이 흘러서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그분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초기부터 살아 있는 사람들은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4세기,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어머니 모니카 성녀는 임종을 맞이하여 아들에게 “주님의 제대에서” 자기를 항상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 기록이 있습니다. 유럽 중세 초기부터 죽은 이들을 위한 성무일도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럽의 옛날 성당들 안에는 군주들과 주교들, 소위 그 시대 실세들의 유해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죽음 후에 그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그들의 유지가 함께 담겨 있는 그들의 석관(石棺), 곧 무덤들입니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는 그리스도 신앙인에게 그들과의 유대를 사는 길이고 또한 희망의 고백입니다. 죽은 모든 이들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시다 가신 분들을 생각하고 슬퍼할 수 있습니다. 눈물 없이는 기억하지 못할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모든 성인의 날인 어제와 돌아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는 오늘,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그리스도 교회의 간절한 희망을 엄숙하게 표현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우리, 또 죽음의 경계를 이미 건너가신 그분들,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간절하게 고백하는 희망의 행위입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오늘 우리의 기도는 슬픔에 잠겨 있지만 않습니다. 그 기도는 부활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며 고백합니다. 우리도 모두 어느 날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 그분들과 함께 살아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이 소중하여 나만을 찾았던 순간들은 허무의 심연으로 사라지고, 우리가 자비와 관대함을 실천한 그 순간들은 하느님이 함께 계셨던 시간들이라 하느님 안에 거두어져서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와 유명을 달리 하신 분들이 아닙니다.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는 분들이고, 우리가 장차 하느님 안에 만나서 함께 기뻐할 분들입니다.
위령의 날 : 죽은 이를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하자.
-오창일 신부- 우리는 사도신경에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라고 기도한다. 모든 성인의 통공이란 세상과 천국 그리고 연옥에 있는 영혼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신비체이기에 살아 있거나 죽었거나 서로 연결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고 또한 성인들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백광현 신부- 셋째 형님이 대장암으로 오랫동안 투병하다 올해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습
- 차공명 신부- 오늘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위령의 날입니다... 더 엄밀히 말하면 천국에 오르지 못하고 연옥에서 우리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어제 모든 성인의 날을 통해 천국에 계시는 모든 분들에게, 특히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성인으로 지정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모르는 모든 성인들에게 존경을 표시하고 그 분들의 도움을 바라며 그분들처럼 되고자 하는 우리의 각오를 다지는 날 이였다면 오늘은 돌아가신 분들 중에 아직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들을 위로하며 우리도 우리 자신의 죽음 역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상기하는 날입니다... 사실 계절적 배경도 이 날의 의미를 더욱 밝혀준다.. 여름 한철 생기 있고 푸르렀던 자연이 이 시기에 그 화려한 옷을 벗고 스스로 유한한 존재임을 알려주는데 우리들 역시 언젠가는 죽을 운명임을 이 시기는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얼마 전, 제 아버님께 들었던 이야기 하나를 전해 드립니다. 저희 아버님께서는 건강을 위해 매일 운동을 하시는데, 친구 분과 함께 운동을 마치고서 집으로 오고 있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이 분은 젊었을 때 체조 선수로 뛰셔서 그런지 몸도 아주 날렵하고 건강하셨습니다. 그래서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후회할 짓을 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복되고 복되시어라 - 장재봉 신부-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양승국신부- <하루하루를 꽃밭으로 장식하십시오>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인생수업’이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와 그녀의 제자 데이비드 케슬러는 죽음 직전의 사람들 수 백 명을 인터뷰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남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살아있음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겨라, 하루하루를 꽃밭으로 장식하라, 매일 매일을 충만한 기쁨으로 엮어가라’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삶을 그렇게 심각하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별의 순례자이며, 단 한 번의 즐거운 놀이를 위해 이곳에 왔음을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눈이 찬란하지 않다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세상을 반영할 수 있겠냐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십시오.” “삶에서 가장 큰 상실은 죽음이 아닙니다. 가장 큰 상실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간절히 원하게 될 것, 그것을 지금 하십시오.”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후회 없는 삶을 살았으면 자신에게 다가오던 죽음을 바라보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갈 거예요. 그곳에서 노래하며 춤추며 놀거예요.” 2004년 8월, 78세의 나이로 별세한 저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장례식 때의 일입니다. 두 자녀가 그녀의 관 앞에서 작은 상자를 열었습니다. 상자 안에서는 한 마리의 호랑나비가 날아올랐습니다. 동시에 조문객들이 미리 받은 종이봉투에서도 수많은 나비들이 일제히 날개를 펄럭이며 파란하늘로 날아올랐습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말마디 그대로 우리보다 앞서 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영혼들이 하느님 자비의 품안에 안착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날입니다. 아울러 언젠가 우리의 몫이 될 죽음을 묵상하면서, 겸손하고 성실하게 이승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날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생각대로 이승의 삶이 다가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의 육신이 소멸되는 그 순간, 우리의 영혼은 한 마리 어여쁜 나비처럼 영원한 하느님 자비의 품안으로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하는 죽음은 다름 아닌 영원한 아버지의 집으로 건너가는 생명의 다리입니다. 그 순간은 우리의 인간적 나약함과 그로 인해 빚어졌던 그 숱한 과오들, 그 많은 죄악들이 주님 사랑 안에 말끔히 씻어지는 순간이 될 것입니다. 더 이상의 방황도, 더 이상의 고통도, 더 이상 눈물도 없게 되는 그 순간, 갖은 속박으로부터 훌훌 털고 일어선 우리는 꿈에 그리던 대 자유를 얻어,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로 훨훨 날아가게 될 것입니다
죽음을 어떻게 살까? -강영구신부- +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라.
삶과 죽음과 연옥 -박상대신부- 오늘은 연중 제31주일과 11월 2일 위령의 날이 겹쳐 고유축일인 "위령의 날"로 지낸다. 교회는 전례력상 마지막 달이 되는 11월을 위령의 달로 정하고, 한달 동안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모든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고, 특히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며, 언젠가는 맞이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그간 살아온 삶을 반성하여 회개의 삶을 살도록 권고한다. 가능하면 11월 한달 동안 자주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친지, 친구, 지인(知人)들의 묘지를 찾아가 기도하고, 그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 연미사를 봉헌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11월 2일 위령의 날은 정확히 1030년경 개혁수도회로 이름난 프랑스의 클뤼니수도원(베네딕토수도원)의 대수도원장 오딜로(Odilo)가 처음으로 기념하기 시작하여 온 세계교회로 퍼졌다. 오딜로 대수도원장은 수사들에게 "비록 그들의 죽음이 너와 무관하다 하더라도 자주 불쌍한 영혼들을 기억하라"고 강조하였다. 오늘날 오딜로 성인은 연옥의 불쌍한 영혼들의 수호성인으로 통한다. 생명을 가지고 세상에 사는 모든 존재는 죽어야 한다. 사람은 물론이고, 동물도 식물도 언젠가 한번은 죽어야 한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두려움과 불안을 주면서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해서도 안 된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 것은 분명한 순리(順理)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이 고귀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우리가 "죽음이 마지막 말이 아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육신이 죽은 뒤에도 다른 차원에서의 생명의 원리가 지속됨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를 증명해 주셨다. 진정한 삶은 어쩌면 죽은 뒤에 가능한 것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바라는 하느님과의 일치는 죽었을 때 비로소 완전히 이루어진다. 따라서 죽음은 우리가 믿고 바라는 영원한 생명에로 옮아가는 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의미 있는 사건이며, 죽음으로 말미암아 삶이 더욱 값지게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죽음이 곧바로 하느님과의 일치를 가져오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뜻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죄 중에 세상을 떠난다면 천국에 바로 들지 못하고 연옥이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이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이다. 트리엔트공의회(1545-1563)도 "연옥은 실제로 존재하며, 여기에 있는 영혼들은 살아있는 신자들의 기도와 미사성제로 도움을 받는다"고 선언하였다. 육신과 분리된 영혼은 자신을 위해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따라서 정화(淨化) 상태에 있는 연옥영혼들의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의 영광을 보면서도 그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다. 아직 지상에 살아있는 우리가 연옥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우리의 기도에 힘입어 연옥의 영혼들이 하루빨리 천상에 이른다면, 그들이 천상교회에서 지상의 우리들을 위해 전구해 줄 것이다. 이를 가리켜 "성인들의 통공"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옥의 영혼들이 하루빨리 천국으로 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며, 이러한 기도는 현세에 사는 지상교회의 소중한 의무인 동시에 자랑스런 특권이다. 지상의 교회에 속한 우리는 자신들의 삶과 죽음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회개하고 기도하며, 준비하여야 한다. 사도 바울로는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립 1,21) 라고 하였다. 이는 곧 "죽는 것이 이득이고 사는 것이 형벌이다"는 성 암브로시오 주교의 말과도 같은 의미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 삶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삶은 분명 커다란 무게이고 짐이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삶의 모든 멍에를 지고 사셨던 예수님 때문에 힘과 위안을 얻는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28절) 나는 내 뜻이 아니라 (요한 6, 36-40) -유 광수신부 -
“신부님, 미사 안 하세요?”
“네? 보좌신부 미사 아닌가요?”
“아뇨. 오늘 저녁미사는 신부님 미사에요.”
주일에는 미사가 다섯 번 있는데, 저의 착각으로 어제 저녁 미사를 보좌신부 미사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제가 잊어먹는 것은 이것뿐이 아닙니다.
매 미사 때마다 인천교구 50주년 기념 구호인 ‘인천교구 성령충만’을 함께 외치자고 지난주부터 신자들과 약속을 했는데, 정작 그 구호를 시작해야 하는 제가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 세 번의 미사를 하면서 단 한 번도 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난 지금에서야 이렇게 기억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저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공통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즉, 신경 쓰지 않으면 자주 잊어먹고 만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기억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들은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계명인 사랑의 계명도 자주 잊어버립니다. 나의 구원, 나의 행복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에게 오늘 우리가 맞이하는 위령의 날은 부족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됩니다.
오늘은 연옥 영혼들을 기억하며 기도하는 날이지요. 우리보다 앞서간 영혼들을 기억하면서 그들이 구원이 얻기를,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 역시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고 실천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달음질하는 날인 것입니다.
저는 ‘후회할 일은 만들지 말자’는 이야기를 자주 합니다. 그러기위해서는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다 나은 나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최후의 순간, 즉 주님 앞에서 나의 삶을 심판 받는 그 순간에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 대부분은 죽음을 잊고 삽니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나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듯이 살아갑니다. 또한 내가 만나는 사람과도 영원한 만남을 가질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누구나 다 죽어서 주님 곁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잊지 말고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야 하며, 특히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위령의 날, 나는 과연 얼마나 후회할 일들을 많이 만들었는지를 반성하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일들을 하나씩 기억하고 바꾸면서 주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로 조금씩 변화할 것을 약속하도록 합시다.
하늘나라에 계신 분들은 참 행복합니다. 우리도 하늘나라에 가게 된다면 정말 행복할 것입니다. 이런 행복을 누리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마음의 가난’을 가장 먼저 꼽습니다. 예수님 시대 쿰란 수도자들은 ‘마음의 가난’의 반대를 ‘완고함’이라 했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을 첫자리에 둡니다. 자기가 아니면 안 되고, 자기가 제일이고, 자기는 잘해야 하고, 또 자기니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자기 안에 자기 힘과 능력만 가득합니다. 인정받지 못하면 불같이 화를 냅니다. 자신을 위한 배려가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한걸음도 떼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한테만 매달립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아니라도 다 할 수 있고, 어떤 것을 이루었어도 모두 다른 이의 도움으로 된 것이라고 합니다.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이를 메우기 위해 부지런히, 그리고 성실하게 자신을 담금질합니다. 오직 하느님께만 매달립니다. 겸손한 사람에게 ‘세상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하느님은 전부요, 모든 것입니다.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경계는 의미가 없습니다.
어제 묵상한 대로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거부하는,
그래서 지옥에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닌 한,
죽은 이도 하느님 사랑 안에 있고
살아 있는 우리도 하느님 사랑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령의 날이라는 것이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뜻에서
죽은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이라면
적절치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모든 영혼들의 친교
또는 통교의 날이라 함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위로한다면
지금 내 옆의 지친 영혼,
지금 내 옆의 외로운 영혼,
지금 내 옆의 방황하는 영혼,
지금 내 옆의 상처 받은 영혼,
지금 내 옆의 사랑 잃고 슬퍼하는 영혼을 위로함이
죽은 영혼을 위로함보다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함은 죽은 이들은 우리보다 먼저
우리가 갈망하는 하느님께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위로해야 할 것은 그들을 보내고 슬퍼하는 우리이고,
오히려 우리는 그들을 부러워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을 살면서
아픈 사람 때문에 많이 마음이 아프고
저만 건강한 것이 많이 미안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찬류 세상에서 힘들고 고통스럽게 사는지!
지난 주 마라톤을 전후하여 이런 분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오늘 독서의 욥처럼
하루하루 사는 것이 너무 힘겹고 고통스러운 분들!
그래서 저는 그 즈음하여 쓰러지신 문 규현 신부님과
이 분들을 생각하면서 마라톤을 뛰었습니다.
마라톤을 뛰기 바로 전날 밤에 만난 분은
하느님께서 왜 자기를 데려가지 않으시고
아직도 살려두시는지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고통스럽고 그래서
빨리 고통을 끝내고 하느님께로 가기를 갈망하는 영혼들은
죽음이 고통을 끝내고 갈망하던 하느님께로 가는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말해야 할 것입니다.
‘모든 고통 끝내고 하느님의 축복 안에 있는 영혼들이여,
아직도 이 찬류 세상에서 고통 받고 있는 우리 영혼들을 위해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해주시오.
이 세상 모든 고통 중에서도 우리가 욥처럼 용기 잃지 말고,
오기와 끈기로 하느님 믿고 갈망하게 해달라고 빌어주시오.’
오늘 독서의 욥은 이렇게 외칩니다.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저는 오늘 위령의 날,
모든 아픈 영혼들이 이 욥처럼 주님을 믿고 갈망하며
마침내 사랑하는 하느님께로 나아가기를 기도하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오늘 저는 죽은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 대한 미련으로
주님께 달려가지 못한 영혼이 있다면
그들도 속히 주님께로 달려가 주님의 축복 안에 머물게 되기를.
“마당을 쓸기 전에 나무를 흔들어서 나뭇잎을 떨어뜨리면 어떨까? 그러면 낙엽 쓸 일이 없을 거야.”
나무를 힘차게 흔들기 시작했지요. 정말로 많은 낙엽이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일에는 낙엽 쓸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저는 어제만큼이나 많이 떨어져 있는 낙엽을 보고서는 할 말을 잊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지요. 나무를 흔들어서 나뭇잎을 떨어뜨려도, 내일이면 나뭇잎이 바람에 의해서 또 떨어진다는 것을 말이지요. 이처럼 세상에는 미리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으므로 성실하게 이 순간을 사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자세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기보다는 오늘을 잘 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현재보다는 내일 일을 걱정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할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지요. 그리고 그분들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인지, 정말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단순히 미래를 걱정하는 것으로 그칠 때가 많습니다. 오늘을 잘 보내는 것이 바로 죽음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인데, 또한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가장 큰 준비인데 걱정만을 하면서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소홀히 여기고 있습니다.
가난에 지친 청년이 본당의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신부님, 정말로 힘들어 죽겠습니다. 제가 언제쯤이나 부자가 될 수 있을까요?”라고 묻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자기를 점쟁이처럼 보는 청년의 말에 어이없어 하기도 했지만 얼마나 힘들면 이런 질문을 던질까 싶었지요. 그리고는 “자네... 지금도 부자인데?”라고 말씀하십니다. 청년은 기가 막혀서 그게 무슨 말이냐고 따지자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세요.
“자네 눈은 세상을 볼 수 있고, 수많은 책을 볼 수 있는 재산이지. 두 손도 원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 재산이야. 두 다리로는 이 세상의 가고 싶은 곳을 다 갈 수 있으니 재산이라 할 수 있어. 게다가 머리와 영혼도 잘 활용하면 큰 재산이 될 거네.”
사람들은 몸에 지닌 것이 모두 재산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몸 밖의 것들을 구하느라 전전긍긍하다 청춘과 건강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미리 많은 재산을 주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즉, 지금이라는 시간에 보다 더 충실할 수 있는 능력과 재능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위령의 날인 오늘, 세상을 떠난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동시에 우리들의 모습도 반성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내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그 많은 재산들을 잘 관리하면서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매우 단순합니다. 우리가 만약 오롯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떠올릴 수 있다면 마음이 아주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이 편안함을 프란치스코 성인은 선(善)이요 사랑이요 진리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주님을 믿을 때 느낄 수 있는 평화와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체험해본 사람만이 알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길 바랍니다. 진정한 믿음이란 잘 되든 못 되든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참 평화가 있고, 여기에 선(善)이 깃듭니다.
내 뜻대로 되길 바라는 것은 믿음이 아니요 고생이며 무거운 짐입니다.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나면, 마음이 온유해지고 겸손해집니다.
참다운 안식을 얻으려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참다운 믿음을 가지십시오.
그러면 내 십자가와 멍에가 편하고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기어이 주님을 뵙고야 말리라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종교학자들은 종교의 생성 이유를 사후 세계에 대한 무지와 불안 등으로 꼽습니다. 모든 인간의 가장 두려운 현실인 죽음, 사실 인간이 공포와 두려움에 싸이는 것도 죽음 때문입니다. 죽게 될까봐 두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이 때로는 저주스러운 것이지만, 죽음 때문에 인간은 겸손할 수 있고, 자신의 나약을 인정하기에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죽음 때문에 우리가 짊어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죽어가는 사람들, 특별히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은 결코 피할 수 없는 이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여러 단계를 거친다고 합니다.
‘퀴블러로스’는 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죽음에 자신을 내맡기기를 거부하는 단계이고, 두 번째 단계는 왜 하필이면 죽음의 위협이 자신에게 닥쳤는지 분노를 느끼는 단계이고, 세 번째 단계는 이미 절박하게 다가온 미지의 운명의 세력인 죽음을 피하기 위하여 하느님과 담판을 하는 단계이며, 네 번째 단계는 체념과 절망이 섞인 의기소침의 단계이며, 마지막 다섯 번째 단계는 죽음을 받아들이고 동의하는 단계이다.”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기에 끝내 죽음에 굴복하는 것이 죽음의 단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신앙은 죽음을 이긴 부활의 신앙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이 고통의 바다, 죽음의 위협이 넘실대는 파도를 헤쳐온 것입니다.
‘조르드 베르나노스’라는 작가는 작품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에서 블랑쉬라고 하는 한 수녀의 입을 통하여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의 엄청난 고뇌를 피할 길이 없다. 그러나 안심하고 고뇌할 수는 있다.”
그렇습니다. 부활을 믿고 희망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이들과 다른 것은 죽음에 짓눌린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실 주님의 은총을 믿기에 안심하고 고뇌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시편의 시인은 노래합니다.
“제가 비록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니 당신께서 저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시편 23, 4)
주님은 나의 목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약속’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사도 성 바오로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2티모 3,16)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위로와 희망의 말씀에 우리는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장 큰 고통인 죽음과 그에 대한 의문도 성경의 가르침을 통하여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죽음을 극복한 희망일 경우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 인간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죽음을 극복하는 말씀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확신에 찬 말씀으로 가르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 25~26)
나아가 묵시록의 저자는 죽음에 대하여 이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묵시 21, 3~4)
이제 우리는 이 같은 말씀에 희망을 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 살아있는 나날 동안 죽음을 어떻게 잘 준비해야 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일본 성심수녀회의 ‘스즈키 히데코’ 수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살아남은 우리에게 반드시 메시지를 남기고 이승을 떠납니다. 그것은 형태를 달리해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지만, 다음과 같은 말로 집약할 수 있습니다.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리고 서로를 소중히 해주십시오. 살아있다는 것은 한없이 고귀한 것입니다.’”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로 불렸던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1912~2007) 신부도 이같이 말합니다.
“죽음은 우리네 삶에서 황홀한 순간이며 환상적인 만남을 가져다주는 눈부신 순간일 수 있다. 인생에는 두 가지 근본적인 것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다. 절대로 망쳐서는 안 되는 그 두 가지 일은 사랑하는 것과 죽는 것이다.”
결국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있는 우리들이 할 일은, 믿음과 사랑, 불멸의 희망, 용서 등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준비 없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첫째는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가난하게 산 사람이든 부유하게 산 사람이든 죽을 때가 되면 "좀 더 나누면서 살 수 있었는데…. 긁어모으고, 움켜쥐어 봐도 별 것 아니었는데 왜 좀 더 나눠주지 못하고 베풀며 살지 못했을까? 참 어리석게 살았구나" 이런 생각이 자꾸 나서 이것을 가장 크게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좋았을 걸,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쓸데없이 행동했던가"하고 후회한다고 하지요. 당시에는 내가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 때 참았더라면 내 인생이 많이 달라졌을 텐데 하며 후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좀 더 행복하게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빡빡하고 재미없게 살았던가? 왜 그렇게 짜증스럽게 힘겹고 어리석게 살았던가? 얼마든지 기쁘고 즐겁게 살 수도 있었는데…"하며 복되게 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또한 그러한 나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힘들었을 것을 뒤늦게 깨닫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 천주교 신자들은 이러한 후회와 미련에서 자유롭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확신하기에 죽음 앞에서 두려움도 후회도 훨씬 적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히 마태오 복음 25장에 나와 있는 최후 심판의 기준대로 가장 가난한 이에게 베푼 것이 나에게 베푼 것이라는 주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온 이라면 베풀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대신 평생을 나누며 살아왔다는 보람으로 흐뭇할 것이고 하늘에 쌓은 보화에 더 큰 희망을 가질 것입니다.
또 세상 사람들은 좀 더 참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많이 한다고 하지만 신자들은 이 부분에서도 자유로울 것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마태 5,44-45)는 말씀을 수도 없이 들었고 이 말씀을 지키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기도와 실천으로 보낸 사람은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실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미신자들과는 달리 최후의 심판을 믿고 착하게 산 사람은 죽은 후에 천국에, 악하게 산 사람은 지옥에, 보속할 것이 남은 사람은 연옥에 간다고 믿습니다.
그러면 위령성월을 맞아 신자 여러분께 물어보겠습니다.
"내가 지금 죽게 된다면 나는 천국에 갈 것 같습니까? 지옥에 갈 것 같습니까? 아니면 연옥에 갈 것 같습니까?"
아마도 대부분이 연옥에 갈 것 같다고 겸손하게 표현하실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문제를 하나 제기해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죽으면 연옥에 갈 것 같다고 표현하시는데 그렇다면 연옥에 있는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줄 사람이 있으십니까? 내가 나의 젊음과 모든 정성을 다 바쳐서 키운 자식들이 내가 죽으면 나를 위해서 기일에 기도를 하고 미사를 봉헌해 줄 것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또 평생을 함께 한 남편이나 아내가 나를 위해 기도해 주겠는지를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기도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분은 참으로 행복한 분입니다. 그렇지 못한 분이라면 노력해야 합니다.
노년을 위해서는 보험을 들고 저축을 하면서도 죽은 후 연옥에서 고생하는 나를 위해 기도 한마디 해줄 사람이 없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사람입니다.
오늘은 돌아가신 분들의 영원한 안식을 위해서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예전의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기일이 되면 마치 제사를 지내듯이 돌아가신 분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천국에 들기를 미사와 연도를 통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전통을 그대로 자녀들에게 물려줬지요. 의미 깊고 아름다운 이 전통을 지킬 의무가 이제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돌아가신 선조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영원한 안식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위령성월을 생각하면 ‘연도하는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렸을 때 조상님들 제사 때마다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바쳤던 연도….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중에서도 ‘연령을 위하여 빌으소서.’라는 기도문만큼은 뚜렷이 기억난다. 기도문 할 때의 목소리와 어떠한 톤으로 해야 되는지도 정확히 기억한다. 아마도 반복되는 기도문이고, 한두 번만 접해도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기도문이기 때문인 것 같다.
연도 기도문 중에서 자주 반복되고, 그러기에 누구나가 쉽게 따라할 수 있는 이 기도. 그런데 이 기도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한 기도’라는 점이다.
우리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장례미사와 연미사를 포함한 모든 미사 안에서, 식사할 때마다 바치는 식사 후 기도에서, 그리고 위에서도 언급한 연도를 통해서이다. 물론 이외에도 많은 기도가 있겠지만,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어떠한 마음으로 기도하는지 생각해본다면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가? 그래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인가? 아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기도의 도움을 받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라기에 기도를 하는 것이 다. 이는,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도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는 바로 ‘주님’이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우리 모두는 주님이라는 거대한 줄기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주님을 통할 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위령성월이 다가왔다고 하면, 막연히 죽음, 묘지, 연도, 절기상 추워지는 계절 등을 떠올린다. 그러기에 조금은 가라앉은 마음에서 삭막하고 차가운 느낌으로 위령성월을 대할 때가 있다. 만약 내 마음이 그랬다면, 이제는 이러한 마음을 따뜻하게 녹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한 기도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은총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은총이라는 것이다.
위령성월을 시작하는 첫 주일이자 위령의 날인 오늘, 주님의 사랑을 마음으로 느끼면서 그리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면서, 기쁘고 활활 타오르는 마음으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수님의 진복팔단은 참으로 위대한 하느님의 사랑이며 그것을 인간에게 준 가장 분명한 계명이다. 모세의 십계명이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인간적이며 하느님께로 향하는 위대한 권리장전이듯이 말이다. 그럼으로 십계명은 인간이 아비와 하느님을 향해 인간답게 살아가는 기본법이라고 한다면, 진복팔단은 하느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가장 확실한 좌표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의 으뜸인 진복팔단을 살아낼 때 우리는 성인, 성녀가 되는 조건을 갖추는 것이라고 본다.
그런 차원에서 진복팔단을 보면, 첫째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즉, 실제적인 가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난을 택할 수 있는 중용의 용기가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훗날에는 하늘을 차지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즉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 것이기에 공동의 것으로 돌릴 수 있는 가장 소중한 공동체 성을 그대로 살 수 있는 분이라고 본다.
둘째는 슬퍼하는 사람이다. 슬픔 끝에 위로를 받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진정한 슬픔은 자신의 감정에 의한 그런 정도의 슬픔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슬퍼하고 하느님 나라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차원의 슬픔을 지닌 사람이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참 하느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셋째는 온유한 사람이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유함이 뭔지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하느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사람이다. 하느님 자신이 온유함의 근원이시기에 그것을 아는 사람이 땅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아야 함은 온유함의 향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정확히 알 필요가 있고, 그것에 근거한 온유함을 몸에 익혀야 함이다.
넷째는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만족의 척도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즉 다 갖춘 것이 아니라, 하느님 때문에 목마른 사람의 모습을 갖춰가는 그런 사람이다. 그 끝에 만나는 것이 완성을 향한 옳음이다. 즉 완성과 만족의 척도를 우리의 어떤 감정 차원에서 다루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서 찾는 사람이다. 즉 만족의 척도를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그럼으로 그분의 잣대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론을 짓는 것이다. 사랑이 전제 된 중용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는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자비를 입는 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아무 손색이 없다고 본다. 즉 설명을 하면 더 어려워 질 것 같고 의미가 퇴색될 수 있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 속담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 다”고 되어 있지 않은가. 하느님의 자비가 그런 것임은 자명한 진리이다.
여섯째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은 아주 맘에 드는 문구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른이면서 어느 차원까지 마음이 깨끗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어 있을 수 있느냐이다. 사람의 마음이 거울이라면 세제를 동원해서라도 반짝반짝 하게 닦아 광이라도 나게 하련만, 이건 마음이니 쉽지가 않다. 그러나 천리 길도 하루부터라고 했으니, 오늘부터라도 아이들의 마음으로 회귀하는 길 외엔 달리 도리가 있겠는가 말이다. 진짜 아이가 되어 순수하게 아버지 하느님과 대화를 하자는 것이다.
일곱째는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들이다. 위의 것들을 다 받아들이고 이뤄나가는 과정이 바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참으로 평화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당연히 백성의 아들이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이자 하느님의 아들이야 말로 바로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예수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의 삶이 그랬고, 성인들의 삶이 그랬으니 평화를 위해 일할 수 있도록 기도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고 본다.
여덟 번째는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이다. 이것은 일곱 가지의 계명을 종합하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 꽃밭이다. 인간의 꽃밭이요 하느님의 꽃밭이며 영의 꽃밭이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 살아온 삶이라고 본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했고, 교회 안에서는 성인이 나온다고 했다. 즉 죄 속에서도 영성의 꽃이 피듯이 박해의 피 속에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감은 참으로 신비 중의 신비라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비를 통과해 나아갈 때 바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진복팔단을 한 단계 한 단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피와 땀이 한 방울 한 방울씩 녹아 스며든 것이 바로 그분의 삶이며 그것이 진복팔단에 그대로 들어 났다고 본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공생활 서두에 이것을 선포하고 시작했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이런 진복팔단의 길에 들어서서 사는 사람만이 바로 하늘나라로 바로 들어가는 것이며 성인의 길에서 삶을 사는 것이라는 것을 천명한 것이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했던가?
-유영봉 몬시뇰-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했던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매일 다가서고 있다.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이 결국 죽음에로 가는 여정인 것을. 그러나 우리는 부활한 예수님이 들어간 그 참 생명을 믿기에, 현세의 삶도 의미가 있다.
1.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
11월은 위령(慰靈)의 달입니다. 교회력으로 한해를 마감하는 때입니다. 그리고 온갖 초목들도 무성했던 잎사귀들을 떨어뜨리고 자신들의 생을 마무리하는 조락(凋落)의 계절입니다. 교회는 이러한 자연의 섭리에 맞게 '위령의 달'을 지내며 돌아가신 분들의 영원한 안식을 빌고, 우리들의 삶도 되돌아보게 합니다.
누구도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는 자연의 질서를 뛰어 넘을 수는 없습니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 되돌아설 수 없듯이,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한 순간도 쉴새없이 죽음에로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음을 누가 부인하겠습니까? 우리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쏘아진 화살처럼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죽음을 향해 내닫고 있음이 사실입니다.
우리는 매일 어떤 일을 결정하고 선택하면서, 베틀에서 베를 짜듯 하루 하루를 엮어가며 삶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매일 살아간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그렇게 하루 하루를 사는 것은 결국 죽음에로 다가서는 일이기에 "매일 죽어간다."는 말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는 것이 죽는 것이다."는 말이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렇게 죽음은 우리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생명의 시작과 함께 우리 안에 이미 있었고, 삶 안에서 싹이 텄고, 우리가 매일 사는 삶의 여정에서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적과의 동침'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렇게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죽음은 생명과 함께 시작되었고, 매일의 삶 안에 함께 있으며, 사는 만큼 가까이 오고 있는 것입니다.
2. 영원한 생명을 믿나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인간이 생물학적으로 죽어도 영혼은 '불사불멸(不死不滅)'한다는 것을 믿습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고 어떤 모양으로든지 새로운 차원의 삶을 계속한다."는 이 믿음은 인류가 동굴에서 살던 때부터 가장 오래 동안, 모든 민족이 보편적으로 지켜온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라자로를 소생시킨 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11,25-26) 하시며 당신이 바로 생명을 주인이심을 선언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사형수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교는 이 세상에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바로 부활 신앙 위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지상의 삶이 끝나는 그 연장선상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차원의 영원한 생명'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참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앞서 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인 것 자체가 하나의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신앙이란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뿐 아니라,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 때, 부활한 예수께서 들어가신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믿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빌어 성령을 통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릴 차원에 대해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1고린2:9)라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셨습니다.
3.매일 영원한 생명을 가꾸는 삶을 살자.
사실 우리는 죽음 후의 세계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아무도 저 세상을 경험해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자신 있게 대답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건너가시고, 진리자체이시고 거짓을 말할 수 없는 주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진실하심에 의지하여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2000여 년 전 예수님께 실제로 일어났던 그 부활이 어떻게 우리에게도 가능한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이해의 실마리를 던져주시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비록 여러분의 몸은 죄 때문에 죽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은 이미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영(靈)은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로마 8,10-11)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깨닫기 위해, 사도 바오로께서 로마인들에게 써 보낸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여러분의 영(靈)은 살아 있습니다." 하신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돌감나무에 단감을 접붙이면 무슨 감이 열립니까? 단감이 열리지요. 이처럼 우리는 비록 원죄로 인해 악으로 기울어지고 자주 죄에 떨어지고 불완전하기 이를 데 없는 돌감나무와 비슷하지만,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구세주로 믿고, 그분의 영을 내 안에 모시고,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의 가르침대로 산다면, 우리도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자라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하신 바오로 사도처럼 주님과 일치하는 삶을 살면 우리 안에 계시는 그분의 성령을 통해, 우리는 포도나무와 그 가지처럼 주님과 하나가 되어 그분의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는 설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그 가지이다. "(요한15,5)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요한 6,56)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의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신 당신의 성령을 시켜 여러분의 죽을 몸까지도 살려 주실 것입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의 삶 안에서 자라고 있듯이, 나날이 늙고 쇠퇴해 가는 우리의 육신생명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자라고 있음을 우리는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알이 애벌레가 되고, 애벌레는 번데기가 되고, 번데기는 꼬치 안에서 변신의 죽음을 거치면서 나비로 날아가는 새 차원의 삶을 시작하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껍질을 벗는 순간 새로운 차원의 영원한 생명을 가꾸기 위해서는 참으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성령께서 내 안에 살아 계시어 내가 참으로 주님의 성전"(1고린3,16)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 몸이 참으로 하느님의 성령이 거처하시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매일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묶은 껍질을 벗기 위한 자신과의 진한 싸움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기적인 껍질을 벗기 위한 자신과의 싸움은 하나의 죽음입니다. 이렇게 매일 자신에게 죽어야 그만큼 부활의 싹이 자라는 것입니다. 죽는 만큼 새롭게 사는 것, "죽어야 산다."는 이 빠스카의 삶을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신자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4. 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서 죽음의 의미
오늘 위령의 날은 단순히 여기 누워 계신 분들과 생전에 맺었던 인연의 기억들을 나누고 되새기는 날로 그치지 않습니다. 오늘은 우리보다 앞서가신 분들의 묘소 앞에서 매일 죽고 그만큼 부활하는 우리의 빠스카의 삶이 어떻게 가꾸어지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성찰과 회개의 피정을 하는 날입니다.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파멸의 날이 아니라, 마루에서 문턱을 넘어 안방에로 건너가듯이, 시간에서 영원에로, 부활한 예수가 들어가신 그 생명에로 건너가는 빠스카의 축제임을 되새기는 날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인에게 있어 죽음은 가장 큰, 가장 어려운, 순명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존재가 전적으로 하느님의 손에, 그분의 뜻에 달려 있음을 온 존재로 받아들이며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내 맡기는 행위입니다.
또한 신앙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마지막 세례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생명에서 죽음에로 건너가는 임종의 고통을 통해 세상의 죄를 다 씻으셨듯이 우리는 임종의 고통을 통해 우리가 저지른 모든 죄와 허물 그리고 세상의 죄까지도 대신 속죄하는 속죄의 큰 제사요, 세례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분께 희망을 걸고, 그분과 일치하는 삶을 추구했던 모든 분들, 믿음 안에서 우리와 인연을 맺었던 이들이 그분의 부활에 동참하며 참된 생명을 누리시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매일의 우리 삶 안에서 움트고 자라는 것임을 명심합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더욱 주님과 일치하여 매일 죽고 부활하는 삶을 살아 주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하신 영원한 생명을 매일 가꾸어가도록 합시다.
-경규봉 신부 -
11월은 추수를 마감하는 달이며, 겨울을 준비하는 달이다. 낙엽이 지고 서리가 내려 겨울이 다가왔음을 알리며, 한 해의 마감을 준비하는 달이기도 하다. 인생으로 비유하면 죽음을 앞둔 노년기와 같다. 때문에 죽음에 대해 묵상하기 좋은 달이다. 교회는 이 달을 위령성월(慰靈聖月)로 정하여 죽은 이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한다. 동시에 우리도 언젠가는 인생을 마감해야 함을 묵상하고 죽음을 준비하도록 한다.
먼저 11월의 첫날을 모든 성인의 날로 정하여 천국의 영광과 영복을 누리는 성인들을 묵상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대한 희망을 갖고 생활하도록 한다. 이어서 다음 날에는 위령의 날을 지냄으로써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연옥에 대해 묵상하도록 한다.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는 죽은 이들을 기억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죽은 이의 시신을 공경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달력에 따르면 한 해의 마지막 날인 2월 마지막 날에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죽은 이를 기억하면서 함께 나누어 먹고 마셨다. 그리스도인들도 각 지역의 풍습에 따라 죽은 이들을 기억하기 위하여 모였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장례식에 묘지에서 성찬례를 거행하기도 하였으며, 통곡 대신에 찬미가와 시편으로 희망의 노래를 불렀다. 이는 부활에 대한 신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4세기에 로마에서는 베드로 사도좌 축일인 2월 22일을 죽은 이를 기억하는 날로 지냈다. 중세에 이르러 교회는 11월 2일을 위령의 날로 선포하였는데, 이는 998년 프랑스 클뤼니 수도원의 오딜로 원장이 11월2일을 위령의 날로 정한 이후부터 교회 안에서 보편화 되었다. 오딜로 원장은 클뤼니 수도원에 속해 있는 수도 공동체들에 칙령을 보내 이날 연옥영혼을 위한 미사를 봉헌하도록 했다.
그 후 1003년에 교황 실베스텔 2세가 이를 승인하고 위령의 날이 교회 안에 널리 지켜지도록 권장했다. 이리하여 프랑스와 독일 영국 스페인에까지 이런 관습이 퍼져나가 14세기에 위령의 날이 교회 전례력에 포함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 안에서는 단지 이날만이 아니라 11월 한 달을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달로 지내는 관습이 보편화됐다.
교회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을 믿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지상 교회와 연옥에서 정화중인 연옥 교회, 그리고 천국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는 천상 교회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세 교회는 서로 친교를 이루며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결합돼 있다. 이들은 기도와 희생, 선행으로 서로 도울 수 있는데 이를 성인의 통공이라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희생함으로써 그들을 돕는 것이다.
위령의 날에 우리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신 조상을 위해 연도를 바치고, 죽은 모든 이들이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이날 교회는 교황의 지향에 따라 3대의 미사를 봉헌한다. 이날 미사의 주제들은 죽음을 뛰어넘는 강인한 희망(첫 미사), 구원의 관문인 죽음 앞에 가질 겸손한 자세(둘째 미사) 그리고 세례를 통해 이루는 부활의 완성에 대한 굳은 믿음(셋째 미사)에 대해 말한다.
위령의 날인 오늘, 죽음에 대해 묵상하고 그럼으로써 삶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살아가자. 우리도 언젠가 하느님께 갈 것임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의 것에 얽매이지 않도록 하자.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처럼 되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임을 묵상하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도록 하자. 또한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 친지들을 위하여 기도하자. 연옥에서 정화의 과정을 거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간절히 청하면서 기도와 희생의 삶을 봉헌하자........
상여를 메고 가면서 느낀 생각
-서진영 신부-
찬미 예수님!
일전에 상여를 매었을 때 일입니다. 어느 더운 여름 신앙학교 준비로 잠시 나가있던 공소에 초상이 났습니다. 그 마을 할머니 한분이 돌아가셨는데, 상여를 맬 사람이 없어서 저와 함께 가 있던 남자 교사들이 꽃상여를 들었습니다. 장례미사를 마치고 상여를 들었을 때, 마을 공터에 나와 있던 동네 어르신들이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어느 할머니 복도 많다고. 그래서 젊은 사람들이 상여도 들어준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제 마음이 조금 우쭐했습니다. 뭐, 이정도 가지고. 거의 작은 집채만한 꽃상여가 보기보다는 가볍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역시 세상은 제 마음 먹은 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큰 길까지 가려니 했는데, 가다보니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었습니다. 장의차에 실는 것이 아니라, 그 길로 산 정상 비탈까지 2시간을 올라갔습니다.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꽃상여 매고, 장지까지 갔습니다. 등산 코스치고는 30분거리의 완만한 비탈이었을지 몰라도, 상여를 매고 올라가기에는 멀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앞에서 상두꾼이 곡을 하고 뒤에는 베옷에 짧은 지팡이 짚은 유족들이 흐느끼고, 함께 상여를 매고 있는, 아니 상여에 매달려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키 작은 아저씨들은 틈만 나면 멈춰 서서 유족에게 넘지시 뭐 주는 것 없냐며 시위를 했습니다.
상여를 들 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이 ‘무겁다’라는 말이랍니다. 왜냐면 정말 무겁기 때문입니다. 느릿느릿 올라가는 운구길에 매고 있는 관 속에 있는 할머니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돌아가신 할머니 체구는 작아도, 왜 이리 관은 무거운 것을 쓰셨는지, 그것도 이렇게 큰 꽃가마는 왜 쓰는지, 정말 내가 왜 이걸 들고 있어야 하는지. 그 할머니께서 생전에 무슨 좋은 일을 많이 하셨는지는 몰라도, 면식도 없는 내가 왜 이 무거운 상여를 매고 알지도 못하는 장지까지 가야하는지 길에서 원망 많이 했습니다.
올라 가는 내내 오늘 복음 말씀인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하신 말씀을 생각하며 자신을 달랬습니다.
힘겹게 장지에 도착해서 하관을 하고 매고 온 꽃상여를 불에 태웠습니다. 그렇게 무겁게 느껴졌던 관이 내려 놓는 순간엔 너무 가벼웠습니다. 망자에 관에 흙을 뿌리면서 사람들이 망자에게 건넨 말이 ‘이제 주님 품에서 편히 쉬세요’ 였습니다.
그 순간 관을 매고 온 내가 그 무게를 졌다고 생각했는데, 돌아가신 분 역시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 안에서 편히 쉬기 위해, 영원한 안식을 누리기까지 허리가 휠 정도로 세상의 무거운 짐을 안고 오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사셨습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의 말이 있습니다. “힘들고 지치면 쉬라구요? 좋든 싫든 주님 곁에서 앞으로 영원히 쉴 텐데, 그때가도 늦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무겁다고 원망한 그 상여의 무게, 사실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무게였습니다. 살면서 언제 한번 들어보겠다며, 언제 한번 해 보겠냐며, 하느님이 좋은 일 하라고 주신 공로의 무게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데 있어 짐을 덜어주시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맞는 짐을 지도록 살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짐을 지게 하시며 충분히 버틸 수 있는 힘과 보람을 주십니다. 지금 무거운 이 짐이 사실 내가 천국으로 가져갈 공로입니다. 아멘.........◆
아르막의 성 말라키아 주교에게는 사랑하는 누이동생이 있었다. 그런데 동생은 너무나 세속에 물들어 있었다. 충고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런 동생이 갑자기 죽었다. 그래서 성인은 동생의 죄를 사해주시도록 기도하며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지만 시간이 가면서 미사드리는 횟수가 뜸해졌고 나중에는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꿈속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네 동생이 문간에 와 있는데 30일 동안 아무것도 주지 않기 때문에 불평을 하고 있다.” 꿈에서 깨어나 보니 동생을 위해서 미사를 드리지 않은 것이 30일이나 된 것을 알았다. 그래서 주교님은 다시 미사를 드리기 시작했다. 며칠 뒤 꿈에 동생이 성당 문간에 서서 검은 옷을 입고 성당으로 들어오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는 계속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며칠 뒤에 꿈을 꾸었는데 이번에는 동생이 흰옷을 입고 성당 안에 들어왔으나 제단에는 오지 못했다. 그래서 미사를 또 드렸다. 또다시 꿈을 꾸었는데 누이동생이 흰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제대 가까이에 와 있었고 얼굴이 기쁨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래서 주교님은 ‘내 기도가 이루어졌구나’ 하며 기뻐하였다고 한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모든 이를 위해 자주 기도하자.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대한 우리 믿음의 표현이자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형제·친지들을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의 행위이기도 하다.
니다.
형님은 3년 전에 세례를 받았지만 신앙이 그리 깊지 못했습니다. 신앙 안에
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이 컸습니다.
동생인 제가 형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는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형님이 사경을 헤매기 시작할 때 가족 모두
가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는 형님을 바라보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고 형님이 가족을 영원히 떠난다는 것은 더 큰 슬픔이었습
니다. 용기를 내어 형님의 임종을 돕기로 했습니다. 고통 중에 있던 형님께 이제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그분께서 이제 고통 없이 편히 쉬게 해 주실 거
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불안했던 형님의 얼굴이 평온해졌고, 가족 모두
와 힘겹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습니다. 용서를 청하는 형님의 마지막 말
은 제가 이 세상에서 지금껏 들어 왔던 말들 중 가장 아름다운 말이었습니
다. 그렇게 떠난 형님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복음을 믿게 했습니다. 형님
이 겪어야 했던 엄청난 고통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었음을 깨달았습니
다. 형님은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되었습니다. 형님의 구원이 나의 희망이
며 우리 모두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죽음 뒤에 반드시 찾아오는 하느님심판의 두려움을 강조해 왔습니다.. 그리고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역시 오래된 우리의 전통 중에 하나입니다.. 근데 이 사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역시 연옥의 존재가 그 안에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창기 교회에서는 부활에 대한 확신으로 어서 주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고대하면 희망과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죠... 우리의 현세는 이런 부활의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이었기에 죽음 역시 두려운 것이 아니었고 모든 것의 끝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심판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부활에 대한 희망이 훨씬 강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하느님의 심판과 죽음이 주는 두려움은 점점 더해갔고 그 이면에는 지옥처럼 완전히 희망을 상실한 곳은 아니지만 지옥과 똑같은 고통을 당해야하는 연옥... 그리고 자신은 천국에는 바로 가지는 못할 것이고 죽음 이후에는 이 엄청난 연옥의 고통을 겪어야 함을 미리 걱정하고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또한 죽은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 역시 논리적으로 따져 봐서 연옥에 있는 영혼들을 위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지옥에 던져진 영혼은 아무리 기도하여도 거기서 나올 수 없다.. 영원히 벌 받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천국으로 바로 올라간 영혼은? 천국은 개선한 교회요 영광된 교회로서 거기에 계신 분들로부터 오히려 우리가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곳은 연옥이며 결국 죽은 자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연옥에서 고생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죽은 자들이 하루빨리 천국으로 올라가도록 도움을 주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과 연옥과 현세의 교회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을 교회는 성인들의 통공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일단 위령의 날 의미와 그 안에 담겨 있는 연옥의 존재 설명은 이 정도로 하고 이제 오늘의 독서와 복음으로 넘어가 보자... 오늘 미사는 세 가지 다른 미사를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데 본 강론은 첫 미사로 한다.. 오늘 복음 말씀은 마태오 복음서에 나오는 유명한 산상설교로서 예전에 진복팔단이라고 해서 참 행복 여덟 가지에 관한 말씀이라고 불렀던 내용입니다.
이 설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대중들을 상대로 한 연설이라는 점에서 크게 드러납니다... 누구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장 먼저 말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긴 교육과정 중에서는 처음에는 쉬운 내용부터 시작해서 핵심으로 가기도 하겠지만 여러 곳을 두루 다니시며 불특정 다수에게 여러 가지 말씀을 한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담겨있는 하느님의 말씀 중에 핵심에 가까운 내용이 오늘 발표되었을 것이고 제자들에게 마음속 깊이 그 장면이 각인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중요한 연설을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입장에서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일단의 사람들이 쭉 나열됩니다.. 대충 왠만한 사람들은 이해가 됩니다... 상식적이건 우리가 그리스도교와 관계없이 배워왔던 도덕적인 맥락에서든 대체로 이해가 되는데 가장 중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젤 처음과 두 번째로 행복하다고 선언하신 내용은 선득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보통 마음을 넓게 가져 라고 말하죠.. 그리고 마음이 풍요롭다는 말도 있습니다.. 근데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니? 게다가 다른 복음서에는 아예 마음이라는 말도 빠져있다.. 이 점은 예수님의 원 가르침에서 핵심은 가난 자체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니 대체 가난한 것이 왜 행복한 것 일까?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슬픔은 더욱 이해가 안 된다.. 청빈은 나름 되로 동서양에서 부끄러워해야할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로서의 역할을 인정했다손 치더라도 아니 슬퍼하는 사람이 행복하다니 이게 무슨 말씀인가?
사실 가난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서 볼 때도 예수님께서 중요하게 생각하신 덕목 중에 하나다.. 부자들이 얼마나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힘든가를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물품 말고는 절대 많이 가지지 말라고 당부하시거나 부자보다 가난한 자들의 헌금을 귀하게 여기시는 대목. 그 외에도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직간접으로 가난의 중요성을 이야기 하셨다.. 분명 예수님이 모자라는 듯이 사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입니다... (물론 현대의 자본주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 점을 그리스도교회가 많이 강조하지 않는 점도 있습니다.) 근데 오늘 복음말씀에서는 마음이 앞에 첨가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마음이 넓고 풍요롭지 못하고 옹졸한 경우? 아닐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일까요? 사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난을 강조하신 예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혹은 유지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정성을 그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거죠.. 왠만한 노력이 없이는 결코 부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 즉 하느님이 그 안에 들어갈 공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머리에는 온통 돈 생각뿐이고 육체도 쉬지 않고 일해야 돈을 벌수 있죠.. 게다가 풍요로운 상태에서는 죄를 지을 수 있는 환경과 기회는 더욱 주어지고 뼛속깊이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는 오히려 멀어집니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란 역시 그 안에 하느님을 채울 수 있는 공간이 많은 사람을 의미할 것입니다.. 온갖 이 세상 걱정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이 아니라 단순하고 진실한 마음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야 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슬퍼하는 사람들이 행복하다라고 하신 의미는 무엇일까요? 슬프다는 것은 결코 행복과는 거리가 먼 심리적 상태입니다.. 물론 문학적 작품에서의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제외하고 일상생활에서 말입니다.. 분명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슬픔은 정신의 순화적 차원을 이야기하시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담에 나오는 말씀 즉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입니다 라는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슬픔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모든 슬픔과 고통은 인간이 저지른 죄의 결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죄들이 인간을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가 있는 사람은 보통 자신의 죄를 지극히 슬퍼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저지른 죄와 그 결과에 대해서 깊은 슬픔을 느낍니다.. 이 세상에는 자신만을 위해 살지 않고 정말 남을 위해 오지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이 세상의 부조리와 죄악과 그 결과로 초래되는 현실의 비참함에 너무나 슬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열심히 노력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슬퍼하는 사람이란 바로 자신과 인류에 죄에 대해 깊은 반성과 참회를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 건강해서 백 살까지 살 거야.”
그런데 이렇게 말씀하신 날, 그것도 각자의 집으로 가기 위해서 헤어진 지 10분도 안되어서 친구 분은 교통사고로 아쉽게 주님의 집으로 가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집으로 가시는 친구를 향해서 “잘 가.”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인사가 될 지는 정말로 몰랐다고 하시네요.
스스로 건강을 자신 있어 하시는 분들이 있지요. 하지만 내가 이 세상을 떠나 주님 곁으로 갈 시간은 그 누구도 모릅니다. 성경에서도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떤 대학 교수님께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다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 합니다.
“만약 내가 3일 뒤에 죽는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시겠어요?
가족과 함께 있겠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여행을 가겠다. 내가 그동안 미워하고 적대시했던 사람들과 화해를 하겠다.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전화하겠다.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편지를 쓰겠다. 그동안의 삶을 정리하는 마지막 일기를 쓴다. 등등……. 학생들은 자신들이 3일 뒤에 죽을 것을 대비해서 해야 할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소망은 뜻밖에도 다들 평범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학생들의 말이 끝나자, 교수님께서는 칠판에다가 이렇게 적으셨다고 합니다.
“Do It Now.”(바로 지금 하라)
‘죽음이 눈앞에 닥칠 때까지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그 모든 일을 실천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즉, 우리 가톨릭교회가 죽음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면서 죽은 이들을 위해 특별히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그 죽음을 피해갈 수가 없기에, 죽음에 대해서 깊이 묵상하고 지금 이 현재를 보다 더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해 제정된 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내 자신은 얼마나 죽음에 대한 준비로써, 주님께서 주신 이 현재라는 시간을 충실히 쓰고 있는가 라는 반성을 해 봅니다.
내가 언제 어디서 죽을 지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미워하고 싸우고 단죄하면서 살아가는지, 또한 마지막 남은 시간에 해야 할 것들은 아주 평범하고 단순한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하지 못하고 뒤로만 미루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서도 깊이 반성을 하게 됩니다.
이제는 지금 당장 해야 할 때입니다. 후회할 짓을 만들지 않는 내가 되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죽음을 잘 준비하는 것이 아닐까요?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인정을 받기는 하였지만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에
우리 없이 그들만 완전하게 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히브 11,39). 이 구절은
완벽한 삶을 살았던 욥이나 수많은 구약 속 성인들도 결코 오늘 우리가 누리는
이 ‘특별한 은혜’는 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무엇이기에 이렇게 귀하게 여기시는지, 다윗 왕처럼 기도하고 싶어집니다
(2사무 7,18 참조). 그리고 자신의 처절한 삶이 너무나 비통해서 주저앉아
하소연할 수밖에 없었던 욥에게 너무 미안한 생각이 듭니다. 특별한 오늘,
이렇게 좋은 약속을 다시 확인해주시는 것을 보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이 성인들처럼
완벽하지 못해도, 아들 예수님의 귀한 피로 얻으신 자식이기에 애지중지하십니다.
우리들이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워지고 더 사랑스러워지는 것을 보시는 것은
하느님의 가장 큰 기쁨이신 게지요.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다”는 말로 힘을 실어주신 바오로 사도께도 감사하고 싶네요.
내 안에 하느님 사랑이 이렇게 가득 채워졌으니 우리는 예수님만큼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큰 복을 받고 태어난 복덩이들입니다.
그대에게
‘죽음을 어떻게 살까?(Dying Well)’
호스피스 전문가인 몬타나 대학의 아이라 바이옥(Ira Byock)교수가 펴낸 책 제목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죽어가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과 지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잘 사는 것은 잘 죽기 위한 방편입니다.
잘 죽는 사람은 잘 살았기 때문에 잘 죽습니다.
삶과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한 과정입니다.
죽음으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삶으로 건너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지구촌에는 웰 빙(Well-Being 잘 삶)바람이 거세고 불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죽음(Dying Well)을 이야기하지 않는 잘 삶(Well Being)은 허구입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고 재미있게 살 궁리만 하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죽음 앞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한다면 그 삶은 결코 잘 산 삶(Well-Being)이 아닙니다.
언제 어떤 모습으로 죽음과 마주하더라도 의연하고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삶(Well Dying)이 잘 삶(Well-Being)입니다.
대지(大地)에 깊이 뿌리내리고 여름 내 푸르고 무성한 잎새들로 풍성한 그늘을 선물하던
느티나무는 지금 갈색 옷으로 갈아입고 겨울 맞을 채비하고 있습니다.
저 느티나무는 잘 삶(Well-Being)이 잘 죽음(Dying Well)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느티나무처럼 하느님 안에 깊이 인생의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이 잘 살고 잘 죽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위령(慰靈)의 날입니다.
죽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나의 죽음도 생각하는 날입니다.
행복한 하루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 왔기 때문이다. 나는 보내신 분의 듯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듯은 도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당신 뜻을 실천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왔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나는 나의 뜻은 무엇인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무슨 뜻을 갖고 태어난 것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과연 내 뜻이란 있는 것인가? 있다면 나의 뜻은 무엇인가?
나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내 뜻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동안 내 뜻이라고 많은 말을 했고 또 그 뜻을 이루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내 뜻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니다. 사실 "나는 이것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뜻이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 모른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은 나의 뜻이 있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어느 날 내가 태어나게 되었을 뿐이다. 왜 태어났는지 무슨 목적을 갖고 태어났는지 어디로 가기 위해서 태어났는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지 나는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세상에 태어났을 뿐이다. 내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나의 뜻이 있을 수 있겠는가? 내가 내 뜻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만 내가 만들어 놓은 허상일 뿐이다. 내가 내 뜻이라고 말하는 것 때문에 내가 태어난 것은 정말 아니다.
내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아는 분은 오직 한 분 즉 나를 창조하신 분,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만이 안다. 나는 내 뜻에 의해 태어 난 것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분의 뜻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뜻이 무엇인지는 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 나의 성소요, 찾은 그 뜻을 사는 것이 나의 성소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의 뜻만을 고집하며 그것이 마치 하느님의 뜻이고 내가 이 세상에서 반드시 펼쳐야할 뜻이라고 생각하며 살아 온 경우가 많이 있다.
나의 뜻이라고 고집할 때 대부분의 경우 나의 욕망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즉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때도 있다.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도 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쳐 내는 경우도 있다.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싸우고 불평하고 다른 사람의 희생을 강요하기도 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나의 뜻일 수는 있지만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아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은 아니다. 그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무엇인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의 뜻이 무엇인가를? 그것은 나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살리는 일이요, 그 일은 아들을 보고 믿게 하는 일이다.
지난 서울 영보회 모임을 마치고 수도원에 들어오는 길에 둘째 형님의 사망 소식을 듣고 병원 영안실로 가서 미사를 봉헌하였고 어제 장례미사를 지내고 형의 유언에 따라 벽제 장례예식장에서 화장을 한 후 용미리 납골당에 유해를 안치하고 돌아왔다.
처음으로 벽제 화장터를 가 보았고 사람을 화장하는 모습을 보았고, 두 시간 동안 불에 타고 남은 뼈들을 보았으며, 기계로 뼈를 가루로 빻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한 줌의 가루가 되어 유골함에 담겨지는 뼈가루를 보았다.
그곳에서만 평균 하루에 150명의 시체가 들어온다고 한다. 계속해서 영정을 앞세우고 시체가 들어오고 그 뒤에는 가족들의 울음소리와 허탈해하는 모습 그야말로 죽음의 세력이 판을 치는 곳이다. 죽음이 지배하는 곳, 죽음이 왕이고 살아 있는 인간은 그 죽음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인간일 뿐이다. 자기발로 걸어 들어오지도 못하고 꽁꽁 묶여 관 속에 갇힌 채 타인의 손에 끌려서 들어오고 그리고 화장할 번호를 받고 순서를 기다리다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 썩은 몸을 태워 한 줌의 흙이 되어 버린 인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조금만 일찍 깨달았더라면 그렇게 자기 뜻만을 고집하며 살지는 않았을 텐데.... 모두가 다 자기의 뜻을 갖고 한 세상을 살던 사람들이다.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치던 사람들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이 있는 줄을 모르고 오직 자기 뜻만을 고집하며 살던 사람들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무관심하고 자기만 살겠다고 욕심부리던 사람들이다. 그렇게 고집했던 자기 뜻이 자기에게 남긴 것이 무엇인가? 나의 뜻이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내가 죽을 때 함께 죽어버리는 나의 뜻을 오늘도 우리는 고집하며 살아 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무엇인가? 사람을 살리는 일이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은 나의 뜻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을 믿는 데에 있다. 사람의 아들을 믿음으로 해서 모든 이를 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우리는 그 일을 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그 뜻을 알고 그 일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투신할 때 이보다 더 위대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과연 우리는 그러한 일에 투신하도록 특별히 봉헌의 삶으로 축성해주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였는가? "성모 영보회원이다."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모 영보 회원에게 주어진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진정으로 우리가 나의 뜻을 찾지 않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찾으며 산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삶보다는 훨씬 더 적극적이고 사명감을 갖고 살았을 것이다.
우리 주위에는 오늘도 이 진리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아버지의 뜻이 아닌 자기의 뜻을 펼치며 살아가는 것이 가장 아름답고 자기 삶의 목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사실 우리가 만나는 사람 거의 대부분이 이런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살리는 일에 투신하도록 불리움을 받은 우리들 자신들도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은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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