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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11월25일연중 제34주간 목요일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루가 21,20-28)
When these signs begin to happen,
stand erect and raise your heads
because your redemption is at hand.”
말씀의 초대
요한 묵시록의 저자는 대바빌론의 몰락을 예언한다. 구약의 바빌론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다 사라진 도시지만, 요한 묵시록의 바빌론은 이교주의와 독재의 상징인 로마를 가리킨다. 멸망의 원인은 재력과 권력을 섬기는 우상 숭배다.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을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의 파괴를 예언하신다. 예루살렘은 구약 백성의 정신적, 물질적 중심이었다. 그 중심이 몰락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보호에서 이탈되고, 구약 백성의 역사가 종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부터는 신약의 새로운 백성들이 하느님의 은총과 보호를 받을 것이다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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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유다 독립 전쟁은 기원후 66년에 일어나 70년에 끝납니다. 무모한 전쟁이 길어진 것은 68년 6월 ‘네로’ 황제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로마 제국 수뇌부에 혼란이 생겼던 것이지요. 하지만 69년 로마 장군 ‘티투스’는 전쟁을 속개합니다. 70년 초에는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4개월의 전투 끝에 성벽을 뚫고 성전에 불을 지릅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행정, 문화, 경제 등 모든 활동의 중심이 예루살렘에서 시작되고 끝납니다. 그만큼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에게 소중한 장소입니다. 그런 곳이 주님께 멸망의 선고를 받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은 70년경 로마에게 함락됩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몹시 사랑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은 주님께서 몇 번이나 다녀가셨던 도시입니다. 그랬던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무참히 못 박히시어 돌아가셨지만, 이스라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의 잘못을 용서해 주시며,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세계는 시시각각으로 전쟁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강대국들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킬 것인지 아닌지 저울질해 대는 상황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전쟁의 위험에 노출된 화약고는 바로 우리 한반도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하는 중동입니다. 한반도는 이념 때문에, 중동은 종교 때문에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참평화이신 주님께서 복음 말씀처럼 다시 한 번 불행을 선언하신다면, 그것은 곧 한반도와 이스라엘의 몰락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 이스라엘 백성인 우리가 그분의 백성답지 못하면, 새 도성 예루살렘도 무너지게 되겠지요?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제외하고 새로운 당신의 예루살렘을 세우시겠지요?
곧바로 ‘돌 위에 돌이 얹혀 있지 못할’ 정도의 파괴가 뒤따랐습니다. 불타는 성전을 바라보면서 유다인들은 세상의 종말을 생각합니다. 성전 파괴와 함께 로마도 벌을 받아 망할 줄 믿습니다. 하지만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원하고 바란다고 오는 것이 아닌 까닭입니다.
종말은 삶의 결과입니다.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개인에게는 죽음이 곧 종말인 셈입니다. 따라서 두려워할 것도, 무서워할 것도 아닙니다. 온전히 자신이 만들어 가는 작품일 뿐입니다. 누구나 결국은 하느님께 돌아갑니다. 미리부터 불안하게 산다면 복음은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날을 위해 현실에 충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종말에 담긴 교훈입니다. 잘못된 ‘지식’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 왔다면 바꾸어야 합니다. 종말 역시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아직은 자비의 날이다
- 김순중 수녀-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에 진노하시며 그곳에 닥칠 극심한 재난을 예고하신다. 주님께서 그 기간을 단축하시지 않으면 인류역사에 가장 심각한 환란이 닥치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사랑의 하느님, 무서운 하느님 -조명연 신부- 갑자기 어렸을 때의 일이 생각나네요.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시험 성적표를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록한 ‘유다의 전쟁’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예루살렘의 굶주린 유다인들 가운데 베레아에서 온 마리아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자기 가슴에 안긴 아기를 잡아먹기 위해 살해해서 불에 구었다고 전한다. 닥쳐올 재난이 얼마나 가혹한가! 끝까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분의 창조물인 하늘과 땅,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반란을 일으키고 소리칠 것이다.
바로 어제 일처럼 생각되는 2000년 대희년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교 제 삼천 년대를 위한 희망과 평화의 지평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바로 그 21세기의 새벽인 2001년 9월 11일, 뉴욕의 쌍둥이 빌딩은 죽음과 고통의 심연으로 무너졌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다. 세계 곳곳에서 테러와 폭력 행위는 끊임없이 계속된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레바논의 비극을 날마다 보고 있다. 또한 교통사고, 기아, 전염병, 어린이에 대한 이상성욕, 노예 수준의 노동, 방어할 능력이 없는 이에 대한 공격, 인간 생명의 시작과 마침의 신성함을 해치는 의학 실험을 위한 배아 이용, 낙태에 대한 합법화, 안락사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아직은 자비의 날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는 어김없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실 것이다.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시는 것을 볼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님!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신 주님을 거슬러 자행되는 무례함과 방종함을 용서하소서.’
받고는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주위를 배회했던 기억이 납니다. 시험 성적이
그리 좋지가 않았거든요. 이 시험 성적표를 부모님께 보여드린 뒤에 도장을
받아와야 하는데, 형편없는 시험 성적 때문에 부모님께 혼날 것 같은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이런 두려움 속에 마주하는 저의 부모님은 너무나도 무서운
부모님이었습니다. 물론 부모님께서는 시험 성적으로 혼내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너무나 성적이 떨어져서 분명히 혼내실 거야’라는 두려움이
부모님을 무서운 분으로 탈바꿈시켰던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시험 성적이
좋았던 적도 있습니다. 그때 만난 부모님은 무서운 분이 아닙니다.
사랑이 한없이 많아보이는 부모님이셨지요.
이렇게 내면의 상태에 따라 우리 마음이 바뀔 수 있으며, 내가 만나는
사람에 대한 생각도 바뀔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즉, 종말에 만나게 되는 예수님도 내가 준비한
내면의 정도에 따라서 때로는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 때로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언제나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단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주님을 엄하고 무서운 분으로 바꾸어놓는 것이지요.
워낙 더운 지역이다 보니 쉽게 지칠 수밖에 없었고, 또한 낯선 지역의 음식이 입에 맞을 리가 없겠지요. 그리고 그 나라의 말을 알지도 못하니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나 봅니다. 더군다나 교포들을 위한 미사가 일주일에 두 번밖에 없기 때문에 사람들을 만날 기회도 없었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해요.
‘내가 주교님께 잘못한 것이 있나?’
그러면서 주교님께 대해 서운한 마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적응을 하다 보니 이렇게 체중도 줄일 수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어서 오히려 주님께 감사의 기도를 바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면 불평과 불만을 먼저 던지고 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포기하고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그렇게 포기하고 절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러한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통과 시련을 디딤돌로 삼아 한 단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해주십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성전이 함락되어 완전히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벗어나 전 세계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절망에 빠져서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의미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이를 계기로 더욱 더 주님 앞에 나아가는 힘을 얻으라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실 도시가 멸망하고 무너지는 것을 주님께서는 종말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개인의 종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내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이 나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임을 기억할 때, 그리고 그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종말을 가장 잘 준비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에 의해
-김찬선신부-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그때는 적에게 나라가 망하는 때이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그때는 우주가 크게 흔들리는 때이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그때는 “바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다.
그때가 어느 때인가?
그때는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적에게 패망하는 때가 종말의 때이며
종말의 때가 주님 재림의 때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실은 이 세상이 적에게 패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 종말을 이루시는 것이라는 뜻 같습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으니
이 세상의 운명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좌우될 수 없습니다.
마치 악령이 욥에게 재앙을 내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악령을 이용하여 욥에게 재앙을 내리신 것처럼
이 세상의 시작과 끝은 다 하느님 것입니다.
저의 운명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누구에 의해 좌우될 수 없습니다.
불행하지도 않지만 제가 불행하다면
저의 불행도 하느님이 아닌 다른 누가 불행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불행이라는 카드를 저에게 쓰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병적 조사 후 벌을 받게 된 다윗이
이왕 벌을 받을 바에는 주님의 자비에 맡기겠다고 한 것처럼
죽어도 하느님에 의해 죽지 악령에 의해 죽고 싶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불행해진다 해도 하느님에 의해 불행해지지
다른 누구에 의해 불행해지고 싶지 않습니다.
죽음을 친구로 두고 살다 -전삼용신부-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셨습니까?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가 죽기만을 바라다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고 기어이 “이젠 살고 싶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죽고 싶은 이유는 살아갈 이유를 느끼지 못해서겠지만, 정작 사랑만이 살아갈 참다운 이유를 주는 것 같습니다. 바오로 사도도 지금 당장 죽는 것도 좋지만 주님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하고 죽고 싶다고 합니다. 어쩌면 진정 살아있다고 느낄 때는 죽음을 직전에 두었을 때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 죽음에 가까이 갑니다. 암벽을 등반한다든가 번지점프를 하면서 살아있는 쾌감을 느낍니다. 죽음 옆에서 삶을 더 느낄 수 있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대조되는 것 옆에 있으면 그것 때문에 자신을 더 잘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참으로 여자가 될 때는 남자와 가까워질 때이고 인간이 참으로 인간이 될 때도 하느님과 가까워질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서는 죽음과 함께 가야 합니다. 1986년 1월, 6천만 미국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첼린져 호는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5년이 지난 후 그 우주선의 비행사들이 남겼던 마지막 대화가 공개되었습니다. 남자: 무슨 일이지? 오, 맙소사. 안 돼. 오 안 돼. 여자: 오! 이런.(비명소리) 너무 뜨거워(신음 소리).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말하지마. 오 지금 하세요. 여자: 이런 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아요. 지금은 안 돼요. 여기서 죽을 순 없어요. 남자: 당신의 팔이... 안 돼. 여자: 전 의식을 잃어가고 있어요. 남자: 우리는 아직은 죽지 않아. 남자: 할 수만 있다면... 기적이 일어날 수만 있다면...(신음소리) 남자: 그녀가... 그녀가... 죽... 남자: 공기가 없어 남/여자: (신음소리) 오 안 돼. 남자: 그녀가 의식을 잃었어. 남자: 그녀에게 행운이 있기를 남자: 오 하느님! 우리가 죽어가고 있어요. (비명소리) 여자: 안녕(신음하면서) 사랑해요. 남자: 마음을 편하게 가져봐! 긴장을 풀라고! 남자: 어딘가에 비상 착륙을 할 수 있을 거야! 남자: 그래. 맞아 . 긍정적으로 생각해봐. 남자: 비상 착륙을 시도해봐. 남자: 오, 그건 불가능해. 남자: 손을 내밀어봐. 남자: 거기에 있어? 깨어 있느냐고? 난... 난... 남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남자: 아버지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남자: 괜찮아? 남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내가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인도하심이로다... 내가 주님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 (침묵).
첼린져호 조종사들이 죽음 직전에 나누었던 대화는 죽음과 함께 사는 삶이 얼마나 우리를 살게 하는지 잘 느끼게 해 줍니다. 이들은 하느님을 찾고 사랑을 찾았습니다. 기도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으로 살아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들은 그 전에 이만큼 절실하게 기도하고 사랑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참으로 살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요즘 거의 매일 종말에 관한 내용이 나옵니다. 이런 복음들을 읽다보면 종말이 매우 두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우리 마음을 북돋아줍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종말은 그렇게 기다리던 우리의 ‘신랑’과 만나는 기쁜 날입니다. 죄인들만이 두려워 떨어야 하는 날입니다. 오히려 죽음을 옆에 끼고 친구처럼 지내야합니다. 그래야 참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성무일도 끝기도에 항상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은 잠자리, 이것은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는 증표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이름을 남기려하는 것이 아니냐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당장 내일 죽게 된다면 적어도 이것은 하고 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씁니다. 오늘이 내 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삽시다. 진정으로 사는 맛을 느끼며 살게 될 것입니다.
<낙화(落花)> -양승국신부- 최근 암환자들이나 그 가족들 사이에서 널리 읽히고 있는 책이 한 권 있습니다. 제목이 "암과 싸우지 말고 친구가 되라"입니다. 서울대 병원장을 지낸바 있는 한만청 교수가 저자이지요. 저자 자신이 실제로 회복 불가능한 간암에 걸렸었고,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지 두 달 만에 암세포가 폐로 전이되었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지요. 그러나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치료에 전념하여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결실을 얻었는데, 저자는 치유의 비결로 "나에게 찾아온 암을 적이 아니라 친구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나를 지키고 치유하는 힘이 내 안에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일이라고 강조합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의 주제는 주님의 날입니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지요. 요즘 계속 지겹도록 같은 주제의 복음을 되풀이해서 소개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생각해봤을 때 "죽음"과 친구가 되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보다 죽음과 친숙하게 지내며 보다 자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묵상하라는 주님의 권고라고 생각합니다. 늙음, 죽음이란 단어들은 떠올리기도 싫을 정도로 거부감을 지니게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이 들어감, 늙음, 죽음 같은 단어처럼 친근한 단어가 또 없습니다. 죽음을 보다 관대한 시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겠지요. 죽음은 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묶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꽃과 잎이 다시 뿌리로 돌아가듯이 말입니다. 나무가 여름에 애를 쓴 이유는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떨어져 내릴 그 낙화의 순간을 위해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죽음은 인생곡선의 가장 하한선을 긋는 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입니다. 나이 들수록, 주님의 날을 가까이 느낄수록 보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보다 덜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보다 단순하고 보다 소박하게 살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지닌 것이 많으면 그 지닌 것들에 신경을 쓰다가 한 세상 다 가버리고 말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날 신속하게 그분을 맞으러 일어서야 할텐데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노력이 무게를 줄이는 노력, 덜어내는 노력, 깎아내는 노력, 집착과 애증을 훌훌 털고 일어서는 노력입니다. 낙화 -이형기-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종말의 참된 의미 -이승준 신부- 사람들에게 종말에 대해 물어보면 먼저 무서움과 두려움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양승국신부-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윈스턴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1965) 하면 모르는 분이 없으실 것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수상이자 명정치가였습니다. 문학적 소질도 탁월하여 수많은 어록을 남겼으며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였습니다. 그런데 생존 당시 처칠 수상은 많은 의사들의 연구대상이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로서는 아주 고령인 65세에 수상에 취임한 그는 당시 시국이 시국인 만큼(2차 세계대전) 스트레스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그는 술을 즐겼습니다. 즐길 정도가 아니라 도를 넘어섰습니다. 그 독한 스카치위스키를 밤이면 밤마다 물마시듯이 마셨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실에 바늘 가듯이 술 마시면 땡기는 것이 있지요. 담배인데, 그냥 담배가 아니라 제일 독한 시거를 늘 입에 달고 다녔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계속되는 보고, 회의, 결재, 시찰...그에게는 운동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비만이었습니다. 이런 처칠 수상이었지만, 그 혹독한 상황 속에서도 아주 건강했다고 합니다. 그런 건강을 바탕으로 90세 넘게까지 장수했습니다. 그의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요. 그 특유의 유머, 불굴의 의지 등등.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길어져만 가는 전쟁으로 지쳐가는 국민들에게 한 짧은 연설은 그의 낙천성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십시오!”(Never, never, never give up!)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 클레멘타인과의 사이에서 오고갔던 ‘전설 같은’ 사랑이었습니다. 둘은 80이 넘은 나이에도 사춘기 소년소녀처럼 살았습니다. 당시 둘 사이에 오고갔던 편지 내용입니다. “처칠, 당신은 제 안의 태양이예요!” “클레멘타인, 당신을 만난 것은 내 생애 가장 큰 행운이라오. 당신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 내게 가장 큰 보람입니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의 주제는 주님의 날입니다. 그날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가장 중요하게 챙겨야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부동산일까요? 은행계좌일까요? 유산일까요? 아파트일까요? 사랑,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사랑만이 전부입니다. 결국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했던 사랑의 몸짓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웃들 안에 현존해계시는 하느님을 향해 바쳤던 사랑의 표현들, 바로 그것입니다. 왜들 그렇게 미워합니까? 왜들 그렇게 싸웁니까? 왜들 그렇게 아웅다웅합니까? 사랑할 시간도 부족한데...
“당신의 어린 시절을 보니 무척 행복해 보이는군요.”
이에 골래뜨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왜 그때는 그것을 몰랐을까요? 참 애석한 일이예요.”
향수공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향수 냄새를 전혀 맡을 수가 없다고 하지요. 그러나 그는 좋은 냄새 가운데에서 생활했고, 자신의 몸에서도 그 좋은 냄새를 풍기고 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시절을 행복한 줄 모르며 살고 있으며, 건강할 때는 건강의 고마움을 모르면서 삽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지요.
“태양과 물과 공기는 인간이 그 가치를 모른다. 단, 그것들이 없어져봐야 알 수 있는데 그것들이 없어지는 순간 인간은 생존할 수 없고 결국 영원히 가치를 모른 채 살다 죽어간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받으면서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못하면서 결국 후회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이렇게 후회하면서 생활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과거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고 대신 지금이라는 시간에 더욱 더 최선을 다해 생활할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오늘 복음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요.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나가라.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이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 함락되어 파괴가 되지요. 그리고 그때 백만 명 이상이 적군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으며, 9천 7백 명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르게 되었던 이유는 예루살렘 성전을 어떻게든 지키려했던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과거 예루살렘 성전의 영화로움이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 더군다나 하느님의 집인 만큼 하느님께서는 이 집을 적군에게 내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이러한 생각들로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피하라고 하시지요. 즉, 미련을 갖지 말고 끊을 것은 과감하게 끊어버려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이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이것만은 지켜야 한다는 생각. 그러다보니 지금이라는 현재에 내게 주어진 은총을 깨닫지 못해서 감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과거에 연연하는 것이 아닌, 또한 미래에 대한 걱정을 간직하는 것도 아닌, 바로 지금이라는 이 현재에 최선을 다해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바로 종말에 대한 준비이며, 주님을 맞이할 준비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한부 종말론자들의 논리에 이성적으로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두려운
감정에 이끌려 그들의 말에 마음이 쏠리게 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인간의 두려움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자신들의 신념을 합리화하는 그들의 세계에 빠져드는
사람들 가운데는 의외로 똑똑하다고 불리는 사람들과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도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약하고 두렵게 만드는 말이 종말입니다.
하지만 종말의 다른 표현은 하느님의 재림이며,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제 우리
가운데 오시어 그분의 정의대로 선과 악을 구분해주신다는 의미이며,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서막입니다. 그렇기에 종말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참된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선과 정의에 맞게 성실하게 살아가면서
종말의 때를 준비하는 것이 더 행복하고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사를 준비할 시간
- 원영배-
11월 마지막 목요일인 오늘은 미국에서 가장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이다. 저녁식탁에 가족이 둘러앉아 하느님께 한 해를 감사하고 서로를 축복하는 푸근함이 넘치는 날이다. 우리나라에서 추석에 조상을 기리듯 미국에 건너온 신앙의 선조들이 역경을 극복하고 뿌리내린 역사를 기념하는 의미가 각별하다. 신앙의 자유를 찾고 이상향을 건설할 꿈을 품은 청교도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에 승선한다. 66일 동안 폭풍 때문에 배 밑창에 갇혀 지내며 그들은 시편을 노래하고 기도로 용기를 북돋우며 견뎠다. 노아의 방주도 40일 만에 항해를 마쳤다는데 신대륙으로 향한 뱃길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이 험난한 모험이었다. 아메리카에 가까스로 도착했으나 전염병과 가뭄으로 그들 중 3분의 1이 넘는 44명이 첫해에 목숨을 잃었다. 다행히 우호적인 원주민들이 식량을 나눠주고 새 농작물 재배법을 가르쳐 주어 이듬해엔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질병과 굶주림에서 구원하시고 죽음의 고난에서 지켜주신 하느님께 첫 추수의 감격을 돌려드린 감사의 축제는 오늘도 재현되고 있다.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자연재해는 지구온난화와 환경변화로 예측불허의 정도가 더욱 심각해지고 인재의 규모도 확대된다. 올해도 지진과 태풍, 전쟁과 대형사고가 숱한 생명을 앗아가고 많은 사람의 삶을 고통스럽게 했다. 한 몸도 벅찬데 태아와 젖먹이를 돌볼 힘 없는 여인들은 처지가 어떠할까? 그들의 시련과 불행을 마음 아파하는 예수님께서 지금도 가장 그늘진 곳을 살피는 시선이 느껴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지켜 희망을 잃지 말라고 이르신다. 혼란스런 재앙 속에서 무서워 떨지 말고 오히려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신다. 구원의 때가 가까워진 징조를 보라고 하신다.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모습을 볼 기대를 품는다면 두려움은 설레는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채찍으로 몸을 찢는 고행보다 고난이 끝나감에 기뻐하고 감사를 준비할 시간이란 가르침은 종말에 대한 우리 태도와 생각을 바꾸어 준다.
징벌의 날
-장재봉신부-
바빌론에 관한 예언은
이사야 예언자의 시대에 이미 선포되었습니다.
예레미아 예언자 시절에도 거듭 선포된 일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가
“나라들 가운데 보배요
칼데아인들의 자랑스러운 영광인 바빌론은
하느님께서 뒤엎으신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리라,”(이사 13,19)고
말하였고
예레미아 예언자는
“너희는 바빌론 한복판에서 도망쳐 저마다 제 목숨을 구하여라.
바빌론의 죄 때문에 함께 죽지 마라.”(예레 51.9) 고 외쳤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에게 똑 같은 주님의 예언이 내렸습니다.
이는 ‘다시는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형태로 멸망당할
악한 바빌론이
지금 이 세대에도 존재한다는 뜻이라 믿습니다.
노아시대의 물 심판 이후, 하느님의 심판은 계속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이 죄악이 너무나 무거울”때
(창세 18,20참조) 그 고장과 나라를 벌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그 고장에서 의인 열 명을 찾을 수 있을 때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 18,32)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바빌론과 폼페이에서도
지금 이 시대에서 조차 하느님께서 찾으시는
의인 열 명이 없어서 온갖 재난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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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주님께서 이르시는 멸망의 징조는
성경의 표현처럼 모든 자연계가 붕괴되는
바로 그 모습과
그 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타락한 바빌론의 생각에 젖어 살고 있다면
어두운 바빌론의 행위를 버리지 못한 채
어영부영하고 있다면
곧
멸망당할 바빌론이라는 뜻으로 듣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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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주님의 맹렬한 경고를 들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악을 애곡하고 세상의 죄에 통곡하며
세상의 상처를 끌어안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는 당부라 짚어봅니다.
해와 달과 별들에 나타날 징조가 있는
바로 그 때
돌아서 회개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기에 그렇습니다.
자지러진 민족들의 공포에 휩싸일 그 시간에
홀로 깨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 수 있는 사람은
매일
매 순간
그분의 자애에 의지하여
그분의 사랑을 품고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한 마음으로
자신의 삶의 굳은 바빌론성곽을 부수어낸 사람
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그 사악함 때문에 벌하고
죄인들을 그 죄악 때문에 벌하리라.”하셨으며
“오만한 자들의 교만을 끝장내고
포악한 자들의 거만을 꺽으리라.”(이사 13,11참조)고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소를 잡고 양을 죽여
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면서
‘내일이면 죽을 몸, 먹고 마시자.’”(이사 22,13)하고 있습니다.
아직 주님을 알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바빌론인 채로 주저앉아
삶을 회개하지 못하고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바빌론 같은 세상을 향해
회개를 외치지 않고 빛을 비추지 않고
소금으로 녹아지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잘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한 그분의 소리가 되어야 하며
그분의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는 증인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빌론 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바빌론을 역행하는
복음을 살아냄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원합니다.
주님께서 찾으시는 그 ‘의인’에게는
징벌의 날도 결코 두렵지 않은 까닭입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저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사실 저는 이 당시에 모범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술, 담배도 했고,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유흥가로 놀러다는 것이 가장 저에게 중요했습니다. 공부도 그리고 성당 다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의 모습을 지금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는 책 읽는 것을 즐겨합니다. 보통 일주일에 2~3권 정도는 읽고 있지요. 그런데 이렇게 책을 읽는 습관을 거의 20년 이상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틈만 나면 책 한 줄이라도 읽으려고 하고 있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책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앞서 고등학교 때에는 노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말씀드렸지만, 그것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책 읽는 습관을 떠올려보니, 나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오랜 기간을 저와 함께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역시 단 기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힘들다고 “주님, 저를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한 다음에 시간이 지나면 주님이 잊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죽어 주님으로 나아갈 때까지 계속해서 간직되어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이 세상 것들이 좋다고, 이 세상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이 세상 것들 없이는 못살겠다면서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것들을 첫째 자리에 놓는데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오래 갈까요? 과연 내게 진정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줄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세상 종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분명히 끔찍한 사건이고, 상상도 하기 싫은 세상 종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역시 전혀 다른 길을 열어 주십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꺼리는 세상 종말이지만 오히려 구원의 시간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어쩌면 정말로 기다려야 할 시간은 세상 사람들이 피하는 세상 종말의 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순간에 내가 두어야 할 시선의 방향은 과연 어디일까요? 바로 이 세상의 것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큰 권능과 영광을 떨치며 오시는 예수님께 시선을 맞추어야 구원될 수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어릴 때, 시험 성적표를 받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리 저리 주위를 배회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의 어머니는 너무도 무서운 어머니였지요. 하지만 제가 성적이라도 잘 받으면 주위를 배회하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지요. 그때의 어머니는 정말 사랑스런 어머니입니다. 종말에 만나게 되는 주님도 나의 준비 정도에 따라서 무서운 주님으로, 혹은 사랑의 주님으로 만나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주님을 멀리하면서 과연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요? 내 삶을 뒤돌아보는 하루 보내세요.
내 마음이 아니라 주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하세요.
빠다킹신부
구원받을 때
-서현승 신부-
시간의 개념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인 ‘크로노스’(chronos)와
의미 있는 시간인 ‘카이로스’(kairos)가 그것입니다. 크로노스란 연대기적인
시간의 의미로서 우리가 흔히 사용하고 있는 시간의 개념입니다. 이에 반해
카이로스란 시간은 비록 흘러가는 것이지만 시간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마치 역사의 의미를 ‘히스토리에’(Historie: 조사나 탐구에 의해
기술된 순수역사)와 ‘게쉬크테’(Geschichte: 풀이역사)로 구분하듯,
시간의 두 가지 그리스적 개념은 ‘하느님의 시간, 섭리’를 이해할 때
참으로 중요한 개념입니다. 적어도 성경에서 쓰이는 시간의 개념은 ‘카이로스’에 가깝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받을 때’는 2천 년 전에
선포된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닌, 지금 다시금 ‘그 시간’이 재현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카이로스의 ‘때’일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은 언제고 이루어질 일이지만,
그 종말을 앞당겨서 미리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삶은 종말론적 희망에 가득찬
시간입니다. 한 개인의 내면 안에서도 천지가 개벽하는 순간이 찾아오곤 합니다.
기존의 삶의 가치가 붕괴되고 홀연히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에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의 종말과
새로운 시작은 지금도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서 매순간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입니다.
머리를 들어라
-정애경 수녀-
우리는 오늘 복음을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며 동시에 종말에 대한 말씀으로, 곧 이미 일어났던 사건을 통해 앞으로 다가올 사건을 예고하는 것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행복한 수요일 저녁시간 -양승국신부- 매주 수요일 저녁 시간 저희 집은 온통 시끌 시끌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미사 시간 내내 떠나갈 듯한 아이들의 성가소리에 정신이 없기도 하지만, 식당으로 옮겨와 벌이는 삼겹살 파티에 또 정신이 없습니다. 옆에 앉은 아이가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진 삼겹살 한 조각을 정성껏 상추에 싸서 야무지게 먹는 모습을 보면서 제 마음이 얼마나 흐뭇해졌는지 모릅니다.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 죽어 가는 병아리처럼 삐쩍 마르고 얼굴에는 마른버짐이 피어 거칠거칠했던 아이였는데, 어느새 살이 포동포동 오르고, 얼굴이 달덩이처럼 변한 아이를 보니 저는 밥 한술 안 떠도 배가 하나도 안고플 것 같았습니다. 삼겹살을 대충 구워먹은 아이들이 철판 비빔밥을 비빈다고 난리들이었습니다. 워낙 잘 먹는 녀석들이라 오늘은 밥이 다 부족했습니다. 너무나 영적으로 살아가는 저인지라(?) 식욕이 별로 없는 저는 대충 식사를 끝내고 한 명 한 명 아이들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며 흐뭇해하고 있었지요. 나날이 긍정적으로 변화되어 가는 아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음 깊은 곳에서 은근히 샘솟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마지막 날의 우리 앞에 펼쳐질 현상이 대해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그 날이 우리 인생 최대의 날, 일생의 가장 행복한 날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던져주고 계십니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주님께서 오시는 날을 가장 잘 준비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가장 좋은 준비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아니겠는가 생각합니다. 하느님과 이웃 앞에 보다 긍정적으로 성장하고 쇄신된 우리 자신을 보여주려는 노력 말입니다. 우리가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보여 왔던 그저 그렇고 그런 삶, 지지부진한 삶,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삶에서 벗어나 뭔가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 변화된 우리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은 준비라고 생각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부단히 변화를 시도하는 사람입니다. 진정으로 삶을 살 줄 아는 사람은 끝없이 변화되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위선과 권위의식을 버리고 새롭게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세상의 가치관을 버리고 언제나 새로운 복음적 가치관을 선택하는 사람들, 타성과 안주본능을 떨치고 끊임없이 일어서며 길 떠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실로 변화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성전이 세워진 곳이다. 이는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하느님을 모시는 성전을 말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세례성사를 받은 후 하느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오면서 가꾸어 왔던 각자의 성전이 그 옛날 예루살렘 성전처럼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일미사에만 참례하면서 이만하면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한다면, 열심히 성당에 다니지만 말씀과 성체로 영적인 살을 찌우지 못하고 미움과 시기심과 이기심을 버리지 못한다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하느님께 대한 의혹과 불신으로 하느님을 원망한다면 마치 예루살렘 성이 적들에게 포위되어 멸망하듯 어느 순간 우리의 신앙도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열악한 상황과 한계로 인해 점점 나의 성전이 흔들리고 꿈과 이상이 무너져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될 때, ‘이젠 끝이다’, ‘이젠 죽었다.’ 하는 바로 그 순간 주님은 우리에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라고 하신다. 당신을 향하라고 하신다. 바로 이때야말로 우리가 속량될 때라고 하신다. 하느님이 우리를 떠나셨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그분을 향해 고개를 들 수 있는 용기와 믿음, 구원의 때를 알아볼 수 있는 지혜를 청해야겠다.
-손영배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의 복음에 이어서 계속됩니다. 어제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의 박해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참생명을 얻기 위해서 끝까지 사랑으로 인내하라며 격려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돌연 종말의 때와 당신의 재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때를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때는 무서운 재난과 하느님의 분노로 이어질 것이라 경고하십니다. 복음 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불행하여라! 그 무렵에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 이 땅에 큰 재난이, 이 백성에게 진노가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시대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은 기원후 70년 경 로마에 의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 역시 예루살렘의 종말의 시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징조들은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세상의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는 사형과 낙태, 인권유린과 인종차별을 낳았으며, 물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는 풍조는 무분별한 에너지 사용과 환경파괴로 지구의 온난화를 낳았으며 그 결과로 각종 홍수와 태풍, 지진과 해일 및 기온 이상현상을 유발했습니다. 또한 나와 우리만을 강조하여 너와 너희에 대한 무관심과 강한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적 세계관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이들, 곧 가난한 이들과 소외받는 이들, 특히 약소국과 빈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말의 때에 있을 이런 징조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종말의 시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복음 말미의 예수님의 말씀에 더욱 주목해야 합니다. 복음말씀을 들어보겠습니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 때 그 시간이 심판과 징벌의 시간이긴 하지만 그것보다 구원의 시간임을 알려 주려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속량을, 우리의 구원을 강조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다시 오심, 곧 재림은 세상의 공포와 엄청난 하느님 분노의 표현이기 이전에 이러한 종말의 징조를 보거든, 마음을 재빨리 돌려 회개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 잡기를 바라시는 말씀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어제 강론에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세상의 논리에, 바알의 논리에, 물질만능의 논리에 수궁하거나 타협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곧 그동안 세상이 원하는 방법으로 세상이 바라는 목적으로 우리가 나아가고 있었다면 발길을 돌리고 머리를 돌려 하느님의 뜻을 살피고 또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명 그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환경을 아끼고 보살피며, 특별히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 모든 것을 실천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루카 복음 25장 36절의 말씀처럼 “늘 깨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와 실천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실천할 수 없습니다. 설사 실천할 수는 있어도 그리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기도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장소와 구체적인 시간을 정해놓고 내가, 혹은 우리가 그 장소와 그 시간에 앉아서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마음만 있어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내가, 우리가 정해놓은 장소와 자리에 앉아있어야 합니다. 세상과의 소통이 아니라 하느님과 소통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이 땅에서 실천하게 될 것이고, 또 마지막 날에 그분은 나를 살릴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 계획을 잡아서 장소를 정하고, 시간을 정해서 앉읍시다. 성령께서 나를, 또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매번 잘 선택할 수 있도록
-오 마리아 수녀-
좀 오래된 ‘포세이돈 어드벤처’라는 영화가 있다. 여객선 포세이돈을 타고 여행을 하던 사람들은 배 안에서 화려한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해저지진으로 배가 침몰, 승객들은 우왕좌왕 탈출구를 찾느라 정신이 없는 가운데 한 신부가 그들을 구하기 위해 나서지만 사람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마지막 순간 최악의 상태에서 신부는 목숨을 던지고 6명만 살아남는 장면이 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알아듣기 어려운 대목이다. 문자 그대로 듣는다면 끔찍한 재앙만이 연상될 것이고 또 상징만으로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주님은 우리의 위로자이시라는 것, 희망이 되신다는 것이다. 얼마 전 종말이 다가왔기 때문에 어서어서 종말을 준비해야 한다고 소리치던 종교집단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아무 일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늘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마지막 시간을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 준비하는 것이 좋은가 하는 것이다. 오늘 복음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매일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그분을 잘 맞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처럼 서로 비슷한 사람들 가운데 과연 누구를 따라갈 것인가, 또 비슷한 일 가운데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가 문제다. 매번 잘 선택할 수 있도록 주님을 바라보며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살아야 할 것이다.
증거
-백광현 신부-
여러 가지 불길한 징조 앞에서 인간이 느끼는 일반적인 감정은 불안과 공포입니다. 국제 공동체에서 공부할 때 같은 수도회의 인도 신부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부를 마친 신부님은 본국에서 수련장으로 봉사하게 되었는데 마피아들의 부당한 요구 앞에서 중대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선택하기로 했는데 그것은 곧 그들의 손에 죽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끝까지 복음을 증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유서 아닌 유서를 보냈습니다.
어느 날 마피아들이 도착했을 때 오늘이 그 날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감지한 그는 다른 모든 형제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고 밖에 나가서 벗과 교회와 복음을 위해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억압과 공포 앞에서 머리를 들고 하느님의 구원을 피로써 증거한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인간의 마지막 날이 참된 해방이 되는 것은 신앙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도정호 신부-
우리들이 사는 이 땅에 재난이 가까워지면 여러 징조들이 나타난다고 말들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해와 달 그리고 별 등 천체가 흔들리게 되고, 무서운 재난이 닥쳐오고, 당연히 많은 사람이 불안해하고, 두려움에 떨게 되겠지요. 만일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구하나 여유 있게, 맘 편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이지 모든 사람이 큰 혼란에 빠질 겁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에는 권능을 떨치며 영광에 싸여 주님께서 오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오실 주님으로 인해 우리가 믿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서 저는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큰 재난이 다가올 것이라는 말에 두렵고 무섭지만 한편으로는 감사 드리게 되었습니다.
구원 받을 때가 가까이 왔다 -강영구 신부 -
제 방 책꽂이에 궤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주 공간에서 우주 비행사들이 여러 가지 실험을 하면서 유영을 하고 있는 모습, 지구를 떠났다가 다시 귀환하는 여러 우주왕복선에 관한 기록들, 우주왕복선이 지구를 돌면서 수집한 여러 가지 실험 모습들에 관한 자료와 우주에서 바라본 지구를 촬영한 사진 등 우리들이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는 설명이 곁들여진 사진 책자입니다.
60억이 넘는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보여주고 있는 모든 행동들을 품고 있는 지구. 그 지구를 보면서 우주를 다녀온 한 우주비행사는 이렇게 소감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파란 구슬 속에 들어 있더라.” 라고 말입니다.
한쪽에서는 기를 쓰면서 싸우고, 때로는 죽이고, 험담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남보다 더 강해지기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지구, 또 한쪽에서는 희생과 사랑을 펼치고, 생명의 주인을 찾고, 선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지구, 남에게 얘기하기에 창피하고, 감추고 싶은 치부들, 어리석고 모자란 모습들까지도, 인간에 대한 모든 사연들을 지니고 있는 지구.
사진을 통해서 새롭게 다시 보게 된 그 파란 구슬이 ‘우리 인간들의 추하고 나쁜 모습들 그 모든 것들을 저 아름다운 지구가 덮어주고 있었구나! 인간의 온갖 것들, 진?선?미도 저 속에 함께 있고, 인간이 저지른 죄악과 어두운 모습들까지도 모두 가려주고, 덮어주면서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이끌어주고, 도와주고, 기다려주시는 분이 저기에 함께 계시구나!’ 그렇게 묵상을 하면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새롭게 하루를 시작하는 이 아침, 오늘 복음은 징벌의 날을 보여주면서 다소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과 공포에 떨게 했지만, 무작정 우리를 그렇게 내버려두시는 분이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께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 날이 오기 전까지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 더 많이 기회를 주시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힘을 주고, 정화되도록 기다려주신 후에 영광을 떨치면서 오실 것이기 때문에 더 열심히 이웃을 사랑하면서 친절을 베풀면서 감사 드리면서 오늘 하루를 보냈으면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몸을 일으켜 머리를 들어라. 너희가 구원받을 때가 가까이 온 것이다.
오늘도 세계 곳곳의 전쟁터에서는 처참한 살육이 벌어지고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허리케인이,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지진이, 동남아에서는 쓰나미와 해일이 밀어닥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후천성면역결핍증(에이즈)으로 죽어가고 있고, 언제 조류독감이 인류에게 큰 재앙을 가져다줄지 알 수 없습니다.
창세(創世) 이래 전쟁과 천재지변(天災地變), 기상이변(氣象異變)과 각종 염병(染病)은 끊이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사실상 이런 일들은 일상적(日常的)입니다.
이런 사건과 징조를 보고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말세로군!’하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말세(末世)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日常)은 말세(末世) 즉 종말(終末)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시간은 ‘종말(終末)의 시간’입니다.
‘종말(終末)의 시간’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과 심판이 바로 그것입니다.
‘종말(終末)의 시간’은 우리에게 어디에 설 것인지, 어떻게 살 것인지 선택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 귀의(歸依)하여 그분의 가르침대로 사랑하고 용서하며 빛의 편에 선다면 그의 지금은 구원의 시간입니다.
우리에게는 ‘종말의 시간’이 계속될 뿐 내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기약하며 오늘을 탕진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욕망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사는 사람에게 지금은 심판이 시간입니다.
내일이면 이미 늦습니다.(一明)
예루살렘의 최후와 예언의 성취
-박상대신부-
루가복음이 기원후 80-90년, 즉 예루살렘이 실제로 멸망한 70년 8월 29일 후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마르코복음(13,14-20)의 같은 대목과 비교함으로써 더욱 명확히 드러난다. 마르코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세상종말 직전의 징조로 다루고 있는데 비하여, 루가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역사적 사건으로 열거하여 평가하고 있으며, 이를 확대하여 세상종말에 대입시키고 있다. 루가는 또한 세상종말의 징조로 우주적 파국을 제시하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종말의 목적은 완성이요, 인자의 재림이다. 인자의 재림은 곧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낸 사람들이 구원받는 때이다.(28절)
예수께서는 암탉이 병아리를 품에 모으듯 예루살렘을 품으려 했으나(루가 13,34), 그 뜻을 이루지 못하셨다. 그들을 향한 당신의 비통한 눈물조차도(루가 19,41)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예루살렘과 그 성전의 멸망에 대한 예수님의 예언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이루어졌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자신의 구원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니 유대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되도록 먼 곳으로 몸을 피해야 하고, 성도에 있는 자는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며, 시골에 있는 자는 성도에 들어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21절) 상황이 이쯤 되면 거동이 불편한 임부(姙婦)나 젖먹이를 가진 산부(産婦)가 불행한 것은 뻔한 일이다.(22절)
기원후 70년 2월 당시 로마제국의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가 8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당도하였고, 3월부터 8월까지 5개월간 성도를 포위하여 일전일퇴를 거듭하면서 8월 29일 성을 함락시킨 후, 73년 마사다 요새에서 버티던 960여명이 최후의 죽음을 맞이한 그날까지 이스라엘은 매일 세상의 종말을 눈으로 보았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유대장군으로서 로마군에 항거하여 싸우다 굴복한 후, 이름을 ‘요세푸스 플라비우스’로 개명(改名)한 ‘요셉 벤 마티아스’(37-100년경)가 직접 기술한 유대전쟁사(Bellum Judaicum)를 펼쳐볼 필요가 있다. 유대전쟁사는 75년부터 79년 사이에 기록되었다. 기원전 2세기 중반 이후의 유대 역사를 기술하고 기원후 66-70년의 유대반란, 70-73년 로마군의 침략과 이스라엘의 멸망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야기 체로 씌어진 이 전쟁사에는 유대의 애국주의자들에 대한 저자(著者)의 반감이 드러나 있으며, 로마의 군사전략과 병법을 높이 평가하여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5개월간 예루살렘이 고립되자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휩쓸고 다녔으며, 유대인들은 굶주림에 지쳐 급기야 자식까지 잡아먹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로마군에게 투항해 오던 자는 산채로 배가 갈리고, 수많은 자들이 체포되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소리쳤던 그들 스스로가 매일 400-500명씩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끝내 항복을 거절한 독립당원들 때문에 성전은 불타고, 예루살렘은 송두리째 폐허가 되어버렸고, 투항한 자들은 포로가 되어 노예로 전 세계에 팔려 나갔으니, 그야말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이다.”(유대전쟁사)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되는 ‘그때가 바로 성서의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22절)이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귀담아 들어야 할지를 깨우쳐 준다. 다음 구약성서의 구절을 묵상하면서 교회 전례력 마지막 주간이며 성서주간을 더욱 열심히 지내도록 하자.
“그러나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내가 오늘 너희에게 지시하는 그의 모든 계명과 규정을 성심껏 실천하지 않는다면 다음과 같은 온갖 저주가 너희를 사로잡을 것이다. (중략) 마침내 너희를 쓸어버리시리니, 너희는 이내 망하고 말 것이다. (중략) 야훼께서는 너희를 원수에게 패하게 하실 것이다. (중략) 저주가 너희를 덮쳐 사로잡는 날, 너희는 망하고 말 것이다. 이는 너희가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하신 말씀을 듣지 않고 그가 지시하신 계명과 규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너희는 마침내 굶주리고 목이 타며, 헐벗은 몸으로 아무 것도 없이 야훼께서 보내신 원수를 섬겨야 하리라. (중략) 너희 원수가 이렇게 너를 포위하고 몰아치면 너희는 자기 뱃속에서 나온 소생,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아들과 딸을 먹게 될 것이다. (중략) 자기가 먹는 자식의 고기를 아무에게도 나누어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원수가 너희 모든 성을 포위하고 몰아쳐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아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다. (중략) 궁한 나머지 제 다리 사이에서 나온 자식을 탯줄 째 몰래 먹어 치울 것이다. 원수가 너희 모든 성을 포위하고 몰아치면 마침내 이런 지경에 이를 것이다. (중략) 야훼께서는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온 땅에 있는 만백성 가운데 너희를 흩으실 것이다.”(신명 28,15-64)
황폐해질 때(루가 21,20-28)
-유 광수신부 -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 그 때에 유다에 있는 이들은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 그 때가 바로 성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이루어지는 징벌의 날이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도 종말에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 말씀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이미 다니엘 예언서에 기록되어 있었다. “너는 똑똑히 알아라. 너희가 돌아 가 예루살렘을 재건하리라는 말씀이 계신 때부터 기름부어 세운 영도자가 오기까지는 칠 주간이 흐를 것이다. 그 뒤에 육십 이 주간 어려운 시대가 계속되겠지만, 그 동안에 성을 쌓고 재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육십 이 주간이 지난 다음, 기름부어 세운 이가 재판도 받지 않고 암살당하며, 도읍과 성소는 한 장군이 이끄는 침략군에게 헐릴 것이다. 전쟁으로 끝장이 나 폐허가 되고 말 것이다. 종말이 홍수처럼 닥쳐 올 것이다. ”(다니엘 9,25-27) 왜 예루살렘이 전쟁으로 끝장이 나 폐허가 되고 말 것인가? 그 이유를 다니엘의 기도에서 해답을 찾아볼 수 있다. 다니엘은 이렇게 기도하였다. “주님, 크고 두려우신 하느님, 하느님을 사랑하여 말씀대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계약을 어김없이 지키시는 하느님, 우리는 못된 일만 하였으며 비뚤어진 짓만 하였습니다. 하느님을 배신하고 몹쓸 짓을 하고 명령과 법을 어겼습니다. 하느님의 종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리의 임금들과 고관들과 조상들과 온 국민에게 하신 말씀을 우리는 저버렸습니다. 주님, 우리는 지금 이처럼 얼굴을 들 수 없이 되었습니다마는 주께는 잘못이 없습니다. 유다 사람이나 예루살렘 주민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 주변에 사는 사람이나 멀리 온 세상에 흩어진 사람들이 모두가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배신하여 그렇게 쫓겨났습니다. 야훼여, 우리는 임금들이나 고관들이나 조상들까지 모두가 주께 죄를 얻어 얼굴을 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주 우리 하느님께서는 애처로운 이 모양이 가엾어 용서해 주셨지만, 우리는 주께 반항만 하였습니다.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종 예언자들을 시켜 우리 앞에 법을 펴시고 그대로 살라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온 이스라엘이 주의 법을 어기고 말씀을 듣지 않아, 죄를 얻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내리시겠다고 하신 저주를 하느님의 종 모세의 법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우리와 우리를 다스리는 위정자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그 큰 재앙을 그대로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천하에 다시 없을 재앙을 예루살렘에 내리셨습니다.”(다니엘 9, 4-12) 결국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벌은 반드시 내리시겠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우리를 공포에 떨게 하기 위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우리를 그런 재앙에서 구하기 위한 말씀이다. 그러면 그런 재앙을 면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내가 지금 그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알면 즉 하느님을 배신하고 몹쓸 짓을 하고 명령과 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빨리 산으로 달아나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고,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는 것이다. 무슨 뜻인가? 빨리 산으로 달아나라는 말은 하느님께로 돌아 오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서에서 산은 하느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죄를 짓는 예루살렘이라는 곳에 머물지 말고 이제는 뉘우치고 하느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있는 이들은 거기에서 빠져 나가라는 말은 악의 구렁에서 나오라는 말씀이요, 시골에 있는 이들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마라는 것은 죄짓는 악의 구렁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예루살렘은 죄의 상징, 온갖 악을 저지르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악의 구렁텅이를 상징한다. “예루살렘이 적군에게 포위된 것을 보거든, 그 곳이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음을 알아라.”는 말은 예루살렘 도시가 온갖 악으로 가득차 있음을 말한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처럼 방탕과 악의 소굴로 포위되어 있으면 곧 황폐해질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것을 눈치챈 사람들은 빨리 그곳을 즉 죄의 구렁에서 나오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빨리 나와야할 때임에도 불구하고 나오지 못하는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불행하다. 왜그런가? 임신한 여자들과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은 누구를 상징하는가? 임신한 여자들이란 마치 여인이 아이를 임신한 것처럼 죄로 가득찬 사람들 즉 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가리키며, 젖먹이가 딸린 여자들이란 여인이 젖먹이를 떼어놓을 수 없기 때문에 항상 데리고 다녀야 하듯이 그렇게 죄에 물들어 있는 사람들, 도저히 죄의 구렁에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결국 칼날에 쓰러지고 포로가 되어 모든 민족들에게 끌려갈 것이고 예루살렘은 다른 민족들의 시대가 다 찰 때까지 그들에게 짓밟힐 것이다. 결국 오늘 복음은 세상 종말에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심으로써 옛 예루살렘은 멸망하고 새 예루살렘이 건설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회개하지 않고 죄의 구렁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미 이 세상에서 시작된 천상 예루살렘의 삶을 살기 위해 옛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때요,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복음의 말씀을 살아야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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