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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 |
반기문 (2016년 2월) | |
유엔의 제8대 사무총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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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 2007년 1월 1일 ~ |
사무부총장 | 아샤 로즈 미기로 (2007–2012) 얀 엘리아손 (2012–) |
전임: 코피 아난(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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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 |
국적 | 대한민국 |
출생일 | 1944년 6월 13일(1944-06-13) (72세) |
출생지 |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 |
거주지 | 미국 뉴욕 주 뉴욕 |
학력 | 서울대학교 외교학 학사 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
배우자 | 유순택 |
자녀 | 1남 2녀 |
반기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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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로마자 표기: | Ban Gimun |
매큔-라이샤워 표기: | Pan Kimun |
공식 표기: | Ban Ki-moon |
대한민국의 제7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한 외교관이자 제7·8대 UN 사무총장이다.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출생지는 충청북도 음성군이다.
1970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하여 외무부에서 근무했다. 외무부에서 겸손하고 능숙하다는 평판을 얻었다.
외무부 미주국장, 외교정책실장 등을 거쳐 대통령비서실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외교통상부 차관을 지냈고, 2004년 1월부터 2006년 11월까지 노무현 정부에서 제7대 외교통상부 장관을 역임했다
.
2006년 2월 유엔사무총장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반기문은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장관으로서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의 모든 나라를 순방할 수 있었다.
2006년 10월 13일 유엔 총회에서 제8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어, 2007년 1월 1일 코피 아난의 뒤를 이어 유엔 사무총장의 임기를 시작하였다.
2011년 6월에는 반기문 사무총장 연임 추천 결의안이 안보리의 만장일치와 지역그룹 전원이 서명한 가운데 총회에서 192개 회원국의 박수로 통과되어 유엔 사무총장 연임에 성공하였다.
반기문은 2013년 포브스 선정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서 한국인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전 세계에서 32번째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됐다.
일제강점기인 1944년 6월 13일에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상당리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종 때 형조판서를 역임한 반석평(潘碩枰)의 후손이다.
충주교현초등학교 6학년 때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에게 헝가리 국민봉기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소련군이 헝가리를 무력으로 침공했기 때문이었다. 반기문은 당시 "헝가리 사람들이 자유를 위해 공산주의에 맞서 싸우고 있으며 세계의 평화를 위해 일하는 유엔에서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
충주중학교를 졸업 후 1963년 충주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외교학과에 진학했다.
충주고등학교 2학년 때 미국 적십자사에서 주최하는 영어경시대회에서 최고점수를 받았다.
부상으로 '외국 학생의 미국 방문 프로그램(VISTA)'에 선발되어 1962년 고등학교 3학년 때 미국을 방문했다. 한 달간 미국 연수 및 봉사활동에서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나 외교관의 꿈을 키웠다.
1970년 2월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과 동시에 제3회 외무고시에 차석으로 합격해 그 해 3월 외무부에 들어갔다. 신입 외교관 연수를 마칠 때 수석을 차지했다.[1] UN 국제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일본어를 소통한다.
1971년 유순택과 충주고와 충주여고 간 학생회장단 간부 교류로 만나 결혼했다.
슬하에 아들 반우현과 딸 반선용, 반현희를 두었다.
둘째 딸 반현희는 유엔아동기금(UNICEF)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1970년 외무부 여권과 1972년 주 인도대사관 부영사, 1974년 주 인도대사관 2등 서기관 등을 지냈고, 주로 국제 조직을 거쳐 1980년 외무부 국제조직조약국 과장이 되었다.
이후 외무부 지원으로 하버드 케네디 행정대학원으로 유학하였으며, 1985년 4월에 졸업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85년 노신영 주 인도 대사에 의해 총리 의전비서관으로 발탁됐다.
1987년 7월 주미대사관 총영사, 1990년 6월 외무부 미주국장,
1992년 2월 외무부장관 특별보좌관, 1992년 9월 주미 공사를 역임했다.
반기문은 1994년 제1차 북한 핵위기 때 주미 대사관 정무공사로 재직하면서
한국과 미국 사이의 대북정책을 조율하는 실무총책을 맡았으며
그해 10월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 체결과정에 기여했다. 1995년 2월 외무부 외교정책실장과 외무부 차관보를 지내고, 1996년 11월에는 외교안보수석을 맡았다.
1997년 2월 황장엽 전 조선로동당 비서가 베이징 한국 총영사관에 망명 신청을 했을 때, 중국 정부의 입장을 고려해 제 3국인 필리핀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망명할 수 있도록 필리핀 피델 라모스 대통령에게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고 황장엽의 한국행을 위한 담판을 지은 밀사로서 활약하였다.[2]
반기문은 2000년 1월 외교통상부 차관을 지내다가 2001년에 물러났다.
뒤이어 2001년 9월 제56차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
2002년 외교통상부 유엔본부 대사를 맡았다.
그 와중에 9·11 테러가 발생하자, 그와 관련된 유엔 차원의 테러리즘 대응조치 및
이견 조율 업무를 수행하는 등 국제경험을 쌓았다.
2003년 2월 참여정부가 출범하자, 미국을 잘 아는 외교관이 필요했던 노무현 대통령은 반기문을 청와대 외교안보보좌관으로 임명하였다.
[3] 같은 달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가 노무현 정부의 반미적 입장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문제를 문제 삼아 대한민국의 국가신용등급 전망(Outlook)을 '긍정적(Positive)'에서 '부정적(Negative)'으로 낮추자,
노무현은 반기문을 비롯한 3인의 대표단을 무디스, 피치,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등의 신용평가기관에 급파하여 진화에 나섰다.
[3][4][5] 반기문의 대표단은 뉴욕의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 본사와 홍콩의 피치 사무국을 방문해 한국의 신용등급을 내리지 말아달라고 읍소하여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이후 노무현이 방미하여 의도적으로 친미적인 발언을 쏟아내자, 무디스는 신용등급 전망만 낮춘 채 실질적인 신용등급 하향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3][5]
반기문은 2004년 1월 외교통상부 장관으로 취임하여 2006년 11월까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반기문 장관은 2004년 국정감사에서 1909년 청나라와 일본 간에 체결된
2005년 반기문 장관은 독도 문제나 역사 문제에 대해 일본 정치인들은 한국인의 감정을 자극하는 발언을 자제하라고 촉구했다. "독도 문제는 우리 국토와 주권 문제와 관련돼 있고 한일관계보다 상위개념이다.
시마네현 영토 편입조치가 우리가 외교권이 거의 박탈당한 상태에서 이뤄진 불법적인 조치였기 때문에 국제법적으로 효력이 없는 것이다."라고 말했다.[7]
보수적인 대북관을 가지고 있던 반기문은 친북적인 대북정책을 추구하던 노무현 당시 대통령 및 참여정부 각료들과 잦은 마찰을 빚었다.
2004년 7월 반기문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결정을 무시하고 베트남에 모여있던 400여명의 탈북자들을 공개적으로 일거에 한국으로 입국시켜 대북관계를 경색시키고 대통령과 대립하였다
.[8] 또한, 2005년 3월 미국이 기존의 정전협정 체제를 평화협정 체제로 바꾸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을 심도있게 검토하고 이를 대한민국 측에 제안했으나, 반기문은 이를 유엔사를 해체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만전술이라고 판단하여 노무현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고, 나중에 콘돌리자 라이스 당시 미 국무장관에게 이 사실을 확인한 노무현은 반기문을 크게 질책하였다.[8][9][10]
반기문은 이후에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장에 동조하는 청와대의 한반도 평화협정 체제 구상에 계속 집요하게 반대하였다.
반기문은 2005년 8월 미국 워싱턴을 방문하여 '선 6자회담, 후 평화협정' 방침을 강조하는 발언을 하였고, 이 때문에 정동영 당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부터 그런 냉전적 시각으로 외교를 제대로 하겠냐는 질책을 듣기도 하였다.
[9] 청와대는 이같이 대북문제에 강경한 반기문을 견제하기 위해, 2005년 9월 6자회담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와 IAEA로 복귀한다는 9.19 공동성명이 타결될 때, 외교부에 박선원 당시 행정관을 감시병으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9] 이후 2006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대포동 2호를 발사하고, 같은 해 10월 1차 핵실험을 감행하여, 결국 9.19 공동성명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만전술로 드러나 공식적으로 파기되었다.
2006년 2월 14일에 유엔 차기 사무총장 선거에 공식적으로 출마 선언을 하여 2006년 10월 14일에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가 출마를 선언했을 당시엔 그의 당선을 예상한 외신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반기문은 아시아에 돌아갈 차례였던 당시 사무총장직을 놓고 인도 출신의 샤시 타루르와 경쟁하였다.[11] 하지만 8대 유엔 사무총장을 뽑는 1차 예비투표에서 그는 15개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회원국 중 13개국의 찬성을 받아 1위에 오르게 되고, 2차 투표에서 14표, 3차 투표에서 13표를 얻었고, 마지막 4차 투표에서 그는 7명의 후보를 제치고 안보리 15개 나라중 14개 나라의 지지를 받아 제8대 유엔 사무총장에 당선되었다.
특히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중동, 아프리카 국가의 그에 대한 지지는 대단하였으나, 10월 2일의 최종 비공식 설문조사까지 일본은 기권표를 던졌다가 논란을 피하기 위해 찬성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2007년 1월 1일 반기문이 유엔사무총장으로 취임하자, 영국의 이코노미스트지는 그에게 직면한 주요 문제로서, 이란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문제, 다르푸르 분쟁의 유혈사태, 끊임없는 중동의 분쟁, 환경 재앙, 급증하는 국제 테러리즘, 대량살상무기의 확산, 에이즈의 만연, 그리고 유엔 내부의 개혁 필요성을 언급하였다.[12] 반기문은 탄자니아의 외무장관 아샤 로즈 미기로를 유엔 사무부총장으로 지명하고 유엔 사무국 내각(Senior Management Group)을 구성하였다.
2007년 2월 6일 유엔 총회장에서 192개 회원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린 비공개 회의에서 반기문은 비대해진 유엔 평화 유지 활동국(DPKO)을 업무별로 2개 부서로 분리하고 군축 부서를 사무총장 직속에 두는 내용을 골자로 한 유엔 평화 유지 활동 개혁 방안을 발표했다. 또 기구 개편안에 대한 회원국들의 지지를 촉구했다.
반기문은 임기 초반에 지구 온난화를 주요 문제로 인식하였다. 2007년 3월 1일 온실 가스 감축을 위해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만난 자리에서 반기문은 "과거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 우리 세대에는 핵겨울이 가장 큰 위협이었으나, 지금 인류에 그와 비견될 정도로 위협이 되는 것은 기후 변화이다"라고 지구 온난화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을 강조하였다.[13] 2009년 9월 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 기후 회의에서 "우리의 발은 가속 페달을 밟고 있고, 우리는 나락을 향해 가고 있다"며 기후 변화 문제에 대한 범국가적 협력을 거듭 촉구하였다.[14]
2007년 1월 반기문은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에서 열린 아프리카 연합 정상회의로 최초 외부 순방을 하였다.[12] 반기문은 다르푸르 분쟁 해결이 그의 임기 중 최우선 목표 중 하나라는 것을 천명하고, 수단의 대통령인 오마르 알바시르를 만나 분쟁 지역에 유엔 평화유지군이 들어갈 수 있도록 하였다. 2007년 7월 31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26,000명의 유엔 평화유지군 병력이 아프리카 연합군과 합세해 분쟁 지역으로 진입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해당 지역에서 유엔 평화유지군의 활동은 2007년 10월부터 시작되었다.[15]
2011년 6월 21일, 반기문은 인류평화를 위해 노력한 점을 인정받아, 사상 이례적으로 15개 상임이사국과 유엔 전 회원국을 대표하는 5개 지역그룹 의장의 연임 추천을 받아 유엔 총회에서 192개국 회원국 만장일치로 유엔 사무총장직에 재선되었다. 연임에 성공한 반기문은 자신의 다음 파트너로서 스웨덴의 외교관 얀 엘리아손을 유엔 사무부총장으로 임명하여 내각을 재구성 하였다. 두번째 임기 중에는 주로 중동의 평화 문제와 소수자들의 평등과 인권 문제에 대해 강조하였다.
2016년 6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가진 연설에서 반기문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분쟁, 시리아 내전, 인권 보호, 대량살상무기 확산 저지 등 국제 문제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16]
2016년 4월 17일 외교부는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에 따라 30년만에 공개한 비밀해제 문서에서 반기문 총장이 과거 김대중의 동향을 정부에 보고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1985년 1월 7일 하버드대에서 연수 중이던 반기문 참사관은 미국 주요 인사들이 김대중의 안전 귀국을 요청한다는 정보를 입수, 류병현 당시 주미대사에게 보고했다.[17] 이는 '김대중 동정'이라는 제목으로 외교부 공식 보고에 포함됐다. 이 논란과 관련해 반기문 총장은 2016년 5월 한국을 방문하여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위한 것이 아닌, 개인 의견이 개입되지 않은 보고였을 뿐이라고 해명하였다.[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