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을 쓰고
김이듬
사과를 깎다가 텔레비전 켠다
심심한 일요일 밤에
음악 버라이어티쇼 복면가왕이란다
희한한 가면 쓰고 등장한 가수가 노래한다
누굴까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첫 토막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저 사람
사과 반쪽을 건네고 싶네
나머지 반도 나누고 싶다네
소백산 자락에서 수확했다는 이 붉고 새콤달콤할 사과 몇 알
훔쳐온 사람처럼 어서 없애고 싶네
스타킹을 벗겼을 때 홍안이었다네
편의점 앞에서 그 청년과 마주쳤던가
언젠가 어디쯤서 당신과 나 스치지 않았을까
태연히 토막살인 현장검증 마친 살인자의 모자 밑으로 보이던 입매
나는 한입 가득 사과를 깨물고
싼 게 왜 싼지 이유를 알게 되고
세상이 다 아는 일
숨기는 게 없다고 속삭이는 복면을 쓰고
진심으로 사랑해 아양 떠는 숙녀의 스타킹을 둘러쓰고
나도 속아 넘어가는 내 비장의 마스크가 있다는 거
자꾸 쓰다 보면 살결로 내장으로 스민다는 거
마스크 쓰고 시위 현장에 가면 처벌 대상이 된다는 거
세상이 다 아는 노래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방청객은 눈물을 흘린다
물에 안 지워지는 화장품이 얼마나 많은지
석고 팩은 부담스럽다는 거
얇고 부드러운 피부복면일수록 속이 덜 비친다는 거
세상이 다 아는 거
홍옥 껍데기 깎는 것처럼 일도 아닌 일
다 아는 걸 쓰고 있는 내 피부 아래 흰 장갑이여 앙상한 손가락이여
내 안에서 자꾸 최초인 것처럼 떨며 흔들리는 은사시나무여 아니
노래 가사처럼 가시나무 가지인가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편한 곳 없어서
내 바깥으로 튀어나간
당신인가 나인가 안팎이 없는
어쨌든 결과 색이 나쁘지 않은 복면을 쓰고
—《유심》2015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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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듬 / 1969년 경남 진주 출생. 2001년 《포에지》를 통해 시 등단. 시집『별 모양의 얼룩』『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베를린, 달렘의 노래』『히스테리아』, 장편소설『블러드 시스터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