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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12월4일 대림 제1주간 토요일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청하여라 The harvest is abundant but the laborers are few;
(마태 9: 35―10,1.6-8)
so ask the master of the harvest
to send out laborers for his harvest.
말씀의 초대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부르짖으면 반드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들으시는 대로 응답해 주실 것이라고 주님의 말씀을 전한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곤경의 빵과 고난의 물을 주신 것은 믿음에 대한 시험일 따름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숨어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백성을 측은하게 여기시며, 그들의 고단한 눈물을 닦아 주시는 분이시다. 그 일을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고, 또 우리를 불러 모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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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당신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느끼셨던 마음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을 선택하시어 ‘당신의 능력’을 주고자 하십니다. 하늘 나라를 알리고 ‘악한 영’을 몰아내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주님께 믿음을 두고 주님의 뜻을 받들어 사는 일입니다. 우리도 생명, 의로움, 평화, 진리이신 주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야 하며, 부활하신 주님을 따라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끊임없이 우리를 당신 날개 그늘 안으로 불러 모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파에 시달리고 고단한 삶으로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이들의 눈물을 닦아 주시며, 병자, 가난한 이, 힘없는 이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십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두운 구석까지 당신의 밝은 빛으로 비추시며,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대림 시기를 보내면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는 이제 그분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닮아 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어 당신의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주님께 속한 사람만이 그분의 일꾼으로서 그분께서 맡기신 일을 할 수 있고, 그분을 닮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확은 ‘주님의 힘’이 일으키는 ‘변화’입니다.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삶을 바꾸는 모습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런 변화를 위해 ‘당신의 힘’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병자를 낫게 하고 악령을 몰아내는 것은 수단일 뿐입니다. 그런 행위를 통해 ‘하느님의 전능’을 드러내야 올바른 사용이 됩니다.
갈수록 사람들은 ‘영적 수확’을 숫자에서 찾으려 합니다. 얼마나 예비 신자로 이끌었고, 영세자가 몇 명이며, 복음화 비율이 얼마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숫자가 많다고 하늘 나라에서 감탄하는 것은 아닙니다. 숫자만큼 ‘기쁨으로 사는 신앙인’이 늘어나야 진정한 수확이 됩니다.
부모들이 감사의 신앙생활을 하면 자녀들은 금방 따라갑니다. 부모가 주는 ‘밝은 기운’은 곧바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자녀들과 함께 봉사의 삶도 실천해야 합니다. 그것은 ‘부모의 혼’을 남기는 행위입니다. 물질의 유산은 자식을 망칠 수 있지만, ‘정신의 유산’은 앞날을 밝게 합니다. 자녀를 변화시키는 부모들은 진정 살아 있는 주님의 일꾼들입니다.
은총의 무상성 -정찬호-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 덕분에 -김찬선신부- 오늘 형이상학 놀이를 좀 할까요?
발상 전환
사랑은 동적이다
양말과 산타 모자 - 최용진 신부- 어렸을 때 저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큰 걸 받기 위해 제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큰 양말을 벽에 걸어 두고 잤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형은 엄마 스타킹을 걸어놓은 것입니다. 저는 그런 형의 똑똑함에 감탄했습니다.
눈 시린 천국 -장재봉신부- 강한 햇살 아래에서는 눈이 스르르 감기는 일을 경험하셨지요? 이는 햇빛을 바라볼 수 있는 시력이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시력은 태양을 곧바로 직시하면 시력을 잃게 되니까요. 세상만물을 창조하시되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게 하신 주님께서는 꼭 필요한 태양을 지으시되 그 빛을 보면 ‘다칠’ 인간을 위해 마련한 조처가 바로 ‘스르르’ 얼른 눈이 감겨버리게 하신 것이라 생각하니 얼마나 좋은 솜씨인지 얼마나 세심한 배려인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느님께서는 달빛이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지는 그곳을 이야기하십니다. 물론 눈이 시려서 살 수가 있을 것인지 모조리 장님이 되는 건 아닌지 염려할 것은 없지요. 우리에게는 특별한 시력이 주어질 테니까요. 태양조차 마주 볼 수 없는 우리 눈은 그곳에서 그분을 뵈올 수 있는 밝은 눈으로 변화될 것이니까요. +++ 믿음생활을 ‘안다’하고 기도생활을 ‘했다’하고 사랑에 관하여 ‘해 봤다’ 고 말하는 일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은 알지 못하면서 보지 못하면서 아는 척하고 본 척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마음눈을 감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지요. 믿음과 기도 더욱이 사랑은 늘 새로운 하느님의 것입니다. 묵은 것만으로, 한 번쯤 해 본 것만으로는 결코 족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사야예언자가 ‘부르짖으면’ ‘들으시는 대로’ 응답하리라 하신 이유라 싶습니다. +++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늘 나라의 복음은 땅에서 기가 꺽이어 시달리는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낫게 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맡겨주신 복음으로 길 잃은 양들을 깨끗하게 하고 낫게 할 뿐 아니라 고쳐주고 일으켜 주라 하십니다. 거저 주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라 하십니다. “나에게서 눈을 돌려 다오. 눈이 부시어 쳐다볼 수도 없구나”(아가 6,5 공동번역) 오늘 우리의 삶을 바라보시는 그분께서는 마음만이 아니라 눈마저 시려하실 것을 고대하십니다. 그날, 그 눈 시린 하늘나라가 얼마나 찬란하겠는지요?
정화와 자기 버림의 수단인 시련과 고통
. 주님의 특기 -민경철 신부- 동창 신부들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신학생 시절 ‘과연 우리가 신부생활 누가 할 것인가? -신금재- 영원한 희망 -이수철신부- 당신 말씀에 희망을 두옵니다.”(시편119,147). 눈 뜨면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이요 그리스도 예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분명 세상 끝날 까지 늘 우리와 함께 있겠다고 하신 임마누엘 하느님이십니다. 바로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신 하느님을 상징합니다. 늘 마음에 하늘과 태양을, 희망이신 하느님을 품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결코 우리의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변화무쌍한 세상에, 사람에, 일에, 재물에, 지위에 희망을 두다보면 마음의 평화는 요원합니다. 영원하신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언제 어디서나 한결같은 내적평화입니다. 벌써 서울 거리에는 크리스마스 츄리가 마음을 설레게 한다지만, 이제 예수님의 성탄은 모든 이들의 보편적 축제가 되었다지만, 과연 그리스도 예수님 그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진정한 희망은 하느님이자 그리스도 예수뿐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매일 새벽마다 일어나 도움을 청하며 주님께 희망을 두는 우리들입니다. 이래야 허무주의 인생관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믿는 이들을 통해 발산하는 하느님 희망의 빛이요, 우리가 세상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도 이런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희망과 기쁨뿐입니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의 활동에서 우선적으로 부각되는 게 하늘나라의 복음 선포가 아닙니까? 온갖 치유 활동이 뒤를 잇습니다. 앓는 이들은 고쳐주고 죽은 이들은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은 깨끗하게 해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하느님께 거저 받은 이 영원한 희망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이웃에게 거저 주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이사야 예언자를 살린 것은 역시 하느님 희망이었습니다. 당신의 매를 맞아 터진 곳을 낫게 해주시는 날, 달빛은 햇빛처럼 되고, 햇빛은 일곱 배나 밝아지리라.”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을 선사하시어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달빛 같은 마음을 햇빛 같이 환하게 해 주십니다. 당신 얼굴을 비추소서. 저희가 구원되리이다.”(시편80,4). 아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윤경재- 慈悲光明(2003-12-06) -강영구신부- 살아있는 교회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복음선포의 특징 중 우세한 특징 하나가 "삶과 연결된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복음선포"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방황과 좌절, 고통과 눈물을 외면한 채 복음만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선포함과 동시에 복음 선포의 핵심 메시지인 "이웃 사랑의 실천"을 동시에 이행하셨습니다. 우는 이들을 만나면 우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셨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만나면 일단 상처부터 치유시켜주셨습니다. 굶주린 사람을 만나면 만사를 제쳐두고 밥부터 먹이셨습니다. 병든 이들, 죽어 가는 이들을 만나면 간절한 기도로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이미 죽은 이들 조차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소생시키셨습니다. 복음서 전반에 나타난 예수님의 행적을 종합해보면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 하셨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도 계속 밀려드는 가엾은 군중들을 눈여겨보셨던 예수님은 당신 몸이 하나뿐인 것이, 당신 손이 두 개뿐인 것이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생각하신 것이 제자 양성이었지요. 아침부터 밤늦도록 혼신의 힘을 다해도 벌떼처럼 셀 수도 없이 몰려드는 백성들을 돕기 위해 제자들을 뽑으십니다. 그들을 교육시키십니다. 그들에게도 당신의 권능을 나눠주십니다. 부족한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채워주시려는 극진한 아버지의 마음, 우리 구원을 위한 일편단심, 그것이 한평생 일관된 예수님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은 하루종일 원예치료학회에서 주관한 학술세미나에 참석했었습니다. 땅을 일구고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밭에서 땀을 흘리는 일이 정서적 안정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성격장애를 치유하는데 얼마나 좋은 도구인지를 잘 알고 돌아왔습니다. 언젠가 가능하다면 저희도 시골에 아담한 집 한 채 짓고, 텃밭도 마련해서 도시 부적응 아이들, 성격장애 아이들, 정서 불안 증세를 보이는 아이들을 위한 원예학습 치료의 장을 꾸며보자고 다짐을 하며 돌아왔지요. 당시 여러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던 사람들, 가장 천대받고 멸시 당하던 사람들만을 우선적 사목 대상으로 선택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만일 지금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을 찾아가실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교회는 교회 본연의 사명인 교세확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성당을 짓기 위한 신축부지 마련이나 신축도 중요합니다. 성지의 개발도 중요합니다. 신자 재교육도 중요합니다. 각종 단체의 활성화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이 시대 살아있는 교회이자 성지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일입니다. 양보다는 질이 관건이다.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나름대로 편집한 기적사화집성문(8-9장)의 마지막 부분이 파견설교(10장)에 연결되는 대목이다. 마태오는 예수께서 지금까지 펼치신 활동들을 간략하게 요약한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의 온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그 표시로 수많은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눈코 뜰 새 없으신 거대한 활동상이 단 몇 마디로 요약된 것이다. 그렇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예수께서는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많은 군중을 보시고 더 많은 목자의 필요성을 느끼신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을 간파하신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는 직접 12제자를 뽑아 사도로 임명하시고,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어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들 가운데로 파견하신다. 목자 없는 양떼 같이 시달리고 허덕이는 많은 군중들을 보면서 아쉬워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떠올리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무엇이 있다. 그것은 "왜 예수께서 한꺼번에 군중의 부족함을 채워주시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은 비단 우리만의 생각이 아니라 모순과 부정의 세상을 살아가는 인류역사의 생각이기도 하다. "기적만이 능사가 아니다"고 어제 말했다. 예수께서 기적만으로 삐뚤어진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하셨다면 굳이 온 마을을 두루 다니실 필요도 없겠거니와 아예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실 필요도 없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처럼 한 마디 말씀으로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이유와 의미를 찾아야 한다. 아울러 오늘 복음이 무엇을 선포하고자 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을 도식으로 설명하자면, "예수님의 활동(열정) -> 목자의 부족(절망) -> 제자들의 파견(희망)"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예수님의 분주하고 열정에 찬 선교활동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상황은 거의 절망적이다. 양떼는 많은데 이를 돌보아 줄 목자가 턱없이 부족한 현실은 가히 절망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모든 양떼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일꾼을 청하라고 독려하신다. 예수님 스스로 많은 제자들 가운데 12명을 선발하시어 사도로 삼아 절망에 찬 세상에 이들을 파견하시어 희망을 주시는 것이다. 12명의 사도로 절망적인 현실이 구제될 수 있겠는가? 물론 불가능하며 중과부적(衆寡不敵)하다. 그것은 "추수할 것은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적다"는 말씀을 수(數)적인 부족으로 생각할 때 그렇다. 양적(量的)인 요청이 간절할 때도 많지만 질적(質的)인 풍요가 더 중요하다. 우리가 예수님의 파견설교(10장)를 귀담아 듣는다면 이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 실행에 옮기기에도 어려운 엄격한 선교상의 여장규칙을 언급하신 것을 생각해 보라. 따라서 문제는 양(量)에 있지 않고 질(質)에 있다. 그 질(質)을 오늘 복음에서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는 말씀이다. 세상 사람들 중에 자기가 가진 것을 거저 받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일꾼은 적다' - 유광수신부-
그런데 놀라운 일이 생겨났습니다. 글쎄 우둔한 반으로 편성된 원래 우수한 아이들의 성적이 크게 떨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학기 내내 선생님들에 의해 열등하고 학습능력이 부족한 아이들로 여겨져 왔기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반대로 우수한 반으로 편성된 우둔한 아이들의 성적은 크게 올라갔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학기 내내 선생님들에 의해 대단히 우수한 아이들로 여겨져 교육되었고, 이들에 대한 긍정적인 기대감을 선생님들이 늘 표현해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어떻게 인정받느냐에 따라서 개인의 능력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큼 인정하고 칭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사회사업가 겸 작가로 유명한 헬렌 켈러의 예에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앤 설리번 선생님의 헬렌 켈러에 대한 인정과 칭찬이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했던 그녀에게 기적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우리 모두를 인정하시고 받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전교 여행을 떠나실 때, 특정한 고을과 마을만을 다니신 것이 아니라,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셨던 것이지요. 또한 당시의 지배층과 특권층들만을 만난 것이 아니라, 가장 힘없고 소외되었던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만나셨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은 과연 주님께서 관심을 갖고 만났던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현재를 살고 있는 지금 우리들에게 당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며 하신 말씀을 그대로 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실 내가 숨 쉬고 살아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전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내가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우리도 주님처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즉, 나의 이웃 모두에게 관심과 사랑을 갖고, 그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특별한 사람만을 받아들이겠다.’, ‘나에게 이득이 되는 사람에게만 사랑을 베풀겠다.’라는 생각들은 주님의 뜻과 정반대로 나아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내가 베풀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이미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내 이웃들에게 특별히 소외되고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거저 베풀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이 거저 받은 것은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 받았고, 또 병을 고치는 능력도 받습니다(10,1). 예수님이 쓰시고자
하셨기에, 여러 능력을 대가 없이 받은 것입니다. ‘은총의 무상성無償性’입니다.
은총은 인간 측의 공로功勞와 무관하게, 주님의 크신 자비로 주어집니다.
제자들에게 맡겨진 일은, 이 은총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는 일입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주 주어야겠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위의 도움을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종종 이런 사실을 잊곤 합니다. 사람은 본디 자기중심적이어서,
내가 거저 받은 것도 내 노력의 결과라 하고 싶고, 또 남들에게 주면서도
무언가 합당한 평판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은총의 무상성’에 대한 깨달음은 달리 생각할 여지를
제공해줍니다. 무엇보다 생명이 그렇습니다. 나의 실존과 모든 소유의
근원인 ‘생명’은 분명 크나큰 은총이며, 그 출발부터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무상으로 받은 것입니다. 생명은 다른 모든 것과 바꿀 수 없는 귀한 것이고 보면,
지금 내가 소유한 것들은 생명이라는 하느님의 은총을 능가할 수 없습니다.
이 무상의 은총에 내 공로를 더 보탠다고 해도, 그것 역시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총에 속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德이란 무엇일까?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德이란 善과 관련한 능력이라 할 수 있지요.
우리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돈을 잘 버는 능력,
사람을 잘 사귀는 능력,
음악을 잘 하는 능력,
경영을 잘 하는 능력 등.
여러 가지 능력 중에서
德은 善을 잘 모으고, 지니고, 나눌 줄 아는 능력입니다.
반면에 惡德은 惡을 잘 모으고, 지니고, 유포하는 능력이라 하겠지요.
그러므로 德이 많은 사람, 즉 厚德한 사람은
남에게 善을 많이 끼치는 사람, 선행을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아시는 분 있으십니까?
德에는 여러 가지 덕이 있지요.
그리스 철학에서는 知義勇節의 四樞德을 얘기하고
중국 철학에서는 知, 仁, 勇의 三達德을 얘기하여
知者不惑(지혜로운 사람은 헷갈리지 않음)하고
仁者不憂(어진 사람은 걱정하지 않음)하며
勇者不懼(용기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음)함을 얘기하고
그리스도교에서는 信望愛 3德을 얘기하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덕중에서
사랑이란 積善을 잘 하는 능력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아무리 악한 것이 판을 쳐도 선을 쌓는 능력이요,
아무리 누가 악한 짓을 자기에게 해도 선으로 되돌리는 능력이요,
더 나아가서 자신의 德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德分, 덕을 나누어 줌으로서
많은 사람이 덕을 보게 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종종 누구 德에 잘 먹었다고 하고
누구 德分에 일이 잘 되었다고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누구를 잘 먹게 하려면
좋은 음식을 사 줄 수 있는 경제적인 능력이 있던지
돈이 없으면 직접 음식을 맛있게 잘 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뿐입니까?
좋은 음식을 사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하지요.
사랑이란 내 德을 보게 하고픈 마음의 힘, 心力이요
선을 나눠줄 수 있는 能力입니다.
오늘 복음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 사랑의 德을 봅니다.
얼마나 사랑의 德이 많으신지 수없이 많은 사람이 德을 봅니다.
예수님 德分에 잘 먹고,
예수님 德分에 병을 고치며,
예수님 德分에 팔자를 고칩니다.
예수님께서는
한없는 측은지심으로
가르치시고
고쳐주심으로
수많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善인 하늘나라를 선사하십니다.
“명예롭게 죽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죽을 각오는 되었느냐?”
“예.”
“그렇다면 가르쳐 주마. 상대와 마주 서거든 우선 칼을 높이 들어 겨누고서 눈을 감아라. 절대 눈을 뜨지 마라. 그리고 기다려라. 상대방의 칼이 네 몸에 닿는 순간 가차 없이 칼을 내리 쳐라.”
생전 처음 해보는 결투, 소년은 사생결단을 내리기로 했지요. 눈감고 칼을 높이 들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한참 후 상대가 바닥에 칼을 던지며 말하는 것이에요.
“이 승부는 내가 졌다.”
소년은 눈을 떴으나 어째서 자기가 이겼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스승을 찾아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너는 칼을 맞고 죽지만, 상대방도 내려치는 네 칼에 또한 죽게 된다. 즉, 서로가 서로를 치는 것이지, 상대가 물러선 것은 그 점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검도란 그런 것으로 생명을 버리지 않으면 이기지 못한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싸우려 했기에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이러한 마음가짐을 필요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남의 생명의 취하기 위해서 이런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되지요. 그보다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런 마음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시지요. 당신께서 계속 이 세상에 남아서 직접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줄 수 없기에, 그 몫을 계속 이을 당신의 일꾼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더군다나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음 그 자체만으로도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림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족하다고 더 많은 것을 내어 놓으라고 주님께 말하고 있는 내 자신의 이기심에 스스로 한숨이 나올 뿐입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다시금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해봅시다. 그래서 이제 주님의 말썽꾸러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진정한 일꾼이 되어 주님께 도움이 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김현태 신부-
신학문과 정보가 봇물을 이루면서 세계 문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도 급변하고 있습니다.
변화와 발전은 어느 순간 하느님을 저 멀리 밀쳐버렸습니다. 간척지 개간사업이
바다를 저 멀리 몰아낸 것처럼 말입니다. 신의 부재(不在)라는 외침이 진동하더니
어느새 인간이 초월인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초월자에 대한 애정은 점점 식어
주객이 전도되어 세상 정원을 가꾸는 비극적 행태가 사방천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소자의 급감은 유행병처럼 세계적 현상이 되고 있습니다.
금전과 권력과 명예가 권세 있는 대감으로 자리잡으면서 사람들은 그 앞에서
마냥 아부를 떨고 있습니다. 대학에서조차 기초학문에 대한 홀대가 계속되고
과학 정보지상주의에 온몸을 내맡기고 있습니다. 인성 및 심성교육,
인격, 애정이란 단어는 이제 저 한쪽 판자촌 구석에나 가서야 비로소
만나볼 수 있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세상 흐름을 거부할 순 없지만 순응 일변도가 아닌 역발상적 사고, 역류하는
삶의 가치를 따져볼 때입니다. 육지만 넓힐 게 아니라 바다의 중요성도 상기하듯
호출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어떻게 응답할 것인지 자세를 바꿔보도록 합시다.
-김찬선신부-
바보 같은 질문일지 모르지만 사랑은 정적일까, 동적일까?
연애 감정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혹 정적인 것이 아닐까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이 참 사랑일수록 사랑은 분명 동적인 것입니다.
오늘의 예수님 사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사랑은 우선 마음을 움직입니다.
가엾은 사람을 보면 가엾은 마음이 듭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안정이 깨지는 것이 두려워
고통이 침입하는 것이 두려워
상처를 입는 것이 두려워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
가엾은 마음이 드는 것을 얼른 차단하고
마음을 차돌같이 단단하게 만드는 우리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오는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사랑은 마음을 움직일 뿐 아니라 몸도 움직입니다.
가엾은 사람을 보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선 찾아가고
찾아가서는 그에게 필요한 무엇을 합니다.
가엾은 사람을 만날까봐 피해가고
도와달라고 찾아와도 냉정하게 문전박대하는 우리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찾아다니십니다.
그리고는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십니다.
사랑은 자기 마음과 몸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의 마음과 몸도 움직입니다.
불이 불을 일으키듯
사랑은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큰 불이 더 큰불을 일으키듯
큰 사랑은 더 많은 사람이 더 큰 사랑을 하게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십니다.
당신이 하시는 것과 똑같은 것을 하라고 파견하십니다.
열 두 제자는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대표들이니
열 두 제자를 파견하심은 온 교회를 파견하심입니다.
저의 사랑은 몇 사람에게나 사랑을 불러일으키는지
사랑을 위해 몇 사람이나 달려가게 하는지
우리의 주님은 오늘 초라한 저의 사랑을 돌아보게 됩니다.
매년 크리스마스 때면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받기 위해 자신의 욕심만큼 커다란 양말을 준비하곤 합니다. 하지만 올해만큼은 그 양말을 치워버리고 빨간 모자를 준비하면 어떨까요? 매년 산타를 기다리던 당신이 올해는 직접 산타가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아무리 꽉 차도 당신의 욕심을 채울 수 없었던 양말보다 산타 모자가 당신을 더 행복하게 해줄지 모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아내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린 아들이 부엌으로 와서 엄마에게 자기가 쓴 글을 내밀었다. 아내는 앞치마에 손을 닦은 다음에 그것을 읽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잔디 깎은 값 5달러, 이번 주에 내 방 청소한 값 1달러, 가게에 엄마 심부름 다녀온 값 50센트, 엄마가 시장 간 사이에 동생 봐준 값 25센트, 쓰레기 내다 버린 값 1달러, 숙제를 잘한 값 5달러, 마당을 청소하고 빗자루질을 한 값 2달러, 전부 합쳐서 14달러 75센트.’
아내는 기대에 차서 바라보는 아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아내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가는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아내는 연필을 가져와 아들이 쓴 종이 뒷면에 이렇게 적었다. ‘너를 내 뱃속에 열 달 동안 데리고 다닌 값 무료, 네가 아플 때 밤을 새워가며 간호하고 널 위해 기도한 값 무료, 너 때문에 지금까지 여러 해 동안 힘들어 하고 눈물 흘린 값 전부 무료, 이 모든 것 말고도 너에 대한 내 사랑은 무료, 너 때문에 불안으로 지샌 수많은 밤과 너에 대해 끝없이 염려한 시간도 모두 무료, 장난감·음식·옷과 심지어 네 코를 풀어준 것까지도 전부 무료, 이 모든 것 말고도 너에 대한 내 진정한 사랑은 무료.’ 아들은 엄마가 쓴 글을 다 읽고 나더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사랑해요!” 그러더니 아들은 연필을 들어 큰 글씨로 이렇게 썼다. “전부 다 지불되었음!”
그대가 가진 것 가운데에서 받지 않은 것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 받은 것이라면 왜 받지 않은 것인 양 자랑합니까?(1코린 4,7)
-경규봉 신부-
예언자는 고통 속에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그들을 위로한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로하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실 것이다. 박해받아 피신했던 예언자들이 다시금 활동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함으로써 당신 백성이 하느님을 참된 인도자로 삼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때맞추어 비를 내리도록 하시어 땅에 곡식이 풍성하게 열매 맺도록 하실 것이며, 가축들은 넓은 목초지 위에서 마음껏 먹이를 먹음으로써 살찌게 하실 것이다. 당신 백성의 교만을 상징하는 요새의 탑이 무너지고, 교만에 찬 무리들이 제거된 다음,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풍성한 축복의 날이 올 것이다(2,15; 미가 5,9-10). 그때 달은 해처럼, 해는 일곱 배로 밝아져 빛을 발함으로써 상처 입은 당신 백성을 깨끗이 치유할 것이며, 그들은 빛의 영화로움 속에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이사 49,15)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늘 기억하신다. 당신 백성이 포로 생활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계신다. 그들이 모욕과 멸시를 당하면서 실의와 절망에 빠져 있다는 점을 너무나도 잘 기억하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곧바로 구원하시지 않는다. 사랑하는 자식이 당하는 고통을 보는 아비의 마음이 아프지만, 자식의 성장을 위해서는 고통을 극복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곧바로 보내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정화되도록 하신다. 그들의 교만과 오만을 없애고 겸손함을 심어주시기 위하여 모욕과 멸시를 당하도록 허락하신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시기 위하여”(에제 36,26) 그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은처럼 불 속에서 녹여내고 고생의 도가니 속에서 그들을 단련시키시는 것이다.”(이사 48,10)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위로와 평화의 때를 약속하시면서, 그때에 이르기까지 시련과 고통을 이겨내도록 용기를 주시는 것이다.
누구나 고통을 싫어하고 모욕과 멸시를 견디기 어려워한다. 그러나 성인들은 고통을 사랑했고, 모욕과 멸시를 달게 받았다. 성인들은 그러한 것들을 자기 정화의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온전히 낮추고 겸손해지기 위하여 그러한 것들을 도구로 삼은 것이다. 때로는 극기와 고행, 단식을 하면서, 때로는 자청하여 모욕과 멸시를 당하면서까지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버리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들은 오직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과 행복만을 구하기 위하여 지상에서의 모든 즐거움과 영예 및 영광을 쓰레기처럼 생각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필리 3,8)는 사도 바울로의 말씀에 따라 살아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때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시련에 처해 있다면, 우리가 모욕과 멸시로 인하여 심한 모멸감과 자괴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곧 하느님께서 나에게 천국의 영광과 영예를 주시기 위한 시련임을 생각하자. 우리로 하여금 자기를 버리고, 세상 것에 얽매이지 말며, 오직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며 걸어가도록 초대하시는 부르심임을 믿고 살아가자.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1,7)는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하느님을 향해 걸어가자...............◆
-김정렬 신부 -
찬미예수님!
세상에 사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고집은 있습니다. 좋게 표현한다면 이 고집은 힘겨운 세상에서 살아하는 힘의 근원이 되기도 하고,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힘들게 해서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같은 일에 대하여 두 가지 면을 아는 것이 우리들이기는 합니다만 우리는 이러저러한 상황에 따라 그렇게 아는 것들을 선택하고 삽니다. 그렇게 누구나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 고집을 어떻게 드러내는 것이 옳은 길인지 고민하고 적용하는 방법에 따라 우리가 인생을 만족하게 살고 있는지 아니면 글자 그대로 다른 사람들의 인상에 주름잡히게 하는 삶인지 구별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복잡한 세상에서 좋은 마음을 갖고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어리석은 삶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현명하고 영악한 삶만을 추구한다고 해도 문제는 남습니다.
사람의 생활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좋게 봐준다고 하더라도 내가 공감하는 기준에 따라 사는 일이 필요한 것이지 다른 사람들의 기준만으로 내 삶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도 만족할 수 있고 내 삶을 보고 하느님도 옳게 살았다고 인정해주실 만한 일은 어떤 길이겠습니까?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기가 반드시 해야 할 숙명으로 받아들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하고 없으면 하지 않을 수 있는 선택적인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자기가 반드시 해야할 숙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니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선교사명을 목숨을 걸고 수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그들을 생각하며 부럽다고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럽다는 생각만 갖고서는 세상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흔히들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와 핑계를 대면서 ‘내가 마음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는데......’하면서 후회하는 일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슬이 세 말이 있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을 기억한다면 사람이 가진 좋은 마음이나 생각만으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 그 복음을 올바른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사람이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기는 쉬워도 그 말씀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물론 더 큰 탓은 우리가 도전하지 않거나 지레짐작으로 미리 주저앉아버리는 일이 더 큰 문제가 될 것입니다. 누구나 가는 길을 가서는 특별할 것이 없는 것이 사람의 삶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나와 같은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받아들이고 삶의 기준으로 삼는 믿음을 전하기 위해서 목숨이 다하기까지 움직인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어제는 사제서품식을 다녀왔습니다. 15명의 사제와 15명의 부제가 새롭게 탄생했지요. 그 모습이 너무나 좋아보였습니다. 특히 주님께서 내려주신 사명을 철저하게 따르겠다는 강한 열의까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이 새 신부와 새 부제의 신입생 시절이 떠올려졌습니다. 사실 제가 부제 때, 어제 서품 받은 신부와 부제들이 신입생과 2학년이었거든요. 정말로 부족한 모습이었지요. 실수투성이고, 과연 신부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의구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제 서품 받을 때의 모습에서 그때의 그 부족한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주님의 섭리는 놀랍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하긴 저처럼 부족한 사람도 이렇게 쓰시는 주님이시지요. 그런데 문제는 주님의 섭리에 반하는 우리들의 섣부른 판단과 단죄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로 슬픔에 잠겨 있던 한 여인이 가슴을 치며 통탄 하듯 말했습니다.
“나에게는 왜 이토록 고통스러운 일만 가득하단 말인가? 차라리 인간으로 창조되지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옆에서 듣고 있던 한 여인이 조용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은 아직 완전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랍니다. 지금도 주님께서 당신을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맞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를 보면서 얼마나 많은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었는가요?
오늘 복음에도 나와 있듯이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항상 가엾은 마음으로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세상살이에 힘들어서 기가 꺾여있는 우리들의 모습에 주님께서는 힘을 내게 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일꾼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모습에 섣부르게 판단하는 우리들의 성급함이라는 것입니다.
그 일꾼의 모습은 다양한 모습으로 올 수 있습니다.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주님의 일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런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한없이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내 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넓은 마음이야말로 주님께서 보내주시는 일꾼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새 사제와 새 부제가 주님의 일꾼으로 새롭게 탄생한 어제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일을 더욱 더 충실히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빠다킹신부
똑바로 할 수 있으려나?’ 하고 의구심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혼자 생각하기에
우리 모습들을 보니까 못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성질도 못되어 보이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어 보이고 그렇단 말이지요.
근데 신부생활 하는 것을 보니까 이건 완전히 대박입니다.
10년 동안 같이 살아왔지만 ‘저 친구에게 저런 모습이 있을 줄이야’ 하면서
감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주님의 능력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못난 놈을 특별한 놈으로 바꾸시는 특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시원찮은 채로 내보내시지 않고 안을 꽉꽉 눌러 채워주시거든요.
더러운 영들을 쫓아낼 수 있는 힘,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보살피고 고칠 수 있는 사랑의
마음과 능력, 당신을 전할 수 있는 지혜를 가득 채워서 보내주십니다.
주님은 당신의 협력자들에게 제까짓 것 능력 발휘하라는 것이 아니고,
당신 힘을 발휘하는 도구로 살라고 보내셨기에 그런 것이지요.
주님의 일꾼은 ‘못나야 제대로’입니다.
우리는 신부님의 새로운 아이디어에 모두 동의하면서, 특별히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을 아껴주시는 마음에 가슴 뭉클했다. 이제 남은 것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일이다. 회합을 하면서 기타사항 시간에 누구를 교리교사로 추천할 것인지를 토론하게 되었다. 우리 팀 단원 중 세 명이 추천을 받았는데 모두 할 수 없는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빠지려고 했다. 나도 머릿속으로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술에 아주 강한 접착제가 붙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왜 이럴까? 정말 이상하다. 그러다 시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평소에는 “주님의 도구로 써주십시오. 주님 포도밭에 일꾼으로 써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면서 이렇게 막상 봉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인간적인 마음이 앞서면서 빠지려고 하는 나약함을 어찌할까? 주님, 부디 인간적인 나약함을 고쳐주소서.
“새벽부터 일어나서 도움을 청하며
눈 들면 어디에나 하늘이요 태양이듯이,
눈 들면 어디에나 있는 푸른 하늘과 빛나는 태양,
순전히 인간적으로 보면 절망적인 오늘의 현실입니다.
많은 이들의 희망 부재의 현실을 탓하지만
우리는 ‘살기위하여’ 하느님을 우리의 희망으로 삼습니다.
먼저 하늘나라의 비전이, 희망이 선포되면서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우리 또한 매일 미사를 통해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상처를 싸매주시고,
매일의 복된 미사를 통해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켜 주소서.
그리고 장애우라고 해서 행복이 전혀 없고 불행하기만 할 것이라고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들과 지내보면 우리들 보다 더 감사하고 지낸다는 것을 금세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아무렇지도 않게 불평하고 있는 것들에 이들이 얼마나 감사해 하는지 안다면 여러분이 오늘 하는 봉사가 시간낭비가 아니라 일생일대에 가장 큰 축복이 될 것입니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님에게 자기를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해요. 좋은 선생님 만나게 해주셔서 고맙다고 기도해요. 착한 친구 사귈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웃어요. 나도 한가지쯤은 잘할 수 있다고 기뻐해요. 걸을 수 있고, 책 읽을 수 있고, 내 손으로 밥 먹을 수 있고, 눈이 보이고, 귀가 들리는 것에 이들처럼 감격해 하는 사람이 없어요. 봉사자 여러분 진정 그들처럼 감사했는지 아마 부끄러우실 것입니다. 그들이야 말로 거저 주신 것에 감사하고 자신이 받은 것을 거저 주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예요.
성경에 바리사이가 바치는 기도가 있죠. 그들도 자기가 하느님께 받은 것을 감사하며 기도하죠. 그러나 잘 들어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도는 자기가 받은 것을 거저 주려는 기도가 아닙니다. 남을 저주하는 기도이며, 자기를 분리하려는 기도입니다. 하나가 되려는 기도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진정 감사하는 기도인지 깨닫고 가시기 바랍니다. 아멘.
온 누리에 자비慈悲의 광명光明이 비치는 모습을 본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이름 없는 떠돌이 랍비이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어둠이 물러가고 새 세상이 열린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마음에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겠느냐.”(마태12,35)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다.
없는 것을 내놓을 수도 없다.
향기롭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사람은 주위를 향기롭고 아름답게 만든다.
탐욕스럽고 추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주위를 썩게 하고 악취 나게 만든다.
보물 창고에서 보물이 나오고 쓰레기통에서 쓰레기 나오기 마련이다.
예수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惻隱之心에서 흘러나오는 치유의 은총은 병자와 허약한 사람은 모두 고쳐준다.
예수의 대자대비심大慈大悲心은 태양과 같다.
그 환하고 따뜻함은 어둠을 몰아내고 새싹처럼 생명이 돋아나게 한다.
예수가 가는 곳마다 악령이 물러가고 죽음이 사라진다.
묶은 것은 사라지고 새 세상이 열린다.
가슴을 열고 예수를 만나는 사람은 누구든지 새롭게 태어나서 새 삶을 누린다.
하느님의 사람 예수가 복음福音이다(一明)
일꾼은 처음부터 자기가 무엇을 시작해서 어떤 결실을 맺게 하고 그 결실을 거둬서 주인님께 갖다 바치는 일꾼이 아니다. 씨를 뿌려서 수확을 할 수 있을 때까지 모든 일은 이미 예수님이 다 해놓으셨다. 일꾼이 해야할 일은 예수님이 이미 다 해놓으신 것을 거두어 들이는 일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항상 예수님이 시작하신다. 또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다. 아버지는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고 그 일을 할 일꾼으로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보내셨다.
둘째,
셋째, 모든 아픔과 질병을 고쳐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단순히 하늘 나라의 복음만 선포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예수님이 찾으시는 추수할 일꾼이 될 수 있는가?
그것은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 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3, 14-15) 즉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고 마귀들을 쫓아내게 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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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거져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아멘 주님 제마음에 늘 새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