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풍상(해냄,2003)인용
번호 : 199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5 스크랩 : 0 날짜 : 2005.03.15 10:19
살마네세르 3세는 기원전 853년에 이스라엘 왕 아하브가 카르카르 전투에 참전했다고 기록했
다.또한 왕은 기원전 825년에 이스라엘왕 예후한데 공물을 받는 장면을 검은 오베리스크에 묘사
했다.
열왕기상 6장 1~2절에 따르면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것은 예루살렘 신전이 세워지기
480년 전 이었다. 여호와에게 바쳐진 제1신전은 솔로몬왕 4년 즉 968년에 착공 되었다.
사사기 11장 26절을 보면 여기서 이스라엘 사사인 예프타(입다)는 암몬의 왕과 협상을 벌이면
서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의땅을 차지하기 직전에 헤스본과 아로엘에 처음 정착했을때-다시 말
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지 약40년뒤(시나이를 40년동안 방랑한 뒤)-를 언급했
다. 예프타는 이스라엘 민족이 트란스요르단(헤스본과 아로엘)에 정착했을때부터 자기 시대 까
지의 기간이 300년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예프타의 치세는 대개 기원전 12세기말(기원전 1130~
1110년경)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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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의 풍상(해냄,2004)중에서
번호 : 204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3 스크랩 : 0 날짜 : 2005.03.22 14:58
아마르나 문서로서 이집트의 신왕국 시대(제 18왕조)가 시작된 연대를 확정할수 있다.
아마르나 문서는 티루스의 통치자인 아비밀쿠가 이집트의 파라오인 아케나텐에게 보낸 편지다.
"나의 태양, 나의 신, 나의 신들인 폐하께 폐하의 종 아비밀쿠가 보내는 메시지....우가리트 (당시
통치자는 니크맛두2세)왕궁이 불타 버렸습니다. 화재가 왕궁의 절반을 파괴하여, 왕궁의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우가리트의 통치자 니크맛두2세의 왕궁 이부 근처에 있는 작은 방에서 검게 그을린 점토판 하나
를 발견했는데 이작은 점토판의 앞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태양(여신)이 그녀의 문지기인 라샤프(다른 천체의 이름, 저승의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나 수호
인)와 함께 저물때, 히야루(4월중순부터 5월중순 까지에)의 음력 초하룻날 낮이 압도 당했다(
개기일식)."
이 점토판의 뒷면에는
"두 간肝은 조사 했더니, 위험!"
1. 일식은 반드시 초승달과 함께 일어난다.
2. 관측은 히야루 달에 이루어졌다. 히야루 달은 율리우스력의 4월중순부터 5월중순 까지에
해당한다.
3.일식은 해질녘에 일어났다. 이것은 매우 드문일이다.
4.이것은 아주 이례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점을 칠 필요가 있었고, 재난이 닥칠 전조라는 점쾌
가 나왔다.
개기일식은 지구상의 어디에서나 평균 360년에 한 번 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이해를 고성능 컴퓨터와 천문 현상을 역산하는 소프트 웨어를 이용하여 조사해보면 해빛이 '
해질녘에 압도 당한것은' 정확히 기원전 1012년 5월 9일 오후 6시 9분 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그리고 달에게 먹힌 태양 옆에는 거대한 별(라샤프)이 하나 있었는데 이 거대한
별은 약 2000년 뒤에 격렬한 폭발을 일으키게 된다. 천문학자들은 이초신성을 '게성운'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이것으로 이집트의 파라오 아케나텐은 즉위한후 12년후 (공동총치자 였던 아버지 아멘호
테프 3세가 제위 37년째에 세상을 떠난 뒤 아케나텐이 단독 군주가 된 첫해를 처눈 연대 측정법
에 따라 도출된 절대 연도인 기원전 1012년에 고정 시킬수 있다.
아케나텐의 아버지인 아멘호테프 3세는 아들 아케나텐이 즉위한지 11년째 되는해 말에 죽는다.
그러므로 아케나텐은 11년전인 기원전 1022년초에 아멘호테프 3세보다 지위가 낮은 공동섭정
이 되었을 것이다.
신왕국이 시대가 시작되기전에 이즙트 북부는 적어도 1세기 동안 외래인의 통치자들에게 점령
되어 있었다. 이를 제2중간기라고 부른다.(제15왕조) 제2중간기는 혈통이 모호한 민족이 이집
트 삼각주에 외래정권을 세우고 결국 이집트의 토착 파라오들을 남쪽의 상上이집트로 밀어낸
혼란기 였다.
당시 테베에 근거지를 둔 이집트 역대파라오들은 이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았다.물론
소규모 군사적 충돌은 있었겠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직접 증거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힉소스
충격이 하下이집트에 이집트 토착 정권을 수복하려는 노력으로 표출되기까지는 여러 세대가
걸렸을 것이다. 하지마 테베의 제17왕조 말엽에는 외세 지배의 굴레를벗어 던지려는 기세를 막
을수 없게 되었다.
힉소르를 몰아내기 위해 애쓴것으로 여겨지는 최초의 파라오는 세케넨레 타켄 이었다. 그는
전투에서 치면상을 입고 전사했기 때문에 발견된 그의 유해에는 끔찍한 상처가 남아 있다. 그는
나중에 이집트 파라오가 된 두아들을 낳은 것으로 여겨 지는데, 그 두형제 가운데 형인 카모세는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받아 아바리스의 힉소스 통치자들을 계속 공격했다. 그는 아버지보다 좀더
성공을 거두어, 힉소스의 수도 성벽까지 바싹 접근했다. 하지만 수도를 점령하지는 못했고, 전쟁
은 계속되었다. 카모세의 운명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의 치세가 3년밖에 지속되지 않은것으로
미루어 그도 역시 전사한 것으로 추측할수 있다. 카모세의 뒤를 이어 동생 아모세가 파라오가
되었다.
아모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기 때문에 이집트군을 이끌고 북부 사람들과 싸울수 없었다는
것이 오랫동안 정설로 인정되었다. 즉위한뒤 처음 10년동안은 어머니인 아호테프오 모후호
등장하고 있다. 일찍이 학자들은 어린 아들이 성년에 이를 때까지 아호테프가 섭정 역할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입증하는 직접 증거는 사실상 전혀 없다. 결국 재위 11년
째 되었을 무렵에는 아모세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바리스의 힉소스족을 공격할수 공격할수
있을만큼 강해졌고, 이번에는 승리를 거두어 이집트인들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었던 외래 점령자
들을 마침내 몰아낼수 있었다. 그리하여 아바리스의 제15왕조는 아모세를 최초의 파라오로 하는
제18왕조가 시작된해로 확정한 연대(기원전 1194년)보다 11년쯤 뒤에 갑자기 막을 내렸다.
따라서 아바리스에 근거지를 둔 힉소스정권의 지배가 끝난 연대는 기원전 1183년경으로 생각
할수 있다.
토리노 파피루스라는 문서를 보면 태곳적부터 신왕국(제18왕조)시대가 시작될때까지 이집트를
다스린 파라오들의 명단이 자세히 실려 있다.
이 문서에는 제2중간기의 외래 통치자들의 이름도 언급되어 있다.내용은 "외국땅(에서 온
통치자)-여섯은 100+(...)년을 다스렸다"라고 되어 있다.
(...)은 한때 8을 나타내는 신관문자로 해독되어 총 햇수가 108년으로 여겨졌었지만, 이문서는
발견된뒤에도 손상이 계속 되었기 때문에 이제 더는 어떤 기호인지 확인할수 없다.
하지만 총 햇구가 정말로 108년이고 6명의 외래인 지배자가 아비라스의 제15왕조의 여섯통치
자들과 동일하다면 우리는 이것에서 제15왕조가 시작된 연대를 결정할수 있다.
힉소스족 왕조인 제15왕조가가 아바리스를 근거지로 삼아 하下 이집트를 다스리기 시작한것은
기원전 1183년에 아모에게 쪽겨나기 108년 전이었고, 따라서 제 힉소스족의 15왕조의 초대파라
오인 살리티스는 기원전 1290년경에 권력을 잡았다.
새로고침꾸미기
바빌론왕들의 새연표
번호 : 205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14 스크랩 : 0 날짜 : 2005.03.22 15:19
1850년 니베베에 있는 아시리아 왕 아슈르 바니팔(기원전 669~627 재위)궁전 기록 보관소
에서 암미사두가의 금성 점토판이 발견됐다.
점토판에 담길 정보들을 보면 21동안의 금성 칠몰에 대한 거으 완전한 관측 기록이 만들어진다.
바빌로니아 왕명록 B에 따르면, 암미사두가는 21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이 관찰은 암미사두가
시대에 이루어졌고 관측이 이루어진 햇수는 암미사두가의 재위기간과 일치한다고 믿을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따라서 관측이 처음 이루어진 해는 아미사두가 원년과 동일하다.
금성주기- 금성의 출몰시각이 정확히 같아질 때까지의 기간-는 56년이나 64년이다.(주기가
두가지인 이유는 복잡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태양년 및 태음월과 관련된 해성의 삭망기간과 관
계가 있다.)따라서 21년에 이르는 관측기간의 출반점은 약 바세기마다 한버이다.
고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문서에 첫 초승달이 뜨난 날 시작되는 태음월의 날짜를 기록했다.
암미사두가 원년은기원전 1419년으로 여겨진다.
암미사두가가 즉위한 해가 기원전 1419년이라면 우리는 바빌로니아의 왕명록 B를 활용하여
바빌론 제1왕조에 속하는 모든 왕들의 재위연대를 다시 알아낼수 있다.
바빌론 제1왕조의 왕들
수무아붐 (1667~1653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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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물라엘 (1653~1617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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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비움 (1617~1603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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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필신 (1603~1585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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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무발리트 (1585~1565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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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무라비 (1565~1522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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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일루나 (1522~1484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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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에샤 (1484~1456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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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미디타나(1456~1419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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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미사두가(1419~1398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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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수디타나(1398~1362년경)
바빌론 제1왕조의왕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위대한 정복자이며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입법자인 함무라비 왕이다. 그의 치세는 기원전 1565년경에 시작된다.
함부라비 재위 35년째 해(기원전 1531년)에 시리아 북동부에 있는 마리라는 도시를 공격하여 짐
릴림 왕의 아름다운 궁전을 파괴하기도 했다.
1933년에 그 궁전의 유적을 발굴하는 중 쐐기문자로 기록된 점토판이 가득들어 있는 기록보관소
를 발견했다. 이 문서들은 대부분 편지가 아니라 행정 기록이었다. 그중에는 짐릴림이 받은 선물
목록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비블로스의 얀틴-암무 왕이 선물로 보낸 금잔이 목록에 올라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비블로스의 얀틴-암무가 마리의 짐릴림과 동시대인이고, 그들은 둘다 함무라비
가 바빌론에서 왕위에 앉아 있을때 자신들으 도시국가를 다스렸다는 결론을 끌어낼수 있었다.
짐릴림 치세는 암부라비가 그의 궁전을 파괴했을때 끝났다. 우리는 이제 그 사건으 연대를 기원
전 1531년으로 결정할수 있다. 마리의 마기막 통치자가 왕들의 평균 치세 기간인 20년을 다스렸
다고 하면 질림림이 왕우에 오른 연대는 기원전 1550년경일 것이다. 그러면 그의 동시대인인
바빌로스의 얀틴-암무에게도 기원전 1550년부터 1530년까지의 연대를 할당할수 있다.
*비블로스는 백향목이 자라는 레바논 산맥 기슭의 동지중해 연안에 자리잡고 있어서 이집트
무역선단에 화물을 공급하는 중곟상 역활을 맡기에 바람직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급
목재는 물론 이집트에서 인기 있는 상품 이었고, 이집트인들은 아크리카 산물을 레반트 지역에
공급했다.
아시리아 연표
번호 : 206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15 스크랩 : 0 날짜 : 2005.03.22 17:37
아시리아 왕 아슈르바니팔이 이집트의 테베를 약탈한것이 기원전 664년이고, 그의 할아버지인
사르곤2세가 남진하여 이집트 북쪽 구경에 이르른것이 기원전 716년 이었다. 여기서 그는 '실칸
니'라는 이집트 파라오에게 공물을 받았다. 학자들은아시리아어로 표기된 '실칸니'가 '[오]소르
콘'이라는 이집트 이름을 나타낸다고 결론 지었다.('오'가 생략되고, 'r'은 'l'로 바뀔수 있다).
그렇다면 오소르콘은 '오실칸'과 비슷하게 발음되었을지도모른다. 하지만 오소르콘이라는
이름의 파라오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단서는 거의 없다.
기원전 716년 부터 아마르나 시대(기원전 11세기 말경에 시작되어 기원전 10세기 초반까지 지속
되는,기존년표에서는 기원전 1350년경으로 봄)에 이르기까지는 이집트와 아시리아를 연결해주
는 당시 문헌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기존 연표에서는 두나라의 접촉 기록이 약 605년
동안 공백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아마르나 시대의 대조연표는 아시리아 연표를 통해 아케나텐의 연대를 확정하는데
매우 중요하다. 아마르나 문서 보관서에는아시리아 왕 아슈르 발리트가 이집트에보낸 편지
두통이 남아 있다. 아슈르발리트는 아시리아 왕명록에서 신원이 확인되었고, 그왕명론을 근거로
기원전 1362~1327년으로 연대가 확정되었다. 이 연대는 아시리아통치자들이(병존 왕존없이)
순서대로 연속하여 나라를 다스렸다고 가정하고 왕명록에 기록된 그들의 재위 기간을 합산하여
얻은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아케나텐이 기원전 14세기 중엽에 이집트를 다스렸음을 입증하는
강력한 외적 증거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이책의 저자-데이비드 롤)생각에는 아시리아 군주들
이 단하나의 연속된 통치자 계보를 이루었다는 기본적인가정을 미심쩍게 만드는 관측 기록이
많이 있다.
현재 전통 연표로 인정받고 있는 아시리아 연표가 제기하는 문제점을 다섯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간략하게 다루고,새연표에 반대하는 논거를 다소나마 해결할수 있는 몇가지 생각을 제시하겠다.
1.아시리아 왕권은 분열되어 있었다.
아시리아 왕명록이 하나의 연속된 계보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적어도 한시기
에는 둘 이상의 왕이 동시에 아시리아를 다스렸다는 명백한 증거가 있다. 카르두니아시(바빌
로니아)의 통치자인 아다스-슈마-우스르는 는 이런 편지를 썼다.
"아시리아의 왕들인 아슈르-니라리와 일리-하다 에게 말한다! 위대한 왕, 강력한 왕,[세계의
왕], 카르두니아시의 왕 아다드-슈마-우수르[의말]"
바빌로니아 통치자는같은 편지에서 아시리아의 두 왕에게 말하고 있다. 따라서 두 왕이 아시리
아의 수도 아슈르를 근거지를 둔 의회의 합의에 따라 공동으로 나라를 다스렸다고 생각할수
있다. R. 보저는 '일리-하다'가 아시리아 북부에 있는 하니갈바트의 왕이었다고 주장했다. 나라
전체의 행정수도는 정부기관이 근거를 두고 있는 아슈르에 남겨둔 채 한 왕조는 아시리아 북부
를 다스리고 또 다른 왕조는 남부를 다스릴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 협정은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났을까? 유명한 아시리아 학자인 A.푀벨은 '일리-하다'와 '아슈르-니라리3세'가 즉위하기
직전에 강력한 왕 투쿨티-니누르타 1세가 암살된것이 아시리아를 분열시켰다고 믿었다.
아마르나 (기원전 11세기 말에 시작되어 기원전 10세기말까지 지속되는 문서를 쓴 아슈루발리
트는 아마 투쿨티 니누르타1세가 암살된뒤- 학자들은 이 시대를 아시리아의 암흑시대라고 불렀
다.-정식으로 인정받지 않고 나라를 다스릴 통치자들 가운데 하나일것이라고 본다.
2.히타이트와의 대조 연표
보가즈쾨이(히타이트 제국의 수도)의 기록 보관소에는 아시리아 통치자들이 보낸 여러통의
편지가 발견되었다. 히타이트 연표가 동시성을 입증하는 여러자료(예를 들면 수필루리우마스
1세가 아멘호테프3세에게 보낸 편지, 하투실리스 3세와 람세스 2세가 맺은 조약등)를 통해 이집
트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 브가즈쾨이 문서를 쓴 아시리아왕의 신원을 확인하는것은 매우
중요하다.
문서 25,74,70은 아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라는왕이 하티(히타이트)의 투달리야스 4세에게
보낸 편지다. 편지를 쓴 사람은 정통 연표에서는 투쿨티-니누르타 1세(정통연표-기원전
1242~1206년)지만,새 연표에서는 투쿨티-니누르타 2세(정통연표와새연표 -기원전 890~884
년)가 유력한 후보다.
문서 20의 연대는 하투실리스3세 시대에 아시리아의 아다드-니라리가 보낸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는 정통 연표에서는 아다느-니라리1세(전통연표 기원전 1304~1273년)지만, 새 연표에서는
아다드-니라리 2세(기존연표와 새 연표-기원전 911~891년)다.
마지막으로 문서 99와 88은 둘다 아시리아 왕 샬마네세르가 투달리야스 4세에게 보낸 편지다.
샬마네세르는 기존 연표에서는 샬마네세르 1세(기존연표 -기원전 1272~1243년)지만, 새 연표
에서는 샬마네세르 3세(기존연표와 새 연표-기원전 858~828년)다. 따라서 두통의 편지에 적힌
샬마네세르는 이름의 형태가 샬마네세르 1세의 아시리아 중기 명문에서는 전혀 찾아 볼수
없다는 하겐부흐너의 주장은 흥미롭다.
3. 바빌로니아 연표의 모순
바빌로니아 연표의 흥미로운 모순 가운데 하나는 바빌로니아 왕세계에서 나온다. 이신왕조의
네부카드네자르 1세는 아시리아 왕 아슈르-레시시(기존연표-기원전 1133~1116년)와 동시대인
으로 '대조역사'에서 입증되었기 때문에, 기원전 1126~1105년 결정되었다. 따라서 그 바빌로니
아 왕의 연대는아시리아 연표를 통해 결정된 셈이다. 그런데 네부카드네자르가 즉위한 지 140년
뒤, 기존연표에서 따르면 시리크티-슈카무나라는 왕이 바빌로니아 왕위에 오른다. 그는 바지 왕
조의 마지막 통치자 인데, 바지 왕조의 연대도 역시 아시리아 연표를 통해 결정 되었다.
문제는 바빌로니아 연대기에 따르면 시리크티-슈카무나가 네부카드네자르 왕의 동생이었다는
것이다. 두 왕 사이에 1세기가 넘는 간격이 가로놓여 있다면, 두 왕이 형제라는 것은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명백한 해결책은 넵카드네자르가 죽은 직후에 바지 왕조가 이신왕조의 뒤를
있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시키르키-슈카무나는 형이 죽은 지 30년이네에 석달동안 나라를 다스
릴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을 역사적 진실로 받아들일수 있다면, 바빌로니아 연표의 변화를 수용
하기 위해 아시리아 연표도 수정해야 할것이다. 이 사례는 메소포타미아 연표를 재검토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4.'대조 역사'에 나타난 공백
'대조 역사는 바빌론에서 발견된 중요한 점토판인데, 여기에는바빌로니아 왕들과 아시리아
통치자들의 접촉이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대부분 두나라의 충돌을 다루고 있지만, 정략
결혼과 정치적 협정도 포함되어 있다. 이 진귀한 문헌에 따르면, 아슈르-벨-칼라(기존연표-기원
전 1073~1056년)의 치세가 끝난뒤- 아홉명의 아시리아 왕이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 것을 두
나라 사이에 정치적관계가 없었다는 증거로 해석할수 있다면-이웃한 두 나라의 접촉에 긴
공백이 있었던것 같다. 아슈르-벨-칼라 바라 다음에 바빌론과 관계를 가진 아시리아 왕으로
'대조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아다드-니라리 2세(기원전 911~891년)다. 따라서 그 사이에
는 150년의 공백이 있다. 문제의 문헌은 마치 공백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그 긴공백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런 단절이 정말로 있었는지, 문헌에 빠져 있는 아홉명의 아시
리아 왕이-'대조 역사'에 등장하는 아시리아 남부의 왕들과는 달리-바빌로니아와 직접 적촉하지
않은 아시리아 북부의 하니칼바트 왕국을 다스린 통치자는 아니었는지는 당연히 제기할수 있는
의문이다. 이 시나리오는 투쿨티-니누르타 1세사 암살된 뒤 아시리아 왕국이 분열했을지도 모른
다는 푀벨의 주장과 일치학 내가 바빌로니아 연표의 모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제안한 것을 뒷받
침 해준다. 또한 내가 5번에서 내놓을 가설과도 잘 들어 맞는다.
5. 아슈루발리트 문제
아케나텐에게 편지를 보낸 아슈르발리트와 아시리아 왕명록에 기록된 아슈르 발리느 사이에는
한가지 명백한 차이가 있다. 바로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집트에 편지를 보낸 아슈루발리
트는 이렇게 말한다.
"내 아버지 아슈르-나딘-아헤는 이집트에 편지를보내고 금 20탈렌트를 받았습니다. 하니갈바
트 왕은 이집트에 있는 폐하(아케나톤)의 아버지께 편지를 보내고 금 20탈렌트를 받았습니다.
[이제는]내가 하니칼바트 왕[...]이지만, 폐하는 낭게 금[...]을 보냅니다. 그것으로는 내 편지를
가져가는 심부름꾼의여비를 충당하기에도 부족합니다. "(문서 EA-16)
세번째 문장을 '이제는 내가 하니갈카트 왕인 사람'으로 복원해야 할지 '이제 내가 하니갈바트
왕과 대등한 사람'으로 복원해야 할지는 말하기 어렵다. 전자라면,아멘 호테프 3세가 죽었을
무렵 미탄니(하니칼바트를 일컫는 이집트식 이름)의 통치자들을 타도한 뒤에 들어서 하니갈바트
아시리아 왕조의 아슈류발리트와 잘 들어 맞는다.
아시리아 왕명록에는 아슈루발리트의 아버지가 에리바0아다드로 되어 있지만 ,아마르나 문서
를 쓴 아슈루발리트의아버지는 아슈르-나딘-아헤다. 오늘날에는 '아버지'라는 말이 조상이라는
뜻을 가질수 있다고 이전되지만 D.D.러큰빌이 말했듯이' 그렇다 해도 우리의 어려움이 모두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헌에서..아슈르발리트는자신의 6대조까지 언급하고 있지만,아슈르 나딘-
아헤는 자기 조상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아시리아 왕명록의 아슈루발리트와 아마르나 시대 아슈르발리트의 계보가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명의 아시리아 통치자0한사람은 기원전 14세기, 또 한사람은 기원
전 11세기-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흥미로운증거가 있다.
몽테가 타니스에서 발굴한 프수센네스 왕의미라는 목에 청금속 구슬을 엮은 커다란 목걸이를
걸고 있다. 이 목걸이의 매력적인 특징은 구슬 한개가나머지 구슬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다른
구슬들보다 색깔이 짙고 상당히 순수한 이 구슬은 장식이 새겨진 유일한 구슬이다. 구스에 쐐기
문자가 새겨져 있는 것이다! R.보저는 고서체와 역사를 근거로 하여 이 짧은 아카디아어 명문을
기원전 11세기의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 명문에 이름이 기록된 관리는아마르나 시대에만
그 존재가 입증되어 있다. 구슬에 새겨진 명문은 아래와 같다.
"이바슈시-일루 총리總理(의소유). 그는 사랑하는 맏딸의 생명을보존하기 위해 아슈르의 수호
신 아슈르와 엔릴과 닌릴(의 소유물을 만들었다). 아무도 이것을 부당하게 탐내어 훔텨가거나 신
과 왕의 이름으로 맹세함으로써 이것을 제것으로 삼지 않기를."
이 물건이 어떻게 제21왕조 파라오인 프수센네스의 부장품이 되었을까? 네가(책의 저자 데이비
드 롤) 추리한 시나리오를 제시 하겠다.
*'왕가의 계곡'에 있던 왕들의 미라가 '로열캐시'와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안에 마련된 제2의
은닉처로 이장될때 당시 이집트 통치자들이 신왕국 시대 무덤의 보물을 자기 개인의 치부를
위해-특히 제 무덤의 부장품으로- 훔쳐간것은 분명하다.
*아멘호테프3세와 그의왕비인 티예의 미라는 왕족의 미라를 보관하는제2의 납골당으로 쓰인
아멘호테프 2세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다. '로열 캐시'보다 작은 이 은닉처는 '로열 캐시'보다
먼저 활용되었고,왕묘들을 치우는 작업도 이곳에서 먼저-아마 시아문의 치세 직전에-이루어진
듯 하다. 다시말해서 아멘호테프 3세의 무덤(WKV-22)에서 보물을 빼내고 KV-55에 들어가 왕비
인 티예의 머리를 꺼내는작업은 프수센네스 시대에이루어 졌을 것이다. 사제들은 KV-55에 왕의
미라 한구를 남겼다. 그들은 이 미라의 신원을 감추기 위해 왕의 이름을 모두 지워버렸다. 최근
무덤 KV-55D의 이 시빈로운 주인을 연구한 결과는 이 미라가 아케나텐이라는 주장을 뒷받침
한다. 따라서 이바슈시-일루의 쐐기 문자가 새겨진 청금석 구슬은 아마르나시대에 테베에 만들
어진 두기의 무덤-WKV-22나 KV-55- 가운데 하나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이 구슬은
원래 아마르나 시대의 왕묘에 들어 있던 부장품일것이다.
*놀라운 일로여겨지겠지만, 아슈루발리트가 이집트에 선물로 보낸 이 구슬을 언급한 문헌이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문서 EA-15에서 아시리아 왕은 이렇게 말한다 "..오늘 나는 폐
하께 편지를 씁니다.나는 아름다운 병거와 말 두마리와 순수한 청금석 구슬 한개를 폐하께
경의를 표하는 선물로 보냅니다."
*구슬에 새겨진 명문을 처음 번역한 사람은 J.레위 였다. 1948년에 그는 이명문이 아마르나
시대에 씌어졌다고 주장 했지만, 지금은 명문에 사용된 아카드어를 근거로 기원전 11세기에
씌어졌다는 설이 우세하다. 두가지 해석이 모두 옳을수 있을까? 새연표에 따르면 아마르나
시대는 이스라엘 통일왕국 시대-즉 기원전 11세기-와 동시대다. 그렇다면 아마르나 시대의 아시
리아 총리인 이바슈시-일루는 당연히 기원전 11세기의 아카드어로 글을 썼을 것이다.
*우리는 아마르나 시대네 아슈루발리트라는 아시리아 왕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에포님 명부 때문에 11세기 이후의 아시리아 연표를 주정할수 없다고 가정한다면,
기원전 1세기에 아슈루발리트라는 이름을 가진 통치자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을까?
*에포님 명부에서 기원전 1007년에 해당하는 부분은 점토판이심하게 손상 되어 있지만,실제로
'아슈[루]발[리트]'라는 이름을 알아 볼수 있다. 아시리아 통치자의 이름을 따라 그해의 이름을
붙인 경우, 그에게는 특별히 '왕'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는다(예를 들면 아슈르-니나리 4세,아
슈르-비 2세, 티글라트필레세르 1세, 아슈르-단 2세). 에포님 명부의 이 부분이 바로 그런 경우
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기원전 1007년의 에포님인 '아슈루발리트'가 설명할수 없는 이유로 왕명
록에 기독되지 않은 제2의 아슈루발리트 왕을 가리킬 가능성이 있을까?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
리는 아시리아 왕명록을 통해 직접 왕으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바빌로니아 통치자가 아슈르의
왕으로 인정한 아시리아 통치자를 적어도 한명은알고 있다. 일리-하다가 바로 그사람이다.
*기원전 11세기 말에 정말로 아슈르발리트라는 왕이 있었다면, 아시리아 연표는 이집트와 팔레
스타인의 새연표에 더는 걸림돌이 되지 않을것이다. 기원전 1007년의 에포님인 아슈[루]발[리
트] (왕)으 새 연표에 따르면 정확히 아케나텐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고, 기원전 1012년의 우가리
트 일식 날짜도 이를 강력하게 뒷받침 한다.
휴우~~~ 끄으읕^^
히타히트에 대한 간사.
번호 : 191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10 스크랩 : 0 날짜 : 2005.02.15 10:13
이집트의 고왕국시대(BC 2670~2150)
중왕국시대(BC 2040~1650)
힉소스족의 지배(BC 1650~1550)
히타이트의 왕들
델리피누 (1500~
타후르와일리
알루왐나
한틸리 2세
지단타 2세(1450~)
후지야 2세
무와탈리1세
루드알리야 2세 (1420~1400)
아르누완다 1세(1400~1375)
투드할리야 3세(1375~1355)
소 투드할리야 (3세?)
수필라우마 1세(1335~1320)
아르누완다 2세(1320~1318)
무르실리 2세(1318~1290)
무와탈리 2세(1290~1272)
무르실리 3세(1272~1266)
하투실리 3세(1266~1236)
투드할리야 4세(1236~1215) 쿠룬타 (1220)
아르누완다 3세(1215)
수필라우마 2세(1214-1190)
잠깐 고고학 지식-네발리 초리 와 괴베클리 테페에서 1만 500년 및 1만 100년전에 지어진 건축
물을 발굴했다.기뤈전 7000년대와 6000년대 차탈회육의 한도시에 사람이 살았는데,이미 고도로
분화된 노동분업을 포함하여 고도로 발달한 정착분화의 특징을 골고루 갖춘 도시였다.
기원전 6000년대-5000년대는 신석기시대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인류가
구리를 최초로 금속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사기 였다.
기원전 4000년대말 3000년대 초가 되자 무역을 통해 주석이 이땅에 소개되었다. 주석은 구리
와 혼합하면 강도와 내구서이 훨씬 뛰어난 우수한 품질 좋은 금속으로 변했다.
3.메소포타미아의 연표(연표에 올라온것은 옮긴이 임의로 정한것임)
BC 3200 남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수메르인 정착
BC 2800 수메르인이 정착하던 남메소포타미아에 셈족(아카드인)이 이주해옴
한편 남쪽에 위치한 아카드 왕국은 몇번의 반란과 외적의 침입으로 괴롭힘을 당했다. 결국
아카드 왕국은 200년을 버티지 못하고 멸망하고 말았다. 그곳에
BC 2047년 우르의 우르남부가 다시금 수메르인의 지배권을 확립했다.
BC 2100년 미케네인(아카이아인)들 그리스 대륙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있던 고대문화 주거지를
정복했다.
BC 2000년 메소포타미아에도 두번쩨 셈족의 이주가 시작
BC 1628년 테라(산토린)의 화산이 폭발하여 주변의 문화권들이 큰 변화를 겪음.
BC 1176(5)에 2차 해양민족들의 전쟁 발생
BC 717년 아시리아의 팽창하기 시작함.
과거 히타히트인들의 보토가 있던 자리에 권력 공백이 생겼고 그 트을 가장 먼저 공략한 종족
은 카스카족이었다. 하지만 중앙 아나톨리아의 후임자는 전혀 새로운 이민자들이었다. 바로
BC 12세기 거대한 이동의 물결을 타고 아나톨리아에 도착한 유럽언어족 프리기아인들이었다.
미타니왕국:BC 1450년에서 1350년까지 근동의 열강으로 부상하여 이집트에 이어 두번째의 강
국이 되었다. 아시리아를 속국으로 거느림.
미나티 왕국의 상류층들은 인도유럽어족을 사용하였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미타니왕국의 백성
들은 비타니족이 아니라 인도유럽족의 후르족 이었다.
BC 1531년 히타이트의 대왕 무르실리 1세가 바빌론을 습격하여 방화를 저질렀고 그로 인해 함
무라비 왕조는 멸망하였다. 카쉬족은 어부지리로 무르실리가 멸망시킬 바빌론지역을 장악하여
그후 400년동안 바빌론을 지배했다.
카쉬족: BC17세기부터 BC1157년 까지 약 500년간 바비로니아를 지배한 왕조
카쉬인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고 BC2000년 전반부터 거주지의 동방 산악지대로부터 바빌로니
아의 평원을 침입, BC17000년경에 바빌론 제2왕조를 쓰러뜨리고 왕조를 세웠다. BC 1595년에
히타히트의 무르실라 1세가 바빌론 제왕조를 멸망시킨틈을 타서 바빌로니아를 지배하게 된다.
(카쉬족은)BC 1169년 아시리아에게 멸망당하였고 1157년에 완전히 멸망됨
바빌로니아는 15년후에 아시리아로부터 독립했지만 카쉬왕조는 채 50년도 채 못되어 동쪽의
이웃 엘람에게 패하였다.
아시리아의 상황도 이와 비슷했다. 해양민족들의 습격으로 인한 혼란은 무사히 피해갔지만
투쿨티-닌우르타 1세가 살해당한(BC 1197 년)후 오랜 기간 몰락의 길을 걸었고 11세기초 잠깐
반짝 영호를 누리기도 한다 그리고 북쪽에서 새로 이주해온 아람인들이위협을 가해왔다.
BC 10세기에서 9세기로 너어가는 전환기에 와서야 다시 공격적인 팽창정책을 펼쳐 아람인들을
쫒아 버릴수 있었다. BC 8세기가 되자 아시리아인들은 비옥한 반월지대 전체를를 손아귀에 넣
었고 7세기에는 이집트 까지도 굴복시켰다. 하지만 같은 세기 아시리아 왕국은 지도에서 사라지
고 말았다.
아시리아인들이 비로서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시기는 중기왕국(BC 1375년부터)에서 이다.
훗날 이들의 성공사에는 히타히트인들의 공이 적지 앟았다.
잠깐 여기서 트로이에 대해언급을 한다면 트로이는 윌루사와 같은 나라임. 유적에서 루위 상형
문자가 새겨진 인장이 발굴되었는데 이는 트로이인들이(적어도 모국어로는)그리스어가 아닌
루위어를 사용했다는 의마가 된다.
새로고침꾸미기
BC 9000~7000년 : 이라크 북동부 자그르스 산록지역인 카림 샤리르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야생
의 밀과보리를 재배하고 개와 양을 사육하고, 팔레스티나 사해 북단 부근 예리코에서 정주 생활
을 시작.
BC 7000년 : 이라크 북동부 키르쿠크의 동쪽 60km에 위치한 자르모에 살고 있던 정착민들이
흙집을 짓고 밀의 씨를 뿌리면서 염소, 양, 돼지를 사육하여 농경문명을 일으키다.
BC6000~5250년 : 이라크 북부 모술 남쪽 35km에 위치한 하수나에 관개시설, 가옥, 물레나 북
양질의 토기가 등장, 고대 근동 지역에서 무역이 시작되다.
BC5300년 : 이라크 남부 유프라테스강 근처에 있던 수메르 신 엔키의 성도 에리두에서 수메르
문화가 시작된다.
BC5050~4300년 : 시리아 북동부 터키 국경 근처 할라프에서 농업과 목축을 기반으로 문화가
발달. 화려하고 정교한 칠무뇌 토기가 나타나고 야금술, 수레가 발명, 메소포타미아 전역과 페
르시아만, 지중해까지 교역하다.
BC4500~3500년 : 이라크 남부 유프라테스 강 서쪽 사막 우바이드에서 할라프 문화를 기조로
한 수준 높은 문화가 시작. 북방에서 남부 메소포타미아로 이동한 농경민이 정착하여 촌락의
인구가늘어나 도시규모로 확대,계급의 발새으구리의 주조,공동체의 상징이르 에리두, 우루크,
우르 등지에 신전이 등장하다. 중앙아시아에서 온 것으로 짐작되는 수메르인이 본격적으로
역사와 문명의 무대에 출현, 셈계의 유목민이 시리아 및 아라비아 반도에서 들어와 우바이드인
과 섞이다.
BC3500~3000년 : 키쉬,우루크,우르 같은 여러 도시국가들이 발전하고 세습 군주제가 생겨나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그림(설형)문자가 기록되기 시작. 이후 수메르는 수백년동안 10여개의 도시
국가들이 전란으로 난립하다.
BC2812~2687년 : 길가메쉬가 우르크 제1왕조의 5번째 왕우에 올라 126년동안 통치하다. 왕의
사후 2000여년동안 수메르어,악카드어,힛타이트어, 준근동의 초기언어들로 그의 영웅담이 여러
민족들에 의해 수없이 되풀이 되어 기록되다.
BC2600년 : 최초의 셈어로 알려진 악카드어가 나타나기 시작.
BC 2335년: 싸르곤 1세가 키쉬 제4왕조의 통치자 우르자바바 밑에 있다가 왕의 치세 37년에 최
초의 셈족국가인 악카드를 탄생시키고, 최초로 수메르와 북메소포타미아의 절반을 단일국가로
묶어낸다. 이후 악카드가 우르크 제4왕조로 왕권이 넘어가고, 구티인, 우르크 제5왕조, 우르 제3
왕조가 차례로 왕권을 이양받다
BC 2123년 : 히브리족의 조상이며 최초의 족장이라는 아브람 출생
BC 2094년 우르 제3왕조를 개국한 우르남무가 18년동안 다스린다음,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총명한 명군 슐기가 왕위에 올라약48년동안 수메르 문예 부흥을 주도.
BC2004년 : 우르 제3왕조의 5번째 왕 입비-씬을 마지막으로 왕권이 아모리인의 이씬 왕조로
넘어가면서 수메르 시대는 종말을 고하다. 우르 제3왕조는 수메르의 숙적 엘람인의 반란과
침공을 받고, 바빌로니아 제1왕조를 세운 서西셈족 계열의 아모리인의 침략을 받아 멸망, 이씬
왕조는 약 100동안 아모리계의 라르싸와 1세기 이상 대립하다 라르싸에게 멸망하다.
BC 1792~1750년 : 바빌론 제1왕조 6대왕 함무라비가 강력한 적수 라르싸를 물리치고 북쪽의
고앗씨리아와 유프라테스 강중류의 마리등을 격파하여 왕조가 개국한 이래 약 250년만에 메소
포타미아 전지역을 통일하여 오리엔트의 맹주가 된다.
BC1531년 :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도 유럽어족의 힛타이트 군대에 의해 바빌로니아
가 유린되고 바빌로니아 제1왕조가 끝난다. 이틈에 자그로스 산지에서 침입한 카시트인이 바빌
로아를 무너뜨리고 카시트왕조를 세워 약 500년간 통치하다.
BC1500년 : 북메소포타미아의 중中앗씨리아가 인도-게르만어족의 미탄니 왕국에게 예속
되지만 미탄니 왕국이 힛타이트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자 앗슈르우발리트(BC 1363년부터 약35
년간 재위)때 독립을 쟁취하다. 앗씨리아 왕조가 바빌로니아의 카시트 왕조와 친인척 관계를
맺고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다.
BC1440년 :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
BC1169년 : 바빌로니아의 카시트 왕조가 앗씨리아에게 멸망당하다.
BC1000년 : 히브리족의 다비드가 여러지파를 통합하여 최초의 이스라엘왕국을 예루살람에
세우다.
BC721년 : 신앗씨리아의 싸르곤2세가 히브리족의 북왕국인 이스라엘의 성도 사마리아를
정복하다.
BC668년 : 이해에 신앗씨리아 왕위에 올라 41년가 통치한 앗슈르바니팔 왕이 예술과 문학을
애호하여 니느웨에 대도서관을 건립하고 수많은 고문서를 수장하다.
BC625년 : 서부셈족 계열인 아람 민족의 한 분파인 칼데아 사람 나보폴라아싸르가 신바빌로아
(칼데아 왕조)를 세우다.
BC612년 : 앗씨리아의 수도 니느웨가 신바빌로니아와 이란계의 메디아 연합군의 공격으로 파괴
되고,2년후 멸망하다
민중 세계사 연표 1
번호 : 125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22 스크랩 : 0 날짜 : 2005.01.11 22:05
15만년전 '구석기시대'중기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기원한 최초의 현생인류 출현, 계급,신분,성
억압이 없었던 소규모 원시 유목민 집단을 이루어 채집 생활을 함.
8만년전~1만4천년전 '구석기시대'후기 현생인류가 중동에 도착(8만년전),호주에 상륙(4만년
전),유럽에 도착(3만년전)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1만 4처년전).
1만 3천년전 '중석기시대'. 기후 덕분에 일부 일류는 채집 생활을 계속 하면서도 약2백명으로
구성된 촌란에 정주.
1만년전 '신석기시대',1차 농업혁명. 식물 과 가축을 길들임. 더 발전한 도구,토기 사용
촌락 생활 확산.집단들 사이의 조직적인 전쟁이 처음 일어난. 계급이나 국가는 아직 출현
하지 않음.
7천년전 유라시아와 아프리카에서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함.븍서 유럽으로 농업 확산. 일부
집단에서 족장 사회가 출현했지만 계급이나 국가는 아직 출현하지 않음.
6천년전~5천년전 중동과 나일 강변에서 '도시혁명'이 일어남. 일부는 구리를 사용
5천년전(BC 3000년) 이집트 '고왕국'과 메소포타미아에서 국가 출현. 최초의 알파벳,청동
발견.명백한 사회 계급 분열.종교적 위계 질서와 신전의 출현. BC 2800년에 최초의 피라미드
건축.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하다는 보는 경향이 생겨남.
BC 2500년~2000년 인더스 강변에서 도시국가 성장함. 사르곤이 최초로 통일된 중동제국을
수립함.서유럽에서 스톤 서클 건물들이 세워짐. 이집트 남부에서 누비아 문명이 출현한 듯함.
BC 2000년 '암흑기', 메소포타미아 제국과 이집트 '고왕국'붕괴. 소아시아 철을 녹여 사용.
BC 2000년~1600년 크레타에서 미노스 문명 출현.이집트에서 '중앙국'이 수립되고. 하부라비가
메소포타미아 제국을 통치함. 중국 붑에서 도시혁명 시작, 그리스에서 미케네 문면 출현
BC 1600년 '중왕국' 붕괴로 위기를 맞은 이집트가 '제2중간기'에 들어섬.크레타 문명. 인더스
문명, 미케네 문명의 붕괴로 '암흑기'가 찾아와 이런지역에서 문자가 소실된. 상조(은나라)가
수립된 중국 북부에서 '청동기시대'가 열림
BC 1000년 에티오피아에서 악숨 문명이 출현. 지중해 연안에서 페니키아의 도시국가들이 수립
됨. 올멕 문화의 '메소아메리카'차빈 문화의 안데스 지역에 '도시혁명'이 일어남
BC 800년~500년 인도,그리스,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문명 출현 누비아에서 메로에 유적이 건설
됨.
BC 400년~1년 메소아메리카의 올멕 문명에서 고유 문자가 발명됨.
AD 1세기 멕시코 계곡에서 태오티우아칸이 생겨남.단단한 금속을 사용할줄 몰랐는데도,아마도
세계 최대의 도시였음. 4백년뒤에 버림받음. 그뒤를 이어 멕시코 남부 와 과테말라엣 몬테알반
문명과 마야 문명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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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 연표 -아가페 큰글성경-
번호 : 124 글쓴이 : 나도사랑을했으면
조회 : 15 스크랩 : 0 날짜 : 2005.01.08 21:44
BC 2166년 아브람의 탄생과 족장시대의 개막
BC 2091년 아브람이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쥬
BC 2066년 이삭의 출생
BC 2006년 야곱과 에서의 출생
BC 2000년 욥의 시대
BC 1991년 아브람의 죽음
BC 1915년 요셉의 출생
BC 1898년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감
BC 1885년 요셉의 애굽 총리 등용
BC 1876년 야곱 가족의 애굽 이주
BC 1805년 요셉의 죽음
BC 1580년 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의 출현과 노예 생활의 시작
BC 1527년 모세의 출생
BC 1487년 모세의 도망과 미디안 정착
BC 1447년 호렙산에서 부름받은 모세 ,바로와의 대면과 10재앙
BC 1446년 출애굽 ,시내산 도착과 십계명 수여
BC 1445년 성막 건축,아론의 제사장 위임식,레위기의 율법과 규례 계시,시내산 출발,1차 인구
조사,가나안 정탐과 보고, 40년간 광야생활~1406년)
BC 1406년 아론의 죽음,제2차 인구 조사,모압 평지에 도착,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임명,미디안
정복과 요단 동편땅의 분배,모세의 고별설교,모세의 죽음
BC 1405년 요단강 도하,여리고 정복,가나안 동맹군 격파
BC 1400년 가나안 정복 완료 및 땅의 분배
BC 1390년 세겜에서의 언약 갱신,여호수아의 죽음 과 사사 시대의 개막
BC 1367 웃니엘의 활약~1327년
BC 1327년 모압의 압제
BC 1309년 에훗의 활약~1229년
BC 1209년 여女 사사 드보라의 활약~1169년)
BC 1162년 기드온의 활약~1122년)
BC 1103년 사무엘 출생
BC 1091년 마지막 사사로 부름받은 사무엘
BC 1078년 입다의 활약~1072년)
BC 1075년 삼손의 활약~1055년)
BC 1060년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겼다가 되찾음
BC 1050년 사울의 기름부음받음과 왕정 시대의 개막
BC 1040년 다윗의 출생
BC 1033년 예루살렘으로 옮겨진 법궤
BC 1025년 다윗의 기름부음 받음
BC 1020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사울의 자객으로 부터 도망치는 다윗, 가드로 도피한 다윗
BC 1017년 사무엘의 죽음
BC 1010년 사울 왕의 죽음,다윗의 왕위 등극
BC 1003년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통일 왕국의 왕이 된 다윗
BC 991년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
BC 990년 솔로몬의 출생
BC 979년 압살롬의 반란
BC 973년 다윗의 인구 조사와 하나님의 형벌
BC 970년 솔로몬의 왕위 계승과 다윗 왕의 죽음
BC 966년 성전건축~959년)
BC 965년 아가서 기록
BC 959년 솔로몬 왕의 죽음과 르호보암의 등극~946년)
BC 935년 여로보암의 반역,전도서의 기록
BC 931년 르호보암의 즉위, 여로보암와 남북의 분열
BC 874년 아랍의 북쪽 이스라엘 통치
BC 855년 엘리야의 갈멜산에서의 영적 전쟁
BC 853년 아합 왕의 죽음,에돔이 여호사밧과의 전투에서 패함
BC 849년 여호람에 대한 에돔의 반란 성공,엘리사의 선택 과 엘리야의 승천,
BC 841년 예후의 반란과 종교개혁
BC 835년 요아스의 유다 왕 등극
BC 806년 아람 왕 벤하닷 3세의 즉위
BC 797년 엘리사의 죽음
BC 796년 유다 왕 아마샤의 즉위
BC 793년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즉위
BC 790년 남쪽 유다의 웃시야 즉위
BC 782년 앗수르 왕 살만에셀 4세의 즉위
BC 780년 웃시야와 여로보암 2세의 연합군에 의해 정복됨.(누가?)
BC 773년 아슈르 단 3세의 앗수르 왕 등극
BC 760년 아모스의 소명
BC 753년 호세아의 소명과 예후 왕조에 대한 심판 예언,아하스로부터 자유 획득
BC 750년 유다 왕 요담의 등극
BC 745년 디글랏 빌레셀 3세의 집권
BC 740년 유다 웃시야의 왕의 사망과 이사야의 소명
BC 735년 유다 왕 아하스의 등극
BC 732년 북쪽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 호세야의 즉위,인접 국가들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다멕섹
의 멸망,앗수르의 속국이 된 에돔.
BC 728년 남쪽 유다의 히스기야 왕 등극과 종교개혁
BC 722년 앗수르에 의한 북쪽 이스라엘의 멸망
BC 701년 앗수르의 예루살렘 포위, 히스기야 왕의 질병과 기도
BC 686년 히스기야 왕의 죽음과 유다 왕 므낫세의 즉위
BC 663년 앗수르에 의한 테베의 패망
BC 640년 유다 왕 요시야의 등극
BC 627년 예레미야의 소명
BC 622년 요시야 왕의 성전 수리와 율법책 발견 및 개혁
BC 612년 앗수르의 수도 니드웨의 멸망과 함께 부분 독립
BC 609년 므깃도 전투와 요시야 왕의 전사,여호야김의 계승과 예레미야의 경고
BC 605년 갈그미스 전투와 앗수르의 멸망, 바벨론의 유다 지배,바벨론의 1차 포로 소환,다니엘
포로로 잡혀감
BC 602년 다니엘의 해몽과 등용
BC 597년 여호야김의 사망과 여호야긴의 등극 및 2차 포로 소환, 시드기야의 계승
풀무불에서 건집받은 세친구
BC 593년 에스겔의 소명
BC 591년 에스겔과 장로들의 회합
BC 588년 예루살렘의 포위와 예레미야의 예언 및 투옥
BC 587년 에돔의 유다 침략
BC 586년 바벨론에 의한 남쪽 유다의 멸망과 바벨론 유수
BC 571년 에스겔의 예언 사역 마감
BC 550년 다니엘의 네 짐승에 대한 환상
BC 539년 바벨론의 멸망,벨사살의 잔치와 벽에 쓰인 글시 해석
BC 538년 바사 왕 고레스의 포로 석방에 대한 포고령,스룹바벨에 의한 제1차 포로 귀환
사자굴에서 구원받은 다니엘,다니엘 칠십 이레 환상
BC 536년 사마리아인에 의한 성전 재건 방해~520년)
BC 522년 바사 왕 다리오의 즉위
BC 520년 스룹바벨에 의한 성전 재건~516년),학개의 소명 및 예언,스가랴의 소명과 환상
BC 483년 비사 왕 아하수에로의 왕후 와스디의 폐위
BC 479년 새 왕후로 간택된 에스더
BC 474년 하만의 음모와 죽음
BC 473년 부림절의 기원,존귀한 자리에 오른 모르드개
BC 458년 에스라에 의한 제2차 포로 귀환,에스라에 의한 개혁 운동 전개
BC 445년 느헤미야에 의한 제3차 포로 귀환
BC 444년 느혜미야에 의한 예루살렘 성벽 재건
BC 432년 바벨론으로 소환된 느헤미야
BC 430년 느헤미야 귀국과 개혁 운동
BC 334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제 동방 정복~323년)
BC 330년 알렉산더 대제 페르시아군대를 격파 권세가 절정에 이름.
BC 320년 프톨레미 1세가 예루살렘을 함락시킴.
BC 311년 셀류쿠스의 바벨론 정복,셀류쿠스 왕조 시작
BC 226년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대제)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세력을 행사함.
BC 223년 안티오쿠스가 수리아의 셀류쿠스 왕조의 지배자가 됨~187년)
BC 198년 안티오쿠스가 이집트를 물리치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지배함.
BC 175년 안티오쿠스 4세 에피파네스가 수리아를 지배함 유대인의 종교 의식이 금지됨.
BC 167년 맛타티아스와 그의 아들들이 안티오쿠스에게 반기를 듦,마카비우스의 반란이 시작됨
BC 166년 유다 마카비우스의 영도~160년),하스모니아 시대~63년)
BC 160년 대제사장 요나단의 영도~143년)
BC 142년 예루살렘 성전의 정결화,대제사장 시몬의 영도~134년)
BC 134년 요한 히르카누스가 독립국으로서의 영토를 확장시킴~104년)
BC 103년 아리스토불루스의 통치
BC 102년 일렉산더 얀네우스의 통치~76년)
BC 75년 대제사장 히르카누스 2세와 살로메 알렉산드리아의 통치~67년)
BC 66년 아리스토불루스 2세와 히르카누스 2세와의 전쟁~63년)
BC 63년 품페이우스가 팔레스타인을 침공함,로마의 지배가 시작됨.,히루카누스 2세가 통치했
지만 로마에 복종해야 했음~40년)
BC 40년 파르티아가家의 예루살렘 정복~37년)
BC 37년 예루살렘이 6개월 동안 포위됨. 팔레스타인 분봉왕 헤롯 즉위
BC 32년 헤롯이 패배함
BC 27년 아우구스투스(아구스도)의 로마 황제 등극
BC 19년 헤롯 성전의 건축이 시작됨
BC 16년 헤롯 아그립바를 방문왕
BC 5년 세레 요한의 출생
BC 4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헤롯이 죽고 아르켈라우스가 뒤를 얻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