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우스에 대한 최초의 반대자는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알렉산더이었다. 그는 아들이 시작을 가질 수 없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만물이 아들로 말미암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자의 진정한 신성을 강조한 동시에, 아들은 시간 속에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 아버지가 낳았다는 영원출생설(eternal sonship of generation)의 교리를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아리우스의 주장을 반대하고 그를 정죄하여 공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아리우스의 진정한 반대자는 알렉산더의 후계자 아다나시우스였다. 그는 296년경 알렉산드리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좋은 환경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신학적으로는 클레멘트, 오리겐, 디오니시우스 등으로 이어지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에 속했으며 우파 오리겐주의와 입장을 같이했다.
아리우스와의 논쟁이 한창일 때, 알렉산더 감독은 아다나시우스를 집사로 안수했다. 그후 부감독이 된 아다나시우스는 325년에 개최된 니케아 회의에 알렉산더와 함께 참석하여 알렉산더파가 아리우스파와의 논쟁에서 승리하는 데 많은 공헌을 했다. 그리고 328년 여름, 아다나시우스는 알렉산더의 후임으로 30세의 젊은 나이에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리우스주의자들에 의해 일시 감독직에서 축출되기도 했으며 다섯 차례에 걸쳐 도합 15년 10개월의 유배 생활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366년에 감독직에 재 취임하여 373년 죽을 때까지 그 직책을 수행했다. 그의 저서로는 『이교도에 반대하여』(Against the Heathen), 『성육신에 관하여』(On the Incarnation of the Word), 『아리우스주의자에 대한 반론』(Discourse against the Arians), 『성령의 신성에 관하여 세라피온에게 보낸 편지』(Letters to Serapion concerning the Divinity of the Holy Spirit) 등이 있다.
아다나시우스는 신학자라기 보다 오히려 신실한 목회자였다. 그는 오리겐이나 어거스틴같이 다방면에 걸친 신학을 만들지 않았다. 그의 관심사는 인간의 구원문제였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말씀이 인간이 되었으며 죽으셨다는 것을 강조했다.
그리스도가 사람이 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적 존재가 되게 하기 위해서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의 신학적 공헌은 구원의 원리를 확고하게 파악한 것에 있다.
한편, 아다나시우스가 아리우스의 학설을 맹렬히 반대했던 것은 그것이 비기독교적이며 불신앙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첫째, 아리우스는 삼위 하나님이 영원하다는 것을 부정한다. 성자와 성령은 시작을 가지고 있으며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통일성에 첨부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삼위일체의 교리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신성까지도 부정하게 된다. 둘째, 아리우스는 두 다른 신을 주장하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된 하나님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의 신론을 논리적으로 이교 세계의 다신론에 접근하고 있다. 셋째, 아리우스주의는 구원의 확실성을 파괴한다. 로고스가 변하기 쉽다면, 어떻게 그가 우리에게 성부를 계시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어떻게 우리는 그 안에서 성부를 볼 수 있는가? 이런 식으로는 인간은 결코 구원의 확신에 이를 수 없다.
아리우스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와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삼위일체 신앙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 예식이 무의미하게 된다. 또한 그것은 다신론에게 이르게 되고 구원이 피조물(그리스도)로 부터 유래함을 의미하게 된다. 아다나시우스는 이런 문제점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아리우스주의를 제거하는 것을 일생의 과제로 삼았다.
그렇다면, 아다나시우스의 교리의 핵심은 무엇인가? 한 하나님의 개념이 아다나시우스의 신관의 출발점이다. 그는 하나님의 통일성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론을 제시하려고 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동일한 신적인 본질로 이루어진 반면, 하나님의 본질적인 존재에는 분할이나 분리가 없다. 특히 아다나시우스는 아들의 신성을 강조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이며, 하나님의 말씀이며 지혜며 아들이며 능력이므로, 성경은 오직 한 하나님을 선포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은 둘이지만 그 신성의 단일성은 분열되거나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다. 아리우스가 주장한 것 같이, 제2의 하나님(Second God)이거나 부분적인 하나님(partial God)일 수 없다.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태어났다. 그러나 성자의 출생은 사람의 출생과 동일한 의미의 출생이 아니다. 사람으로부터 태어난 것은 부모의 일부분을 나누어 받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일부를 분리하는 것 없이 아들을 낳았다. 아다나시우스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샘물과 시냇물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샘물로부터 흘러나오는 시냇물은 샘물과 형태가 다르고 이름은 다르지만, 샘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이다. 샘물이 시냇물이 아니고, 시냇물이 샘물은 아니지만, 이 둘은 샘물로부터 시냇물로 이어지는 수로로 흐르는 동일한 물인 것과 같이, 아버지의 신성은 누수 되거나 분리되지 않고 아들에게로 전달된다. 이 비유를 통해 아다나시우스는 아들과 아버지의 본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령도 성부와 동일 본질임을 주장하고, 성령이 피조물 혹은 천사와 같은 존재라는 견해를 부정했다. 성령이 다른 본질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삼위일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