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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그에게서 여유로움이 묻어났다. “요즘 언론의 관심이 부담스럽지 않으세요?”라는 질문에 “너무 즐거워요. 그래서 즐기고 있어요. (웃음)”라고 대답하는 그는 지금이 너무 좋다며 미소를 지었다.
인터뷰 내내 눈을 보며 말하던 그에게서 진실함과 자신감이 보였다. 자신감 가득 찬 그의 모습에서 좌절이라는 단어는 다시는 없을 것만 같았다. 과거부터 그를 바라본 필자로서는 1년 새, 부쩍 어른스러워진 그의 모습이 낯설기도 했지만 생각이 깊어진 만큼 미래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차분히 그 단계를 밟아가는 그를 보며 흐뭇함도 들었다.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시절, 축구의 시작.
운동을 좋아하는 집에서 태어난 막내아들. 뛰는 게 좋아 운동장을 달리던 그에게서 주위 분들이 축구를 권해왔다. 축구를 워낙 좋아하는 형, 뛰는 걸 무척이나 좋아하던 그. 축구를 할 것만 같던 형이 아닌, 그가 바로 축구를 선택해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축구를 시작한건 우연치 않은 계기였어요. 원래 축구를 좋아하긴 했지만, 뛰는 걸 좋아해서 육상부도 했어요. 그냥 동네에서 축구를 하던 게 주위 어른들이 테스트를 받아보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농담으로 어머니한테 ‘엄마, 나 축구할래.’라고 했는데, 어머니가 그걸 알아보시고 축구를 하게 해주셨어요.
아버지가 말씀하시길, 예전에 축구 경기를 보러 갔을 때 제가 그랬데요. ‘나중에 내가 저기서 뛰고 싶어.’라고. 그런 이야기들을 어머니께서 머릿속에 새겨듣고 축구를 시키신 거래요.”
가족은 축구를 하는데 있어 절대적인 후원을 해주는 지지자였다. 항상 채찍과 당근을 주는 그의 가족은 축구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족에게서 절대적인 후원을 받았어요. 가족이 워낙 운동을 좋아하니까 제가 운동을 하는 내내 불편함이 없을 정도예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운동을 정말 좋아하세요. 제 형은 완전 축구광이라고 할 정도로 매니아에요. 그래서 부모님이 농담으로 형이 축구를 하고 내가 공부를 했으면 형이 더 성공했을 거라고 하더라고요. 뭐, 제가 공부를 했으면 법대정도는 가있지 않았을까. (웃음)”
어린나이에 가족과 떨어져 운동을 하는 게 힘들만도 한데, 친구를 워낙 좋아하는 그에게는 외로움보다는 즐거움이었다. 축구, 가족 다음으로 그가 좋아하는 친구라는 존재. 그에게서 또 빼놓을 수 없는 존재 중에 하나가 바로 친구이다.
“가족과 떨어져서 숙소생활을 하는 게 그때는 재밌었어요. 친구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가족과 떨어져 있어도 외로움을 못 느꼈죠. 그리고 가족과 떨어져있어도 내내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릴 적에는 부모님이 학교에 많이 찾아오셨어요. 그게 생활화 되다보니까 정말 편하고 좋았어요. 친구들이랑 즐거운 추억들이 많거든요. (웃음)”
가족과의 외로움을 대신해준 친구들, 그들과 함께였기에 축구라는 게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부평고 주장 이근호, 내 생에 최고의 시간들.
인천에서 초, 중, 고를 나온 그. 그는 명문 부평고에서 축구를 했고, 3학년 때는 주장을 맡았다. 부평고에서의 기억은 그에게 있어 최고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기억에 남는 축구이야기, 친구들, 은사님들 모두 부평고에서 이룬 추억이다.
“지금도 좋은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부평고 시절은 축구를 하면서 정말 행복하고 제일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에요. 나름 성적도 잘 냈고, 친구들이랑 게임을 하는 자체가 즐거웠어요. 운동을 하는 자체가 즐거웠을 정도죠. 그리고 그때 친구들이랑 하는 건 모든 게 즐거워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날 정도예요. (웃음)”
기억에 남는 골, 기억에 남는 게임. 부평고 3학년 시절의 그는 부상의 설움을 딛고 다시 날아오르는 시간이었다. 그의 팔에 있는 주장 완장은 그에게 책임감을 부여했고, 그만큼 그는 열심히 뛰었다.
“2003년 백운기 준결승에서 최단 시간 골을 넣었어요. 하프라인에서 우리 팀이 커트한 볼이 바로 롱 패스로 저에게 넘어와서 바로 헤딩으로 연결한 게 골이 됐죠. 전광판을 보니깐 스코어와 분이 동시에 0에서 1로 바뀌더라고요.
기억에 남는 게임은 3학년 마지막 대회였어요. 전국체전 우승을 했을 때였는데, 너무 감동적이고 가슴 뭉클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죠. 왜냐면 학교도, 감독님이랑 코치님도 안 좋은 상황에 있었어요. 그래서 저희가 골을 넣고 특별한 세리머니를 준비했죠. 모두 유니폼 안에 전부 한마디씩 문구를 적었어요.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같은 문구들이요. 골을 넣고 선생님들 앞에서 그 문구들을 보여줬어요. 그때가 참 뿌듯했고, 감동적이었어요.”
즐거웠던 학창시절, 그 시절에 그만큼의 에피소드도 참 많았다. ‘리마리오’로 불리는 부평고 시절 단짝 김승용은 그 시절에도 웃음을 주는 재간둥이였고, ‘김도훈’으로 불리는 그는 부평고의 명물이기도 했다.
“(김)승용이는 청소년대표 시절에 리마리오 세리머니를 보여줘서 유명해지기도 했지만, 부평고 시절에도 유명세를 탈만한 세리머니를 많이 했어요. 워낙 끼가 많은 친구예요. (웃음) 3학년 백운기 결승전 때, 골을 넣고 그때 유행하던 댄서킴의 쭉쭉쭉 댄스를 세리머니로 했어요. 결승전 중계방송을 했으니까, 어딘가 구하면 있을 거예요. 그 외에도 전국체전 결승전에서는 외인구단이 유행할 때였는데 코너플렉에서 ‘돌아’ 그러더니 애들이랑 전체 다 코너 플렉을 돌고, 한번은 러브하우스 흉내를 내고 재밌던 에피소드가 참 많았죠. (웃음)
저는 김도훈을 닮았다고 TV중계에 김도훈 선수가 나오면 형들이 TV옆에 서있으라고 했어요. (웃음) 군대에서 관등성명 하듯이 장난으로 이근호 부르면 ‘전북현대 에쿠스 김도훈입니다.’라고 장난도 많이 했죠. (웃음)
명문 부평고를 졸업하고 그는 두 가지 갈림길에 서있었다. 프로라는 길과 대학이라는 길. 그는 고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대라는 명문대에서도 그에게 손짓을 했고, 그에게는 프로라는 꿈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2학년 말쯤에 대학과 프로라는 진로 방향을 선택하게 되는데, 대학보다 프로로 가겠다는 마음이 컸어요. 대학가면 대학생활도 해보고 좋은 게 많겠지만 빨리 좋은 여건에서 축구를 하고 싶어요. (웃음) 다른 것보다 워낙 잔디를 좋아해서 (웃음) 환경적인 면에서 빨리 프로라는 곳에 가서 운동을 해보고 싶었죠. 그 당시 고려대간다고 말나오던 친구들이 다 대학을 안가고 프로에 갈 정도로 프로에 대한 꿈이 컸어요.
그리고 인천에 가게 된 건 원래 인천이 창단이 늦어진다고 해서 다른 구단을 가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갑자기 창단되는 바람에 우리 부평고에서 한 명이 가야 되지 않나 싶었고 그때 프로로 가는 사람 중에 결정이 나지 않은 게 나 하나였어요. 그리고 감독님이나 코치선생님이 인천에 가면 좀 더 혜택을 받으면서 볼을 차지 않을까라는 말에 마음이 기울었죠.
대학에 대한 아쉬움은 커요. 캠퍼스생활이란 걸 저는 못하고 지나가잖아요. 미팅, 소개팅 그런 거 젊어서 밖에 할 수 없는 건데 못하니까 아쉬움이 크죠. (웃음) 하지만 어쩔 수 없죠.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포기하는 수밖에요. (웃음)”
그는 대학에 대한 로망이 크다. 어쩌면 축구를 안했으면 대학생의 모습도 참 어울리기도 하다. 그런 그는 그래도 축구가 우선이었다. 자신의 축구인생을 더 넓히기 위해 프로로 발을 내딛었다.
인천 사나이, 프로에 대한 첫 발을 인천에서 내딛다.
인천에서의 시작은 좋을 것만 같았다. 인천출신 이근호, 그를 보기위해 경기장을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를 어려서부터 지켜봐온 이들은 인천유나이티드의 그 어느 선수들보다도 이근호, 그를 응원했다.
“게임을 못 나갈 때도 항상 형과 형의 제일 친한 친구들이 저를 응원해줬어요. 게임에 나갈 때는 제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찾아 저를 응원해줬죠. 지금도 매번 전화오고 힘이 되어줘요. 그렇게 저를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더 잘해야겠다는 마음이 들고, 뿌듯하기도 해요.”
첫 인천유나이티드를 알리던 순간. 2004년 3월 1일 첫 게임을 하기 전, 카 퍼레이드를 했다. 그에게는 색다른 순간이었다.
“그때는 너무 신났죠. (웃음) 프로라는데 처음 와서 고등학교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잖아요. 고등학교 때는 관중이 많지 않았는데, 그때는 처음으로 많은 관중 앞에 섰고 그 시선을 받는다는 게 참 즐거웠어요. 차 위에서 손을 흔들면서 ‘내가 하고 있는 게 어색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웃음) 그날 특별히 잘 보이려고 머리에 드라이도 하고 나갔죠. (웃음)”
좋은 시간은 잠시뿐이었다. 그의 어깨에 놓인 부담감은 그를 짓눌렀고, 그곳에서의 기억은 괴로움으로 다가왔다. 자신의 고향에서 새로운 시작을 멋지게 펼치고 싶었지만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고향이었기에 괴로움은 더 크게 다가와 그를 힘들게 했다.
“제 생각에는 인천 출신이라고 따로 큰 혜택을 받은 건 없어요. 주목을 받은 거에 비하면 활약이 없어서 인천에 대해서는 좋은 기억이 많지 못해요.”라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에게 그 기억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인 듯 했다.
“처음 인천에 갔을 때는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막상 부딪혀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실력이 고등학교 때만 못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자신감을 많이 잃었고 힘든 생활을 했어요. 프로생활을 처음 하다보니까 겪는 어려움도 컸어요. 또래들과 경쟁하다 나이 많은 선배들과 경쟁하는 것도 어려웠고, 몸 관리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1군이었던 그는 어느새 2군이 되었고, 2군이었던 그는 어느새 바닥까지 맛보게 되었다. 벤치도 아닌 관중석에서 같은 팀 선수들을 바라보는 그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다.
“관중석에서 게임을 보는데, 게임 보는 내내 기분도 많이 안 좋았어요. ‘내가 더 잘할 수 있는데’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나도 저기서 뛰고 싶은데 못 뛰니까 너무 안타까웠어요. 더군다나 제가 초, 중, 고를 다 나온 인천이다 보니까 아는 사람도 많아 관중석에서 게임을 보는 게 괴로웠어요. 다들 알아보시고 말을 많이 하셨거든요. 그게 너무 힘들어서 반대편에 사람 없는 곳으로 가서 경기를 볼 정도로 많이 힘들었어요.”
동갑내기 이요한과는 비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함께하는 친구이지만, 어쩔 수 없이 언론의 라이벌 상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요한이랑은 유일하게 같은 또래다보니까 금방 친해졌고, 지금도 꾸준히 연락하고 친한 정을 쌓고 있는 친구예요. 그런데 인간이라는 게 참 애매한 것 같아요. 아무래도 비교대상이 될 수밖에 없겠죠. 같은 나이에 같이 청소년대표를 했고 같이 팀에 같이 입단을 했으니 언론에서는 어쩔 수 없이 저희가 비교가 되는 상황이죠. 그런데 (이)요한이는 게임을 뛰고 저는 못 뛰니까 많이 위축되더라고요. 겉으로는 표현을 안 하려고 했는데, 표시가 났는지 주위에서 많이 얘기했어요. 그런데, 나는 괜찮다고 맘 편히 먹고 가만히 있어도 주위에서 그러니까 오히려 더 우리를 어색한 사이로 만들기도 했어요.”
그런 그에게 최고의 슬럼프가 찾아왔다. 어느새 그는 바닥에 와 있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자책할 힘도 없었다. 반년을 그렇게 지낸 그는 새로운 마음으로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했다.
“최고의 슬럼프였어요. 2군 경기도 못 뛴다는 건 정말 충격이었죠. 왜냐면 그때 연습생형들도 게임 뛸 때였는데, 게임도 못 뛰고, 따라다니지도 못했으니까요.
그때가 아마 청대 가서 박성화 감독님 처음 만났을 때 일거예요. 몸이 안 좋아서 청소년대표에도 못가고 좌절해있었어요. 운동도 안 되고, 집중도 안 될 때였어요. 그러다보니까 어느새 처음에 1.5군이었다가 2군이었다가 마지막에 말 그대로 3군까지. 2군경기도 못 뛸 정도로 그렇게 추락했죠. 그때가 아마 축구를 하면서 최고의 슬럼프였죠.
슬럼프가 다섯 달, 여섯 달 쯤 되었나? 그 시간이 지나고 마음을 비웠어요. 그냥 운동만 바라보고 한번 해보자 싶었죠. 운동이 잘 되던 안 되던, 게임을 뛰던 못 뛰던 신경 쓰지 말고 마음 편히 운동하자 했어요. 그랬더니 몸이 조금씩 올라오고 좋아지더라고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1군 게임까지 뛰었죠.”
그의 이름을 다시 한 번 알리게 된 2군 리그. 비록 1군이 아니지만 그는 만족했다. 왜냐하면 1군, 2군은 마음을 비웠던 그에게 큰 차이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에게 기회가 왔고, 그 기회를 잡았다는 것에 그는 성취감을 느꼈다.
“선배 형들이 제가 MVP가 될 거라고 했는데, 솔직히 잘하는 선배들이 타지 않을까 했어요. 한창 몸이 좋고, 계속 포인트를 올리고 그러니까 형들이 게임 내내 ‘다음경기 너 또 나간다.’ 계속 그랬어요. 기대를 하다가 나중에는 마음을 비웠어요. 기대를 했는데 안 되면 실망을 하니까 마음을 비우고 그동안 못 보여준 거 2군 리그에서 최대한 보여줄 수 있는 건 보여주자 싶었죠. 그래서 목요일에 맞춰 몸 관리를 했고, 그러다보니 잘 되었죠. 그때 비록 1군 리그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목표를 이뤘다는 성취감만으로도 기뻤어요. 고등학교 때 이후로 오랜만에 마주한 성취감이었어요. 2군 리그 우승과 함께 MVP까지, 7골 7도움 했잖아요. (웃음)”
아무리 힘들어도 축구를 멀리하지 않았던 그의 마인드가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웠던 것 같다. 바닥에 있어도 항상 그의 발에서 공이 떠나질 않았다. 인천의 한 풋살장, 저녁시간이 되면 그곳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웃으며 공을 차는 그는 역시 축구인 이었다.
"축구라는 게 워낙에 좋기 때문에 축구를 멀리 할 수는 없었어요. 축구가 싫다는 건 제가 볼 때 축구 외적으로 뛰는 운동이나 힘든 운동을 할 때가 싫다는 것 같아요. 공을 가지고 운동 할 때는 다들 즐거워하지 않나 싶어요. 저 또한 축구할 때가 제일 즐거워요. 인천에 있을 때도, 휴가 때도 축구를 정말 많이 했어요.
시즌에 운동을 너무 해도 피로누적이 되고 안 좋지만 인천에 있을 때는 1군 리그를 뛰는 게 아니니까 시간도 많고, 몸 관리도 적기 때문에 오후에 운동하고 저녁에 풋살을 했죠. 풋살을 하도 하니까 그곳에서 절 본 사람들이 팀에서 나왔나 싶어 하기도 했을 정도로 (웃음) 풋살을 많이 했고, 풋살하는 걸 그만큼 좋아해요. 지금도 쉴 때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모여서 풋살을 자주해요. (웃음)”
축구가 좋은 그에게 다가온 새로운 햇빛. 대구FC로의 이적은 모험이었지만 그 모험에서 그는 살아남았다. 아니, 그곳의 희망이 되어 기적을 일으켰다.
대구를 이끌던 주축 두 명이 대구를 떠났다. 그 자리에 안착하게 된 그는 부담감이 컸다. 하지만 그 부담감 때문에 또 쓰디쓴 경험을 되풀이 할 수 없었다. 그에게 온 기회를 두 손으로 꼭 붙들었다.
“처음 대구에 왔을 때 부담감이 엄청 컸어요. 인천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왔기 때문에 여기서 못하면 끝이라고 생각했죠. 트레이드된 윤주일선수가 대구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선수라고 들었어요. 그렇게 인지도 높은 선수의 자리에 제가 온 거잖아요. 그래서 좋은 모습을 보여야한다는 부담감이 많았어요. 더군다나 (오)장은이가 너무 잘 해놓고 다른 팀으로 갔기 때문에 제가 바통을 이어받은 느낌이었어요. 같은 연령에 같이 올림픽대표라는 점에서 이목을 받아 동계훈련을 할 때 까지만 해도 부담이 된 게 사실이었고, 그래서 더 악착같이 했죠.
지금의 관심이 부담되기보다는 오히려 재밌어요. 그래서 즐기고 있고요. 그냥 이런 분위기가 참 좋아요. 운동장에서 웃음이 많이 나오게 되네요. (웃음)”
대구에서 참 편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어쩌면 제2의 고향이 될 것만 같은 곳으로 다가온다. 지금 이곳에서의 생활은 뭐하나 불만이 없다.
“대구에 와서 제일 좋은 점은 감독님께서 편하게 해주시는 거예요. 심적으로 편하니까 전술 그런 걸 다 떠나서 내가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어요. 그러다보니 팀플레이도 더 잘 되는 것 같아요. 원래 제 플레이가 다른 팀에서는 센터포워드를 볼 수 없는 신체조건을 갖은 상황인데, 대구에서는 센터포워드를 보고 있어요. 원래 팀에 컨셉을 잡자면 저랑 잘 맞는다고 생각되는 포지션이 윙 포워드나 공격형 미들에서 자유롭게 플레이를 하는 건데, 이곳에서는 외적인 조건에서 편하게 해주니까 지금 이 포지션에서도 적합한 플레이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대구가 좋은 첫 번째 이유로 감독과 코칭스텝을 꼽는 그. 자신을 이해해주고, 100% 신뢰해주는 그들에게 보답을 하고 싶은 그이다.
“변병주 감독님과 플레이가 비슷하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어떤 플레이를 하셨는지 자료가 있다면 정말 보고 싶어요. 그 시대에 어땠는지 제 눈으로 보고 느끼고 싶은 마음이 커요. 하지만 얼굴은 안 닮았어요. (웃음) 저는 변병주 감독님이 완전 좋아요. (웃음) 언론과 인터뷰할 때 감독님에 대해 이런 얘기 많이 했는데 안 나가더라고요.
(변병주 감독님이 좋은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다른 감독님들과 다른 게, 젊으시다 보니까 선수측면에서 많이 바라보고 선수들과 가까이 지내려는 점이 많으세요. 그래서 선수들이 편하게 운동을 하고, 더 열심히 하게 되요. 감독님도, 코칭 스텝도 다 농담도 잘하고 센스가 넘치세요. 저희 선수들 보다 먼저 파마를 하고 오셔서 ‘머리 잘 나오지 않았느냐’고도 하세요. (웃음) 어제는 신연호 선생님이 저희를 코치하시다가 갑자기 ‘뭔 말인지 알지?’라고 하시는 거예요. (웃음) 그 자리에 있던 선수들이 다 배꼽잡고 웃었잖아요. (웃음) 재미 붙이셔서 계속 하시더라고요. 참 위트 있으시죠? 원래 코칭 스텝은 어렵고 근엄하고 말 붙이기 힘들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장난치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운동을 하고 있어요. 정말 신세대 감독 코칭 스텝이에요. (웃음)”
그에게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그는 너무 잘해주고 있다. ‘무한 근호교’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그의 입지를 굳히던 첫 게임은 전남 전이었다. 멋진 어시스트를 만들어주고, 극적인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이근호’라는 이름을 알렸다.
“그 경기가 서울에서 원정경기하고 갔다가 올림픽대표 경기를 하고 와서 처음 뛴 경기가 홈경기였어요. 2대2로 비겼는데, 이긴 것보다 더 기쁜 경기였죠. 그 경기에서 넣은 골이 제 K리그 데뷔 골이었거든요. 그것도 2대1로 지는 상황에서 끝나기 바로 전에 극적으로 넣어서 우리가 지지 않았잖아요. 홈경기는 이겨야지, 비기고 좋아하면 안 되는 건데 다들 이긴 것 같은 분위기로 좋아했어요. 그때 감독님도 첫 승점이었고, 대구 홈팬들에게 처음으로 각인 시킨 거라 다 좋았죠. (웃음)
그 후로 골이 많이 터졌어요. 대구에서만 골이 그렇게 터지는데요. (웃음) 제가 넣은 7골이 전반전에는 하나도 없고, 다 후반전에 넣은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전반전을 0대0으로 끝내면 기분이 좋더라고요. (웃음) 괜히 후반전엔 되겠다 싶은 마음이 들어요. 맞부딪혀서 싸우면 저희가 전력이 안 되는데, 선 수비를 하다가 후반전에 상대편 체력이 떨어지면 서로 시간이 없어서 공격을 하잖아요. 그러다 보면 빈틈이 보이고 그걸 노리는 거죠. 저희가 후반에 강한 이유가 그 점에 있는 것 같아요.
지난 울산 전에서의 골은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제 골로 인해 첫 승을 올리는 상황이었고, (하)대성이에게 K리그 데뷔 골을 기록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줘서 더 기뻤죠. (웃음) 지금 동영상을 다시 봐도 정말 잘 넣었다고 생각해요. 1대1 상황에서 46분에 넣은 골이었어요. 그때는 시간도 잘 몰랐어요. 골을 넣고 세리머니를 다 하고 오면서 전광판을 보니까 경기 시간이 끝나고 루스 타임인거예요. 울산 코치선생님이 고등학교 때 트레이너 선생님이신데, 게임 시작 전에 인사드리고 게임 끝나고 전화 드렸더니, 저랑 (하)대성이보고 ‘너네둘이 피를 말리는구나. 다른 애들이 넣은 것보다 너희가 넣어서 뿌듯하다.’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요즘 경기장에 가면 그의 어머니를 뵐 수 있다. 게임이 끝나고 한곳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그, 바로 어머니를 향한 손짓이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다. 아들을 보러 먼 곳도 마다하지 않고 몇 시간을 달려오신다. 그런 어머니에게 멋진 막내아들이고 싶다.
“어머니가 게임을 보러 다 와요. 전국을 다 다니죠. 포항도 제주도 마다않고 오세요. 제가 어릴 때부터 워낙 게임 보러 오시는 걸 좋아하셨어요. 제가 인천에 있을 때는 보러 못 오셨어요. 그때는 삶의 의욕이 없었다고 하실 정도였데요.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어딜 가든지 주제거리가 있었는데, 인천에 가서는 깜깜무소식에 다른 사람들은 애가 다쳤냐고 묻고 내가 뭘 하는지 할 얘기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은 게임도 뛰고 활약이 좀 있으니까 어머니가 즐거우신가 봐요. 처음에는 말렸는데 보고 싶어 하셔서 안 말렸더니 매 경기마다 오시더라고요. 저희 어머니는 준전문가예요. 평론가 같아요. 세밀한 것까지 다 보시고, 기사도 다 챙겨보시고 연락이 오세요. 십 몇 년을 보시니까 더 잘 아시는 것 같아요. 아무튼 축구에 관해서는 전문가죠. (웃음)”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자 그의 표정에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묻어났다. 그동안 자신과 함께 힘들었을, 그리고 끝까지 옆에서 응원해주는 가족에 대한 마음일 것이다.
태극마크, 아직은 이르지만 곧 정상에 오르리라.
유소년대표, 청소년대표, 올림픽대표, 국가대표. 그는 모든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는 만족하지 못한다. 대표시절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동안 남긴 기록이 그에게는 만족하지 못한 이유이다.
“청소년대표 때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어요. 실패를 맛봤던 때였죠. 청소년대표에서 쓴맛을 본 게 지금 올림픽대표에서 잘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청소년대표 시절에는 많이 위축 되서 운동을 했어요. 왜냐면 내놓으라 하는 선수들이 모여서 운동을 하니까 적극적이지 못하고 내 본모습을 많이 보여주지 못했거든요. 청소년대표 끝나고 아쉬움이 많아서 올림픽대표 뽑히고 되풀이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때 경험 때문에 더 열심히 했죠.
올림픽대표에 뽑힐 거라고는 기대도 안했어요. 전혀 상상도 못했죠. 2군이었으니까. 그 당시에 다들 1군에서 운동하고 게임 뛰는 선수들이 뽑혔는데, 저 혼자 2군이었거든요. 놀림도 많이 받았어요. 선수들이 농담으로 ‘2군 MVP’라고 불렀어요. 처음 본 형들도 ‘2군 MVP야’ 이러니까 너무 솔직히 너무 민망하잖아요. 1군도 아니고 2군이었다는 게.
내가 올림픽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걸 알았을 때, 생각지 못한 일이어서 기쁨이 더 했어요. 그래서 가족들에게 먼저 알려야겠다 싶었죠. 너무 좋아하셨어요. 반면에 이번엔 정말 잘해보자고 하셨어요.
올림픽대표에서 괜찮은 플레이를 했다고 생각해요.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아직 내가 살아있구나.’ 싶었어요. (웃음) 정말 이번에는 잘해야겠다고 다짐했죠.
첫 게임을 하고나서 골을 못 넣은 거 빼고는 만족할 만한 경기를 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나서 다음 일본전은 더 잘해야겠다, 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집중하고 몸 관리를 했어요. 그대 당시 심정은 정말 절대 이대로 지지말자 그거 하나였어요.
그런데 매 경기 괜찮은 게임을 하면서 골을 못 넣은걸 생각하면 답답해요. 아직도 올림픽대표에서 골을 못 넣고 있어요. 지난 예멘과의 게임 때, 고트비 고치가 그러더라고요. 대구에서 골 많이 넣는데 왜 여기서는 안 넣느냐고 빨리 골 넣으라고. (웃음) 한번 골이 안 터지기 시작해서 그런지 몰라도 정말 아쉬움이 컸어요. 지금 생각해도 좀 만 더 집중했으면 골을 넣을 수 있었을 텐데 라는 아쉬움이 남아요.
그런데 제 자리가 골을 넣기보다는 도움을 주는 포지션이에요. 왜냐면 올림픽대표가 네덜란드 식 축구를 하다보니까 포지션 플레이를 중요시하거든요. 대구에서처럼 종횡무진 플레이는 자제를 원해요. 체력안배적인 문제도 있고 자기위치에서 자기의 역할을 최선을 다해 최고의 능률을 바라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구에서보다는 찬스를 못 잡는 게 사실인데, 대신 도움을 많이 하게 되요. 오히려 게임을 푸는 역할을 하고 있죠. 그래도 골에 대한 욕심은 있어요."
올림픽대표에서의 활약만큼이나 중계를 했던 동영상이 포털사이트에 퍼지면서 그는 또, 한번 유명세를 톡톡히 치렀다. 코너깃발을 뽑은 장면과 욕하는 장면 때문이다.
“코너플렉에서 볼을 잡으려는데, 볼이 아웃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래서 코너깃발을 잡고 멈춰서 돌아 서려고 했는데 깃발이 폭 빠지는 거예요. 당황해서 그 짧은 시간에 던지고 갈까, 꼽고 갈까 고민을 했죠. 그런데 저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래서 빨리 꼽고 가려고 옆에서 드로잉 하는데 전 깃발을 꼽고 있었죠. (웃음)
(욕하는 장면이 캡쳐 되어서 돌아다니던데.) 그게 원래 3초만 참으면 된다고 하는데 그 순간에는 정말 아쉬워서 저도 모르게 나오더라고요. 평상시에는 욕 안 해요. (웃음) 저는 욕 안한답니다. (웃음) 앞으로 자제 해야죠.”
현재 그는 부상 중인 박지성 자리를 매김 할 만한 선수로 떠오르고 있다. 언론에서는 그가 박지성의 플레이를 쏙 빼닮아 그 자리에 설 만한 적임자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는 그 말에 대한 부담감에 손을 내 저었다.
“정말 언론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예요. 아직까지 그런 욕심은 안내고 있어요. 올림픽 대표에서 좀 더 입지를 다져야할 것 같아요. 어제도 대표 팀 게임이 있었지만 그 자리에는 정말 (이)천수형도 있고 (염)기훈이형도 있고 잘하는 형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저는 더 노력을 해야 해요. 올림픽대표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지금 말고 나중에라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생각해요. 언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벌써부터 기대를 하고 있지는 않아요. 지금 올림픽대표에서의 제 자리도 안심할 게 못된다고 생각해요. 왜냐면 올림픽대표도 본선에 가게 되면 정예 멤버가 조금씩 추려질 거고, (박)주영이도 들어오고 지금 잘하는 이청용 선수 같은 선수들이 들어올 것 같고, 와일드카드까지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아직은 방심할 단계가 아닌 것 같아요.”
지금 눈앞에 큰 기회가 왔지만, 욕심을 내지 않고 차근차근 계단을 밟고 올라가려고 한다. 한 계단씩 밟고 올라서면 어릴 적 꿈꾸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 질 것이다. 아직도 가슴 한 켠에 꿈으로 간직 한 채 오늘도 달린다.
이제 그에게 있어서 축구는 가족보다도 우선시 될 정도로 큰 존재가 되어있다고 했다. 축구를 포기 할 만큼 큰 건 없을 정도라고. 지금까지 해 온 축구, 이제는 인생의 동반자로 여기고 끝까지 함께 하려 한다. 축구로 인해, 좌절을 맛보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축구가 좋다.
운동장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그, 이젠 자신감을 갖고 달리겠다는 그. 축구가 제일 좋다는 그의 미소가 세상에서 제일 빛이 났다. 꿈이 있기에 아름답고, 겸손하기에 멋있는 23살 이근호의 두 발이 한국 축구에 어떤 변화를 줄 지 기대해본다.
K-리그 명예기자 정선녀
첫댓글 길지만.. 다 읽어보면.. 이근호 완전 귀엽다..ㅋ_ㅋ 어머님이 축구를 좋아하셨군하.. 나도 내 아들 축구선수로키워야지꼭.
생략 ......
이근호 언뜻 강지환 닮았어
네..아주 언뜻 보면..
어익후,,,아주 빡빡하네요 ㅋㅋ언제 다 읽지 ㅜㅜ
허버 길어서 읽는거 포기했네요/..ㅋ
그노 성공 할 사 람
세줄요약점ㅠ_ㅠ
화이팅
1줄요약 난 축구가좋다
다 읽었다 잼난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