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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0일 연중 제1주간 월요일
"나를 따라오너라.
(마르 1,14-20)
Come after me,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는 바오로 사도의 편지 형식과는 달리, 처음부터 장엄한 강론 형식을 띠고 있다. 하느님께서 예전에 예언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을 이제는 당신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역할을 제시해 주심으로써, 구원의 역사에 그분께서 자리하고 계심을 드러내신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복음을 선포하시며 본격적으로 당신의 구원 사업을 시작하시려고 제자들을 부르신다. 예수님께 부름 받은 사람들은 아무런 미련도 없이 즉시 그분을 따라나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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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외국의 한 명문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사람이 대학에 교수직을 찾고 있었습니다. 적당한 대학의 교수로 살아도 좋을 것 같은데, 그는 꼭 일류 대학의 교수직을 고집하는 것이었습니다. 개인적인 명예도 있겠지만, 유능한 제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좋은 연구 성과를 내려면 능력 있는 제자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스승이라면 누구나 유능한 제자를 두기를 바랄 것입니다. 자신의 사상이든 기술이든, 능력 있는 제자가 물려받아 계승해 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은 다르셨습니다. 제자를 부르실 때 그들의 능력도, 배경도 묻지 않으십니다. 그저 ‘보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십니다. 그분께는 어부든 세리든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은 우리의 능력 때문에 부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한발 더 나아가, 교회의 봉사자나 사제나 수도자로 부름 받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자신이 가진 재능과 배경들을 오히려 쓰레기로 여겼습니다(필리 3,8 참조). 우리가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내세울 때’는 자기 자신의 일을 하지만, 오히려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의 약함을 자랑할 때’(2코린 11,30 참조)는 주님께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봉사자로 일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저는 부족한 죄인일 뿐이지만,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십시오.” 하는 겸손한 응답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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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갑니다. 정말 그렇게 했을까요?
만남은 신비입니다. 절대 결혼하지 않을 것이라던 사람이 어느 날 혼인한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평범한 모임에서 ‘눈이 확 돌아가는’ 사람을 만났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행복한 부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연은 부르심입니다. 모든 인연을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여긴다면 소홀히 대할 수가 없습니다. 불교에서도 ‘옷깃만 스쳐도 인연’으로 여기라 했습니다. 그만큼 만남을 소중히 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찮은 만남도 정성으로 대하면 은혜로운 만남을 반드시 체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형제와 요한 형제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은 평소 사람들과의 만남에 적극적이었을 겁니다. 이웃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선택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부르심에 즉시 답합니다. 변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라고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복음사가가 표현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부르심에는 “예!” 하고 답해야 한다는 가르침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새로운 삶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누구라도 ‘주어진 인연’에 최선을 다하면 그만큼 새로운 삶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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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오늘 복음에서 들은 이 말씀의 실현을 위하여 스승은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첫 번째 그룹으로 베드로 형제와 야고보 형제가 선택됩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따라갑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예수님 곁에 섭니다.
더구나 야고보와 요한은 함께 일하던 아버지를 그대로 남겨 둔 채 떠나갑니다. 삯꾼들이 빤히 보고 있는데도 홀연히 떠나갑니다. 아버지와 원수진 것도 아닐 터인데 정말 그렇게 서둘러 떠나갔을까요? 삯꾼들은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니, 저럴 수 있나? 아버지를 놓아두고 저렇게 가다니.’ 했을 겁니다. 오늘의 우리도 이 모습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식으로 제자를 뽑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스승의 부르심에 제자들은 곧바로 따릅니다. 그 과정은 짧습니다. 단순합니다.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부르면 따라야 한다.’ 이것이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제자들이라고 왜 고뇌가 없고 망설임이 없었겠습니까? 그들도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수도 없이 망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 생략되어 있습니다. 모든 과정이 생략된 채 스승을 따르는 결과만 나옵니다.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회개 역시 그렇습니다. 변명이나 망설임 없이 곧바로 실천할 때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뭘 하러 흐리멍텅하게 살겄나? 죽지 못해 일하고 입에 간신히 풀칠이나 하며 살 바엔, 고생두 신나게 해야 사는 보람이 있잖어.(황석영, ‘개밥바리기별’ 중에서)
하느님의 초대
-오기백 신부-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외치는 요한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으셔서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요한은 체포되고 맙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고민하시고 결단을 내리셨던 것 같습니다.
“이제 메시지를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해야겠구나”라고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역사의 징표를
읽으시면서 응답하신 것이지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끔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발생해서 우리를 새롭게 부르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든다면, 25년 전 저의 고향에 한 여고생이 있었는데
뜻하지 않은 임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부모는 여러 갈등을
겪으면서도 그 아이를 대신 키우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녀를 다 키워서 더 이상
아이들을 키운다는 계획을 갖고 있지 않던 부모님이었지만, 딸이 낳은 아기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고 다시 아기를 키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어느새
25년이 지났고 오늘날 그 두 분은 오히려 그 손녀로 인해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손녀가 결혼함으로써 증조부가 되었고 또 예쁜 증손을 보게 되어
요즘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역사, 우리의 삶에 있어서
예상치 않은 일들 속엔 하느님의 특별한 초대가 있습니다.
가장 깊은 어둠 가까이에
- 조정희 수녀-
오래전 맹인 선교회 식구들과 만날 때였다. 겨울에 차가운 방에서 예비자 교리도 하고 함께 병원 방문도 하며 기쁘게 지내던 중 한 사람을 통해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체험을 했다. 내가 상대방의 자립을 바라지 않고 나에게 의존하기를 바라며 만나왔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 내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자 나는 몹시 비참했고 슬펐다.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믿으며 살아온 내 존재가 흔들리며 아주 힘든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을 깨닫게 해주신 것이 감사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 나에게 첫 회개의 순간이라 느껴진다. 내가 이상적이라고 굳게 믿었던 삶의 방식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시고 나를 거짓된 강박관념에서 풀려나게 해주신, 그리고 순수한 사랑의 동기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신 은총의 시간이었다.
지금도 내가 느끼기에 버거운 일이 닥칠 때면 나는 하느님께서 함께해 주실 것을 믿고 ‘예.’`할 것인가, 부족한 내 능력을 생각하고 편하게 살고 싶은 본성에 따라 ‘아니오.’ 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서 갈등한다. 나를 바라보는 눈을 들어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께 온전히 맡겨드리며 ‘예.’`하는 데 믿음과 용기가 필요함을 느낀다.
내가 걸어온 길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때로 가장 깊은 어둠과 두려움 가까이에 있었다. 그 너머를 보게 해주시고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은 늘 가까이 계셨다. 그러기에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도 감사하다. 당신께서 더 진실한 그릇으로 빚기 위해 인도하시는 것임을 늘 뒤늦게 깨닫지만….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젊은 시절부터 정력적으로 사업에 몰두하던 형제님이 중년에 들어서자 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위궤양 증세로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일을 하다가 그만 피를 토하고 쓰러져 큰 대학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지요. 의사는 그의 병세가 심각한 지경이라는 진단과 함께 매일같이 위세척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식사라고는 1시간마다 알칼리성 분말과 반 스푼 정도의 크림과 우유 반 컵 정도였지요. 이런 치료는 몇 달 동안 지루하게 계속되었습니다. 그동안 이 형제님의 체중은 79킬로그램에서 40킬로그램까지 내려갔지요. 하지만 이런 혹독한 치료에도 그의 병세에는 호전된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황한 의사들은 좀 더 정밀한 검사를 한 후에 그에게 완치될 가망이 없다는 충격적인 선고를 내렸습니다. 이 형제는 눈앞에 캄캄했지요.
‘이제 내 앞에 죽음밖에 남아 있는 것이 없다니…….’
하지만 그는 곧 마음을 새롭게 다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진정으로 원하던 일을 아낌없이 해보겠다는 다짐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던 중에 젊은 날 세계 일주를 해보고 싶었던 꿈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는 의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달라는 부탁을 남기고 여행을 시작하였지요.
여행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여태까지 복용했던 약이나 위세척의 횟수를 차츰 줄이고 먹고 싶었던 여러 가지 음식들을 먹어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죽음을 초월한 그에게 장애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지요. 마음껏 스스로의 자유를 즐기고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소망하던 낯선 세계로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사업상의 문제들이 부질없는 걱정거리였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더욱 더 즐거운 여행을 할 수 있었지요.
세계 일주 여행이 끝났을 때 그는 죽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궤양은 씻은 듯 사라졌고 오히려 체중이 50킬로그램 정도 늘어난 건강한 몸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이라는 현재에서 보다 더 나은 생활을 위해 노력을 했고, 그 결과 죽음을 이겨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내게 다가온 고통과 시련에 그냥 주저앉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오늘은 연중 시기의 첫 날입니다. 이 연중 시기의 첫 날,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그 말은 언제 하라는 것일까요? 바로 지금이라는 현재에 당장 행하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내가 가지고 있는 고통과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이기에, 그리고 지금의 상황에서 더 나은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이기에 지금 당장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당장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려 봅시다. 주님께서는 안일한 마음을 가지고 대충 대충 살아가는 우리들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최선을 다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을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말고, 지금 최선을 다해 살아보세요.
길을 얻었는가?
-박기호 신부-
예수님을 만났다 함은 길을 만난 것입니다. 참된 행복의 길, 평화로운 인생길,
조화로운 삶의 길입니다. 내 앞에 길이 있음은 내가 여기 말고 다른 곳으로
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찾아야 할 삶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은 내게
생명을 주시고 손을 떼신 것이 아니라 매순간 삶을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외치기만 하지 않고 친히 그 영접의 길로 인도하시고자 우리를
부릅니다. 어부는 고기를 잡고 농부는 곡식을 거둡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필요한 물자를 얻으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물을 들고 바다로 가고 소를 몰고
밭으로 가고 승용차를 몰고 회사로 갑니다. 한결같이 피곤하지만 가족의 행복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출정입니다. 그러나 지고의 행복이란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럴 필요가 없어집니다. 예수, 그분께서 행복의 모든 과정을
생략하시고 직접 하느님 나라로 인도하시겠다고 초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자는 자신에게 행복의 도구였던 어선도 그물도 버렸는지
챙겼는지 무상해집니다. 그분을 따라나서는 것만이 중요할 뿐. 그럼에도 즉시
따라나서지 못한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가까운 행복을 두고 왜 아직도 먼 길을
돌아가야 할까요? 움직이길 싫어하면서 건강을 위한 운동은 따로 하고
몸에 좋은 약과 웰빙 식품을 찾습니다. 버리고 떠날 수는 없을까요? 우리
‘산 위의 마을’에서는 힘들여 노동하면서 소박하지만 좋은 음식을 먹고 삽니다.
순희 누님의 회갑 잔치
-박영대-
지금까지 ‘복음이 뭐냐?’고 물었을 때 선뜻 대답하는 신자는 거의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하는 대답도 예수님의 모범 답안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이 기쁜 소식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신자들이 이처럼 예수께서 선포한 복음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참 이상한 일이다.
예수님의 복음을 안다손 치더라도 나는 예수님의 복음,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정말로 믿는가? 그걸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정도로 기쁘게 받아들이는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던 제자들이 한 것처럼 재산과 가족마저 팽개칠 정도로? 쉽게 ‘그렇다’라고 대답할 수 없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을 흉내라도 내며 살려는 건 주변에 하느님 나라를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던지는 스승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한 분은 지난해 회갑을 맞는 박순희 아녜스 누님이다. 스스로 노동운동과 결혼했다고 할 정도로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시작한 뒤로 평생 한눈팔지 않고 노동자로서 사회운동가로서 온 삶을 바치신 분이다. 순희 누님의 회갑 잔치에 가서 놀란 건 단지 축하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다. 전국 곳곳에서 정말 다양한 나이와 신분의 사람들이 모여서 놀랐다. 하나같이 밝고 행복한 축하 손님의 얼굴을 통해 순희 누님의 인생 성적표를 보는 것 같아 나도 괜히 우쭐하고 기뻤다. 이게 하느님 나라 잔치의 기쁨이 아닐까 싶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쉽게 믿지 못하는 건 내게 이 같은 기쁨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스도 가르침의 시작 - 회개
-서경돈 신부-
구원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하느님의 대변자가 가장 많 이 외친 주제는 무엇이겠는가? 하느님의 백성이 예언자들 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주제는 무엇이겠는가? 예수께서 공 생활을 시작하시며 세상을 향해 맨 처음 외치신 첫 일성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하고 말씀하신다. 인류가 하느님께 죄를 지은 이래 끊임없이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회개"이다. 회개라는 주제는 너무 많이,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할 정도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만큼 회개를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회개가 무엇이기에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회개는 삶의 중심, 생활의 기준 문제이다. 인간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데 있어 그 중심과 기준을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둔다. 그래서 오해하고, 미워하고, 탓하고, 불평하고, 고통 받고, 거짓말하고, 싸우고, 하느님을 잊는다. 이래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 기쁜 소식으로 와 닿을 수 없다. 생각과 말과 행동의 중심과 기준을 내 자신이 아닌 하느님께 두는 것이 회개 하는 것이다.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인간인 우리에게 이것은 한시도 쉬운 문제가 아니다.
보라, 주님께서 분명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미사에까지 와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나의 사람관계, 어려운 일, 돈 문제 등을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미사시간에 왜 그렇게 얼굴들을 펴지 못하고 있는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주지 못하시는 것이겠는가? 회개가 필요한 모습들이다.
주님께 정신을 집중하고 마음을 활짝 열어 주님을 맛들이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 생각의 중심을 주님께 두어야 한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앞날의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생각하기 보다는 지금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데 열중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힘도, 용기도, 강복도 주신다. 믿음을 가지고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는 회개를 종말 때까지,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해야 할 것이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또 다시 첫 아침에>
-양승국신부-
한 달 반가량의 대림․성탄 시기가 어제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돌아보니 참으로 행복했던 나날들이었습니다. 마치도 잔잔한 은혜의 강가를 주님과 함께 거닐던 꿈결 같던 순간이었습니다. 아기 예수님과 함께 걸어온 은총의 오솔길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출발선상에 서 있습니다. 교회 전례력 안의 여러 전례 시기들 가운데 가장 평범하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연중시기를 시작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사순․부활 시기가 더욱 빛을 발합니다. 연중시기가 있기에 대림․성탄시기가 더욱 풍요롭습니다. 이처럼 연중시기는 다른 전례시기의 배경이자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한 시절을 매듭지을 때 마다, 그리고 새로운 절기를 맞아들일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은 엄청난 고통일 것입니다. 한번 만개한 꽃이 시들지 않고 계속해서 피어있는 것도 무척 어색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네 사랑에 이별이 있고,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 시절의 끝자락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인생에도 저무는 황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황혼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착해지기 때문입니다.
한 절기의 끝자락에 매달려 우여곡절의 지난 순간들을 뒤돌아보면 만감이 교차합니다.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나온 나날들은 주님의 자비 안에 행복했던 날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큰 부족함을 끝까지 참아주셨으니 말입니다.
감사하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숱한 죄와 과오, 부끄러움을 끝까지 인내하셨으니 말입니다.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우리에게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아직 이렇게 살아서 두 발로 서있으니 말입니다.
돌아보니 정녕 우리는 모두 지난 대림․성탄 시기 동안 하느님으로부터 충만한 은총을 받고 또 받았습니다.
결국 새롭게 맞이한 연중시기 첫 아침에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는 감사뿐입니다. 오늘은 정녕 은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묵은 것이 새것과 화해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절망이 희망과 다시금 손을 잡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고통이 축복으로 변화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온 시절에 대한 결론은 항상 감사입니다.
은총의 주님께서는 은혜와 축복으로 충만했던 우리의 지난날들을 봉헌물로 받으시는군요. 그리고 은혜롭게도 우리 앞에 또 다시 빈 들판 같은 희망만으로 가득 찬 새로운 연중시기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감사하면서, 찬미하면서, 다시 한 번 힘차게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의 과제는 삶이 눈물겹게 소중한 축복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부족했던 우리의 지난날들, 이제 하느님께서 모두 거두어가셨습니다. 우리는 또 다시 다시 새로운 연중시기란 과분한 은총 앞에 서있습니다. 정녕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의 아침입니다. 하느님 사랑의 가장 큰 표시인 은총의 아침입니다.
이 연중시기의 첫날,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처럼 기쁜 마음으로, 감개무량한 심정으로 다시 한 번 주님과 함께 힘찬 항해를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연중시기를 시작하며...
-오상선신부-
우리 구원의 시작을 알린
주님의 성탄시기를 마무리하고
연중시기를 시작한다.
성탄시기 동안 보고 느끼고 체험한
화려함과 감동을 뒤로 하고
이제 묵묵히
그 성탄의 신비를 살아나가야 할 때이다.
성탄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새롭게 일깨워 주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아니 나를
얼마나 사랑해 주시는 지를 강력하게 깨우쳐 주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의 사랑을 목말라하고 계심도 보여주셨다.
우리는 사람이 되어 오신 말씀,
겸손의 모습으로 오신 구세주를 통해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이 겸손의 길임을 배우기도 하였다.
이제 우리는
묵묵히
이 성탄의 신비를 살아나가야 한다.
연중시기를 시작하시면서
주님께서 들려주시는 일성(一聲)은
<때가 차서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이다.
성탄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臨)하심을 체험하였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중심에 놓고 사는 기쁨을 누리라는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오늘 하루의 삶 안에서 나와 함께 계시는 그 주님을 느껴보자.
그리고 그 주님과 더불어 함께 기쁨을 나누자꾸나.
두번째의 말씀은
<나를 따라 오너라!>이다.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시며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시고
제자들 또한 두말없이 묵묵히 그 초대에 응한다.
연중시기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거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듣고 그분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하루하루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그분의 음성을 제대로 알아듣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가자.
그냥 단순히 그분의 초대에 <예> 하고 순응하는 생활이
연중시기를 지내는 가장 아름다운 방법이리라.
마치 장거리 경주의 출발점에 서 있듯이,
길고 지루하게 펼쳐질 연중시기를 시작하면서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 안에서
가족 여러분 모두에게
영적 여정에 진보 있으시길
축원해 본다...
출발!
참 만남
-김광태-
마르코 복음 전체가 그렇지만, 특히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의 이야기는 간결하게 묘사되어 그 느낌이 아주 강렬합니다.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 인생 전체가 걸린 문제일 텐데, 예수님을 따른 동기나 내면의 갈등에 대한 어떠한 부연 설명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최면에 걸리는 것과 비슷한
어떤 강렬한 체험이 없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만남의 힘이고 사랑의 힘입니다. 제자들은 자기의 영혼 깊숙이 새겨진
그분을 만나고서 그 황홀함에 매료되어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진 것을 다 버리는 일이 구태여 고뇌에 찬 결단이 될 이유도
없었습니다. 배와 그물이 조금 전까지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소중한
생계수단이었지만, 이제는 그분을 따르는 일을 방해하는 거추장스런 짐으로
여겨질 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합니다. 그분의 눈을
바라보고 그분과 마음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분 매력에 온전히 빠지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집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다 해결해줄 것입니다.
믿음과 확신 -김찬선신부- 저는 성공과 실패의 차원에서
무엇을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것으로 전부가 아니고
무엇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시점에서 단층적으로 보면 그것이 전부이고 끝인 것 같지만
그것이 사실은 아직 알지 못하는 미래와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굳이 실패한 것이 있다면 젊은이들과 관련한 것들입니다.
제 조카들 중에 하나라도 수도자로 만들고 싶었는데
열 셋 중에 아직 한 놈도 수도자가 된 놈이 없습니다.
아직 여섯이 남아 있긴 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한 것 같습니다.
조카들이 제 기대를 배반한 것도 있지만
제가 조카들을 적극적으로 끌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이 생활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인 것 사실이지만
그만큼 쉽지 않고 실패율이 높기 때문이고,
제가 아는 한 조카들도 영 미덥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실패는 조카뿐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제가 흑심을 품었던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흑심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요놈 잘 키워서 수도자 만들어야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내색은 하지 않고 공을 들였는데
어느 날 ‘저 시집가요, 장가가요’하고 휭 떠나버립니다.
오늘 복음의 부르심 얘기를 묵상하면서 저를 반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다 알고 계셨을 텐데
그럼에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부르셨는데
저는 제 조카들을 인간적으로 따져보고 끌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고
하느님께서 뽑으시고
하느님께서 키우시고
하느님께서 이끄시고
하느님께서 힘주신다고 말로는 하면서
실제로는 그런 믿음으로 하느님께 조카들을 맡기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저에 비추어
고기를 낚는 어부들을 사람 낚는 어부들로 만들겠다는
예수님의 그 믿음과 확신은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제자들에 대한 믿음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제자들, 나중에 확인되었듯이 그리 믿을 만하지 못합니다.
제 조카들이나 제자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확신이란
고기 낚는 어부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될 것이라는 확신과 함께
또 그렇게 되게 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자기 확신입니다.
이 확신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당신의 헌신의지가 합해져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무엇에 대한 확신을 갖고자 한다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은총에 부응하는 우리의 헌신의지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믿음과 확신으로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을 대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아침입니다.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전삼용신부-
제가 보좌 신부를 할 때 순교복자회 본원에서 지, 청원, 수련자들에게 성경강의를 해 달라는 부탁이 들어왔습니다. 제가 신학생 때는 성경을 전공했기 때문에 로마에서 함께 공부하던 수녀님을 통해 부탁을 해 온 것입니다.
그러나 첫 해 보좌 생활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좀체 시간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 사제의 불타는 열정으로 해 드리겠다고 수락했고 결국 쉬는 날인 월요일 아침마다 강의를 해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한 이유는 월요일은 사제가 쉬는 날인데 그 때마다 이런 저런 사제들의 모임이 많았기에 아침 일찍 하지 않으면 모임에 참석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일까지의 피곤한 일정을 마치고 월요일은 아침미사 하고 한 숨 자는 것이 꿀맛이었는데 그 주간부터는 새벽미사가 끝나자마자 차를 몰고 서울 청파동으로 향해야 했습니다. 매 주 한 시간 반의 강의를 마치고 내려오면 간신히 동기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월요일 날도 쉬지 못하니 정말 피곤할 것 같았는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제관에서 오전 내내 잠을 자던 때보다 더 힘이 났습니다. 그래서 유학을 다시 나오기 전까지 거의 2년을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그들에게 강의를 하였습니다.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힘들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제게 힘을 주었습니다. 사실 신자들에게 강론시간에 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정말 깊은 부분과 자세한 부분들은 일일이 강론에서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시간도 부족할뿐더러 신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면 지루해 한다던가, 관심 없어 하는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강론은 쉽게 핵심적인 것을 삶에 비추어 해야 합니다. 그래도 어려워하거나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되겠다고 앉아있는 그 자매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은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보물을 발견한 것과도 같습니다. 쉬지 않고 한 시간 반을 이야기해도 열심히 받아 적고 질문도 하는 등 가르치는 사람을 즐겁게 해 주었습니다.
저는 사실 신자들에게 얻을 수 없는 만족을 그들을 통해 얻었었습니다. 많은 신자들도 힘을 주는 말씀을 많이 해 주셨지만, 그이들이 주는 만족은 그 이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서 더 ‘제자들’이라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시작하시며 첫 네 명의 직업이 어부였던 이들을 제자로 부르십니다.
저는 그 자매들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왜 복음 선포를 시작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부르셨는지 이해가 갑니다. 물론 당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아 그들을 온전히 당신의 후계자로 가르칠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가장 클 것입니다. 당신이 수난하시는 날까지 제자들은 완전하게 되지 못하여 모두 도망쳐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제자들은 예수님께 큰 위로가 되었음 또한 확실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던 것을 제자들에게만 따로 설명해 주시는가하면 제자들과만 함께 계실 때 특별한 것들을 더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들에게는 이렇게 비유로만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일일이 그 뜻을 풀이해 주셨다.” (마르 4,36)
“예수의 일행이 그 곳을 떠나 갈릴래아 지방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예수께서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마르 9,30-3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런 숨겨진 말씀들을 따로 해 주시며 만족하시고 더 깊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셔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을 하실 때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제자들만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어렵다고 모두 떠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아프셨지만 끝까지 당신께 남아있는 제자들을 보며 위로를 받으셨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도 부활하여 나타나신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열심히 배워 제자가 된다는 말은 곧 사랑한다는 말이고 스승에게 커다란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하게 ‘스승’이라 불려야 합당한 분이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모든 민족들을 가르치고 제자로 삼으라고 하십니다. 제자들이란 스승과의 더 깊은 가르침을 통해 끈끈한 통교와 사랑의 관계를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모습은 항상 우리가 따라야하는 모범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전파를 시작하는 동시에 제자들을 뽑아 함께 지내시며 가르치셨습니다. 그것도 12사도와 72제자들만을 뽑으셔서 그들에게 특별교육을 하셨습니다. 가르친다는 것, 또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은 스승과 제자 관계를 넘어서서 사랑의 관계입니다. 제자들은 교회를 의미하고 스승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 자녀가 가장 큰 재산이라면 우리 신앙인은 자신의 제자들이 가장 큰 재산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당신의 제자들이 더 늘어나기를 원하시고 당신의 제자들을 보며 기뻐하십니다. 이제 사람 낚는 어부를 부르는 몫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는 몫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차지하시는 분은 유일한 스승,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 공생활 따라잡기
-박상대 신부-
어제 ‘주님 세례 축일’로서 20여일 정도의 성탄시기가 마감되고 연중시기가 시작되었다. 연중시기는 구체적으로 오늘부터 재의 수요일 전까지와 성령강림 주일 다음 월요일부터 새 전례력의 시작인 대림 제1주일 직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그래서 연중시기는 편의상 연중시기(1)과 연중시기(2)로 구분된다. 연중시기에 사제는 녹색 제의와 영대를 착용하고 미사를 봉헌한다. 녹색은 다른 색에 비해 나서기를 꺼려하고 멀리 있는 느낌을 주며, 희망과 겸손, 인내와 차분함을 상징한다. 따라서 연중시기는 대림, 성탄, 사순, 부활시기 같은 하느님의 구원계획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역사 안에서 드러난 특수한 신비를 고려하지 않고 이를 포괄적으로 기념하며 지내는 시기이다. 한 마디로 연중시기는 예수님의 공생활 ‘따라잡기’의 시기인 것이다.
연중시기의 시작에 걸맞게 오늘 복음은 마르코가 보도하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 부분이다. 마르코는 마태오와 함께 세례자 요한의 투옥사건을 예수님 공생활 시작의 계기로 삼고 있다. 비록 강제로 중단된 것이지만 세례자 요한이 활동을 마치자 예수님의 공적 활동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다. 예수님의 복음선포는 오늘 복음에서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15절)는 절대절명의 언명(言明) 속에 간단명료하게 선포된다. 이 복음은 세상창조 때 이미 계획되고 약속된 것이며, 구약의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예고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기다림을 거쳐 예수님과 함께 성취의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은 아니지만 가까운 장래에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을 통하여 실현될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세상통치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하느님 스스로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과 함께 계심(임마누엘)을 뜻한다
도래한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세상이 취할 태도는 회개(悔改)와 믿음이다. 회개는 죄악의 세계에 빠진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은총의 세계로 복귀시키는 일련의 행위를 말한다. 회개는 여태껏 살아오던 삶의 방식과 방향을 바꾸고 전환하여 전적으로 하느님께 자신을 질서 지우는 것이다. 믿음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는 복음을 수락하고, 수락하였다는 표시를 보이는 행위이다. 따라서 믿음은 복음에 대한 응답이다. 즉, 기쁜 소식의 소리를 듣고 응답하는 것이다. 믿음의 구체적인 행동은 추종(追從)이다. 모든 믿음이 다 적극적인 추종일 수는 없지만, “나를 따라오너라.”는 주님의 부르심에 적극적인 추종이 필요하다. 성소(聖召)에 대한 적극적인 추종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것이다. 추종은 맹목적 복종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는 뚜렷한 대의명분을 가지고 있다. 오늘 연중시기를 시작하는 첫날에 주님께서 복음선포의 길로 우리 각자를 초대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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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쁜소식이신 주님을 믿고 받아드리는 제가 되게 도와주시고 채워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