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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14일 연중 제1주간 금요일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him,
(마르코 2,1-12)
“Child, your sins are forgiven.”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 저자는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그들의 잘못으로 하느님의 안식처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전하며 경고한다. 그러나 안식처에 대한 하느님의 약속은 유효하며, 모두가 그 안식처에 들어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들것으로 지붕을 뚫고 내려보낸 중풍 병자를 치유하시면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육체적 질병뿐 아니라, 환자가 안고 살았던 정신적 고통까지도 해방시켜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작년 바로 오늘 새벽 4시에 한 사제가 선종하였습니다. 돌아가시기 전 그분은 “꿈에서 돈 보스코 성인을 만났다.”라고 하시며 주변 사람들에게 강복을 주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이태석 신부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사제의 영혼을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인지, 아니면 젊고 아름다운 사제의 모습을 영원히 세상에 남겨 두시고 싶어서인지, 아프리카 수단에서 보낸 8년의 시간을 마감하시고 48세 나이로 그분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신부님께 물었습니다. “왜 하필이면 아프리카로 가야 했습니까?”라고. 그분이 남긴 유일한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서 신부님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를 맡아서!”라고 대답합니다. 아프리카에서 일생을 보내신 슈바이처 박사, 고아들을 보살피며 사시던 신부님과 수녀님의 모습, 평생을 희생하며 10남매를 키워 내신 홀어머니,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맡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향기라고 했습니다. 그분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마태 25,40 참조)이라는 한 구절 말씀을 붙잡고, 의사가 누릴 수 있는 세상의 유혹을 뿌리친 채, 아프리카에서 인술을 펼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를 들것에 들고 데려온 사람들, 그들이 그 환자의 친척인지 이웃인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지붕을 뚫고라도 그 고통 받는 사람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믿음과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아프리카 오지로 떠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적어도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을 도울 줄 아는 이런 작은 향기들은 삶 속에서 내고 살아야 합니다.
☆☆☆
예수님께서는 중풍 병자를 고쳐 주십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극성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앞을 막아 예수님께 갈 수 없게 되자 지붕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러고는 지붕 한쪽을 벗겨 그 구멍으로 환자를 내려 보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옥 구조는 우리와 다릅니다. 그곳은 ‘비 오는 계절’과 ‘비 없는 계절’로 확연히 구별됩니다. 따라서 비가 없는 철에는 나뭇가지나 거적 같은 것으로 대충 덮어 두었습니다. 그랬기에 환자를 내려 보낼 수 있었던 겁니다. 아무튼 그들의 극성은 기적으로 보답받습니다. ☆☆☆ 중풍은 무서운 병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수족을 못 쓰는 병입니다. 본인은 물론 가족들마저 고통으로 몰아넣습니다. 어쩌다 이러한 병이 나타나는지요? 뇌 세포가 죽어 감으로써 그렇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학 상식이 없던 옛날에는 참으로 기이한 병으로 여겼습니다. 펄펄하던 사람이 갑자기 말을 더듬고 움직이지 못하니 얼마나 놀라고 기가 찼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늘이 응징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누군가 율법을 어겼기에 벌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몇몇은 법을 따집니다. 그날이 안식일이었기에 치료 행위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죄가 되는가, 안 되는가?’ ‘법을 어긴 것인가, 아닌 것인가?’ 그들은 그것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딜 가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까지도 용서하십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믿음과 용기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고려했다면 그렇게 행동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능과 선하심을 믿었기에 지붕을 뚫고 내려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법을 생각하고 주변을 의식합니다. 결과는 따지는 행위였습니다. 주님의 일을 ‘따지고 계산하면’ 은총은 결코 함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그러한 생각을 알고 있었기에 오늘 복음에서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죄를 용서하니까 죄의 결과인 벌도 없어지고 병도 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곁에 있던 바리사이들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꾸짖듯 말씀하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고 말하는 것과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물론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쉽습니다. 결과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죄를 용서한다고 말했지만 용서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들것을 들고 가라는 명령은 즉시 결과가 나타납니다. 스승의 말씀에 중풍 병자는 들것을 가지고 일어섰습니다. 그분께 하느님의 능력이 있음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분께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도 있습니다. 중풍 병자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인 셈입니다.
마음의 벽을 허물게 하는 것 - 황지원 신부- 대세를 받고 돌아가신 분의 장례미사를 봉헌하다 보면 유가족 가운데 신자들은 많지 않지만, 주변에 믿음이 좋은 신자 분들이 많음을 알게 됩니다. 언제나 성당 일에 열심인 며느리나, 어려운 집을 방문하고 신앙을 전하는 구역반장과 오랜 시간 외짝교우로 힘겹게 신앙생활을 하던 분들, 이 모든 분의 기도가 굳게 닫혀 있던 마음의 벽을 허물게 하고 구원으로 이끌어 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비록 돌아가신 분의 삶은 하느님 보시기에 부족할지라도, 이처럼 가족과 이웃의 믿음과 신앙이 돌아가신 고인을 하느님께 이르는 구원의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들것 -김광태- 복음에서 치유 이야기는 대개 예수님께서 환자의 처지를 불쌍히 여기시거나
오늘도 몸을 가눌 수 없는 중풍 병자를 네 사람이 예수님께 인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벽에 가로막혀 그분께 다가설 수 없자, 지붕 위로 올라가 지붕을 벗기고 그분께 병자를 달아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중풍 병자의 믿음뿐 아니라 그를 예수님께 인도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병자의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십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총도 성인들의 믿음을 통해서, 또한 우리 가족과 주변의 희생과 믿음을 통해 누리는 선물임을 기억하고 우리도 이웃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고 희생하는 삶으로 그분께 다가설 수 있도록 합시다.
첫날밤부터 시작해서 며칠 동안 저는 고속도로에서 발생하는 차량의 소리와 울림으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곤히 잠들어도 오밤중에 차량의 소리와 울림이 커지는 순간 깜짝 놀라면서 잠에서 깨곤 했지요. 하지만 일주일이 지나자 저는 차의 소리와 울림을 거의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름이 지나자 단 한 번도 깨지 않고 밤새 단잠을 잘 수 있게 되었지요.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도저히 잠을 잘 수 없는 환경인 줄 알았는데, 단 며칠 만에 적응을 하다니요. 그러면서 최고의 피정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동창들과 이런 말도 했지요.
“정말로 최고의 피정의 집이었어.”
이렇게 최고의 피정의 집이라고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이 전환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부정적인 생각들을 자꾸 무시하면서 점점 부정적인 생각들을 지울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정적인 생각들을 무시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노력을 통해 분명히 무시할 수 있으며 대신 긍정적인 생각들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도 예수님 앞에 한 중풍병자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그 등장의 모습이 조금 신기합니다. 친구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나오기 위해 지붕을 뜯는 행동까지 한다는 것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로 인해 예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고 포기할 수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지붕에 까지 올라가면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친구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간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지 않았다고 뭐라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께서도 이 모습을 보고서 우리를 쫓아내는 것이 아닐까? 지붕을 뜯어냈다고 집주인이 신고하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부정적 생각들을 품지 않고, 그저 친구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만을 가지고 이 모든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 중풍병자는 자신이 직접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몰아내고 긍정적인 생각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위 사람들이 입을 모아 불평해도 우리 신앙인들만큼은 모든 상황에서 좋은 면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께서 약속하신 행복이 늘 우리를 따라다니게 됩니다.
환자의 강한 믿음이 예수님을 감동시켰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 나온 중풍병자의 치유 사건은 이례적입니다.
이번에는 병자 자신이 아니라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행위가 예수님을
감동시킵니다. 그 결과 수동적인 역할에만 머물고 있던 중풍병자가 치유의
은혜를 입습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가 꼭 필요한 이유입니다. 비록 누군가의 믿음이 약해도 교회 공동체 안에만 머물면 다른 이들의 믿음 덕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누군가에 매인다는 것은 대단히 불편한
일입니다.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 시간을 사용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결국 그런 불편함이 자기를 구원합니다. 내가 인기 있고 잘 나갈 때는 교회 공동체의 일들이 귀찮고 하찮게 여겨지겠지만, 그래도
힘 있을 때 열심히 봉사합시다. 그래야만 내가 약해졌을 때, 오늘 복음의
중풍병자처럼 다른 사람이 나를 들것에 태워 구원으로 인도하지 않겠습니까?
은총의 조건?
-김찬선신부-
至誠이면 感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 사람” -전삼용신부- 전에 제가 신학생 때 함께 공부했던 수녀님이 성지순례 단을 이끌고 다녀가셨습니다. 그 수녀님의 부탁으로 며칠 로마를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 분들은 프란치스코회 삼회 회원들로 대부분이 교사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몇 명 회원이 아니신 분들도 섞여 있었습니다. 스페인 광장 쪽으로 함께 걸어가고 있었는데 한 자매님이 저만 따로 옆으로 끌고 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 오기로 된 사람들이 못 와서 몇 명 원하는 신자들과 함께 왔는데 그 중에 마리아라는 선생님이 계셔요. 그 분은 20년 동안 냉담을 했답니다. 우리들이 이야기를 잘 해서 냉담을 풀고 고해를 받으라고 했어요. 그러나 스스로는 고해를 볼 자신이 없는 것 같아요. 신부님께서 혹시 기회를 봐서 그 자매에게 고해성사를 주실 수 없나요?” 저는 그러겠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명품거리를 구경하는 사이에 저는 그 자매에게 다가가 고해성사를 보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매는 고해성사를 보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어보였습니다. 저는 다른 자매들이 그 자매를 억지로 고해보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우선 둘이 앉아서 이야기라도 좀 하자고 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자매가 고해를 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싶지만 자신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고해를 하고 싶냐고 했더니 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주님께 다가가겠다는 약속을 받고 성사를 주었습니다. 그 자매는 떠나는 날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이 여행에서 자신이 제일 많은 것을 얻어간다고 하면서 계속 감사해 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믿음이었습니다. 주위의 열심한 자매들의 극성(?)에 못 이겨 고해를 보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적어도 새로운 신앙의 결심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네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 병자를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중풍 병자란 자신의 힘으로는 예수님께 다가와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영적인 병자를 의미합니다. 그를 들것에 들고 온 네 사람은 그리스도께만 데려가면 그를 치유해 주실 것을 확신하는 믿음 깊은 신앙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병자를 데려가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주위에 사람이 너무 많아 그를 들고 예수님께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지붕을 뜯어내고 병자를 들것과 함께 예수님 앞으로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당시 육체적 병도 죄로 인해 온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죄를 용서하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이시기에 율법학자들은 속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예수님은 그의 병을 치유해주심으로써 당신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 중풍 병자의 믿음을 보고 그를 용서해주시고 치유해 주신 것이 아니라 “그를 데려온 이들의 믿음”을 보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다시 일어설 힘이 없을 때는 주위 사람들의 믿음 때문에라도 주님은 그 사람을 구해주신다는 뜻입니다. 예전 본당 신부님께서 외국에서 사목을 하실 때도 마귀 들린 사람이 있다고 본당 신자들이 쫓아왔다고 합니다. 그 신부님은 자신이 없었지만 사람들에게 이끌려 마귀 들린 사람에게 가서 구마경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신부님을 비웃기만 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신자들의 힘을 빌리기로 하고 그 사람을 가운데 눕혀 놓은 다음에 빙 둘러서 묵주기도를 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자들은 시키는 대로 그 병자를 중앙에 놓고 둥글게 앉아서 묵주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엔 비웃기만 하던 그 병자는 조금씩 목소리도 약해지고 식은땀을 흘리다가 결국엔 아무 힘도 없이 그 사람을 떠나갔다고 합니다. 우리가 액션영화에서 보면 주인공 혼자 맨손으로 수십 명을 날려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남자 두 사람만 함께 악을 쓰고 달려들면 아무리 잘 싸우는 사람도 이길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다 쓰러지는 이유는 한명씩 덤비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를 들고 온 사람 수가 정확히 ‘네 명’이라고 나옵니다. 숫자 ‘4’는 동서남북을 가리키며 완전한 숫자이고 그 사람들이 혼자는 일어설 힘도 없는 사람을 지붕 위까지 끌고 올라가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았던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함께 협동을 하면 못할 일이 없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 회합에선 냉담 하는 이들을 위해 집중적으로 기도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 주님께 스스로 나아올 수 있는 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해 힘을 써주는 모습이 오늘 병자를 낫게 해 준 네 명과 같은 역할을 해 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혼자가 안 된다면 합심해서 힘없는 이들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인간이 지극 정성을 기울이면 하늘을 감동케 해
하늘이 마음을 바꿔 인간을 돕는다는 말이지요.
이 관점에서 본다면 오늘 복음의 사람들도 이런 지성을 보여
예수님의 치유를 얻어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정말 그런 것입니까?
예수님은 치유해 줄 마음이 없었는데
인간들의 정성이 마음을 바꾸게 한 것이겠습니까?
우리 인간은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뭔가 정성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그저께 어떤 자매님들을 만났습니다.
자녀들이 입시 중이었는데
하느님께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붙게 해달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참 아름다운 마음을 느낍니다.
은총을 받기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영성체 전 기도에서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다.”하고 기도하는 것과 같은 자세이지요.
그 자매님이 분명 이러한 마음과 자세로 그리 말씀하신 거겠지요.
그러나 다른 한 편,
그 자녀가 열심히 공부하고,
또 그분이 자녀를 위해 교회에 헌금도 많이 바치고
목욕재계하고 치성을 드렸다면 기도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은총을 받을 자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자격을 갖추기 전에는 은총을 주시지 않으려다가
자격을 갖춤으로써 하느님은 은총을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아무리 해도 자격을 갖출 수 없는 것이지만
설사 자격을 갖출 수 있다 하더라도
자격을 갖추면 은총을 베푸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은총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은총은 인간 공로의 대가, 보상이 아닙니다.
은총은 무상으로, 즉 거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과 공로가 마치 뇌물과 같이
아니 주시려든 하느님의 마음을 바꿔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노력을 많이 했건 아니 했건,
우리가 치성을 드렸건 아니 드렸건,
하느님 은총에 미흡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지성을 다 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노력과 지성과 상관없이
주시고자 하시면 주시리라는 것을 믿으며
다만 주시는 은총에 대한 황공한 마음과 감사드리는 마음 때문에
나의 정성을 다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도
인간의 정성이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치유 받게 되었다고 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은총의 조건은 지성이 아니라
은총에 대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의 잘못까지도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
행복한 이들... -상지종신부- 중풍병자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율사들의 항의에도 굴하지 않으셨던 예수님 덕분에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는 죄를 용서받기 이전에도 이미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손발이 되어준 네 사람의 친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없었다면... 자신의 허물을 벗기는커녕 예수님께 다가갈 수도 없었을 텐데. 네 사람의 친구는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간절한 소망이 자신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소박한 믿음이 소중하게 그리고 가치 있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네 사람의 친구는 소망이 이루어지기 전에도 믿음이 받아들여지기 전에도 이미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친구를 제 몸처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위해 무모함을 감수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행복한 사람,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셨습니다. 율사들의 치기어린 시선이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큰 아름다운 사랑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와 네 사람의 친구들... 집안을 가득 채운 사람들의 눈에는 분명 다섯 사람이었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은 단 한 사람으로 품에 안으셨습니다. 하나의 마음, 하나의 몸, 하나의 믿음, 하나의 소망을 가진 갈라질 수 없는 단 한 사람. 갈라진 이들이 하나되는 하느님 나라가 이미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예수님께로 향하는 그들은 이미 하느님 나라에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하나인 다섯 사람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안의 하느님 나라를, 당신과의 참된 일치를 모든 이에게 선포하십니다. 치유를 통해서, 중풍병자의 새로운 삶을 통해서, 사람의 아들이 이땅에 온 이유를 통해서. 우리는 과연 행복한 사람들인지요...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 (1요한 5,4)
-경규봉 신부-
가나안 지역에 사는 주민들은 왕이 국민을 통치하는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주변의 나라와는 달리 왕이 없는 부족사회였다. 이스라엘의 왕은 오직 한 분이신 야훼 하느님이셨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그들의 왕이셨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필리스티아 사람들과의 전투에서 자주 패배하게 되자, 그 까닭이 자신들에게 왕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스라엘도 필리스티아(블레셋) 사람들처럼 왕이 다스리는 국가체제를 갖춘다면 왕의 인도 하에 전투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더욱이 예언자 사무엘은 늙었고, 판관으로 내세운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않고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제 하느님께서 친히 왕으로 계시면서 예언자나 판관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인도하실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왕에게 의지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꾀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을 왕으로 모시기 싫어서 하느님을 배척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청한다.
이러한 백성들의 생각을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사무엘을 통하여 왕정제도가 지닌 여러 가지 모순점을 백성에게 설명하며, 왕을 내세웠을 때 그들이 당할 여러 가지 고초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신다. 그렇지만 이미 왕을 모시겠다는 그들의 완고한 생각은 변함이 없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 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 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1사무 8,19-20) 하고 완고한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의 완고한 고집대로 해주도록 하느님께서 허락하신다.
우상숭배란 꼭 어떤 신상(神像)이나 고목나무 앞에서 절을 하고, 소원을 비는 것만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 의지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내 삶에서 하느님을 제외시키고, 하느님 대신 다른 어떤 사람이나, 재물, 권력 등을 그 자리에 두고자 하는 것, 그것이 우상숭배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을 이용하려는 것이 우상숭배이다. 하느님 앞에 서있기보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고, 다른 사람처럼 행하며 살고자 하는 사람,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보다 자신의 고집을 내세우는 사람, 그들이 우상숭배자이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도 우상숭배에 빠져있는지 모른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하느님을 제외시키고, 하느님의 자리를 스스로가 차지하고,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따르기보다 설사 원수일지라도 그 원수처럼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 그러한 마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우리 자신이 곧 우상숭배자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우리를 너무 잘 아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바라보시며, 우리의 잘못을 다 아시면서도 우리의 뜻을 받아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자식을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옛말처럼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우리에게 져주시면서 우리를 받아주신다. “그들의 말대로 왕을 세워 주어라” 하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의 뜻을 받아주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의 눈물> -양승국신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마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마음, 가장 눈물겹도록 고마운 마음이 있다면 "측은지심"일 것입니다. 또 다른 표현을 쓰자면 "연민"일 것입니다. 연민은 가련한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불쌍한 우리 처지 때문에 가슴아파하시고 눈물 흘리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측은지심이자 연민의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연민 빼면 시체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측은지심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수 십 년 동안 한 인간이 겪어온 처절한 고통 앞에 같이 눈물 흘릴 줄 아는 진정한 인간이었습니다. 다들 제 한 몸 챙기기에 바쁜 세상살이 가운데서도 이웃이 흘리는 피눈물을 외면하지 않았던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을 예수님께서는 아주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들의 간절한 염원을 들어주십니다. 사실 예수님 앞에 전개된 상황은 참으로 민망한 상황이었습니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몰상식하고 예의에 어긋난 행동으로 입을 다물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줄서서 기다리다가는 날 다 세겠구나. 이러고 있다가는 말짱 황이겠구나"는 생각과 함께 상황을 정확히 분석한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편법을 사용하기로 작당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새치기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그 새치기는 어느 정도의 새치기가 아니라 해도 해도 너무한 새치기, 상상을 초월한 새치기였습니다. 집 안 거실에서 한참 말씀을 나누시던 예수님의 머리 위에서 갑자기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붕이 열리더니 강한 햇살이 내리쏟아졌습니다. 그뿐이었겠습니까? 지붕을 벗겨내면서 켜켜이 쌓여있던 묵은 먼지와 함께 이런 저런 잡동사니들이 예수님의 머리위로 사정없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이윽고 들것에 매달린 중풍병자가 천천히 예수님 앞으로 내려졌습니다. 정말 상상을 초월한 행동, 해도 해도 너무한 몰상식한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어느 정도야지. 이거 너무한 것 아냐?"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환자 친구들의 마음, 인간미, 이웃의 고통을 그냥 못 지나치는 연민의 마음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리고 친구들의 따뜻한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 치유활동의 동기를 제공합니다. 기도드릴 때마다 절실히 느끼는 체험이 한가지 있습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기도, 내 가족만을 위한 기도, 내 지극히 이기적인 바램의 성취만을 위한 기도는 성공률이 극히 저조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이웃을 위한 기도, 특히 고통받는 이웃의 치유, 억압된 이웃의 해방을 위한 기도는 90% 이상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웃의 부족함, 이웃의 뒷모습, 이웃의 불치병에 함께 가슴아파하고 이웃의 고통에 연민의 마음으로 다가서는 오늘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주신 더 큰 마음 - 조정희 수녀- 학교 곳곳을 청소하는 아주머니의 남편이 공사장에서 일하다 떨어져 중환자실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 아주머니의 두 딸이 아버지의 볼에 손을 부비며 “아빠, 어제 아빠가 우릴 알아봐 줘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전엔 우리를 몰라보시는 것 같아 슬펐는데 어제저녁엔 우리 식구들이 모두 행복했어요.”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찡해 왔다. 아주머니께서도 “당신이 나으면 인제 업어줄 거야, 더 잘해 줄 거야.” 하며 팔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나는 그 가족이 평소 가난함 속에서도 얼마나 서로 위하며 사랑 표현을 잘하고 살아왔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어떤 형제님께서 중요한 회의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던 도중 난데없는 괴한의 습격을 당했습니다. 얼마나 심하게 얻어맞고 칼에 찔렸던지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지요. 간신히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집까지 업혀 온 그는 자기 형에게 사정했습니다.
사랑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세요.
고통의 회상이 감사의 삶이다 -박기호 신부- 건강했는데 암이라 진단받고 치료받는 이웃들이 한둘이 아닐 것입니다. 지금 간절한 마음으로 -박영대- 나는 기적을 그다지 믿지 않는다. 아마 내 눈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걸 본 적도, 기적에 매달려야 할 만큼 절박했던 적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내 기억에 내가 가장 절실하게 기도했던 건 큰딸 혜진이가 급성후두염에 걸렸을 때다. 그러나 그때도 기적에 기대야 할 만큼 위급하지 않았다. “그때에 사람들이 어떤 중풍병자를 그분께 데리고 왔다.” -양승국신부- <약자를 배려하는 공동체> 오랜 세월 치매로 고생하시는 아버님을 지극정성으로 봉양하기로 소문난 한 효자가 한적한 바닷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루 온 종일 맥없이 자리에 누워만 계시는 아버님을 위해 뭔가 의미 있는 일이 없겠는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최근 한 가지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즉각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버님은 젊은 시절 어부셨기에 바다를 무척이나 좋아하셨다는 것이 기억났습니다. 태풍이 불어 고깃배가 뜨지 못하는 날조차 방파제로 나가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계셨던 모습도 기억났습니다. 아들은 우선 아버지와 바다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담을 허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담이 있던 자리에 예쁜 꽃들을 줄줄이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아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님은 담 허무는 공사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셨습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힘겹게 마루로 나오셨습니다. 고개를 바다로 향했습니다. 굳게 잠겨 침울했던 그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맴돌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가던 마을 사람들도 마루로 나와 앉은 아버님을 향해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고, 아버님께서는 예전보다 훨씬 행복해보였습니다. 노부모님을 모시고 계시는 자녀분들 계실 텐데, 특히 거동이 불편하신 부모님들, 병고에 시달리고 계신 부모님들 모시느라 정말 고생들이 많으시겠지요. 그러나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노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앙인에 앞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가장 우선적이고 기본적인 도리입니다. 우리 부모님들, 그간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과 기쁨을 안겨주셨습니까? 그분들이 우리에게 주셨던 그 행복을 이제는 우리가 돌려드려야 할 때입니다. 몰론 점점 연로해져만 가시는 부모님들 바라보는 시선이 꼭 곱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한때 그렇게 위풍당당하셨던 분, 태산 같은 분이셨는데, 이제 완전히 노쇠해지시고, 저리 쫀쫀해지시고, 저리 구차스러워지시고, 마음으로부터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은근히 무시하는 마음도 생깁니다. 미워하는 마음도 자리 잡습니다. 그러나 꼭 기억하십시오. 노화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약화는 어쩔 수 없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어쩔 수 없는 우리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세월 앞에 장사 없습니다. 육체는 시들고 영혼도 시듭니다. 그저 부족하고 안쓰러운 한 존재, 측은한 한 인간으로 우리 앞에 서 계십니다. 그래서 이제 건강할뿐더러, 인생의 황금기를 구사하고 있는 자녀들께서는 부모님과의 관계 설정을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는 위치가 바뀐 것입니다. 연로하신 부모님들, 이제는 우리가 보호해드리고, 동반해드리고, 기도해드리고, 감싸 안아드려야 할 연약하고 측은한 존재인 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안에서 더 많은 사랑과 위로가 필요한 약자인 것입니다. 노화와 더불어 즉시 다가오는 감정이 서운함입니다. 허전함입니다. 무대 뒤로 물러나야 하는데서 오는 쓸쓸함입니다. 이런 부모님들에게 자녀들은 위로자요, 치유자, 동반자요 격려자로 존재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 가족들의 지극정성을 눈여겨보십니다. 그들이 오늘 보여준 행동은 상식을 크게 벗어난 행동이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해도 해도 너무한 행동이었습니다. 아무리 상황이 다급하다 하더라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켰어야지요. 아무리 절박하다 하더라도 이게 뭡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갑자기 지붕이 열리고, 열린 지붕 사이로 끈에 매달린 중풍병자가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의 병자를 향한 각별한 애정을 높이 평가하십니다. 그들은 중풍병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간병해왔습니다.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끝까지 견뎌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족들의 그 적극성, 능동성 앞에 탄복하십니다. 오늘날 우리의 가정이 가장 약한 사람을 가장 많이 배려하길 바랍니다. 구성원 가운데 가장 약자를 공동체의 중심이 놓길 바랍니다. 끝까지 약한 사람을 포기하지 말길 바랍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풍병자의 행복 -오상선신부- 중풍병자 치유기사는
이런 일은 일찍이 본적이 없다. 용서하는 마음 -이철구신부-
용서하는 사람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기란 그러자 그는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유 루시아 수녀 -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중풍환자를 고치시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방법에 대해 묵상하고 싶습니다. 세상에는 훌륭한 과학자·의사들이 많은 환자를 고쳤습니다. 전기를 발명한 뉴턴, 방사선을 발명한 뢴트겐 박사 그리고 노벨 과학상을 받은 과학자들도 많습니다. 많은 과학자와 의사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병자들이 나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치유하시는 것은 다릅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환자의 의식을 바꾸어서 온전한 인간으로 만듭니다. -박광훈신부- 새삼스런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성당 왜 다니시는 거죠? 그래서 하느님은 이 세상에 없다고 푸념섞인 말들을 서슴치 않고 내뱉게 됩니다. 가끔은 나한테 장애물이라고 생각한 것이
과거의 죄는 극복되는 것 - 이중섭 신부- 과거의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입니다.
연중 제1주간 금요일 - 이차룡 신부 오늘 복음에서 중풍병자기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병자의 믿음, 다시 말해 말씀의 능력을 믿은 중풍병자의 믿음과 치유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의 합작품이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은혜를 받은 사람은 복음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만이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네 사람은 누구입니까? 병들고 어려움에 처한 우리 이웃을 예수님께 데려갈 네 사람의 역할을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죄는 육신의 마비를 가져옵니다. 스트레스, 과로와 불안과 두려움, 용서하지 못한 마음, 원한에 쌓여 살아갈 때 어느 날인가 우리는 쓰러지게 됩니다. 용서하라, 그러면 용서받으리라. 용서받은 사람은 알 것입니다. 용서하는 사람도 알 것입니다. 늘 반복되는 잘못을 악습이라고 합니다. 고치려고 노력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악습이 있습니다. 고해성사를 볼 때 단골메뉴에 들어가는 그것을 악습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고칠 수 있는 비법은 고해성사를 끊임없이 보는 것뿐입니다. 수없이 많이 고해성사를 받을 때 언젠가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죄에 대한 염증, 혐오감에 떨어지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주님의 이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 축복의 말씀인가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해야 하고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네 사람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입니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임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요 직무유기를 하는 것이며, 그것은 복음적인 삶을 산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감사합니다. 오늘 제가 여기 주님 앞에 있을 수 있는 것은 누군가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신 그 믿음 덕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제가 누군가를 위해 기도할 때 저의 믿음을 보시고 들어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늘 바로 이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용기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 주님의 용서는 치유로 이어집니다' - 홍성만신부- 네 사람이 어떤 중풍 병자를 들고 옵니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데려갈 수 없게 되자, 예수님이 계신 바로 위의 지붕을 벗겨 구멍을 내고, 중풍 병자를 들것에 눕힌 채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려 보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이에 율법 학자들이 "이자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을 모독하는 군. 하느님 한분 외에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하며 중얼거립니다. 그것을 알아채시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중풍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하고 말하는 것과'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하고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어느 쪽이 더 쉬우냐? 이제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원한을 가지고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해주겠다." 그리고 나서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중풍 병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별떡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들고 나갑니다. 벌떡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나가는 치유받은 이 사람, 그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네 사람에 의해 들려 왔던 준풍 병자였습니다. 이 환자에게 투여된 약은 오직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중풍 병자가 치유된 근원적인 이유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용서'입니다. 죄의 용서는 곧바로 건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를 용서한느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주님만의 고유한 권한입니다. 믿는 우리들, 주님의 용서에 자주 '나'의 마음을 보여 드립시다. 잦은 고해성사로 영혼과 육체에 건강을 회복하여 주어진 인생길을 힘차게 걸어갑시다. 오늘도 또 내일도 말입니다.
-박상대신부- 예수께서 나병환자에게 외적인 깨끗함뿐 아니라 내적인 깨끗함을 베풀어주신 후 며칠이 지나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오셨다. 가파르나움의 집이라 함은 시몬 베드로의 집을 말한다.(마르 1,29) 아마도 예수께서 갈릴래아 지방의 복음선포를 위해 시몬의 집을 거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예수께서 시몬의 집에 다시 오셨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고, 삽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문 앞까지 가득 찼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하느님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셨다. 마침 중풍병자 하나를 네 사람이 들고 왔으나 들어갈 수가 없음을 알고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벗겨내고 구멍을 내어 예수께서 계신 곳으로 병자를 내려보냈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더욱더 기막힌 것은 그렇게 내려보낸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 병을 고쳐주시는 대신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5절)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는 복음서가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집약하여 보도하는 책으로 착각하면 큰일이다. 기적은 분명 놀라운 일이고 늘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는 기적이 대수가 아니다. 마귀 들린 자, 나병환자, 오늘의 중풍병자 등 어떤 모양의 물리적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치유하는 일은 예수께 있어서 그리 큰 일이 아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일들을 도구로 더 큰 일을 생각하고 계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는 믿음과 용서이다. 기적을 베푸는 자는 예수님이시나 그 기적을 유발시키는 힘은 기적을 베푸는 자에 대한 믿음이다. 중풍병자를 들것에 들고 지붕까지 벗기면서 예수께 내려보낸 네 사람은 적어도 믿음에 있어서는 같은 마음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병자를 고쳐주실 수 있고, 또 고쳐주실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왔으며, 들것에 실려 있는 병자도 같은 믿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믿음이 뜻밖에도 ’죄의 용서’를 만나게 된 것이다. 죄(罪) 때문에 병(病)이 온다는 생각은 이미 구약시대에 널리 퍼져 있던 사실이다. 이는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생각이다. 오늘날 누가 아프거나 병에 걸렸는데 병원에 가지 않고 고해소를 찾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현대의 우리는 질병의 원인을 도덕적인 잘못에서 찾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의 사람들은 달랐다. 굳이 죄 때문에 병이 드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병의 원인을 죄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구약의 율법이 온갖 악성 피부병을 ’부정(不淨)’하게 본 것은 사실이다.(레위 13-14장) 레위기가 깨끗하지 못한 것을 죄라고 단정하지는 않았지만, 부정(不淨)함을 죄의 맥락에서 보았던 것이다. 욥기를 보아도 그렇다. 욥이 악마의 시험으로 죽을 피부병에 걸려서 갖은 고통을 받다가 결국은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지 않는가?(욥 9,2.12.20) 예수께서도 38년이나 앓아 누워있었던 중풍병자를 고쳐주시고는 "자, 지금은 네 병이 말끔히 나았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더욱 흉한 일이 너에게 생길지도 모른다"(요한 5,14) 하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죄와 병은 결과론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관념론적으로 한데 묶여 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예수께서 중풍병자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고 먼저 ’죄의 사함’을 베푸신 것이다. 예수께는 이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본 율법학자들의 머릿속에 예수의 발언이 하느님을 모독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당연한 일이다. 땅위에서 죄를 사할 수 있는 권한은 오직 하느님에게만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바로 죄사함의 권한을 가지신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은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병자의 행동에 의해 증명된다.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병자의 행동은 병이 다 나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10절)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율법학자들은 예수께 이러한 권한이 있다는 것을 한편으로는 의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가 죄를 용서받았다는 데는 관심이 없고, 중풍이 사라지고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기적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 우리도 속으로 죄를 용서받기 위해 고백성사를 배령하기보다 불편한 몸이 좀 나아지기를 바라거나 어려운 경제적 형편이 좀 나아지기만을 바라고 있지는 않는가?
중풍병자(마르2,1-12) -유 광수신부- 며칠 뒤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가파르나움으로 들어가셨다. 그분께서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퍼지자,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셨다. 그 때에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그분께 데리고 왔다. 오늘 복음을 보면 다섯 부류의 사람을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람들에게 복음 말씀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 둘째는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 셋째는 네 사람에 의해 예수님께 온 중풍병자, 넷째는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네 사람이다. 다섯째는 예수님을 말씀을 듣기보다는 듣고 판단하고 있는 율법학자의 모습이다. 나는 이 다섯 부류의 모습에서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내가 이 다섯 부류 중에 어느 한 부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런 인생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중풍병자면 중풍병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복음을 전하고 있으면 복음을 전하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는 네 사람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다면 늘 남을 위해 봉사하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고 율법학자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트집이나 잡고 판단하고 있으면 늘 남을 판단하고 있는 삶을 살아가는 인생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과연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어떤 사명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인가? 그런 일을 하라고 불리움을 받은 사람인가?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인가? 그렇다면 복음을 듣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당신 주위에 모여드는가? 만일 하느님으로부터 그런 사명을 갖고 있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중풍병자일지도 모른다. 또 당신은 예수님 주위에 모여든 사람 중에 한 사람인가? 예수님 주위에서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당신은 많은 은혜를 받고 중풍병자가 중풍병에서 치유되었듯이 당신이 앓고 있는 병에서 치유받고 당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예수님 주위에 모여 있었고 매 주일 복음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기쁨이 없고 받은 은혜도 없다면 당신의 신앙 생활에는 반드시 문제가 있다. 즉 복음을 듣고 복음에 의한 복음을 위한 신앙생활이 아니라 병이나 치유받으려는 기복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중풍병자의 모습일 것이다. 신앙 생활을 하고 성당에 다니고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하더라도 본인 자신이 아무런 느낌도 없고 기쁨도 없고 받은 은혜도 없이 무감각하게 말하고 행동하고 듣고 있다면 그것이 중풍병자 아니고 무엇인가? 중풍병자의 특징은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다. 누워있으면 있는 대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지 않으면 혼자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는 죽은 이의 모습이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죽은 이의 모습이요, 죽으면 어떤 모습인가를 보여주는 시체의 모습이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네 사람의 모습이 당신의 모습인가? 그렇다면 당신은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이요, 정말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고 봉사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고쳐주신 것은 중풍병자를 보시고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중풍병자를 당신께 데리고 온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 주셨다. 그렇다. 우리가 예수님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고 해야하는 일은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이요, 사람을 살리는 봉사이다. 나의 믿음은 나만을 위한 믿음이어서는 안 된다. 나도 구원받고 다른 사람들도 살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믿음이란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다 살려줄 수 있고 고쳐줄 수 있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어야 한다. 나를 살리고 다른 이를 살리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 데려가기만 하면 살릴 수 있다는 믿음뿐만 아니라 중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기 위해서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해야하고 희생을 치루워야 하고 중단하지 말아야 한다. 보라. 오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가를. 그들이 중풍병자를 설득해서 들것에 들고 예수님께 데려 오는 것도 힘든 일이고 또 예수님께 데려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뚫는 일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의 지붕을 벗기고 구명을 내어 "중풍병자가 누워 있는 들 것을 달아 내려 보냈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 이 네 사람이 겪어야했던 어려움들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었으며 힘든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고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갖고 노력하였고 인내하였으며 희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드디어 중풍병자가 치유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들이 사도이다. 하느님의 사람이요, 신앙인의 삶이고 자세이다. 네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오기까지는 하였지만 그 다음은 중풍병자에게 달렸다. 항상 결정적인 치유는 본인 자신에게 달려있다. 다른 이들은 도와줄 수는 있어도 대신할 수는 없다. 목마른 이를 우물가에 데려갈 수는 있어도 물을 대신 마셔 줄 수가 없듯이 네 사람의 역할과 중풍병자의 몫과는 확연히 구분된다.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 온 것까지는 네 사람이 할 수 있었지만 중풍병자가 치유받고 못받는 것은 전적으로 중풍병자에게 달려 있다. 만일 중풍병자가 네 사람이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려고 하더라도 그가 원치 않았으면 강제로 데려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 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라고 하셨을 때 중풍병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들것에서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풍병자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일어나 곧바로 들것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오랫동안 중풍병을 앓고 있던 사람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일어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그 동안 중풍병자가 치유받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노력했는데도 고치지 못했는데 낮선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려고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어떤 특별한 진찰도 하지 않고 다만 보시고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는 한 마디 말씀만을 듣고 일어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믿음이다. 또 그것이 말씀의 능력이다. 결국 중풍병자가 치유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려가면 치유될 수 있을 것이라는 네 사람의 믿음과 예수님의 말씀만을 듣고 일어나 들 것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간 중풍병자의 믿음과 치유의 능력을 갖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의 합작품이다. 그곳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결국 은혜를 받은 사람은 믿음을 복음을 전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믿은 사람만이 은혜를 받았다. 그럼 중풍병자가 중풍병을 앓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 그의 죄였다. 죄란 무엇인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요,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고정관념으로 판단해버리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로 말미암아 중풍병을 앓고 들것에 누워지내는 병자들이 많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해야하고 중풍병자들을 예수님께 데려오는 일을 해야한다. 그것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인이다. 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의무를 실행하지 않는 것이며 그것은 복음적인 삶을 산다고 할 수 없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을 사도라고 한다. -알베리오네 신부님의 말씀에서-
오늘 복음에서 혼자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병자를 예수님 앞에 달아 내리는 네 사람의 모습을 본다.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그리고 그 병자에 대한 사랑과 소망이 예수님을 감동하게 하고, 그래서 죄인이지만 사랑받는 기쁨과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아닌가? 반면에 율법학자는 믿음이 없었기에 예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에 의문을 품지 않았는가?
그는 하느님처럼 넓은 마음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기 내면의 더 큰 자기의 모습을 믿지 못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예수님께서 비록 몸은 마비되어 있어도 당신을 믿고 찾는 병자에게는 당신의 사랑과 자유와 치유의 은총을 베푸시고, 몸은 건강하지만 용서하는 사랑을 믿지 못하는 율법학자에게는 눈을 뜨고 믿도록 초대하시는 것이 아닌가?
나도 작은 자존심에 매여 상대방을 용서하지 못할 때가 있다. 자존심보다 더 귀중한 사랑의 마음으로 살도록 부르시는 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고 싶다.
“형, 난 이제 살아날 가망이 없어. 차라리 날 죽게 놔두는 것이 이 엄청난 고통을 덜어주는 거야…….”
그는 절박하게 자신을 안락사 시켜달라고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피를 나눈 형으로서는 차마 그런 짓을 할 수가 없었지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머뭇거리는 형에게 동생은 계속해서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습니다.
마침내 형이 결심을 굳혔습니다. 동생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 것이었어요. 그의 손에 서슬 퍼런 일본도가 쥐어졌고, 그는 온 힘을 칼끝에 모아 힘껏 동생의 목을 향해 내리쳤습니다. 그러나…….
“안 된다. 얘야!”
바로 그 순간 곁에 있던 그의 어머니가 동생의 몸을 덮었고, 결국 그는 어머니의 애절한 부탁 때문에 아우의 소원을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그는 의사들의 정성어린 치료와 어머니의 간호 덕분에 점차 회복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일본 근대화를 앞당긴 명치유신의 주역으로, 일본 외무대신을 지내기도 한 이노우에 가오루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두 가지 모습이 나오지요. 형님의 사랑은 포기하는 사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사랑은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 지키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랑을 간직해야 할까요? 분명히 형님도 동생을 사랑했었지요. 그러나 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동생을 안락사 시켰다면 어떠했을까요? 바로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 지키는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하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 나옵니다. 문 앞까지 빈자리가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은 상태이기에 자신의 친구인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갈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그들은 나름대로 머리를 씁니다.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중풍 병자가 누워 있는 들것을 달아 내려 보낸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포기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당시의 의료기술로는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중풍이라는 병으로 꼼짝달싹 하지 못하는 친구가 예수님을 통해서 과연 낫게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이러한 행동을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친구를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사랑, 즉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남들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사랑은 과연 어떤 사랑일까요? 예수님을 감동시킬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사랑을 실천하고 있나요?
내 몸에도 어떤 암이 붙어 자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규칙적으로 식사하고
운동하고 적절한 수면과 휴식을 취하고 스트레스를 피해야 하고 즐겁고
긍정적 태도로 살아야 하고…. 그렇지만 산다는 게 어디 뜻대로 되던가요?
그럭저럭 사는 게지요. 그렇지만 정작 나와 가족에게 닥치게 되면 비로소
생활습관을 후회하면서 생명의 고비 앞에 긴장합니다. 다행스럽게 치료되어
퇴원하게 된다면 이제 용서받은 각성의 생이 시작될 것입니다. 인생의 지평을
바라보는 시야도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를 치유해주시며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용서와
치유는 예수님께서 하셨지만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는 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건강한 삶이란 지나간 고통의 기억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 노예살이를 잊어서는 아니 됨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와 헌신으로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봉헌이 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통의 상징인 들것을 결코 버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제 손으로 들고 제 발로 걸어가야만 합니다. 들것을 들고 간다 함은 이제 인생의
관조가 더욱 성숙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제 상처받은 이들의 친구가
되어주어야 하고 그분께 대한 믿음으로 참된 행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내가 최근 기적을 바란다. 착하디착한 두 여자 때문이다. 한 명은 후배이고 또 한 명은 선배다. 둘 다 암에 걸렸다. 선배는 이민을 떠난 상태라 만날 수도 없다. 행복한 삶을 살았다 할 수 없는 두 사람이 거짓말처럼 나아 오래오래 살면서 가끔은 내게 밝게 웃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가 내게 그 기적을 정말 간절하게 바라는지를 묻는다면 나는 머뭇거릴 것이다. ‘예, 그럼요. 간절하다마다요. 내 목숨을 바쳐도 좋아요.’ 이렇게 말할 수 없어서 두 사람에게 미안하다. 그만큼 두 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정말 미안하다.
기적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간절함이 있다. 지붕이 아니라 하늘에라도 구멍을 내겠다는 간절함이 있다. 기적이 일어나는 건 하느님도 어쩔 수 없는 그 간절함 때문일 것이다. 그 간절함은 사랑에서 비롯되기에 더없이 아름답고 숭고하다. 그래서 그로 말미암아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 또한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다.
우리 교회 안에서 치유를 대가로 돈을 주고받는 일이 있다고 한다. 놀랍고 마음 아프다. 그 상혼이 질리게 무섭다.
공관복음 세 곳에서 모두 다루고 있다.
마태오는 지붕까지 열어제치고 중풍환자를 예수앞에 내렸다는
이야기는 빼고 있지만,
세 복음서 모두
죄까지도 사해주시는 예수의 권능에 대한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하게 다가오는 내용은
중풍병자와 그의 절친한 동료 4명의 이야기이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이상적인 숫자가 몇명일까 생각해 볼 때가 있다.
기본적으로 수도생활 안에서 공동체라 한다면
3명이상을 이야기하고
보통은 전통적으로 4명은 적어도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 자신의 수도생활 체험 안에서 본다면
가능하면 5명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정상적인 구조 안에서는 4명이면 되겠지만
비상사태 등을 염두에 둔다면 5명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오늘 복음에 등장하듯이
한 구성원이 중풍에 걸렸다든가,
불가피하게 쉬어야만 하는 경우라든가를 생각한다면 필수적이다.
나는 오늘 중풍병자의 행복을 한번 생각해 본다.
그는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다른 구성원들에게 짐 아닌 짐이 됨을 늘 가슴아프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내가 빨리 죽는 것이 이들을 도와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삶의 의미가 없다고도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란 말인가?
그는 얼마전 까지만 해도 신바람나게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갑작스런 중풍으로 인해 더이상 살고 싶지 않은 깊은 낙심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오늘
중풍병자는 참으로 행복에 겨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삶이 참으로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체험하게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식구들이(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랑하는 이 못난 환자를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이 환자를 치유코자 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가상한 노력 덕분에
그는 예수를 만날 수 있었고
다시 성한 몸으로 걸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함께 살 때는
이런 모습, 저런 모습 때문에
맘에 안드는 것도 많았었는데...
이 형제들이 나를 그토록 사랑했었다니...
그들 덕분에 나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 덕분에 나는 다시 태어나게 되었으니
오, 형제들이여, 너무도 고맙구나, 정말 고맙구나...
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는구나...
가정공동체도 수도공동체도
적어도 5명은 되어야 한다.
우리네 가정이 핵가족화하면서
이렇게 서로 어렵고 힘들 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다른 구성원들이 힘써줌으로써
치유될 수 있는 가능성이 너무도 많이 박탈되었다.
식구가 적다 보니
그 중 누가 환자(영, 육)가 되어도
부축해줄 식구들이 없다는 것
이것이 오늘날 우리 가정 문제의 발단이 아닐까?
가끔
병든 시어머니를 수십년간 모시고 있는 며느리의 고백을 듣기도 한다.
남편이 있고 아이들이 있지만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힘이 들어보인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이 함께 부축한다면
그 할머니는 오늘 중풍병자가 누리는 그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가정은 참으로 건강한 성가정이 될 것이다.
우리네 가정생활, 수도생활에는
항상 영육간에 힘드는 식구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 식구를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가 그 환자일 수도 있다면
나는 다른 형제식구들의 도움으로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야만 치유될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형제식구들의 도움을 겸손되이 청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건강한 식구들은
환자식구를 귀찮아해서는 안된다.
그 환자식구를 위해서는
힘을 모아(이것이 중요하다)
최선을 다해
모든 노력을 경주하여
그를 주님 앞에까지 데려놓는 일을 해야한다.
우리는 미약하지만
주님께서는 기적을 이루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우리 식구들을 주신 이유,
우리 형제들을 함께 살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니겠는가?
또 가끔은
주님께서
우리 가정과 수도공동체에
이렇게 영육간에 아픈 형제들을 허락하시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형제애, 가족애는
주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
우리 가족들을 위해, 우리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자.
그리고 그런 가족과 형제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자.
그리고 식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마음으로 고마움을 표시하자.
-이상일 신부-
가끔은 1999년에 방영됐던 드라마 허준의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곤 합니다. 허준이 명의로서 이 세상의 삶을 마감했을 때 그의 무덤에 예진아씨가 조그마한 꼬마아이 하나와 찾아옵니다.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무덤을 바라보고, 무덤을 쓰다듬으며, 허준과의 오랜 인연이 스쳐지나가는 듯한 회한에 찬 얼굴로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산등성이의 꾸불꾸불한 산길을 걷는 대목에서 꼬마아이가 이렇게 묻습니다. “누구의 무덤이냐?, 뭐하셨던 분입니까?”라는 물음에 “내가 평생을 가슴에 두고 존경한 분이란다. 그분은 땅속을 흐르는 물같은 분이셨지..”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분도 내의녀님을 사랑하셨습니까?”라는 물음에 “ 그건 나도 모르겠구나. 내가 죽어 땅속에 묻히고 흐르는 물이 되어 만난다면 그땐 꼭 여쭈어 봐야겠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마지막 장면이 두고두고 마음에 와닿는 이유는 지리산의 전경이 펼쳐진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허준과 예진아씨의 그 애틋한 영적인 사랑이 주는 여운이 컸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며 종종 떠올리곤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영적인 삶의 여정을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 자신에게도 대입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은 우리가 평생을 가슴에 두고 존경에 존경을 더해도 손해보지 않는 그런분이라는 사실...그리고 언제나 우리 삶의 한켠에서 땅속을 흐르는 물같은 존재로 함께 해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애틋한 사랑을 지금부터라도 만들어 나가는건 어떨런지요?
예수님과의 애틋한 사랑이라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고침을 받은 나병환자와 고쳐주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크게 놀라며 “이런 일은 일찍이 본적이 없다.”라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일들이 더더욱 많아지리라 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도 병자임을 좋은신 주님께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겉보기에 멀쩡하다고 다 정상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겉으로는 멀쩡해도 내면은 병들어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모습대로 예수님께 보여드리고 치유해주십사, 내면을 고쳐주십사 간절히 간절히 기도해 보십시오. 바라고 원하는 것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원하면 원할수록 예수님께서는 더 잘 들어주시는 분이시니까요!
나병 환자를 고쳐주신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똑같이 치유의 은총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
지금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끝없는 기도 안에서 현재의 삶보다 나아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일어나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힘내어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안에서 여러분들에게도 “이런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는 오늘의 성경말씀이 더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중풍병자를 예수님께서는 고쳐주실수 있다면 확고한 믿음과 중풍병자를 고치기 위해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예수님 근처에 달아 내려 보낸 주위 사람들의 열정처럼 신앙안에서도 노력하셔야 된다는 사실도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쉽지 않습니다. 그 잘못이 사소한 일이라 해도 용서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지
모릅니다. 또 누군가 나에게 큰 상처를 주는 잘못을 했다면 용서란 더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병상에 누워 있는 병자를 부르시며 “얘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병자가 어떤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은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용서는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죄로 인해 어둠 속에서 불안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사랑은 용서를 통해서
새로운 희망으로 자리합니다. 우리 역시 이웃에 대한 모든 편견과 교만을 버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죄의 멍에를 지우지 말고
그를 용서함으로써 자유롭게 해 주어야 합니다. 희망을 갖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으로부터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그 용서는 화해이고
그 화해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안에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구절에서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가지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자기 병을 한탄하면서 앉아 있지 말고 그 들것을 걷어가라는 말씀을 하시는데, 여기에서 들것은 상징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너는 네 병을 나와 같이 치유할 수 있다”고 촉구하십니다. 나도 의사지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느끼는 환자들은 치유의 속도도 다르고, 자기 자신의 의식으로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옛날의 자기(들것)를 걷어들고 걸어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이 추운 날씨에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까?
물론 대답은 불보듯 당연한 것,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우리들은 각자가 예수님을 만나는 이유가 참으로 다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식위해, 남편위해, 가정의 평화를 위해, 또 아니면 나의 신앙의 성숙을 위해 등등...
그러나 막상 예수님을 위해서라고 생각해본 적은 몇 번이 있는지요?
우리네 신앙생활이라는 것, 이론적으로는 저 세상, 저 하느님 세상을 위한 것이라고
외치면서도 실제로보면 이 세상, 내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기쁨,
이 세상의 가치들을 위한 것임을 솔직히 고백해야 하겠습니다.
어제 복음에 이어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을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찾는 아마도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시는 예수님 ㏏??nbsp;아닌가 싶습니다.
나의 병이 낫기위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지 예수님이 하느님이라서,
하느님을 뵙고 싶은 간절한 심정 그것 때문에,
다시 말해 하느님 때문에 찾는 것을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만난다면 우리는 극단적으로 율법학자들처럼 되어버립니다.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단순히 병고치는 용한 사람으로만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하니까 율법학자는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며 예수를 신성모독의 범죄인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사실 하느님 말고는 죄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요.
죄라는 것이 하느님하고 등을 돌리고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데
우리가 그러한 등돌린 삶을 반성하고 하느님께 되돌아 온다면 용서라는 것이
하느님께 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이렇게 당연하고 올바른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율법학자들이 잘못한 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기 이전에 우리가 바라는 우리의 가치들,
우리의 판단을 먼저 생각한다면 우리는 늘 오늘 복음의 율법학자들처럼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대로 신앙생활이 되지 않고,
내가 요구하는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내게 있어 하느님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느님을 잃어버립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다가오시는데 우리가 그런 하느님을
나의 기준대로만 바라보려 할 때 우리는 하느님을 배척하게 됩니다.
신앙은 내 것과 하느님 것을 따져보고 거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나를 내어 던지는 것입니다.
나를 온전히 포기하고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또한 살아가면서 종종 큰 장애물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 때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그 장애물을 통과하기도 하고,
때로는 한계에 부딪혀 한 참을 방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장애물을 빠져 나오기까지 잃은 것도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참 많은 것을 얻기도 합니다.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길도 마찬가집니다. 주님께 나아가는데는 꼭 큰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 장애물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 장애물이
예수님께 나아가는 신념을 더 굳게 해주기도 합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중풍병자처럼 말입니다.
그의 첫 번째 장애는 '자신이 겪고 있는 중풍 병'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자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움직일 수조차 없었기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의해서 겨우 예수님께서 계신 문 앞까지 당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발디딜 틈도 없는 많은 사람들에 가려 갈 수가 없었습니다.
또 장애물이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도와준 사람들은 지붕을 통해 예수님께로 그를 인도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장애물이 생겨납니다.
이번에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졌는가 하면서 비아냥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의 편견을 깨뜨리고는 중풍병자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결국 중풍병자는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게 됩니다.
잠시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만일 그에게 병이 없었다면 그는 그렇게 힘들게 예수님을 만나려 했을까요?
결국엔 그에게 장애물이었던 '중풍병'이 예수님을 찾게 한 도구가 된 것입니다.
도리어 주님께 더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됨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앞에 장애물이 놓여 있다고 돌아서기보다는 주님께 나의 어려움을 봉헌하고
더욱 더 주님을 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 나한테 놓여있는 그 장애물이
버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느껴질수도 있을 것입니다.
잠시 요즘 내 앞에 놓여진 장애물을 신앙의 눈으로 한 번 바라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거라”(마르 2,5-11) 하며
용서와 해방을 설파하십니다. 지나간 죄와 잘못에 연연하지 말고
하느님의 자비와 능력을 믿으라는 가르침입니다.
신앙인들에게 과거의 죄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극복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와 잘못을 지워버리지 않고 용서하십니다. 그럼으로써
당신의 전능과 자비를 드러내시며,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와 해방을 체험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실패도 하고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실패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태도입니다. 몇 가지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중대한 실패를 반복하지 마십시오. 둘째,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과
유머감각을 잃지 마십시오. 셋째, 하느님께서 우리의 실패를 용서하고
언젠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 믿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넷째, 정신적으로 격려와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실패담을 나누십시오.
다섯째,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람이 실패한 후에 하느님을 위해서
더 큰 일을 했음을 잊지 마십시오.
얼마 전, T.V프로에 의사가 암을 손님처럼 맞이하라는 신선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암이라는 한자를 살펴보면 병(病)이라는 글자와 암(癌)이라는 글자를 비교해 보면 입구 세 개가 산처럼 쌓여있는 것이 암이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식습관이 암을 불러오는 것입니다. 과음, 과식, 폭음, 폭식이 그런 병을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소식이야말로 건강의 비결입니다. 그리고 암을 불청객으로만 여겨 거부하고 화를 내고 절망만 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친절로서 손님처럼 대할 때 언젠가는 물러갈 것이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많이 웃는 것이 암 예방과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웃을 떼도 배가 땡길만큼 웃는 것이 몸에 좋다고 하는데 100미터 달리기보다 더 큰 효과를가져 온다고 합니다. 그만큼 에너지가 팍팍 생성된다는 말입니다. 많이 웃습시다. 생활리듬을 잃지 말고, 좋은 생각과 좋은 공기를 마시며, 적당한 운동을 매일 하며 소식을 하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환자에게 낫다는 믿음과 확신을 주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만 찾아가면 중풍 걸린 친구의 병은 절로 고칠 줄 알았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가까이 갈 수 없게 되었을 때 포기하고 다른 날 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친구에 대한 사랑이 적으면 일은 간단합니다. 힘들지만 다시 돌아가면 됩니다. 할 만큼 다 했다고 위로하면서 ... 그러나 친구를 고쳐주고픈 마음이 크기에 그렇게 간단하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뵙기만 하면 고칠 수 있는데 어떻게든 궁리를 해야 했는데 결국 네 친구는 한 가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지붕을 뚫고 내려 보내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친구에 대한 사랑으로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을 시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를 바라보셨고, 그 네 친구들의 믿음을 기특하게 여기시어 치유해 주셨습니다.
둘째, 오늘 복음의 핵심은 “사람의 아들이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시며 일어나 들것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심으로써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최고의 행적은 죄의 용서요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 이르신 말씀이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예수라는 말마디의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라는 의미입니다. 구원자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병든 세상에 병든 인간을 위해 죄인을 위해 오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의사에게는 필요하다며 나는 의인을 위해 오지 않고 죄인을 위해 오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의 치유를 넘어 죄의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그가 중풍을 앓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죄였습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듣지만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생각이나 고정관념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주위에는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죄로 말미암아 중풍을 앓고 들것에 누워 지내는 병자들이 많습니다.
주님의 용서는 건강으로 이어집니다.
죄의 용서는 위로와 평화로 이어집니다.
이와 반대?죄는 우리를 절름발이로 만듭니다.
외냐하면 죄에는 사물을 올바로 보지못하게 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분별하고 판단하는 의식을 흐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려는 노력은 하지 않고 쉽게 어떤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기보다는 자기들의 고정관념과 얕은 지식으로 판단만 하는 율법학자들은 아무 은혜를 받지 못했다.
사도는 자기 영혼 안에 지니고 있는 하느님을 자기 주위에 발산하는 사람이다.
사도는 보화를 축적하고, 그 축적한 보화를 인류에게 전해주는 성인이다.
사도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게 대한 사랑으로 불붙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절제할 수도 차단시킬 수도 없는 사람이다.
사도는 갈증을 해소시키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로 달려가 넘치도록 채워주는 선택된 그릇이다.
사도는 자신 안에서 최고도로 활동하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성전이다.
한 저술가의 말을 빌리자면, 사도는 자신의 몸 전체에서-공사를 막론하고 자기의 말, 일, 기도, 몸짓, 태도를 통해서- 그의 전존재로부터 하느님을 발산시키는 사람이다.
하느님에 의거해서 살라! 그리고 하느님을 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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