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성 전투와 김윤후
어느 출판사 교과서인지는 모르지만 국사 교과서에는 몽골의 고려 침략기를 이렇게 서술하고 있네. “집권자인 최우는 몽고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반발하여 강화도로 도읍을 옮기고, 장기 항전을 위한 방비를 강화하였다. 이에 몽고가 다시 침입해 왔으나 처인성(경기 용인)에서 장수 살리타가 김윤후에게 사살되자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고려는 여러 차례의 몽고 침략을 끈질기게 막아냈다. 강화도의 고려 정부는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키고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하였다.”
나는 이 서술에 개인적으로 극렬하게 반대해. 일단 최우는 ‘항전’을 위해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게 아니라 최씨 정권의 유지를 위해 강화도에 들어앉았던 거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도피였다는 거지. 그러면서 사실상 본토의 방위를 사실상 포기해. “주민들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켰다고 하지만 정부가 치밀한 준비와 계획을 거쳐 이쪽의 모든 자원을 탈탈 털어 방어 진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그냥 “알아서 산성으로 가든가 섬으로 가라.”는 거였어.
설악산 케이블카가 있는 권금성 알지? 그처럼 험준한 산자락에 둘러쳐진 산성이 피난처였어. 물론 숨어 있긴 좋지. 그런데 속초나 양양 해안가 평지에 살던 사람들이 그 성으로 피난할 때 이고 지고 갈 수 있는 식량이 얼마나 되겠니. 그런 험한 길엔 달구지도 못 올라갈 거고. 4인 가족이 피난한다면 가장이 짊어질 수 있는 건 한 1주일 치나 될까? 섬도 마찬가지.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든다고 섬에 농토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식수조차 부족한 섬이 태반인데. 이건 거국적인 ‘저항’은 커녕, 정권의 ‘방치’였어.
1253년 몽골군은 5차 침입을 감행해. 몽골의 공격 루트는 두 방향이었어. 서북 지역을 휩쓸고 내려오는 종래의 경로 외에 동북면으로 해서 강원도, 경기도 내륙 지방을 쑥밭으로 만들었지. 가장 치열한 전투 중의 하나는 강원도 춘천의 봉의산성 전투였어.
봉의산성은 험준했지만 물이 귀했어. 갑자기 많은 인구가 몰리면서 산 위의 물은 금방 말라 버렸다. 말과 소를 잡아 그 피를 마셨지만 말과 소도 무한정 있지는 않았고 배고픔보다 더한 목마름에 지친 고려군은 안찰사 박천기의 지휘 하에 죽음의 돌격을 감행해. 하지만 몽골군은 성 밖에 목책을 미리 쌓아두고 고려군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몽골군은 고려군의 결사대를 전멸시키고 성안에 들어가 나머지 노약자들을 남김없이 다 죽여 버려. 이런 식으로 강원도 양양도 황무지가 되고 철원도 쑥대밭이 돼.
이윽고 몽골군은 오늘날 중부 내륙 고속국도가 뚫린 그 루트로 남하하는데 춘천, 철원 등의 소문을 들은 양평과 천룡 (충북 중원)의 백성과 군사들은 저항을 포기한다. 여느 제국도 마찬가지지만 몽골군도 항복한 나라의 군대를 ‘화살받이’ 부대로 활용하는 데 익숙했고 몽골군은 양평과 천룡성의 군대를 앞장세워 남하하게 돼. 그 군대를 지휘한 건 고려 사람이었어. 이현.
몽골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예 몽골에 붙어버린 자인데, 음력 8월에 몽골군이 쳐내려온 건 이 인간의 속삭임이 작용했었어. “수도는 강화도에 있고 세금은 지방에서 나오니 추수때 지방을 치시면 강화도가 낭패를 볼 겁니다.” 원래 뭐든 배신자가 더 열렬한 법이지.
그들의 다음 목적지는 충주였어. 이 충주성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었어. 20년 전 몽골의 1차 침입 때 충주성은 몽골의 공격을 받아. 이때 양반들은 다 도망가고 노비와 평민들만이 남아서 몽골군을 물리치는데 도망갔던 양반들이 돌아와서는 은그릇 없어졌다고 기껏 몽골군을 물리친 노비들을 도둑으로 몰아붙이는 통에 한바탕 난리가 일어났고 결국 정부군에게 진압당하는 사건이 있었지. 몽골군에게 쓴맛을 안긴 곳이면서도 고려 상류층의 ‘모럴 해저드’를 적나라하게 보여 줬던 지역.
이번에도 상황은 비슷했어. 양반들은 일찌감치 보따리 싸서 남한강을 타고 영월 정선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거나 새재 넘어 경상도로 피했지. 남은 건 또 오갈데없는 노비와 천민들 중심의 민병들. 그런데 그 지휘관은 사연이 많은 인물이었어. 바로 20년 전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이를 활로 쏘아 죽였던 김윤후가 충주에 와 있었던 거야.
승려 출신인 그는 양반들보다는 오히려 천민들과 잘 통하는 사람이었어. 살리타이가 죽음을 당한 처인성은 원래 처인 부곡이라는 천민들의 주거지였고 성이래봐야 축구장보다도 좁은 토성이었어. 김윤후는 그 천민들을 데리고 농성을 준비하다가 살리타이라는 대어를 낚았던 거지.
보통 사람이라면 적장을 죽인 공로라면 훔쳐서라도 갖고 싶어한다. 졸병 몇 명의 목에 팔자가 바뀔 수도 있었는데 하물며 대몽골제국 고려 정벌군 사령관을 쏘아 떨어드린 공이야......몽골군은 살리타이 사후 완전히 갈팡질팡 오락가락 면모를 보이면서 철수하게 돼. 거의 김윤후 혼자서 몽골군을 무찌른 셈이야. 그런데 김윤후는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서 상과 벼슬을 내리려는 조정에 대고 이렇게 얘기해.
“제가 아닙니다. 저는 살리타이를 죽일 때 활을 든 적도 없습니다. 어떻게 공이 없는데 상을 받겠습니까.”
이는 김윤후의 겸손한 성품을 말해 주기도 하지만 그가 공을 돌리고 싶은 대상이 따로 있었음을 의미해. 바로 처인부곡의 천민들이었지. 처인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된다. 무슨 뜻이냐고? 천민들이 양민이 된 거야.
“오늘부로 처인부곡의 처인현임과 부곡 천민들의 면천을 선언하노라.” 아마 처인 부곡이 생긴 이래 가장 큰 잔치가 벌어졌겠지. 김윤후는 양민의 지위를 받아든 부곡민들이 얼마나 미친 듯이 기뻐하는지, 얼마나 그 신분의 딱지에 한이 맺혔는지를 이해했을 거야. 그리고 김윤후는 처인현의 영웅으로 떠받들어졌겠지. “스님 덕분에 저희는 다 살았습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러 그는 충주성의 방호별감이 됐고 또 한 번 천민들을 이끌고 몽골군의 대군과 고려인 배신자와 맞서게 돼.
이미 충주는 고립된 성이었어. 심지어 경상도 성주의 유력자가 소백산맥을 넘어 몽골군에 투항하고 있으니 이미 충주 주변은 몽골군의 세력권이었다고 봐야지. 더구나 충주 천민들은 20년 전 싸워 이겨도 도둑으로 몰린 기억이 아직 생생하지 않았겠어? 하지만 그들을 묶어 세울 수 있었던 건 역시 처인부곡의 종결자, 김윤후의 이름 때문이었을 거야. 1253년 10월, 몽골군이 충주산성을 포위하고 사다리를 성벽에 걸치면서 70일에 걸친 공방전이 시작된다.
귀주성 전투 때처럼 정규군이 주력이 아니었고 민병과 천민 위주의 고려군이었지만 역시 몽골군이 혀를 내두를만큼 악착같이 싸워. 하지만 식량의 부족과 기나긴 싸움은 점차 고려군의 힘을 소진시켰지. 몽골군이 성벽에 올라서는 일이 잦아졌고 화살과 돌도 점점 바닥을 드러냈어.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서도 사람들의 머리 속에는 ‘끝’이라는 글자가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무엇보다 괴로운 건 밖에서 외치는 고려 말이었을 거야. “너희들 이러다가 성 함락되면 애들까지 다 죽는다!” “이 천민들아. 나라가 너희에게 해 준 게 뭐가 있다고! 이렇게 싸운다고 상이나 줄 줄 알아? 20년 전 일 잊었어?”
이때 김윤후가 내린 특단의 조치. 전투가 소강 상태에 접어든 어느 날 김윤후는 성 안의 천민과 노비들을 불러 모은다. 굶주리고 기진맥진한 천민들은 김윤후 앞에 서 있지도 못하고 철퍼덕 철퍼덕 주저앉았어. 김윤후는 부르짖는다. “이 성을 사수하면 너희들의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직을 내릴 것이다!” 맥없는 함성이 좀 나오긴 했지만 그다지 반응은 뜨겁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그 다음 김윤후의 명령으로 병사들이 뭔가를 잔뜩 들고 나왔을 때 천민들, 특히 노비들의 눈은 커진다. 그건 노비 문서였어. 이마를 두르는 천형처럼, 발목을 잡아챈 족쇄처럼 자신들의 부모와 자신과 자신들의 자식의 이름과 인생을 결박한 문서. 설마!
김윤후는 외쳐. “똑똑히 보아라. 이 노비문서가 어떻게 되는가를. 너희는 오늘부로 양민이다. 이 성을 지킨 뒤 문하시중도 되고 병마사도 될 수 있는 양민!” 그리고 노비문서에는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김윤후는 20년 전 처인성에서 그 에너지를 봤거든. 운명에 귀속된 인간들이 그 운명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때 어떤 힘을 내고 어떤 힘을 얻는지.
날름거리며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노비 문서가 스러지는 것을 본 노비들은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악을 쓰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지. 사방팔방을 내달리기도 하고 물구나무를 서 보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불에 데는 줄도 모르고 노비문서가 재가 되는 걸 보며 눈물을 흘렸지. 어쩌면 그 중의 몇 명은 수십 년 전 개경을 진동했던 불온한 구호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를 외쳤을지도 몰라.
신분의 굴레에서 해방된 인간들의 힘은 끝내 대제국 몽골의 공격을 물리친다. 김윤후가 천민들에게 제공한 건 신분의 해방이면서 곧 그들이 싸워야 하는 이유였을 거야. 인간사에서 벌어지는 모든 갈등이나 전투, 그리고 경쟁에서 승리의 가장 큰 원동력은 왜 싸워야 하는지의 이유를 확실히 아는 거거든. 지치고 힘들고 굶주리고 하다못해 내가 죽을 것 같아도 왜 싸워야 하는지를 이해하는 거거든. 인류 역사에서 ‘자유’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였고 충주성 전투는 그 한 예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