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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5일 화요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바오로는 소아시아 킬리키아 지방 타르수스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도록 교육을 받은 철저한 유다인이었고, 바리사이였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박해자였으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극적인 회심을 한 뒤 사도가 되었다. 그는 열정적인 신앙으로 이방인 지역에 복음을 전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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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마르코 16,15-18)
"Go out to the whole world and
proclaim the Good News to all creation.
The one who believes and is baptized will be saved;
the one who refuses to believe will be condemned.
Signs like these will accompany
those who have believed: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성장 과정과 과거 그리스도교 박해자였음을 밝히면서,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되었는지 들려준다. 그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하늘에서 큰 빛을 받고, 부활하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잠시 장님이 되었다가 눈을 뜨면서 신앙의 눈도 새롭게 뜨게 된다(제1독서).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께 자신들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듣게 된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받아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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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늘 짧은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물론 문맥상으로는 이것은 인간을 염두에 둔 표현이겠지만, 훨씬 더 깊은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복음이 우리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창조에까지 소급되는 모든 피조물의 기쁜 소식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복음 선포는 창세기 본디의 아름다운 창조성의 회복을 말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파괴된 인간성이 복음으로 회복될 때, 곧 우리 자신이 복음적인 올바른 눈과 가치관을 가질 때, 비로소 창조의 실상(實像)을 바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 안에서 하느님의 창조의 아름다운 손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연은 더 이상 지배나 착취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피조성을 나누는 친구임을 깨닫게 됩니다.
복음으로 우리가 사랑의 본성을 회복하면, 나무 한 그루와도 친구가 되어 말을 건넬 수 있고, 돌멩이 하나, 풀 한 포기에서도 하느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하셨던 것처럼, 해와 달을 형님과 누님으로 부르며, 들의 짐승들과 대화를 나누는 신화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 나라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는”(이사 11,6), 서로에게 아무런 해를 입히지 않는 ‘사랑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나라를 실현해 가라고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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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 한 마리가 어디론가 가던 중 쉬고 있었습니다. 산비둘기가 묻습니다. “어디로 가는 중인가요?” “이곳이 싫어 동쪽으로 가고 있답니다.” 올빼미는 힘이 없습니다. 산비둘기가 그 이유를 묻자, 올빼미는 목쉰 소리로 답합니다. “사람들이 내 울음소리를 싫어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러자 산비둘기가 달랬습니다. “동쪽으로 간들, 그곳 사람들 역시 당신의 울음소리를 싫어할 것입니다. 이 기회에 울음소리를 바꾸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살다 보면 ‘사는 곳’을 옮기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 싫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곳으로 옮겨도 ‘좋지 않은 모습’은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사람도 자꾸 만나다 보면 단점을 보게 됩니다. 싫은 사람도 자주 만나면 그 나름대로의 장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을 바꾸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전교 역시 잘하려면 끊임없이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기존 방법만을 고집한다면 사람들은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싫어하는데도 성당 가자고 조르는 것은 전교가 아닙니다. 이것은 울음소리를 들어 주지 않는다고 투정하는 올빼미와 다를 바 없습니다.
많은 경우, 인생의 축복은 ‘하찮은 일’이 계기가 됩니다. 모르기에 하찮은 일이지, 사실은 주님의 개입입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이 많이 생깁니다. 전교는 그것을 전하는 일입니다. 작은 일을 통해 우리를 도와주시는 주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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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정말 그럴 수 있을는지요? 그렇다고 실험해 볼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랬다가는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했다가 정말 뱀에게 물리거나 독을 마셔 목숨이 위태로워지면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예수님께 배상 청구를 해야 할까요?
그렇다면 이 말씀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뱀처럼 악하고 간교한 사람을 만나도 주님께서 지켜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독에 해당될 만큼 위험한 사건을 만나도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아무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는 당부입니다.
하느님의 보호는 완벽합니다. 어느 누구도 해치지 못합니다. 선교사들이 오지와 벽지에서 그토록 꾸준히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은 주님의 이러한 보살핌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이 주님을 전하고 舡??삶이라면, 그분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의 보호를 강요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보호받을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 가운데에는 하찮은 일이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지나고 보니까 하찮은 것이었겠지요. 그러나 사실은 그 하찮은 것이 주님의 배려요 도움입니다. 인생에는 그런 일이 많습니다. 우리가 모를 뿐이지 그런 일은 수없이 많습니다. 전교는 그것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찮은 일을 통하여 우리를 살려 주신 하느님을 전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 - 강인봉-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것이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지만 누구나 얻는 것은 좋아하지만 잃기는 싫어합니다. 그래서 무리한 욕심을 부리게 되고 그 결과는 스스로에겐 스트레스로, 다른 사람들과의 갈등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다 가질 수는 없는 법인데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포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마음의 평화는 멀고 먼 이야기일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아닌 나의 변화를 위해 -조명연- 우리들은 ‘변화’에 대해 자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기준을
내가 좋아서 하는 음악을 위해 대중적 인기는 포기하면 되는데 음악은 음악대로 멋지고 어려운 음악을 하면서도 왜 대중은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라는 고민에 빠지게 되면 그 순간부터 괴로운 나날이 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주님을 맞이한 순간부터 바오로 사도의 삶은 이른바 '행복 끝, 불행 시작'입니다. 편안하고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온갖 박해와 고난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지요.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누구보다 행복한 분이었습니다.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 길을 실천해 나갔으니까요.
다음은 육상 선수 칼 루이스의 인터뷰 내용입니다. "달리기를 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셨습니까?" 라는 물음에 그는 "나는 달리기를 위해 무언가를 희생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다른 일을 하기 위해 달리기를 희생했지요."라고 말하더군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알고 그 길을 위해 열심히 나아가는 사람한테는 고난과 시련이 오히려 즐거움이 됩니다. 그만큼 자신의 목표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절망에 빠져 집에 들어왔는데, 네 살 배기 어린 아들이 책을 읽어달라고 하면서 성경책을 들고 온 것입니다. 아들은 성경책의 어느 부분을 가리키고 있었는데, 그 부분을 보는 순간 형제님께서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구절은 요한복음 11장 4절의 말씀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그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형제님께서는 이 구절을 보는 순간 커다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은 자신의 병에 대해서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다는 생각에 아무런 희망을 갖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이들이 다 포기한다고 할지라도 절대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 하느님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하느님께서는 어린 아들을 통해서 전해주신 것이지요.
실제로 이 형제님은 더욱 더 열심히 살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자기의 몸을 통해 이루어 질 것임을 굳게 믿고, 치료를 열심히 받고 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병을 극복하여 지금 정상인으로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좌절과 절망에 빠져서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은 하느님께 주도권을 맡기지 않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느님께 주도권을 맡기지 않은 사람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생활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말과 행동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사도 바오로 역시 포기하지 않고 주님 앞으로 나아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서 회심하게 됩니다. 사실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때에는 자신이 틀렸다 할지라도 맞다면서 억지를 부리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하지만 바오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을 모두 버리고, 온 몸과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사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내 삶의 주도권을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그래야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에게 두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둘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즉, 저 사람이 변해야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나의 변화입니다. 내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바뀌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회심 축일을 맞이하면서
바오로 사도가 회심하기 직전의 심정을 떠올려봅니다. 아마 바오로 사도는
회심 전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면서 그들이 변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즉, 그들이 배교해서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박해하고 아프게 했습니까? 하지만 정작 변해야 할
사람은 바로 자신임을 주님께서 깨우쳐주셨고, 그래서 그는 회심하여 스스로
변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주님을 증거하는 주님 제자의 길에 들어섭니다.
지금 내 모습은 어떠합니까? 혹시 남의 변화만을 힘주어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중요한 것은 자신의 변화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제자로의 변화. 그 변화를 위해 오늘도 힘차게 살아봅시다.
바뀌어봅시다!
-김찬선신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윤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방황하다가
하느님을 만난 아오스딩 성인과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세속적인 성공을 꿈꾸고 세속에 맛들여 살다
하느님을 만나 하느님의 사람이 된 프란치스코 성인과도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열렬히 믿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에서의 변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적대자에서 옹호자로의 변화이며
그리스도교 파괴자에서 전파자로의 변화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적대자에서 옹호자로의 변화란 어떤 것입니까?
한 마디로 얘기한다면
율법주의자에서 사랑주의자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은 의심하고
율법은 단죄하고
율법은 구속하고
율법은 억압하고
율법은 그래서 사람을 죽게 합니다.
자신도 죽고 남도 죽게 합니다.
그러나
사랑은 믿고
사랑은 용서하고
사랑은 풀어주고
사랑은 부축하고
사랑은 그래서 사람을 살게 합니다.
자신도 살고 남도 살게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을 지내는 우리,
우리도 율법주의자에서 사랑주의자로 바뀌어봅시다.
초자연적 은총 -전삼용신부- 테니스를 칠 때면 가끔 공이 맞은 곳이 선 밖인지 안인지 구별이 안 갈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공은 워낙 빠르고 공이 맞고 나가는 위치는 서로 보는 위치마다 다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분쟁이 생기면 대부분은 공을 가장 가까이에서 본 사람의 말을 믿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았다고 더 정확한 것만은 아닙니다. 저의 기억으로 보아도 그런데, 테니스를 처음 배울 때는 남들은 다 선 안에 맞은 것으로 보는데 혼자만 밖에 나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하면 그 공이 나가야 자신이 점수를 먹기 때문입니다. 즉, ‘나갔으면 좋겠다.’하는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안에 맞아도 금 밖에 맞은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판단력은 이렇게 우리 심리상태에 따라 자신도 모르게 흐려지게 됩니다. 신학생이 판단력 부족이란 말을 들으면 신학교를 나가라는 뜻입니다. 사제가 되어서도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수많은 영혼을 잃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판단력 부족이란 말을 듣고 싶겠습니까? 또 일부러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삶의 경험으로 보면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자신은 옳다고 믿고 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들먹여서 죄송하지만, 얼마 전에 자살하신 높으신 분들과 연예인들은 자신들의 자살이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정말 잘못 된 것임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본인들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하였지만 사실 우리 입장에서는 자살이 올바른 선택은 아닌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한 도시 사람들을 쏘아 죽여도 된다는 발포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 분들은 시간이 흘러도 그 판단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빈 라덴 같은 사람들도 자신들이 믿는 종교 안에서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믿으며 수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듭니다.
이렇게 각자가 자신이 옳다고 믿고 판단하고 살아가지만 실상은 자신도 모르게 ‘판단 미쓰’를 하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의 바오로 사도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바오로가 그리스도교 인들을 잡아 교회를 박해한 것은 그가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은 바로 올바로 볼 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만약 바오로가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고 그 분의 음성을 듣지 못했고 또 아나니아의 안수를 받지 못했다면 그렇게 회심할 수 있었을까요? 바오로의 회심은 바로 하늘에서 오는 은총 덕이었습니다. 세상 누구도 자신의 혼자 힘으로는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혼자 힘으로는 항상 판단 미쓰를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믿음의 눈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초자연적 은총’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내가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오늘 바오로 사도의 예처럼 하늘의 도우심이 없다면 결코 회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이 사건 때문에 항상 ‘은총’을 강조합니다. 은총과 자신의 자유의지가 결합되어야 회개든 믿음이든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올바른 판단을 하며 살아갈 수 없음을 일깨워주는 것입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아주 조금씩 가열하면 뜨거워지는지 모르고 그래서 뛰어나오지도 않고 그냥 그 속에서 죽는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떠나 살아가면 사실 처음에는 그 판단이란 것이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눈치 채기 힘듭니다. 어쩌면 자살 직전까지 가도 자신이 옳다고 믿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교묘하게 조금씩 자신의 시력을 잃어가기 때문에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은 모르고 남들만 아는 잘못된 판단을 많이 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처럼 우리에게도 성령의 빛을 비추시어 올바로 볼 수 있고 올바른 판단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을 청하도록 합시다. 특별히 자신의 판단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들은 항상 성령의 빛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언제나 깨어 은총지위에 있도록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을 해 놓고도 잘못된 정보로 그랬다고 마무리 짓기도 합니다. 그래서 단체의 책임자를 마귀는 더 많이 유혹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 분이 주시는 은총이 아니면 마치 우리는 장님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한 사기꾼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꿀벌이 날아와 포도주 잔 근처를 맴도는 것입니다. 그는 꿀벌을 책으로 내리쳐서 잡으려고 했으나, 괜히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마음을 바꾸어 살려주었지요. 죽었다가 살아난 꿀벌은 잽싸게 그 자리를 떠나 막 꽃을 피운 어린 야생 살구나무 밭에 다다랐습니다. 꿀벌은 열심히 꿀을 모았고, 어찌어찌해서 꽃가루도 옮겨주었지요.
머지않아 살구나무에는 열매가 맺혔고, 하도 열매가 달콤한지라 한 농부가 이 살구를 따서 잼을 만들었습니다. 다들 맛있다고 칭찬하므로 농부는 왕에게 이 잼 한 단지를 바쳤지요. 왕은 살구 잼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진상품을 받아주었지요. 그런데 이 왕은 한 공주를 좋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공주는 왕의 데이트 신청을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왕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다짐하면서 농부가 바친 잼 한 단지와 초대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살구 잼 한 단지에 공주는 감동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몇 달 전 세상을 떠난 공주의 할머니가 늘 맛있는 잼을 만들어 주었거든요. 이 살구 잼을 통해 할머니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었고, 그래서 왕의 초대를 승낙한 것입니다.
마침내 공주가 초대에 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왕은 또 나쁜 짓을 저질러 감옥에 갇힌 사기꾼에게 큰 벌을 내리려던 참이었지요. 하지만 이 희소식에 마음이 누그러져서 사기꾼에게 가벼운 벌을 내렸답니다. 이 사기꾼이 바로 처음에 꿀벌을 죽이려다가 말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한 사기꾼의 작은 행동 하나로 인해서 자신의 삶에 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작은 행동, 나의 조그마한 체험 하나를 통해서 내 삶 전체가 아니 어쩌면 세상이 변화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사도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원래 예수님을 믿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그에게도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 나오듯이 작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 체험을 통해 그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철저히 박해했던 사람이, 오늘 복음의 말씀처럼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는데 최선을 다하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우리 본당의 어떤 자매님 말씀이 기억납니다.
“신부님, 저는 성당이 너무 재미없어요. 미사도 재미없고, 기도하는 것도 너무나 힘들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정말로 대단하신 분 같아서 미사도 꼭 참석해야 할 것 같고, 기도도 꼭 해야 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와 함께 살면서 평생 바뀌지 않았던 제 남편이 세례 받고 나서는 술 담배를 끊는 등 완전히 바뀌었거든요.”
나의 작은 행동, 작은 체험 하나도 소중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작은 행동, 작은 체험 하나가 나를 변화시키고 가족을 변화시키며 이웃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나의 작은 행동, 작은 체험 하나도 소중히 받아들이세요.
설득력 있는 신앙생활
-구경국 신부-
얼마 전 <가톨릭신문>에서 “입교도 냉담도 가족 영향 크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복음은 말로써만 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다시 말해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먼저 복음에 근거한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역설하는 좋은 증거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들은 우리보다 먼저 신앙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로부터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도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파할 의무를 지니는데, 그것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서 신앙에 관한 한 좋은 것을 골라서 듣고 봄으로써 자신들의 신앙을 적극적이며 긍정적으로 키워나갈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좋은 것을 골라서 듣고 본다는 것은 다른 신앙인들의 부정적인 측면이나 단점들을 비판하기보다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측면과 그들의 장점 등을 찾아내고 본받아 내 것으로 만들려는 부단한 노력을 말합니다.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노력으로 얻어진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통해서만이 신앙을 전파할 의무를 채울 수 있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아무런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가족들에게조차도 모범이 되는 복음적인 삶을 살아 이웃에게 보다 설득력 있게 주님의 복음을 선포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새롭게 변화되게 하소서
-김현숙 수녀-
오늘도 나는 새롭게 변화하고 싶다. 바오로 사도처럼! 유교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아픈 자식을 위해 무속에 의지하며 아침마다 치성을 드리는 어머니를 통해 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최초의 스승인 예배당 선생님들을 통해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새벽 예배에 나온 꼬마들과 함께 놀아주시던 선생님들. 그중에 김경숙 선생님은 결혼식 당일에도 우리와 함께 놀아주셨다. 아마도 나의 신앙은 그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 때는 절에 사는 짝을 따라 수락산 자락에 있는 절에 갔다. 스님한테 불경과 불상을 받고 열심히 경문을 외우며 불교를 배웠다. 중학교에 다닐 때는 군종목사였던 이모부가 최전방 사병들을 찾아다니며 기도와 찬송으로 목회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삶을 동경하기도 했다. 그 후 나는 여러 교회를 섭렵하며 신앙심을 키워갔다. 「불타는 세계」·「인류의 종말」과 같은 이상한 책까지 읽다가 교무실에 불려가 국어선생님께 야단 맞은 기억도 생생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성당에 다니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나를 성당으로 이끌지 않고 천도교에 다니자고 해 같이 다녔다. 어느 날 이 사실을 안 친구 어머니가 천도교에 와서 친구를 데려가는 바람에 그것도 끝이 났다.
그 후 나는 다른 친구와 함께 성당에 찾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약속 시간이 다 되어도 친구가 오지 않아 혼자 용기를 내어 성당에 들어갔다. 아무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 냉정한 성당에 매력을 느꼈다. 부모님이 신자가 아니고, 또 미혼 여성들에게 세례 주기를 꺼리던 시대여서 3년 동안 교리반에 다녔다. 마침내 교리반 수녀님이 가정방문을 오셨고 아버지 몰래 어머니의 허락을 받고 난 후에 나는 세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오랜 시간 개신교 문화에 길들여진 터라 주일이면 역전에서 노래와 율동으로 찬양을 하고, 하루 종일 기차를 오르내리며 전단지를 뿌리고, 추운 겨울에도 사병들을 찾아다니는 이모부처럼 열정적으로 살고 싶었다.
결국 나는 수녀원에 입회했다. 내 열정이 넘치긴 했지만 모태신앙을 가진 자매들이나 레지오 마리애 단장 출신인 자매들과는 다른 면이 있었다. 훗날 동기 수녀님이 나에게 해준 이야기가 있다. 그 시절 성모님에 대해 너무 아는 것이 없는 나를 보면서 분심이 많았다고 했다. 아무튼 나는 노틀담(Notre Dame) 수녀원에서 성모 마리아의 신심을 새롭게 받아들였고, 입회 전 내가 즐겨 바치던 ‘이름 없는 순례자의 기도’보다 묵주기도를 더 바치게 되었다. 밤이면 수호천사에게 못다 한 묵주기도를 대신해 주기를 청하며 잠이 드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이냐시오식 관상기도를 배웠고 나중에 내 성향에 맞는 향심기도를 받아들였다. 사도직에서 영적인 목마름을 느꼈을 때 하느님은 나를 ‘십자가의 버림받은 예수님을 사랑하며 외로우신 마리아를 살자.’는 포콜라레의 이상으로 이끌어 주셨다. 이제 또 주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길을 두려움 없이 따라가며 그분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양승국신부-
<정말 특별한 인물, 바오로 사도>
교회 역사 안의 많은 인물들 가운에 바오로 사도처럼 특별한 인물이 또 있을까요?
그는 한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교회를 박해하던 사람이었으나, 후에 바로 그 교회를 가장 사랑하는 참 목자로 탈바꿈합니다. 그는 한때 예수님을 철저하게도 부인하던 사람이었으나, 머지않아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예수님의 사랑을 노래하는 서정 시인으로 거듭납니다.
극적인 회심을 통해, 또 많은 감동적인 아름다운 서간을 통해, 시대를 뛰어넘어 아직까지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시는 위대한 사도, 뛰어난 문학가이신 분이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잘 나가던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순탄했던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출중한 자질을 지녔습니다. 다방면에 걸친 학문적 조예도 깊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바오로 사도는 아무런 부족함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도 당당했고, 자존심이 강했습니다.
“나는 태어 난지 여드레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나는 제대로 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율법으로 말하면 바리사이 사람입니다.”
그러나 회심이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에게 유익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애물로 여겼습니다.”
바오로 사도 안에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총체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졌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제대로 예수님을 만난 바오로 사도는 그분의 충만하심 앞에서 그야말로 ‘깨갱’ 하고 말았습니다.
바오로는 지금까지 자신이 지녀왔던 삶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틀렸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과의 참 만남을 통해 자신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그 모든 것들이 사실 아무것도 아닌 하찮은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은 정녕 불쌍한 사람이고, 자신이 대단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죄인인 자신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비를 베풀어주시고 회심의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수시로 자신에게 반문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생애 안에서 언제 예수님과의 참 만남이 이루어졌는가? 언제 근본적인 회심이 이루어졌던가? 언제 하느님의 신비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었는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이유는 우리가 잘나서, 또는 대단해서라기보다는 우리가 너무 안쓰러워서, 우리가 너무나 죄인이어서, 우리가 너무 안 되 보여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가 자랑할 것은 쥐뿔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자랑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 그분의 흘러넘치는 자비입니다. 내세울 것이 있다면 은총의 십자가뿐입니다
바오로야, 바오로야!
-오상선신부-
사도 바오로의 개종 때문에
개신교에서 개종한 나는
바오로라는 본명을 기꺼운 맘으로 택했었다.
바오로의 강한 성격이 때론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의 회개와 사도적 열정이 내 맘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바오로 자신의 고백을 통해 듣게 되는
그의 회개 체험기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우리 대부분이 겪게 되는 회개 여정과는 다르게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의 회개체험을 통해
회개의 본질적인 요소들을 바라보게 된다.
무엇보다도 먼저
회개는 나의 노력의 결과 내지 결실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다.
우리는 가끔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회개가 이루어질 수 있는 양
생각한다. 그래서 작심을 하면서 그래 회개해 보자고 덤빌 수 있다.
하지만 회개는 우리의 노력에 상관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은총의 결과일 뿐이다.
둘째로 나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항상 조력자를 보내주신다.
바오로의 경우에는 하나니아스였다.
우리 각자의 회개를 위해서도 하느님께서는 항상 중개자로서
혹은 조력자로서 누군가를 보내주신다.
그러나 이 바오로의 회개체험은
그를 사울에서 바오로가 되게 만들어 주었지만
이것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서는 사울아, 사울아! 부르셨던 것처럼
바오로야, 바오로야! 하고 부르시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시기 때문이다.
회개는 단 한번에 이룰 수 있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우리 생을 통해 끊임없이 지속되고 반복되어야만 하는 사건이다.
오늘도
바오로야, 바오로야!
하고 나의 회개를 재촉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또 나의 그 회개를 위해
하느님께서는 누군가를 보내주시리라!
오늘 그분께서 나에게 보내주시는 그 나의 회개 조력자는 누구일까?
열린 눈으로, 열린 마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나를 내어놓자.
나의 주보이신 사도 성 바오로,
저를 위하여 빌으소서.
- 이동진 신부 -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많은 군중들이 몰려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악령을 쫓아내시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시는 등 당시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중풍병자, 나병환자, 마귀 들린 자 등은 하느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이로 취급받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을 찾아다니고 또 고쳐 주셨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과 어울려 다니시고 먹고 마시는 등의 당시 사회 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헐벗고 굶주린 자를 보살피시고, 아프고 고통 받는 이들을 치료해 주시고, 힘없는 이들에게는 위로를 주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또 자주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갈 것을 약속하고 다짐하였습니다. 모두를 사랑으로 보살피겠다고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이것을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만을 보살피고 살아갑니다. 또한 어디에서건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는 삶을 살아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힘들 때 치유자이시며 위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께 의탁합시다. “누구나 그분에게 손을 대려고 밀려든” 것처럼 우리도 그런 예수께 믿음으로 의탁합시다. 주님은 언제나 지치고 쓰러진 우리를 위로하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 그분을 향해 눈을 돌려 바라봅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의 구원
-이중섭 신부-
원래 마르코 복음 초판은 빈 무덤을 발견한 여자들에게 나타난 천사의 말로
끝났습니다(마르 16,8). 여자들은 제자들에게 이방세계를 뜻하는
갈릴래아로 가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2세기경에 첨가된 부분에 속합니다. 이 부분은 마르코 복음의 의도를 더욱
강조합니다. 곧 제자들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계속하여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그 표징을 보여주는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르코 복음 16장 15절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온 세상만물 역시 복음이 필요하고 그리스도의 파스카 사건에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바오로 사도의 사상과
통합니다. “피조물도 멸망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를 얻을 것입니다”(로마 8,21).
인간의 구원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의 구원 역시
하느님의 계획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너희가 예수를 아느냐?
-최연석 목사-
몇 년 전 ‘패션 어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가 상영되어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영화의 내용과 그 표현이 ‘신성모독’에 가까운 화면으로 가득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십몇 년 만에 극장에 처음 가서 그 영화를 보았는데 이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이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어쨌거나 이 영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한 가지 중요한 도전을 하고 있었다. 이 영화는 ‘피와 살이 튀는’ 화면이 중심이다. 채찍을 휘두르는 병사의 얼굴까지 땀에 범벅이 될 정도로 끔찍한 장면이 화면을 채우는데, 한 가지 우리 신앙의 근본적 허점을 깊이 찌르고 들어왔다. ‘우리 신앙은 너무 잘 다듬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 신앙은 너무 추상화된 것은 아닌가?’ ‘십자가가 이제 많은 사람이 목걸이로 달고 다니는 장식품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 영화는 마치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을 아느냐?”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조롱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스도교가 만약 힘을 잃고 있다면 여기에 중요한 단서가 있다고 생각되었다. 우리의 신앙에 구체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주님은 열한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그런데 우리한테는 어떤 표징이 따르고 있는가? 우리한테는 어떤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있는가? 때로는 삼류 유행가 가사가 원래 가사의 의도와 관계없이 심금을 울리듯, 하찮은 영화지만 나에게는 무슨 믿음의 표징이 있는가를 돌아보게 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이인옥-
오늘 독서는 바오로 사도를 변화시킨 어떤 사건을 묘사하고 있다.
사도행전 안에는 이 사건에 관한 기사가 세 번이나 나오는데,
첫 번째(9,1-43)는 제 삼자가 옆에서 본 것처럼 기술하고 있고,
두 번째(22, 3-16)와 세 번째(26, 4-18)는 바울로 사도가 직접 증언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사도행전의 세 기사는 모두 루가복음사가가 기록한 것으로서 바
울로 사도 자신이 자기의 편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루가복음사가는 바울로를 변화시킨 역사적인 사건에 대해서
사도행전 안에서만 장황하고 길게 세번에 걸쳐 강조하고 있는 데 비하여,
바울로 자신은 놀랄만큼 짧게 이야기하고 있다.(갈라 1,15-16; 1고린 9,1. 15,8-9)
뿐만 아니라 자신의 서간 어느 곳에서도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될 수 있는 한 직접적인 언급을 피하며
일반화시킨 이야기로 대치하고 있음을 본다(로마 8, 29-30 참조).
또 주목해 볼 것은 루가라는 제 삼자는
’엄청난 섬광을 목격하고 고꾸라져 장님이 된’ 외적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는 반면,
바울로 자신은 내면 깊은 곳에서의 ’주님과의 만남’에,
그 만남이 ’하느님의 섭리’였음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흔히 이 사건을 다룰 때, 말에서 떨어진 바울로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성서에는 말을 타고 있었다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이 사건을 다룬 예술 작품들의 영향인 듯 싶다.
17세기의 화가 카라바치오(Caravaggio)의 감동적인 그림,
’성 바울로의 개종(Conversion of St. Paul)’-위의 그림-을 보면,
깡마르고 참을성 없게 생긴 바울로가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힘없이 벌리고,
팔은 허공을 향해 허우적거리며,
멀어버린 눈을 그대로 감고 있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로 묘사되어있다.
좀 전에 말에 올라탄 상태는 어떠했을까?
자신있고, 당당하며, 다른 사람보다 높은 위치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늠름한 상태였으리라.
이제 왜 화가는 바울로를 말 위에서 떨어졌다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단지 말등에서의 추락이 아니라 그의 세속적인 권위와 권력은 물론,
내면적인 자신감과 그를 지배하고 있던
종교적 신념에서의 추락까지 그려내고 싶었던 것같다.
거기에 천재 화가 카라바치오는 어둠 속에서 바울로를 내려다보고 있는
늙은 마부의 안쓰러운 표정과 함께,
조금 전까지 자기의 등에 올라탄 기세등등한 젊은이를 밟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한발을 치켜올린 말의 동정어린 배려를 그
림의 중앙에 놓음으로써 바울로가 겪고 있는
이 사건이 바울로에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다.
폭력과 자만심이라는 말에서 떨어져,
완전한 밑바닥에서 진리의 빛을 발견한 바울로.
이제껏 밝히 알고 있다고 자부했던 진리가
참 진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눈이 먼 장님의 표상으로 형상화시켰다.
이렇듯 문학으로, 그림으로 표현된 바울로의 회심사건은
작가 나름의 표현(형상과 색채와 문학적 기법)으로
바울로 사도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 중요한 것은 바울로의 ’변화의 삶’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 ’변화의 삶’을 이끌고 있는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것이다.
우리 신앙인의 삶 속에서 문득 ’주님이 나를 진짜 불렀는가?’라는 의심이 드는 날이 있다.
좀 더 확실하게 번쩍이는 섬광 속의 주님을 보고 싶어한다면,
’아무개야!’라는 주님의 목소리가 들리길 기대한다면,
우리는 어쩌면 일생 그분을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언제 우리는 그분을 만났는가?’ ’언제 그분이 우리를 불렀는가?’ 하는 질문은
그래서 ’어떻게 우리는 변화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과 같다.
바울로의 주님 현존 체험은,
소명체험은 자신의 서간에서 나타나듯이 말로써 설명될 사건이 아니라,
삶 안에 깊이 받아들여지고 일생의 삶으로 재 표현되어야 할 어떤 변화,
어떤 이끌림이라는 것이다.
바울로 사도는 주님의 부르시는 목소리를 들었는데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못 들었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의 목소리는 너무나 미약해서 아무나 들을 수 없지만,
그분의 목소리는 너무나 또렷해서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누구나 들을 수 있다!
다만 그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각자 타고 있는 말에서 내려와야 한다.
그분과의 만남을 위해서는 이제까지 잘 보인다고 확신했던 그 눈을 감아야 한다.
그리고 만남의 의미를 되새김질할
’아라비아 사막으로의 여행(갈라 1,17)’이 때때로 필요할 것이다.
(참고: 웬디수녀의 미술산책)
용머리가 잘린 이유
-이찬홍 신부-
사신이나, 대사들은 어떠한 사명을 받고 파견된 곳으로 떠납니다.
좋은 사신, 훌륭한 사신은 얼마나 자신을 파견한 사람의 뜻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신으로는 구약의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떠나라’는 사명을 받고 사람들에게 파견되어,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 분들입니다.
사신에 대한 묵상을 하다보니 문득, 용머리가 두 쪽이 난 이유가 생각났습니다.
산방산 앞에는 용의 머리를 연상시킨다 하여, ‘용머리’라고 부르는 해안가가 있습니다.
이 용머리는 꼭 칼로 베인 것같이 두 조각이 나 있고, 그곳을 통로로 하여 썰물 때는 용머리 해안가를 한 바퀴 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아십니까?
불로초를 찾아오라는 진시왕의 명을 받고 길을 떠난 사신이 헤매고 헤맨 후에, 제주에까지 오게 됩니다.
찾으려는 불로초는 찾지 못하자 거의 자포자기식으로 산방산에 앉아 탁주를 하려고 고개를 들고 보니, 용이 태평양을 향해 포효하려는 듯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사신은 ‘저 용을 보니, 이 지역에서 태평양을 정복할 인물이 나오겠구나. 그래도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서는, 용의 머리를 칼로 베어버립니다.
사신의 칼에 베임을 받은 용의머리는 두 쪽으로 나눠지는데, 그 때 피가 튀게 됩니다.
산방산을 기점으로 서쪽으로는(사계) 검은 피가 튀었는데, 피가 튄 그 지역을 ‘검은 질’ 이라고 부르고, 또 동쪽으로는(화순) 붉은 피가 튀어 ‘붉은 질’이라고 부릅니다.
(아아 그렇구나. 아아 그렇구나. 믿거나 말거나!!! 불로초는 찾으려 왔으면 불로초만 찾을 것이지. 왜 죄 없는 용에게 해코지를 하고 갔는지 참 아쉽습니다. 분명, 진시왕의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지 못한 벌로 사약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11제자들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이 “떠나라”는 말씀은, ‘나는 따라다니면서 수고하고 고생을 했으니, 앞으로 편하게 먹고 즐길 수 있는 곳으로 떠나라’ 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명을 부여받고, 앞으로 예수님께서 가실 고장에 미리 가서 평화를 빌어주고 병자를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다가 왔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떠남에는 편함과 여유로움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고난과 아픔 속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이중적인 모습을 볼 수 있는 떠남입니다.
꼭 위선자요, 거짓말쟁이처럼 느껴지는 괴로움이 수반되는 떠남입니다.
자신에 대해 알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대해, 주님께서 주신 소명을 수행하기 위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떠남에는 주님의 축복과 돌보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떠남의 모습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디모테오”와 “디도” 성인입니다.
두 성인은 바오로 사도의 직제자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두 성인에게 “나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였습니다.
두 분은 바오로 사도로부터 안수를 받고, 바오로 사도께서 전해주는 예수님을 마음에 담고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각기 속한 공동체를 향해 떠나서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주고, 병자를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증언하며, 자신들이 떠나온 이유를 누구로부터 파견을 받아 떠나 왔는지를 알렸던 것입니다.
곧 자신들의 편함과 만족을 위해 떠난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떠난 것입니다.
우리도 어떠한 목표점을 설정하고 이를 향해 길을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떠남의 여정 속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과연 나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고 길을 떠나는 사람인지, 아니면 나의 만족과 즐거움을 찾기 위한 떠남인지를 살펴봅시다.
두 번째는 떠남의 길이 하느님 나라를 향한, 예수님께 다시 돌아가기 위한 떠남인지 아니면, 비극이라 할 수 있는 허무를 향한 떠남인지 되돌아봅시다.
만약 내 자신의 만족과 쾌락을 향한 떠남이라면, 그리하여 허무만을 느끼게 하는 떠남이라면, 우리는 빨리 가는 길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발길을 돌리지 않기에는, 허무 속에서만 파묻혀 지내기에는 우리의 삶은 그리 길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멘.
† 성령의 빛 속에서 참된 회심을 †
-이현철 신부-
얼마 전에 읽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죽음을 체험하고 살아난 사람들의 증언에는 한결같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사람들이 어떤 신비로운 빛 속에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마치 드라마나 영화처럼 관람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사람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채택한다.”는 내용입니다. 저도 거기에 공감하는 것은 최근에 미국영화 ‘요크상사’를 보고나서입니다.
어느 산골에서 신앙생활을 하지 않고 술만 마시고 건달이었던 청년 요크가 모처럼 연애를 하면서 마음을 잡고 돈을 모아 평지땅을 사려고 했는데, 땅주인인 구두쇠 영감과 약속기한을 지키지 못하자 땅주인은 요크에게 좀더 기다려주겠다고 약속한 땅을 그의 연적이자 경쟁자에게 팔고 맙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요크는 장총을 들고 그 노인을 살해하려고 폭풍우 속을 말타고 달리다 그만 벼락을 맞고 맙니다. 그런데 그의 어머니의 기도덕분인지 기적적으로 살아난 요크는 다시 교회에 나가게 되고 모범 청년이 됩니다. 한편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요크도 징집되었지만 그는 양심적 병역기피를 하게 되어 재판까지 받게 됩니다. 하지만 청년 요크의 양심과 신앙을 인정한 상관의 배려와 고향 땅 산위에서의 기도 끝에 요크는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전쟁에 참전하여 명사수로 무공을 세우고 또 수많은 독일군들을 그의 지혜와 용기로 생포하게 되어 금의환향하게 됩니다.
오늘 독서(사도 22, 3-16)에서 교회를 박해하고 교인들을 체포하러 다마스커스로 달려가던 사울은 빛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사울이 급히 달리다 넘어졌는지? 아니면 말에서 떨어졌는지? 아무튼 그는 죽을 위험을 맞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아마 그래서 그는 빛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예수님을 박해하면서 살아왔는지 그리고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닫게 되었을 겁니다. 마치 깨끗하다고 여겨지던 방안의 공기가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살 속에 얼마나 먼지투성이인지 드러나듯이 말입니다.
아무튼 사울은 그동안의 자신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는 듯, 한동안 실명하게 되었고 또 자신이 그동안 박해했던 교인들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즉 아나니야의 도움으로 눈을 뜨게 되고 나중에는 바르나바의 추천으로 교회에 나가게 되며, 마침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사도로 변모하게 됩니다.
우리는 요크나 사울처럼 죽을 위험 속에서 극적으로 예수님을 만나기보다는 평소에 기도와 묵상중에 그리고 ‘성령의 빛 속에서 참된 회심’을 하면서 만나보면 어떨런지요? 참고로 회심에 관한 글을 소개합니다.
회심(悔心)이란?
수세기 전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마음을 바꾸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하는 일도 바뀔 것입니다.”
그 ‘창조적 마음의 변화’를 우리는 ‘회개(metanoia)’ 또는 ‘회심’이라고 부른다. 교황 요한 바오로2세께서 1999년에 우리에게 요청하신 것이 바로 이 ‘회심’이며, 현대 세계에 절실히 필요한 치유와 화해를 이루는 길도 바로 이 회심이다. 교황교서 제삼천년기에서 교황님께서는 1999년의 ‘아버지께 나아가는 여정’을 ‘진정한 회심의 여정’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진정한 회심’은 무엇을 뜻하는가?
교황님께서는 그것을 ‘죄로부터 돌아서서 선(善)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신다. 그리고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회심을 ‘사고방식과 행동의 점진적 변화”로 설명한다. 예수님께서는 ’회심‘(복음에서는 ’회개‘)을 ‘당신과 당신의 길을 따르라’는, ‘당신의 제자가 되라’는 부르심의 핵심 즉, 더 인격적인 관계로 설명하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초대와 요구로 당신 설교를 시작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마르 1,15). 곧 “하느님의 나라는 마음 안에서, 집단 안에서, 더 크게는 세상 안에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화해시키시며 변화를 일으키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서 개인과 집단과 온 세상을 다스리고 변형시키시며 새롭게 하고 화해시키시도록 협조해 드려야 하는 것이다.
복음서와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그리고 교황님께서는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의 인도 아래 이루어지는 참된 회심의 세 가지 차원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 번째 차원은 우리 눈의 열림이다.
진실한 회심은 우리의 실패와 한계와 죄를 보지 않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무제한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의 “기쁜 소식” 곧 “복음”을 믿는 것을 내포한다. 가끔 우리는 인간적인 사랑이나 아름다움, 또는 비극과 같은 특별한 사건을 통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도록 자신을 개방하게 된다. 정녕코 새로운 눈으로 자기 자신과 삶의 모든 것을 바라보도록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하느님 사랑의 수용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눈을 통해 삶을 바라보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두 번째 차원은 내적 변화이다.
그리스도인의 회심은 자기중심에서 상호신뢰로, 이기주의에서 모든 인간 존재와 하느님의 창조물들과 함께 하는, 마음과 정신의 근본적인 변화를 포함한다. 하느님 그리고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모든 것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핵심 가치이며, 우리는 이 가치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세 번째 차원은 우리의 삶과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점진적 변화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가치관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따라 오라.”고 당신 제자들을 부르신다. 그리고 복음서들은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 성령께서는 이 시대에도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이 시대와 환경에서 예수님과 똑같이 행동하도록 이끌고 계신다. 즉 우리 각자가 이 시대의 작은 예수로서 사명감을 가지고 살아갈 것을 촉구하고 계신다.
사울,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다
-이기양 신부-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는데 혹시 못 보셨는지요? 흔히 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해가 서쪽에서 떴다고 이야기하지요.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입니다. 교회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난 사건을 근거로 1월 25일을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열렬한 유대교 신자였던 ?사울?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몸담고 있는 유대교에서 못박아 죽인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 후 세례를 받고 ?예수는 주님?이라고 선포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사울 본인으로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울의 회개는 세계사를 바꾼 사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의미심장한 사건이지요.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두 기둥을 뽑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망설임 없이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를 뽑을 것입니다. 특히 바오로 사도는 27권의 신약성경 중에 약 13(4)권이나 되는 책을 집필한 저자이기도 하지요. 그 성경은 테살로니카 전?후서, 코린토 전?후서, 갈라티아서, 로마서, 필리피서, 필레몬서, 콜로새서, 에페소서, 티모테오 전?후서, 티토서, 히브리서입니다. 그 중에서도 초대 교회를 전 세계로 확장한 일등 공신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가 바오로 사도를 두고 ?그리스도교의 발명가?라고 까지 부를 정도였으니 바오로 사도를 초대 교회의 근간을 이룩한 사도라고 보아도 틀림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죽었다?고 부르짖은 니체는 사울을 이렇게 변화시킨 분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음을 몰랐음이 분명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이름은 그래서 두 개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교 신자였던 때 ‘사울’로 불렸고 회심하여 그리스도교 공동체로 들어와서는 ?바오로?로 불리었지요.
역사를 바꾼 바오로 사도의 회심 이야기가 오늘 독서의 내용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행전 9장, 22장, 26장에 되풀이되어 묘사되고 있습니다. 같은 성경에 세 번씩이나 반복되어 다루어진 것을 보면 이 일이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바오로 사도는 너무나 열렬한 유대교 신자였기 때문에 유다교를 거부하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스테파노가 죽을 때에도 옆에서 찬동을 하였고, 스테파노의 죽음 이후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안티오키아 쪽으로 도망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잡으러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에 대한 그의 박해는 유명하여 심지어는 예루살렘에서 다마스쿠스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오로의 회심을 옆에서 도왔던 하나니아스라는 사람까지도 바오로의 악명을 들었을 정도였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사도9,13)
사울을 찾아가라는 주님의 요청에 하나니아스가 한 대답입니다. 그 곳까지 소문이 자자했던 것이지요. 바오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안티오키아에 모여 있다는 말을 듣고 대사제들과 원로들로부터 아주 특별한 위임장을 받고 혈기왕성하게 그들을 잡으러 갑니다. 의기양양하게 길을 가고 있는 바오로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며 그의 둘레를 환히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바오로는 너무 놀라서 땅에 엎드러지고 말지요. 그때 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9,4)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사도9,5) 깜짝 놀란 바오로가 묻자 그 음성이 대답합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9,5)
이 순간 사울은 완전히 다른 인물이 되어버립니다. 단 한번 예수님과의 만남으로 유다인으로서의 사울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 바오로로 탄생이 되지요. 다마스쿠스에 도착한 바오로는 예루살렘을 떠날 때의 혈기왕성한 유다인 사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너무나도 놀라서 모든 것을 뉘우치고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며 그리스도교를 전 세계로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변화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회심이 이루어지고 나서 바오로 사도는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주님을 증언하게 됩니다.
사울의 변화는 그의 판단력이나 의지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를 뽑은 이유가 오늘 독서에 나와 있지요.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도9,15-16)
스테파노를 돌로 쳐 죽이는 데에 가담하고 그리스도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하여 다마스쿠스로 출발할 때부터 벌써 주님은 바오로 사도를 당신의 일꾼으로 뽑아 놓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충격으로 땅에 엎드려졌던 사울은 즉시 기력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사흘 동안이나 앞을 못 보고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못했지요. 마치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사흘 밤낮을 돌무덤에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것 같은 과정을 겪습니다. 그 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만나면서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사도9,18) 되지요.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세례를 받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사울이 주님께로부터 큰 은총을 받는 장면을 보고 우리는 이제 그가 당장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큰 일을 하고 승승장구하리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크신 은총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직접 불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공동체는 바오로를 받틉湧肩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뛰어난 선교사 스테파노를 죽이는 데 찬동하고 조직적으로 자신들을 박해하는데 힘을 쏟던 유다의 열혈 청년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사면초가에 빠진 바오로사도는 45년경 1차 전도여행을 하기까지 많은 시련과 실패를 체험하면서 성과없는 11년을 보내고 고향 타르수스에서 은둔생활을 하기까지 합니다. 실의에 빠져 고향에 머무르고 있는 바오로를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 교회를 돌보기 위해 파견된 바르나바가 사목자로 부릅니다. 그때서야 하느님의 사람으로 쓰기 위해 부르셨지요.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생각은 이렇게 다른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 때가 있는 법입니다. 사울의 사람됨과 그 행위를 낱낱이 아시고 그를 바오로로 변화시킨 후에도 주님은 기다리셨습니다. 묵묵히 지켜보시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다른 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바오로가 회심하자마자 자신의 경험과 의지만을 믿고 마구 행동했다면 분명히 얼마 안 가서 실패자가 되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자기의 의지만을 믿는 사람은 반드시 걸려 넘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주님께서는 바오로가 힘이 빠져 성령 안에 자신을 도구로 내어 맡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구약의 대표적인 인물인 모세 또한 혈기 왕성하게 자기 민족을 박해하는 이집트 사람을 쳐죽이지만 그의 의거는 실패로 돌아가지요.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모세는 사십 년 동안을 양치기로 보내야 했습니다. 힘이 다 빠진 모세가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낼 수 있겠습니까??(탈출3,11)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3,12)하고 끌어내시지요. 바오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의 의지나 지식만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도구로 내어 맡길 때 풍요로운 결실을 맺게 되지요. 또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어 맡긴다고 해서 시련이나 고난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에게도, 부활을 체험한 열 한 사도에게도, 또 갑작스럽게 회심한 사도 바오로에게도 분명하게 주어진 소명과 고난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 복음을 전하는 길은 험난하지만 세상이 줄 수 없는 자유와 평화를 주는 길이지요. 복음을 전함으로써 누구보다도 강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던 바오로 사도는 주님을 전하는 일을 사도의 권리라고 말합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 나도 복음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1코린9,23)
이 복음 선포의 사명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시대와 역사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사명입니다. 이 곳에 성당에 세워진 이유도 바로 그것이지요. 이 지역에 복음을 전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느님께 미사를 드리며 감사와 찬미로써 모든 봉헌을 마치고 파견될 때마다 사제는 신자들에게 촉구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또 다시 복음 선포의 사명을 일깨워주는 것이지요. 복음 선포가 바로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이고 그것이 가장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들, 그리고 하느님의 부활의 체험을 더 깊이 성장시키는 방법은 복음 선포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하고 우리 공동체가 복음적인 공동체로 거듭 성장하려면 복음 선포의 사도로서 내 자신을 성령의 도구로 내여 놓아야 합니다. 그 때 개인의 부활 체험은 더욱 깊어져 성화 되고 공동체는 복음적인 공동체로 한 걸음 더 성장될 수 있는 것입니다.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9,15)
오늘 주님께서 하나니아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을 지내는 우리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같은 사명을 주셨습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을 실천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실천하는 오늘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의 사명
-조욱현신부-
처음에 그는 예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것이 하느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을 뵙고 예수님이야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고 당신의 교회와 한 몸이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때에 회개한 바오로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하게 된다.
교회가 바오로 사도의 개종을 축일로 지내는 것은 그의 개종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큰 은총"이라는 데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 축일은 8세기부터 프랑스 지방에서 먼저 지내오다가 10세기말에 교회력에 정식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의 개종은 어떤 의미에서 주님의 또 다른 공현이며 그리스도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메시아의 모습으로 사울에게 나타나셨다.
사도의 개종은 교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획기적인 사건들 중의 하나이며, 박해자였던 사울로를 이방인의 사도로 변화시켜준 사건이었다.
그의 개종은 또한 하느님 앞에 크나큰 겸손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도 바오로의 "개종"은 그의 가르침의 많고도 중요한 요소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특히 거룩한 은총과 교회의 잔인한 박해자 사울로를 "사도"로 변화시킨 능력에 대한 권능의 주제에 대한 그의 학설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교회는 사도 바오로의 개종축일을 지내고 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방인의 사도로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실천한 분이었다.
예수께서 당신의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한까지 주시면서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신다.
"너희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사도들은
그러기에 또 다른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다.
부활을 체험하였다는 것은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였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이 체험을 통하여 살아 계신 주님을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교회가 갖는 선교의 사명 역시 이 부활하신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주님께서는 이 복음 선포를 항상 협력해 주시고 계시다.
이 도우심을 믿고 우리는 용감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주님을 알게 된 것은 특권이라기보다 하나의 의무요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알고, 신앙 안에 사는 것이 진정 행복함을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해야하는 일들 중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듯이, 즉 어렵고 힘들어도 해내야 하듯이 우리는 세례를 받으며 우리가 받은 우리의 세례의 사명을 다 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복음 선포의 삶이 나 자신과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여 모두가 복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우리도 사도 바오로와 같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자.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모든 사람에게 이 복음을 선포하여라.
-강영구신부-
오늘은 바오로 사도의 개종(改宗)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천년 전에 사울이라는 골수 유태교 청년이 있었습니다. 정통 유태교의 랍비 교육을 받은 그는 당시 신흥 종교인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죽이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커스에 가다가 그는 빛 속에서 예수를 만납니다. 말에서 떨어진 그는 강력한 빛 때문에 시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귀는 열려있어서 “왜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예수의 말씀을 듣습니다. 아나니아의 안수로 다시 눈을 뜨게 된 그는 박해자에서 복음 선포자로 변신합니다. 무엇이 사울을 바오로가 되게 합니까?
복음(福音)은 기쁜 소식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가 바로 복음(福音)입니다.
하느님의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예수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하늘에서 들려오는 아름답고 감미로운 노래입니다. 예수가 그 노래입니다.
그 노래를 듣는 사람은 인생이 바뀝니다. 하느님의 대자비(大慈悲) 속에 잠기게 됩니다.
복음은 달콤하고 아름다운 향기입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가 그 향기입니다.
벌과 나비가 향기에 이끌려 아름다운 꽃을 만나듯이
예수의 향기는 하느님의 큰 사랑을 만나게 합니다.
예수의 향기에 취해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 사람은 하늘나라(天國)를 열매 맺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머무는 곳에 악마와 악령이 물러가고 병든 사람이 깨끗이 낫고 죽었던 사람이 살아납니다. 하느님의 손길은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박해자 사울이 예수를 만나서 바오로가 되듯이
복음(福音)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향기(2고린2,15)가 됩니다.
당신도 오늘 하루 종일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으면서 복음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一明)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 15-18)
-유 광수신부-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믿고 세례를 받는 이는 구원을 받고 믿지 않는 자는 단죄를 받을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15-17절)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는 복음 선포의 사명을 맡기신다. 그럼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기적을 일으키는 일이다. 기적을 일으키지 않고서는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우리 주위에서 매일 새로운 신상품이 개발되어 나오고 옛날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제는 웬만한 일로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아니 사람들에게 호감을 살 수가 없다. 맥빠진 강론, 생명력이라고는 하나도 찾아 볼 수 없는 형식적이고 틀에 박힌 듯한 전례, 세상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성직자, 수도자들의 생활을 통해서는 복음 선포가 될 수 없다. 정말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단순한 말만으로 복음을 전할 때는 지나갔다. 그럼 어떻게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가? 어떤 기적을 일으켜야 하는가?
"믿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곧 내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 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이 나을 것이다."고 했던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이런 기적은 꼭 어떤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믿는 이들에게는이러한 표징들이 따를 것이다." 라고 했다. 따라서 믿는 이라면 누구나 이런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기적들을 일으키는가? 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면 복음을 선포할 수 없다. 아니 복음을 선포한다 하더라도 아무도 믿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또 이런 기적을 일으키지 못하면 복음을 선포할 용기도 없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런 기적들을 일으킬 수 있을까? 정말 이런 기적들이 믿는 이들에게 일어나는 것일까? 만일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복음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기적이 일어난다. 아니 복음을 전하려면 반드시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오늘 복음은 마르코 복음의 끝 부분이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이 말씀은 제자들의 영적 여정을 다 끝마친 다음에 하신 말씀이다.
즉 제자들이 예수님한테 불리움을 받은 그 때부터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면서 예수님한테 직접 교육도 받고 또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을 보면서 조금씩 조금씩 신앙이 성숙해졌고 마침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서 받은 사명이다.
따라서 복음 선포자가 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필요한 훈련과 교육을 받은 후에야 비로서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고서는 결코 복음 선포자가 될 수도 없고 또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지도 못한다.
제자들은 복음 선포자가 되기 위해서 자기들이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버렸고 불리움 받은 그 순간부터 예수님이 죽으실 때까지 끝까지 예수님만을 따라 다녔다. 그리고 때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절대로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비록 자기들이 이해하지 못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의 길일지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따랐다.
제자들이 복음 선포라는 사명을 받게 된 것은 그냥 앉아서 받은 것이 아니다. 그만한 훈련과 희생, 포기, 교육을 통해서 받게 된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때로는 예수님한테 꾸중도 듣고 질책도 받고, 자기 자신까지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야 했다.
결국 복음 선포자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복음선포자가 되기 위해서는 완전히 예수님을 통해서 아니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먼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런 자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고 새로운 언어들을 말하며, 손으로 뱀을 집어 들고 독을 마셔도 아무런 해도 입지 않으며, 또 병자들에게 손을 얹으면 병을 낫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려면 우리 자신이 복음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도 제자들이 예수님 한테 처음 불리움 받은 그 순간부터 걸어갔던 영적 여정을 우리도 걸어가야 한다. 영적 여정을 걸어가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잘라 버릴 것은 잘라 버려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 자신은 죽고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해야 한다. 그래야 복음 선포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 동안 너무 안일하게 예수님을 따랐는지 모른다. 그리고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교육시켰던 그런 방법을 따르지 않고 내 맘대로 예수님을 따랐는지 모른다.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마르코가 제시해준 영적 여정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제자들이 걸어갔던 그 길, 예수님이 열 두 제자들을 교육시켜나갔던 그 방법을 따라 우리의 영적 여정을 시작해야 한다. 그런 자만이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며 믿는 이들이 일으키는 기적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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