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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1월 27일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등불은 누구나 등경 위에 얹어 놓는다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
(마르 4,21-25)
"Is a lamp brought in to be placed under a bushel basket
or under a bed, and not to be placed on a lampstand?
"Take care what you hear.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 저자는 세례를 통하여 구원을 받은 신앙인들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을 가지고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하느님께 나아가기를 권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비추는 빛으로 오셨다. 그분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을 통해서이다. 베풀고 나누는 사람이 오히려 더 많은 축복을 받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밤에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들고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그와 마주친 사람이 물었습니다. “정말 어리석군요. 당신은 앞을 보지도 못하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닙니까?”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나와 부딪히지 않게 하려고요. 이 등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배려』라는 책에서 재인용한 글입니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위해 빛을 밝혀 본 적이 있는지요? 어둠 속에서 등불을 밝혀서 길을 찾아 주고, 그 사람이 안전한 길에 들어설 때까지 함께 동행해 준 적이 있는지요?
사람은 머리보다 가슴이 더 깊고 진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머리는 그 사람의 외모, 성격, 재능 등의 정보를 기억하지만, 가슴은 사랑, 배려, 진실 그리고 용서 등 그 사람의 마음을 기억합니다. 머릿속의 기억은 시간과 함께 지워지지만, 가슴속 기억은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 삶 속에서 축복이 되기도 하고,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위해 밝힌 그 등불은 배려와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바친 사랑과 배려의 크기만큼 그 빛은 밝기를 더할 것입니다. 그 빛을 밝히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
등불을 침상 밑에 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어 놓으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내어 놓는 행동일는지요? ‘밝은 모습’으로 사는 일입니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행동입니다. 늘 부딪히는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는 모습입니다. 가족에게 ‘삶의 이유’를 제공하는 일입니다. 어느 것 ‘하나’를 실천하더라도 등불을 밝히는 행위가 됩니다.
베풀지 않으면 받을 수 없습니다. 주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습니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울한 중년이나 외로운 노년은 ‘베풀고 나누는 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표현입니다.
운명은 언제나 자신의 것입니다. 아무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운명에 끌려가기’보다는 ‘운명을 밀고’ 가야 합니다. 삶의 본질은 기쁨이며, 인생의 근본은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서두를 이유가 없습니다. 천천히 베풀며 가도 인생은 늦지 않습니다.
누구도 등불을 침상 밑에 두지는 않습니다. 높은 곳에 두기 마련입니다.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르게 베풀어도 언젠가는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미래를 밝혀 줍니다. 시간이든 건강이든, 명예든 자식이든 ‘꼭 쥐고’ 있으면 오히려 떠나갑니다. 내어 놓고 나누어야 오히려 주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삶의 신비입니다.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를 드시며 “누가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고 하십니다. 방을 환하게 하려면 높은 곳에 두기 마련입니다. 선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은 남몰래 베풀지라도 언젠가는 드러납니다. 그리하여 그의 미래를 환하게 밝혀 줍니다. 삶의 등불을 켜는 것이지요.
어느 날 공자는 제자들에게 질문합니다. “덕이 높을 것 같은가? 복이 높을 것 같은가?” 제자들은 단숨에 답합니다. “그야 당연히 덕이 높지요.” 그러나 스승의 말씀은 의외입니다. “아니다. 복이 높다.” 제자들이 따지듯 묻습니다. “그렇다면 복 받으려 하지, 누가 애써 덕을 닦으려 하겠습니까?”
제자들의 공격에 공자는 말합니다. “나는 오랫동안 덕을 닦으려 애써 왔다. 그런데 주변에는 별로 힘들이지 않고 겸손의 덕, 절제의 덕, 용기의 덕을 지닌 사람들이 있다. 하늘이 복을 내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제자들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스승님, 어떻게 하면 그런 복을 받을 수 있을는지요?” 공자가 대답합니다. “적선 외에 달리 무슨 방법으로 하늘의 복을 얻겠느냐?”
우리 속담에도 적선을 하면 귀신도 어쩌지 못한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좋은 기운이 감싸고 있기에 악한 기운이 다가서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선행에는 하늘의 힘이 함께합니다. 교리적으로 말하면, 은총이 감싸고 있는 것이지요.
이렇듯 선행과 자선은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주건만 많은 사람이 그것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복은 받고 싶어 하면서 정작 그 길은 외면하고 있는 셈입니다. 선행의 등불을 켜야 합니다. 그러면 운명은 밝아집니다.
더불어 법칙
-김찬선신부-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
어떤 이들이 습관적으로 그러듯이
우리의 모임을 소홀히 하지 말고, 서로 격려합시다.”
건널목(횡단보도)을 건널 때 저는 재미있는 현상을 보곤 합니다.
차가 많이 다니는 곳은 아니지만 신호등이 있는 곳입니다.
신호들이 빨간 불일 때
차가 오지 않아도 인내하며 잘 기다리던 사람들이
누구 하나가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면 같이 우르르 건너갑니다.
그런 상황이 되면 이번에는 어쩌나 하고 저는 지켜보는데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한 사람이 규칙을 깨트리면
다른 사람도 덩달아 규칙을 깨트리고 맙니다.
고속도로 정체 때도 어느 한 차가 위반하여 갓길로 가면
지금까지 준법주행을 하던 다른 차도 갓길로 갑니다.
한 사람의 악행은 모든 선행을 허물어버리는 것입니다.
작은 구멍이 거대한 둑을 허물 듯
하나의 작은 악이 모든 선행을 허물어버립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선행은 선행을 격려합니다.
선행은 선행을 자극합니다.
선행은 악행을 억지합니다.
이것이 ‘더불어’의 법칙입니다.
‘더불어’는 ‘더’와 ‘불어나다’가 합쳐진 말입니다.
무엇이든지 더불어 하면 더 불어납니다.
선행을 더불어 하면 마치 작은 불이 큰 불이 되듯이 큰 선이 되어
웬만한 악으로 어쩔 수 없게 되지만
악행을 더불어 하면 시너지 효과로 더 큰 악이 되어
웬만한 선으로 어찌할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공동체는 나쁜 것이 더 불지 않고
좋은 것이 더불도록 해야겠습니다.
등불을 더 밝게 비추기 위해
- 이창걸-
지난 겨울에 세브란스병원 가톨릭 교우들의 모임인 등잔회에서 해미성지로 순례를 가서 미사를 드렸다. 신부님께서 우리 모임이름이 등잔회라는 것을 들으시고 참 의미가 있고 좋은 명칭이라고 하셨다. 등잔회는 원래 영동 세브란스병원 가톨릭 교우들의 모임으로 활동해 왔는데 2000년 9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도 가톨릭 교우들의 모임을 시작하면서 서로 일치감을 갖기 위해 같은 이름인 등잔회로 했다.
1999년 미국 연수 후 귀국했을 때 가톨릭 신앙을 혼자 성장시키기는 어려워 누군가 함께하고 싶었다. 누가 신자인지 모르던 차에 식당에서 성호경을 긋고 식사를 하니 내 앞에 있던 박 교수님이 “나도 신자야. 지금은 성당에 잘 안 나가고 있지만 그래도 세례명은 추기경님과 같아.”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박 교수님이 아는 천주교 신자가 누구인지 물었고 또 그분들에게 가서 또 알고 있는 신자들을 알려 달라고 해서 알음알음 모여 대희년인 2000년 9월 18일 감격의 등잔회 첫 모임을 갖게 되었다. 매월 기도모임을 하고 피정이나 성지순례를 다녀오면서 교우 직원들의 우애를 다졌다.
2005년 5월 4일 세브란스 새 병원이 개원되기 전에 등잔회에서는 모금을 해서 1000만 원을 건립기금으로 기증했다. 새 병원 로비에 기증자명단에 그 이름이 올라 있다. 그때의 소망은 무엇보다 환자를 위해 매주 미사가 봉헌되는 것이었다.
포도나무 학생동아리에서 연 4회 미사를 드리면서 환자들과 함께했고 2년 전부터 부활절·성탄절, 추석 때도 미사를 부탁하여 연 7회로 늘어나다가 올해 4월부터는 원목실의 배려로 매달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다. 지도 신부님도 연희동 성당 신부님께서 맡아 수고해 주신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등잔회는 조금씩 그 등불을 밝게 비추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희망하건대 매주 미사가 봉헌되어 가톨릭 신자들이 고통 중에도 성체를 받아 모실 수 있는 날이 오길 소망해 본다. 한편 박 스테파노 교수님은 지난 10월 견진성사를 받고 이제는 매주 미사를 빠지지 않고 다니고 계시다.
들음과 새김
김연희 수녀-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와 사랑의 계명을
잘 알아들으려면, 그분의 설교 중에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유들을 제대로
파악해나가고 그 깊은 의미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은 등불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곧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이든 비신앙인이든 계속해서 듣도록 요구하십니다. 또한
이어서 우리에게 “너희는 새겨들어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들을 귀를
지닌 자가 누구입니까? 오직 믿음으로 마음을 여는 자가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 담긴 비유는 듣는 이의 마음속에 오래 새겨져 그 시기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새롭게 다가올 수 있고, 그 강렬한 메시지는
새로운 삶을 향하여 도전하는 데 힘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새김으로써
내적 통찰력을 얻게 된 자는 자신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가장 중요하고도
영원한 가치를 선택하는 결단력을 갖게 됩니다.
“보고 맛보고 만져보아도 알 길 없고 다만 들음으로써 믿음 든든해지오니
믿나이다. 천주 성자 말씀하신 모든 것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참된 진리
없나이다”라고 자주 애송하는 성 토마스의 성체 찬미가를 오늘도 읊어봅니다.
죄의 사회적 측면
-전삼용신부-
어떤 피정에서 한 지도 신부님이 혼자 짓는 죄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니 괜찮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혼자 그 죄를 지었다고 과연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요?
제가 일반 대학 다닐 때 심심풀이로 관상을 좀 공부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 관상 책을 보며 강의하는 교수님들의 얼굴을 표본 삼아 관상을 연습하였습니다.
그 때만 해도 얼굴 보며 몇 시간은 이야기 할 정도로 심취해 있었습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내면인데 그것들이 얼굴에 드러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관상을 봐주었는데 보아주는 제가 신기하게도 80%정도는 맞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관상은 하나의 통계입니다. 선천적으로 생긴 얼굴과 후천적으로 인상을 써서 생기는 얼굴의 조합이 사람의 성격과 운명을 만들어갑니다.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 중에 더 중요한 것은 후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해진 운명이란 사실 없고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얼굴이 변해가는 사람도 있고 사실 제 얼굴도 예전에 비해서는 많이 변했습니다.
예를 들면 걱정을 많이 하는 사람은 윗눈썹 사이에 골이 파입니다. 걱정을 하니 저절로 미간이 찡그려지고 그렇게 시간이 오래 지나다보니 당연히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기는 것입니다.
또 눈이 위로 치켜뜬 눈은 윗사람들에게 대항하는 상입니다. 실제로 자신도 모르게 윗사람들을 그렇게 노려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래로 내려 보는 눈은 아랫사람을 내리 누르는 상이겠지요.
물론 지금은 관상을 보지도 않고 다 잊어먹었습니다. 사람들 중에 혹시 특이한 관상이 있을 때는 하나씩 기억나기는 하지만 사람을 앉혀놓고 관상을 보아 주는 것은 군대 제대하고 끝냈습니다.
어느 순간에 관상에서 말하는 길흉화복(吉凶禍福)이 현세에서 돈 많이 벌고 오래 사는 등의 매우 속세적인 기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관상에서의 복은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잘 사는 것이지 영혼이 구원되거나 하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관상학으로 보면 그것만큼 안 좋은 운명을 타고 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난하고 고생하고 치욕의 죽음을 당한 것이 우리 믿음 안에서는 더 할 수 없는 가치 있는 삶이었습니다.
또 하나의 위험성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실 관상을 조금 했어도 맞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럼에도 관상대로 성격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어쨌거나 관상 보는 것을 더 이상 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하나 믿는 것은 있습니다.
바로 자기 얼굴엔 안에 있는 것들이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십 이후 얼굴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하듯이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짓는 표정들이 얼굴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다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 숨길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적어도 하느님은 다 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마 우리 경험 안에서도 아이들이나 주위 사람들이 ‘뻔한 거짓말’을 할 때 쉽게 알아차렸던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 나름대로는 거짓말을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 사람들은 다 보고 있는 것입니다.
혼자 죄를 짓고 그것이 감추어질 것이라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것은 어떻게든 자신의 말과 행동, 표정 등을 통해 밖으로 나타나게 되고 다른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이 죄의 사회성이고 온전히 개인적인 죄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들입니다. 빛은 대낮이고 대낮에 숨길 수 있는 것들은 없습니다. 죄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짓는 것입니다. 적어도 완전히 죄를 물리칠 수는 없어도 자신에게 솔직하고 또 이웃을 위해서라도 죄를 줄여나가도록 합시다.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 강인봉-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면 뭔가 크게 한 획을 긋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인지 어린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대통령?·?장군?·?과학자 등 위인전에 등장할 만한 직업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은 장래 희망직업으로 연예인이 가장 많다고 하더군요.) 평범한 삶보다는 뭔가 특별하고 자신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누구한테나 그런 능력이 주어지지도 않고 또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기회를 잡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장래 희망은 점점 평범해지고 소박해지고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변하지요.
신앙인으로서의 우리 삶은 어떨까요? 누구나 빛과 같은 사람, 향기로운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이런저런 이유로 자신이 꿈꾸던 신앙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스스로에게 실망합니다. 하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구나 순교자나 성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성직자나 수도자가 될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께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으니까요.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다면 그 빛을 더욱 밝게 반사시키는 거울 같은 삶에도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겁니다. 최소한 그 빛을 가리는 됫박이나 침상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있어서 좋은 사람, 있으나 마나 한 사람, 없는 게 나은 사람.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하느님 나라 -조명연- 우리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상대방의 기를 살리기도, 또 반대로 죽이기도
합니다. 만약 내가 오늘 아침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긍정적인 말, 칭찬의 말,
사랑의 말 등을 들으면 어떨까요? 모든 것이 기쁘고 세상 살맛을 느끼게 되면서 하루를 신나게 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부정적인 말, 미움의 말,
악담 등을 듣는다면, 머리에서 그 말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서 하루 종일
우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기쁨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즉,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기를 뺏는 나라가 아니라 기를 살리는 나라입니다. 또한 ‘하느님 나라’ 하면 보통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죽어서 갈 수 있는
나라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체험하는 나라입니다. 달리 이야기한다면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죽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하느님 나라는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내 이웃을 위해서
기를 살리는 말과 행동을 한다면 바로 그 순간 하느님 나라가 내 곁에 자리잡게 된다는 것입니다. 겨자씨라는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듯, 우리의
작은 칭찬이 다른 곳에서 더 큰 수확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기쁨을 주는
말 한마디, 그것이 하느님 나라를 키워가는 좋은 거름이 됩니다
가진 것은 작아도 마음은 크게!
-김찬선신부-
“너희는 새겨들어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할지 사람들을 수상쩍게 봅니다.
그렇기에 정말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자본주의의 논리로 이해하면 큰 일입니다.
자본주의의 신조는 “Money creates money”,
“돈 놓고 돈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이런 신조로 왜곡해서 알아들으면
“하느님은 있는 자의 편이다.”
“하느님은 돈 있는 사람에게 돈을 더 주신다.”가 될 수 있습니다.
만일 이렇게 이해한다면
오늘 주님의 말씀을 근본적으로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먼저 오늘 주님의 말씀은 소유가 아니라
나눔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심 사나운 신조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기 위해서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건
빼앗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신조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말씀은 주기 위해서 가지는 것입니다.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게 될 것이다.”고
바로 앞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있는 사람만이 줄 수 있습니다.
없는 사람이 어떻게 주겠습니까?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어떻게 줄 수 있습니까?
그러니 주지 못하는 사람은 불쌍하고 불행합니다.
줄 것이 없는 사람이거나
줄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 말씀은
더 많이 소유하려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더 많이 주려는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고
더 많이 주도록 하느님께서 더 많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 말씀을 우리는 재물의 차원만이 아니라
마음의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으로도 알아들어야 합니다.
줄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더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복음에서 “가진 사람”이란
재물을 가진 사람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줄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없다고 생각하며
줄 마음조차 없는 사람이 불쌍하고 불행한 사람입니다.
줄 마음만 있으면 줄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불과 장작은 있지만 정작 제물인 양이 없다고 하는 이사악에게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것이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우리는 줄 마음과 봉헌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하느님께서 줄 것과 봉헌할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작은 빛과
작은 능력과
작은 소유와
작은 성의를 우습게 여기고
함지속이나 침상 밑에 처박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가지고
거기에 더 보태어 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진 것은 작어도 마음은 크게!”
이것을 오늘의 경구,
아니 일생의 경구로 삼아도 좋지 않을까요?
-박철현신부-
등불은 요즘 우리가 거의 사용하지 않는 추억 속의 물건입니다. 하지만 등불을 생각하면 마음이 훈훈해집니다. 거기에는 왠지 모를 포근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등불의 존재이유는 무엇입니까?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데 그 존재이유가 있습니다. 대낮에 등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밤에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등불의 비유’를 통해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진리는 감추어두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드러내 보이고 증거 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이런 진리를 전하려할 때에 때로는 박해를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진리의 반대 세력이 그것을 막으려고 온갖 술수를 다 부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진리는 드러나게 되고, 진리가 옳다는 사실이 밝혀져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감추어 둔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그것이 지금은 당장 드러나지 않고 타인을 속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불안합니다. 그렇게 순간을 벗어나기는 하지만 하느님 앞에 감추어진 비밀로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죄를 짓게 된다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등불인 하느님의 진리를 외면하면 우리는 어둠 속에서 헤매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리를 받은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감추거나 가리지 말고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비추는 등불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사는 생활, 다른 이들의 어둠까지 밝혀 진리를 증거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사람의 잘못 여섯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하나, 남을 깎아내리면 자기가 올라간다고 착각함.
둘, 바꾸거나 고칠 수 없는 일로 걱정함.
셋, 어떤 일을, 자기가 이룰 수 없으니까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함.
넷, 대중의 편견을 생각 없이 따름.
다섯, 생각의 발전과 진보를 무시하여 독서하고 공부하는 습관을 들이지 아니함.
여섯, 다른 사람에게 자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강요함.
정말로 우리들은 이러한 잘못을 끊임없이 반복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로 나를 중심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요. 내가 중심에 있기에 그 무엇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그래서 주님도 이 가운데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옛날, 바른 나라의 왕이 참된 나라 왕의 초대를 받아 놀라갔습니다. 참된 나라의 왕이 자기 나라 풍습에 따라서 다가와 뺨에 입을 맞추려 하자 바른 나라의 왕은 질겁했지요. 모르는 사람끼리 입술을 갖다 대는 것은 바른 나라에서는 불결한 행동으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른 나라의 왕은 자신이 교육을 제대로 받은 신사중의 신사라는 사실을 증명할 생각으로 참된 나라 여왕에게 다가가 엉덩이를 슬슬 어루만졌습니다. 왜냐하면 이 행동이야말로 바른 나라에서는 “댁의 아내가 참으로 아름답고 건강하구려.”라는 칭찬이었거든요.
하지만 참된 나라의 왕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노발대발했지요. 왕은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선전 포고를 했고, 바른 나라와 참된 나라의 전쟁으로 숱한 사람들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바로 다른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들도 이러한 잘못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주님이 아닌 내가 중심이 되어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을 또다시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불의 비유 말씀을 해주십니다. 등불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두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말은 곧 무엇을 의미할까요? 당연한 진리를 쫓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중심에 세움으로 인해서 진리에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중심에 세워서 진리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여러분은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었는지요? 이제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잘못들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의 잘못 여섯 가지에서 벗어나도록 노력합시다.
스스로 결정 짓는 것
-구경국 신부-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많이 먹는다’는 속담처럼 자주 경험하거나 열심히
연습을 하여 숙달이 되면 저절로 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숙달이 숙련을 창조하는 것은 학문이나 기술의 연마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 봉사, 선행, 기도 등과 같은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도 역시
예외가 없습니다. 본당공동체 등에서 항상 봉사하는 사람들이 이 단체 저 단체에서
열심히 봉사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계속 뒷짐을 지고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봉사와 같은 사랑을 실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것으로써
하느님께 점점 더 가까이 가는 데에 반해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법조차 잊어버리게 되어 저절로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오늘의 복음 말씀은 주고받는 것을
주님께서 능동적으로 주도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계속 실천함으로써
사랑을 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는 사람은 더 많은 사랑을 받게 되고 사랑의 실천을
미루기만 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랑이 저절로 유보되어진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더 많은 사랑과 은총을 받느냐
그렇지 못하냐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임의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결정 짓는 것입니다.
안면보시(顔面普施)
-김현숙 수녀-
등불! 빛은 밝음과 따뜻함 그리고 확산의 속성이 있다.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스스로 퍼져 나간다. 이는 다른 사람을 비추기 위해서다.
지금은 옛 정취로 남아 있는 호롱불. 학창 시절 늦은 귀갓길, 인적이 드문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올 때 우리 집 대문에서 비쳐오는 불빛만 보아도 긴장했던 다리의 힘이 확 풀리며 안도의 큰 숨을 쉬곤 했다. 그리도 밝게 빛나던 등불이 이젠 대낮에도 어느 사무실이나 켜져 있건만 밝음과 따뜻함을 쉽게 느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빛이 내 시야와 가슴에 담아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빛의 강도가 아무리 높다 해도 안목이 더 높아지지 않고 인정이 메마른 탓일까? 스스로 누군가에게 빛을 밝혀주려는 마음이 부족하기 때문일까?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도 없고, 또 아무것도 받을 것이 없는 부유한 사람도 없다고 했다. 다만 무언가 채워야 한다는 생각이 무언가 나누어 주려는 마음보다 앞서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을 뿐이다. 나눈다고 할 때 좋은 것, 나눌 만큼 풍요로운 것이 없다는 생각이 또 앞서기 때문이다.
언젠가 상담 워크숍에서 자신의 life story를 나눈 기억은 아직도 내 영혼을 흔든다. 한 자매님이 다른 사람을 위해 장기를 기증하듯이 자신의 상처를 나누겠다고 하면서 아픔과 수치로 점철된 자신의 깊은 생채기를 보여주었다. 자신의 아픈 과거와 현재를 우리에게 선물로 나눈 것이다. 나는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십자가에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생각했다. 자매님을 통해 그 자리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아픔과 결핍을 서로를 위한 선물로 나누게 되었다.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간증(干證)이었다. 그리고 참으로 건강하다는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보시할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서로를 위하여 자신을 선물로 기꺼이 내놓는 것임을 배웠다. 보시 중에 으뜸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안면보시(웃는 얼굴)라고 했던가! 나의 아픔과 상처를 나눌 수 있다면 밝고 따뜻한 등불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등불처럼 환하게 웃어보자. ●
양극화의 해법
-오상선신부-
자본주의 경제의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심화,
즉 양극화 문제이다.
부자는 더욱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이는 더욱더 가난한 이가 될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계이기도 하다
.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인류가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 중의 하나 일지도 모른다.
제도상의 보완을 통하여 각 나라마다 나름대로 노력은 하고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 문제에 대한 해결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지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새정부에게 경제활성화를 기대하고는 있지만
경제활성화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더욱더 가속화시킬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걱정스럽기 짝이 없다.
그런데 나는 문득
양극화 문제는
바로 부익부 빈익빈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란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오늘 말씀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바로
부익부 빈익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경제적 측면에서의 부익부 빈익빈이 아니라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을 말하는 것이다.
경제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의 해결책은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숙고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나누면 나눌수록,
주면 줄수록 더욱더 풍요로워지는
영적인 부자됨의 신비는
경제적, 물질적 부익부 빈익빈 현상과는
정반대 현상이기 때문이다.
경제적 측면의 부익부 빈익빈은
서로 자기 것을 챙기려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은
서로 자기 것을 버리고 주려는 열망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나누면 나눌수록
영적으로는 더욱더 가진자가 되고
자기 것으로 챙기면 챙길수록
영적으로는 매마른 영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스승 예수님의 해법은
인류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이 얼마나 절묘한 해법인가!
우리 모든 크리스천들이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을 문제시하고 아파하고 있다면
우리 스스로가
스승 예수의 영적인 부익부 빈익빈에 대한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실제로 영적인 풍요를 위한
나눔의 삶에 매진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이것을 하지 않고
정부가 무슨 답을 제시해 주길 바라고
부자가 회개하여 빈자에게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결코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주님은
<너희가 해 주어라!>고 하신다.
우리의 영적인 풍요의 삶은
인류가 안고 있는 부익부 빈익빈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답이리라.
오늘
나는 무엇을 주고, 나눔으로써
영적인 부자가 될 것인가?
받으려 하지말고,
나의 것으로 챙기려 하지 말고
오히려 주고, 나누고, 베품으로써
나의 영적인 풍요를 체험해 보자.
이를 체험하는 크리스천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는 희망이 있고, 기쁨이 있는
그런 세상으로 한발자욱 더
나아가게 되지 않을까?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는
성 요한 보스코는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영적인 부자가 아니었겠는가
너희가 되어 주는 만큼 보태어 받을 것이다
-야고보아저씨-
사람의 뇌의 크기를 재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뇌가 크면 사람의 머리도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사람의 뇌의 무게는 통계학적으로 대략 1,200g - 1,500g정도 한다고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그보다 훨씬 큰 사람도 있고, 가벼운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문헌으로 무게를 재서 기록에 남긴 사람은 러시아의 문호 투르게네프가 2,012g 이라고 하고, 독일의 철학자인 칸트는 1,650 그램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죽은 다음에 해부해서 그 무게를 달아보고 그렇게 보고 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뇌의 무게를 가지고 머리가 좋고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코끼리의 뇌는 대략 4,000그램이나 나간다고 하고 향유고래는 대략 9,000그램이나 나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코끼리의 30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데 코끼리 머리보다 더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기들은 태어나자마자 400그램 정도 나간다고 하지만 성인이 되었을 때는 남성들이 여성들보다 150그램 정도 더 무거지지만 여성들보다 남성들이 머리가 더 좋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난해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사람들의 비율을 보면 여성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고등학교와 대학에서도 성적 우수자들은 여성들이 훨씬 많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공부를 잘하는 것은 여성들이 더 잘한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남성들이 뇌가 많아서도 아니고, 여성들이 뇌가 작더라도 더 집중력이 강하고 학습 분위기가 더 좋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머리가 좋은 사람들을 “골 찬 사람” 이라고 하고,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들을 “골 빈 사람”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골이 찬 사람들은 그만큼 뇌도 무거울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뇌의 밀도에 따라서 말할 수 있다고 하는데 사람의 뇌의 밀도는 3.12, 침팬지는 1.79, 사자는 0.67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뇌의 밀도도 머리와 관계가 깊을 것이라고 생각은 한답니다. (나카하라 히데오미/홍성민 옮김/ 뇌력사전 참조)
내가 아무리 내 컴퓨터를 잘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5-10%도 활용하지 못하고 마냥 업그레이드만 해서 용량만 키우고 사실은 5%도 사용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뇌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사용하는 나의 뇌도 5%도 사용 못하고 있다는 것을 자주 느끼고 머리가 커서 어떤 모자도 맞지 않아 언제나 모자를 살 때 고민하는데도 머리가 좋은 것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때는 좋은 머리와 나쁜 머리를 구별할 수 없고, 내 머리가 점점 나빠지는데 머리크기는 그대로이기 때문에 내 골이 지금 텅텅 비어가고 있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뇌의 양과 뇌의 크기와 뇌의 밀도에 대하여 사진을 찍고, 무게를 잴 수 있는 기술들이 발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의 크기를 잴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내 심장의 무게는 잴 수 있을 것이고 내 허파와 뼈들의 무게까지도 전부 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묘한 인체의 구조 중에서 아마 측정할 수 없는 것은 마음뿐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누구든지 자신의 마음의 크기를 나름대로 재고 살려고 하지만 정답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나는 호수처럼 큰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물 컵 보다도 더 작고, 적은 것인 줄 요즘 겨우 알게 되었답니다. 내 마음을 되나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내 행실은 금방 되나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나 자신의 생각을 나타내는 행동이나 말은 금방 밖으로 표출됩니다. 아무리 큰 소리로 떠들어도 자신의 진심을 마음에 숨기고 살고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무리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니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면 그 마음도 무한정으로 커질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출중하지 못하고 용렬(庸劣)한 사람이 되어 자신의 좁은 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입니다. 그건 하느님의 마음을 닮지 못하고 지금 내 마음의 빗장을 잠그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능출불유호? 하막유사도야?’(誰能出不由戶? 何莫由斯道也?)라는 말이 있습니다. 논어의 옹야 편에 있는 말입니다. <누가 문을 통하지 않고 나갈 수 있는가? 어찌하여 올바른 도를 따르지 않는가?> 주님을 통하지 않고 어떻게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며, 주님을 통하지 않고 어찌 도를 따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 행하라는 선행을 외면하고 나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어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어찌 내가 한 생각이나 말이나 행동은 조금도 반성해 보지 않는 것인가? 내가 도를 따르지 않고, 선행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어찌 선행을 실천하라고 하는가? 또 내가 따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따르지 않는다고 책망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자신과 자식들에게도 같은 이치라는 생각입니다. 용렬한 내 마음을 탓하지 않고, 됫박으로 야박하게 되어 주면서 고봉으로 받으려고 하는 ‘밴댕이 창자’ 같은 내 마음을 탓하지 않고 사는 내가 내 아집의 문을 닫아걸고 있는 모습을 다시는 보기 싫습니다. 매일 그렇게 결심하면서 인생의 후반부에서 망설이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따라야하는 그 길에서 나는 문을 닫아걸고 그 안에서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 제 마음을 더 크고 넓게 가지도록 자비의 은총을 베풀어 주소서. 당신의 사랑으로 제가 넘치도록 되어주고, 넘치도록 자신을 나누게 하소서. 빗장을 벗어 버리고, 당신께 뛰어 달려가는 길을 깨닫게 하소서. 자비와 사랑의 주님!!!
-순교자와 함께하는 하루-
“이 세상에서 자기 주인에게 불충실한 것도 흉악한 범죄이거늘 하물며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대주재(大主宰)하느님을 어떻게 배반하라고 하십니까?”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 (최양업 신부의 여덟 번째 편지 중에서)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조욱현신부-
등불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등불은 어두운 곳에서 밝혀주는데 그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대낮에 등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밤에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의 진리가 바로 감추어두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드러내 보이고
증거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리를 전하려할 때에 때로는 박해를 당하기도 하고
어려움을 당할 수 있다.
진리의 반대 세력이 그것을 막으려고 온갖 술수를 다 부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진리는 드러나게 되고,
진리가 옳다는 사실이 밝혀져 승리를 가져다 줄 것이다.
감추어 둔 것이 드러나게 마련이라는 말씀이 우리의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것이 지금은 당장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불안한 상태에서 살게 된다.
그렇게 순간을 피하는 것이라도 하느님 앞에 감추어진 비밀로 있을 수는 없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부족하고 나약하여 실수를 하고 죄를 짓게된다 하더라도
결정적으로 등불을 외면하면,
즉 진리를 외면하게 되면 우리는 어두움 속에서 헤매게 된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진리를 받은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하느님의 말씀을 감추거나
가리지 말고 외면하지 말아야 하겠다.
오히려 다른 이들을 비추는 등불과 같이 진리의 말씀을 사는 생활을,
다른 이들을 비추어 증거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빛으로서 증거의 삶을 산다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을 통해서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님의 복음 한 말씀을 가지고도 빛을 낼 수 있다,
아무리 짙은 어두움도 성냥불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냥불빛에 어두움은 서서히 걷혀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선행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세상의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데 충분하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 때 우리는 작은 것이라도 성실하게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이러한 겸손된 삶을 청하자.
분별의 지혜가 더 절실한 현대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마르코복음 4장에 실려있는 4가지 비유 중 두 번째 비유인 ’등불의 비유’를 들려준다. 그런데 사실상 등불의 비유는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만 해당되고, 후반부는 종말보상률(24-25절)에 관한 가르침이다. 그러니까 두 대목은 서로 떨어져 전해 오던 것을 마르코가 한데 묶어 비유설교의 틀 안에 집성한 것으로 보인다. 복음사가들은 종종 이런 의도적인 편집을 통하여 그 의미를 서로 연결시키기도 하고 부각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오늘 복음대목은 4가지 비유들의 핵심적인 주제인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밝히는 방향으로 풀이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앞서간 복음에서 ’알아들을 귀’가 있다고 생각되는 12제자들과 다른 제자들에 국한시켜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와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셨다. 따라서 오늘 복음대목도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만 훈시(訓示)된 것이다.
우선 복음의 전반부인 등불의 비유를 살펴보자. 등불을 등경 위에 얹어 놓아야 함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불을 끌 때 됫박을 사용하는 것은 당대의 습관이다. 그런데 등불을 됫박 아래 두거나 침상 밑에 둔다는 것은, 물론 그런 사람은 없겠지만, 좀 과장되고 지나친 표현이다. 이 표현 때문에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이 힘을 얻는다. 즉 감추어 둔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을 밝혀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22절) 아무리 감추어 두고 비밀로 해도 그것은 밝히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등불이기 때문이다. 등불을 끄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씨 뿌리는 비유에서 씨가 복음의 말씀이라면 등불의 비유에서 빛을 내는 등불은 복음의 선포를 뜻한다. 등불의 본질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따라서 등불은 복음자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복음선포라는 말이 된다. 사실 등불은 성서에서 예수님이 아닌 엘리야와 모세(묵시 11,4), 또는 세례자 요한(요한 5,35)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예수께서는 등불보다 훨씬 더 높고 강한 상징인 빛이시며, 세례자 요한은 이 빛을 증언하러 왔을 뿐이었다.(요한 1,4-9) 따라서 복음자체이며 동시에 선포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빛으로서 특정한 장소와 시간에 머무름 없이 온 세상에 드러나 밝게 비추이실 것이다.
복음의 후반부는 종말보상률에 관한 훈시이다. 굳이 종말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아도 무방하다. 무엇을 주고 난 후 되돌려 받을 때까지의 시간을 감안한다면 그 때가 종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보상률은 두 단계로 구별된다. 하나는 인과(因果), 또는 동태(同態) 보상률이고, 다른 하나는 은총(恩寵), 또는 가감(加減) 보상률이다. 앞의 것은 달아 주면 달아 주는 만큼 받는다(24절)는 것이고, 뒤의 것은 가진 사람은 더 받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긴다(25절)는 것이다.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는다’는 속담이나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되는 대목이다. 이 대목을 독자적으로 본다면 인간의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적 동태보상, 또는 하늘에 영적(靈的) 재물을 쌓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적 은총보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데 있다.
문제의 해결점은 전반부의 등불비유와 후반부의 보상률을 서로 연결시켜주는 관절어(關節語)에 있다. 바로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들어라"(23절), 또 "내 말을 마음에 새겨들어라"(24a절)는 말씀이다. 말씀인즉,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등불의 비유를 잘 알아듣고 그 뜻을 마음에 새겨 간직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등불의 비유에서 등불보다 훨씬 강한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았다. 그러므로 빛이신 예수와 그 말씀을 알아듣는다 함은 다시금 씨 뿌리는 비유의 의미를 곱씹어야 한다는 말이겠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만큼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깨우치게 될 것이고, 종말에 가서는 깨우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신비를 통찰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시대보다 들어야 할 것, 알아야 할 것, 보아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은 우리들 세상에서는 무엇이 하느님나라의 신비를 밝히는 것인지를 정확히 분별하는 지혜가 더 절실히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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