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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2일 수요일 주님 봉헌 축일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산모는 아이를 낳고 40일이 지나면 성전에 나아가 정결례를 치러야 했다(레위 12장 참조). 마리아께서도 이 율법을 지키셨다. ‘주님 봉헌 축일’은 성탄 뒤 40일째 되는 날 성모님께서 정결례를 치르시고,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날 교회는 1년 동안 전례에 사용할 초를 축복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미사 전례 전에 ‘초 축복’과 ‘봉헌 행렬’을 한다. ☆☆☆ 모세의 율법에 따라 정결례를 거행할 날이 되자,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 2,22~40) When the days were completed for their purification
말씀의 초대 ☆☆☆ 오늘의 묵상 ☆☆☆
주님, 시메온의 희망을 이루어 주셨으니, 저희가 받아 모신 이 성체로 주님의 은총을 풍부히 내리시고, 시메온이 죽기 전에 그리스도를 품에 안는 기쁨을 누렸던 것처럼, 저희도 주님을 맞이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
한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주님 봉헌 축일’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정하고, 해마다 전 세계 교회가 이를 기념하도록 하였다. 봉헌 생활을 하느님의 은총으로 받아들이라는 가르침이다. 모든 신자, 특히 젊은이들이 ‘봉헌의 성소’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according to the law of Moses,
Mary and Joseph took Jesus up to Jerusalem
to present him to the Lord,
말라키 예언자는 만군의 주님께서 성전에 홀연히 나타나시어 이스라엘의 제사를 정화하심으로써 주님 마음에 들도록 하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이러한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전에 봉헌되심으로써 성취되었음을 드러낸다. 시메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자신의 눈으로 ‘주님의 구원’을 보았다고 고백한다(복음).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이산가족 가운데 한 분이 꿈에 그리던 가족을 상봉하고 나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꼭 하고 싶던 일을 마침내 이루었을 때 흔히 이런 말을 씁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목적하던 바를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의 시메온이 바로 이런 경우라 하겠습니다. 시메온은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이 위로받는 때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정결례를 위해 봉헌하러 오신 마리아와 요셉에게서 아기 예수님을 받아 안고,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시메온은 자신이 평생을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바로 자신 품에 안긴 아기 예수님임을 깨닫고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사실 이런 기다림의 삶입니다. 어쩌면 평생 동안 내가 믿고 기다리는 주님을 삶 속에서 깊이 깨닫는 순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100년을 넘게 살든, 단 몇 년을 살든, 중요한 것은 주님을 깊이 깨닫고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을 빼놓고 나면 우리 인생에 무엇이 남을 수 있는지요? 지금 죽어도 아무런 여한이 없는 삶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주님을 깊이 만날 때입니다.
율법에서는 아이를 낳은 산모를 ‘일정 기간’ 부정한 몸으로 규정해, 남편과 떨어져 있게 했습니다. 몸에 피를 묻혔기 때문입니다. 사내아이를 낳으면 33일간이었고, 여자아이를 낳으면 66일간이었습니다. 이 의식이 ‘정결례’의 핵심입니다. 오늘날에는 사내아이는 7일, 여자아이는 14일로 축소되었다고 합니다. 그런 뒤, 사내아이는 성전에 봉헌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셨기에 주님께 드린다는 종교 예절입니다. 아이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겠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굉장한 ‘마음가짐’이지요. 그리고 형편에 따라 새끼 양이나 비둘기를 봉헌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비둘기 한 쌍을 바치십니다.
신앙인 역시 봉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례성사로 주님께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사건을 그분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기며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기쁘고 즐거운 일에는 봉헌이 쉽습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일에는 힘이 듭니다. 억울한 사건을 ‘주님께서 주셨다고’ 여기는 것은 ‘신앙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시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봉헌의 삶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시메온과 한나를 만나십니다. 그분들이 우연히 아기 예수님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평생 의롭게 살았기에 구세주를 뵈올 수 있었습니다.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신심 깊은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들의 모습입니다.
삶의 봉헌 - 이진원 신부- 무언가를 봉헌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유다인들이 아기를 봉헌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주신 아기임을 인정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아기를 하느님께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얼마나 ‘충실히’ 봉헌하느냐가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는 것이다.
좋은 것을 주신다는 믿음 -김효준신부- 추운 겨울 택시를 기다립니다. 택시가 도착했지만 뒤에 서 있는 노부부에게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것이 물질만이 아니듯 우리가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는 것이 반드시 물질만은 아니다. 우리가 받은 시간?·?재능?·?에너지, 심지어 마음까지도 우리가 봉헌할 수 있다. 그래서 아침과 저녁기도?·?삼종기도?·?성체조배?·?묵주기도와 같이 시간을 내어 드리는 기도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봉헌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나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내가 가진 재능과 능력과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도 나를 봉헌하는 것이다.
수도 생활은 다른 말로 ‘봉헌생활’?이라고 부른다. 삶의 전부, 순간순간을 모두 봉헌하는 삶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도 삶의 순간순간을 봉헌할 수 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묵주기도를 바친다면 그 순간의 나를 봉헌하는 것이다. 일을 할 때도 기도로 시작하고 끝맺는다면, 그것 역시 봉헌하는 것이다. 내 일상을 하느님께 봉헌해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하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시간을 내는 그만큼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볼 수 있다. 그것은 봉헌생활을 하는 수도자만 맛보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자신이 봉헌하는 그만큼 맛볼 수 있다. 내 일상을 봉헌하면 삶 전체를 봉헌하는 것이 된다.
아무튼 그 봉헌 바구니가 어느 눈먼 사람 앞에 멈추었습니다. 그 사람은 주변의 사람들도 잘 아는 사람으로 단 1프랑도 헌금할 수 없는 형편의 가난한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자그마치 27프랑을 접시에 세어서 놓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옆 사람이 “당신이 어떻게 그 많은 돈을?” 하고 묻자, 눈먼 사람은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래요.
“저는 눈이 안 보이지요. 그런데 제 친구에게 물어보니 저녁 때 불을 켜는 비용이 일 년에 27프랑이 든다고 하더군요. 나는 불을 켤 필요가 없으니 일 년이면 이만큼의 돈을 저축할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 모은 거죠. 그래서 예수님을 몰라 어두운 곳에 있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참 빛이 비치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의 봉헌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합니다. 자기에게 쓰고 남은 것만을 봉헌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 그러다보니 제대로 된 봉헌을 하지 못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늘 부족하다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특별히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해서 우리들의 모습을 반성하고 다시 제자리에 위치시켜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 인간을 위해서 희생 제물로 봉헌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세례 성사를 통해 우리 역시 주님 앞에 봉헌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봉헌에는 예수님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주님은 철저히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신 반면, 우리들은 나의 뜻에만 맞게 살아가면서 제대로 된 봉헌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제대로 봉헌하지 못했음을 반성합니다. 그 이유를 제 방 안에서 아주 쉽게 찾게 됩니다. 즉, 너무나도 많은 물건들이 방 안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렇게 짐이 많을 수 있을까요? 물론 필요에 의해서 구입한 것도 있지만, 필요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관심사로 인해 주님께 제대로 된 봉헌의 삶을 살지 못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제대로 된 봉헌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양보합니다. 몸은 춥지만 마음은 따뜻해집니다. 고마워하는 노부부를 보니
저 또한 기쁩니다. 하지만 잠시 후 택시는 큰 사고를 냅니다.
노부부가 다칩니다. 저는 좋은 일을 한 것인데, 결국 불행을 낳았습니다.
좋은 일도 이렇게 좋지 않은 결과를 불러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시메온은 평생토록 기다려온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노쇠한 시메온은 충만한 기쁨 속에 입을 엽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는 곧 닥칠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서도 주님을 만난 기쁨 때문에 두려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시메온은 주님께 아기를 봉헌하는 성모님께 말합니다.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성모님은 자식을 봉헌한 대가로 고통과 슬픔의 메시지를
들었지만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시메온과 고통의 메시지를 전해 들은 성모님은
어떻게 그러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을까요? 바로 하느님께서는
항상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봉헌과 혼인 -전삼용신부- 오늘 유투브에서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한 대형교회 목사님의 십일조에 대한 설교를 조금 들었습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이것저것의 예를 들면서, 그것을 내지 않으면 질병이든, 사고든, 세무조사든, 어떤 것을 통해서라도 하느님께서 당신의 몫을 꼭 챙겨 가신다고 겁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내는 사람은 하느님께서 몇 배로 갚아 주시니 빚을 내서라도 꼭 정확히 셈해서 십일조를 내라고 설교를 했고 앉아있던 신도들은 계속 아멘이란 말로 응수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어렵지 않게 개신교 목사님들이 십일조에 대해 강조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봉헌이란 말이 나오면 십일조를 가장 먼저 떠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십일조는 내야합니다. 그러나 십일조는 우리가 이야기하는 ‘봉헌’이란 단어의 10분의 1의 의미밖에는 없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또 특별히 봉헌생활을 하시는 분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봉헌’이란 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새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우리가 삼위일체 교리에서 배웠듯이 ‘자신을 봉헌함’은 ‘사랑’과 ‘일치’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즉, “아버지 - 성령님 - 아들”의 모델에서 아버지가 ‘당신 자신을 비우시는 것’이 바로 아드님께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입니다. 동시에 아들이 아버지께 다시 성령님을 보내시는 것이 아들의 ‘자기 비움’입니다. 또 성령님은 아버지와 아드님께 ‘순종’함으로써 당신 자신을 비우시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자기 비움이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곳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입니다. 또 이 죽음과 부활을 일시에 체험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곧 그리스도의 ‘세례’였습니다. 즉, 세례는 죽고 다시 부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죽이니 성령님을 통한 부활이 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세 분은 한 몸을 이루십니다. 그리스도는 이 비움을 통한 사랑의 일치를 당신의 백성과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인간에게 내어주시는데 그 모습이 “성체”입니다. 인간 또한 그 성체를 영하기 위해 자신 안에 공간을 마련해 놓아야하는데 이것이 바로 자신을 비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성령님을 모시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비우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듯이 인간도 그리스도와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헌’의 의미입니다. 이 봉헌은 ‘감사 (Eucaristia)’의 형태로 표출됩니다. 이 ‘감사’는 찬미로 표현되고 그래서 성경에선 ‘찬미의 제사’ (히브 13,15)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어떤 봉헌이든 ‘감사’의 마음이 들어있지 않으면 그것은 봉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께 봉헌하시면서 먼저 ‘감사의 기도’를 드렸음을 명심해야합니다. 감사를 통해서 빵과 포도주가 생명 자체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어 돌아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든 미사 중에 자신의 온 마음을 비워 주님께 봉헌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실지라도 그 마음 안에는 자신이 봉헌한 만큼만 은총이 채워지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신을 온전히 비워야만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을 온전히 받을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고 자신 안에 자신으로 가득 채우는 것을 ‘죄’라고 하고 그 ‘죄’는 ‘원죄’라는 형태로 모든 인간에게 인성을 통해 전달됩니다. 영혼은 하느님의 영을 받아 성모님처럼 자신을 은총으로 가득 채우고 싶지만 그 안에 ‘교만과 육욕과 소유욕’이 있기 때문에 하느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의 교만의 죄와, 그것을 통해 들어온 육욕의 죄, 또 그것으로 전달되어 카인이 짓게 되는 소유욕의 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육욕과 소유욕도 교만에서 저절로 나온 것이기에, 교만과 육적인 이기심이 카인의 제사가 하느님께 역겨운 것이 되게 한 이유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아담과 하와 이후로 하느님께 온전한 제사를 드릴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봉헌을 하지 못하니 동시에 사제직도 잃게 된 것입니다. 누구도 자기 자신을 온전히 그리스도께 봉헌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어 “나는 내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 (갈라 2,19)이라고 당당히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일치는 결국 자신을 죽이고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것인데 죄라는 것이 들어와서 이기적이 되어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았기 때문입니다. 봉헌의 의미가, 따라서, 三仇 (교만, 육욕, 소유욕)를 이기는 福音三德 (순명, 정결, 가난)에 있음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여주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와의 일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비우시고’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 십자가엔 순명만이 아닌, 자신의 육신을 이기고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은 바라지 않는 가난까지 다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봉헌’은 추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인 ‘복음삼덕의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 봉헌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습이 ‘수녀님’들의 봉헌생활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여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는 것처럼, 수녀님들은 ‘여성’으로서 신랑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는 상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교회가 나아가야 할 상징적인 모습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수도생활을 어떤 분들은 ‘축성생활’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신학적으로는 맞지 않는 말입니다. ‘축성’이란 거룩하게 만드는 것으로써 ‘성체’의 축성에 가장 적당한 말입니다. 수도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몸처럼 온전히 거룩하게 변하는 것으로 여기면 안 됩니다. 거룩해짐은 서품이나 서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향주삼덕 안에서의 복음삼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한 인간으로서 온전한 봉헌의 모델을 찾으라면 성모님 외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봉헌이란 자신을 비워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지닌 모든 것, 즉 빵과 포도주를 봉헌함으로써 성자 자신인 성체와 성혈을 받는 것처럼, 자신을 바치지 않으면 어떤 주고받음에서 오는 혼인의 일치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처럼 하느님께 무엇을 봉헌한다는 것은 그 봉헌을 통한 하느님과의 합일의 기적을 체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원죄가 없으십니다. 그 이유는 태초부터 하느님께서 원죄의 물듦에서 보호해 주셨기 때문이고 그만큼 자아가 비워졌기에 완전한 순종, 즉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며 당신 자신을 아버지 뜻에 봉헌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물론 그를 통해 그리스도와 한 몸을 나누어 가지시게 됩니다. 봉헌을 통한 온전한 한 몸이 되는 모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봉헌생활이란 이 한 말씀으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나를 따르려거든 네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한다.” (마태 16, 24)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을 버려야합니다. 자신을 버리는 것이 곧 매일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매일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 곧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다운 봉헌은 참다운 하와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참다운 하와가 되어 신랑이신 아버지와 한 몸을 이루신 것처럼, 또 성모님께서 온전한 순종으로 완전한 하와가 되어 하느님과 한 몸을 이루셨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께 온전히 순종하여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하와가 되는 것이 바로 봉헌입니다. 왜냐하면 봉헌이란 말엔 자기를 포기한다는 의미가 아주 강하게 들어있는데 그것이 자신을 버린 완전한 믿음과 순종의 바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봉헌의 의미가 그저 독신으로만 사는 것, 사제 수녀 복장만 입는 것을 훨씬 넘어선 혼인의 신비를 사는 것임을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영적생활을 목숨처럼 소중히>
오상선신부-
오늘 주님 봉헌 축일이자, 봉헌생활의 날입니다. 교회는 오늘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과 봉헌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다시 한번 자신의 삶을 재점검하고 자신의 봉헌을 쇄신하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봉헌생활이 날을 맞아 루가 복음사가는 봉헌생활의 모범으로 시므온 예언자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므온 예언자는 무엇보다도 한 평생 하느님께 충실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루가 복음사가의 표현에 따르면 시므온은
1. 의인(義人)
2. 경건한 사람
3. 주님의 성전에서 봉사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사람
4. 성령 안에 살던 사람,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던 사람으로
그 결과 죽기 전에 하느님을 자신의 두 팔에 안고 자신의 눈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직접 뵙게 되는 영광,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었던지 시므온 예언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한 평생 오로지 주님께만 희망을 두며 주님께만 충실했던 시므온 예언자였기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주님을 직접 눈으로 뵙는 기쁨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시므온 예언자의 "일생에 걸친 꾸준한 봉헌생활" 그 결과가 지복직관의 은총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또한 수도생활에 있어서 진정으로 중요한 자세는 항구한 마음입니다. 그 어떤 풍파가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고 의연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신앙인들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결국 신앙생활, 수도생활, 봉헌생활의 핵심은 충실성, 지속성, 일상성입니다.
우리 수도자들, 신앙인들은 이벤트 회사 사람들이 절대로 아니지요. 일거리가 있으면 사흘이고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따지지 않고 바짝 한 건 뛰고, 뒤풀이하고 나서, 한 삼일은 기도나 미사, 영적생활, 일상생활과는 담을 쌓고 두문불출한 채 죽은 듯이 휴식을 취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죽는 순간까지 성서나 기도서, 성무일도, 묵주를 손에서 놓지 않는 노력이 소중합니다.
영적으로 깊이 있는 봉헌생활을 해나가시는 존경하는 선배 신부님들과 저희 같은 "날나리"들과 확연히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이것입니다.
그분들은 저희 신참들과는 달리 어딜 가나 성무일도서를 손에서 떼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쁜 생활 중이라도 성체조배를 빠트리지 않으십니다. 영적생활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십니다.
오늘 봉헌생활의 날을 맞아 세상의 모든 수도자들과 봉헌생활자들이 다시 한번 하느님과의 첫 계약에로 돌아가 해맑은 얼굴, 순수한 마음으로 새 출발 하는 좋은 날이 되길 기원합니다.
일상, 그 기다림의 도장에서··· - 이은주 수녀- 계수리 성 바오로 피정의 집에는 나무가 많다. 알록달록 가을볕에 물들어 가며 성숙하는 법을 알려주던 나무들이 때가 되어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보면 좋은 기다림의 자세를 엿볼 수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하다. 기다릴 줄 알았던 노인 시메온도 그러했을 것이다. 기다림의 끝자락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충만했으리라.
-정연동신부- + 찬미예수님 발에 불이 나게 뛰어다닌 날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성사, 강론, 훈화, 강복, 회합, 만남, 관계. 밥 먹을 때도, 운전할 때도, 동료 사제들과의 대화도. 어떻게 하면, 신자들을 더 지혜롭게 사랑할 수 있을까? 어쩌면 더 예수님을 잘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더 사제다운 삶일까? 아침부터 한밤까지. 발에 불나게 뛰어봅니다. 그리고 밤늦게 혼자 앉으면, 신자들 뭔가 하나 더 주겠다고 더 뛰어다닌 날일수록, 내가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신자들에게는 말씀과 훈화로 하느님 만나기를 바라면서, 정작 나를 돌아보고 나를 반성하고 정작 내가 하느님과 만나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은 날, 그런 날은 허전함이 시리도록 사무칩니다. 게다가. 뭔가 어긋나고, 무슨 소리를 듣고, 어른에게서도 아이에게서도 사제의 순정이 외면당한 그 날 밤은, 철저히 혼자라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기도는 시작됩니다. ‘저에게 지혜를 주십시오. 다시 일어서게 하십시오.’ ‘두려움을 떨치게 하십시오. 용기를 주십시오.’ 대답은 들려옵니다. ‘너를 버려라. 네가 아닌 내가 살게 하라. 내가 네 뒤에 있다.’ ‘너를 버려야, 네가 죽을 때 나는 산다. 너를 나에게 맡기고 바쳐라.’ 신앙은 나를 버리고 하느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봉헌은 나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주도권이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봉헌하는 것입니다. 오늘 아들을 봉헌하는 엄마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해 봅니다. 아들에 대한 권한 포기, 어미로서의 권한 포기, 여인보다 하느님의 딸이 되신 어머니, 심장에 못 박힐 줄 알면서도 스스로를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신 어머니.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께 봉헌하신 어머니. 오늘 나는 무엇을 포기하고 삽니까? 무엇을 봉헌하고 삽니까? 오늘 나는 무엇을 하느님께 바칩니까? 심장에 박힐 못이 두려워, 감각적인 안락과 쾌락에 빠져, 나는 오늘 사소한 것 하나 하느님께 바치지(봉헌)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 저를 받아주십시오. 아이를 바치는 어머니의 마음은 아니라도 부족한 저를 당신께 봉헌합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새벽을 열며
-조명연신부- 여러분 자녀가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왔으면 좋은 소식일까요? 나쁜 소식일까요? 당연히 좋은 소식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옆집 아이도 받아왔습니다. 처음처럼 기분은 좋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쁜 소식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상장이 아이들 기 살려준다고 전교생 모두 준 것이라면 어떨까요? 환장할 소식일까요?
주님께 자신을 봉헌한 모든 이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봉헌
-정인준 신부- 토라의 후대 작품인 탈무드에서는 자녀를 부모의 소유가 아니고 하느님의
아기 예수님을 만난 한나 -김은주 수녀- 혼인하여 남편과 일곱 해를 살고서는 여든네 살이 되도록 혼자 지내며 성전을 떠나지 않고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긴 한나 예언자의 모습을 그려본다. 결혼하기 전 한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남편이 떠난 후에 하느님을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는 표현에 비추어 볼 때 결혼 전에도 그와 같은 일상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다 유다인의 풍속대로 나이가 차서 부모가 맺어주는 남자와 혼인하여 남편과 함께 하느님을 섬겼을 것이다.
“태를 열고 나온 사내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해야 한다.” -양승국신부- <모든 것을 주신 하느님> 자주 접하게 되는 봉헌성가를 부를 때 마다 늘 송구스런 생각이 앞섭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네∼사랑하는 내-주 앞에 모두 드리네.”(가톨릭 성가 214번 주께 드리네) 주님께 바치는 것이 거의 없으면서 큰 목청으로 ‘아낌없이 바치네’를 외치니 가슴이 많이 찔립니다. 일반 신자들은 그나마 적어도 얼마간의 봉헌금이라도 바치니 그 기분이 덜할 것입니다. 수도자랍시고 가만히 앉아 노래만 부르고 있자니 여간 창피스런 일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봉헌 한다’고 하면 주로 먼저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가진 것 가운데 일부를 하느님께 드린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좀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봉헌’의 개념이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좀 더 확장됩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다시 그분께 되돌려드린다’ ‘무상의 선물로 주신 것을 본래대로 원위치 시킨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오늘 이 아침, 하느님께서 제게 선물로 주신 것이 어떤 것들인지 곰곰이 헤아려봅니다. 하나하나 챙겨보니 의외로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가장 큰 축복의 선물로 ‘삶’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가족’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형제’를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결국 따지고 보니 하느님께서는 제게 ‘왕창’ 주셨습니다. 저를 위해 ‘대박’을 터트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게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토록 풍성한 나눔과 베품, 끝도 없는 자기 증여의 역사가 하느님과 저 사이에 계속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에 비해 너무나도 초라한 제 빈손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오늘 주님 봉헌 축일, 과연 무엇을 되돌려드릴까 고민해보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봉헌생활의 날에... -오상선신부-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신앙인
봉헌 -이정호신부-
손 -윤인규 신부-
-양승국신부- <늘 초심자의 마음으로> 수도생활에 입문할 무렵, 돌아보니 참으로 순수했습니다.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기세였습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제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이 강물처럼 흘렀네요. 쌓아온 수도생활의 연륜에 비례해서 삶이 한 차원 성숙되고 쇄신되어야 마땅한데, 전혀 그렇지 못하니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부끄럽고 또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다시 한 번 제대로 된 봉헌생활을 꿈꾸기에, 다시 한번 예수님을 제 삶의 중심으로 옮겨오고 싶은 마음에, 다시 한 번 그분을 향해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외치고 싶은 마음에, 다시 한 번 “그분은 내 삶의 전부입니다”라고 떳떳하게 고백하고 싶은 마음에, 그간 무엇이 문제였던지 곰곰이 지난날을 한번 되돌아보았습니다. 문제의 해답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첫 마음의 퇴색이었습니다. 늘 초심자의 마음으로 살았어야 했는데...세월의 흐름에 따라 입회 때의 순수함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무 필요도 없는 독선과 아집만이 때처럼 덕지덕지 남아있습니다. 수도원에서 먹은 밥 그릇 수와 성덕과는 절대로 정비례하는 것이 아님을 진작 알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모진 독설을 밥 먹듯이 듣곤 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 정말 그들처럼 되어서는 안 되겠다고 자주 걱정했었는데, 어느덧 그들의 모습에 꽤나 근접해있는 저 자신의 모습을 슬픈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이런 제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한 노인을 제 삶의 또 다른 이정표로, 또 다른 새 출발의 희망으로 세워주시더군요. 예루살렘의 시메온. 그는 기다림의 달인이었습니다. 기다리는 것 하나만큼은 자신 있었습니다. 다들 메시아를 기다리다 지쳐 포기하고 말았는데, 다들 ‘내 나이에, 내 주제에 메시아는 무슨!’하고 절망의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만큼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끝내 ‘지복직관’이라는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아쉬움 속에 이 세상을 하직했는데, 그는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때’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것입니다. 시메온은 정말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시메온이었기에 하느님께서 그의 신앙에 기쁜 마음으로 응답하십니다. 성령께서 시메온의 앞길을 밝혀주셨습니다. 때가 무르익자 성령께서 시메온을 성전으로 이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모의 팔에 안겨 성전 안으로 들어오시는 메시아 하느님을 뵙는 일생일대의 행운을 잡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과분하게도 하느님을 자신의 두 팔에 안아보는 기쁨을 누립니다. 세메온처럼 끝까지 참는 사람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상급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꿈과도 같은 기적도 일어납니다. 죽어도 떨칠 수 없을 것 같던 악습도 사라집니다.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행동도 변화됩니다. 행동양식도 달라집니다. 사고방식마저 달라집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 위주로 변화됩니다. 제대로 된 봉헌생활을 꿈꾸는 분들은 시메온처럼 끝까지 기다려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열렬한 기다림을 바탕으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인내 끝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큰 것인지, 그분 사랑이 얼마나 감미로운 것인지를 제대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사람으로서 가장 큰 축복을 누린 시메온을 바라보면서 저 역시 또 다른 희망을 가져봅니다. 우리 모두는 시메온처럼 하느님을 제대로 한번 만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리 지루하고, 고되고, 팍팍하다 할지라도 언젠가 반드시 하느님을 만날 은총의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이 지지부진한 신앙생활을 반전시킬 호기가 반드시 찾아오리라고 확신합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망가지고 깨진 모습으로 살아도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다시금 새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예수 그리스도, 세상을 비추는 구원의 빛
-차성현 신부-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께서 정결례를 치르시고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돌아가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예수님의 봉헌의 의미를 오늘의 삶에서 되살리고자 봉헌 축일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제정하고 전 세계 교회가 이를 기념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봉헌 생활이 있는데, 특별히 오늘은 모든 수도자와 수도 성소를 위하여 기도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김인한 신부- 성당 식구들 가운데에서는 아프거나, 불편한 곳이 있거나 혹은 연로하셔서 성당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신부가 직접 찾아가서 함께 기도해 주고,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합니다. -조욱현 신부- 오늘은 그리스도 예수를 낳으신 마리아가 모세 율법을 따라 정결예식을 행한 것과 예수님의 성전 봉헌을 기념한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이 날 성전에서 그리스도를 봉헌한 것을 따라 참회행렬을 했었는데, 이 행렬에 사용된 초를 장엄하게 축복하던 전통이 일년 동안 사용할 초를 축성하는 것으로 전례 안에 정착되었다. 맏배는 모두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는 율법을 지키는 이것은 또한 언제나 하느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살아야 함을 가르치고 있다. 마리아께서 맏아들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행위는 바로 우리에게도 좋은 교훈을 주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고 그 대가로 커다란 기쁨을 느낄 수 있었을 때에 그것이 내가 모든 것을 잘해서 된 것이라고 생각해서 주위의 칭송이나 칭찬을 바라게 되고, 하느님께 그 영광을 돌리지 못하면, 그 기쁨은 오래 가지 못하고 만다. 그리고 결국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지 의미 마저 잃게 될 것이다. 작은 것이나 큰 기쁨이나, 심지어 아픔까지도 그분 앞에 겸손하게 드릴 수 있어야 한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으로 우리의 유한한 것이라도 그분에게 닿기만 하면 즉시 영원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 거기에서 우리는 더욱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대받는 표적 -강동진 신부- 빛과 어둠은 상극입니다. 그래서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기 예수님은 어둠이 가득한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를 어둠이 가만둘 리가 없습니다. 빛을 꺼뜨리지 않으면 자신들이 소멸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은 빛이신 아기 예수님을 맹렬히 반대하고 공격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언자 시므온은 이 사실을 정확히 꿰뚫어보았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고 말았고 결국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세상의 빛이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밝히려는 빛이 아무런 저항 없이 쉽고 편안하게 밝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안이한 생각일 것입니다. 우리들도 선하고 올바르게 살려는 우리들의 거룩한 원의를 반대하고 공격하고 꺾으려 하는 어둠의 세력과 필연적으로 맞부딪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심 깊게 열심히 살려고 할수록 갖가지 유혹이 더 생기고 부당한 오해나 비판, 비난, 공격 등을 받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나기정 신부 - -이창영 신부- 가장 좋은 선물 -이철구 신부-
† 각자에게 주어진 숙제 †
예수님의 모습을 일상 안에 새겨넣으려는 나의 노력도 이 같은 기다림이 있어야 했다. 여러 해 동안 일상과 하느님의 현존의식을 일치하여 살 수 없어 갑갑하기만 했다. 그런 내게 기다림은 그다지 반가운 단어가 아니었다. 빨리 도달하고 싶을 뿐이었다. 빨리 세상을 따르던 모습에서 벗어나 예수님처럼 하느님과 일치되어 배척받는 자리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용기를 얻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노력할수록 턱없이 부족한 약함만을 대면해야 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내게 현존 안에서 충만하게 살려면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일상의 잔잔한 사건을 통해 자상하게 말씀해 주신다. 일상을 떠나서는 하느님을 만날 수도 없고, 하느님께서 귀하게 간직하셨다가 때가 되어 보여주시는 메시지도 받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 나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를 들려주신다. 일상은 하느님을 만나는 기다림의 도장이요, 나를 나답게 하는 수련장이기도 하다.
시메온은 일상을 성전에서 지냈다. 그래서 때가 되었을 때 예수님을 만나뵙고, 이제는 평안히 떠나가게 해 달라는 청을 하게 된다. 성령의 이끄심에 내맡기며 기다릴 줄 알았던 겸손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모두가 좋은 소식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약간의 부정적인 마음이 나쁜 소식, 환장할 소식으로 변하게 한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두 마리의 개구리가 크림 깡통 속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한 개구리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슬픈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렇게 죽는구나. 아무도 도와주지 못할 테니 우린 여기서 죽고 말 거야. 그렇다면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결국 이 개구리는 슬피 울다가 크림 속에 빠져 죽고 말았습니다. 한편 또 다른 개구리는 열심히 헤엄을 치면서 이렇게 말했어요.
“계속 헤엄치다 보면 얼마 동안은 살 수 있겠지. 아무것도 해 보지 않고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이 개구리는 얼굴에 묻은 크림을 닦아 내며 열심히 헤엄을 쳤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어요. 글쎄 크림이 굳어 버터가 된 것이지요. 결국 개구리는 굳은 버터를 밟고 깡통에서 빠져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부정적인 마음보다는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오늘은 성모님과 요셉 성인께서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예수님을 낳은 뒤 40일(부정기간: 7일, 외출금지기간: 33일) 만에 정결예식을 행하셨지요. 그리고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십니다.
바로 그때 시메온이 나타나 놀라운 이야기를 전해주지요.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적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부모님은 어떠했을까요? 기분이 좋지 않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말입니다. 시메온은 성모님께 말하지요.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처음의 이야기는 정말로 좋은 소식인데, 나중의 이야기는 왠지 께름칙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이야기를 가슴에 새겨두십니다. 즉,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쁘게 아기를 성전에 봉헌하셨습니다. 고생길이냐 편안한 길이냐 라는 두 갈래 길을 만나면 우리들은 편안한 길만 선택 할 텐데,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길이 하느님의 뜻이기에 이 두 갈래 길 모두를 받아들이십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매 순간 내게 하시는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기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모님과 같이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기는 기쁨의 봉헌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유이며 부모에게 잠깐 맡긴 것으로 설명합니다. 이 정신은 구약의 토라에서 비롯되어 맏자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비록 가난하게 태어나시어 소나 양 대신 비둘기로 제물을 바치는 예식에 참여하시지만
그 당시 율법의 관례를 따르신 것이었습니다. 이 율법의 정신은 자식을
부모의 것이 아닌 하느님 소유로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태어났을 때처럼 정결예식에서도 몇몇 사람들에게만 드러내시고 조용히 예식을 치르십니다.
‘거룩하다’라는 용어에는 ‘다른 것과 구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세상 것과 구분해서 하느님께로 되돌린다는 뜻도 있습니다.
우리는 차를 구입해도 또 집을 장만해도 성물을 구입해도 ‘방사를 놓는다’라는 변하지 않는 관습어를 쓰지만 그 뜻도 역시 하느님 소유로 돌린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나의 삶, 내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도 다 주님 것으로
되돌린다면, 우리는 자유롭고 또 복된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구약의 정신이 예수님의 삶에서 더욱 완성되는 신비를 묵상해야겠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지금도 매우 엄격하다고 한다. 결혼 전에 임신한 것 같으면 아버지는 딸을 산부인과 두 곳에 데리고 가서 의사 검진을 받게 한 후 임신한 사실이 드러나면 딸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린다고 한다. ‘사형제도’를 폐지하는 이 마당에….
한나는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하느님을 섬기다 아기 예수님의 봉헌예절에 참석하게 된다. 한나와 아기 예수님의 상봉! 한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인간적인 엄격함이나 사회 규범 등 그 무엇에도 얽어매지 않는 자유로움 자체이신 분, 그동안 한나가 인간적인 모든 대가를 치르면서 옹골차게 기다려온 하느님! 그분께서 한나를 만나주셨을 때, 그것은 평화! 환희! 어떤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벅찬 감격이었을 것이다.
한나가 그 체험을 어떻게 혼자 간직할 수 있었겠는가? 전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어 예루살렘의 속량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달려가 이야기를 전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한나를 보면서 오늘 나의 봉헌의 삶을 뒤돌아보게 된다.
오늘은 예수님의 봉헌축일인 동시에
교황님께서 제정하신 수도자들의 봉헌축일이다.
이름하여 <봉헌생활의 날>이라고 한다.
수도생활을 봉헌생활(Vita Consecrata)라 칭함은
아마도 수도생활의 본질이 '바치는 데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는 것은 아닐까?
바치는 삶, 비우는 삶,
결국 자신은 없어지는 삶이 수도생활이란 말일게다.
수도자들의 날을 맞이하면서
과연 나는 무엇을, 얼마나 주님께 바쳐드리고 있는지 반성해봐야겠다.
내년이면 수도서원 은경축을 맞게 되는데
과연 내 삶이 바치는 삶이었는가?
끝없이 비우는 삶이었는가?
끝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었는가?
정말로 내가 봉헌의 삶을 제대로만 산다는
내가 없어져 있기에
그 어떤 오욕칠정에도 사로잡힘이 없이
늘 복됨을 누릴진대
아직도 그렇지 못함은
이 봉헌생활이 온전히 성취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오늘 모 수녀원 종신서원식에 참석한다.
종신서원은 바로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한다는 서약이다.
수도생활은 이렇게 끊임없이 바쳐드리는 삶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바치고 또 바치고 더 이상 바칠 것이 없을 때
우리는 마지막으로 나의 목숨을 바쳐드림으로써
봉헌생활을 완성하게 된다.
봉헌성가를 부를 때마다
내 몸과 맘을 다 바쳐드리오니 받아달라고 하지 않는가?
수도자의 삶은 봉헌성가를 진정으로 몸으로 부르는 삶이다.
그럴 수 있을 때
진정한 봉헌생활이 될 수 있으리라.
오늘,
내가 아는 수사님, 수녀님들께
축하인사를 드리자.
오랜만에 메일이나 전화라도 드리면 어떨까?
자신을 태워 없애면서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촛불처럼
늘 자신을 내어놓고 버리고 바쳐드림으로써
봉헌생활을 완성하시도록 기도해 드리자.
그 옛날 예수님께서
자신을 성전에 봉헌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상의 봉헌으로 봉헌생활을 완성하셨듯이
모든 수도자들도
자신의 서약으로 봉헌한 삶을
끊임없이 버리고 바쳐드리는 삶을 통해
완성에로 나아가시도록 말이다...
모든 수사님, 수녀님들 축하드립니다!
더욱더 봉헌의 삶, 아름다운 비움의 삶에 정진합시다!
그것이 우리의 성소가 아니겠습니까?
이 아름다운 성소로 불러주신 주님께 오늘 하루
질퍽하게 감사를 드립시다!
-경규봉 신부-
모든 수확의 첫물은 하느님의 것이다. 사람도, 가축도, 곡식도 첫물은 하느님의 것이다. 모든 첫물은 다 하느님께 바쳐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맏아들 대신 레위인들을 구별하여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의 가축의 모든 맏배 대신 레위인들의 가축을 구별하여 세워 나 야훼의 것으로 삼아라.”(민수 3,41)는 말씀에 따라 첫 물을 직접 바치지는 않았다. 다만 첫아들을 낳은 경우 속죄의 예물로 다섯 세겔(1세 겔은 하루의 품삯)을 바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예수님은 첫아들이셨기 때문에 속죄의 예물을 봉헌해야 했지만, 굳이 예수님을 성전에서 봉헌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 성인과 성모님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셨다. 이는 곧 사무엘 상권에서 한나가 사무엘을 하느님께 봉헌한 것처럼 예수님을 온전히 하느님의 아들로 봉헌하고자 함이었다.
예언자 사무엘은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으로 성별되어 일생 동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며 살았다. 그처럼 예수님께서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되어 하느님의 사람으로 거룩하게 축성되어 사시도록 한 것이다.
예수님의 일생을 보면 예수님이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되신 분임을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의 뜻을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셨고,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하셨으며, 자신의 일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을 하셨다.
오늘 주님봉헌축일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봉헌되셨음을 기념하고 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봉헌되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겠다. 우리가 성전에서 우리의 유익과 이익을 위하여 미사에 참석하고 기도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하고 기도 하는 것이 더 좋다.
우리가 하느님께 내 자신을 봉헌하는 마음으로 미사에 참석하고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모든 것을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구하기도 전에 벌써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마태 6,5)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 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 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나의 생 각과 말과 행위를, 나의 온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해마다 많은 수도원에서 주님의 봉헌축일에 수도서원을 합니다.
성모님과 요셉께서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처럼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고자 합니다. 다른 삶도 마찬가지겠지만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 혹은 수도생활을 하다보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애초에 품었던 결심과 확신이 흐려지거나 흔들리기도 합니다.
서로 다른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데에서 오는 어려움, 생활이 주는
피로감과 무력감 등이 우리의 결심을 지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라는
은총의 선물에 대해 감사해하던 그 마음을 되돌아볼 때입니다.
시간이, 삶의 주변 상황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바라게 하고 원하게 함으로써
처음에는 없던 짐을 지워주고 의지를 흐리게 할 때 우리가 주님께 드렸던 애초의
첫 마음을 깊이 바라봅시다. 마치 아기를 가진 어머니가 태중의 아기에게
이런저런 바람과 희망을 품고 남보다 나은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고 기대하지만
막상 아기를 낳을 때가 되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아기의 건강만을
기원하고 바라는 것처럼,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은총의 선물을 감사드리면서
우리 마음에 내려앉은 겉치레와 껍데기의 부유물을 걷어내는 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은총에 감사드리면서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다시 한 번 봉헌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손으로 흙을 빚어 만드신다. 그 어떤 피조물보다 사람한테는 하느님의 손길이 닿아 있다. 사람은 손으로 죄를 끌어들이기도 하였고, 하느님의 권능을 보이기도 하였으며 구세주를 받아 안기도 하였다.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창세 3,6). 하와는 손으로 지선악수의 열매를 따서 먹고 남편에게도 건네주었다. 인류의 고통과 죽음은 사람의 손을 타고 들어왔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탈출 14,21).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홍해 바다에 빠져 죽든가 추격하는 파라오 군사의 창검에 찔려 죽을 수도 있었다. 손은 하느님과도 잡을 수 있고 악마와도 잡을 수 있어 두 개이다.
“시메온은 아기를 두 팔에 받아 안고 하느님을 찬미하였다”(루카 2,28). 지선악수의 열매를 움켜쥐었던 사람의 손이 하느님을 안았다. 열매를 따던 하와의 손은 뱀을, 열매를 받아먹었던 아담의 손은 하와를 가리킨다. 그 같은 사람의 손 안에 들려 성전에 봉헌되는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사람의 손에 의해 못박히신다.
기도하는 손이 될 때 비로소 사람은 빈손이 된다. 시메온과 한나는 기도하느라 빈손이 되었기에 구세주를 안을 수 있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가게 해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정호신부-
오늘은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후 40일이 지난 다음, 산모였던 성모님의 정결례와 함께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봉헌되는 예수님을 향해 예언자 시므온이 이야기한 대로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신 예수님을 기념하며 우리는 한 해 동안 주님의 빛을 밝혀줄 초를 축복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복음 속에 봉헌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빛이 되시는지 살펴보는 것이 좋은 묵상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을 구원할 빛을 먼저 눈으로 목격한 예언자 시므온은 하느님께 예수님에 대해 증언합니다.
"주님,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이 종은 평안히 눈감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그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
그리고 이 어린 아이를 안은 어머니에게 또 이렇게 증언합니다.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
이런 두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의미가 우리에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빛으로 표현하는 의미와 그 빛의 내용이 모두 우리 앞에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시므온이 하느님께 고백한 것처럼 이 빛이 세상에 와 비치게 된 이유는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뜻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세상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빛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두를 그 비추임의 대상으로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당신이 선택하신 그 백성에게 그들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며 이 빛은 온 세상, 이방인의 땅으로 퍼져나가는 방법으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상에, 인간의 사람됨을 알려주신 그 내용을 밝혀 보여주시고 모든 이가 당신을 바라보고 본받음으로써 하느님의 원하시는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누릴 길을 열어주시고자 사람이 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인간 구원의 시작이 그러했듯 작은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하신 약속대로 다윗의 자손으로 사람이 되시어 이스라엘 사람으로 모든 이를 구원하실 삶을 이루신 것이 곧 예수님의 삶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시므온이 성모님께 던진 이야기는 훨씬 구체적으로 그 빛의 모습을 우리에게 소개 시켜줍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냥 아름다움이 아니라 마치 불의 뜨거움을 나타내듯 강렬한 인상으로 다가옵니다. 또한 매우 고통스럽고 아픈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 빛은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비춰 그들을 일으키기도, 또 쓰러뜨리기도 할 것이라 합니다. 그러나 이 빛이 걸어야 하는 길은 수많은 반대자들의 표적이 되어 그를 가장 사랑하는 이에게 가장 고통스런 삶이 되리라 말합니다. 그렇지만 이 고통으로 인해 그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이 드러나게 되리라, 곧 그들의 어둔 부분이 이 빛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리라는 이야기가 더해집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하느님 자체이시므로 하느님의 진심이 사람들에게 드러남으로써 하느님이 사랑하시던 이들이 그들의 삶에 참 힘을 얻고 그 몸을 일으켜 하느님을 바라보고 생명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수많은 예언과 말씀을 어기고 살아온 이들에게 예수님의 존재는 그 자체로 그들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위협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삶 앞에서 그들이 하느님이 믿어오던 신앙의 모습이 얼마나 추하고 왜곡되었던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둘러 예수님을 없앨 수밖에 없는 잔인한 자신들의 삶의 진실을 드러내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사랑스런 사람을 죽이려는 그들의 생각이 하느님을 죽음으로 내 모는 것이라는 것이 드러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오늘 시므온의 예언은 예수님 생애 모두를 담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과 그분의 운명,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질 하느님의 사랑의 완성 모두를 말입니다. 하느님을 밝혀주는 빛, 그것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미사에서 주님의 빛을 밝힐 초들이 축복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제단에서, 또 여러분의 기도 자리에서 그 작은 촛불을 처음으로 밝히게 될 것입니다. 오늘 그 큰 빛이신 예수님이 성전에 봉헌되는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성모님께 안겨있듯 말입니다.
그 빛이 자라고 자라 이 세상을 구원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초들에 불을 붙일 때도 이 빛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이 이방인들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빛이시라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작은 불꽃들이 됩시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어둠을 밝히는 뜨거움으로 세상을 밝히고 구원을 전합시다.
오늘은 제가 며칠 전에 받은 편지 한통을 읽어 드릴려고 합니다. 이 편지는 수도성소를 받고 외국에서 봉헌 생활을 하고 있는 어느 수녀님의 글 입니다. 오늘이 봉헌 생활의 날인 봉헌 축일 이라 더욱 마음에 와 닿을 것 같습니다.
"성령의 바람을 타고 중국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저희 수녀회 공동체에 파견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저는 정신 지체 아동들과 함께 살아갑니다. 아이들은 모두 부모가 있지만 전부 부모로 부터 위탁 받아 있습니다. 수도회에 입회하여 처음으로 수도회의 울타리를 벗어나 시작하는 저의 봉헌 생활은 먼저 저 자신부터 얼떨떨하게 만들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자유롭게 선교를 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외국인 신분으로서의 선교의 삶이란 국내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우선 수도자란 신분을 드러내 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곳의 학부모들이 저희들의 신분에 대하여 몹시 궁금해 하였습니다. '국적이 다른 여자들끼리 왜 여기 와서 이렇게 함께 사는걸까?' '남편들은 얼마나 너그럽기에 아녀자들과 저렇게 오래 헤어져 있는가?' 중국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처음엔 질문 자체가 재미있었지만 그것도 끝이 없이 계속되니까 너무 피곤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듣다 못한 중국인 우리 공동체 직원이 적당히 둘러 대 주어 피곤함은 면했지만, 그 댓가로 저희들은 졸지에 아이 서넛을 한꺼번에 가진 유부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곳에서의 저의 봉헌 생활은 법적인 구속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함께하는 순수함과 함께 더욱 맛들여 갔습니다. 아이들의 연령은 5세에서 16세, 이들은 자폐아, 대뇌 척수증, 지진아, 다운증후군의 아이들입니다. 가족적인 분위기로 교육시키기 위해 모였지만 소수의 인원으로 24시간 이들과 같이 생활함이란 결코 쉽지가 않습니다. 수없이 반복해서 가르쳐야 하고 주위의 물건들이 모두 장난감으로 여기는 아이들은 일 저지르기를 밥 먹듯이 하였으므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악동(?)들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이 아이들은 저의 작은 예수님이었습니다. 기억력이 짧고 이성적인 판단력의 부족이 그들의 가장 큰 어려움이긴 하지만 서로 용서하고 빨리 화해하는 모습, 있는 그대로의 자기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단순함이 저를 항상 일깨웁니다. '어린이 처럼 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 뜻을 조금 알아들을 것 같습니다.
시간이 조금씩 지날수록 아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생활습관들이 늘어나고 또 저희들의 보살핌이 그들을 위하는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는 학부형들로 부터 감사의 말을 들을 때면, 마음속으로부터 '주님! 당신은 사랑이십니다'하고 감사드리게 됩니다. 봉헌 생활의 예언자적 성격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인격적 사랑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가르침을 온 몸으로 느끼며, 가장 나약한 이들의 손과 발, 마음이 되어 함께 엮어 나가는 이 삶을 통해 살아계신 하느님의 사랑을 한껏 체험합니다. 방학 때 집에서 가지고 온 껌을 꾸깃 꾸깃 구겨서 좋아한다는 말 대신에 불쑥 내미는 그 순수함을 통하여, 또 이웃 집 총각이 결혼식하는 것을 보고 와서는 무작정 결혼하자고 달려드는 그들의 천진난만함에서, 큰 죄 지을 줄 모르고 늘 명랑하고 기쁘게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저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합니다. 하느님께서 죄에 물든 이 세상을 자비하심으로 돌보시는 까닭은 바로 이 깨끗한 영혼들의 순수한 삶의 힘이 아닌가 싶습니다. 주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갑자기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는 제 동생이 생각납니다. 그 곳에서 수녀님과 똑 같은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졸지에 자식이 생겨 유부녀가 되어버린 수녀는 아니지만 진짜 아이 둘을 둔 유부남입니다. 본성이 워낙 선한 동생이라 아마도 수녀님 못지 않게 열심히 아이들을 사랑하리라 믿습니다. 수녀님의 봉헌 생활에야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동생 또한 신앙인으로서 또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미약한 봉헌의 삶을 살아가리라 믿습니다.
봉헌의 의미를 가슴속에 조용히 다시 한번 새겨봅니다. 세례받은 모든 사람은 봉헌의 삶을 살아갑니다. 모두 다 하느님께 바쳐진 우리들의 삶입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매일 매일 헤아려보는 우리들의 봉헌의 삶입니다. 아멘.
신부가 되고 처음으로 성당 식구들 가운데 아프거나 연로하신분들을 방문할 때 였습니다. 어떤 할머니 집을 찾아갔는데, 집의 문을 열자마자 냄새가 많이 나고, 그리고 집안에는 그리 정돈되지 못했습니다. 거의 누워있다시피 하고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드셔서 잘 들리지도 않는 분이 주섬주섬 무엇을 챙기시더니 기도를 마치고 일어서려는 제 손에 봉투를 하나 쥐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제게 건네는 말씀이 “신부님, 이거 얼마 되지는 않지만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서 써주십시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아니 할머니도 어려우신데, 할머니가 쓰세요!”라고 제가 말씀드리니까, 할머니는 “이거 없다고 저는 굶어죽지는 않습니다. 더 어려운 사람들 위해 써주십시오. 그리고 이건 제것이 아닙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찌보면 이 세상이 그래도 살아갈만하고, 그리고 어찌보면 이 세상이 그래도 사람사는 향기가 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내어놓고 봉헌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거대한 재물과 그리고 권력과 착취로 쌓아진 것들은 오히려 파괴하고, 죽이고 그리고 억눌려 버립니다. 그러나 내어놓는 삶은 모든 것을 살리고, 그리고 일으켜 세우며, 그리고 또한 새롭게 합니다.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것, 자신의 사람으로,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만들기 위해 몸부림 치지만, 그 가운데에서 조그마한 것이지만 자신의 것을 소중하게 내어놓는 그 주름 가득한 할머님의 손길처럼 곳곳의 많은 이들은 진정 하느님만으로도 행복하고,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가는 모습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들으신 복음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아마 자식일 것입니다. 그런 자식을 주님께 봉헌합니다. 바로 주님께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주님 뜻대로 쓰여지도록 내어놓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삶도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놓았습니다.
어찌보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고, 그리고 우리가 정말 예수님의 은총으로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렇게 주님께서 자신을 내어놓으심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진정 모든 구원의 시작은, 그리고 모든 사랑의 시작은 바로 내어놓음에서 시작됩니다. 신이신 예수님께서 보잘것없는 인간이 되어오심도, 그리고 십자가에서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시는 그분의 내어놓으심으로 그리고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는 그렇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어찌보면 이 사회가 어두운 것은 어느 누구도 자신을 내어놓으려 하지 않기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를 믿는, 그분의 뜻을 따르겠다고 하는 이들마저 자신의 구원만, 자신의 이익만을 좇아감으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내어놓음을 살아가지 못하는, 그리고 아파하고 그리고 힘들어하는 이들을 바라보지 못하는 껍데기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는 않나 반성해 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의 자리로만 끌어당기는 것보다도 먼저 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다른 이를 위해서 밀어주는, 그리고 내어놓고, 희생할줄 아는 그런 마음과 영혼의 손놀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오늘 일년에 쓸 초를 봉헌합니다. 초 한자루도 자신을 봉헌하고, 그리고 내어놓고 태움으로 인해서 좁디좁은 곳이나마 밝힐수 있는데, 하물며 하느님의 사랑으로 창조된 우리들은,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된 우리들의 삶속에서 먼저 내어주고 희생함으로 인해서 세상은 더욱 밝게 됨을 초 한자루가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렇게 우리는 또하나의 촛불로서 세상을 밝혀 주어야 할것입니다. 오늘 주님 세례 축일을 지내는 우리들도 새롭게 봉헌되고, 그리고 또한 새롭게 내어놓을 수 있을때 이 사회는 더욱 밝아지고,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함께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성전에서 새롭게 우리를 내어놓고 봉헌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복음을 다시 한번 묵상하도록 하자.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의 아들이며 구세주이신 아기 예수가 이 세상에 탄생하신 다음 하느님은 그 아드님을 어떤 사람들에게 보여주셨는가 하는 점을 알아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느님 나라를 기다리며 인내를 가지고 기도하고 착하게 살아온 시므온과 안나라는 노인들에게 아기 예수가 누구인지를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하느님 나라를 찾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믿음의 자세, 생활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겠는가? 안나와 시므온이라는 노인들처럼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구세주 예수를 만날 수 없고 옆에 두고도 볼 수 없을 것이다. 나이를 먹고 기운이 없어져도 오늘 복음의 안나 할머니처럼 믿음 안에서 주님께 봉사하며 기도하는 속에서 구세주 그리스도를 찾고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우리는 이웃을 통해서 그분을 만나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모상인 우리 이웃을 통해서 우리는 언제나 그분을 만날 수 있다. 나의 이웃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하느님과 만날 수 없고, 사랑해 드릴 수도 없다.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났다는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하느님 자녀로서 아버지이신 그분을 우리의 이웃 형제를 통하여 체험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자신의 교만을 모두 버리고 하느님께 자신의 생활을 봉헌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진정 기쁘게 살아갈 수 있다. 주님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자신 다시 한번 하느님 앞에 회개하며, 앞으로 진정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자.
우리는 일상에서 수없이 많은 만남을 갖는다. 일을 하면서 만나고 놀기 위해서도 만난다. 또 보금자리에서도 만남이 있다. 그뿐이 아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여 만남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손쉽게 그 사람을 만난다. 또 편지를 통해 그의 마음을 읽으며, 전화로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그의 생각과 만나고, 선물을 받음으로써 그의 정성스런 마음과 만난다.
그렇다면 누구를 만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함께 있기 위한 욕구' 때문이다. 사람은 함께 살도록 하느님께서 만드셨다. 그러기에 수없이 많은 만남을 가지며 사는 것이다. 비록 시간적으로 또는 공간적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헤어지고 또 다시 만나기를 되풀이하지만, 만남은 '함께하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누구를 만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길을 떠나고, 전화를 걸고 편지나 카드를 보내고, 또 마음을 담은 정성의 선물이나 꽃을 전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만나야 할 그를 무한정 기다리기도 한다.
해마다 2월 2일에 교회는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낸다. 이날은 주님의 성탄과 공현을 마무리 짓는 축일이기도 하다. 전례주년에서 성탄시기는 주님 공현 대축일 다음인 주님 세례 축일로 공식적으로 마감하지만, 주님 봉헌 축일은 성탄 축일과 연결된 축일이다. 이날은 예수 성탄 대축일에서 꼭 40일째가 되는 날이다.
우리는 주님의 성탄을 지내면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났다. 인간으로 오신 겸손한 모습의 주님을 만나뵈었다. 그리고 그분이 탄생하신 지 40일째 되는 날 유다 전통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했던 사건을 기념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성전에서 주님의 봉헌에 앞서 예언자 시므온이 고대하고 기다리던 '메시아'를 만나뵙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날 '주님 봉헌 축일'은 두 가지 내용을 기념한다. 평생을 기다려온 시므온 예언자처럼 주님을 만나 함께 지내게 되었고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는 것이며,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듯이 우리 자신도 만나서 함께 계시는 주님과 하나되어 봉헌의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축일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가? 교회는 일찍부터 이 축일을 지내왔다. 4세기말에 예루살렘 교회에서 이 축일을 기념하였고, 5세기 중엽에 초 봉헌 행렬을 시작하였다. 6세기에 이미 이웃 동방 교회들에 이 축일이 전파되어 기념하였다. 이때에는 시므온 예언자가 주님을 만났던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남'의 축제를 지냈다. 7세기 후반 이후로 로마 교회에 들어오게 되었고 다른 서방 교회에도 전파되었다. 처음에는 동방 교회들처럼 '만남의 축제일', 또는 '성 시므온의 날'로 지냈다가 성모 신심과 성모 축일이 발달하여, '성모 취결례(정화예식)'로 불리게 되었다. 주님의 축일이 성모의 축일로 바뀌어 오랫동안 지내게 된 것이다.
또 중세 후반기에는 촛불을 들고 행렬하는 것 때문에 한때 '성촉절(聖燭節)'이라고도 불렸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례는 이 축일의 본디 모습을 되찾아 시므온 예언자의 '만남'의 의미, 축복받은 초를 들고 성당으로 들어가는 행렬 등의 의미를 강조하고 원래대로 주님의 축일로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이날 우리는 기도할 때 쓸 초를 축복하고 또 봉헌한다. 초는 자신을 태워서 미약하지만 불을 켜서 어둠을 밝히는 빛이다. 그래서 교회는 전례에서 일찍부터 제대와 함께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전례표지로 초를 써왔다. 이날 교회에서 초를 봉헌하고 촛불 행렬을 하는 것은 주님 봉헌 축일의 의미에 가장 알맞은 것이다.
우리는 흔히 본당에서 이날 기도할 때 켤 초를 갖고 와서 축복을 받고 또 본당에서 쓸 초들을 봉헌한다. 완전한 봉헌은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드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그 결과물이나 몫을 드린다. 초를 드리는 것은 주님께서 성전에 봉헌되셨듯이, 우리도 주님과 일치하여 나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다. 시므온이 주님을 만나 함께했듯이, 봉헌하기 이전에 이미 우리는 주님과 만나야 한다. 그것이 시므온이 주님을 만난 사건을 기억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초를 들고 행렬하는 것을 잘 볼 수 없다. 주님 봉헌 축일이 교우들이 많이 참석하지 않는 춥고 이른 평일 아침에 미사가 거행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를 들고 행렬하는 것은, 우리를 만나러 오신 주님을 찾아 불을 밝혀 들고 하느님의 집(또는 제대)으로 나아가는 의미를 더 잘 드러내준다.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를 찾아오신 주님의 성탄의 의미를 다시 되새기자. 더 나아가 우리도 주님을 찾아 만나고 함께하는 기쁨으로 주님의 봉헌에 동참하여 나 자신을 봉헌하도록 하자. 성전에 봉헌되신 주님의 봉헌 축일에 성탄을 기억하고 나의 새 삶을 기쁜 마음으로 드려야 할 것이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지 꼭 40일째 되는 날로서,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바친 날을 기념하는 '주님 봉헌 축일'입니다. 이 축일의 기원은 요셉과 마리아가 구약의 율법에 따라 하느님의 성전에 아기 예수님을 봉헌한 데서 유래합니다.
봉헌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받들어 바친다', '정성을 모아 바친다'는 뜻입니다. 받들어 바침으로써, 정성을 모아 바침으로써 봉헌물은 받는 사람의 것이 됩니다. 따라서 요셉과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의 성전에서 바쳤다는 것은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내어 드렸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 아기 예수님을 완전히 내어 맡겼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제는 하느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키우게 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봉헌되심으로써 하느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하느님의 참다운 일꾼이 되셨습니다. 아울러 아기의 부모는 하느님께 바쳐진 아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 아들의 삶을 위해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누구한테 봉헌할 때 그 봉헌물을 받을 대상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전적으로 그를 믿고 온전히 내어 맡깁니다. 우리의 부모님들도 자식들을 자주 봉헌합니다. 특히 입시 때 또는 혼사 때가 되면 자식을 쉽게 봉헌하게 됩니다. 자식들을 유명한 점쟁이에게 봉헌하는 사람들도 있고, 심지어는 신령한 힘이 있다고 하는 큰 바위나 고목에 봉헌하는 부모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봉헌 행위를 자세히 살펴보면, 대부분은 개인 욕심에 치우쳐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욕구를 채워 보려는 기복주의 신앙에 빠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러한 봉헌 행위는 이기적인 봉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봉헌 행위는 오직 자식의 성공만을 바랄 뿐입니다. 자식의 능력이야 어떻든 간에, 노력이야 얼마를 했든 간에 그저 무조건 잘되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이 시험에 낙방하거나 혼사가 잘되지 않으면 금방 돌아서서는 욕을 합니다. 투자한 만큼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저 손해만 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결국 자식을 봉헌했던 그 대상을 원망하고 부정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되는 근본적인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식을 봉헌했던 그 대상을, 믿었던 그 대상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온전히 믿지 못하고 투자한 만큼 얻어내야겠다는 이기적인 욕심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참되게 진실로 봉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를 봉헌하고, 하느님께 조건 없이 온전히 봉헌한다고 말은 하지만 하느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봉헌 행위는 결코 참된 봉헌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행위는 단순히 하느님과 타협하고자 하는 흥정일 뿐입니다. 만일 하느님을 온전히 믿고 봉헌했다면 그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결과야 어떻든 간에 주어진 대로, 있는 처지 그대로를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설령 그 일이 자기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한 요셉과 마리아의 삶을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언자 시므온은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리듯 아플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삶은 지지리도 못난 삶, 철저하게 실패한 삶처럼 보였습니다. 고향에서조차도 환영받지 못했고, 언제나 온갖 죽음의 위협을 받고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모습으로 결국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아들의 삶 앞에서 마리아는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하였습니까? 복음서는 마리아의 태도를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을 마리아는 마음속 깊이 새겨 간직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마리아는 아들의 고통과 아픔과 죽음 속에서도 하느님을 굳게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아들을 봉헌한 하느님께 전적인 신뢰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결코 한 자식의 어머니로서 욕심이나 기대를 앞세우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아들 예수님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앞세우지 않고, 자신의 욕심을 앞세우지 않고, 언제나 겸손한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앞세웠습니다. 결국 마리아는 참으로 하느님께 아들의 모든 것을 봉헌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해서 초를 축복합니다. 하느님께 봉헌하는 기도와 전례, 모든 신심 행위에서 초는 결코 빼놓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초는 바로 하느님께 봉헌된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자신을 태움으로써 빛을 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빛이십니다. 어둠을 밝히시는 참 빛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스스로 태우심으로써 우리에게 빛을 밝혀 주셨습니다. 구원의 빛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어두움 속을 걷지 않는다." 우리는 이 빛을 믿습니다. 우리는 빛이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 구원의 빛이신 예수님, 우리에게 기쁨과 사랑과 평화와 정의를 내리시는 빛이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참 빛이신 예수님을 진실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예수님께 자신을 참되게 봉헌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식을, 자기 가정을 온전히 봉헌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뜻, 나의 의지, 나의 욕심을 내세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마리아를 닮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한 예수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어떤 역경이나 환난이나 모진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절망 속에서 주저하지 않고, 슬픔 속에서도 자포자기하지 않으며 다시 하느님의 손을 잡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지닌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모든 일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지는 모든 처지 그대로를 하느님의 섭리로, 하느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마련하신 선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형제 자매 여러분!
주님 봉헌 축일을 맞이하여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한 성모님의 믿음과 신앙을 바라봅시다. 오로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 속에서 아들을 바라보며 숨어서 기도한 마리아의 삶을 바라봅시다. 하느님의 일을 위해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포기할 줄 알았던 마리아, 그리하여 아들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인 마리아의 철저한 신앙을 바라봅시다.
실패와 어려움 속에서 그것을 하느님의 손길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외쳐 봅시다. '내 욕심을 버리자! 내 생각을 버리자! 사랑하는 아들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한 마리아를 바라보자!'
그리고 언제나 이렇게 기도 드립시다.
"이제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봉헌합니다. 제가 하고 싶어했던 모든 일, 제가 욕심부렸던 모든 일, 제가 기대했던 모든 일, 그것을 모두 당신께 봉헌합니다. 오로지 당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는 오로지 당신의 것이오니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는 저에게 주어지는 모든 처지, 있는 그대로를 당신께서 저에게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느님 아버지! 저의 모든 것을 온전히 당신께 봉헌할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주십시오. 아멘."
지난 성탄을 준비하면서 나에게 오시는 아기 예수님께 좋은 선물을 봉헌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선물이 무엇일지 고민했습니다. 성탄 구유를 멋지게 만들어서 아기 예수님께 선물할까? 아니면 따스한 곰인형을 선물할까? 결국 저는 주님께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으니 아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쌀을 선물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왠지 부족한 것 같았습니다. 왠지 주님께 기쁨이 되는 선물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일까요?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고 가장 받고 싶어 하시는 선물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 바로 나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것, 그것이 예수님께서 받고 싶어 하시는 선물인 것입니다. 성모님과 성요셉이 아기 예수님을 주님께 바친 것처럼 나도 내 자신을 주님께 바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이 아닐까요?
-박상대 신부-
오늘은 주님성탄대축일로부터 40일째 되는 날이다. 이미 5세기초부터 동방교회는 루가복음의 전사(前史)를 근거로(2,22-40) 모세의 율법이 정하는 성모 마리아의 정결례 축제를 예루살렘에서 지내기 시작하였다. 동방교회는 처음부터 1월 6일에 주님성탄대축일을 지냈기 때문에 정결례 축일은 성탄 후 40일이 되는 2월 14일이었다. 650년경 교황 마르티노 1세가 이 축일을 로마교회에 도입하면서 '마리아 빛의 축일'로 정하여 2월 14일에 지냈으나, 얼마 후 2월 2일로 변경되었다. 그 이유는 로마교회가 이미 336년경부터 12월 25일에 주님성탄대축일을 지내왔기 때문에 이 날부터 40일째 되는 날이 2월 2일이기 때문이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동방교회는 오늘 축일의 핵심을 '주님의 성전봉헌'에 맞추어 주님성탄사건을 마무리하는 의미로 거행하는 반면, 서방교회는 초 축성과 촛불행렬을 곁들여 성모 마리아의 축제로 발전시켰다. 서방교회는 이 날 성전에 필요한 초들뿐 아니라 전기가 없던 당시 가정에서 기도를 드릴 때 필요한 초들까지 축성하여 속죄와 참회의 의미로 성대한 촛불행렬을 거행하였다. 1960년 전례개혁을 통하여 오늘 축일의 원초적인 의미에 비중을 실었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축일명을 '주님봉헌축일'로 확정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축일에 마리아의 자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아버지의 집에 봉헌된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그 주위에 마리아와 요셉, 시므온의 예언말씀과 안나의 역할도 상당히 부각된다.
예수가 비록 정상적인 부부관계에서 태어난 아기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모든 부모는 첫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해야 하는 봉헌례와 산모의 부정을 벗는 정결례를 치러야 했다. 야훼 하느님께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이집트의 모든 맏배를 죽여버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탈출하게 하신 바로 그 날 맏아들과 맏배를 야훼께 물러내는 계명을 내리셨다.(출애 13,1-2.11-16) 모세가 정한 율법에 의하면 그 첫아들은 출생 30일이 되면서부터 회당이나 성전을 찾아가 제관 앞에서 봉헌례를 치러야 하며(민수 18,15-16), 산모는 아들을 낳은 경우에 1주간 부정기간과 33일의 정결기간을 보내고 40일째 되는 날, 딸을 낳은 경우에는 2주간 부정기간과 66일의 정결기간을 보내고 80일째 되는 날 예루살렘 성전에서 1년 된 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비둘기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바치는 정결례를 치름으로써 부정을 벗고 정결을 찾아야 했다. 가세(家勢)가 어려우면 비둘기 두 마리만 바칠 수도 있다.(레위 12,1-8).
이에 루가복음사가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례를 한데 묶어 같은 날에 치러진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다.(22-24절) 이는 루가가 이중효과를 노리는 의도로서 예수의 부모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하는 동시에 아기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 등장시킴으로써 예수를 "자기 궁궐(성전)에 나타나는 상전"(말라 3,1)으로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루가는 분명 늘그막에 아들을 얻은 엘카나와 한나가 젖을 뗀 아들 사무엘을 실제로 성전에 갖다 바친 이야기(1사무 1,24-28)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루가가 보도하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아기 예수의 봉헌례는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는 이스라엘에 종지부를 찍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루가의 의도는 마리아의 정결례와 예수의 봉헌례라는 율법준수의 틀을 통하여 예수를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야훼 하느님이 현존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으로 현현(Epiphania, 顯顯)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예수 현현(顯顯)의 목적은 두 예언자를 통하여 성사된다. 바로 자신을 봉헌하여 밤낮으로 성전에서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던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의 증언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성과 신성을 공적(公的)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예언자 시므온은 첫눈에 아기 예수를 메시아요, 이스라엘과 이방인 모두의 구세주로 알아본다. 물론 시므온의 예지(叡智)는 성령에 의한 것이다.(25절, 27절) 아기 예수를 두 팔에 안아든 시므온의 예언은 하느님께 대한 찬양의 말씀(29-32절)과 마리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34-35절)으로 짜여 있다. 물론 예언의 전체 내용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하느님 자신의 계시이다. 따라서 시므온이 자신의 예지를 통하여 예수를 메시아로 통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를 통하여 메시아로 드러난 것을 자신의 눈으로 본 것이다. 볼 것을 본 시므온은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게 되었고 메시아이신 예수는 이방인의 빛이요 이스라엘의 영광으로 우뚝 서게 된다.
예언녀 안나는 결혼 7년만에 남편을 잃고 84살이 되도록 과부로 지내면서 성전에 몸담아 밤낮 없이 단식과 기도로 하느님을 섬겨온 사람이다. 과부로서의 안나의 삶은 구차하고 가난하기가 이를 데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경건했을 것이다. 가난한 자가 하느님을 먼저 공경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안나는 오늘을 보기 위해 84년을 기다려 왔다. 안나의 삶은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의 모범이다. 이스라엘의 가난하고 경건한 사람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임박한 메시아의 구원을 기다리고 있었던 자들이다. 안나는 이들을 대표하는 자로 묘사되며 나아가 모든 그리스도교적 과부들의 가난하고 경건한 삶을 이끌 수 있는 모범으로 제시된다. 이러한 그녀가 시므온의 팔에 안겨있는 아기 예수를 메시아로 알아보았고, 시므온의 예언을 밖으로 배달한다. 루가는 안나가 어떤 말로 사람들에게 메시아의 도래를 알렸는지 밝히지 않고 있다. 그것은 시므온의 예언이 어떤 말을 덧붙일 필요 없이 그 자체로 완벽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빛과 영광 속에는 반대와 갈등과 고통이 함께 들어 있다. 예수의 도래로 위기가 세상에 들어왔고 예수에게 이스라엘과 모든 백성들의 운명이 달리게 된 것이다. 예수탄생을 축하하러 왔던 목자들의 말을 이미 마음에 새기고 있던(2,19) 마리아는 오늘 시므온의 예언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예수와 함께 하는 고통의 길을 걸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마리아는 이렇게 자기에게 약속된 놀라운 하느님의 계획을 하나씩 배워하고 깨달아가고 있는 것이다. 마리가 고통을 배우는 숙제를 하는 동안, 예수도 메시아로서의 자의식을 키워가야 하는 숙제를 받았고 세상은 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할 숙제를 받았다.
예수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육적인 건강과 영적인 지혜를 갖춘(40절) 성인(成人)으로 성장하는 것은 예수 스스로가 메시아임에 대한 인식과 의식의 성장을 의미하듯이 세상 또한 메시아와 그 현존에 대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한다. 그 때까지는 예수도 세상도 시간을 필요로 한다. 이 시간은 성령의 시간이다.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고 계시며, 성령 하느님만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고 또 선포하는 일을 도와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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