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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4일 연중 제4주간 금요일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하고 말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마르6,14-29)
King Herod heard about Jesus,
for his fame had become widespread,
and people were saying,
“John the Baptist has been raised from the dead;
that is why mighty powers are at work in him.”
Others were saying, “He is Elijah”;
still others, “He is a prophet like any of the prophets.”
But when Herod learned of it, he said,
“It is John whom I beheaded. He has been raised up.”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 저자는 하느님을 기쁘게 하는 참된 경배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가르치는 네 가지 훈화를 들려준다. 이웃 사랑, 고통 받는 이에 대한 자세, 정결, 가난에 대한 가르침이다(제1독서). 세례자 요한은 무엇이 하느님 뜻인지를 식별하며, 권력자에게도 옳지 못한 행동에 대하여 도전했다. 결국 그는 죽임을 당하였지만, 정치적, 사회적 악의 실체를 폭로하는 예언자가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한 나라를 통치하는 헤로데 임금의 생활 모습을 보십시오. 권력 주변에서 얽히고설킨 여인들의 질투와 간교한 계략들이 난무하는 모습이 마치 한 편의 역사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허세와 체면 때문에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예수님을 재판하고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빌라도는 직접 예수님을 신문했기 때문에 그분께 죄가 없으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결국은 죄수였던 바라빠를 놓아주고, 무고하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내어 줍니다(마르 15,15 참조).
그들의 공통점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자신의 권력 유지와 명성, 대중적 인기와 자존심, 체면 이런 것이 기준이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 시대의 이야기거나 현재 비판받고 있는 정치 권력가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회에서, 직장에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까지 이런 모습들은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알게 모르게 힘을 추구하고 체면이나 자존심, 인기에 휘둘려 살다 보면, 영혼이 없는 사람처럼 됩니다. 본디의 자기 자신은 없어지고 껍데기 인생이 됩니다. 자기 자신의 이런 모습 속에서 사회에 생명이 되는 정의와 평화는 하나둘 그 빛을 잃어 갑니다. 오늘 복음은 헤로데의 얼굴을 통해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게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얼굴입니까?
시험의 두려움
-전삼용신부-
오늘 인생에서의 마지막 시험을 치렀습니다. 유학 와서도 칠년 만에 시험이 끝난 것입니다. 한마디로 지긋지긋한 시험들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보는 시험 방법은 한국에서 보는 방법과 조금 다릅니다. 한국은 대부분 필기로 보지만 이 곳에선 대부분 교수와 일대일 오랄, 즉 말로 시험을 봅니다.
처음에 저를 가르친 교수 앞에서 배운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굉장히 두려웠었습니다. 특히 잘되지 않는 남의 나라말로 시험을 보려면 며칠 전부터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여기저기서는 재시(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여 다시 보아야 하는 것)가 걸려 곡소리가 나오기도 하는 등 유학에서 가장 스트레스 받는 시기가 바로 시험기간입니다.
처음엔 첫 해가 가장 힘들고 가면 갈수록 시험이 쉬워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첫 해엔 말을 잘 못하니 몽땅 외워서 시험을 보아야 하기 때문에 공부를 열심히 하였지만 말을 조금씩 더 잘하게 되면서는 요령이 생겨서 첫 해만큼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시험 성적이 떨어져서 급기야는 유학 육 년차 때 첫 재시를 받아보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시험의 부담감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말 잘하는 이태리 학생들도 힘들어 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험은 누구에게나 시험인가 봅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 시험을 치르다보니 매번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내 자신이 싫어졌습니다.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방법은 없는가?’
해답은 ‘없다.’였습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완벽하게 했다고 하더라도 교수님이 어떤 일로 화가 나 있거나 한 반을 본보기로 다 재시를 줄 때는 피해나갈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준비를 완벽하게 하더라도 100% 통과에 대한 확신을 갖고 여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일반적으로 ‘이 정도’만 하면 마음이 안심이 되는 수준은 있습니다. 그 수준은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공부하다보면 ‘이 정도면 됐어!’하며 스스로 위안이 되는 정도가 있는 것입니다. ‘그 정도만 하면 이변이 없는 한 통과는 할 수 있다.’는 수준이 있고 그 수준은 내가 내 스스로 내리게 됩니다.
만약 시간이 없어 공부가 스스로 만족할 ‘그 수준’에 미치지 못했다면 시험 보러 들어갈 때까지 기도하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불안감은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 공부하지 못한 것을 잘 알고 있는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공부를 하지 않은 자신이 재시나 과락을 맞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을 스스로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100%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을 수준까지는 미리미리 공부해 놓는 것이 스트레스를 안 받는 지름길입니다.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삶도 시험과 같습니다. 시험관은 당연히 하느님입니다. 내가 통과할 수준만큼 살고 있는지 살고 있지 못한지는 내 스스로 잘 압니다. 내 스스로 안다기보다는 양심이 압니다. 양심은 하느님 이전의 내 자신의 심판관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 살고 있다면 양심이 ‘넌 통과 했어.’라고 말해주고 그러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느끼게 해 주어 안심시켜줍니다. 그러나 스스로 아무리 잘 살고 있다고 머리로 되뇌어도 양심이 ‘넌 지금 위험수위야!’라고 한다면 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한 맘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 다닌다는 말을 듣자 헤로데는 얼마 전에 자신이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며 몹시 두려워합니다. 세례자 요한이 아니면 그런 기적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살아있을 때도 기적을 행한 적이 없었습니다.
잘못을 하면 이성적으로는 그것을 아무리 정당화하려고 해도 양심은 속일 수 없습니다. 그 양심은 죄를 지은 사람을 두려움과 불안함으로 끝없이 괴롭힙니다. 잘못을 했으면 벌을 받아야 당연하다는 것까지 양심은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언제 자신에게 벌이 떨어질지 몰라 항상 불안해하며 살아가게 되고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 것에서까지 두려운 이유를 찾아내어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양심이 ‘그 정도면 됐어.’하는 소리를 할 때까지 주님의 가르침에 충실히 사는 방법 외엔 없습니다. 마지막 날 자신을 심판하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의 양심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작은 시험과 같은 하루하루, 시험 준비가 안 되어 불안함에 떠는 그런 모습이 아니라 스스로 구원받았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자유로움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우리 삶을 그리스도의 말씀에 일치하며 살아가도록 합시다.
영원한 현재이신 예수 그리스도
-김찬선신부-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같은 분이십니다.”
교리에 대한 의문이 한창 많았을 때 천당과 지옥에 대한 교리,
그 중에서도 지옥에 대한 교리에 의문이 많았습니다.
그 첫 번째가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신데
어찌 영원한 형벌의 지옥이 있을까?’였습니다.
처음에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지옥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동안 이렇게 생각하다가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래서 구원하고자 하시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영원히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영원한 형벌의 지옥이 될 것이다.’라는 답으로 풀렸습니다.
두 번째 의문은 ‘지옥은 정말 불이 활활 타오르는 어떤 곳인가?’입니다.
물리적 형벌이 가해지는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곳입니까?
어제 묵상하였듯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입니다.
우선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곳입니다.
복음에서 악령이 예수님께 당신과 내가 아무런 상관도 없는데
왜 간섭하느냐고 하듯이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런 관계가 지옥입니다.
달리 얘기하면 사랑이신 하느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아무런 사랑이 없는 상태, 그것이 지옥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과의 아무런 관계가 없기에
하느님 백성과도 아무런 관계도 사랑도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렇다면 천당은 당연히
하느님 안에서 모든 사랑의 관계가 이뤄지는 곳입니다.
오늘 히브리서는 이런 사랑의 관계가 이뤄지면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은 시작된다는 뜻에서 형제애를 얘기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진정한 사랑이 이뤄지면
이곳이 천국이고
순간이 영원이고
손님이 그저 손님이 아니고 그리스도이고
남편이 그저 남편이 아니고 그리스도이고
아내가 그저 아내가 아니고 그리스도이고
사물이 그저 사물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이 모든 사랑 안에서
이 모든 것들 안에서
어제도
오늘도 영원하십니다.
약함이 강함으로 드러날 때
- 이은주 수녀-
소문만 듣고 벌벌 떠는 약함, 옳은 말을 하는 사람에게 앙심을 품는 표독함 안에 숨어 있는 약함, 그리하여 마침내 권력을 빌려 의인을 죽이는 강함으로 탈바꿈해 버리는 약함. 이 약함이 강함인 줄 알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쩍도 못하고 죽어갔는가? 짐짓 제가 옳다고 주장하다가 결국 억지를 부려 상대방의 콧대를 꺾어버리는 우리의 약한 본성 안에서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권력이라는 강함 안에 드러난 내면의 허약함을 본다.
어느 해 겨울, 책의 제자(題字)를 받기 위해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계신 신영복 선생을 찾아뵌 적이 있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쳐드는 단아한 집무실에서 선생께 차를 대접받으면서, 얻고자 했던 글씨보다는 그분의 20여 년의 감옥 생활에 마음이 더 쏠렸다. 선생은 암울했던 기억을 마치 좋은 추억인 듯 떠올리며 말씀하셨다.
작은 창으로 비쳐드는 햇살을 따라 자리를 옮겨가며 햇빛을 맞던 체험을 이야기할 때는 이미 선생의 책을 통해 감옥 생활을 알고 있었지만 또다시 가슴이 아파왔다. 권력이라는 허상이 그분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갔지만 선생은 오랜 영어 생활에서도 인간에 대한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신영복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우리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대상이 이성적으로 옳게 파악되지 못하고 말초감각에 의하여 그릇되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알면서도 증오의 감정과 대상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는 자기혐오에 있다.” 자신의 이기심을 넘어서지 못해 대상을 잘못 판단하게 될 때, 약함은 강함으로 탈바꿈하여 한 사람의 삶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것이다.
-정연동신부-
+ 찬미예수님
고아 출신의 엄마가 몇 푼의 돈이 없어서 생후 3일된 아이를 찜질방에서 굶겨 죽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분유는 할인점 직원이 주는 비매품 샘플을 얻어 먹여야 했지만 아기는 잘 먹지 않았습니다. 임신 중에 스낵이나 가끔 먹는 김밥으로 연명한 탓인지 엄마는 젖마저 제대로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엄마는 고아여서 친정 등 의지할 곳이 없었습니다. 추위와 배고픔에 아이도 엄마도 지쳐 있었습니다. 그러다 돈 5만원을 어렵사리 구해서 추위를 피하기 위해 찜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아이는 입술이 파래지고 이상증세를 보여 병원으로 옮겼으나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도대체 이 아이를 누가 죽인 것입니까?
‘저는 아닙니다. 저는 그 아이와 아이의 엄마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하고 대뜸 이야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그 아이가 또 엄마가 누군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들 탓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누구나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살아갑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열심히 행복을 추구하고 획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의 큰 맹점이 있습니다. 바로 무관심입니다. 내 삶의 행복을 위해 무던히 애쓰는 이 순간 우리 주위에는 굶고 고통 받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죽어갑니다.
오늘 헤로데는 자신의 즐거움·행복을 위해 요한을 죽입니다. 우리가 우리들의 행복만을 추구하고 아프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한다면, 헤로데와 별반 차이 없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무관심은 고통 받는 이웃의 죽음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 받고 아파하는 그들의 모습으로 먼저 이 세상에 오십니다. 결국 우리들의 무관심은 또 한 번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즐거움과 행복이 남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남을 살리는 것으로 드러났으면 좋겠습니다.
남을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그것만이 모두가 사는 길이요, 더불어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새벽을 열며
훗날 미국의 원수가 된 맥아더가 육군학교 교장 직을 맡고 있던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미국 상원의 국방위원들이 시찰을 나왔습니다. 맥아더는 각종 보고를 마치고 그들을 자기 방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는 아무런 가구도 없고, 단지 야전용 쇠 침대 하나만 놓여 있을 뿐이었습니다. 맥아더는 말했습니다.
“여기가 제가 생활하는 방입니다. 이곳에서 일주일을 지내고 주일에만 집에 가지요.”
맥아더는 자기가 얼마나 고생을 하고 있는지, 내심 목에 힘을 주며 쇠 침대에서 자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시찰이 끝난 후 만찬이 베풀어졌고, 금 접시에 멋진 요리들이 담겨져 나왔습니다. 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모두들 돌아간 뒤에, 금 접시 하나가 분실된 것이 드러났어요. 먼저 국방위원들을 의심한 맥아더는 서신을 보내 금 접시의 행방을 물었지요.
며칠 뒤 그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만일 장군님께서 그날 밤 야전용 쇠 침대에서 주무셨더라면 벌써 그 금 접시를 찾으셨을 겁니다. 금 접시는 제가 모포 밑에 넣어두었습니다.”
이 편지로 우리들은 맥아더 장군의 말과 행동이 달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과는 달리 야전용 쇠 침대에서 잠을 자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 언행일치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우리의 습관처럼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체면을 위해서 그리고 남의 시선 때문에 나오는 것은 오히려 잘못된 길로 나아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을 우리들의 삶 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바로 그런 모습이 나오지요.
갈리래아의 영주였던 헤로데는 그의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자신의 아내로 만듭니다. 백성들에게 나쁜 본을 보인 헤로데에게 요한은 그것이 옳지 않다고 누차 간하다가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요. 자기의 생일날 손님들 앞에서 호기를 부린 헤로데는 그것을 적절히 이용한 사악한 헤로디아와 그의 딸이 꾸미는 덫에 결려 결국은 세례자 요한을 죽이게 됩니다.
복음에서는 “임금은 몹시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라 그의 청을 물리치고 싶지 않았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언행일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언행일치라는 것이 오히려 그를 악의 한가운데로 밀어 넣는 역할을 하고 맙니다. 진리와 정의를 위한 언행일치가 아니라, 단순히 자신의 체면 때문을 생각하면서 이루어진 언행일치이기에 그 모습은 결코 옳은 모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에 우리 사회에서는 도처에 만연된 모습이 아닌가 합니다.
체면 때문에 혹은 용기가 없어서 불의를 보고도 못 본 척 눈감고 침묵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불의에 동조하는 비겁한 행위일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불의한 사건들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침묵하고 있습니까? 도처에서 체면을 생각하며 악을 반대하지 않는 헤로데가 있으며, 헤로디아처럼 악을 조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한 잔칫상에 모인 고관들, 무관들, 갈릴래아의 유지들 같은 사람들이 각종 악에 대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혹시 내가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아닐까요?
불의를 보고서 가만히 있지 맙시다.
빠다킹 신부
예수님을 닮은 모습
-이철구 신부-
나는 처음 만난 사람과 대화를 하다가
당신은 유명한 누군가를 닮았다고 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보통은 영화 배우나 탤런트 누군가를 닮았다고 하면 싫어하지 않더군요.
대부분 잘생기고 예쁘기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여자에게
씨름 선수를 닮았다고 하면 금방 얼굴이 달라집니다. 당연하죠.
있는 그대로 나의 느낌을 전달한 것은 사실이지만
상대방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말한 것은 실례이기 때문입니다.
이천 년 전에도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그들의 느낌대로 예수님이
엘리야를 닮았다고 는 옛 예언자 중 한사람을 닮았다고 했습니다.
또 헤로데는 예수님을 자신이 목을 베어 죽인 세례자 요한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느끼고 생각하고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예수님을 우리는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만일 우리 각자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모습대로 그렇게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언젠가 나에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닮았군요!
헤로데가 요한을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김병로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 행적에 대한 소문을 들은 헤로데 임금이 자기가 죽였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으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닐까 하며 두려워하는 내용이다. 그는 세례자 요한과는 마음으로 각별한 관계를 가졌던 것 같다. 그것은 세례자 요한이 그의 의롭지 못한 부분을 지적하여 솔직하게 그의 행동을 책하였던 것에서,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기가 껄끄럽긴 했지만 기꺼이 들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생일날 춤을 추어 그와 참석한 이들을 즐겁게 해준 딸(실제로는 동생의 딸이다)의 부탁으로 어쩌면 속으로 존경했을지도 모를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버린다. 이는 부인(그러나 실제로는 동생의 부인이었다)이 자기 딸을 시켜 하게 한 일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그런 모습이 강한 여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아마 그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에 그러할 것이리라.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하고 귀중한 선물과 은총들을(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나의 체면과 안위, 쾌락을 위해 사용하고 결국은 버리고 마는 우리의 모습 말이다. 우리는 과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헤로데처럼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의 목숨이 다하는 날 사라져 버릴 그 모든 것인데 그렇게도 소중한 것일까? 영원한 생명을 위해 주어진 것들을 금방 지나갈 안락을 위해 버리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은가. 헤로데는 그런 불쌍한 우리 모습의 전형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같다.
헤로데의 불행
-강영구신부(2004-02-06)
예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그 소문이 헤로데 왕의 귀에 들어갔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면 죽은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 틀림없다.”하고 말하였다. 예수의 소문을 들은 헤로데 왕은 “바로 요한이다. 내가 목을 벤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하고 말하였다.(마르6,14.16)
사랑하는 예수님, 우리 속담에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어도 악한 일을 하면 마음이 편할 리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莊子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若人作不善하여 得顯名者하면 人雖不害라도 天必戮之라.”
예수님, 당신 앞에서 문자를 쓰서 죄송합니다. 제 말이 아니라 莊子의 가르침입니다.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만일 사람이 선하지 아니한 일을 하여 이름을 세상에 드날리게 되면 비록 사람은 그를 해칠 수 없지만 하늘은 반드시 그를 죽인다.” 무서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하늘이 그 누구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자업자득自業自得으로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스스로 짓눌려 죽는 것입니다. 당신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칼로 망하는 법이다.”(마태26,52)
세상일들이 우연偶然으로 생겨나는 것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필연必然입니다. 입으로 내 뱉는 말 한마디, 작은 눈짓 하나, 행동 하나도 모두 씨앗과 같습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씨앗처럼 떨어져서 좋은 씨앗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고 감미로운 열매를 맺지만, 악한 말이나 행동은 가시덤불처럼 자라나서 자신을 짓누르고 고통과 불행의 열매를 맺습니다. 天必戮之라는 가르침이나 “칼을 쓰는 사람이 칼로 망하는 법이다” 하신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는 속담대로 헤로데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자신이 목 벤 세례자 요한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는 평생토록 쟁반 위에 담긴 두 눈 부릅뜬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비참하게 죽습니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自業自得이지요.
예수님, 저희가 어리석음에 빠지거나 탐욕에 사로잡히거나 분노하거나 증오심을 품음으로서 악한 씨를 뿌리지 않도록 지켜주소서.(一明)
“당장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양승국신부-
<미움덩어리, 제거 대상 제1순위>
정당한 절차에 의해 선출되지 않은 정치인, 합당한 자질이나 인품을 지니지 못한 지도자, 정통성이 없는 권력의 소유자들이 얼마나 피곤하게, 또 불안하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우리는 오랜 체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잠시도 편할 날이 없습니다. 그들의 눈동자는 늘 불안합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전전긍긍합니다. 좌불안석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헤로데 아티파스가 그랬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활동 주 무대 가운데 하나였던 갈릴래아의 영주였습니다. 묘하게도 그의 통치 기간은 예수님의 지상생활 기간과 거의 일치합니다.
헤로데 아티파스가 얼마나 막가는 사람, 부도덕적인 사람, 문제가 많았던 사람, 한 마디로 자질부족의 사람이었던가는 단 한 가지 스캔들만으로도 잘 파악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 아티파스는 본부인을 버리고 재혼을 하게 되는데, 재혼의 대상자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였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니 나라꼴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헤로디아 역시 ‘그 나물에 그 밥’이었습니다. 그녀는 허영심으로 가득 찬 여인이었습니다. 인륜을 저버린 여인이었습니다. 난잡한 사생활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권모술수와 끔찍한 악행을 서슴지 않고 강행하던 ‘대단한’ 여인이었습니다.
이 패륜의 부부에게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나, 백성들의 고초에 동참하려는 의지는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최우선적 과제는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의 불안정한 정권기반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벌인 추문은 하느님 앞에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의심할 바 없는 간통행위였습니다. 용서될 수 없는 파렴치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뒤에서만 수군거릴 뿐, 추악한 헤로데 왕권의 추문에 대해서 제대로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단 한 사람, 세례자 요한만은 예외였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 왕권의 난잡한 사생활에 대해 공공연하게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감추고만 싶은 추문을 과감하게 들춰냈습니다.
헤로데 아티파스는 뜨끔했습니다. 부끄럽기도 했지만, 세례자 요한으로 인해 받은 마음의 상처도 심각했습니다. 그래서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세례자 요한의 입을 막아보려고 기를 썼습니다. 협박, 회유, 감언이설...그러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한번 열린 세례자 요한의 입은 절대로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위기감을 느낀 헤로데 아티파스는 세례자 요한을 옥에 가둡니다. 기회를 잡은 헤로디아는 복수심과 증오심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눈에 가시 같던’ 세례자 요한을 마침내 죽음으로 몰고 갑니다.
이처럼 세례자 요한의 일생은 예수님의 일생처럼 사람들로부터 ‘반대 받는 표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미움덩어리였습니다. 제거 대상 제1순위였습니다.
세례자 요한 이전에 오랜 세월 동안 이스라엘에는 거짓예언자들만 득실거렸을 뿐, 참 예언자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의 침묵은 세례자 요한에 이르러 깨어지게 됩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에 의해 예언자의 시대가 다시 재개됩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예언의 말씀은 참으로 단순명료한 것이었습니다. 소박한 것이었습니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는 것, 알아듣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선포한 예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교만으로 가득 찬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단단히 화가 나 계십니다. 머지않아 여러분들에게 큰 벌을 주실 계획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도 여러분들의 완고한 마음을 바꾸어 하느님께로 돌아선다면 하느님은 진노를 푸시고 여러분들에게 축복과 자비를 베푸실 것입니다.
회개할 사람들은 세리나 창녀뿐이 아닙니다. 다른 누구보다도 죄 없다고 자처하는 바리사이 사람들, 율법학자들, 대사제들부터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헤로데 왕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는 내적인 회개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 안에서의 회개로 연장되어야 하는데, 그 구체적인 실례는 이런 것입니다. 옷 두벌 가진 사람은 갖지 못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생애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진리를 위해 몸 바친 생애였습니다. 광야에서 일생을 보낸 고독한 삶이었지만 구약시대의 마지막 대예언자로서 하느님의 사자, 하느님의 대변자로서의 삶에 충실한 삶이었습니다.
현 교황이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말씀이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의 양식이 되면 좋겠습니다.
“공동체 안에 살아가면서 그저 조용한 상태, 평온한 상태만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능사만은 아닙니다. 불쾌한 일을 겪지 않으려고, 가능한 한 모든 갈등을 덮어둘 생각만 하는 수도자, 또는 목자들을 생각만 하면 큰 걱정이 앞섭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닮은 이유?
-정호신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항상 함께 생각하게 되는 분들입니다. 두 분은 이미 어머니들끼리 친척이었고, 거의 같은 시기에 태어나신 분들입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이 태어날 무렵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심으로써 두 분은 태중에서 서로 만나신 분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두 분이 연결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두 분은 여러 부분에서 차이점을 보입니다. 그것도 너무나 달라서 반대된다고 말할 만큼 두 분은 전혀 다른 분이십니다.
사제의 아들이었던 세례자 요한, 그러나 목수의 아들이었던 예수님, 또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는 60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고 불리던 여인이었고, 예수님의 어머니는 시집도 안간 처녀인 상태로 임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두 분이 자라는 환경 또한 너무 달랐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동네 모두가 들썩 거릴만한 하느님의 은총의 아이로 인정받고 사제인 아버지의 후광과 말문이 닫혔다 열리는 기적 속에 태어났기에 모르는 사람이 없이 관심 속에 자라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나마 임신 사실을 알릴 수 없는 처지에서 파혼까지 내 몰리는 상황을 당했고, 어렵사리 서둘러 결혼한 후에 여행길에서 태어났고, 목숨이 위태로워 고향에도 섣불리 들어오지 못하고 떠돌다 후에 나자렛 고향에 이미 태어나고 자라고 있는 예수님을 안고 돌아오게 됩니다. 이미 예수님의 임신에 대한 의심이 있었던 터라 예수님이 자라시는 것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두 분은 후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전혀 다른 모습이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역할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는 사실, 곧 하느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다는 사실을 알리는 예언자이고, 예수님은 바로 그 예언의 실재 인물이십니다. 움직임 역시 다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답게 한 곳에 서서 사람들에게 회개를 외치며 그들이 자신 앞에 와서 세례를 받게 하셨는데 반해, 예수님은 스스로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셔서 그들 가운데서 가르치시고 몸소 움직이시는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또한 죽음에서 조차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이 보지 않는 옥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처럼 다른 두 분이 오늘 한 복음에 등장합니다. 그런데 복음은 순서를 거꾸로 보여주며 세례자 요한이 죽은 경위와 함께 예수님의 활동이 세례자 요한의 죽음 후에 이루어지고, 그분의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께서 예언자들 중 하나이거나, 세례자 요한으로 착각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을 죽였던 헤로데까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이 두분을 혼동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의 어떤 기준으로도 두 분은 서로 다르며 다른 삶을 사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으로 혼동한 까닭은 두 분이 이야기하신 내용이 결국 하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을 알려주고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알려준 이와 실제 살아서 보여준 이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둘은 분명 다르고 차이가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 헤아리면 세례자 요한의 외침이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의 실제 모습으로 비춰졌을 정도로 간절하고 힘이 있고 진실 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 안에서 다시 만나 일치라고 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 모습과 행동이, 그리고 사는 방식이 다르다 하더라도 모두에게 단 하나의 가르침, 곧 하느님을 느끼게 해주고 보여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하느님의 뜻을 직접 산다 하더라도 그들이 모두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 안에 집중한다면 그 어떤 삶 속에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히 만나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비교하려 듭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 보다 실제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말이 맞다면 이 두 분은 비교할 분이 아니라 하나의 하느님 사랑의 기준으로 일치의 삶을 사신 분들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의 삶의 목표 또한 이분들처럼 살아가는 것임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헤로데의 생일(生日)과 요한의 사망일(死亡日)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의 정체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정하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착각,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수난과 죽음에 대하여 들려준다. 오늘 복음은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 수난’ 기념일에 봉독되는 복음이기도 하다. 마르코는 이 복음을 예수님의 공생활 가운데, 즉 12제자의 파견((마르 6,7-13)과 빵의 기적(6,30-44) 사이에 삽입하였다. 이미 과거사가 되어버린 요한의 수난기를 여기에 삽입한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 있는 여지를 없애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한창 복음선포에 열중하실 즈음에, 사람들은 예수를 소생한 세례자 요한, 또는 소생한 엘리야, 또는 구약의 예언자와 같은 한 예언자로 여겼다. 그런데 갈릴래아와 베레아 지방을 다스리던 헤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를 자기가 죽인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것으로 단정하고 있다.
이미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시점에 요한은 헤로데의 군사들에게 잡혀서 감옥에 갇혔고(마르 1,14), 그후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헤로데가 자신의 생일(生日)을 요한 세례자의 사망일(死亡日)로 만들었다. 헤로데가 요한을 잡아 가둔 이유는 "헤로데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결혼하였다고 해서 요한이 헤로데에게 ’동생의 아내를 데리고 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누차 간하였기 때문"(17-18절)이고, 요한을 목베어 죽인 이유는 이에 원한을 품은 헤로디아의 꾀임(19-28절)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성서학자들은 17절의 기록을 오보(誤報)로 인정한다. 복음은 헤로데 안티파스가 동생 필립보의 아내 헤로디아와 재혼했다고 하지만, 헤로디아는 필립보의 아내가 아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아레타 4세의 딸과 이혼하여 헤로디아와 재혼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헤로디아는 헤로데 대왕의 손녀로서 대왕의 다른 아들과 결혼하였고, 여기서 딸 살로메가 태어났다.(자세한 내용은 아래 ’헤로데 가문의 족보’를 참조하라.)
헤로디아의 간교함에 넘어간 헤로데가 세례자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오게 했으니, 그가 죽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복음서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이 시점에서 보도하는 이유는 헤로데가 예수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세례자의 수난기는 예수님의 수난을 반영하고 있다. 예수께서도 같은 운명의 길을 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운명에 하느님의 진리와 자비가 함께 할 것이며, 정의의 외침이 운명을 대변할 것이다. 예언자는 죽임을 당하여 사라지지만 그 외침은 결코 죽지 않는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6, 14-29)
-유 광수신부-
예수님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마침내 헤로데 임금도 소문을 듣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저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는 엘리야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들과 같은 예언자다."하고 말하였다. 헤로데는 이러한 소문을 듣고,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말하였다.
선구자로서의 세례자 요한의 사명과 역사는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라는 이 말씀으로 모두 끝난다. 마르코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선구자로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요르단 강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푸는 선구자로 등장하고, 두 번째가 이곳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소문을 듣고 가서, 그의 주검을 거두어 무덤에 모셨다."라는 이야기로 요한의 일생이 끝난다. 첫 번째 물로 세례를 베풀던 요한 세례자의 활동이 끝난 다음 시작된 예수님의 활동과 가르침은 세례성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과정이었다면 두 번째 요한 세례자의 죽음은 성체성사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고, 또 파견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권력의 핵심부까지 알려졌고, 마침내 최고권자인 헤로데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뿌려진 겨자씨와 같이 작은 존재이지만 당신의 활동을 통해서 점점 자라고 있고, 마침내 권력의 핵심부에까지 알려질 만큼 크게 자란 것이다. 나의 믿음도 나에게서 머물지 말고 주위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는 믿음이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름은 나를 위한 이름만이 아니라 내 주위의 모든 이들을 구원해주는 이름으로 널리 소문이 나야 할 이름이다. 나를 통해서 알려지는 예수님의 이름은 어떤 소문으로 알려지는가? 내 주위 사람들은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사람들이 왜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가 나타난 것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을까? 그만큼 그 당시 사람들에게 요한 세례자의 존재는 위대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었고, 또 요한 세례자는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들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고 그것을 올바로 잡아주지 않으면 안된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로 착각하고 있다면 그 동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던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예수님이 아닌 요한 세례자의 활동으로 착각할 수 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신 것을 요한 세례자가 한 것처럼 착각하듯이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일을 다른 사람이 한 것으로 잘못 생각할 수 있다. 그러기에 마르코는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도록 예수님의 정체를 올바로 알려 주고자 한 것이다.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저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라고 말하는 그 말을 통하여 우리는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이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럼에도 "요한 세례자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난 것이다."라는 말은 엄청난 진리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람은 누구나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는 인생관에서 죽지만 "다시 살아날 수도 있다."는 새로운 인생관을 생각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비록 사람들이 아직까지 부활에 대한 확실한 의식은 없지만 마르코는 이 말을 통해서 서서히 부활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님에 대해서 일반 사람들의 생각은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라고 서로 엇갈리는 의견을 내놓고 있는 반면 헤로데 임금의 생각은 주저함이 없이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헤로데 임금은 어떻게 단정적으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여기서 인간 내면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겉으로는 표시가 잘 나타나지 않더라도 누구나 내면 깊숙이 잠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이 있고, 그것이 평상시에는 잘 안 나타났다가도 어떤 상황에 가서는 자기도 모르게 표출되는 법이다. 속담에 "도둑이 제발 저린다."라는 말이 있다. 인간에게는 하느님이 심어 주신 양심을 갖고 있다. 양심은 그 사람의 행동에 대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준다. 양심에 따라 옳게 행동했을 때에는 자기도 모르게 기쁘고, 보람을 느끼고, 마음의 평화스러움을 느끼지만 반대로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했을 때에는 늘 불안하고 불편하고 그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도 자기가 한 잘못이 드러날까 봐 가슴이 철렁거림을 느낀다. 사람을 죽였거나 강도짓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서 돈을 빼앗아 깊은 산중에 숨어 있다 하더라도 누군가가 자기를 붙잡으려고 쫓아오는 것 같고, 바람소리가 조금만 세차게 불거나 짐승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두근 반, 세근 반 하면서 불안해한다. 혹시나 혹시나 하는 생각이 늘 떠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사람이 죄를 짓고는 못사는 법이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결국 견디다 못해 자수하는 사람이 있고, 비록 자수는 못했어도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을 때가 오히려 편안함을 느낀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난 것이다."라는 말은 헤로데 임금이 스스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임금이었지만 자기 말대로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을 딸의 요구로 목을 베게 한 그 죄가 늘 그를 쫓아다녔던 것이다. 그는 비록 임금으로서 자기가 한 일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감히 무엇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어 겉으로는 평온한 척하고 지냈다 하더라도, 자기 양심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늘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받았고 괴로워하며 살았던 것 같다. 그 결과 헤로데 임금은 예수님의 소문이 널리 퍼지자 주저함이 없이 곧 "내가 목을 벤 그 요한이 되살아났구나."라고 무의식 속에 잠복했던 생각이 순간적으로 밖으로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은 헤로데 임금처럼 자기 마음에 남아 있는 큰 상처를 한번도 털어놓지 못했기에 늘 마음의 평화를 누리지 못하고 그것에 꽁꽁 얽매여 사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어렸을 때의 상처이든, 또는 몇 년 전의 것이든 그것을 고백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법이다. 매듭은 풀어야 풀리는 것이지, 풀지 않은 채 그냥 놔두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풀리지 않은 채 그대로 있는 법이다.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라고 말씀하셨다.
내 무의식 속에 감추어 둔 비밀은 없는가? 양심에 꺼리는 어떤 것들을 고백하지 못하고 늘 불안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런 죄가 있다면 그것을 진실되이 고백하지 않고서는 우리 마음이 안식을 얻을 수 없다. 그것은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본인 자신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다.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고해성사를 통해서 깨끗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른다. 마음에 깊이 간직했던 죄를 고백한다는 것이 얼마나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큰 치료가 되는지 모른다. 우리는 고해성사를 통해서 나를 줄기차게 쫓아다니며 괴롭혀 왔던 죄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자기가 잘못한 사람을 찾아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청함으로써 거기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사람은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를 깊이 성찰해보고 그것을 일일이 종이에 기록하여 주님께 기도한 후 태워버리는 작업을 통해서 해방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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