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대로-001] 프롤로그 : 한민족의 옛길
부산~서울 오가던 가장 빠른 길… 걷기 열풍 타고 재조명
- 남대문에서 동래까지 총 380㎞에 이르는 길
- 경부고속道·철도보다 거리 70~80㎞ 더 짧아
- 과거길·조공품 운반로, 조선통신사 이동로 등 우리 정치·생활사 축도
- 일제, 철도와 신작로로 역사적 의미 덮어버려
- 지자체들 설익은 복원, 큰 그림 제대로 못 그려
- 옛길에 스민 의미 살려 국가차원 계획 세워야
백두대간의 큰 고개인 문경새재.
이곳의 옛길박물관 뜰에는 '기리고차'라는 특이한 수레가 전시돼 있다.
뭐하는 수레일까 ? '세종실록'에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세종 23년(1441년) 3월 17일, 왕과 왕비가 온수현(온양)으로 수레를 타고 가니,
왕세자와 종친, 문무 군신 50여 명이 호위하였다. 임금이 사냥을 구경했다.
이 행차에 처음 기리고(記里鼓)를 사용하니, 수레가 1리를 가게 되면 목인(木人)이 스스로 북을 쳤다.'
▲ 문경 옛길박물관 뜰에 전시된 기리고차.
기리고차(記里鼓車)는 조선시대의 반자동 거리측정장치였다.
일정한 거리를 가면 북 또는 징을 쳐서 거리를 알려준다.
세종 때 처음 사용했다고 하니 이후에 등장하는 지역 간의 이수(里數) 표시는 물론
이정, 노폭, 노표 등이 꽤 과학적으로 산출됐음을 알 수 있다.
■ 한양~동래 간 960리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때 한양(서울)~동래(부산)를 오가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한양의 남대문에서 출발해 문경새재를 넘는 중로(中路)를 택하면,
용인~안성~충주~문경~상주~칠곡~대구~청도~밀양~양산~동래까지 걸어서 15~16일이 걸렸다.
총연장은 960리(약 380㎞). 지금의 경부 국도나 경부선 철도보다 거리상으로 70~80㎞가 짧았다는 점에서,
조상들의 지리적 혜안을 엿본다.
도로의 폭은 넓은 곳이 10m, 좁은 곳이 3m 정도였다.
대부분 수레와 사인교가 지나갈 수 있었으나,
문경의 관갑천잔도, 삼랑진의 작천잔도, 물금의 황산잔도 같은 벼랑길은 디딤판을 밟고 가까스로 지날 수 있었다.
30리마다 역(驛)을 두었다.
장국밥 한 그릇 먹고 짚신 신은 길손이 한 번 쉴 때쯤을 표시하는 '일식(一息)' 또는 '참(站)'의 거리가 30리였다.
'한참 간다'는 거리 개념도 여기서 나왔다.
지역별로 10여 개의 역을 한데 묶어 종육품 관직의 찰방(察訪)이 관리했으며,
역의 기능을 보조하여 숙식을 제공하는 관(館)과 원(院)이 설치됐고, 서민들의 주막도 들어섰다.
■ 한민족사의 축도
영남대로는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진 길이 아니었다.
이 길은 구석기 신석기 때부터 한반도에서 살다간 선인들의 자취와 궤적의 총합이었다.
고려시대의 우역제도를 바탕으로 조선 초기에 확립된 역제 속에 '영남대로'라는 공로가 자리한다.
이 길을 오간 사람이 숫제 얼마일 텐가.
과거길의 선비부터 등짐 봇짐을 맨 장꾼들, 나들이길의 민초들, 왕명을 수행하는 파발들과 공문서의 수발,
세금으로 거두는 세미, 조공품 운반, 관리들의 여행도 모두 이 길을 통해 이루어졌다.
1592년 임진년엔 수십만의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 영남대로를 따라 진공해왔고,
선린우호를 내세운 통신사들은 이 길을 따라 부산포에서 일본으로 가는 배에 올랐다.
영남대로가 잘 관리, 운영된 시기는 사람과 화물의 이동이 활발하여 사회가 발전했고,
영남대로가 황폐화되었던 시기는 우리가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때와 대체로 일치한다.
영남대로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정치·생활사의 축도(縮圖)였다.
이 길의 의미와 가치를 읽고 정리하기도 전에,
이 땅을 강점한 일제는 철도와 신작로를 앞세워 영남대로를 철저하게 유린했다.
침략을 노린 문화말살이었다. 그후 한국전쟁과 경제개발 연대를 거치면서 영남대로는 기억 저편으로 멀어졌다.
길 걷기 열풍이 옛길을 다시 불러낸 것은 시대적 역설이다.
옛길이 관광자원으로 둔갑하면서 지자체들은 길 스토리텔링에 매달리고 있다.
영남대로 도보 답사기가 책으로 묶이는가 하면, 지자체 또는 걷기단체의 종주 탐사 프로그램도 생겼다.
한국청소년탐험연맹은 오는 6~19일 13박 14일동안 전국의 초중고교생 70명을 모아
'걸어서 가는 한양옛길- 영남대로 종주 탐사'에 나선다. 지난 2001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32차 탐사다.
2007년 말 '영남대로-부산에서 서울까지 옛길을 걷다'라는 책을 펴낸 신정일 (사)우리땅걷기 대표는
올 상반기에 도반들과 함께 2차 영남대로 종주 답사를 할 계획이다.
■ 옛 노선 복원 가능할까
지난달 28일 오후 문경새재 옛길박물관.
이곳에서 일하는 안태현(43) 학예연구사는 일제시대때 작성된 지적도 꾸러미를 보여주며
"옛길의 원형이 이 속에 있다"며 "이것을 활용하면 영남대로 전체 노선 복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가 보여준 지적도는 1920년 전후 제작된 축적 1200대 1 지도로,
'도(道)' '구(溝)' 식으로 옛길 표시가 뚜렷했다.
옛길 옆으로는 막 신작로가 뚫리고 있었다.
안 학예사는
"4~5년 전부터 문경지역 25㎞ 구간에 해당하는 지적도(200여 장)를 모두 떼
오늘날의 지번과 지도를 비교하고 문헌과 사진, 구술을 더해 하나 하나 옛길을 찾았다"면서
그간 연구 성과가 조만간 책으로 묶인다고 전했다.
옛길 찾기는 이처럼 상당한 공력이 요구된다.
현재 대체적인 흐름만 잡히고 있는 영남대로의 전체 노선을 규명하려면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가 필요하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영남대로 핵심 루트인 '새재 넘어 소조령길'(총 36㎞)을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해 관리하고 있을 뿐,
영남대로의 전체 복원사업은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다.
신정일 대표는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와 함께한 길들을 지금이라도 되찾고 보존하지 않으면 완전히 망가지고 말 것"이라며
영남대로, 삼남대로, 관동대로 같은 역사적 길들은 최소한 걸어다닐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자체들이 정확한 옛길 노선을 찾으려 하지 않고,
임의적으로 노선을 만들고 덱을 깔거나 토목공사하듯 복원하는 것은 문제"라면서
"옛길에 스민 문화적, 정신적 의미가 중요하며, 국가가 나서 중장기적 복원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영남대로' 저자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
- "옛 찰방역 있던 물금, 스토리텔링 소재 풍성"
김정호 하면 '대동여지도'가 생각나듯, '영남대로' 하면 최영준(69·사진) 고려대 명예교수가 떠오른다.
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던 1970년대에 우리 옛길에 빠져
1990년 초 '한국의 옛길- 영남대로'(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란 책을 펴냈다.
개념이 모호하던 '영남대로'란 명칭이 학계에 통용되고 일반화된 것도 이때부터다.
이 책은 2004년 증보판이 나올 만큼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다.
▲ '영남대로' 저자 최영준 고려대 명예교수
강원도 춘천 인근에 거주하며 20여 년째 농사를 짓고 사는 최 교수는
요즘도 '옛길' 이야기가 나오면 천리길도 마다않고 달려간다.
지난해 5월 밀양시 삼랑진 검세리의 4대 강 공사장에서 '처자교(處子橋)' 유적이 발굴되자,
누구보다 먼저 현장으로 가 '영남대로상의 희귀한 홍예교'임을 증언했다.
최 교수는 "처자교 유적은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인근의 작원관과 작천잔도(낙동강변의 벼랑길)를 함께 조명해야 역사가 온전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넌지시 정보 한가지를 알려줬다.
"작천잔도가 경부선 철도에 깔려 모두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유적 일부가 남아 있어요.
옛 작원관 자리와 경부선 상·하행선의 터널이 뚫려 있는 벼락바위 윗부분에 폭 2m 가량의 작천잔도가 있죠.
작원나루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볼 수 있지만…."
양산시가 추진 중인 '황산강 베랑길'(황산잔도·물금~원동 사이 1.9㎞)에 대해선 우려의 시각을 나타냈다.
"그곳도 경부선 철도가 깔고 앉았는데 어떻게 복원하지 ? 덱으로 난간을 달아내면 옛 정취가 살아날까요 ?
고증은 제대로 됐는지 모르겠네요."
최 교수는 물금취수장 바로 위에 있는 경파대(鏡波臺)를 주목해 보라고 했다.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이 유상했고, 배를 묶던 자리도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물금은 찰방역이 있던 곳이어서 역리의 후손이나 주막의 옛 주모 등을 찾아 이야기를 들어보면
생생한 스토리텔링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최 교수는 영남대로 연구 과정에서
경북 예천의 삼강주막과 문경의 관갑천잔도를 처음으로 학계에 보고하는 등 옛길 연구에 남다른 성과를 쌓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인 그는 지난해 '홍천강변에서 주경야독 20년'(한길사)을 펴냈고,
요즘은 '개화기 경남의 가옥과 취락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 신영남대로 자문단
▷ 최영준(고려대 명예교수, '영남대로' 저자)
▷ 신정일(문화사학자, 우리땅걷기 대표)
▷ 주경업(부산민학회 회장)
▷ 한정훈(부경역사연구소 사무국장·한국교통사 전공)
▷ 양흥숙(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 좌상훈(사람사는세상연구소 대표·부산연구가)
▷ 안태현(문경새재 옛길박물관 학예연구사)
※ 협찬 : 화승그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