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인생의 주인입니까? 아니면 객입니까?
글쓴이 - 서경자
99년 28살의 늦은 나이로 대학입학시험을 치루면서 두 가지 서원을 세웠었다. 하나
는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3000배를 하는 것이었다.
원하던 대학에선 합격통지서가 오지 않았다. 다만 채플이 필수과목이던, 입구의 커
다란 십자가가 내 어깨를 짓누르던 기독교 대학에 입학금을 접수해 놓았을 뿐이었
다.
절 하러 대구로 떠나면서 다짐했다. 다니겠노라고. 열심히 배워 거듭나겠노라고.
3000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문을 열어주던 어머니가 먼저 건넨 건 인사말
이 아니었다. “네가 원하던 대학에서 전화 왔어. 등록금 가지고 9시까지 입학사무처
로 들어오래.”
작년 여름, 해인사 수련회에 참가하러 가면서 베갯머리에서 기도를 올렸었다. 마음
에 두고 있던 남자를 해인사로 보내달라고. 그가 만약 현명하고 일에 협조하고 예절
바르고 총명한 동반자라면 기꺼이 그의 리어카를 끌어 줄 터이니 그를 내게 보내달
라고.
행동의 제약이 많았던 일정에도 불구하고 사경 후에 찾은 해우소 앞에서 나는 놀랍
게도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의 여자와 함께. 작년, 나는 내가 일하던 유치원의 ‘재
위탁평가’를 앞두고 있었다.
나는 우리가 탈락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경력 10년차인 베테랑 교사로서의
자존심은 차치하고서라도 부처님 하시는 일이 여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무렵 다라니 독경을 하였는데 마음이 모아지질 않았다. 기도의 첫 번째 자세는 하심
(下心)이요, 마음을 비우는 것인데 당시 그러하질 못하였다. 여러 가지 욕심이 마음
곳곳을 뛰어 다녔다.
불교사회복지재단에서 우리를 놓았을 무렵 재단에서 집 가까운 불교유치원으로 자
리를 알아봐 주겠다고 제안해 왔을 때 나는 흐느끼며 재단을 떠나왔다. 원장님이 떠
나신 자릴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그 구질구질하던 동네의 아이들 모습이 나와 다르
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데 나는 3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
올해 초 골수 기독교 신자인 새 원장님이 부임해 오셨을 때 하루의 일과를 브리핑하
며 신임 원장님을 도우려는 결심은 원장님과 의견충돌을 겪으면서 대립하기 시작했
다. 만자 반지에 옴자 목걸이를 하고 단주를 손목에 차고 원장실에 들어갈 때면 원장
님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난감해 하셨다.
주임요청을 거절하고 영아반을 배정받았을 때 영아반 주임까지 거론하는 원장님께
사직서를 제출했다. ‘유아반 전문’인데 영아반으로 내려가는 것이 강등처럼 느껴져
싫었다.
교사들의 중재로 사직서는 반려되고 나는 영아반 교사가 되었다. 불만족스러웠지만,
돌이켜보면 홀가분하고 가벼운 시간이 찾아왔다. 모든 세력과 기득권을 내놓고 일에
서 멀어지고 마음도 비우니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원장님께 과잉 충성하느
라 아이들을 동원할 필요도 없었고 혹시 밤새 불이라도 날까 3층까지 시설점검을 다
니며 코드를 뽑던 열정도 없어졌다.
그러나 꼼꼼하고 독실한 현 원장님은 그 어느 원장보다도 유치원을 청렴하게 운영하
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불교가 하지 못한 일을 기독교가 한다면 그 또한 법이지
아니한가? 내가 걸어온 길이 부끄럽지 않았으매 당신 또한 그러하리라.
영아반은 교실 당 교사가 2인인 덕분에 휴가를 편하게 쓸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그
전부터 하고 싶었던 기도를 해보기로 결심했다. 아비라 기도였다. ‘아비라’는 나의 숙
생에 풀어야 할 업(業)이라. 몇 해 전 여름,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갔던 암자에선 광목
으로 법복을 해 입고 땀 흘리며 법신진언을 외우는 수승한 신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는 진풍경이었지만 그날 이후 내게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게 되
었다.
의사는 인대가 끊어진 다리 때문에 ‘절을 해선 안 된다’는 판정을 내렸지만 아비라 기
도를 젊을 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무리한 휴가를 내어서 가야산으로 올라갔
다.
그 곳에는 뜻밖의 고수들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어서 하루 전날 들어갔음에도 불구
하고 적광전, 관음전에 모두 사람이 차서 정념당에 짐을 풀었다. 정념당에선 주로 대
구, 부산의 나이 지긋하신 여신도들이 수행을 하고 있었다.
고심원에서 성철대종사와 같은 큰 스님을 생전에 뵙지 못하고 입적에 드신 후에나
찾아뵙는 것이 못내 서러워 어린애처럼 앙앙거리며 울었는데 밖에서 그 광경을 보고
측은하셨는지 조계사 불교대학출신이라던 보살님이 한마디 하셨다.
“ ‘북 진제, 남 송담’이라고 공부하고 싶으면 큰 스님들 찾아다니며 공부해 봐.”
어느 신도에게 물었다.
“아기를 낳겠느냐? 아니면 아비라 기도를 하겠느냐?”
여신도는 대답했다.
“차라리 아기를 낳겠습니다.”
아비라 기도는 아기를 낳을 때의 고통만큼이나 힘들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겁이 덜
컥 났지만 법복 하나에 배낭 하나 덜렁 메고 온 초심자를 모두 반겨주셨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하였는가? 인터넷으로 뽑은 아비라 기도 안내문을 들고 씩씩하
게 산길을 올라갔지만 뜻밖의 난제에 부딪혔다. 선배에게 물어물어 구입한 법복은
일단 복장 불량으로 찍혀서 해우소 갈 때를 제외하곤 사용할 수가 없었다. 저고리가
달린 광목 법복만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 중 설마 나 하나쯤이야 하던 생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여비를
털어 구입하자니 서울 갈 차비가 딸려서 막막해 하고 있을 무렵 보살님 한분이 한 번
도 입지 않은 자신의 여벌옷을 빌려 주시어 기도 내내 그 옷에 의지하여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 했는가? 인터넷으로 뽑은 아비라 기도 안내문을 들고 씩씩하게
산길을 올라갔지만 뜻밖의 난제에 부딪혔다. 선배에게 물어물어 구입한 법복은 일단
복장 불량으로 찍혀서 해우소 갈 때를 제외하곤 사용할 수가 없었다. 저고리가 달린
광목 법복만이 유용하다는 것이다.
500명이 넘는 사람들 중 설마 나 하나쯤이야 하던 생각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여비를
털어 구입하자니 서울 갈 차비가 없어서 막막해 하고 있을 무렵, 보살님 한분이 한
번도 입지 않은 자신의 여벌옷을 빌려 주시어 기도 내내 그 옷에 의지하여 기도를 올
릴 수 있었다. ‘인도 보살님’이라 불리던 그 분은 정말 인도사람처럼 이국적인 외모를
지니고 계셨는데 하루는 고무장갑을 끼고 해우소청소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백
련암 직원이었나 보구나.’ 생각하였는데 나와 다르지 않게 기도접수를 하고 오신 분
이었다.
1년에 4차례 아비라 기도를 빠지지 않는다는 그 신도님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분이
야말로 이 절의 주인이로구나. 나는 객이지 아니한가?’ 순간 고개가 절로 수그러졌
다.
‘아비라’는 내가 해 본 그 어느 기도보다도 힘든 수행이었다. 108참회는 하겠는데 장
궤합장을 하고 30분간 ‘옴 아비라 훔 캄 스바하’ 법신진언을 암송하고 나면 무릎이
깨어질 듯 아팠다. 좌복 밑에 담요를 겹겹이 깔아도 식탐의 무게만큼 고통의 무게도
가산되었다.
‘남은 인대마저 끊어져 내 몸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이 자리에서 한 공부하
지 않으면 물러나지 않으리라’ 이를 악 물고서 법당 중앙에 걸린 성철스님의 사진을
쳐다보며 다짐 또 다짐했다.
기도는 서울처녀에게만 힘든 것은 아니었나 보다. 여기저기서 신음소리와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도반의 고통이 있었기에 진언을 외우는 목소리는 점점 커
져만 갔다.
목덜미에 흐르는 땀방울을 음미하기란 세상을 살면서 쉽지 않은 일인즉 앞에 앉은
도반의 흐르는 땀은 또 하나의 경책이 되어 마음을 잡아주었다.
앞에서 기도하신 노 보살님은 3박 4일 내내 서울에서 멀리 가야산으로 공부하러 온
젊은이를 고마워 하셨다. 기도가 끝나고 나선 내 손을 잡고 암자 곳곳에 계신 부처님
들께 인사를 다니시었다. 콩을 배꼽에 넣고 그 기운과 더불어 수행하셨는데 그 소문
이 퍼져 여기저기서 콩을 주문하는 소리가 빗발쳤다. 한참을 다니시다가 다음에 올
땐 콩을 가져오지 않겠다고, 이 담에 큰스님 앞에 가서 야단맞겠다며 수줍게 웃으시
던 모습이 참으로 곱고 아름다웠다.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연세가 지긋한 중년이나 노 보살님이셨기에 몸보신할 비상식
량을 소지하고 계셨다. 나 같았으면 며칠을 두고 먹어야 할 양식이라 쉽게 내주지 않
을 텐데도 먹을 것이 있는 자리엔 꼭 나를 불러주셨다.
나는 이틀 내내 아비라 기도의 고통으로 흐느꼈는데 옆에 계셨던 보살님이 포도즙을
챙겨주셨다. 포도의 힘은 위대했다. 포도의 위력을 절감한 나는 포도를 즐기지 않는
데도 불구하고 서울에 돌아와 거봉 한 박스를 사서 먹었다.
박카스에 두유, 건빵 등 평소엔 먹지 않던 식품들이 수행중인 내게는 절실했다. 한
그릇에 돌아가며 커피를 얻어먹어도 더러운 줄을 몰랐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물으셨다.
“아난아, 대중에게서 무엇을 얻느냐?”
아난이 대답했다.
“절반쯤을 얻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틀렸다. 대중으로부터 전체를 얻느니라.”
회향 후 종정스님의 하안거 해제법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내려왔다. 내가
사랑하는 어머니가 큰 님을 뵙는 것보다 젊은 내가 뵈어야 한다. 그래야 미래를 도모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의식이 끝난 큰절은 썰렁했다. 인도보살님이 나의 처진 어깨를 쓸어주
시며 말씀하신다.
“다시 오라는 부처님의 뜻이야. 다음에 꼭 와.”
“예” 하고 희미하게 대답하였으나 중생계에 매인 몸이 언제 또 시간을 맞출 수 있을
까?
서울로 돌아오는 고속열차에서 보는 세상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구름이
어제와 다르게 보이고 초록색 논밭이 아름다웠으며 산천초목이 모두 불국토였다.
꿈같은 3박 4일이 지나고 또다시 넉 달여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아직도 베갯머리에선 백련암이 떠오르고 보살님들께 받았던 사랑에 눈시울이 뜨거
워진다.
큰스님들을 찾아다니며 법 동냥이라도 해야 하고 <대불정능엄신주> 또한 숙제로 남
아 있다. 수선회에 동안거 방부를 들여놓고 참선중이며 <선가귀감> <육조단경> 등
선에 관한 서적들을 보고 있다.
불교에 귀의한 지 10여 년 만에 나는 원하던 책을 손에 쥔 셈이다.
원장님께서 “내년에도 주임이 싫으냐?”고 물으시면 못 이기는 척 수락할 생각이다.
그리고 아기부처님들과 열심히 땀 흘리며 생활할 것이다.
“본래 한 물건이 있어 그 시작도 모르고 끝도 모르는데 물건을 잡아 맬 수 있는 방법
이 무엇입니까?”
“나는 내 인생의 주인입니까? 아니면 객입니까?”
선계와 속계가 공존하는 곳 백련암. 구름과 가까이 위치한 선계에는 수도승과 고수
인 수행자들이 청정도량을 지키고 있고 산을 내려다보면 전등 빛이 하나 둘 켜졌다
꺼졌다 하는 속계가 있다.
대자대비하신 부처님, 그 길이 깨끗함을 모르는 바 아니나 그 길을 갈 수 없는 건 중
생의 두터운 업이리라. 내 이생에서 할 일을 마친 후에 구석의 한자리를 얻어 앉아
더불어 열심히 공부할 것이다. (끝)
2005-01-28 오전 3:31:00 서경자(서울시 은평구 불광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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