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병원에 원혼들을 위로하는 위령비탑이 있다던데요
남침했던 북한이 잔혹하게 국군과 우리나라 시민과 간호사 의사를 죽였다.
서울대병원 부속병원 학살사건이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조선인민군이 남침 초기 서울을 점령한 시점에서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으로 난입하여 벌인 학살극을 말합니다. 다음의설명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개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개전 직후 전방 전선의 교전을 거쳐 살아돌아온 대한민국 국군 부상병 다수는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으로 후송된 상태였다. 이들은 당연히 심한 부상을 입고 중환자로 치료받고 있었다.
그러나 개전 며칠만에 조선인민군이 서울까지 밀고 내려오자, 시민 대부분은 아비규환에 빠져 피난길에 올랐으며
병원 근무자들도 짐을 쌀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것은 거동이 불가능해 미처 병원을 빠져나갈 수 없었던 중환자들이었다.
6월 28일 아침, 마침내 조선인민군이 서울 미아리를 뚫고 중앙청을 지나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까지 들이닥쳤고
병원을 최후까지 사수하던 1개 소대는 교전 끝에 전멸했다. 당시 병원 내부는 미처 피난하지 못한 환자들로
만원이었으며, 조선인민군은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병력을 산개시켜 병원을 둘러쌌다.
이윽고 한 인민군 중좌가 "원쑤놈들의 앞잡이들이 여기 누워있다"며 선동을 시작했고, 이내 대한민국 국군 부상자,
중환자들을 상대로 사살하기 위한 학살극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병동을 순회하며 부상병들을 향해 총을 갈겨 죽였으나,
이것도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는지 환자들을 밖으로 끌어내어 구석으로 몰아넣고 대량으로 총을 쏴 죽였다.
인민군측은 '한국군 응징'이라는 미명하에 학살을 자행했으나 실제로는 군인이나 일반인이나 환자복을 입은 채로는
별로 구분이 가리지 않고, 일반인들도 다수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시간이 좀 지난 뒤엔 총알도 아까웠는지 모신나강에 착검해서 직접 찔러 죽이는 식으로 학살을 벌였다.
그리고 정신병동까지 들이닥쳐, 국군 부상병이 숨을 수 있다고 여겨 그 환자들까지 죽였다.
이렇듯 소음이 울리자 다른 병동에 남아있던 환자들은 급히 대피 시도를 했지만 많은 수가 인민군 보초들에게 걸려
참혹한 죽음을 당했고, 일부는 살해당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흥분한 인민군은 심지어 위문차 남아있던 환자의 가족들까지도 살해했다.
학살은 오후까지 이어졌고, 마지막까지 숨어 있다가 적발된 이들은 본보기로 보일러실로 끌려가
석탄 더미에 생매장되었다. 이렇게 살해된 희생자들은 정확한 피해규모를 알 수 없으나
추산 1000여명에 육박한다 하며, 사체들은 모여진 채로 20일동안 방치되어 병원에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한다.
그리고 창경원 인근으로 실려나가 소각되었다.
환자들이 죽은 뒤 병원은 조선인민군 부상병들의 후송 기지로 쓰였고, 3개월 뒤 서울이 수복된 뒤에야 끔찍한
참상이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게다가 밀려나기 직전에 또 한차례 학살을 벌인 정황이 드러나 충격을 주었다.
참고로 수일 후 전주에서도 이와 비슷한 학살극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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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가
이 사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제네바 협정을 위반한 명백한 전쟁범죄 행위다.
이 학살은 불과 한국전쟁 개전 3일만에 빚어진 사건이다.
- 희생자 추모
현재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 내에는 당시의 희생자들을 위한 현충탑이 세워져 매년 위령을 지내고 있다.
첫댓글 대학병원 영안실 앞에 위치한 현충탑은 일년에 수차례나 마주치고 묵념을 하는 곳입니다. 저의 산책길은 혜화동 전철역에서 대학병원을 가로 질러 영안실을 지나는 과정에 탑이 있습니다. 이곳을 지나 창경궁-창덕궁 안을 거닐며 인사동 종로3가역으로 가는 코스의 일부입니다. 1970년대 초기만해도 미아리 고개와 같이 위치한 개운산에서 6.25 당시의 국군 전투흔적으로 남은 녹쓴 칼빈 탄피가 있었습니다.
저는 산 증인 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이였으며 바로 옆 동내 명륜동 3가에 살고 있었습니다.
까맣게 어렸던 저도 육이오 사변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던 탓인지 마치 무성영화처럼 몇가지 장면은 기억에 남아서 그후 독감 같은 열병을 앓을 때면 악몽을 꾸면서 그것들이 보이는데, 한번은 눈을 떴는대도 그것이 사라지지 않아 마구 헛소리를 해서 부엌에 계시던 어머니가 놀라 뛰어들어 오신 적도 있읍니다.
피난지에서 본 공비들의 시체는 형언하기 힘들 만큼 끔찍했는데, 폴란드 화가 벡신스키의 그림은 제가 본 그 시체들을 소재로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그 공비들의 시체들을 연상케 해 줍니다.
그 동네 근처의 낮은 산꼭대기에 버려진 초소가 있었는데 사람들이 학살된 곳이라고 하면서 아무도 그 근처에 얼씬도 안했읍니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러 옛 일들이 많이 흐미해졌습니다마는, 위에 올리신 글을 보고 당시 겪은 일들이 생각나는 것이 있어 몇자 적습니다. 6.25가 터진 해에는 학제가 바뀌어 몇개월 일찍 중학교 5학년이 되었었지요.
전쟁인지 뭣인지는 모르지만 미아리쪽에서 대포소리가 계속 나자 혜화동 안쪽에 있던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학생들 보다 더 초조해하였습니다. 학생이란 아침에 학교에 가는 것이 당연하므로 얼마간 계속 학교에
나갔었지요. 7월 초순경 수십명 학생이 모였는데, 집합을 시키더니 오늘는 상부지시로 근로봉사를 하러 간다고 했고, 창경원 앞쪽으로 갔을 때, 오늘은 서울대병원 뒷마당에 시체가 많이 있어 우리가 치워야 한다며
잠시 기다리게 해서, 우리는 깜짝 놀라 어린 학생들이 시체를 어떻게 치우느냐며 겁들을 먹고 있는데, 인솔자가 돌아오더니, 시체는 다른 곳에서 일찍 나와 다 치웠으므로 우리는 내일 다시 나와야 한다고 했고, 학교로
돌아갔습니다. 이 당시의 이야기를 하자면 끝이 없을 것인데, 당시 우리는 대학병원 환자들이 왜 갑자기 그렇게 많이 죽었는지 의아했었으나 이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네요. 공산주의자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저는 그 후 학교에는 더 나가지 안했고 서울에서 소위 '적치하의 3개월'을 보냈으며, 12월 중순에 입대통지서가 그 어리고 약한 저에게 나와 입대하였고, 어머님의 기도 덕분에 살아서 3년후 제대했습니다.
저는 6.25를 겪지 않은 세대지만 겪으신 웃대 부모님 세대에게서 귀가 닳도록 들었죠
그래서 그런지 제가 겪은 것인 것 마냥 읊어댈 수 있습니다 ㅎ
우리 세대 마저 지나가고 나면
우리 자녀 세대에는 희미한 역사가 되어 5.18의 역사만큼 잔혹한 것은 없었다고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