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2월 25일 연중 제7주간 금요일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코 10,1-12)
But from the beginning of creation,
God made them male and female.
For this reason a man shall leave his father and mother
and be joined to his wife,
and the two shall become one flesh.
So they are no longer two but one flesh.
Therefore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no human being must separate.”
말씀의 초대
믿을 수 있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선물이다. 좋은 친구는 든든한 피난처이고 생명을 준다. 주님을 경외하며 사는 이들이 이런 참되고 성실한 친구를 얻는다. 참된 친구를 얻고 싶으면 내가 참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제1독서). 부부는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인연으로 둘이 한 몸이다. 서로 신뢰하고 사랑해야 할 인생의 동반자요, 친구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아프리카의 외진 마을에는 독특한 혼인 풍습이 있었는데, 남자가 혼인을 하려면 여자 집에 암소를 주고 청혼을 해야 했습니다. 남자가 신부를 사랑하는 정도에 따라 암소를 주는데, 보통은 한 마리만 주어도 충분히 청혼이 가능했습니다.
이 마을에는 외국에서 선진 영농 기술을 배워 온 유능한 청년이 있었는데, 모두가 그 청년이 누구에게 청혼을 하는지에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청년이 무려 암소를 아홉 마리나 끌고 청혼을 하러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암소를 끌고 간 곳은 정말 보잘것없고 병든 말라깽이 딸이 사는 아주 가난한 집이었습니다. 그런 여자에게 청혼을 하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은 그 청년이 마법에 걸린 것이라고 수군거렸습니다.
그 마을에서 의료 봉사를 하던 의사가 있었는데, 그도 이해할 수 없는 이런 광경을 목격하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이 의사가 이 마을에 다시 오게 되었고, 그는 청년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아리따운 부인이 그에게 차〔茶〕를 내왔습니다. 그래서 그 의사가 청년에게 그때 당시 청혼했던 그 여인은 어떻게 되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 청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때 제가 청혼했던 그 여인이 바로 방금 차를 내온 저의 아내입니다. 저는 저 여인을 어릴 때부터 사랑했습니다. 저 여인이 가난해지고 병들어 야위어져도, 어릴 때 그녀의 맑고 고운 눈동자를 한순간도 잊지 않았습니다. 혼인을 할 때 그 가치와 사랑을 주고 다시 그 아름다움을 찾아낸 것입니다!”
이것이 부부가 사랑하는 방법입니다. 세월과 함께 몸은 늙어 갈지라도, 내가 배우자를 사랑했던 그 아름다운 기억들을 꼭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가치를 끊임없이 부여해 주는 것입니다. 배우자의 참된 아름다움은 자신이 만들어 주는 데 달려 있습니다.
☆☆☆
“‘그것도 못 들어? 한물갔구먼.’ 김칫독을 들려는데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벌써 늙었나?’ 헛웃음을 참고 있는 남편에게 아내가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아내가 무심코 던진 말에 남편은 기분이 틀어집니다. ‘내가 한물가면 누구 손해인데…….’ 밥도 먹지 않고 혼자 불쾌한 기분을 삭입니다. 그런데 아내는 저녁 안 먹느냐며 닦달합니다. 속이 좋지 않다며 방에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내 마음도 모르는 아내. 우린 그냥 어색했습니다.”
“‘당신은 좀 빠져.’ 시누이와 대화를 나누는 내게 남편은 핀잔을 줍니다. 농담인 줄 알지만 얼굴이 굳어집니다. 억지웃음으로 자리를 떴지만 가슴에는 구멍이 뚫립니다. ‘매양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어요?’ 하고 한마디 쏘아 주고 싶었지만 그러면 더 비참해질 것 같아 입을 다뭅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인지…….”
성격 차이로 이혼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그러나 이혼과 성격 차이는 무관합니다. 헤어짐의 진짜 이유는 사랑의 감정이 고갈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부의 사랑은 상대방을 헤아릴 줄 아는 능력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성장시키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애정이 식지 않습니다. 그러한 삶을 살라고 주님께서 맺어 주신 것입니다.
☆☆☆
옛말에 “참을 인(忍)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참고 기다려야 할 일이 참 많습니다. 결혼하여 사는 것도 예외는 아닙니다. 부부가 서로 참아야 할 일이 많습니다. 오늘날 이혼하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서로 참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친구들 사이에도, 직장 동료들 사이에도 참고 견뎌 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에 돌아오는 주인을 제대로 맞이하는 종이 되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준주성범」은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조처하시어 우리가 서로서로의 짐을 져야 할 것을 배우게 하셨으니, 이는 아무도 결점이 없는 사람이 없고, 짐이 없는 사람이 없고, 저 스스로 만족할 자 없고, 저 스스로 족히 지혜로운 자 없는 까닭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 참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같이 도와주고, 서로 가르쳐 주고, 서로 훈계함이 마땅할 것이다”(16,3).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좋습니까?”
-양승국신부-
<때로 쓰디쓴 현실, 결혼>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를 연구하던 한 학자가 기막힌 내용의 글귀를 발견했답니다.
“요즘 아이들, 정말 버릇도 없고 문제가 심각하다.”
참 재미있습니다. ‘청소년 문제’, 오늘 우리 시대만 심각한 것인 줄 알았는데, 이미 수천 년 전 어른들도 머리 싸매고 고민했던 문제가 청소년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혼 문제도 마찬가지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가 씌어 진 후 벌써 2천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우리 시대만 이혼문제가 심각한 줄 알았는데, 예수님 시대 당시뿐만 아니라, 더 거슬러 올라가서 모세 시대 역시 이혼문제는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완화시키고, 이혼을 합리화시키려는 경향이 모세 시대뿐만 아니라 예수님 시대에도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모세가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허락해주었는데, 그렇다면 살다가 마음에 안 들면 이혼해도 큰 문제없지 않겠느냐’고 예수님께 따집니다.
사람들이 가만히 있는데, 괜히 모세가 앞장서서 이혼을 허락했겠습니까? 또 별 이유도 아닌데 이혼을 허락했겠습니까?
사람들이 당시 백성들이 지도자였던 모세에게 갖은 협박을 가하고 괴롭히니 할 수 없이 특별한 케이스에 한해서 선별적으로 허락을 해준 것을 가지고 바리사이들은 이토록 물고 늘어진 것입니다.
이혼하는 부부들, 그들 나름대로의 사정을 들어보면 참으로 ‘기막힌’ 케이스들이 많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헤어지는 것이 서로가 사는 길인 부부도 있습니다. 속아서 결혼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혼사유로 ‘성격차이’를 내세우는 분들도 있는데, 이것만큼은 재고되어야 합니다. 30년 가까이 서로 다른 가정환경, 문화, 분위기, 가족관계 안에서 살아오던 두 사람이 결혼을 통해서 한배를 타게 됩니다. ‘성격 차이’는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성격이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합니다.
결혼은 어쩌면 또 다른 하나의 세상을 만나는 것입니다. 결혼은 어쩌면 또 다른 하나의 우주를 만나는 것입니다. 결혼은 어쩌면 스승 한분을 만나는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 부부는 긴 항해를 시작합니다. 결혼을 통해 부부는 공부를 시작합니다. 어쩌면 배우자는 신천지입니다. 갖은 다양한 탐구거리로 가득 찬 새로운 대양이 배우자입니다.
결혼생활을 영위하시는 분들, 상대방을 내 소유물로 설정하지 마십시오. 상대방을 내 성취의 도구로도 생각하지 마십시오. 상대방을 내 욕구충족의 대상으로도 여기지 마십시오.
그는 멀고먼 은하계에서 오직 나만을 찾아 정확하게 내 안에 떨어진 하나의 별입니다. 그는 나의 성장을 위해, 나의 구원을 위해 다가오신 또 다른 하느님입니다.
슬픈 일이지만 결혼은 현실입니다. 사람은 이슬만 먹고 살지 않습니다. 결혼은 사랑에 밥 말아서 먹고 사는 것 일거라는 환상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텔레비전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입니다. 결혼은 때로 쓰디쓴 현실입니다. 길고 험난한 자신과의 투쟁입니다. 결혼은 수도생활 못지않은 오랜 자기 수련과 고행의 길입니다.
하느님이 정한 것
-김상조 신부-
진도아리랑에 나오는 ‘아리랑’과 ‘스리랑’의 어머니가 누굴까?
바로 ‘아라리’이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낳았네….”하고 노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아리랑’과 ‘스리랑’의 아버지이자,
‘아라리’의 남편은 누굴까?
바로 ‘아리’이다.
“아리 랑 응~응~응응 아라리가 낳았네….”
아리랑 응~응~해서 낳았다고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우린 ‘아리’가 애들의 아빠이자, ‘아라리’의 남편인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바로 ‘아라리’가 재혼을 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아리랑’과 ‘스리랑’의 성이, 서로 다른 데서 알 수가 있다.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아라리가 아리와 응응응 해서 낳은 것이 아리 아리랑이고
스리와 응응응 해서 낳은 아들이 스리 스리랑이다.
결국 ‘아라리’는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인터넷 펌)^+++^;
남자 여자는 하느님이 정한 구분이다.
왜 남자와 여자를 따로 만들었냐고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남자와 여자는 상당히 다르다. 180도 다르다고 한다.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어야 360도 완전한 원이 된다.
둘은 반원이고, 너무나 정반대의 속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정한 것이다.
같게 만들지 않았다고 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같을 수도 없다.
사람의 몸도 제 각기 다르다.
똑 같은 구석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사람의 몸의 세포도 일정한 주기로 죽고 새로 생긴다고 한다.
췌장 24시간, 위장 3일마다 위벽에 새로운 내피를 얻는다.
백혈구는 10일마다 교체, 지방조직 3주, 뇌의 단백질은 98%가 한달, 피부는 4주 마다 새로 태어난다.
단단한 두개골 조차 석달이 지나면 완전히 새로워진다.
그러니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생김새는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전혀 다른 세포로 구성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세포로 된 몸이다.
어제와 오늘의 내가 다른데 너와 나, 남녀가 다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서로 180도 다른 사람이라서 독단적으로 행동하면 안되고,
언제나 생각을 합하여 행동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완전한 원이 되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이혼, 그 뜨거운 감자
-양승국신부-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한집 혹은 두세 집 걸러 이혼가정이 생겨나는 ‘꽤 심각한’ 우리 사회 현실 앞에 ‘죽어도 이혼만큼은 안 된다’는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는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신자들도 밥 먹듯이 어기는 상황 속에서 구색만 갖춰놓은 교회법처럼 여겨져 씁쓸합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왜 끝까지 강경하게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를 고집하고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을까요?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는 바로 예수님의 입에서 직접 나온 말씀을 바탕으로 한 교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 앞에서 이혼은 가능하다’는 유다 이혼 율법을 폐지하셨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혼인 관련 율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입니다.
흐트러진 백성들의 생활을 다시 한 번 바로잡아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윤리질서의 회복을 위해,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쇄신을 위해 단행하신 예수님의 혁신 작업이 바로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의 설정이었습니다.
혼인을 통해서 부부는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라고 강조하십니다. 결혼한 두 사람이 갈라선다는 것은 한 육체를 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무리하고 부자연스런 일임을 선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선언하십니다. 언제나 흔들리고 유한한 인간이 제정한 것이라면 세월이 흐름에 따라 파기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불멸의 것입니다. 그것을 파괴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입니다.
이렇듯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시고 선포하신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이기에 우리 가톨릭교회는 단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구체적인 현실, 세태, 상황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언젠가 ‘가정과 혼인’을 주제로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늘 소년원이나 분류심사원, 교도소를 찾아다니고, 가출 비행 청소년들을 일상적으로 접하면서 은연중에 제 머릿속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고착화되더군요.
부모의 불화, 별거, 이혼=자녀들의 고통, 방황, 일탈행위, 비행
그래서 제가 쓴 글도 부모의 이혼은 곧 자녀들의 비행과 직결되니 절대로 이혼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해서든 부모가 참으라는 식의 내용이 주류를 이뤘습니다. 얼마 후, 몇몇 분들의 피드백을 받았는데,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참으로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 억지스런 논리로 상처 입은 분들께 정말 죄송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너무도 좁은 안목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이혼했다고 가정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혼가정 청소년이 다 비행청소년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록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이혼했지만, 자녀들이 모든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더 훌륭하게 성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었습니다.
언제나 부족한 인간이다 보니 누구나 다 판단착오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루어지지 말았어야할 잘못된 결혼도 고려해 볼 수 있겠습니다. 전혀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어떻게 한 평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지옥과도 같은 하루하루인데, 어떻게 한 평생을 참겠습니까?
다양한 케이스들을 접하면서 원칙을 철두철미하게 준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각 개별인간들이 겪고 있는 말 못한 사정들, 고통들, 어쩔 수 없는 상황들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혼인의 불가해소성’ 교리, 그리스도 신자된 도리로써 목숨을 걸고 실천하고자 노력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미 벌어진 일들에 대해서 교회 차원에서의 진지한 사목적 배려가 필요하겠습니다. 이혼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가족 구성원들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교회는 구체적이고 다양한 사목적 노력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혼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모든 가정과 구성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주님 안에서 다시금 빨리 추스르고 일어설 수 있는 힘과 용기와 지혜를 주시길 청합니다.................◆
혼인 서약
-조명준 신부-
창세기 안에서 남편과 아내의 결합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동사 ‘바카드’는
‘달라붙다’라는 의미로 마치 아교로 붙이듯이 이루어지는 결합, 영원히
지속되는 결합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동사는 본시 계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결합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결합을 가리키는 이 동사가 부부간의 결합에도
쓰인 이유는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약속이 중단 없이 이루어지듯이 배우자를
향한 결혼 서약도 영원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성격 차이’라는 이유로 결혼 생활 초기에 혼인관계를
쉽게 청산합니다. 성격 차이! 30여 년 가까이 서로 다른 부모와 살며
다른 환경 속에서 성장해온 두 남녀가 성격이 같을 수 있을까요? 그런데
단지 몇 개월 또는 1-2년 만에 서로의 수많은 다른 점을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서로가 다르게 살아온 시간만큼 함께 살며
함께 노력해나갈 때 비로소 서로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야고 5,7)는
야고보 사도의 권고를 따를 때 사랑의 일치를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혼인의 진정한 의미
- 이상각 신부-
너무나 큰 고통과 번민·좌절 속에서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미움과 원망만이 가득합니다. 제 상황이 이 정도인데도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해야만 하는 건가요?”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보통 가정 폭력이나 알코올 중독, 도박, 극심한 경제적 곤란이나 혼외정사 등이 원인이다.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면서도 그저 ‘한 번 결혼했으니 무조건 끝까지 같이 살아야 한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혼을 하라.’고 말할 수도 없는 상황이 종종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그럴 때면 예수께서 바리사이들의 질문에 얼마나 지혜롭게 대답하셨는지를 생각한다. 예수께서는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을 최우선으로 생각하시고 말씀하신다. 남자와 여자에 대한 하느님의 본래 계획을 밝히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창조의 목적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하나 되는 데 있다. 이것이 바로 혼인의 진정한 의미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남편이나 아내가 배우자를 버리는 것은 혼인, 나아가 창조의 참된 의미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신다.
어떤 이유로든 혼인에 실패한 사람은 혼인이 어떤 직업처럼 간단히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혼인의 실패는 무엇인가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파괴하고,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참다운 삶을 파괴한다. 특히 얼마나 많은 어린이와 청소년이 부모의 이혼으로 고통 받고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지 모른다.
가정의 파괴를 막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성모님은 모든 가정에서 묵주기도를 함께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가족이 함께 묵주기도를 바칠 때 가족은 그 기도 안에서 예수·마리아·요셉의 모범적 삶을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되는 것이다.
성가정의 모범은 서로에게 사랑과 존경을 불러일으킨다. 그렇게 될 때 가족은 가정 안에서 기쁨을 나누는 법과 십자가와 고통을 함께 지는 법을 배우고 마침내 부활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묵주기도를 통해 성모님을 우리 가정에로 초대할 수 있으며, 우리 가정 안에 오신 성모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칫집에서처럼 우리 가정에 부족한 포도주를 채워주실 것이다.
새벽을 열며
지난 화요일, 저는 교구청 신협 총회에 참석해서 좋은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만보기’입니다. 많이 걷는 것이 건강에 좋다고 해서 만들어진 기계가 아닌가 싶은데요. 아무튼 신기하게도 허리에 이 기계를 차고 걸으면 얼마나 걸었는지를 알 수가 있답니다. 그래서 이 기계를 이틀 동안 차고 다니면서 하루에 얼마나 걷는지를 보았지요. 제가 얼마나 걸을 것 같아요?
우선 첫날(수요일)에는 하루 종일 바깥에서 일을 했거든요. 그랬더니만 만보기에 표시된 숫자가 12380입니다. 어제(목요일)는 강의 준비로 인해서 오후에는 방에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표시된 숫자가 9544입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이렇게 많이 걸을지는 몰랐거든요(혹시 기계가 잘못된 것은 아닐까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많이 걷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서, '내가 모르는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이 어쩌면 더 많을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내가 행하고 있는 걸음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요? 그런데도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생각에 대한 섣부른 판단을 얼마나 많이 하고 있나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불가해소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씀하시지요. 그런데 지금 이 사회는 어때요? 점점 늘어나는 이혼율을 보면서, 왜 이럴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정말 왜 그럴까요?
바로 상대방에 대한 섣부른 판단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는 행동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모습을 보면서 섣부르게 판단하고 부정적인 모습만 보려고 하니 함께 살 수가 없는 것이지요.
어제 읽은 책에서 30초 규칙이란 것이 나옵니다. 이 30초 규칙이란, 어떤 일을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 섰을 때 딱 30초만 더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유부단하게 망설이라는 뜻은 아니지요. 대신 어떤 결단의 기로에 섰을 때 30초만 더 자신에게 겸허하게 물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짧은 30초의 순간이 인생을 결정적으로 뒤바꿀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아주 순간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으로 얻게 된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30초만 더 주의 깊게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분명히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모든 만남에서 이런 30초 규칙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요? 섣부른 판단에서 분명히 벗어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30초 규칙을 따라봅시다.
빠다킹 신부
하느님과의 인연
-이철구 신부-
우리는 수많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남과 헤어짐 속에서
때로는 기뻐하고 또 때로는 슬퍼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기도 하고
때론 상처를 주면서 서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인연 중에서 가장 소중한 인연은
하느님과의 인연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느님은 나를 불러 주시어
당신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시고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나를 위해
당신 아들을 십자가상 희생 제물로 세상에 보내셨고 그 어느 순간에도
나의 이름을 잊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내가 이루어 가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이제 나는 하느님과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시며 내가 하느님과 한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어떤 어려움도 하느님과 내가 이루는 사랑의 관계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나의 사랑임을 고백합니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양창순(양창순 신경정신과 대인관계 클리닉)
◆호스피스를 담당하고 있는 선배 의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배우자가 불치병으로 앓아 누웠을 때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고 합니다. 배우자에게 매우 다정다감하고 헌신적인 유형과 무뚝뚝하고 냉담해 보이기까지 하는 유형으로.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배우자가 죽으면 곧장 따라 죽을 것처럼 보이던 사람일수록 실제로 배우자가 죽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당장 재혼시켜 달라고 조른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무뚝뚝해 보이기만 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혼자서 꿋꿋이 잘 살아가는 예가 더 많다고 합니다.
선배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쩌면 금방 재혼을 원하는 사람들이 사랑했던 사람은 죽은 배우자가 아니라 누구든지 자신이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겠느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새롭게 자신의 의존 욕구를 채워줄 누군가를 찾아 나서게 된다는 것이지요. 뭐, 꼭 그런 것만은 아니겠죠. 하지만 실제로 결혼생활을 통해 자신의 의존 욕구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그들이 보여주는 특징의 하나는 자신의 의존 욕구를 열정적인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그럴 만도 합니다. 상대방에게 열렬하게 매달리고 하루라도 사랑을 확인하지 않고는 못 견디니 꽤 뜨거운 사랑으로 착각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의존적인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처음에는 상대방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무의식적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의존 욕구를 완벽하게 채워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생각처럼 그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그때부터 끝없는 불안과 변덕, 불화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현명한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부가 서로의 의존 욕구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부부가 한몸이 되었다고 선포하신 것도 정신적으로 독립적이고 건강한 두 사람이 서로를 도와 더욱 성장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실 테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서로를 보완하며 함께 성숙해 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 아니던가요.
-원정학 신부 -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이혼’에 관한 내용을 가지고 질문을 던집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무작정 던지는 뜬금없는 질문에 예수님의 눈은 휘둥그레집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속을 떠보는 질문을 가끔씩 소개하고 있는데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문제에 대해서나 누가 내 이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오늘처럼 ‘이혼’에 관한 것 등이 있습니다. 이들 질문의 함정은 “예”나 “아니오”로 대답할 성질의 것이 못됩니다. 모세의 율법과 도덕적 양심이 엇갈려 있기 때문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어느 답을 선택하더라도 트집을 잡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이혼해도 된다, 안된다의 답변을 기대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근본적으로 ‘왜 이혼을 하는가?’에 대한 답변만을 하십니다.
모세의 법에 따르면 “이혼장을 써주고” 아내를 버려도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법의 본래 의미는 아내가 탐탁지 못한 행동을 했거나 또는 남편이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두어 새장가를 가려고 한다면 아내를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뜻으로 최소한 “이혼장‘이라도 써 주어라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혼장“만 써주면 아무런 죄책감없이 살아도 되는 것으로 여기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가부장적인 상황을 한탄하시며 남편과 아내의 동등한 권리를 주장하십니다. 남편이 잘못을 한 경우에도 무조건 이혼장만 써주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것 자체가 혼인의 근본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인 자체가 하느님께서 근본적으로 맺어준 것이므로 사람이 마음대로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서로가 대등하게 한몸을 이루는 것임을 강조하십니다. 그 누구도 이 혼인의 관계에 개입할 수 없고, 만일 이를 파기한다면 서로가 간음을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즘은 서로 동등한 입장을 법으로 정해놓기는 했지만 너무 쉽게 결혼하고 또 이혼하고 재혼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또한 법적인 문제만 해결되면 서로 남남으로 각자의 길을 가면 그만이라는 생각도 이기적인 성향이 짙다고 봅니다.
기쁠때나 슬플때나 병들거나 힘들어 할 때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함께 극복해 나아가야 할 부부의 역할보다는 개인의 성격 때문에 서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갈라서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실까요?
서로가 동등하다고 해서 합의만 잘 보면 된다는 생각 역시 바리사이가 생각하는 율법주의의 방식과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서로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지금보다 조금만 더해보면 어떨까요?
무촌 !!!
- 이찬홍 신부-
성씨, 족보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회에는 촌수가 있습니다.
부모님과 자녀와의 촌수는 1촌 입니다.
형제자매간의 촌수는 2촌입니다.
이를 기준으로 3촌, 4촌, 5촌으로 계속 확대되어 갑니다.
그런데, 부부사이에는 촌수가 없습니다.
왜 없는 것일까요? ‘도로남’이란 노랫말처럼, 님이라는 글자에 점하나만 찍으면 도로남이 되어 버리기 때문일까요?
혹시, 그 이유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아시면, 좀 알려주십시오.
저는 그 이유를 오늘 복음 말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바리사이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은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8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제 그들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결혼을 한 부부는 더 이상 둘이 아니라, 한 몸입니다.
결혼 전에는 각자 개별적인 고유한 몸이었지만, 결혼을 통해 둘이 하나가 되어, 더욱 완전하고, 성숙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둘이 아니라, 하나, 한 몸이기에, 부부사이에는 촌수가 없는 것입니다. 촌수가 있다는 것은 하나가 아니라, 둘을 의미합니다.
나와는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결혼에는 이런 의미가 있기에... 아니, 이 의미가 가장 크고 중요하기에, 우리 선조들은 결혼을 ‘이성지합’이라고 말했나 봅니다.
그러나, 결혼생활은 둘이 한 몸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늘 행복하지만은 않습니다. 언제나 달콤하고, 꿈속을 헤메는 듯한 신혼이 아닙니다.
신혼의 달콤함은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약 신혼이 달콤함이 오래간다면... 결혼의 끝남을 의미하는 죽는 그 순간까지 이어진다면... 왜, 이혼하는 부부가 생겨나겠습니까?
왜, ‘사랑은 2-3년 정도면 식는다. 그 후에는 정으로 살아간다.’는 말이 그토록 마음에 와 닿겠습니까?
이는 자기식대로만 하려는... 자기 마음대로만 생각하고 살아가려하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된다.’고 할 때, 이는 두개가 하나로 합쳐지는 흡수가 아닙니다. 자신의 개성, 성격 등 하느님께 받은 고유한 본성을 없애고, 무조건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상대방을... 자신의 배우자가 자신과 똑같은 존재요, 인격체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바라고 원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해주는 것이요,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전에는 다른 집에서 살고, 다른 이불을 덮고 자며, 다른 고민을 하며 살아갔지만, 이제는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은 이불을 덮고, 같은 고민을 하며 살아간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실제 결혼생활은 이러지 못하고, 상대방을 자신에게 맞추려 하고, 자기 식대로만 살아가려 하다보니, 미움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이고, 내가 미쳤주, 눈에 콩깍지가 끼엉 참 모습을 못봤주...’ 라고 탄식하며 해서는 안 되는 이혼까지도 생각하게 되고, 실제 스스럼없이 이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론적인 내용입니다.
결혼을 하지 않는... 결혼의 참 맛을 온 몸으로 체험하지 못한 제가 말하는 결혼의 의미일 뿐입니다.
그저 결혼의 중요성과 이상향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때문에, 저의 말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고,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결혼 생활의 의미, 목적, 완성은 이러저런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있습니다.
많은 아픔, 고민, 갈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가는데 있습니다.
결혼 역시,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사제, 수도 성소만 성소가 아니라, 결혼 성소 역시 하느님 친히 당신의 강복으로 맺어 주셨고, 하느님만이 떼어놓을 수 있는 완전한 결합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둘이 아니라, 한 몸이 되어 살아가야 하는 거룩한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경험은 삶에서 나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다는 것은, 인생의 막바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그냥 얻어진 결과가 아닙니다.
젊은 날의 기쁨과 행복만 담겨있는 것이 아니라, 아픔과 상처, 고통까지 모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소중하고 값진 결실입니다.
이에, 혹 주변에 가정의 불화가 있는 분이 계시다면... 이혼하려고 하는 부부가 있다면.. 단순히 ‘아이들도 있고, 그냥 참으라. 다덜 겅 참으멍 살았져... 살다보믄 살아진다.’는 식의 말로 위로하지 말고, 여러분들의 삶의 여정을.. 결혼생활의 아픔과 상처를 말씀드리며 ‘우리는 이렇게 극복했다. 이런저런 노력을 하며 여기까지 왔다.’고 말씀해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알 수 없는 바로, 여러분들의 삶의 경험과 결실을... 젊은 날의 초상을 알려준다면, 불화가 끊이지 않는 가정에 참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 몸을 둘로 나누려는 부부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가정의 소중함과 결혼의 신성함, 성소의 의미가 파괴되는 오늘날의 현실에 여러분들의 결혼생활과 그 삶의 주는 결실은 진정 그 무엇으로도 대신 할 수 없는 해결책이요, 가장 좋은 처방입니다. 아멘.
결혼은 미친 짓이다???
-오상선신부-
어느 영화의 제목이다.
나는 영화를 잘 보지는 않지만
현 세태를 반영해 주는 것이기에
나름대로 관심은 갖고 있는 편이다.
이 영화 또한
구속받기는 싫으면서도 자신의 필요와 욕구는 충족시키고
싶은 젊은 세태의 단면을 잘 표현해 주고 있는 듯하다.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고
젊은이들 사이에 계약결혼 내지는 동거가 많아지고
살아보고 맘에 들지 않으면 헤어지는 등의 사고도
늘어만 간다고 한다.
우리 주위에 이혼한 젊은 부부들을 보는 것은 이제
아주 쉬운 일이다.
결혼생활이나 수도생활이나
삶 자체는 언제나 <서약>을 전제로 한다.
결혼이 <구속>인가 아니면 <더 큰 자유>인가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수도생활에서도 수도서약이 <구속>이라면
할 필요가 없는 삶일게다.
결혼서약이든 수도서약이든 공통점은
당사자의 <자유로운 의지와 결단>이다.
그 누구의 강요나 방해에 의해 서약이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는 <결혼무효소송>,<서약무효소송>이 가능할 정도로
교회에서는 이 결혼과 수도생활에 있어 서약의 <자유로운
결단>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이혼문제와 수도생활을 쉽게 파기하는 등의
문제는 결혼과 수도서약의 이 자유로운 의지와 결단이
빈곤함에서 생기는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수도서약을 위해
오랜 기간을 숙고하고 생활을 해보듯이
온전한 자유의지와 결단을 통해서 서약을 발한 사람은
그 서약에 대부분 충실하게 된다.
자신은 준비가 덜 되었는데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해야지,
혹은 서약을 하면 좀더 달라지겠지 등의 생각으로
서약을 발한 사람은 어려운 상황이 도래하면 쉽게
무너지기 십상이다.
마찬가지로
결혼서약에 있어서도
연애와 만남 등을 통해서 서로를 깊이 알아가면서
온전한 자유의지와 결단을 통해서 결혼을 결심한 사람은
어떠한 여건이 오더라도 그 서약에 충실한 법이다.
결혼을 배우자의 조건을 보고 선택했다던가,
별로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있지만 결혼하면 좀
나아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결혼을 신중한 준비와 결단
없이 하게 된 사람은 이내 결혼생활이 그런 꿈같은
생활이 아님을 접하고 실망하고 만다.
서약생활은 <사랑>을 전제로 한다.
서약생활은 <조건>을 전제로 해서는 성공할 수 없다.
수도자가 주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그리고 교회와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부족한 가운데서도 부르심에
응답하여 서약의 삶을 살아가야지, 사회적 신분 상승이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등의 세속적인
사고에서 출발해서는 올바로 서약의 삶을 성취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결혼생활도 배우자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어야지
다른 조건들이 우선시 되는 한
결혼이 미친 짓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랑 때문에 발한 서약은
상황이 아무리 달라져도 영원하게 된다.
그러나
다른 세속적인 조건 때문에 발한 서약은
그 상황이 달라지면 조건 또한 영원할 수 없기에
파기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커지게 되는 것은
어쩜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 내가 발한 서약에 대해
다시한번 숙고해 보자.
내가 발한 서약의 시작은 <사랑> 때문이었을텐데
지금은 어디에 와 있는가?
수도자로서 내 서약 생활에 만족치 못한다면
이는 내가 발한 그 <사랑의 서약>에 둔감해져 있기
때문이리라.
결혼한 사람으로서 결혼생활에 만족치 못한다면
이는 내가 발한 그 <사랑의 서약>에 둔감해져 있기
때문이리라.
그 때 그 시절,
결혼의 기쁨과 수도서약의 기쁨에 충만했던
그날을 다시 회상해 보자...
결혼과 이혼 ( 10, 1- 12)
-유 광수신부-
그런데 천지 창조 때부터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하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집에 돌아 와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물으니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면 그 여자와 간음하는 것이며 또 아내가 자기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해도 간음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왜 이혼이 허락할 수 없는 것인 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천지창조 때로 거슬러 올라가서 설명해 주신다. 결혼과 이혼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서 인간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이혼은 안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계획이고 따라서 인간은 오직 그 법을 따라야 할뿐인 하나의 원칙이라는 것이다. 내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나의 존재는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나의 생명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관계를 이해하는데 그리고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가장 기초적인 것이고 기본적인 원리이라는 것이다. 이 원리에서부터 모든 문제는 풀어 나가야 한다. 내가 창조주처럼 생각하는 착각에서 벗어나서 피조물이라는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한다.
두 번째 원칙은 사람은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찾아 부모를 떠난다는 것이다. 부모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도록 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감사드려야 할 분이시기는 하지만 한 몸을 이루어 함께 사랑을 나눌 짝은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자기를 존재하게 하신 부모를 떠나 자기 짝을 찾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계획이다. 즉 사람은 창조주이신 하느님에 의해서 그렇게 살아가도록 만들어진 피조물인 것이다. 사랑스런 자식이 부모를 떠나는 것은 못내 아쉬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순리를 막을 수는 없다. 이 순리를 막는 것은 부모에게나 자식에게나 불행한 일이다. 자식은 어차피 부모를 떠나 자립해야 할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떠남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 떠남은 어머니의 자궁을 떠나는 것으로 시작해서 서서히 진행되다가 사춘기의 격변기를 거쳐 결혼기가 되면 짝을 찾아 부모를 떠나 자기들만의 둥지를 틀고 자리 잡는 것이다.
남녀가 부모를 떠남은 자기 짝과의 결합을 위한 것이다. 혼인 예식서에 보면 혼인 계약문이 있다. "나---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고 되어 있다. 이것은 두 사람과의 계약이다. 즉 결혼의 내용은 어디에서나 어떤 처지에서나 나는 당신을 사랑과 존경으로 결합하여 함께 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두 사람과의 약속이면서 또한 하느님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즉 당신을 내 아내로 남편으로 결합하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에 이 계약은 서로에게 주는 결혼 선물인 것이다.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더 이상 결혼 생활이라고 할 수 없다. 결혼생활이란 죽을 때까지 이 약속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것도 하느님의 역사이셨고 또 그와 짝을 찾아 짝지어 주시는 것도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십억의 사람들 가운데에서 단 한 사람의 자기 짝을 선택하는 일이 어찌 인간의 일인가? 고무신도 다 제 짝이 있듯이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에게 맞는 짝이 있다. 하느님이 창조 때부터 짝지어 주신 짝이 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에 누가 나의 짝인지는 오직 창조하신 분만이 아신다. 우리는 짝을 만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한다. 인연이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 이끌림을 받는다는 뜻이다. 즉 전생에서부터 둘이 짝이 되어 태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섭리이다. 즉 서로의 짝을 만나게 해주신 분은 바로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하신 일이다. 따라서 하느님이 맺어 주신 결혼을 인간이 갈라 놓아서는 안 된다. 결혼은 하느님의 일이지 인간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이혼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이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원인을 들겠지만 근본적인 것은 서로간의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에서 하느님은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고 하셨다. 하느님은 원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들과는 달리 "우리 모습을 닮은"인간을 창조하셨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누구에게나 사랑자체이신 하느님을 닮은 모습이 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이 깨어진 것은 사랑으로 하느님을 닮으려고 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창세 3, 5)되고자 하는 탐욕으로 따먹지 말라는 나무 열매를 따먹었기 때문이다. 혼인성사는 탐욕으로 잃어 버렸던 하느님의 모습을 원상시켜 주는 것이다. 즉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참 좋더라!" 고 하셨던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주신 것이다. 그 모습은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의 모습이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라는 말에는 남자만도 아니고 여자만도 아닌 남자와 여자가 포함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결혼은 남자만의 것도 또는 여자만의 것도 아닌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이혼은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이 원초적인 공동체를 피괴시키는 행위이다. 그것은 부부간에 서로의 계약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혼인 계약서에는 "나는 평생동안 언제나 ..... 신의를 지킬 것을 약속합니다."라고 서로가 서로에게 약속하였다. 이 약속은 남자와 여자가 공동으로 지켜야 할 의무이고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혼은 서로가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 데에서 빚어지는 불행이다. 대부분의 이혼은 "우리"라는 개념이 없이 마치 아담과 에와가 하느님과 같아지기 위해 선악과 나무 열매를 따먹었듯이 "너는 나의 것"이라는 일방적인 소유욕에서 빚어진다. 그 누구도 상대방의 소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즉 누구에게 예속되어져서는 안 된다. 서로가 서로의 인격을 존중해주는 그래서 "너"와 "나"의 두 인격이 "우리"라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면서 하느님을 닮은 "우리"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라는 단위는 하나의 공동체를 말한다. 인격 공동체인 가정은 최초의 인간 사회이다. 인간 사회는 친교의 사회이다. 친교는 서로 나누는 것이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해주고 갖은 것을 서로 나누는 것이다. 이혼은 하루 아침에 오는 것이 아니라 친교가 없는 삶이 계속되었을 때 오는 하나의 결과이다. 따라서 이혼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서로의 친교를 통해서 "우리"라는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와 "너"라는 두 인격체가 하나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함께 노력해 나가야 할 작업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