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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17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Do to others whatever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오 7,7-12)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
말씀의 초대
에스테르가 유다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다인들을 보호하고 그가 하는 일에 힘을 주십사고 이스라엘의 주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스테르는 하느님만이 자신의 역경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임을 알았다(제1독서). 기도는 하느님과 하는 ‘게임’이 아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에 해로운 것을 기도의 응답으로 주시지 않는다.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칠 좋은 것을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60세가 된 동갑내기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자기보다 젊은 여자와 사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하느님께 서른 살쯤 어린 여자와 살게 해 주십사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느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정말로 자신보다 서른 살이나 어린 부인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부인이 젊어진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아흔 살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에 대한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기도는 도깨비 방망이가 아닙니다. “돈 나와라, 뚝딱!” 하면 돈이 나오는 요술 방망이가 아닙니다. 평소에 기도를 하지 않던 신자들도 어떤 간절한 바람이 생기거나 갑자기 어려움이 닥치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다리다가 금방 응답이 없으면 이내 실망하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은 설령 기도의 응답으로 좋은 결과를 얻었다 하더라도, 마치 사탕을 받아 든 아이와 같은 유아적 신앙 태도를 보입니다. 기도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성숙한 기도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라는 오늘 복음 말씀을 ‘주님께서 너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가 주님께 해 드려라.’고 바꾸면 됩니다. 참된 기도는 이렇게 주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시기에, 정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십니다. 기도가 깊어지면, 주님께 드리는 청원 기도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 내어 맡기는 기도로 바뀌게 됩니다. 이럴 때 기도는 평화롭고 행복한 느낌을 줍니다. 기도가 어렵고 힘든 이유는 어린아이처럼 달라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수없이 들어 온 말씀입니다. 하지만 인생의 ‘닫힌 문’은 너무나 많습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들입니다. 아직도 알 수 없는 관계들입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문을 두드리는 것이 될는지요? 주님을 아버지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부모님으로 모시는 삶입니다. 그런 자세가 문을 두드리는 ‘첫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아빠, 빵 좀 주세요!” 하는데, “빵 좋아하네, 돌이나 받아라.” 이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애정의 마음으로 다가가는데 외면하실 주님은 아니십니다. 이것은 ‘믿음의 기초’에 해당되는 가르침입니다. 이 교훈을 잊지 말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입니다.
중세 때부터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수도자가 성체 조배 차례가 되어 성당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앞 조의 수사가 코를 골며 자고 있었습니다. 화가 난 수사는 감실을 향해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주님, 제대 앞에서 자고 있는 이 형제를 용서하소서!” 그러자, 감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좀, 조용히 해라. 네가 나까지 깨우는구나. 나도 자고 있단다.”
부모는 어떤 상황에서도 좋게 봅니다. 자녀가 사랑스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걸 아는 자녀는 많지 않습니다. 대개는 간섭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늘 좋게 보십니다.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려 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또 ‘문을 두드리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
게으른 아들을 둔 부모가 있었습니다. 고생하며 재산을 모았건만 아들은 일을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는 아버지께 말합니다. “그렇더라도 이제는 재산을 물려줘야 하지 않겠어요?” 아버지는 답합니다. “자기 힘으로 돈을 벌기 전에는 재산을 주지 않을 작정이오.” ☆☆☆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진정한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어떠한 마음으로 인간을 바라보고 계시는지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잘되기만을 바라시며, 필요한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녀들이 필요한 것과 구하는 것을 결코 모른 체하지 않으시며, 자녀들이 미처 구하지 못하는 은총도 내려 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아무리 미천한 부모라 하더라도 자식에 대한 사랑은 한이 없는데, 하물며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모른 척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어머니는 아들에게 돈을 주며, 아버지께는 ‘일해서 번 돈’이라고 말하게 합니다. 며칠 후 아들이 나타납니다. “아버지, 제가 일해서 번 돈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말없이 화로 속에 던져 버립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깜짝 놀랐지만 말을 못합니다.
얼마 뒤 아들은 어머니의 돈으로 또다시 말합니다. “제가 일해서 번 돈입니다.” 이번에도 아버지는 불 속에 던져 버립니다. 그제야 어머니는 남편을 이해하고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다. 네 힘으로 돈을 벌어 오너라. 미안하구나.”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아들은 정신을 차립니다. 그러고는 험한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아들은 어렵게 번 돈을 아버지 앞에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또다시 화로 속에 던져 버립니다. 아들은 깜짝 놀라며 뜨거운 화로 속에 손을 넣어 돈을 꺼냅니다. “아버지 너무하십니다. 이 돈을 버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아들의 눈물에 아버지는 손을 잡고 말합니다. “이번에야말로 진정 내 아들을 찾은 것 같구나!” 주님께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격을 갖추면 반드시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그러니 언제나 자신을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하느님에게서 버림을 받았다거나 하느님께서 고통만 안겨 주실 뿐 돌보아 주지 않으신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이웃에게 하느님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의 손길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찾고 두드리는 방식
- 양미강 목사- 워싱턴 디시에 있는 세이비어 교회는 미국의 유명한 수정 교회나 새들백 교회처럼 건물이 웅장하지 않다. 그러나 세이비어 교회는 미국을 움직이는 몇 안 되는 교회의 하나다. 교인을 다해야 150여 명도 안 되는 작은 교회가 큰 교회도 하기 힘든 노숙자와 알코올의존증자, 저소득 계층을 위한 아파트 임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마음을 두드리시는 성령 -고계영신부- 작년 12월 김장할 즈음의 일입니다. 수도원 현관에서 근무하는 이가 쉬는
악한 선과 선한 악
40여 개의 네트워크와 10개 교회로 구성되어 활동하는 이들은 세이비어 교회라는 단일한 우산 속에 들어 있는 지부가 아니다. 10개 교회는 때로는 주일, 때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다양한 형식과 내용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들이 드리는 예배는 목사에 의해 주도되지 않는다. 훈련된 교인 한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며 성경을 읽고 삶을 나눈다. 그들의 예배는 큰 교회에서 볼 수 있는 한 편의 질 높은 공연을 특급석에 앉아 관람하는 것 같은 고품질 예배는 아니지만, 소박하고 정리된 예배 속에서 하느님과 소통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살아 있는 예배다. 그들에게 예배란 자신들이 하고 있는 미션과 삶을 함께 나누는 장이다.
이 교회를 방문한 후 내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이 공동체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이 궁금했다. 이들이 구하고 두드리는 방식은 세상과 담을 쌓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데 있다.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기도 훈련, 묵상 훈련, 성경 연구 등 강력한 영적 성장을 위한 훈련이 바로 그들의 방식이다. 바로 이 점이 세이비어 교회가 균형감과 건강성을 갖는 이유다. 이것이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그들만이 찾고 두드리는 방식이다.
“꽃을 주는 사람이 행복할까? 받는 사람이 행복할까?”
그러나 서로 자신의 생각만 주장하다 보니 결론이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근처의 꽃집에 갔습니다. 꽃집 주인은 꽃을 많이 팔아보았으니 꽃을 주는 사람이 행복한지 아니면 꽃을 받는 사람이 행복한 지를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지요. 꽃집 주인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꽃을 판 사람이 제일 행복합니다.”
사실 꽃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그리고 파는 사람 모두 예외 없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꽃이라는 매개체가 그렇게 행복하게끔 만든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 안에서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오늘 복음에 나와 있듯이 우리가 청하는 대로 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이렇게 주님을 통해서 행복을 얻은 우리는 이제 내가 받은 만큼 남에게 베풀어야 할 것을 명하시지요. 왜냐하면 받는 행복과 주는 행복이 함께 이루어질 때 진정으로 완전한 하나의 행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지만 우리들은 받는 것에 익숙할 뿐 주는 것에는 너무나도 어색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받는 행복에만 익숙한 반쪽짜리 행복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다 받을 수 있는 우리, 그리고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우리가 될 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디 까지 만을 원하며 살고 있었을까요? 혹시 받는 것까지만 원하고, 주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조건을 걸어서 거부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건망증이 아주 많은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형제님께서 택시를 타셨지요. 한참을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이 형제님께서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가 기억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택시 기사님께 여쭤보았지요.
“기사님, 제가 지금 어디 간다고 말씀드렸죠?”
그러자 택시 기사님이 깜짝 놀라며 “아이고 깜짝이야. 그런데 언제 타셨어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형제님뿐만 아니라 택시 기사님 역시 건망증이 심했던 것이지요.
우리 역시 이렇게 건망증이 심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의 목적지가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래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그렇게 살지 못할까요? 바로 잊어버리기 때문이지요.
이제는 다시 정신을 차려서 받는 것만을 이야기하지 말고, 주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갖도록 합시다. 이 둘이 모두 내 안에서 이루어질 때 완전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날이라 오후 내내 현관에서 전화를 받으며 봉사를 했습니다. 4시쯤이었을까요?
수도원의 경리 소임을 하는 형제가 김장거리를 잔뜩 싣고 와서 부탁하기를,
수도원에 있는 다른 형제들에게 알려 식당으로 옮겨달라는 것입니다. 방에 있는
형제들에게 인터폰으로 연락을 하고 함께 그 배추를 나르려고 나서는데
‘혹시 전화가 올지 모르니, 현관에 그냥 머물러 있어야 하나?’ 하는 갈등이
스쳤습니다. 사실 경리 형제가 ‘신경 쓰지 말고 현관을 보라’는 터였습니다.
그러나 부추기는 유혹을 뒤로하고 배추를 나르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형제들이
내려와서 일은 간단하게 끝났습니다. 무 몇 단이 남았을까, ‘이제 몇 개
안 남았으니, 이 정도 도와주었으면 되었다’는 생각이 또 스쳤습니다.
기회만 오면 절대로 놓치지 않으려는 끈질기고도 날렵한 이 유혹!
그러나 현관까지 들어갔다 다시 나와 남은 무 단을 들었습니다. 순간 그윽한
평화가 마음에 잦아들었습니다. 나를 유혹한 것은, 내 마음을 두드린 것은,
나약한 유혹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향해 두드리기도 전에 성령께서
먼저 내 마음을 두드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문이 열리며 도란도란 속삭이며
들어오는 신비의 광채들! 여기가 바로 우리가 머물러야 할 고향입니다.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청하고, 찾고, 두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그렇게만 된다면 못할 것이 무엇일까?
그러나
청하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합니다.
찾기 위해서는 열망이 있어야 합니다.
두드리기 위해서는 앞의 겸손과 열망에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겸손과 열망과 용기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절실함입니다.
곤궁에서 도움이 절실할 때
우리는 청하는 겸손이 생기고
찾는 열망이 생기고
두드리는 용기가 생깁니다.
오늘 첫 번째 독서의 에스테르 왕비가 이런 경우입니다.
죽게 되었을 때 아무에게도 청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이렇게 청합니다.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내 편에서 이런 절실함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주실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면 이것도 무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두 가지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은 선이시다는 것과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믿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주실 선을 가지신 분이시고
그 선을 주실 사랑을 가지신 분이시라는 믿음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너희가 악해도”하고 주님은 먼저 말씀하십니다.
인간도 선이지요.
선이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왔으니 선이지만
결핍이 있는 선이고 그래서 최고선이신 하느님께 비하면 악입니다.
줄 수 있는 선이 하느님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에
인간은 자기 자식한테 밖에는 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깡패도 자기는 나쁜 짓을 해도 자기 자식은 착하기를 바라고
남에게는 나쁜 짓을 해도 자기 자식에게는 가장 좋은 것을 줍니다.
심지어 자기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을 숨깁니다.
이것이 아비 된 자의 마음입니다.
말하자면 사랑이고 사랑의 마음인 것이지요.
인간 아비가 이러하니 하늘 아비는 이보다 훨씬 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모두 좋은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의 눈에 선이 아니라 악이 주어진 것 같아도
내가 몰라보는 것이지 사실은 선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에스테르는 “당신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고 고백합니다.
모든 것을 아시기에 무엇이 더 나에게 좋은 것인지 아십니다.
우리는 종종 너무 무지하여 악한 선을 달라고 하지만
그런 우리에게 하느님은 선한 악을 주시곤 합니다.
예를 들자면 담배를 좋아하여 담배를 달라는 자식에게
아비는 절대로 담배를 주지 않고 싫다는 빵을 주십니다.
당장은 좋으니 담배가 선이지만 사실은 나에게 나쁜 것, 악이지요.
당장은 싫으니 빵이 악이지만 사실은 나에게 좋은 것, 선입니다.
주님, 당신께서 어련히 알아서 주시는
이 선한 악에 맛들이게 하소서.
바라는 그대로 해 주어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에서는 “너희가 청하는 대로 이루어지리라 믿기만 하면 그렇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청하는 대로 다 들어주십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MBC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을 정말 재미있고 감사하게 보았습니다. 특별히 문명과 떨어져 사는 원시 ‘조에’ 부족은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들은 턱을 뚫어 뽀뚜루라는 나무를 끼고 다니고 옷을 걸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사냥해서 나누어먹습니다. 사냥을 위한 도구 정도를 제외하고는 개인소유도 없고 그래서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을 촬영했던 사람들은 문명에 접해가며 원시부족들이 점차 웃음을 잃어가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사는 것과 같은 이들의 삶은 문명이 오히려 우리의 웃음을 빼앗아 갈 수 있음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조에 부족 역사상 살인사건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총을 소지하고 있는 미국 등지에서 빈번히 발생하는 사고와는 다르게, 이들도 활과 칼을 지니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사람에게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명과 접했던 다른 부족들과는 다르게 외지인이 들어와도 두려워하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그 곳에 다녀온 PD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아무도 누구를 해치려 하지 않기 때문에 남들도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 것을 알아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말에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무학 대사와 이성계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시험하기 위해, “당신의 모습은 꼭 돼지와 같소!”하자, 무학대사는 “임금님은 부처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것에 놀란 이성계에게 무학대사는 한 마디 더 보탭니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님만 보이는 법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사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내가 두려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판단을 받는 것을 두려워한다면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해를 입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사람은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험담을 하기에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험담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두려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이, 내가 하는 대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조에족은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이전의 상태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선만 알고 악을 모르기에 남들이 자신에게 악을 끼칠 줄도 모르고 그래서 두려움 없이 마냥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명을 접하고 사람이 사람에게 악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 때는 이들도 움츠려들고 공격적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돌아와서 왜 우리가 하느님께 무엇을 청할 때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내가 하느님께 그만큼 돌려드릴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기에 하느님도 그런 분으로 판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병자들에게 안수 기도를 해 주며 이들을 고쳐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청합니다. 그러면서 속에서는 “나 같은 죄인에게 하느님이 청을 들어주실 리가 없어.”라고 스스로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아버지께 청하는 모든 것을 얻어내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을 사랑으로 볼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의 청을 의심 없이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느님도 당연히 그렇게 나에게 주실 것을 확신할 수 있지만, 내가 남에게 그렇게 해주지 못할 사람이기에 하느님께로부터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모든 것을 주실 분임을 믿기 위해서는 우리도 남이 청하는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느님도 자비로운 분으로 보이고 그래서 자비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청하기 전에 내가 정말 그 청을 하면서 남의 청은 들어주지 않는 인색한 사람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와 삶" -이수철신부- 우리의 실존적 고백입니다. 우리 궁극의 피신처 역시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께 피신하는 자에게는 방패가 되어 주시고 주님은 당신의 오른 팔로 우리를 받아 주십니다. 마침 본원장 신부님의 영명축일을 맞이하여 수고 많다며 축하인사를 전할 때, 본원장 신부님의 차분하면서도 짤막한 답변을 잊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사는 것, 바로 이게 믿음입니다. 하느님을 까맣게 잊고 온통 자기 힘으로 하려기에 무거운 짐이자 스트레스입니다. 하여 세례 받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맡길 분(곳)이 있어 좋고 편안하다.’고 고백합니다. 말이나 글, 기도나 삶이 간절하고 절실할 때 감동을 줍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에 간절하고 절실한 삶이요,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에 간절하고 절실한 삶이니, 기도와 삶은 함께 갑니다. 하여 기도를 보면 삶을 알 수 있고, 삶을 보면 기도를 알 수 있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말씀,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와 삶이 하늘을 감동시킨다는 말입니다. 진인사대천명,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고 그 결과는 하늘에 맡기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이런 자세로 기도하고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삶의 자세를 말해 줍니다.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다 죽을지언정, 포기하지 말고 절망하지 말고 끝까지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기도와 삶의 자세가 사람은 물론 하느님을 감동시킵니다. 몸과 마음도 다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됩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간절히, 절실히, 항구히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릴 때, 하느님은 우리 방식대로가 아닌 당신 최상의 방식대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바로 이런 기도의 모범이 1독서의 에스텔입니다.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리는 이런 간절하고 절실한 신앙고백과 기도가 역시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외로운 저를 도와주소서.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는데, 이 몸은 위험에 닥쳐 있습니다. 기억하소서. 주님, 저희 고난의 때에 당신 자손을 알리소서. 저에게 용기를 주소서.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자신의 기도로 삼아 바쳐도 참 좋은 기도입니다. 이런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를 바치는 이들 결코 하느님의 자비에 절망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에게 주님은 당신의 적절한 때에 당신 최상의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매일 이 거룩한 미사시간, 주님은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으로 청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맞갖은 은총과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시편138,3ㄱ). 아멘
오늘 ‘주님 없이는 저희가 있을 수 없사오니’ 란 말마디 그대로
공포에 사로잡혀 주님께 피신처를 찾은 에스텔,
대수도원 본원의 원장 소임이 얼마나 힘든지 아는 사람은 압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삽니다.”
이 말씀이 저에게도 위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삽니다.”
간절하고 절실한 신앙고백입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간절하고 절실한 기도의 자세,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느님은 말 그대로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저의 주님, 당신은 유일한 분이십니다.
곤경 중에 있는 누구나
“주님, 제가 부르짖던 날, 당신은 응답하셨나이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양승국신부-
<다급해지다보니>
요즘 한 몇 일 아이들을 위해 집중적인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사는 게 기도지", 그게 아니면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 기도지"하면서 기도를 소홀히 했었는데, 다급해지다보니 어쩔 수 없이 가장 원시적인 청원기도를 하게 됩니다.
"꼭 돌아오게 해주세요.", "하느님 이 부탁은 꼭 들어주셔야만 하겠습니다." 등등 어린애가 떼를 쓰듯이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 참으로 묘한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자신의 건강을 위한 기도, 제 성취를 위한 기도,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기도는 제대로 먹혀 들어간 적이 거의 없었는데, 타인을 위한 기도, 특히 방황하는 아이들이나 절박한 이웃을 위한 기도는 거의 90% 이상 OK되는 특별한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는 자세에 대해서 가르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늘 흔들리는 우리에게 참으로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도하기에 앞서서 무엇을 구할 것인가를 식별하는 일은 기도에 못지 않게 더 중요한 일인 듯 싶습니다.
적어도 너무 터무니없는 청원기도를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로또 복권을 한 장 샀으면 그저 한번 추첨시간의 그 짜릿함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사야지, 꼭 1등에 당첨되도록 기도하기 위해서 산다면 너무나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이겠지요.
하느님을 마치 무당 대하듯이 대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어느 쪽 땅이 빨리 그린벨트가 풀릴 것인지 하느님, 족집게로 집듯이 알려주십시오"와 같은 기도를 드린다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처신하기 곤란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은 누구 말은 들어주고 누구 말은 외면하는 편애의 하느님이 절대로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느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보다 보편적인 기도, 보다 이타적인 기도, 보다 폭넓은 기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나 자신의 유익이나 내 가족의 안녕도 중요한 기도거리겠지만, 중동의 평화를 위한 기도, 아프리카의 난민들을 위한 기도, 이 땅의 모든 고통받는 청소년들을 위한 기도, 아직도 사망여부조차 확인 받지 못해 애태우고 있는 대구 참사 실종자 가족들을 위한 기도 등, 세상과의 연대를 위한 기도에도 게을리 하지 않는 우리의 기도이면 좋겠습니다.
설사 당신의 친구가 당신을 배신하는 행동을 해도 당신은 친구의 욕을 남에게 해서는 안 된다. 오랫동안의 우정이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싱)
선하신 하느님
-류충희 신부-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말씀은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으로 모두 같은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청하는 사람의 자세와
청원 내용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이나 청해서는
안 되고 주님의 기도에서처럼 하느님의 뜻을 청해야 합니다.
기도에 있어서는 항상 내 뜻보다 하느님의 뜻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빵을 달라는 아들에게 돌을 줄 아버지는 없습니다.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아버지도 없습니다. 세상 아버지도 자식들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야 우리들에게 좋은 것을
더 많이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참새
한 마리의 운명도 지켜보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참새
한 마리까지도 보호하시는 하느님께서 참새보다 귀한 당신의 사랑스런
자녀들을 얼마나 더 귀중하게 여기시고 보호하시겠습니까? 사도 바오로는
필리피 교우들에게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 4,6-7)라고 했습니다.
너의 간절한 만큼
-김찬선신부-
24년 전 결핵환자들과 자활촌을 하겠다고 하던 때
30여 명의 결핵환자들과 원주 근교의 한 폐교를 사 갔습니다.
폐병쟁이들이 온다고 첫날부터 시작된 동네 사람들의 시위는
얼마 지나면 가라앉을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더 심해져갔습니다.
강에서 경운기로 돌을 실어 날라 학교 둘레에 쌓아놓고는
밖으로 나오기만 하면 돌로 쳐 죽이겠다고 위협을 하였습니다.
감옥살이, 겨우 식수밖에 없는 물 부족 상황, 환우들의 동요 등
그야말로 內憂外患의 그 어려운 상황에서의 기도는
이전의 그 어느 기도보다도 절실하여
전에는 지나치던 시편의 탄원하는 한 구절, 한 구절이
그대로 저의 기도가 되었습니다.
이때의 저의 체험은 아주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저의 청원의 내용이 그토록 진실하였던 적도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그토록 진실하게 주님을 마주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주인은 뒷전이고 주인 손에 들려있는 고기만 보던 개가
차츰 고기와 상관없이 주인을 따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청원이 가납되기를 바라는 절실함에서 시작된 기도가
이제 청원의 가납은 뒷전이 되어버리고
하느님과 진실하게 대면하는 기도로 이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절실함이 진실함을 낳고
진실함이 성실함을 낳고
성실함이 주님의 성실함과 자애로움에 대한 믿음을 낳았습니다.
외로운 에스테르 왕비가 모든 것을 아시는 주님과 독대할 때도
바로 이러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간절히 청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청하는 만큼 주실 뿐 아니라 더 많이 주시고
청하는 것을 주실 뿐 아니라 더 좋은 것을 주십니다.
세상의 아비보다 더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루카 복음에서는 오늘 마태오 복음과는 달리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성숙한 요청과 나눔
- 배미애 수녀-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 바라는 바가 무엇일까?” 내가 어느 모임에서 이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참석자들은 대개 서로에게 인정과 신뢰를, 또 관심과 이해받기를 원한다고 대답했다. 오늘 복음에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는 말씀도 각 사람 안에 있는 존엄성, 거룩함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담은 시선과 태도를 의미한다.
또한 복음 말씀 중에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려라.”는 구절은 하느님을 우리가 간절히 원해야만 주시는 혹독한 아버지로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빵을 달라는데 돌을 줄 아버지,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줄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질문은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임을 잘 보여준다. 그분은 자녀들이 원하지도 않는데 거저 주시면서 우리를 어린이로 취급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필요한 것만 채우고 다른 이들을 모른 체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지도 않으신다.
경험에 비춰 보면, 내가 가지고 있는 선물을 기쁘게 나누었을 때 나도 성장하고 공동체도 더욱 풍요로워진다. 나눔은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라 남들이 나에게 해주면 좋겠다고 바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그 방식은 나를 어린이 취급하지 않고, 나의 자유의지를 존중하면서, 내가 간절히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마치 빵과 생선이 주어지는 것처럼 이루어지는 것을 말한다. 구하거나 찾지도 않고 문을 두드리지도 않는데 주는 것도 아니고, 빵과 생선을 달라는데 돌과 뱀을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기도의 응답 이전에 오는 위로 -전삼용신부-
얼마 전에 제가 아는 한 분이 진로 문제로 걱정하는 말을 했습니다. 물론 걱정한다고 바뀌는 것이 없는 것도 알지만 저절로 걱정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누가 보내온 메일에 “주님의 이름으로 믿고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키아라 루빅의 묵상을 읽고는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고 했습니다. 맞습니다. 걱정하는 것보다는 기도하는 편이 낫습니다. 기도하면 응답이 있기 이전에 벌써 좋은 효과를 얻습니다. 그 이유는 청하면서 이미 주님께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청하면서 이미 혼자가 아님을 스스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까지 청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주소서.” 예수님은 이 기도가 안 들어질 것을 아시면서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창조 이전부터 계획된 주님의 뜻을 실현하려 세상에 오셨고 바로 그 순간이 그 일의 종지부를 찍기 직전인데 하느님께서 그 계획을 변경하실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잔을 마셔야 하고 마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런 기도를 하시는 이유는 그 기도를 하는 것만으로 이미 위로를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아버지께 청하셨습니다. 비록 기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 기도를 드림으로써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관계가 불가능한 것까지 청할 수 있는 관계임을 스스로 느끼며 위로를 받으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원하는 것을 마구 청할 수 있지만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것 하나 청하기가 꺼려집니다. 다시 말해서 무언가를 청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이고 그래서 청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미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주님의 뜻에 맞을까, 맞지 않을까?’ 이것은 주님께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그저 청하고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안 주시는 편이 낫기 때문에 안 주시는 것이라고 위로하며 넘기면 됩니다. 자녀가 둘이 있는데 둘이 장난치다가 귀한 것을 깼습니다. 한 자녀는 부모에게 용서해달라고 달려들고 한 자녀는 용서를 청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귀한 것이 깨진 것보다 자녀가 용서를 청하지 않는 것에 더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또 그 자녀가 계속 부모에게 아무것도 원하는 것이 없고 혼자 다 해결하며 살아가려고 한다면 그것만큼 부모에게 속상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남남으로 살자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부담 없이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가 참으로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많이 청하는 사람이 주님을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좋은 것만 주시는 분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의 응답이 없더라도 꾸준히 청하고 다른 것까지 청합니다. 좋은 것이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이렇게 용기를 북돋아 주십니다.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우리가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청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주님께서도 부모에게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 자녀를 두신 것처럼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철부지 어린아이처럼 무엇이든지 청하도록 합시다. 많이 청하는 사람이 많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믿고 청하면서부터 응답에 관계없이 이미 우리에게 사랑과 위로가 오게 됩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새벽을 열며
어떤 공장에서 청년들과 한 노인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정부의 정책이 잘못되어서 직장인들이 살기 어려워졌다고 불평하였고, 노인은 각자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는 토론의 형식이었으나 의견이 좁혀지지 않자, 서로 큰소리를 지르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청년 중의 한 명이 소리쳤습니다.
남이 원하는 데로 남에게 해주십시오. 빠다킹신부 서로의 처지가 되는 날 -허찬란 신부- 교구 신부님 가운데 미카엘 신부님이라는 분은 항상 제게 모범적인 사제의 기도와 실천 -이동훈 신부- 많은 신앙인들이 기도를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여기는 것을 자주 본다. 도깨비 방망이를 내리치듯이 하느님도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하기만 하면 다 들어주시는 분으로 믿는다. 이런 이들에게 오늘 예수님 말씀은 그러한 기도에 대해 확신을 가지라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사순 제1주간 목요일 - 최현욱 신부-
세탁소를 하는 사람과 농부가 기도하는 것 때문에 하느님께서 참 머리가 아픕니다. 세탁소를 하는 사람은 제발 비를 내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하고, 농부는 비가 오지 않으면 농작물이 말라죽기 때문에 비를 내려 달라고 기도합니다. 할 수 없이 하느님께서는 세탁소를 하는 사람과 농부에게 잘 합의해서 언제 비를 내려주면 좋을 지 의논해 보라고 했습니다. 주일은 함께 교회에 가야 하니까 비가 오면 너무 불편하고, 월요일은 얘들이 학교에 가야하고, 화요일은 농부도 빨래를 해야 하고, 수요일은 뭐 때문에 비가 오면 안 되고, 목요일, 금요일...... 등등. 아무리 논의를 해봐도 비오는 날을 결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이렇게 합의를 보았습니다. “이 문제는 하느님께 맡기기로 합시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비를 내려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운동 경기를 앞두고 양 팀 선수들이 서로 자기 팀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실력이나 노력은 둘째 치고 무조건 이기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은 과연 어느 팀의 기도를 들어줘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느 팀의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입시철이 되면 너도나도 개신교회에서, 절에서, 성당에서 자기 자녀가 시험을 잘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점수가 많이 나오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하느님이 이런 기도를 들으실 때 과연 어떻게 하실까요? 우리들도 참 많은 기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이러한 기도를 바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자기 기도를 하느님께서 꼭 들어주시기를 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이 사람 기도를 들어주면 저 사람은 피해를 입어야 하고, 저 사람 기도를 들어주면 이 사람이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저보고 이러한 하느님을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만일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면 아마 머리카락이 하얗게 되거나, 다 빠져서 대머리가 될 것 같습니다. 정말 골치가 아플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들이 바치는 청원기도 중에 많은 것들이 이렇게 하느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기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청하여라, 주실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께 청원 기도를 바치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무엇을 청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만을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희생시키면서,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면서까지 내가 원하는 것만을 주시라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의 노력은 없으면서 좋은 결과만을 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순절이 시작된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따라 걸어가는 이 사순시기에 하느님을 난처하게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기도보다 하느님과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전해주는 기도를 많이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 당신 자신을 알리소서
-이회진신부-
그리스 신화에서 에오스는 새벽의 여신입니다. (로마신화에서 에오스는 아우로라Aurora(오로라)라고 불립니다.) 새벽의 여신 에오스는 인간인 티토누스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새벽의 여신인 에오스에게 어떤 선물을 줄 것인가에 대해 물었고, 에오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선물을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당연히 인간인 티토누스가 영원히 살게 해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한 가지 잊은 것이 있었습니다. 티토누스가 영원히 사는 것뿐만 아니라 영원히 젊은 상태로 있게 해 달라는 것은 잊은 것이죠. 티토누스는 서서히 나이가 들었고, 늙어 갔습니다. 그는 영원한 생명을 제우스신으로부터 받았기에 계속해서 늙어 갔고, 또 늙어 갔습니다. 그는 죽을 수가 없었기에, 신으로부터 받은 선물(은총)이 이제는 자신에게 저주와 같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는 하느님에 관한 이야기와 같습니다. 하느님은 항상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응답은 언제나 같은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흔히 지금 당장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지고 죽을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다른 것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성장하고 있고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아이가 되었을 때 바라는 것과 어른이 되었을 때 바라는 것이 같지 않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성장과 변화 속에서 더 멀리 더 깊이 우리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보고 들어주시길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이 진정 하느님께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기 자신도 자기 마음을 모르는데 어떻게 하느님께 마음을 열어 청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오늘 제 1 독서에 나타나는 에스테르 왕비의 기도는 문을 두드리며 하느님께 청하는 우리에게 기도의 좋은 본보기가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고난 받을 때 하느님 당신을 알게 해 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함께 하고 있음을 알게 해 달라는 것이고, 당신에게서 전해지는 마음과 지혜로 고난을 이길 수 있도록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에스테르의 기도는 지금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니 꼭 이것을 들어달라고 청하는 우리의 기도와는 많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라고 합니다. 이 대화는 일방적인 청원과 말의 나열이 아니라 마음의 대화 즉,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만나고 서로를 이해하고 알게 되는 영혼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를 잘 하기 위해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귀기울여하고, 하느님이 또한 나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시는지 마음을 기울여야합니다. “하느님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하느님께 해 주어라.”(마태 7,12)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을 이렇게 바꾸어 읽어 본다면 우리 기도의 뜻은 더욱 분명해질 것입니다. 먼저 주님의 마음을 청하십시오. “주님, 오늘 당신의 마음을 저에게 알려주소서. 아멘.”
“아, 글쎄 그게 아니라니깐요! 영감님은 알지도 못하면서 고집부리고 그러세요.”
“아니긴 뭐가 아녀! 다 자기 할 탓이지, 누가 나대신 인생을 살아주나?”
이렇게 한참을 서로 떠들고 나더니, 갑자기 청년 서너 명이 노인의 팔다리를 잡고 번쩍 들어 올려서는 공장 옆에 있는 커다란 물통 속으로 던져 넣어버렸습니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보고 있던 공장장은 노인이 걱정되어 불러서 말합니다.
“좀 참으시지, 속상하시죠? 그래도 일하러는 나오셔야 합니다.”
그러자 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였습니다.
“뭐, 젊은 것들이 그럴 수도 있지! 하하하!”
호탕하게 웃고 난 노인은 다시 나가서 옷을 갈아입고 오후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노인을 집어던진 청년들은 노인 앞에서 죄인이 되었습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생쥐처럼 노인이 나타나기만 하면 굽실거리며 눈치를 살치는 하인들이 되고 말았지요.
노인을 물통에 집어던질 때까지만 해도 청년들은 자신들이 이긴 것으로 생각하였지만, 사실은 이긴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지요.
물론 다른 사람이 내게 서운한 말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픔을 주고 실수로 피해를 주기도 합니다. 그 순간에 ‘그럴 수도 있지! 하하하!’라고 웃어넘길 수 있다면 오히려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황금률을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바로 남이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각자가 잘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즉, 나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오히려 더 큰 불편함과 힘듦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도록 ‘내가 먼저 남에게 해주는’ 실천을 강조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3월 1일. 다시 새로운 달의 시작입니다. 이 날에 나는 얼마나 남을 위해서 남이 원하는 바를 실천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남을 위해서 그리고 남이 원하는 바를 실천할 때, 나의 마음은 세상의 누구보다도 편안한 행복을 체험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신부님이 젊은 사제였을 때, 한번은 각 종교간 대화와
만남을 위한 행사 준비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으셨답니다. 신부님은 당시
외국인 교구장님을 모시고 함께 가셨는데, 모임이 한창 진행될 무렵,
당신의 생각을 피력해야겠다 싶은 순간이 있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더군요.
“지금 이 자리에 앉아 계신 한 분 한 분을 보면서, 솔직히 제가 보기에 스님은
스님으로만 보이고, 목사님은 목사님으로만 보이는데 혹시 제가 스님이나
목사님들 눈에 신부가 아닌 여러분과 같은 신분으로 보이는 분이 계십니까?
모임도 좋고 만남도 좋지만 서로가 서로의 처지가 되어준다는 것이 정말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깨닫고 있습니다.
우리 종교인들이 서로 입장을 바꾸고 서로의 처지가 되어서 서로를 존경하는
날이 올 때 즈음해서야 이 모임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줄로 믿는데,
어떻게들 생각하십니까?”
상대방의 입장이 되고 서로의 처지가 되어줘야 한다는 이 말씀을 깊이 공감하며
오늘 복음을 묵상해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로 청하는 것뿐만 아니라 찾고 두드리는 우리의 적극적인 행위 또한 요구하신다. 그 행위란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12절)는 황금률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웃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야고 3,17) 것이다. 기도와 실천, 이 둘은 결코 갈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기도생활에만 전념한다고 실천을 소홀히 하거나, 실천을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한다면 완전한 신앙에 도달할 수 없다.
우리는 교회의 거룩한 전례를 통해서 하느님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의무를 의식하게 된다. 에스텔의 기도(1독서)는 그녀의 용기있는 행위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도로시 데이와 피터 모린은 그들이 가난한 이들을 먹이고 재우고 옷을 입힌만큼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게 해 달라고,
다른 사람보다 더 잘 되게 해 달라고,
내 남편이 다른 사람을 제치고 진급하게 해 달라고,
내 자녀가 다른 얘들보다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황금률
-김훈일 신부-
사람은 누구나 사랑받기를 원하고, 칭찬받기를 원하고, 선물 받기를 원하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얼마나 받을지를 염려하지 말고,
얼마나 줄 수 있는지를 염려하라고 하십니다.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그 사람의
처지에 서라는 것이 황금률입니다. 그들의 고충과, 그들의 실망과, 그들의 기쁨과,
그들의 슬픔 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 황금률입니다. 자신을 그들과 동일시하고,
그리고 자신과 그들의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한 다음, 자신이 그들에게 대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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