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가 기독교 국가였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도마가 한국에 왔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에서 이런 내용을 가르쳐 줄 리는 만무하니 당연합니다.
1세기 당시에 예루살렘에서 인도를 거쳐 한국까지 사람이 다녀가셨다고?
자, 이제부터 설명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아래의 자료는 여러분들의 자료를 종합 정리한 것입니다.
참고로, 근거 없는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문헌과 유물이 없으면 모든 주장은 무의미합니다.
가야가 기독교 국가라는 것은 삼국유사에 근거한 것입니다.
김병모박사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영국 옥스퍼드대 문학박사, 한양대 문화인류학 명예교수,
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 한양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이분은 크리스챤이 아닙니다.
조국현박사
1988년 가야국이 기독교국가임을 최초 발표. 기장측 목회자, 삼국유사중 가락국기 해설, 가락국 20년 연구
정학봉박사
한국역사철학자, 대신대대학원원장, 인도 18회 방문하며 조국현 박사의 이론 입증
이장식박사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종교학과(B.A), 장로회신학대학 신대원(Th.B), 장로회신학대학 대학원(Th.M), 서독 뮌스터대학 신학부
미국 하버드대학 신학부(Th.M), 미국 드류대학 대학원(Ph.D)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사도 도마가 해양 실크로드의 마지막 항구인 땅끝 나라 한국 김해에 도착하여 활동하였습니다.
1. 도마의 행적
1) 도마는 40년간 선교의 사역을 감당하다가 순교했습니다.
도마의 사역은
전반기 20년= 에데사 탁실라, 한국의 가야
후반기 20년= 인도의 호칭, 챙나이에서 활동했습니다.
도마는 땅 끝이 인도인 줄 알고 왔었습니다.
이 당시 인도 역시 로마의 동쪽 끝 속국이었습니다.
땅끝까지 이르러 증인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받들어 인도까지 왔었는데
막상 인도에 와서 보니 인도와 교역하는 더 땅 끝인 한국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가야와 인도는 교역을 많이 하고 있었습니다. 그 역사적 정황은 아래에 차차 설명드리겠습니다.)
2) AD 42~47년까지 한국에 6년간 머무르며 김수로왕에게 세례를 주고 인도로 돌아갔습니다.(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기록된 연대)
3) AD 48년에 허황옥을 김수로왕에게 중매했습니다.
도마는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 총회에 선교보고를 하러 가던 길에
인도에 들러 허황옥을 김수로왕에게 중매시켜주고는 그 길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4) AD 50년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했습니다.(서양의 역사에 기록된 연대)
5) AD 52년 인도 서남부 케랄라주에서 선교하였습니다.(인도의 역사에 기록된 연대)
6) AD 72년 인도의 첸나이에서 창에 찔려 순교하였습니다.
2.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옥은 인도사람.
1) 허황옥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왔습니다.
아유타국은 현재 인도에 있는 겐지스강 아이오디아라는 조그마한 읍이 있습니다.
그 옆에 페자바드란 큰 도시가 있습니다.
허황옥의 아버지는 약초, 향신료 등을 수출하는 아유로베다 무역상을 했던 소왕국의 왕이었습니다.
이 아유타국에서 허황옥은 48년에 한국(가야)로 시집 왔습니다.
가락국기에 허황옥이 시집오면서 들고온 물품들을 보면 당시 실크로드를 통해 교역됐던 물품들이었습니다.
이런 물품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도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당시 가락국은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 교두보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중국 현금이 발견됐습니다.(오수전, 화천, 왕망전)
중국 왕망은 신나라를 만들고 3차례 화폐개혁을 단행했습니다(AD 23년 왕망 죽음).
대천오십(AD 7~14년), 화천/화포(14~40년), 특히 화천은 20년만 통용됐습니다.
아래는 그 화천이 발굴된 장소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사도행전의 복음사역을 감당할 때 당시
이미 중국에서 김해와 무역했다는 것이지요. 김해는 당시 최고 해상무역 관문이었습니다. 철을 수출했지요.
1세기 당시는 육상 실크로드와 해상 실크로드가 왕성했습니다.
그 이전에도 헬라의 알렉산더가 인도까지 통일했고, 페르시아 아하수에로왕 역시 그랬죠.
BC 1000년 전 이미 솔로몬 때도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어 해상무역을 활발히 했습니다.
그러니 바닷길도 엄연히 잘 발달돼 있음을 간과하면 안됩니다.
경주에서 매년 열리는 실크로드 축제 팜플렛입니다.
[로만글라스 2000년전에 신라에 오다] -KBS역사스페셜-
2) 허황옥의 후손들
허황옥이 10왕자 2공주를 낳습니다. 그 후손이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입니다.
허황옥의 아버지로 부터 내려오는 왕손이 인도에 지금도 살고 있습니다.
김종필씨가 아유타에 있는 그 후손을 찾아내서 김해에 데려와서 허황옥릉에 참배도 하고
기념식수도 해놓았으며 이런 인연으로 페자바드시와 김해시는자매결연까지 맺은 상태입니다.
*실지로 한국어 속에는 인도어(드리비다어)가 400여개나 있습니다. 특히 농사에 관련된 유사 단어가 있습니다. (쌀-Sal, 벼-Bya, 가래-Kalai, 메뚜기-Metti, 풀-Pul 등)
3) 가락국기에서 밝히는 아유타국
삼국유사의 내용 중에 가야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놓은 가락국기에 보면 허황옥은 아유타에서 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아요디아란 말 자체가 인도 의학, 아유로베다 의학을 하는 사람이 옛날에 그 왕국을 하다보니 아유타국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인도에서 아유로베다란 의학이 의료관광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혹자는 아유타국이 태국의 나라가 아니냐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뿌리를 불교로 돌리려는 노력입니다.
아유타국이라는 나라는 전세계에 두 곳이 있습니다.
(1) 태국의 아유타국은 15세기에 있었던 나라이지만,
(2) 인도의 아요디아는 BC 6세기부터 있었습니다. 허황옥은 전의 인물입니다.
-김병모박사(고려문화재연구원 이사장,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졸업, 영국 옥스퍼드대 문학박사)
4) 서울대학교 서정선교수의 DNA검사
김해 대성동 고분박물관에는 허황옥과 김수로왕의 후손들의 유물이 있습니다.
거기에 묻힌 고분의 뼈의 DNA검사 결과 허황옥은 인도의 타미린과 같은 염색체로 밝혀졌습니다.
이로 인해 허황옥의 한국사람, 일본사람, 중국사람 등 많은 설이 있다가 서교수의 발표로 모든 설들은 잠잠해 졌습니다.
3. 김수로왕은 누구인가?
1) 고등학교 역사 교과서 = 기마민족
우리나라 역사교과서에는 이전까지는 알에서 나온 신화적 인물로 소개했지만 현재는 기마민족 정도로 본다고 실려있습니다.
2) 흑해의 스키타이 민족
김수로왕은 흑해 옆에 있는 스키타이 출신 왕자입니다.
스키타이 민족은 문자가 없으면서, 금은세공이 굉장히 발달한 민족입니다.
신라의 금관, 귀고리 등에 보이는 '무금세공방법'이라고 하여 점이 찍히는 세공법입니다.
이 방법은 스키타이민족만 가능한 것을 나중에는 신라도 배우게 된 것입니다.
*참고로 농경문화는 옥을 숭상합니다. 그래서 중국의 모든 보물은 대개가 옥입니다. 실크로드를 타고 맨먼저
중국으로 들어온 보물은 바로 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목민들은 금을 숭상합니다. 가야가 멸망하고 신라로
흡수되었기 때문에 신라에는 백제나 고구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금문화가 있습니다.
이 스키타이족들은 황금장식과 함께 땅을 파서 시신이 담긴 목곽(木槨)을 안치하고
그 위에 돌을 쌓아올린 소위 적석 목곽분이라는 무덤양식이 특징입니다.
스키타이족이 흉노족과 훈족으로 불리우는 북방 유목민족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진,한 시대에는 흉노,
수.당시대에는 돌궐(투르크=위그르=터키),
고대 그리스(폴리스 시대)에서는 스키타이,
로마(제정시대)에서는 훈(후니)족으로 불리우게 됩니다.
따라서 흉노(스카티아)가 인종학적으로는 아시아족에 속하는 황인종 퉁구스계열에 속합니다.
(시베리아.만주.한반도 사람들을 지칭하는 동호=전통적인 동이족)
신라 경주 김씨들이 비문에 자신들을 흉노족의 후손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라 문무왕 비문에는 김알지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중국문헌의 기록의 근거는 고대 중국의 삼국지에 나오는
오나라의 왕 손권이 고구려를 ‘흉노의 왕’이라는 ‘흉노의 선우’라고 지칭한데서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유럽인들이 경주 방문하면 꼭 들르는 곳입니다.
왼쪽에 문인은 신라사람이고 오른쪽 무인은 흉노족 입니다.
신라 경주의 괘릉에 있는 무인석상입니다.
신라 원성왕릉(785~798,김경신) 앞에 있는 것으로 AD 700년 경에 신라에 스키타이민족과의 교역을 잘 보여줍니다.
얼굴 모양이 중앙 아시아인 - 아시아에서 서진한 스키타이족(흉노)이 유럽인들과 피를 섞여 동진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김수로왕의 청동 솥
김수로왕의 유물중에는 김수로왕이 들고 온 청동 솥이 있습니다.
그 청동솥은 쇠꼬챙이로 꿰어서 고기도 삼고 차도 끓이는 유목민들의 것입니다.
이것이 1990년대 초반에 김해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발견으로 고고학계에서는 김수로왕은 스키타이 사람이라고 다시 굳혀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영향을 신라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그래서 신란 금관총에서도 기마인물형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4) 김수로왕은 유태계 스키타이인
성경에 보면 골3:11에 나오는 '스구디아인'이 바로 스키타이인입니다.
스구디아인은 흑해 야만족인데 유대인들이 그리로 와서 유대인 스쿠디아인이 됩니다.
이들이 철기 문명을 가집니다.
한반도 철기문화 보급, 김해박물관에 철기 유물이 굉장히 많이 전시 돼 있습니다.
김행에서는 해마다 이렇게 철기문화의 가야를 알리는 행사가 열립니다.
청동기로 살던 한반도에 철기문명이 들어옵니다.
1세기 당시 아시아의 반대편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미 철연장을 사용하며
로마에 끌려가 콜로세움을 짓습니다. 철기는 보편화 된 것입니다.
말을 타며 강력한 기마민족이 됩니다. 북쪽으로 거쳐 중국까지 옵니다.
당시 실크로드는 육상과 해상이 이렇게 거미줄 처럼 연결돼 있었습니다.
정학봉교수에 의하면 거기서 성을 쌓고 정착 하다가
너무 힘드니까 남하하게 되었고 고구려, 신라, 백제 등에도 많이 흡수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김수로왕은 가야에 온 것입니다.
김수로왕은 스키아티에서 와서 중국의 소김천씨라는 마을을 거쳐왔기 때문에 성은 김씨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해의 구지봉에 왔을 때에 얼굴도 다르고 말도 못하니
가마 안에 있으면서 통역을 통해 얘기를 나누고 왕으로 선포되었습니다.
*김해 박물관에 가면 스키타이인이 왔다는 유적이 있습니다.
김해지역과 경주지역 고분에서 발굴된 동복, 각배, 황금장식 등 북방유목민들의 유골과 유물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김수로왕은 스키타이 유대인이란 것입니다. 물론 혼혈입니다.
사도들의 사역 방법은 어디를 가든지 흩어진(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찾아 다녔습니다.
도마가 인도에 왔을 때 찾아간 아유타족 역시 유대인 혈족입니다.
그런 연유로 도마가 한국에 왔을 때 김수로왕이 유대계였던 관계로 그렇게 만난 것입니다.
사실 기원전 천년 솔로몬 시대때부터 유대인들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무역을 했습니다(왕상9:26,10:22).
에시온게벨이란 항구였습니다. 이곳이 실질적인 해양실크로드의 출발점입니다.
기원후 얼마까지 전세계를 다니면서 상업을 한 민족은 전세계에서 유대인 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민족은 고작해야 이웃나라와 무역하는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불교 신문에서도 불경을 나른 사람은 100% 유대인이라고 한답니다.
정학봉박사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6일을 그렇게 이동하다가 7일 안식일에는
예배를 드려야하므로 크고 작게 모여서 집성촌을 이루고 회당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4. 허황옥은 어떤 사람?
1) 사도 도마가 에데사를 거쳐서 탁실라(터키 이슬라바마드 옆)에서 왕궁을 짓고
인도 아유타국을 거쳐올 때에 허황옥의 나이는 10살이었습니다.
(참고로 도마는 왕궁 건축기술을 가진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한국에 왔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김수로왕을 세례주고, 부활절에 가야국을 기독교국으로 선포하고
교회를 세우고, 철기문화를 만들고 많은 흔적을 남기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잠시 인도에 들렀습니다.
김수로왕은 6년간 신하들이 좋은 혼처를 주선하였지만 결혼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6년 뒤, 허황옥의 나이가 16세 때 김수로왕에게 시집가기로 결심을 합니다.
2) 인도로 간 도마는 허황옥의 아버지에게 가야에 김수로왕이 모든 혼처를 마다하고 허황옥을 기다리고 있다는
정보를 주게 됩니다. 그래서 가락 국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허황옥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동시에 꿈을 주었다고 합니다.
허황옥이 부모님의 말씀을 듣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면 죽으면 죽으리란 심정으로 시집을 오게 됩니다.
"부왕이 왕비로 더불어 저에게 말씀하시기를 어젯밤 꿈에 함께 상제를 뵈었는데
상제의 말씀이 가락국왕 수로를 내려보내 등극케 하였으니 그는 나의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새로 나라를 세웠으나 아직 베필을 정하지 못하였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 짝을 삼게
하라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니라..."(삼국유사 가락국기 -일연스님-)
*상제란 말은 하나님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성경에는 전부 하나님을 '상제'로 번역했습니다.
('엘 샤다이'를 중국 광동에서 번역할 때 '상제'로 번역)
이렇게 중매를 서고 나서 도마는 예루살렘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떠납니다.
3) 허황옥이 시집 오면서 타고 왔던 배의 무게 중심을 잡기 위해 싣고 왔던 돌이 있습니다.
김수로왕은 공주가 오는 날짜에 맞춰 크게 환영행사를 열었고, 공주를 태워온 20여명의 뱃사공들에게
큰 선물을 줍니다. 8월 1일 이 배가 돌아가는데 벼 150석을 실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선물들을 배에 다 실으려니 당연히 싣고 왔던 돌들은 강변에 내려두고 간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탑으로 쌓아놓은 것입니다. 물론 이 돌들은 인도 산인 것이 밝혀졌습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대로 구지봉을 비롯하여 파사석탑이 있는 이것 일대가 모두 바다였습니다.
(김해평야가 만들어진 것은 3세기입니다. 가야의 철기 문화로 산에 나무를 베고 개간이 가능졌기 때문입니다.)
(김해박물관에 가면 조개무덤 패총이 전시돼 있지요. 즉, 옛날에는 이곳이 바다였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불교계에선 '허황후가 불교를 들고 들어왔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고려 말(AD 1281년)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이 당시에는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삼국유사 제3권 [금관성 파사석탑]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때 (김수로왕과 허왕후 시대) 해동에서는 아직 절을 창건하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으니
대개 부처님 화상과 교리가 이르지 않았던 까닭으로 토박이 사람들이 신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본기(本記)에는 절을 창건하는 기록이 없었다. 제8대 질지왕 2년 임진에 이르러 비로소
그 땅에 절(왕후사)를 세웠고..."
일연에 의하면 불교가 한반도에 전파된 시기는 가락국의 건국(서기 42년)보다 훨씬 이후라고 합니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에 불교가 우리나라 들어온 때를 고구려 AD 372년, 백제418, 신라462, 가야 452이라고 밝혔습니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AD 67입니다. 그 영향으로 구구려에는 372년, 백제는 384년에 전파되었습니다.
신라에는 418 년(신라 눌지왕 2년)에 고구려의 스님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하려 했으나 신라왕가에서
반대하여 3년간 숨어 지내다 끝내 허락받고 흥륜사를 지으며 불교를 전파하였으나 신라 사람들의 미움을 받고 죽었습니다.
가야는 AD 452년 (8대 질지왕 2년) 왕후사를 세웠습니다. 그후 AD 528년 신라는 이차돈이 순교함으로 불교를 승인합니다.
연대를 보면 중국에서 부터 불교가 들어오는 시간 순서가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올 때 상당한 저항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 저항을 과연 어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했을까요? 감히 법흥왕이 불교를 믿고 싶었는데도
신하들왜 일제히 반대를 했을까요? 단순한 미신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한반도는 불교가 들어오기 전, 이미 기독교가 뿌리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5. 경북 영주의 도마상
1) 경북 영주에는 도마의 상도 발견되었습니다.
이것을 처음 발견한 분은 당시 서울관악고등학교 역사교사였습니다.
이분은 당시 순복음교회집사님이셨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기도 중에
경북 영주 이곳에 가보라는 음성을 주셨다고 합니다.
순종하여 가보니 막상 이끼와 숲으로 뒤덮힌 바위덩어리였답니다.
아무런 무속행위가 없었으니 덩쿨에 묻혀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과 함께 청소를 했답니다. 유적 청소는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대나무와 붓을 가지고 하나하나 청소하기 시작했답니다.
맨 위에 오른쪽에 청소하다보니 맨 오른 쪽에 히브리글자 네 자가 보인 것입니다.
[타우멤] = 바로 [도마]입니다.
히브리어 글자를 가장 먼저 학술화 한 분이 이장식 박사입니다.
이 분은 도마연구를 위해서 영국 멘체스터 대학에서 1년간, 미국 예일대에서 1년간 교환교수로 갔었고
한국에 돌아와서 [아시아 고대기독교회사]란 책을 내고
도마상의 [타우멤]이 도마란 사실을 학계에 공식 보고하였습니다.
도마상의 왼쪽 밑을 보면 [지전행]이라는 한자가 씌여져있습니다.
한자에는 여러 서체가 있습니다.
갑골문이 있고, 전서, 해서, 초서, 예서체가 있는데
이 서체는 예서체입니다. 예서체는 중국 한나라시대(BC 206년~AD 220년)에 사용한 것이라
불교가 들어오기 전의 석상임을 입증합니다. 또한 가야 건국이 바로 중국 한나라시대입니다.
그리고 불상에는 발가락이 이렇게 묘사된 것이 아무데도 없습니다.
유일하게 발가락이 선명히 묘사된 것은 바로 샌들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불교계에서는 이런 기독교계의 주장이 일자 현재 그곳에 [마애보살입상]이라는 팻말을 갖다 붙여 놨습니다.
원래 미륵불상이라고 했는데 한 동네에 미륵불은 두 개가 있을 수 없다는 원칙에 따라
도마상은 방치된(?) 미륵상이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덩쿨에 묻혀서 고스란히 잘 보존되었던 것입니다.
혹자는 도마가 왜 십계명에서 금한 형상을 만들었을까란 의문을 제기합니다.
아마도 도마가 쓴 '지전행'이란 글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지전행이란 것은 '땅 끝까지 다닌 사람'이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행1:8 명령을 따라 땅끝까지 이르러 주의 복음을 정말 땅 끝까지 전한 사도 도마의 고백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도마는 40년간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며 주로 강과 바다쪽으로만 다녔습니다.
유브라데스, 인더스 강, ...남인도에도 가보면 사도 도마가 가장 오래 산 곳은 수로가 많은 케롤라지역입니다.
그 곳에는 사도 도마가 세운 7개의 교회가 지금도 있습니다.
AD 70년 예루살렘 멸망후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들은 콜로세움 경기장을 지었습니다.
도마는 왕궁건축기술자였습니다. 에뎃사와 북인도에서 선교 하며 군다포러스 왕궁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다가 실크로드의 땅 끝인 한국의 낙동강 지역을 선교하게 되었습니다(가락국기에 기록된 연대 AD 42년).
AD 48년에 김수로왕과 허황옥을 중매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AD 50년에 예루살렘 사도회의에 참석합니다(서양역사 연대).
AD 52년 인도의 서남부 케랄라주에서 선교하다가(연도역사에 기록된 연대),
AD 72년 인도의 첸나이에서 창에 찔려 순교합니다.
이렇게 도마의 일생은 한국과 서양과 인도에 기록된 연사적 연대가 한 사람의 이력서처럼 정확히 일치합니다.
특히 경북 영주의 지형을 보면, 영주는 지금으로서는 제일 촌 이지만
세계적인 해상 실크로드와 육로의 실크로드가 만나는 맨 마지막 지점입니다(형상강 지구대).
그리고 도마상의 머리가 없습니다.
정학봉교수의 책에 의하면 사람들이 머리를 인근 제변으로 옮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그 얼굴을 보니 한국사람이 아니라 유대인의 골격과 같다고 보고합니다.
(일제시대 때 많은 불상의 목이 훼손됐습니다. 경주에도 와보시면 불상 대부분이 목이 없습니다)
신기한 일은 경북의 기독교율이 8%인데 영주는 30%입니다.
2) 나뭇결 무늬 유리잔(황남대총남분, 신라)
대릉원 황남대분에서 발견된 것으로 이스라엘 제로 판명이 났습니다.
현재 김해박물관에는 굉장히 수많은 성찬기(성찬식을 행하는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가야에는 그 흔한 불상 하나 없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기독교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3) 쌍어문 = 이게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김수로왕능 입구 현판입니다. 당시 백제,신라,고구려에는 이런 국기 같은 마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독 가야에서만은 이런 그림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수많은 추측의 자료들이 제시되었습니다.
현재 김수로왕능 입구의 현판에 걸린 그림은 위에 있는 사진입니다.
그러나 저렇게 바뀌기 전에 원래 있던 모양은 아래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은 김해박물관 옛날 홍보자료(브로슈어)에도 실려 있습니다.
나무 목판이다보니 보수를 하면서 저렇게 원형과 판이하게 다르게 변질돼 버렸습니다.
불교계에서 마치 석탑처럼 보이게 둔갑시켜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는 떡과 물고기를 입으로 먹는 모습입니다.
313년까지는 떡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오병이어)가 기독교의 상징이었습니다.
313년 이후부터 십자가로 바뀌었습니다.
이 쌍어문의 이 그림은 바로 오병이어를 먹는 모습입니다.
빨간 점들은 유월절 양의 피를 의미하는 것이고,
입 모양에 떡물고기 두마리와 떡을 두었냐하면 먹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병이어는 먹는 것임을 합니다.
물고기의 등지느리미 형태는 이스라엘의 타부가(가버나움)에 있는 오병이어 물고기의 모양과 일치합니다.
이 쌍어문에 대한 연구는 김병모박사가 40년을 연구하여 보고서를 냈습니다.
그는 어떤 쌍어신앙을 가진 무리들이 이스라엘에서부터 인도~ 한국~ 일본까지 갔다는 보고를 학계에 냈습니다.
김병모박사에 의하면 이스라엘에서 시작된 쌍어문의 흔적들은 저 루트를 지나는 나라들 마다 다양하게나타나 있습니다.
* 김수로왕비 허황옥(쌍어의 비밀 : 김병모, 조선일보사. 1994)참고
*김병모박사는 이스라엘에서 발견된 쌍어그림이 이 루트를 따라 1세기에 일본까지 왔음을 밝혀주었습니다.
그러나 김병모 박사는 이 쌍어 문양이 기원전 8세기에도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보다시피 물고기들과는 페르시아의 다곤신(오안네스)는 차원이 다릅니다.
결국 김병모박사가 주장한 '쌍어신앙'이란 말은 사실은 오병이어, 즉 기독교의 표식입니다.
결국 바울이 로마를 찍고 스페인(서바나) 서쪽 끝으로~
동쪽으로는 가장 의심많다고 타박했던 도마가
제일 정확하게 동방의 끝까지 복음들고 와 주었습니다
(행1:8은 하나님 말씀입니다. 사람은 못 이루나 하나님은 이루실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를 잇지 못하고 고려 불교에 완전히 먹혀버렸습니다.
기껏 동짓날 팥죽이나 쑤어 뿌리고 먹는 정도~
북어 두 마리 묶어서 액땜하는 미신 정도로 전락해버렸네요~
그러니 더이상 선한 이순신 장군이 복음을 못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지옥간단말이냐는 철딱서니 없는 소리는 이제 그만하고
이제 우리들 차례입니다. GoGo~
참고로....'게쉬히테'란 단어를 역사교과서에서 보셨을 겁니다.
사실로서의역사와 기록으로서의역사가는 다릅니다.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역사의 승자가 사실로서의 역사중에서 무엇을 기록에 남길까 결정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일연스님의 넓은 아량으로 남겨준 자료만 해도 우리가 가진 복음에 대한 전래 상식은 틀린 것입니다.
김해에서는 이 모든 유적들은 불교의 것이라며 불교로 옷입혀버렸습니다.
유교도 덩달아 이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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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병천카페 [성령전인치유목회] 원문보기▶ 글쓴이 : 이병천목사
첫댓글 신라고분에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만들어진 유리제품이 발견되었습니다.
신라초기부터 중동과 교역이 있을 것으로 짐작하면 기독교가 들어왔다는 것은 전면 부인할 수 없습니다.
깊이 연구할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