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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과 8월의 여름 동안에는 지속적인 가뭄 현상으로 이해 지구상에서 브르타뉴와 더불어 하계 강우량이 연간 최대치를 기록하지 않는 유일한 지역에 해당한다.
지진과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발칸 반도를 위협했다. 실제로 1354년에는 이러한 위험으로 인해ㅑ 갈리폴리의 방위체제가 무너지고 오스만투르크제국이 유럽에 쁘리내릴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기원전 1700년경 이집트는 힉소스족과 대면하게 되는데, 그들은 기원전 1560년경 이집트가 다시 통일을 이룰 때까지 그곳을 다스린다. 람세스 2세가 통치하는 새 왕국(기원전 1290~24)이 출범하고 기원전 1250년경에는 헤브라이인이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팔레스타인에 다다른다.
크레타 섬의 문명은 기원전 1450년경 중대한 변화를 맞는다. 크레타의 궁전들 대부분이 파괴되는데...확실한 것은 그리스로부터 새로운 인구가 유입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바로 미케네인이다.
트로이는 기원전 12세기의 혼란기에 발칸 반도에서 쫓겨 온 미케니인들이 은둔 장소로 이용한 소박한 부락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미케네인들은...기원전 15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크노소스 또는 카니아의 크레타 궁전 양식을 도입하게 된다.
기원전 13세기부터 미케네 지역은 잇따른 파괴로 인해 궁정체제가 붕괴되고 문명이 사라지게 되었다.
사울(재위 기원전 1030~10)의 왕위를 뒤이어 다윗(재위 기원전 1010~970)과 솔로몬(재위 기원전 970~31)이 계승했다.
솔로몬이 티루스의 히람 왕으로 하여금 무장 함대를 만들고 지휘하도록 한 것으로 전해진다.이 함대는...에스파냐의 타르테소스일 가능성이 높은 타르시스로 항해했다.
기원전 2000년경 시돈은 타니트 여신의 요람이자 이웃 도시인 사렙다와 함께 페니키아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다. ...티루스는 멜카르트, 아스타르트와 바알 신을 숭배하는 중심지이자 자주색 염료의 산지로서, 베이루트에서 70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해 있었다. 또한 시돈으로 통하는 중계지이자 기원전 1000년 초기에 페니키아인들의 활동을 감독했던 곳이기도 하다.
시돈은 기원전 677년에 멸망하고, 티루스는 기원전 671년에 아시리아 제국에 포위당한다. 아시리아는 이집트도 공격했는데, 특히 아슈르바니팔 왕이 집권 중이던 기원전 663년 테베를 장악하고 프삼메티쿠스 1세를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사이스의 파라오로 등극시킨다. 프삼메티쿠스 1세는 아시리아가 점차 세력을 키워가는 바빌로니아에 대항하는 사이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확립한다. 이집트는 지중해로 점차 개방정책을 펴나간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나우크라티스(나일강 삼각주 서쪽에 있었던 그리스인의 식민도시)에 거주하며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기원전 524년에는 티루스가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중에 넘어간다.
에트루리아는(의)...벼락 같은 자연 현상이나 동물 간(제물의 내장)의 상태 등의 징조를 보고 점을 치는 것 같은 풍습들이 (로마에) 그대로 전해졌다.
해상교역은 초기부터 두 계절 동안 활발히 이루어졌다. 첫 번째 시기는 그리스인들이 나쁜 계절을 뜻하는 '케이몬'이라 불렀던 11월부터 3월까지다. 다음은 좋은 계절을 뜻하는 '테로스'로, 3월부터 11월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아테나는 기원전 6세기부터 아티카의 라우리온 광산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청동을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주석이 부족했다. 중요한 주석 광산은 대서양 연안에 퍼져 있었는데, 페니키아인이 지브롤터 해협에 상주하면서 이 길목을 철버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리스인에게 마실리아(
마르세유)와 아가드는 매우 중요한 도시였다. 두 도시는 가론 강 계곡이나 론 강 계곡의 육로를 통해 나오는 주석을 실어 나르는 입구가 되었다.
기원전 7세기에, 이미 리디아왕국에서 통용되고 있던 각인(刻印) 화폐가 교환수단으로 도입되었다.
기원전 540년에 발발한 알레리아해전은 지중해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전투다. 그런데 그 결말은 불분명하다.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함대가 전멸당한 포카이아인은 알레리아를 떠나 포세이도니아 근처의 엘레아에 정착한다. 에투루리아인과 카르타고인의 유대관계는 기원전 509년 카르타고와 당시 에트루리아의 도시였던 로마 간에 체결된 협정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살라미스 전투 : 480년 9월 28일, 9월 29일
기원전 448년 칼리아스라는 아테네인이 페르시아와 평화협약을 체결했고, 그 결과 페르시아 선단의 에게 해 출입이 금지되었다. 기원전 446~45년에는 스파르타와 30년 평화협약이 타결되면서 아테네의에게 해 주도권이 인정받게 되었다. 이로써 에게 해가 '아티카 해'가 될수 있는 조건들이 충족되었다.
이 시기에는 해상무역이 절정에 이르렀는데, 아테네와 연결되는 긴 장벽의 울타리로 둘러쳐진 피레우스(피레에프스의 그리스식 이름) 항이 교역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코린토스 또한 교역활동에 기여했다. 그곳에는 선박을 육상으로 옮겨 코린트 지협을 통과하도록 해주는 '디올코스'라는 포장도로가 있었다. 이 도시는 지중해 서쪽과의 해상무역을 대부분 통제했으며, 각종 물품들이 지중해 일대에 재분배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했다. 이러한 방식의 교역을 통해 자신들의 화폐가 지중해에 널리 유통되ㅏ고 있었던 에기나 섬이 큰 부를 축적했다. 그러자 에기나를 질투한 아테네는 그 섬에 대한 자신들의 감독권을 강요하고, 마침내 기원전 431년 그곳으로부터 주민들을 추방하기에 이르렀다. 아테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에게 해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아테네 시민권을 지닌 사람들을 동맹 도시국가들 내에 정착하도록 했다. 이들이 곧 클레루키인이다. 기원전 443년 페리클레스가 남부 이탈리아의 옛 시바리스 근처에 범그리스적인 식민지 투리오이를 세운...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스파르타가 주도한 이 전쟁은 아테네가 패배하고 피레우스 항과 성벽이 파괴됨으로써 종결되었다.
시라쿠사가 다른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에게 압력을 행사하자 그 도시국가들은 아테네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러한 지원 요청으로 인해 기원전 415년과 413년에 알키비아데스가 이끄는 원정대가 파견되었다. 그러나 함대가 격파되고 4만 명에 가까운 아테네인이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이는 아테네 역사상 가장 처참한 패배였다. 그러나 승리한 시라쿠사도 카르타고의 강력한 압력을 막아낼 수는 없었다.
그들은(스파르타) 펠르시아의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401년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국왕의 경쟁자를 지원하기 위해 그리스 용병들로 구성된 군대를 파견했다.
기원전 386년 소아시아의 도시국가들을 페르시아에 재통합시키려 했던 상황을 '왕의 평화'라 하는데 이를 통제하려는 페르시아...
시칠리아...기원전 405년부터 섬을 지배해온 디오니시오스는 카르타고를 할리코스(플라타니) 강 너머 서쪽지역으로 내몬 세 차례의 전쟁 이후 권력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남부 이탈리아와 아드리아 해까지 진입해서 일리리아(지금의 달마티아 일대)의 왕과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이리하여 그는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연방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사망한 후 내부 분쟁으로 인해 국가는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332년에 그는(알렉산드로스) 페니키아계 도시국가인 시돈과 티루슷 되찾았고,...
이 모든 국가(발칸반도 북부의)의 주민들은 중앙아시아로부터 침입해 들어오는 켈트족의 위협에 시달렸는데, 켈트족은 기원전 279년에 델포이까지 진출하게 된다.
기원전 3세기 이후, 근동의 지중해는...공용어로 사용된 그리스어로 인해 그리고 모든 왕국들이 채택한 정치제도로 인해, 일종의 문화적 단일성 즉 '코이네'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대의 도시들은 예전의 자치권을 대부분 상실했지만 (아테네, 코린토스, 에보이아의 칼키스, 테살리아의 테메트리아스에는 마케도니아의 군대가 주둔했다) 제도와 기관들으 그대로 유지되었다.
(로마가) 카르타고와 기원전 509년에 맺었던 조약들은 기원전 348년에 갱신되었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264년 카르타고의 공격을 받고 있던 메시나 주민들이 구원을 요청해오자 주저하지 않고 바로 응답했다.
기원전 241~37년에 일어난 용병들의 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 쪽으로 눈을 돌린다.
로마는 델로스를 자유무역항으로 만들어서 에게 해 경제활동의 중심축으로 삼았는데, 이는 로도스에는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전리품이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것은 로마가 그동안 시민들이 나부해온 개인 세금을 폐지한 것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마케도니아 합병 이후에 로마 시인의 개인 세금이 면제되었다.
헬레니즘 시대에 수그러들었던 약탈전은 기원전 2세기경에 그리스가 쇠퇴하고, 해적 무역의 자원이 되는 노예들을 수중에 넣는 데 혈안이 된 로마의 야심이 표출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 그러나교역을 마비시키는 지중해의 불안정한 상태가 가속화하자 로마가 직접 문제 해결에 나섰다. 기원전 68~67년 로마에서 파견된 폼페이우스가 지중해 일대를 완전히 소탕한 이후...
당시 노예의 수는 전체 인구의 30~50퍼센트에 육박했다. 노예 인구는 특히 시칠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에 집중되었다.
바빌론 탈출 이후 유대인들은 사원을 재건축했다. 그러나 유대 공동체 속에서 사회적 위기를 겪은 그들은 유대 지역 밖, 이를테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나 시리아의 안티오크에 정착하는 것을 더 선호했다.
기원전 27년 1월 16일,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줌으로써....
지방조직은 기원전 27년 1월 23일에 이뤄진 행정권 분배를 토대로 구성되ㅏ었다.
202년이 되자, 카라칼라 칙령에 따라 로마 권역에 속하는 모든 자유민들에게 로마 시민권이 인정되었다.
238년에 고트족은 흑해 연안의 도시 올비아를 점령했고, 이후 도나우 강의 전구역을 위협했다. 고트족의 진군을 저지하려던 데키우스 황제는 싸움에 패하고 251년에 살해당했다.
260년, 전투에 패한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에데사 근방에서 샤푸르 1세의 포로가 되었다.
301년 막시미아누스의 칙령을 통해 가격정찰제를 실시하고자 했는데, 이는 경제 분야에서 역사상 최초로 시도된 가격조치였다.
33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고트족을 로마제국의 연방으로 인정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그러나 고트족과의 협력 관계는 364년에 깨졌다.
트라야누스 시대의 로마제국보다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계승자들이 이끄는 동로마제국은 훨씬 더 강력한 해양 지배권을 소유했다.
410년, 알라리크가 로마를 점령하면서 지중해 세계 전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다.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의 수많은 주민들이 배를 타고 동지중해로 향하여 그곳의 성지 주변으로 피신했다.
동방의 주요 대도시들이 몰락하고 교역이 쇠퇴하며 총체적 위기에 직면한 연계 도시들이 취약해짐으로써 도시들의 중요성이 약화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농촌지역의 소득이 증가했기 때문이다.
(8세기 중엽의) 페르시아 만, 메소파타미아, 아르메니아를 거쳐 흑해로 이르는 이동로가 융성해진 반명, 홍해를 통과해 시리아와 이집트에 이르는 육로는 쇠퇴하게 된다.
카이르완의 아글라브왕조와 코르도바의 후 우마이야왕조는 정복지들에게서 약탈을 일삼고 해상 공격을 자행함으로써 지중해에서 이슬람의 제2차 공세의 원인을 제공한다.
904년에 트리폴리의 레오의 지휘에 따라 크레타 , 이집트 , 비잔틴의 선박으로 구성된 함대가 비잔틴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카에 침입하여 약탈하고 그곳 거주민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이 전투를 통해 섬들을 장악함으로써 중동, 시칠리아와 에스파냐 사이의 북쪽 해로가 다시 열리고 짖중해 동쪽과 서쪽 간의 계절별 수송로에 대한 소유권이 그들에게 넘어가게 된다.
1스타드는 600피트 즉 180미터에 해당한다.
1플레트르(약 30미터)
전
누미디아의 마시니사 왕
연대기
325년 니케아에서 세계주교회의가 열림.
378년 발렌스 황제, 아드리아노플에서 패배.
395년 동방(지중해 연안과 동유럽의 나라들)과 서방 간 지중해 분할.
410년 알라리크 왕이 이끄는 서고트족의 로마 정복과 약탈.
455년 가이세릭, 카르타고 정복.
476년 서로마제국 멸망.
493년 서고트족, 이탈리아 점령.
533~534년 벨리사리우스 지휘 아래 로마군은 북아프리카 지역의 반달 왕국을 멸망시키다. 이 지역을
다시 지배한 로마는 가톨릭 교회를 부활시킨다.
562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사산 제국 페르시아 왕 호스로우 1세와 평화협정을 맺다.
626년 아바르족과 페르시아, 콘스탄티노플 공략.
678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아랍 함대의 공격이 실패하다. 일종의 액화 화약인 '그리스의 불'로 아랍인
들을 격퇴하다.
717년 아랍인들이 콘스탄티노플 2차 공격을 감행하나 실패하다. 레오 3세(재위 714~741년)가 즉위하
다.
751년 롬바르드족이 비잔티움의 라벤나 주교구를 정복하다.
1055년 셀주크투르크족, 아랍 점령.
1071년 비잔틴 황제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투르크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패배하다. 이후 셀주크투르
크는 아나톨리아 지방 대부분을 정복하다.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끄는 노르만 군대가 바리를 정복함으
로, 이탈리아의 비잔티움 영토는 모두 사라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