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대사회 경제사』중에서 (저자: 전덕재)
고조선 부여의 지배구조
신라에서도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개별가호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동일 액수의 부세를 부과하는 세제를 운영했음을 밝힌 다음,...
나말여초 사회변동의 결과 인호세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아지고 토지면적에 따라 전조를 부과하는 토지세의 비중이 높아졌다는 사실도 파악할 수 있었다.
본래 한나라의 하호는 소작농(=빈농)을 가리키는 개념이었다.
부여의 하호는 노복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제가들이 전투할 때 군량을 날라다 공급하였다. 읍락에는 하호에 대응되는 호민이 있었다.
고구려에서 5부의 주민들도 하호라고 불렀다는 증거가 발견된다.
부민들도 하호라고 불렀음을 입증하는 증거다.
한나라 때 소1마리 값이 속(粟) 100석에 상당했다는 점은 참고할 만하다. 중국의 이런 사례는 소2마리 이상을 보유한 계층이 많지 않았음을 짐작케 해준다.
광개토왕릉 비문에 '부족지자(富足之者)'란 표현이 보이는데, 이것은 5세기 초반에 고구려 전역에 부호농민들이 적지 않았음을 전해주는 증거 자료다.
매구여는 매구루라 불린 옛 북옥저지역을 가리킨다.
돈성(敦城)은 한때 신성(新城)이라고 불린 두만강 유역의 책성(柵城)을 말한다. 비리성(碑利城)은 함경남도 안변 일대로, 우성(于城)은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으나, 함경도 동해안 지역 어디인가로 추정된다.
고구려본기에 서천왕 7년(276)과 19년(288)에 왕이 신성에 행차했다고 나온다. 고구려본기에 고국원왕 5년(335)에 신성을 쌓았다는기록이 나와서...기록에 335년에 쌓았다고 전하는 신성은 서천왕이 행차한 신성과 그 위치가 다르다. 후자는 고구려 혼하 연안을 차지하고 새로 쌓은 성이데...현재 중국 무순시 혼하 북안의 고이산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신성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광개토왕릉비에서 동해안 지역의 주민들을 국가의 공민을 의미하는 구민(舊民)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대부터 당대까지의 중국 수취제도를 살펴볼 때, 한나라를 제외하고는 모든 가구원을 대상으로 세를 부과한 경우는 발견되지 않는 바,...
(고구려는) 가호 단위로 부세를 부과했음을 전제로 할때 합리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고구려에서의) 조(租)의 실체는...인세 외에 가호 단위로 부과한 부가세였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고구려에서는) 가호의 경제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가호마다 곡 5석을 조로 균일하게 부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