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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정부의 조기유학 프로젝트 유미유동(첸강 후징초,시니북스,2005) 중에서
청나라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지방 관원과 장교들을 동원해 사士, 백성, 일반 군인에게 강희제의 16조 성유를 강의하도록 제도화 했다.
동치 광서 연간에는 보름에 한 번씩 성유광훈이 강의 되었다.
청나라 규정에 의하면 과거시험의 최종과정 지정된 '성유' 조목을 적는 것이었데, 십여 글자 이상 틀리
면 불합격이 되었다.
청나라 시기에 성유광훈은 사서오경보다도 더욱 중시되었었다.
1847년 1월 5일 룽홍은 브라운 목사를 따라 미국에 가게 된다.
미국에서 돌아온 룽홍은 1860년에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인간을 만났다.
1855년 일본의 개명지식은 증기선으로 바다를 항핸 기술을 배우기 시작한다.
1858년 일본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덜란드 등 5개국과 통상 조약을 맺었다.
1859년 일본 지식인은 증기선으로 태평양을 횡단하기로 결정한다.
1861년 일본 막부는 네덜란드에 사람을 파견하여 해군학을 배우도록 했다.
1862년 동문관이 북경에 설립된다.
1862년 세 개의 돛 대가 달린 '치토세마루'라는 배가 청淸 황포강으로 들어왔다. 일본인이 쇄구글 포기한 뒤 처음 중국을 찾아온 것이다.
1863년 가을 룽홍은 쩡꿔판을 만났다.
1864년 광주에도 동문관이 설립된다.
쭤쭝탕과 선빠오전이 세운 복건 선정학당은 중국 최초의 해군학교이다.
1867년 복주 남쪽 정광사에 새로운 학교가 설립됐다.
동치제의 스승이었던 대학사 위런은 동문관에 정식관원을 불러 천문학과 산학을 배우도록 하는 것에 반대했다.
서방국가에 파견된 첫 번째 중국 외교관은 미국인이었다. 그의 이름은 앤스 버링에임(Anson Burlingame), 중국명은 푸안천 이다.
1869년 일본의 서구 유학생은 50명 정도 였다. 1870년에는 150명 , 그리고 1873년에는 천명을 넘어섰
다.
1870년 천진교안 발생
1871년 일본은 이와쿠라 도모니를 수반으로 하는 대규모 정부대표단을 조직해 세ㅖ 각국을 방문하도록 했다. 이들을 따라 50여명의 학생들도 서구 각국으로 보내졌다. 유학생들 가운데는 아주 어린 아이도 있었고, 여자아이도 5명이나 있었다. 이들이 출발하기 전, 메이지 천황은 몸소 9살의 쯔다 우메코를 접견하여 열심히 배우라고 격려했다.
1871년 8월 5일 쩡꿔판과 리훙장은 동치제에게 어린이들의 유학에 대한 상소를 올린다.
이무렵만 해도 미국은 오늘날 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진 나라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지원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미국으로 유학간 유동 120명의 출신지역은 광둥이 82명, 강소 22명, 절강 8명, 안휘 3명, 복건 2명, 산동 1명 이었다.
전체 유학생 가운데 31명의 아버지가 바로 양무와 관련된 직업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팔기, 고관 의 자제는 단 사람도 없었다.
룽홍은 유학생들을 이끄는 부위원이었다.
청나라 정부는 미국에서 한 달에 네번씩 방, 허, 묘, 성 등의 날이 되면 유동들에게 성유광훈을 강의하도
록 규정하였다. (방은 전갈좌, 허는 물병좌와 페가수스좌, 묘는 황소좌, 성은 히드라좌 이다.)
유동들이 다녔던 하트포트의 공립고등학교의 교실에는 미국의 대문호 마크 트웨인의 딸 두명도 있었다.
1874년 룽홍은 조정의 위탁을 받아 페루의 중국인 노동자 문제를 조사하러 갔다.
도중에 귀국길에 오른 유동이 있었는데 변발을 자르고 서양옷을 입자 리훙장은 "정신이 썼은 놈!"이라고
나무라 하였다.
1876년 필라델피에서 열린 미국 건국 100주년 세게 박람회가 열렸는데...이중 일본 과 중국 관련 사항을
보면 일본은 참가대표단이 284명이었고 중국은 80명이었다. 일본측 전시 부스는 17831평망미터였고, 중국은 6628평방미터였다. 그리고 당시 37개국 차가국 가운데 11개 나라는 종합관 이외에 별도로 독립전시관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도 그중 한 나라였다. 일본은 7112종의 전시품을, 중국은 477종을 보내왔다. 일본은 133개 전시품이 우수상을 받았었고 중국은 35개 전시품이 우수상을 받았다.
120명의 유동중 50여명이 대학에 들어갔었는데 그 학교를 보면 20여명은 예일대학에 진학했고 메사추세츠 대학에는 8명이 런셀라러공과대학에는 5명 컬럼비아 대학은 3명, 하버드 대학은 2명등등이다.
리훙장은 유동들이 서학을 익히는 데 진보가 있을수록 "중학에 소홀하게 될지" 모른다고 우려하면서, 유동들에게 이것저것 두루 섭력하도록 대버려두지 말고 국가가 시급하게 필요로 하는 기능을 지중적으로 익히게 하라고 요구했다.
리훙장은 본래 유동들을 군사학교나 해군학교에 입학시킬 생각이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는 뜻밖에 청 조정의 요청을 거부했다. 일본 유학생들에게는 군사학교의 진학을 허가했던 것과는 달리 청 유동들의 입학은 불허했던 것이다.
1880년 12월 17일 강남도 감찰어서였던 리쓰삔李士彬이 상소를 올려 유학에 관해 부정적인 상소를 올린다.
유동들은 소환된 뒤, 94명 가운데 41명이 북양해군, 광동해군, 선정학당, 강남제조국, 대고어뢰국등 해군 계통으로 배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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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6월 양무파의 조선造船 계획이 대학사 쑹진宋晉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1872년 이해에 리훙장은 운선초상국을 세웠다. 그능 1878년에는 개평開平 탄광을 열었고, 1879년에는 중국 최초의 전신선을 설치했으며, 1881년 중국인의 힘으로 처음 철도를 건설하였다.
해상 방위 대토론이 진행되던 1875년 동치제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리훙장은 세번째로 황 태후(자희)를 알현하면서 탄광채굴, 철도정비, 학교건설, 대만개발 등을 비롯해 외교에 힘쓸 것을 건의했다.
1877년 3월 31, 汽船 제안濟安호가 복주를 신속히 빠져나갔다. 옌푸 등 복주 선정학당의 학생들을 태우고 영국으로 가는 것이었다. 이들 학생은 런던의 그리니티로얄해군학교에 입학했다.
1879년 리훙장은 천진 대고 앞에서 시내 자죽림의 총독아문까지 단거리 전보선을 깔았다.
1880년 가을 청은 러시아측에 강점당했던 이리를 돌려받기 위해 협상문제가 시급하였다.
1880년 조정은 마침내 천진-상해간 전보선 설치에 대한 리훙장의 건의를 비준했다.
1880년 설립된 천진 전보학당에는 미국에서 돌아온 량뚠옌, 황카이자 등등의 1차 유동들이 배치되었다.
1881년 청조는 초용超勇 양위楊威호를 유럽에 구매하였다. 이와 동시에 리훙장은 유럽으로 전보를 보내 앞으로 제조할 두 척의 중국 군함에 '정원定遠'과 '진원鎭遠'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이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안팎은 경악했다.
1884년 7월 15일부터 19일 사이에 5척의 프랑스 군함이 마미강에 도착했다.
8월 중순, 나미 나성탑羅星塔 뷰군우ㅏ 만겅 수면 위로 철갑함 2척을 포함한 8척의 프랑스 군함과 11척의 중국 목제 군함이 빽빽히 들어섰다.
언덕 너머에서는 가끔씩 총성이 울렸는데, 천지신명을 믿는 총독이 '요사스런 기운'을 흩어버리기 위해서 병사를 시켜 하늘을 쏘아대는 것이었다.
8월 23일, 전쟁이 터졌다.
양무호에 타고 있던 룽샹첸은 프랑스 군함 브왈다호에 돛대에 걸려 있던 신호기가 갑자기 내려오는 것을 보고는 즉각 함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다. 그러나 함장은 프랑스 전함에 장교가 죽어 조기로 애도하는 것이겠거니 여겼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주의하지 않았다. 그 순간 포탄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그러자 양조오난이 곧장 배 후미의 대포를 발사하여 첫 발에 브왈다호의 함교를 적중시켰다. 그 자리에서 수로 안내인과 선원 다섯이 폭사했다. 하마터면 프랑스함 사령관 쿠르베(Anatole Courbet)도 죽을 뻔했다. 이때 프랑스 어뢰정이 급히 돌진하더니 양무호에 어뢰 한 발을 쏘았다. 함장은 신속히 배를 후퇴하도록 지시했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전쟁이 시작된지 27초만의 일이었다. 복건해군의 기함 양무호는 우측 뱃전에 어뢰를 맞고 침몰했다.
진위호는 프랑스 브왈다호와 트리스탕호의 함포 사격을 받고, 터롱팡호 앞을 지나쳐 후퇴하다가 다시 적함의 집중 포화를 받아 선체가 모두 불길에 휩싸였다. 그리고 프랑스 어회정이 어뢰정을 쏘아대며 불길 속으로 돌진했다. 결국 진위호는 가라앉았다.
전쟁이 진행된 지 30분도 안 되어 복건해군은 전멸했다. 신정학당과 조선공장도 폭파당했다. 군함과 학교,공장은 둘째치고 신식교욱을 받은 인재들이 전사했다.
1886년 정원호와 진원호 일본 방문시 중국 병사와 일본 경찰 사이에 충돌이 빚어져 살인으로까지 번진 일이 발생. 이 해 일본은 1700만 엔의 해군공채를 발행하여 '이쯔구시마嚴島', '마쯔시마松島', '하시다데橋立' 등 세 척의 배를 건조하기로 결정했다.
1886년 리훙장은 황제의 생부인 순친왕을 위해 전무후무한 해군 대사열을 실기했다. 광서제가 친정하고 국가권력을 장악하는 것은 황제의 생부 순친왕도 은근히 바라는 일이었다.
1887년 말 우럽에 주문한 치원, 정원, 경원, 내원 등 네 척의 순양함이 도착하여 해상 방위에 배치되었다.
1889년, 섬서, 감숙, 호남 세 곳을 제외하고 전국 각 성에는 북경까지 통하는 전보선이 개설되었다.
1891년 7월 5일, 북양해군 소속의 정원, 진원, 치원致遠, 정원靖遠, 경원經遠, 내원來遠 등 군함 6척이 일본 요코하마 항에 들어섰다.
당시 청나라 청부는(1891)는 2년 전부터 호부戶部의 건의로 외국에서 군사장비를 사들이는 일을 중단한 상태였다. 게다가 1891년 부터 청일전쟁이 발발하는 1894년 동안 북양해군은 한 척의 배도 증원하지 않았다. 또 1889년부터 1896년까지 국가에서 파견한 유학생도 단 한사람도 없었다.
일본은 '다카치오高千혜' '치요다千代田'등의 순양함을 건조한 뒤, 1892년에는 다시 영국으로부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순양함 '요시노吉野'를 사들였다.
1894년 초여름, 광동해군의 군함 '광갑廣甲'이 북상하고 있었다. 이들의 임무는 해마다 공물로 바치는 리쯔를 운반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리쯔를 천진으로 운반했을 때, 청과 일본의 전쟁이 터졌다.
일본의 전략은 전쟁을 육지에서 바다로 끌어낸 뒤, 청나라와 해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7월 23일 요시노,다니와浪速 아키쯔시마秋津洲등 초고속, 초속사를 자랑하는 일본 연합함대 제1유격대의 군함들이 섬 사이에 매목해 있었다. 사령관은 51세의 쯔보이 고조였다. 요시노의 함장 가와하라 요이치 다니와의 함장은 토코 헤이하치로 아키쯔시마의 함장은 카미무라 히고노조였다.
7월 25일 새벽, 일본해군은 제원,광을廣乙을 기습했다. 이때 제원호의 함장은 팡뽀첸方伯謙이었다.
30분 가령이 지나자, 중국이 자체 제작한 군함 광을호가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전쟁터에서 퇴출 당한 채 불길에 휩싸였다. 제원호는 세척의 일본 군함과 싸웠다. 요시노의 이물을 폭격하여 돛대와 도리를 부러뜨렸으며, 다시 우현에 포를 쏘아 철갑을 꿰뚫고 발전기를 파괴했다. 선원 13명이 죽고 40 여명이 부상당한 제원호는 센체에 큰 상처를 입은 채 여순항으로 회항했다.
9월 17일 압록강 근처 바다에서 청 일 두나라에서 저마다 12척의 군함이 맞붙었다. 중국은 정원, 진원 등을 투입했고, 대규모 대포도 일본보다 많이 장작하고 있었다. 일본은 항운과 사격 속도면에서 중국보다 앞서 있었다.
교전이 시작되자, 일본의 제1유격대(다카치오高千혜까지 포함되었다)가 곧장 맹렬한 속도로 벙커선 초용과 양위를 공격했다. 일본의 제1유격대는 초용, 양위를 향해 나지막히 대포를 직사했다. 중국 군함 두척은 반격하려 했지만 오히려 포탄에 맞아 불길에 휩싸였고, 초용호는 침몰했다. 양위호는 수심이 깊지 않은 바다로 빠져나와 불길을 잡았다. 하지만 공격을 받고 갑자기 자기 전쟁터랄 빠져나오던 제원호와 부딪쳐 침몰하게 된다. 청나라 군함도 일본 군함으로 파고들어, 일본 함대에서 비교적 항속이 느린 히에이比睿, 아키키赤城, 사이쿄우마루西京丸 등이 청나라 군함의 공격을 받았다.히에이는 포격을 심하게 당하자 짙은 연기를 내며 전력을 다해 청나라의 군함의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 중국 군함 내원,치원,광갑廣甲이 일본의 아카키를 향해 대포를 쏘아댔다. 아카키에서는 우렁찬 쇳소리의 군가가 흘러나왔는데, 그것은 바로 함장 사카모도 하치로타(阪元八郞太)가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부른 노래였다. 이때 정원호가 포문을 열더니, 아카키를 명중시켰고, 사카모토 하치로타도 숨졌다. 그 순간 중국 군함 평원平遠과 광평廣平이 일본군 사량관 가바야마 스케노리樺産資紀가 타고 있는 샤이쿄우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함포 사격이 시작되자 사이쿄우마루의 키가 굉음을 내며 부러졌다. 이에 바싹 접근한 청나라의 어뢰정들도 사이쿄우마를 향해 어뢰를 발사했다. 어뢰 하나가 사이쿄우마루의 밑 부분을 지나쳐 배 우측으로 빗겨났다. 일본에게는 무척 다행이었다.
항속 18노트를 유지하며 대형을 갖춘 일본의 제1유격대가 초용,양위를 침몰시킨 뒤, 다시 중국 함대를 포위하며 측면을 공격하다가 정면으로 정원호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요시노 등 네 척의 군함이 정원호에 바싹 다가섰다. 순간 , 청나라쪽 진영에서 갑자기 군함 한 척이 전속력으로 질주하여 정워호 앞으로 다가갔다. 치원호 였다. 하지만 오히려 치원호에게 불리해졌다. 일본 함포의 발사혹도가 청나라 보다 우수했기때문이다. 치원호가 포구 앞에 노출되자, 일본 군함을 연속적으로 대포를 쏘아 심한 ㄴ타격을 주었고, 끝내 흘수선 아래까지도 손상을 입게 했다. 일본 군함 요시노가 치원과의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치원호는 대포로 응수했고, 선체 앞머리로 요시노를 들이받으려 했다. 요시노는 재빨리 피하면서, 치원과 부딪히려는 찰나에 어외를 발사했다. 치원의 기관실이 폭발했고 배는 화염에 휩싸였다.이때 다른 청나라 군함 경원이 맹렬한 속도로 요시노를 향해 달려들었다.치원호는 침몰하게 된다. 일본 함대는 비 오듯 포탄을 퍼붓고, 경원호는 폭발하여 바다 밎으로 가라앉았다. 치원호가 침몰할 때, 일본 기함 마쯔시마도 청나라측의 포격에 맞아 선체에 실려 있던 화약이 폭발했다. 마쯔시마는 약 5도쯤 기울었고, 사상자가 백여 명이나 발생했다. 일본 함대 사령관은 급히 기함을 바꾸었다. 마쯔시마를 격중시킨 중국 군함은 진원이었다. 일본 함대가 진원을 계속 공격했지만 진원,정원은 건재했던 것이다. 이 두척의 배에는 유학경험이 있는 중국 해군의 군인들이 타고 있었다.
이 해전에서 중국은 군함 다섯 척이 침몰 당했지만, 일본은 군함 다섯 척이 심각한 손상을 입은 데 그쳤다.
일본군함이 위해를 공격할때 청나라 군대는 그것을 막기위해 군함 광병廣丙으로 보냈다. 하지만 결국 일본은 위해의 육지 포대를 점령했고, 그 즉시로 항구 내의 북양함대를 거세게 공격했다.
1895년 2월 21일 오후, 모든 무기를 떼어낸 북양해군의 연습한 강제康濟가 일본군의 묵인 아래 6구의 시신을 싣도 위해를 떠나 연태로 향했다. 시신은 일본 군에 맞서 항전한 군인들이었는데 띵루창丁汝昌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강제호가 항구를 떠나는 순간, 일본군도 깃발을 내린 채 조포弔砲를 울려주었다.
리훙장이 일본으로 강화를 위해 떠나기전 광서제가 그를 불렀다. 리훙장은 앞서 "땅을 할양하자는 논의는 삼가 받을 수 없습니다. 땅의 할양은 옳지 않습니다. 강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저는 곧장 돌아오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광서제가 결국 '할양'을 마음 먹고, 그에게 "토지를 상론하여 양보할 수 있는 권한"을 주자 어쩔 수 없이 사절의 사명을 받아들였다.
1895년 3월 24일 이토 히로부미와 담판을 한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리훙장은 일본 낭인 고야마 도미타로 小山豊太郞의 총격을 받았다. 이 소식이 해외에 알려지자 술렁이며 세계 여러나가가 일본을 비난했다. 일본은 열강이 간섭해올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신속하게 정전을 선포하고, 뒤이어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총격사건후 병상에 누워있던 리훙장은 조정에 전보를 쳤다. 그 내용은 중국은 일본이 받아내려는 엄청난 배상금을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되고, 일본이 할양받기를 원하는 동북지역도 절대로 할양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강화가 끝내 이루어 질 수 없다면 두 나라는 끝까지 싸울뿐이다로 하였다.
4월 5일 청조정의 훈령이 아직 전달되지 않았지만, 리훙장은 일본측에게 장문의 회답서를 보냈다. 그는 조선이 자주국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 이외에, 땅을 할양하는 것과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은 물론 통상 권리 이권을 인정하는 것에 대해 거부 했다.
4월 17일 청과 일본은 시모노세끼조약을 체결했다.
사실 리훙장의 주변에도 일찍부터 일본에 전혀 뒤지지 않을 정도로 서학을 배운 인재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중국의 서학 인재들은 19세기가 끝나갈 때까지 정치에 참여할수 없었고 정책 결정에 영향을 끼칠수도 없었다.
리훙장이 생애를 마감하기 전 며칠동안, 유동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막료로서 시종일관 그를 지켜주고 있었다. 바로 군함 정원호의 작전참모였던 우잉커였다. 그는 청일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운 공로로, 조정으로 부터 '바토르巴圖魯'(몽골어로 칸보다 세력이 약한 부족장을 말함)란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썩은 정치에 분개한 나머지 훈장과 군복의 계급장을 한데 싸서 바닷무레 던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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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들 가운데 신해혁명에 참가한 사람은 룽홍의 친적동생인 룽시차오 였다. 그는 흥중회의 기관지 중국일보신문사를 창간한 사람중 한명이었다.
(196년 6월, 조정은 정식으로 유학생 파견정책을 비준했다.)
무술정변이 발생한 1898년 9월 18일 저녁, 룽훙은 량치아오와 함께 북경 금정묘 숙소에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타들어가는 초조한 마음으로, 위안스카이를 설득하러 간 탄쓰퉁을 기다리고 있었다. 9월 19일, 동이 트자마자 광서제가 이미 곤경에 빠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형세는 극도로 악화되ㅏ었다. 룽훙은 미국 주중국공사를 찾아갔다. 광서제를 도와달라고 부탁하려던 것이었다.
룽싱차오의 부인은 홍콩의 유명한 꽌씨關氏집안의 아가씨였는데 꽌씨 집안은 쑨원의 오랜 친구였고, 룽싱차오는이 때문에 쑨원과 맹우가 되었다.
룽훙이 최초로 만났던 혁명파 인물은 흥중회를 이끄는 양취원,세쫜타이였다. 1900년 3월, 탄스퉁의 절짓한 벗이자 유신파 인사인 탕차이창의 부탁으로, 룽훙은 싱가포르에 가서 캉유웨이를 설득하여 그에게 흥중회와 합작하도록 권유했다. 4월에 룽훙은 다시 홍콩에서 양취윈,셰쫜타이 등을 만났고, 각파 개혁세력의 연합 가능성을 통론했다.
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북경이 전무후무한 혼란 속에 빠졌던 7월, 탕차이창 등 80여명은 상해 우원에서 회의를 열고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비적과 내통하고 천자의 조서를 위조하는 괴뢰정부는 인정하지 않는다. 의회(국회)를 조직한다. 룽훙은 국회 의장, 옌푸를 부회장으로 추천한다.
또한 이 회의는 양쯔강 유역에서 봉기를 일으켜 황실을 구하자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 봉기는 기밀이 누설되는 바람에 실패했다. 호광 총독 장즈뚱은 한구에서 탕차이창 등 10명을 체호, 사형에 처했다. 룽싱차오는 상해로 도망쳤다. 이때 쑨원이 막 상해로 돌아왔다.
1900년 9월 2일, 순원은 룽홍,룽싱차오와 함께 '고베고神戶號'를 타고 있었다.
1903년 봄 량치차오는 미국에 이르렀다. 그리고 하트포트에서 같은 처지에 있던 룽훙을 만났다.
량치차오가 미국에 왔을 때, 청 조정은 량청梁誠을 중국 주미국공사로 임명했다. 그가 공사를 취임하러 갈때 수행원이 있었던데 다섯명이 유동 이었다.
한편 자희태후는 서안으로 가면서 광서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그동안 변법을 주장했습니다.동치제 초년에 쩡꿔판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젋은이들을 해외로 유학보냈던 일이 그것이지요. 또 배를 만들고 기기를 제작하는 것도 지지했습니다. 바로 나라의 부강을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볍법하여 조상에게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저 일본인들처럼 복식을 바꾸고 역법을 고치는 일 따위는 결코 할 수 업습니다."
1901년 1월 29일, 자희태후는 광서제의 이름으로 조서를 반포했다. 다시 '변법' 을 제출한 것이다.
1901년 7월 5일, 자희태후는 조칙을 내려 외국 주재대신들에게 유학생을 세심하게 살펴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능력있는자는 귀국시키라고도 하였다.
1901년 9월 16일 다시 조칙을 내려 각 성에서 유학생을 외국으로 파견하도록 했다.
1904년 11월 16일 자희태후의 만수절을 맞아 특별사면령을 내렸는데 칸유웨이,량치차오를 제외한 무술정변 관련자들을 사면한것이다. 룽훙도 사면되었다.
1905년 9월 2일 광서제는 과거중지안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1906년 시행될 예정이었던 향시가 최소되고, 그 대신 귀국 유학생에 대한 시험이 치뤄졌다. 탕사오이가 주시험관으로 임명되고, 잔텐유와 옌푸가 부시험관으로 선발되었다. 이 시험에서 탕사오이,잔톈유,옌푸등이 칭찬한 가운데는 뒷날 중화민국 정부의 재정총리를 지낸 천진타오, 외교부장을 지낸 스자오지, 국무총리 대리를 비낸 안후이칭등이 있었다.
유동출신들은 1884년 조선에 세무관원으로 파견되었는데 그들은 바로 탕사오이,량루하오,차이사오지
蔡紹基와 저우서우천周壽臣등이다.
중국 최초의 신식 경찰인 북양경찰의 천진 순경도에는 유동 차오자샹이 임명되었다.
탕사오이는 1904까지 천진 세관장을 맡았고 그 후임으로는 같은 유동출신인 량뚠엔이 되었다.또 그 후임으론 역시 유동출신인 량루하오가 되었다. 또 그후임으로 유동출신 차이사오지였다.
1903년 자희태후는 기차를 타고 서릉으로 가서 제사를 드리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1906년 청 조정이 북경에서 장가구간의 철도를 부설하겠다는 것이 알려지자, 영국과 러시아는 그 지역이 자신들의 세려권 주장하며 양보하지 않았다가 결국 타협안을 냈다. 만일 청 조정이 외채를 빌리치 않고 서양 기술자도 쓰지 않은 채 온전히 독자적인 힘으로 철도를 부설한다면, 모두 손을 뻗치지 않기로 했다. 두 나라는 낙후한 중국이 그럴 능력이 전혀 없으리라 생각했고, 그래서 공사가 교착상태에 빠져 자신들에게 도우을 쵸청할 것을 계산에 넣어 두었던 것이다.
철도부설의 책임자인 잔톈유가 채택한 노선은 서직문에서 사하를 지나 남구 거용관 팔달령 회래 계명력 선화를 거쳐 장가구에 이르는 180000킬로미터의 길이었다.
1906년 9월 30일 제1단계 공사구간이 모두 개통되었다. 곧 제2단계 공정이 시작되었다.난관은 이제부터였다. 먼저 거용관, 오계두, 석불사, 팔당령 등 터널 네 개를 뚫어야 했다. 가장 긴 팔달령 터널은 1092미터였다. 또한 채광용 공기압축기, 통풍기, 물펌프등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장비들은 당시 중국에 없었다. 그래서 오직 노도아의 맨손에 의지해야만 했다.
경장철도는 본래 6년 공정으로 완성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잔톈유는 무려 2년을 앞당겨 1909년 8월 11일에 완전히 개통시켰다. 비용도 초과되지 앟고 백은 28만 냥을 절약했다.
1904년 8월, 라싸에 침입한 영국군은 서장 지역 관원들을 을러대어 라싸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은 사실상 서장을 영국령으로 만드는 것이었다.청조정은 이 조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05년 2월 중국과 영국은 자카르타에서 회담을 진행했다.
1906년 3월, 중국과 영국은 북경에서 다시 회담을 열었다.
1905년 12월 28일 청조정은 오대신을 파견하는데 이때 수행원중에 원삥중溫秉忠이 있었는데 그는 바로 쑹메이링등 쑹씨자메의 이모부 였었다. 그 역시 유동 출신이었다.
무창기의 후, 청나라 측 대표와 혁명당 대표가 만나게 되는데, 여기서 혁명당 대표인 우팅팡은 시모노 세끼조약시 리훙장을 수행한 인물이었고 또 청말 주미국공사를 역임하기도 했다.
중화민국 내각 12명중 9명이 유학생 출신이었는데 몇명을 말한다면 교육총장 차이위안페이(독일 유학), 육군총장 단치루이(독일 유학), 교통총장 스자오지(미국 유학), 농림총장 쑹자오린(일본 유학) 이다.
저우서우천은 1904년 윤선초상국 총재가 되었고, 1905년에는 팡뽀량과 가이 산해관 부근에 노광학당을 열었다.
량뚠옌梁敦彦은 훗날 청나라 외부 외무대신이 되었다. 그는 청 조정에 충성하고 황제를 옹호했는데 신해혁명이 일어난 뒤에도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1917년, 장쉰의 황제복위운동에 참가했고, 황제 푸이가 결혼을할 때는 차이팅깐과 함께 푸이의 드러리를 서기도 했다.
은 1냥=1.37달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