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사도직의 귀감 장면 요한 박사
최근 서울 종로구청과 운석 장면 총리 기념사업회가 혜화동 로터리에
장 박사의 동상을 건립하기로 협약을 맺는 자리에 함께하면서 감회에 젖었습니다.
입학시험을 치르기 위해 제가 밤차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 것이
1960년 3월 1일 아침이었고, 관훈동 고모님 댁에 들어가면서 인사동 초입
민주당사에 나붙은 ‘못 살겠다 갈아보자!’ 구호와 함께 부통령 후보 장면 박사
사진을 담은 선거 포스터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주간 토요일인 3월 5일에는
서울운동장 유세장으로 가서 후보의 연설을 들었고, 15일의 3·15 부정선거를
거쳐 4·19 혁명과 26일의 이승만 대통령 하야 성명 발표, 28일 허정 과도 내각
출범, 7·29 제5대 민의원과 초대 참의원 선거, 양원 합동회의에서 8월 12일
윤보선 대통령 선출에 이어 19일에는 내각 책임제 제2공화국 국정 책임자로
장면 총리를 인준하는 일련의 바쁜 정치 일정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1961년에 일어난 5·16을 겪은 다음 장 박사 내외분이 가톨릭 학생회관으로
오셔서 미사 참례하실 때 제가 복사를 섰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오늘의 영국, 독일, 이탈리아, 일본과 같이 국정을
책임진 국무총리의 직분을 수행했던 장면 박사는 평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에 주로 활동했으면서도 공의회의 정신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가르침을 일찍부터 살아내신 분이라는 점에서
저는 특별히 그분을 조명하고 싶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가정에 충실했고, 자녀들로부터 존경받는 아버지였습니다.
따님인 베네딕타 수녀는 말했습니다. “나의 오랜 수도생활을 통해 가장 좋은
영향을 끼친 것은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좋은 피정과 양성을 넘어서는 것이
표양이다. … 우리는 매일 저녁 가족들이 모여 기도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옷을 갖추어 입고 자세를 바르게 해서 기도하게 했으며, 저녁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쳤다. 가난하고 어렵고, 특히 기도해 줄 사람이 없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게
하셨다.”
장면 박사는 우리나라 첫 프란치스코 3회원이었고,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에는
병상에서 ‘1회 회원’으로 받아들인다는 통보를 받고 “이 편입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영예”라며 기뻐했다고 전해집니다.
‘가톨릭 운동’에 관한 말과 글과 열성적인 활동을 남긴 그분은
“철저한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소년기, 청년기, 그리고 만년까지 보냈으며,
그 일관된 가톨릭 정신을 현실 정치에까지 적용해 보려 했던 훌륭한 평신도이며
정치인으로서, 민주주의자로서의 모범을 보여줬던 인물”(조광 교수)입니다.
국방부장관과 서울 평협 초대 회장을 지낸 현석호 선생은 “정무에 바쁜 중에도
처음 만나는 사람이면 ‘교회에 나가십니까? 나가지 않으면 지금이라도 나가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십시오.’하고 으레 말할 정도로 전교에 열성이었다.
그래서 저도 … 만날 때마다 교회에 나갈 것을 종용 당했지만 정무에 바쁜 나머지
차일피일하다가 5·16 후에야 비로소 입교하게 되었다.”라고 회상합니다.
최홍준 파비아노 / 방송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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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천국에서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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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민주주의에 힘써주셔서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