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둥글지도 모나지도 않는 행 !
어떠한 음식을 먹을 지라도 목적은 건강유지에 있고 어떠한 환자라도 목적은 완쾌에 있으며 어떠한 방법의 수행을 하더라도 목적은 성불(成佛)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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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수행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고 불 보살님도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울만큼 많은 분들이 계시며 부처님의 법문도 8만 4천의 무진한 내용으로 되어있다
어떤 사람들은 참선을 해야 도(道)를 깨칠 수 있다 하고, 어떤 사람은 다라니를, 어떤 사람은 경전을, 어떤 사람은 기도를 해야 도(道)를 이루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
염불을 할 때에도 어떤 사람은 관세음보살을 찾아야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지장보살을, 어떤 사람은 아미타불을 찾아야 한다고 하며,
주문을 외우는데도 ‘사십이수주문‘을 해야 한다거나 ‘육자대명왕진언‘을 외우면 좋다는 사람이 있고 ‘츰부다라니‘를 해야 좋다거나
‘멸업장진언‘을 외워야 업장이 소멸되고 원을 이룰 수 있다는 사람도 있다
불법을 하는데에도,
「승려가 처자권속이 있으면 어때?」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스님이 어떻게 시집 장가를 가?」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원효처럼 장가를 가도 바른 법만 전하면 되지」 하는 사람도 있다
또한 비구와 대처가 서로 쟁론을 일삼고 같은 종파나 계파간에도 뜻이 분분하여 이합집산의 시시비비가 일어나기도 한다
물은 본래가 둥글지도 않고 모나지도 않다. 둥근 그릇에 담으면 둥글어지고 모난 그릇에 담으면 모가 나게 된다 부처님의 진리 역시 모양도 없고 색깔도 없는 진여(眞如) 그 자체인데
우리 중생들은 구분을 하고 경계를 지어 종단을 만들고 종파 계파를 따지며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그리고 내편과 네편을 구분한다
수행방법이나 불보살이 많은 것도 결국 중생들의 근기가 각자 다르기 때문이다 자비를 위하여 관음이 생기고, 지혜를 위하여 문수가 생기고, 실천행을 위하여 보현이 생겼으며,
지옥중생을 위하여 지장이, 병든 중생을 위하여 약사가, 미래중생을 위하여 미륵이 생기고 현세중생을 위하여 석가여래가 태어났다
마치 수없이 많은 음식의 종류가 있어도 각기 좋아하는 음식이 다르고, 몸이 아픈 사람이 각기 질병의 부위에 따라 전문의를 찾아 치료를 받는 방법이 다른 것처럼 중생들의 특성과 소질 직업과 근성에 따라 구제방법이 다르기에 수행방법과 불보살도 역량에 따라 다르게 형성이 되었다
그러나 어떠한 음식을 먹을 지라도 목적은 건강유지에 있고 어떠한 환자라도 목적은 완쾌에 있으며 어떠한 방법의 수행을 하더라도 목적은 성불(成佛)에 있다
그러기에 염불이나 참선 독경등을 하는 것은 모두가 마음을 닦아 깨달음을 얻기위한 수단이요 방편이며 어떠한 방법으로 하는 것이 옳다거나 그릇되다고 볼 수가 없고 또한 많이 해야 좋다거나 적게 해서 나쁘다는 단정을 지을 수도 없다
내가 위장이 나빠 위장약을 먹고 아픈 부위가 치료되었다 해서 머리가 아픈 사람에게도 같은 위장약을 먹게하여 치료할 수는 없고, 자신과 피부색깔이 다르다 해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듯이 전법자나 불자도 꼭 자신의 방법이 옳다는 주장을 한다거나 자신들이 속해있는 종파나 계파가 옳다고 한다면
만법이 평등하고 제법이 실상한 부처님법을 오염시키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경을 ○번 읽으면 소원이 성취된다」
「절을 ○번 하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 진다」 「○○에 가면 꼭 한 가지 소원은 이룰 수 있다」는
등의 이야기는 불교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한 자들이 사리사욕의 가면을 쓰고 더욱 무지한 불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장사의 행위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기기도 한다
정녕 그러한 것들이 사실이라면 지금쯤 번뇌하고 고민하는 불자는 물론, 패싸움하는 승려는 하나도 없을 것이고 또한 높은 자리는 승려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경을 읽거나 절을 하거나 큰스님이 있는 곳이라 하여 무조건 깨우침을 얻거나 소원이 이루어 지는 것은 아니다. 경이나 절이나 큰스님의 가르침은 각자 스스로의 흔들림없는 올바른 노력의 방법만을 제시해 주는 것이며 이루고 못이루고는 바로 자신이 노력을 하는 실천행에 달려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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