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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에게
‘희생과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 고 가르칩니다.
부활 제3주일(베드로 1서 1장 17~21절)
오늘 독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 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 그 피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일까요? 두 가지를 말씀 드리고 싶은데요.
먼저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에게 소유가 아니라 나눔과 희생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프랑스 어떤 시골에서 주민들이 전체 회의를 열었습니다. 복음 정신대로 살기 위해서, 공동으로 기금을 모으고, 그래서 나눔을 실천하고 이웃사랑을 실천하자는 주제로 열린 회의였습니다.
맨 처음에 어떤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나눔을 실천하기 위해서 마차를 두 대 가진 사람은 마을에 한 대를 기증하자.” 이 제안은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마차만 있고, 말이 없으면 안 되니까, 말을 두 마리 가진 사람은 한 마리씩 기증하자.” 이 제안도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습니다.
세 번째 제안이 나왔습니다. “말과 마차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필요하니 창고를 두 개 가진 사람은 한 개를 기증하자.” 이 제안 역시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나는 너무 가난해서, 마을을 위해 내놓을 것이 없다. 그러나 나도 뭔가 참여하고 싶다. 나에게는 닭이 두 마리 있는데, 한 마리를 기증하겠다. 다른 사람들도 닭이 두 마리 이상 있다면, 한 마리씩 내놓자.”
그 제안에 대해서 투표를 한 결과, 제안자 한 사람만 빼놓고 모두 반대해서 부결되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말이나, 마차나, 창고를 가진 사람은 하나도 없었지만, 닭은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우리는 자신의 것을 내어놓고 희생하는 데 인색합니다. 그러한 모습이 보통 사람의 마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은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말씀대로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자신의 시간과 재능과 힘과 소유를 내어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는 나눔과 희생의 열매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하는 사람은 아직 희생하고 헌신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매 주일 미사에 앉아 있다고 나의 삶이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니겠죠. 열매 맺는 삶을 살고 싶다면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는 최근에 주님을 위해 어떤 희생과 나눔을 실천 했는가? 나는 주님을 위해 어떤 눈물과 땀을 흘리고 있는가?’
우리가 마지막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는지.. 얼마나 높은 지위에 올랐는지.. 얼마나 좋은 직업을 가졌었는지.. 어떤 좋은 대학에 나왔는지...’ 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 이유를 다음의 이야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장기를 둬본 사람들은 압니다. 장기에 왕과 말과 졸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기가 끝나면 왕이나 졸이나 말이나 다 같은 상자로 되돌아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각자 하느님께서 배정한 소임에 따라 누구는 왕이 되고, 누구는 졸이 되고, 누구는 말이 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면 그 역할은 계속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하여 얼마나 성실하였는가...’ 하는 것이겠죠. 소유하고 움켜쥐는 삶을 살기보다, 나누고 희생하는 삶을 통해 성실하게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면, 언제가 마태오 복음 25장과 같은 주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피는 열등감이 아니라 사랑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예전에 동기 신부 아버지 차를 빌려서, 동기 신부와 강화도에 있는 신학교에 갔던 적이 있습니다. 동기 신부가 면허가 없어서 제가 운전을 했는데, 오랜만에 운전하는 거고, 차가 스틱이라 운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날 시동만 수 십 번 꺼먹었을 겁니다. 언덕길에서 시동이 꺼지고, 신호 대기하다가 출발할 때 꺼지고, 비포장 길에서 꺼지고 정말 등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였습니다. 속도도 거북이처럼 느렸고, 차선도 눈치 없이 바꿀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주위 차들의 경적 소리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시동 꺼먹고 머뭇거리고 있을 때 빵빵 거렸고, 천천히 가고 있을 때 뒤에서 빵빵 거렸고, 차선을 바꿀 때 빨리 달려오던 차들이 빵빵 거렸습니다. 하도 빵빵 소리를 많이 들으니까, 신학교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는 멀리서 ‘빠아앙~’ 소리가 나도,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신경이 곤두섰었습니다. 주위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가 다 날 향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마도 운전이 서투르다는 열등감 때문에 그렇게 반응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보였던 모습처럼,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 예민합니다. 또 쉽게 반응합니다. 예를 들면, 자기 이야기도 아닌데 자기를 공격한다고 생각하며 상대방을 원망하기도 하고, 어떤 모임의 공동 작업에 빠졌을 때 다른 이유가 있는데도 ‘나 때문에 빠졌나?’ 하며 쉽게 오해를 하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 공동체에 그렇게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이 많다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집 평수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고, 덜 배운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고, 외모나 능력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고, 직업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고,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 때문에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이 계시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마도 공동체가 함께 모여 대화하고 친교를 나누는 자리가 쉼의 자리가 되지 못하고,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자리가 될 겁니다.
우리의 모임과 만남이 쉼의 자리가 되고, 편안한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열등감을 극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갖추면 열등감이 극복될까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우리 안에 사랑이 있으면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나는 이렇게 못생겼는데, 내 딸은 왜 이렇게 예쁜 거야... 아, 열등감 느껴.’ 하는 부모님이 계신가요? 또 ‘나는 학교 다닐 때 10등 안에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내 자식은 1등만 하네... 아, 열등감 생긴다.’ 하는 부모님이 계신가요? 그런 부모님은 없습니다. 자식이 예쁘고, 공부를 잘하면 기뻐하고 또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녀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열등감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겁니다.
오늘 하루, 주님이 흘리신 피가 헛되지 않도록 나누고 희생하고 사랑하는 삶을 살아 봅시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엄마를 따라 병원에 온 아들이 물었다.
“의사는 수술할 때 왜 마스크를 쓰는 거에요?”
이 말을 들은 엄마가 말했다.
“아마 수술이 실패하더라도
환자가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게 하려고 그러겠지!”
- 김기현 신부님 -
첫댓글 열등감........도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