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라시 (외 2편)
신용목
동그라미는 왼쪽으로 태어납니까
오른쪽으로 태어납니까
왼쪽으로 태어난 동그라미의 고향은 오른쪽입니까 어디서부터
오른쪽은 시작됩니까
동그라미를 그리는 자는 동그라미의 부모입니까 내가 그린 동그라미는 몇 개입니까
나는 그들에게 죄인입니까
왼쪽으로 걸어갔는데 왜 오른쪽에 도착합니까
왜 자꾸 동그라미를 그립니까
동그랗습니까
동그랗습니까
어둠을 뒤쫓던 후라시 불빛이 내 얼굴에 쏟아졌을 때
나는 유일한 동그라미 안에 갇혀 있었다
동그라미 안에만 비가 내리고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착취당하지
너는 혼자였고 나는 가난했어
무엇보다도 우린 젊어서
온통 늙어가지
그러나 어둠은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후라시를 켤 때마다 보란 듯이 불빛 그 바깥에 가 있었네
동그라미 안에만 비가 내리고
나는 간신히 외치기 시작했어
비 내리는 밤이 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의 슬픔이 젊기 때문이다
다음 날부터
태양은 구정물 통에 담긴 접시처럼 유일한 하늘에 떠 있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깨뜨릴 수 있는 동그라미와 깨뜨릴 수 없는 동그라미에 대해 생각했지만
우리가 만났던 밤은 아직 젊었고
어떤 비도 슬픔을 씻기진 못하고
너는 혼자였고 나는 가난했지
동그라미 안으로 쓰윽 들어온 손이 내 턱을 추켜올렸을 때
내 얼굴은 이미 깨져 있었다
모래시계
잤던 잠을 또 잤다.
모래처럼 하얗게 쏟아지는 잠이었다.
누구의 이름이든
부르면,
그가 나타날 것 같은 모래밭이었다. 잠은 어떻게 그 많은 모래를 다 옮겨왔을까?
멀리서부터 모래를 털며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모래로 부서지는 이름을 보았다.
가까워지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의 해변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잤던 잠을 또 잤다.
꿨던 꿈을 또 꾸며 파도 소리를 듣고 있었다. 파도는 언제부터 내 몸의 모래를 다 가져갔을까?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지 않아도
나는 돌아보았다.
밤
검은 사내가 내 목을 잘라 보자기에 담아 간다 낡은 보자기 곳곳에 구멍이 나 있다
나는 구멍으로 먼 마을의 불빛을 내려다보았다
어느날 연인들이 마을에 떨어진 보자기를 주워 구멍으로 검은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꼭 한발씩 내 머리를 나눠 딛고서
—시집『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2017. 7)에서
------------
신용목 / 1974년 경남 거창 출생. 2000년 《작가세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아무 날의 도시』『누군가가 누군가를 부르면 내가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