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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은 우리를 고향으로 이끈다. 깨달음은 눈물을 수반한다 | 등록일 | 2016-08-1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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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교는 스스로 알게 되는 종교 부처님은 항상 ‘뜻있는 삶을 어떻게 이끌어낼 수 있을까?’를 말씀하셨습니다. 또『금강경』에서 ‘응운하주 운하항복기심(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마음을 잘 다스리도록 해야 된다, 마음을 잘 항복받도록 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하나같이 혼란된 마음, 즉 나의 이익을 따라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타인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기심이 있습니다. 비가 와서 진흙탕이 된 물도 자연 그대로 놔두면 고요히 가라앉듯이 잔뜩 들뜬 마음도 수행이나 참선을 통해서 차분히 가라앉힐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늘 ‘부처님이 되자, 성불합시다.’ 하면서도 “스님, 성불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라고 되물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또 이런 질문을 합니다. “스님, 그냥 조용히 앉아 있으면 누가 밥을 갖다 주고 누가 떡을 갖다 줍니까?” 여러분이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히고 있다고 해서 될 게 안 되고, 안 될 게 되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있으면 조각조각 흩어져서 마구 싸워대는 마음의 온갖 양상들을 정착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안정을 되찾는다고 해도 좋습니다. 또 모든 것들로부터 융화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마음의 근본자리에서 어떤 힘이, 빛이 흘러나오게 되는 겁니다. 몸과 마음을 가지런하게 하고 있으면 오랜 세월 동안 살아오면서 내 마음 가운데 쌓아왔던 부정적인 성향이랄까, 공격성이랄까, 사나운 감정들이 진정됩니다. 참선은 그냥 가만히 앉아있기만 하는 게 아닙니다. 하루에 그저 삼십 분도 좋고 한 시간도 좋고 시간을 내서 고요히 앉아 참선수행을 해보세요. 부처님은 우리가 앉아있는 동안의 마음을 가리켜 “우주를 끌어안은 하늘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또 “하늘을 네 몸과 마음 가운데 체화시키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불교는 스스로 알게 되는 종교입니다. 저도 법회를 하기 전에 ‘오늘은 많은 분들께 무슨 말씀을 드릴까?’하고 생각하면서 한참을 앉아있습니다. 그러면 제 마음이 하늘과 같은 한없는 공간의 어떤 향기를 풍기면서 ‘네가 오늘은 이와 같은 말을 해야만 한다.’고 하는 따사로운 기운이 감싸는 걸 확연히 느낍니다. 흔히 ‘마음을 내려놓아라.’ 또는 ‘마음을 쉬게 하라.’ 고 합니다. 마음은 격렬한 바람에 쉴 새 없이 흔들거리고 요동치는 촛불과도 같아서입니다. 촛불은 바람이 불면 막 흔들리다가도 바람이 멈추면 고요해집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가라앉히면 축복과 명료함이 충만해집니다.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불신이 우주법계에 충만해짐을 느낄 수 있으며 따라서 자신의 참된 본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실제로 허공처럼 온 하늘을 다 품으면 모든 마음이 쉬게 됩니다. 한없는 분노, 마음의 요동침, 어떤 신경질적인 생각들이 거룩한 어떤 평화 속에서 쉬는 겁니다. 여러분도 마음이 번잡스럽거나 혼란스러울 땐 한동안 가만히 앉아 보세요. 그걸 생활화해보세요. 그러면 허공 가운데 계신 깨달은 존재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내외 분리 없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됩니다. 내면의 스승이 나타납니다. 안팎이 하나가 되니까 군더더기가 녹아져버립니다. 약사여래불, 관세음보살님, 이 뭣고도 좋습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보세요. 내면의 또 다른 스승을 만나 수 있습니다. 2. 잡다한 생각을 내려놓을수록 뇌는 활성화 된다 부처님은 항상 “참 안타깝다. 너희들이 짓는 죄는 너희가 부처임을 모르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 무슨 우리가 부처님이시겠습니까?” 하지만 체험해보면 부처님의 말씀이 어떤 뜻을 담고 있는가를 알게 됩니다. 실제로 참선이나 명상을 하는 과정 가운데 학자들이 두뇌를 연구해 보면 전두엽의 세 부분, 즉 기획 센터, 동기 센터, 조절 센터가 굉장히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앉아 있는 게 노는 게 아니에요. 멍 때리는 게 노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잡다한 걸 다 정리하면서 미래를 직시할 수 있는 눈이 떠지는 겁니다. 오로지 한 생각으로 앉아있을 때 정확한 방향성을 잡아갈 수 있습니다. 부처님도 고행 끝에 부처님이 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네 마음이 붓다를 염원함에 따라서, 마음을 텅 비움에 따라서 그대의 불성이 영감을 받아 활짝 개화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면 잡다한 게 다 녹아져 버리니까 불성이 현실화되면서 영감이 발동을 걸고 그것이 점점 꽃을 피우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의 본자리, 부처님자리, 즉 불성을 이야기하면 보통 중생으로서는 힘겨운 게 아닌가 생각하지만 결코 힘겹지 않습니다. 뇌는 잡다한 모든 생각을 내려놓으면 놓을수록 점점 더 활성화된다는 게 확실합니다. 뇌공학자 존카밧진박사도 스스로 실험을 했습니다. 숭산스님 제자였던 그는 가만히 앉아서 자기 머리에 기기를 걸고 그래프를 살펴봤더니 참선 수위가 깊어질수록 뇌가 활성화된다는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마음의 본성, 불성을 찾아 떠나는 자세를 습관화하고, 체화시키면 본성이 항상 나와 함께 했다는 걸 저절로 느낄 수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우리 마음 가운데 계신 수정같이 맑은 빛에 의해 두뇌는 어느 새 정리됩니다. 참선을 할수록 뭔가 알 수 없는 심원한 차원에서 육신을 초탈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심원하기 때문에 심원한 세계로 들어간 것이 숨이 막힐 정도입니다. 참선을 통해 체험하게 되는 순간의 느낌은 정말 놀랍고 어떤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이런 미묘한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과 수행은 단 하나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네 마음의 본성, 그 본성에 항상 마음을 두고 살아라. 네 마음 가운데 위대한 선지식이 계시다.’ 그러므로 참선을 통한 신비한 세계를 스스로 체험하고 나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실제로 녹아집니다, 불식됩니다. 우리가 ‘자비하라’, ‘사랑하라’, ‘베풀라’얘기하지만 사실 육신을 갖고 살다 보면, 나는 나가 있고 상대방은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집착을 내려놓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내가 상대방을 기쁘게 한 것만큼 오고 고통은 상대방을 아프게 한 것만큼 오는 게 우주의 원리입니다. 이 우주는 하나니까요. 여러분은 눈을 감고 하품을 막 하고 나면 ‘이게 뭐지?’ 하는 어떤 빛 같은 게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신 적 있으신가요? 때로는 그냥 책상에다 머리를 이렇게 걸치고 한 2,3분만 졸아도 머리가 맑아지는 걸 경험하셨을 겁니다. 잠깐이지만 뇌는 노는 게 아니라 본래 그 자리로 돌아가려는 왕성한 활동력을 벌이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남들이 하품하면 내가 괜히 하품하고 싶은 이유도 우리 마음자리가 본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품은 실제로 전염됩니다. 때로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이 괜히 막 눈물이 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내 마음 가운데 감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심금을 울린다고 그러죠, 내 마음 가운데 어떤 세계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럼 저절로 눈물이 흐릅니다. 그 다음 기쁨을 동반한 본성(本性)이 어떤 작동을 하고 깨달음의 세계가 열리게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간다는 것은 불성을 드러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라고 보면 됩니다. 또 불성을 실천하기 위한 훈련의 길입니다. 남을 아프게 하면 내가 아픈 거고, 남을 즐겁게 하면 내가 즐거운 것은 자명한 이치입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 부처님 말씀을 믿고, 잘 이해한 다음 행동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길, 그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문사수증(聞思修證)’,듣고,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기면 똑같이 몸과 마음에 증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겁니다. 나도 모르게 감격에 북받쳐서 이상한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이 우주 만유는 부처님으로부터 벗어난 적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어느 한 순간도 어떤 다른, 부처님으로부터 분리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일으키는 생각에 따라서 미묘하게 변해가고 있을 뿐입니다. 3. 참선은 스님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은 지금도 계속 변해갑니다. 늙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부처님은 하나이신데, 나의 마음의 어떤 그 순간순간 일어나는 생각 때문에 출렁대고 있는 겁니다. 그런 움직이는 마음을 고요히 잡기 위해서라도 화두를 들어보세요. 제행(諸行)은 무상(無想)합니다. 모든 것은 흘러가버립니다. 무상의 어떤 세계를 깊이 성찰해보면 그건 모두 허상입니다. 부처님은 항상 “모든 게 꿈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너도 꿈이고 나도 꿈이고 덩어리도 꿈입니다. 물론 우린 살긴 살아야 됩니다. 그런데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하면 사랑스럽지 않나요? 꿈속에 있는 동안 긍정적인 생각을 유지하는 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굉장히 둔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구름이 많다 하더라도 구름은 하늘을 오염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늘은 구름이 아니거든요. 『화엄경』에 나옵니다. ‘마음은 몸에 있지 아니하다. 몸은 마음에 있지 아니하다.’ 삶이란 한 조각 구름의 생겨나는 것과도 같고,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의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혀보세요. 맑고 파란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어렵다고 한다면 자신의 견인력이 취약한 겁니다. 고도의 훈련이 필요합니다. 참선은 스님들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스님들처럼 거기에 익숙하지 못한고 하니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태도가 취약해서 그렇습니다. 물질의 세계에 포박되어 노예로 살다 보니까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진정으로 존중하는 태도가 결여돼 있다는 겁니다. 우리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당체가 뭐예요? ‘난 나를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게 물질과 관계돼 있다 보니 자신을 존중하는 태도가 부족합니다. “나는 나를 존중하는데요.”하지만 뭘 존중하는 겁니까? 내 안에 계신 부처님을 내가 사랑한다면 부처님이 하명하신 대로 살아야 하는 게 마땅합니다. 불씨 하나가 온 산을 다 태우는 법입니다. 한 방울의 독으로 사람을 죽일 수가 있습니다. 작은 씨앗 하나가 우람한 나무로 자라납니다. 작은 물방울이 쌓이면 양동이를 가득 채웁니다. 『신심명』에 ‘극소동대요 극대동소라’, 작은 것이라고 우습게보지 마세요. 한 낱 독심이 나를 죽이고 남도 죽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 부처님 계시고, 상대방의 마음 가운데도 부처님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나를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럽니다. “스님, 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이 더 잘 살아요.” 당장 보면 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고 잘 되는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습니다. 선거에 당선된 사람들은 순간 우쭐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선거판이 벌어집니다. 계속 바뀌어 가는 겁니다. 바뀔 때 마다 요동치며 스러지고 사라집니다. 법을 안 지키는 사람들은 언제 어느 곳이든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독수리가 하늘을 날고 있을 땐 그림자가 땅에 비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독수리가 먹이를 보고 사뿐히 내려앉을 땐 그림자가 크게 드리웁니다. 뭐든지 전조가 있는 것이지 우연은 없습니다. 어떤 분이 저한테 묻습니다. “스님, 우리가 전생에 있었다는데, 왜 까맣게 모릅니까?” 그런데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모습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전생의 내가 다 그려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관된 말씀가운데 “탐진치의 삼독심을 잘 다스려라. 그리고 자비심을 계발하라.” 고 합니다. 독심을 잘 잡고 지혜와 자비를 계발해나가면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은 까르마(업식)는 창조적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노력해서 좋은 인연을 만들어 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인연업보는 오는 대로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창조해나가는 겁니다. 까르마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변화시키는 게 우리의 운명이고 능력입니다.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항상 “심여공화사(心如工畵師), 너희들의 마음은 예술가와도 같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고통은 무명에서 시작됩니다. 고통은 과거 우리가 지었던 업장을 쓸어내는 빗자루와 같은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쓸어낸다고 생각하면 자기를 증오하거나 학대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냥 쓸어내 버리면 됩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시간과 공간은 여러분이 수행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나침반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이 잠을 자면 육신은 두루뭉수리하게 과거 현재 미래가 한데 석여버립니다. 그래서 세상을 등지면 무수한 환상에 시달리게 되는 겁니다. 게다가 죽은 후에도 마음 상태는 이승과 그대로입니다. 현재 여러분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이런 이유로 현재의 삶을 더욱 철저하게 살아야 합니다. 금생에 부정적으로 살면 저승에 가서 더 힘든 체험을 하게 됩니다. 고요히 자기의 본성을 돌이켜보세요. 위대한 깨달음의 행로는 끈질긴 인내심과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물질이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빛을 통해 본성을 체험해보면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수행은 우리를 고향으로 이끌어주는 안내도입니다. 영원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끊임없이 정진하시기 당부 드립니다. 출처"능인선원"지광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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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