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에 투숙하다 (외 2편)
이관묵
이 집을 빈방이 혼자 사시도록 고쳤다 어느 날 마음이 수평선을 데리고 몰려오거나 눈사람이 추위를 사 들고 아무 길이나 들어서더라도 마중 나가 집 앞까지 모셔오도록 오는 길을 여럿 풀어놓았다 대문 옆 파도 소리 심어놓고 요즘 부쩍 건강이 좋지 않은 빈방 간병도 부탁해놓았다 빈방 혼자 밥 잡수시는 창살 무늬를, 뒤늦게 집 나간 바깥 들어와 며칠 묵었다 가는 바람의 주소를 붉게 익은 동백들이 환하게 비추었다 문밖에 환하게 켜놓은 동백 전구
집 꼴이 좀 돼가는지 지난여름 불볕에 타 죽지 않은 모과나무 그늘도 묵고 있었다 매일매일 밤도 와서 묵고 간다고 한다 여기서 나고 자란 저녁연기 술에 취해 게걸거리다 그냥 돌아가게 허공에 디딤돌이라도 놓아야겠다 나를 무단 방류했던 길바닥도 분실되지 않도록 뜯어다 걸어두어야겠다
내년 봄엔 생각 다 쳐버린 나를 한 그루 앞뜰에 심었으면 좋겠다
꽃 아래 누워 뼈를 뜨겁게 지지고 싶다
늙은 높이
구름으로 낙향하리
구름에다가 구름 한 채 지으리
잎 진 미루나무
네가 바라보는 곳을 나도 보기 위해
네 그늘 밑에 내 그림자를 쌓아두리
추위가 한철 살다 가는 높이를 나도 가져야 하리
네가 바라보는 곳을 나도 보기 위해
네 높이를 한 뿌리 얻어다 기르리
절판된 사람들
책상도 없이 맨바닥 폈다 덮는다
무릎 높이에서 여치가 울다 가고 오늘은 책도 재운다
책꽂이에 수북이 밤이 꽂혔다
사람이 자꾸 틀린다
사람을 타고 항해하다 사람에 좌초한 삶을 틀리고
틀린 삶을 또 틀리고 다시 반복해서 읽어도 또 틀린다
어떤 손이 나를 꽂혀 있던 자리에 도로 꽂아놓는다
읽다가 말고 빈 케이스만 꽂아놓는다
어제였다
국밥집에 헌 시집 같은 사람들 만나 국밥을 먹었다
누군가 읽다 제자리 꽂아놓은 절판된 사람들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난해한 사람들
읽다 말고 침 묻혀가며 얼굴 몇 장 접는다
사람 덮고
사람 끄고
—시집『동백에 투숙하다』(2017. 8)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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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묵 / 1947년 충남 공주 출생.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수몰지구』『변형의 바람』『저녁비를 만나거든』『가랑잎 경』『시간의 사육』『동백에 투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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