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오현은 "리베로는 '코트의 빗자루'라고도 한다"며 웃었다. 떨어지는 공을 살려내려고 구르고 슬라이딩하며 코트바닥을 '쓸고 다니기' 때문이다. 키가 작아서 리베로로 전향한 여오현은 "배구에 리베로 포지션이 생긴 건 나에게 행운이었다"고 말했다./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바늘도 못 뚫는 팔뚝인데, 배구공쯤이야…
공격수 성향 모조리 파악…
날마다 실전같은 훈련에 하체 근력 키우기도 필수
"제 팔은 피부가 달라요."
4일 프로배구 삼성화재의 용인 훈련장에서 만난 리베로(Libero·수비전문선수) 여오현(31)은 대뜸 "볼펜을 달라"고 했다. 그러곤 볼펜 심으로 자신의 왼쪽 팔 아래쪽을 꾹 찔렀다. 아프지도 않은가? 기자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여오현은 웃으며 "리베로만 11년째다. 팔뚝에 공을 워낙 많이 맞아 감각이 둔해졌다"고 했다. "일반인들은 배구선수의 스파이크를 2~3개만 받아도 팔뚝이 시퍼렇게 멍든다. 리베로를 한 지 3년쯤 되니까 주삿바늘도 잘 안 들어가더라"는 얘기를 듣자 리베로의 고충이 어느 정도 이해됐다.
'수비 배구'의 묘미를 더하기 위해 만든 포지션인 리베로는 네트 높이(남자 2m43·여자 2m24)위에서 공을 터치하거나, 서브·블로킹·공격을 하면 반칙으로 상대팀에 1점을 줘야 한다. 선수들은 서브권을 가져올 때마다 시계방향으로 자리이동(로테이션)을 하는데, 리베로의 경우 후위(뒷줄)에서 전위(앞줄)로 이동할 때가 되면 다른 선수로 교체되어야 한다. 리베로는 공격을 못하는 대신 선수 교체 횟수(한 팀이 세트당 6회)에 구애받지 않는다. 지난달 아시아선수권에서 리베로 상을 받은 여오현에게 '수비 달인'의 비결을 들어봤다.
■죽은 공 살리는 '마법의 손'
여오현은 대학교 1학년까지 공격수였다. 하지만 1m75인 키가 더 자라지 않자 리베로로 전향했다. 처음엔 공격을 못해서 답답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몸을 날려 살려낸 볼을 동료가 공격으로 연결해 성공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서 수비의 매력에 빠졌다. 배구에서 수비의 비중은 공격과 같다. 리베로가 상대 공격을 받아내면 1점을 뺏기지 않는 것이고, 오히려 역습으로 1점을 따면 '2점짜리 효과'를 낸다. 여오현의 연봉(1억4000만원)은 삼성화재에서 최태웅(1억6800만원) 다음으로 높다.
여오현은 다른 팀 주공격수들(6개 팀 약 20명)의 성향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 선호하는 공격방향과 특징, 버릇을 기억해 실전에 활용한다. 스파이크는 시속 100㎞가 넘을 만큼 빠르기 때문에 '예습'을 하지 않으면 제대로 받아내기 어렵다. 여오현은 "모 선수는 대각선 공격을 할 때 고개를 공격방향으로 돌리면서 숙이는 버릇이 있다"고 귀띔했다. 여오현의 수비 위치는 주로 코트의 왼쪽 지역이다. 각 팀의 주 공격수인 라이트 공격수가 가장 즐겨 노리는 곳이다.
■받고, 받고, 또 받고
"수비 20개 시작!" 삼성화재 신치용 감독의 지시가 떨어지자 네트의 양쪽 끝에 의자를 놓고 올라선 코치 두 명이 2~3초 간격으로 번갈아 코트 여기저기에 스파이크를 때렸다. 여오현은 혼자 폭 9m의 코트를 1분 동안 왕복하며 20개의 공을 받아낸 후 큰 대(大)자로 드러누웠다. 그는 이런 훈련을 매일 3~4회씩 반복한다. 서브 리시브도 100개쯤 한다.
수비할 때 자세를 낮춰야 하므로 하체 근력이 필수적. 근력훈련의 비중도 하체(70%)가 상체(30%)보다 훨씬 크다. 120~140㎏의 역기를 어깨에 메고 앉았다 일어나는 훈련(한 번에 6개씩 총 4세트)은 매일 거르지 않는다. 배구선수들은 반복된 점프로 무릎에 무리가 와 30대 초반에 은퇴하는 경우가 많지만, 리베로는 30대 중반까지도 충분히 뛸 수 있다. 그만큼 경기경험과 판단력이 필요한 포지션이다.
☞ 리베로(Libero)
배구의 ‘수비 전문 선수’를 뜻한다. 서브·블로킹·공격은 할 수 없고, 수비만 할 수 있다. 양 팀이 공을 주고받는 횟수를 늘려 경기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 1998년 도입됐다. 리베로는 선수 교체에 제한이 없고, 유니폼 색깔이 동료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