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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사건의 주인공인 박대환 지점장이 옥중에서 쓴 수기 원본.
| 지난해 2월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희대의 금융 사기 사건이 터졌다. 사기 목표액 90조원, 허위 입금액은 66조원에 달했다. 66조원이란 돈은 우리나라 한 해 순예산인 160조원(2004년)의 3분의 1이 훨씬 넘는다. 만원짜리로 바꾸면 10t 트럭 726대 분량이다. 그런데 경북 안동 지역 농협 지소와 서울 태평로 지점에서 66조원 인출 사기 사건이 실제로 벌어졌다. 이코노미스트는 당시 사기에 가담한 박대환 농협 안동 지점장이 옥중에서 쓴 수기를 단독 입수했다. 이 수기에는 권력기관을 사칭해 비자금을 만드는 가공할 음모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요약해서 싣는다.
9조원을 입금시키고 입력키를 치자 화면에 경고 메시지가 떴다. “1회 계좌이체 한도는 2조원입니다.” 10분 안에 90조원을 입금시키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32번째 입력작업을 처리하는 내(박대환 지점장)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떨지 말자. 나는 청와대 비자금 90조원을 세탁하는 막대한 국책 사업을 수행할 사람으로 선택된 행운아다. 오늘 오전 청와대 비자금 세탁팀 조인철로부터 전달받은 메모에는 ‘농협계좌번호 013-12-**5905, 예금주 차형수, 금일 11시55분부터 12시5분까지 10분 동안 90조를 이체작업하기 바람!’이라는 내용이 깨끗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필경 세탁팀 책임자인 왕 회장의 친필일 것이다.
‘청와대 비자금 관리팀’ 총책인 그녀는 국책사업팀 근거지인 한남동 안가에서 왕 회장으로 통했다. 금융기관의 휴면 예금과 비실명 예금, 과거 정권의 비자금을 세탁해 90조원을 국책 사업에 투입한다는 목표 아래 ‘청와대 비자금 관리팀’이 만들어졌다는 게 그녀의 설명이었다.
여전히 떨리고 있는 손끝을 내려다보며 나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청와대, 국정원은 물론 농협중앙회 회장까지 모두 인가한 전혀 문제될 게 없는 임무였다. 나는 오로지 90조원을 입금처리하고 나랏일에 이바지한 대가로 수십억원의 보상금과 재정경제부의 중책을 맡으면 되는 일이었다. 다시 입력키. 총 33번, 66조원을 이체시킨 셈이다.
나는 금융계에 종사하기에는 너무 우유부단했다. 사정이 어려운 친구나 친지들에게는 내 명의로 은행 돈을 빌려 그들에게 줬다. 그렇게 짊어지게 된 빚이 총 9000만원. 게다가 둘째 아이의 치료비와 이자 때문에 형편은 늘 어려웠다.
이제 방법은 하나. 명예퇴직을 신청하는 것뿐이라고 어렵게 결심했을 때, 바로 ‘청와대 비자금 관리팀’이 내게 희망의 손을 뻗쳐 왔다.
“박형, 아침 시간인데 통화 가능합니까?” ‘청와대 비자금 관리팀’의 조인철이었다. 그를 알게 된 것은 서울 베트남 참전 전우회 사무실이 내가 돈을 투자한 벤처회사 건물에 임시로 세들면서부터였다. 그는 전우회에서 직책을 맡고 있었다.
“한남동 안가 왕 회장을 소개하죠” “국책사업이라고? 그게 뭔데?” “사장님, 제가 백 날 얘기해 봐야 믿기 어려울 겁니다. 기회가 닿으면 한남동 안가 왕 회장님을 소개해 드리죠.” 거나하게 취기가 오른 조인철이 비밀을 조금 털어놓았다.
“한남동 안가라니요? 국정원과도 선이 닿는 사업인가요?” “국정원뿐 아닙니다. 정부 6개 부처가 합동으로 추진하는 국책사업이랍니다.” “어쨌든 대단한 일인 거 같네요.” “이 사업은 금융 거래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기 때문에 박 사장님처럼 금융 업무 경험이 풍부하신 분 몇 명이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 이미 각 금융기관을 상대로 주요 책임자 선정 작업이 시작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박형, 이번 주 일요일 한남동 안가에서 농협 관련 작전회의가 열립니다. 그때 정부 부처 관계자들과 함께 최종 미팅을 해야 하니 박 형도 반드시 참석해야 합니다.” 그가 말하는 이번 주 일요일은 2월 6일이었다. “농협 작전 일자가 확정됐다는 말인가요?” “이변이 없는 한 구정(舊正) 전에 실행한다고 했으니 늦어도 2월 7일이 될 겁니다.” “작전 규모는?” “아무리 적어도 수십 개는 될 겁니다.” 수십 개란 말이 수십조원임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박형, 신분 보장 조건은 들어서 알고 있죠? 그리고 희망하는 정부 부처로 근무지를 옮기는 것도. 마지막은 포상금 문제인데, 한남동 안가에서 평생 먹고사는 데 지장 없도록 해 준다고 했잖아요? 외환은행에서 7조원을 작업하고 50억원의 포상금을 받았어요. 그중에 외환은행 임 대리가 20억원을 갖기로 했답니다. 그 점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포상금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빨리 샤워하고 출발합시다.” 조인철이 깨웠을 때는 전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서울 지리에 익숙지 못한 나는 그가 재촉하지 않더라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조인철이 직접 운전대를 잡겠다면서 나보고 옆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한남동까지 몇 분 정도 걸리는데요?” “대략 20분?” “너무 빨리 도착하는 거 아닌가요?” 겨우 8시가 넘었기 때문에 내가 물었다. “아니오. 계획이 변경됐어요. 그 사람들, 한남동 안가에 모여 저녁을 먹기로 했대요. 지금 모두 모여 있을 겁니다.” “한남대교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면 1층에 외환은행이 입주한 주상복합 건물이 나타난답니다. 김명수씨가 외환은행 앞에서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김명수가 오른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국책사업’에 일익을 담당할 귀빈을 상대하듯 미소를 잃지 않고 깍듯한 자세로 환대했다.
“밤이 되면 1층 로비의 출입문을 잠그기 때문에 지하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합니다. 많은 외교관이 거주하는 지역이어서 출입 통제가 심한 편이죠.” 그 말에 화답이라도 하듯 지하 주차장 관리인이 우리 일행을 저지했다. “몇 호에 가십니까?” “10**호!”
지하 주차장 관리인과 김명수가 짧은 대화를 암호처럼 주고받았다. 김명수가 바로 전에 열어 놓고 나왔다던 10**호의 현관문은 닫혀 있었다. 그는 인터폰 벨을 누르지 않고 주먹으로 문을 두드렸다.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온 뒤에도 한참 동안 문이 열리지 않았다. 거실 쪽에서 리모컨을 작동했는지 이윽고 문이 스르르 열렸다.
말로만 듣던 한남동 안가는 예상 외로 휘황찬란했다. 외제처럼 보이는 고급 가구들과 눈이 부신 인테리어. 복잡한 의문부호가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을 때 안방이라고 짐작되는 곳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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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조9000억원이 입금된 외환은행통장 사본. 농협과 마찬가지 수법으로 외환은행도 당했다. | “도대체 일들을 어떻게 하는 거야!” 내실에서 나오던 한복 차림의 60대 여성이 다짜고짜 큰소리부터 쳤다. 귀가 따갑게 들어오던 왕 회장이 분명해 보였다. 그 귀부인의 꽁무니를 따라나오던 50대 정장 신사의 품에 1인용 소파가 안겨 있었다. 나는 액자 속의 사진을 눈치껏 훔쳐보면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왕 회장이 두리번거리자 모든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대답이 필요 없었다. 낯선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왕 회장도 즉각 알아차렸다.
“이쪽으로 앉게!” “농협에만 120조원 휴면예금 있어” 손님에게 자리를 권하는 게 아니라 차라리 추상같은 명령이었다. “박 상무라고 했던가? 밀양 박씨겠네?” 그녀가 아래위로 훑어보며 반말을 뱉었다. 왕 회장이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자 나는 벌떡 일어났고 그녀의 손에 내 손을 맡겼다. 악수를 한 게 아니라 임금으로부터 어떤 선물을 하사받거나 여왕에게 운명을 맡기는 느낌이었다.
“전직 대통령들이 모든 자금을 딸딸 긁어 쓰는 바람에 지금 대통령이 이렇게 힘드는 기라! 우리 박 상무, 이번에 절호의 기회가 왔어. 이건 박 상무의 능력으로 생긴 일이 아냐. 조상이 내리신 은덕이란 말입니다. 한번 잘해 보이소!” “아, 예, 예!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온몸이 후끈거리는 걸 어쩌지 못했다. 왕 회장이 주도하는 듯한 그 ‘국책사업’이 사실이든 아니든 알 바가 아니었다. 일단 일을 벌여 놓고 나중에 어떤 결과가 나오든 운명에 맡겨 버리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정 실장이라는 사람이 설명을 이어갔다.
“박 상무님, 지난 93년 금융실명제가 실시된 이래 비실명으로 남아 있는 예금과 휴면 예금이 농협에 얼마 가량인지 알고 계세요?” 정 실장이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듯 또박또박 물었다. “글쎄요. 휴면 예금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하지만 비실명 예금 규모가 어느 정도 될지는 짐작하기 어렵군요. 농협중앙회 본부에 통계 자료가 있을 겁니다.” “우리 국정원과 재경부에는 2004년 말 현재 은행별 휴면 예금과 비실명 예금에 대한 통계 자료가 확보돼 있습니다. 그 자료에 따르면 농협엔 120조원이 있다고 합니다.”
“몇 가지 역할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박 상무로선 계좌 이체를 담당하는 게 가장 손쉬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태평로 지점에 계좌 개설을 해 놨습니다.” “아니, 오늘은 일요일인데요?” “농협중앙회 전산실의 협조로 만들었습니다. 그까짓 통장 하나 개설하는 건 아무 일도 아니죠. 날짜를 소급해서 2월 4일자로 개설했습니다.” 휴일에 통장을 개설할 수 있다니. 나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무지 노력해야 했다.
“박 상무님은 우리가 지정한 계좌에 입금만 시키면 됩니다. 입력한 가공 수치는 은행 마감 전에 채워 넣게 돼 있어요. 농협중앙회 전산실에서 별도 관리 중인 비실명 예금으로 커버하게 돼 있단 말입니다. 2월 3일 외환은행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법이죠. 박 상무님은 그저 계좌 이체만 담당하고 뒤처리는 정부와 우리가 책임을 집니다.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어요.” “계좌 이체를 하자마자 중앙회 전산감사실에서 정상적인 거래 여부를 확인하는 전화가 옵니다. 그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내가 따져 물었을 때 달변가 정 실장이 잠시 우물쭈물했다. “임 대리, 그때 입금을 한꺼번에 했지요?” 정 실장이 베란다 근처의 소파에 앉아 있던 젊은이에게 물었다. “예! 한꺼번에 했습니다.” 임 대리가 커다란 소리로 대답하고 말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려 한강의 야경을 바라보던 젊은이를 훔쳐보면서 나는 얼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7조원을 이체했다는 외환은행 임 대리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박 상무님! 이처럼 거대한 국책사업을 진행하면서 농협중앙회 전산감사실을 그냥 놔뒀을 거 같아요? 외환은행 전산실에는 회식하라고 1500만원을 줬지만, 농협중앙회 전산실에는 단 한 푼 주지 않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 대신 우리가 지정하는 시간에만 작업을 해야지 그 밖의 시간에 작업을 하면 안 돼요!” 정 실장의 사업 설명이 마무리되었다고 판단했던지 왕 회장이 내게 손짓을 보냈다. 거실 중앙 상석에서 일어난 왕 회장이 안방으로 들어가면서 내게 눈짓을 했다.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가 본 안방은 웬만한 아파트 한 채만큼이나 넓었다. 25평 아파트 넓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계속]
[농협 66조원 사기 사건 주인공 옥중 수기 ②는 인터넷에 27일 연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