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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6월 18일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오 6,24-34)
Seek first the Kingdom of God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you besides.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에게 당신의 힘은 오히려 인간의 ‘약함’에서 드러난다고 말씀하신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약점이 그리스도의 힘이 머무르는 장소라고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힘으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약함을 통하여 일하신다(제1독서). 주님께서는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라고 말씀하신다. 삼라만상이 다 주님의 섭리와 보살핌 안에 있듯이 하느님의 귀한 존재인 우리도 하느님의 보살핌 속에 있다. 주님께서는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고 주님께 의탁하며 살기를 바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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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여러 분야에서 성공을 거둔 박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명예와 부를 누렸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정신과 의사를 찾아가서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의사는 네 가지 처방의 약봉지를 주면서 가까운 바닷가로 떠나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박사는 의사의 말대로 바닷가에 이르러, 첫 번째 약봉지를 열었습니다. 안에 든 것은 약이 아니라 의사의 글씨가 적힌 종이였습니다. “귀를 기울여 들으세요!” 그는 조용한 곳에 앉아 눈을 감았습니다. 바람과 파도 소리가 마음을 조금씩 진정시켜 주었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두 번째 약봉지를 열었습니다. 거기에는 “추억”이라는 낱말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옛 시절들을 떠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순수하던 어린 시절, 친구들과 나눈 우정, 부모님의 사랑 …… 그동안 잊고 지낸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꿈틀거렸습니다.
세 번째 약봉지에는 “초심을 회복하세요.”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는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성공만 좇느라 가까운 사람에게 너무나 소홀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약봉지에는 “당신의 모든 근심을 모래에 쓰세요.”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는 모래 위에 그동안의 걱정거리를 모두 적었습니다. 곧 파도가 밀려와 모든 것을 지워 버렸습니다.
『이야기로 배우는 하버드의 지혜』라는 책에서 요약한 글입니다. 우리는 일어나지도 않을 숱한 일들을 늘 걱정하며 산다고 합니다. 우리가 걱정해서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얼마나 되는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모든 일을 다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내일을 걱정하고 불안해하며 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선(善)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섭리에 모든 걱정거리를 맡기고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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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불현듯 그동안에 지은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 가슴 깊이에서부터 밀려듭니다. 지은 죄들의 대부분은 ‘무엇을 마시고, 먹고, 입을까? 어떻게 살아갈까?’ 등 순전히 일상생활에서 오는 욕심들에서 출발합니다.
그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감사드리며,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이든 남보다 앞서고, 최고의 것을 가져야 한다고만 생각하며 살다 보니, 몸은 생각을 따라오지 못했고, 그래서 더더욱 짜증을 부리면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하시면서,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라고 하십니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솔로몬도 결국 쓸쓸히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일, 곧 형제애와 나눔과 섬김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를 키워 가는 일을 앞세우지 않으면, 끝없는 생활 걱정과 미래 걱정에 쫓겨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되지요. 주님께서는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추구하다 보면,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도 자연히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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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재물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찾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느님의 능력’을 찾고 있습니다. 재물에 ‘주님의 능력’이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착각을 깨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의식주에 관한 두려움을 접어야 주님의 능력에 눈뜰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어렵습니다. 우리 삶의 태반이 의식주에 얽힌 고민인데 어떻게 털어 낼 수 있을는지요?
고민을 하되 신앙인답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걱정한다고 없는 쌀과 의복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는 고민부터 먼저 합니다. 걱정으로 삶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필요할 때에는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미리 애태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의로움은 그분의 애정입니다. 들풀을 입히시고 하늘의 새를 먹이시는 그분의 선하심입니다. 그 의로움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내일 일을 너무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걱정으로 자신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꼭 간직해야 …
- 한창현 신부-
울릉도로 소임을 받으면 육지에서 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많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스킨스쿠버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보듯 공기통을 매고 바다 속 10미터에서 30미터정도를 들어가 물속을 구경하기도 하고 허가된 곳에서 전복 · 소라 · 해삼 · 미역 등을 땁니다.
지난 여름 10미터 정도 들어갔다가 바다 속에서 공기를 다 소진했습니다. 입수 전에 게이지를 봤을 때 공기가 남아 있어 안심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사실 그 게이지에 이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갑자기 공기가 없으니 숨을 쉴 수 없었고 당황하며 급히 밖으로 나오기 위해 바다 위로 다리를 내저었습니다. 저는 무작정 살기 위해 발을 저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이 얼마나 멀던지 …. 바다 위까지 올라오면서 숨을 쉬기 위해 호흡을 했다가 바닷물을 마셨습니다. 바다 속에서 입을 벌리니 공기가 들어오는 대신 물이 밀려들어온 것입니다.
한번 물을 마실 때마다 지난 삶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잘 살았던 것보다 잘못 살았던 기억이 영화장면처럼 지나가면서, 그렇게 짧은 시간이지만 저는 ‘주님, 당신께 모든 것을 맡깁니다.’ 하는 기도를 올리면서 동시에 ‘제발 살려주십시오 !’ 하고 외치게 되었습니다. 얼굴이 물 위로 나왔는데도 몇 분간은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 하신 말씀에서 참으로 귀하게 나를 생각해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그때의 경험으로 다시 한 번 체험합니다.
근심과 걱정을 이기는 힘
-김훈일 신부-
매년 경제가 위기에 처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더욱더 위기에 처한 것은 우리의 가치관과 가정과 사회입니다.
자살, 이혼, 윤락, 청소년 범죄 등 가치관의
상실로 인해서 삶을 실패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늘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고 주저앉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늘의 새도 보살피거늘 더 소중한 우리는 얼마나 보살펴 주시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인생에 시련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서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첫째, 믿음을 잃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에는 나보다 강한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만 바라보면 무너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가장 강하신 하느님께서 나를 지켜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면 세상 시련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둘째,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소유가 많은 곳에 근심이 많아지는
법입니다. 걱정과 근심은 나눔을 통해서 없어집니다. 쌓아만 두려고 하고
남이 쌓아둔 것을 탐내는 삶이 우리를 황폐하게 합니다. 셋째,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나라와 주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가 왜 주님께 기도합니까?
나의 욕구가 채워지기를 위해 기도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참기도의 뜻은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느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행복의 비밀
-전삼용신부-
한 사람이 참 행복의 길을 찾고 싶어서 세상에서 제일 현명하기도하고 그만큼 재산도 많은 현자를 찾아갔습니다. 오랜 여행 끝에 그 집에 당도하였습니다. 산 정상에 있는 그 집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화려한 모습의 궁궐이었습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현자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자 온 수 많은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현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예, 저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러나 우선 저의 집을 좀 구경해 보십시오. 집 안에는 세계의 귀한 예술품들이 모아져 있고 정원은 세상 어디서도 보지 못한 식물들과 꽃들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기름이 담긴 숟가락을 드릴 테니 제 집을 구경하시면서 이 기름이 든 숟가락을 들고 다니십시오. 만약 집을 다 구경한 뒤에도 숟가락에 기름이 그대로 남아있다면 그 때서야 행복의 비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다른 손님들을 만나야 하니 그 동안 집을 다 돌아보며 구경하도록 하십시오.”
그 사람은 기름이 담긴 숟가락을 조심스럽게 들고 집을 돌아다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있는 예술품들과 볼거리들에 너무 정신이 팔려 어느 순간에 숟가락에 있던 기름이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말았습니다.
그 이후로는 걱정에 싸여 예술품이 예술품으로 보이지 않고 궁궐의 화려함도 정원의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몇 시간 후에 집을 다 둘러본 후 현자를 다시 만났습니다.
“집 구경을 즐겁게 하셨습니까?”
“아니요, 기름이 흘러내려, 그 걱정에 아름다운 것들을 보면서도 즐겁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한 번 기회를 드릴 테니 이번엔 잘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은 기뻐서 이번엔 숟가락에서 정신을 떼지 않으면서도 주위의 것들을 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집을 다 돈 후에도 숟가락에는 기름이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현자는 손님을 보며 말했습니다.
“이제, 행복의 길을 말씀드리지요. 행복의 방법은, 손님께서 하신 것처럼, 숟가락의 기름을 떨어뜨리지 않고 주위의 것들을 즐길 수 있는 기술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에 의하면 하느님 나라는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정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 즉 성령을 통하여 오는 행복인 것입니다. 성경에 성령은 기름으로 상징되고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그리스도’라 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기름부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 행복의 기름은 우리가 정신을 다른 곳에 팔면 조금씩 우리에게서 흘러내려 버려집니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기름이 빠져나가지 않게 집중해야합니다. 그래야 덤으로 세상 것들까지 즐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절대 내 안에서는 두 주인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내가 세상의 재물이나 육체적 욕망에 신경을 더 쓰게 될 때는 저절로 내 안에서 성령의 기름이 빠져나가 세상의 것들도 즐기지 못하고 ‘걱정’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걱정이 없는 것이 곧 행복입니다.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 하라고 하시며,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느님나라를 구하면 나머지는 덤으로 받게 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먼저 하느님나라를 찾겠다고 사제나 수도자가 되신 분들이 세상 걱정에서 벗어나 살게 되는 것들도 예수님의 이 가르침의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걱정이나 두려움을 없앱니다. 행복해지려면 먼저 내 안에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하느님나라가 육체적이고 세상적인 것들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일이 선행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랑하다
-깈찬선신부-
“그러므로 내일 걱정을 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인생을 오래 산 사람은 내일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래 살았다고 다 내일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미리 걱정해도 아무 소용없음을 깨달은 사람이라야 걱정 않습니다.
그러나 미리 걱정해도 아무 소용없기에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 진정 깨달은 사람이 아닙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 하심은 오늘을 살라 하심이기에
오늘을 산다는 것의 그 뜻을 알고
그래서 오늘을 사는 사람이라야 진정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러면 오늘을 산다는 것의 그 뜻은 무엇입니까?
오늘을 산다는 것은 지금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산다는 것은 지금 행복한 것입니다.
오늘을 산다는 것은 지금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산다는 것은 지금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오늘을 산다는 것은 지금 살아있음을 감사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을 산다는 것은 오늘 할 일을 지금 하는 것입니다.
지금 사랑합니다.
지금 감사합니다.
지금 용서합니다.
지금 화해합니다.
지금 기도합니다.
지금의 나를 사랑하고
지금의 내 옆 사람을 사랑하고
지금의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돈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 봅시다.
-김기현신부-
저는 관교동에 있는 뉴코아에서 수영과 가벼운 체력 운동을 합니다. 아침에 갈 때도 있고 오후에 갈 때도 있는데, 보통 오후에 운동이 끝나면 교보 문고 쪽 방향으로 해서 본당에 돌아옵니다. 그렇게 가는 길에 풀빵 파는 데가 하나 있습니다. 오토바이에 연결된 작은 포장 풀빵가게인데, 거기 안에 있는 부부 때문에 늘 눈길이 갑니다. 두 부부는 둘이 들어가면 딱 맞는 그 좁은 포장 풀빵가게 안에서 불만이나 불평이 없어 보입니다.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소박하고 순수한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참 행복해 보였고, 욕심이 없는 듯 보였습니다. 그분들은 많이 벌지 않아도 행복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필립 얀시라는 사람에 의하면, 성경이 돈에 관하여 우리에게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고 합니다. 첫째는 ‘돈을 어떻게 벌었는가? 합법적으로 벌었는가, 아니면 착취적 방법으로 벌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돈을 어떻게 쓰는가? 사리사욕을 위해 흥청망청 쓰는가, 아니면 고통에 처한 이웃을 돌보며 하느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사용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도 중요한 질문이지만, 더 중요한 질문은 세 번째 질문이라고 합니다. 곧 ‘돈이 당신에게 무엇을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런 질문들을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기뻐하고 무엇 때문에 낙심하는가? 내가 투자한 주식이나 부동산, 펀드의 시세 등락에 따라 일희일비하는가? 무엇이 나에게 진정 안정감을 주는가? 사업이 부도나고 예금통장의 잔고가 바닥나서 죽고 싶은 심정인가? ...’ 그러한 질문에 ‘예스’ 라고 답한다면, 조금씩 나의 삶이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전 본당에서 신학생으로 있을 때, 보좌 신부님이 오셨었습니다. 그래서 후배 신학생과 나, 그리고 다른 두 신학생이 신부님의 이삿짐을 날라드리고 정리해 드렸습니다. 그렇게 한 참을 정리하고 있는데, 보좌 신부님이 전 본당에서 떠나면서 받은 선물들을 뜯고 계셨습니다. 옷도 있고 화장품도 있고 돈 봉투도 있었습니다. 잠시 그것들을 정리하시더니 저희들을 불러서, 신부님이 받은 돈을 우리들에게 거의 비슷하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신부는 돈 모으면 안 돼...’ 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 기억납니다. 왜 신부가 돈을 모으면 안 될까요? 오늘 복음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말씀대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을 모으고 쓰는 데에 기쁨을 느끼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의 주인이 하느님이 아니라 돈이 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또 나의 삶이 돈에 의해 좌지우지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과정은 나도 모르게 서서히 아주 조금씩 이루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깨어 경계하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자주 ‘돈이 나에게 무엇을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돈이 내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하지 않는 성실함으로 하느님을 섬길 수 있을 겁니다.
오늘 하루,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마음을 다하는지, 돈을 섬기는 데에 마음을 다하는지 반성해 봅시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양승국신부-
<적멸보궁 가는 길>
한 몇 일 피정을 다녀왔습니다. 다들 팍팍한 세상 사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실텐데..."매일 놀면서 피정은 무슨 피정"하는 마음이 들어 형제들이나 직원들에게 많이 미안했습니다.
"누구는 팔자 좋네!"하실 것 같아 변명을 좀 댄다면 상습적인 일이 아니고 몇 년만에 한번 있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최근 중년기 증상이 심각해져서 꼭 필요했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늘 가고 싶었던 섬으로 갔었지요. "적멸보궁 가는 길"(이산하 저)도 보따리에 넣었지요.
섬에서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작가의 표현이 어찌 그리도 딱 들어맞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낯선 사람들을 만나다보면 슬픔의 종류와 뿌리가 얼마나 다양하고 깊은지를 느끼게 된다."
섬사람 특유의 투박함 속에 감춰진 기백과 여유를 볼 수 있어 기뻤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들 나름의 깊은 슬픔과 슬픔을 그저 말없이 견뎌내는 일상도 엿볼 수 있어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에서 만난 분들의 얼굴은 어찌도 그리 정겹던지요? 다들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듯한 편안한 얼굴들이었습니다.
안개로 인해 출항하지 못해 벌어진 아침 술판, 낯선 이방인들이 껄끄럽기도 할텐데 전혀 내색들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조금씩 자리를 좁혀 앉으면서 우리들 자리를 만들어주던 훈훈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안개가 끼면 안개가 끼는 데로,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데로, 폭풍이 오면 폭풍이 오는 데로, 때로 체념하면서, 때로 수용하면서, 때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저 견뎌내고 삭여내며 살아가는 그분들의 낙천적인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러워 보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현실이 고통스럽더라도 너무 걱정도, 낙담도, 실망도 하지말고 살아 갈 것이며, 그 날 그 날을 아버지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십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 날에 겪는 것만으로 족하다."
사실 우리는 너무도 너무 많은 걱정거리 속에 살아가지요. 물론 때로 최악의 상황도 가정하면서 냉철하게 대비하는 노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예 애초부터 실패를 전제로 일을 시작한다든지,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장애물을 상상하면서 고통받을 필요는 없겠지요?
요즘 돌아보니 살만큼 살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됩니다. 문득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달으며 섭섭함도 느끼지요. 그래서 하루 하루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하루를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일생의 축소판이지요.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를 늘 소중히 여기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는 예수님의 권고말씀은 지나치게 낙관적으로만 해석해서도 안되겠지요. 오늘 불충분했던 일들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도지지 않고, 그저 하루가 지났으니 "어쩌겠어?" 하는 식으로 살라는 말씀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일 걱정을 내일에 맡겨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매일 주어지는 모든 일들에 최선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한계나 부족함에 대해서 하느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부족하지만 내일이 있으니 다시 한번 힘을 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고 자신을 추스르고 내일 다시 한번 힘차게 새출발하자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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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걱정?
-김대선 신부-
얼마 전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친구에게 “요즘 무슨 고민 있어?”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재미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고민? 어! 오늘 점심 뭐 먹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친구는 자신을 걱정해주는 저를 안심시키기 위해
농담을 한 것이지만, 전화를 끊고서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만 보면 점심 식사 하나를 하는 것에도 걱정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한 끼 굶는다고 당장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닌데
먹는 것 하나에도 많은 걱정들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배불리는 일에는 참 신중합니다. 그렇다면 영혼을 살찌우는 데는 얼마나
고민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엇이든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은 아닐 것입니다.
현실에 허황된 것에 대한 걱정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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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걱정은 내일이 한다
- 전봉순 수녀-
지난해 겨울 성경반에서 공부하던 할아버지 한 분이 백혈병 진단을 받으셨다. 그래서 더 이상 성경 공부를 하러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고 작별인사를 하러 오셨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시는 할아버지의 눈물 고인 눈을 보니 나도 마음이 착잡했지만 그래도 명랑하게 “할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병명을 아셨으니 곧 치유되실 것입니다.” 하고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속으로는 나도 불안했다. 연세도 높으실 뿐 아니라 병원 치료비가 너무 비싸 할아버지는 항암 치료도 받으실 수가 없었고 한 달에 수혈 한 번 하는 것이 치료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성경반 분위기는 참 허전했다.
그런데 어제 우연히 수녀원 앞에서 그 할아버지를 만났다. 너무 반가워 수녀원으로 모시고 들어와서 차를 대접했다. 할아버지께서 건강해 보였다. 함께 오신 친구 분의 말씀에 의하면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단다. 몇 달 만에 백혈구 수치가 많이 올라가서 요즘은 수혈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할아버지는 하느님께서 지금까지 살게 해주신 것만도 감사할 뿐이라는 마음으로 지냈다고 하셨다. 그래서 내일은 없으며 지금 살아 있는 이 순간에 대해 감사드리며 살 뿐이라면서 편안하게 웃으셨다.
그렇다.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미래에 얽매여 오늘을 걱정 속에 살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하느님의 충만한 현존 속에 감사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걱정은 노년을 앞당긴다고 했다(집회 30,`24). 모든 걱정에서 해방되어 하느님 나라를 찾는 것, 지금 주어진 이 시간에 몸과 마음을 온전히 투신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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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을 보라
-김찬선신부-
아침 새벽
일어나 창문을 열면 뒤뜰이 저를 맞이합니다.
봄에는 꽃들이 새로움의 잔치를 벌이며 저를 맞이하였는데
요즘은 새들이 명랑함의 잔치를 벌이며 저를 맞이합니다.
어렸을 적에는 본 적이 없는 처음 보는 새들인데
텃새가 되어 버린 새로운 새들인 것 같습니다.
요즘은 4시 40분 쯤 동이 트는데
동틈과 동시에 이 새들은 재잘거림과 함께
부지런하고 활기찬 날갯짓으로 아침을 명랑하게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새소리를 들으며
“The early bird gets the worm.”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도 잡는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오늘 복음 말씀의 연상 작용이었을 것입니다.
아침 형 인간을 얘기하며 요즘 각광을 받는 말인데
부지런하다 하여 이 새들이 욕심껏 먹이를 모으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거둬들이다’는 말이 있고
‘모아들이다’는 말도 있는데
새들은 주어진 열매는 거두되 모아들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새 비유를 이 정도로만 생각을 하였는데
오늘 복음을 자세히 보니 그런데 그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거둬들이지도 모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아버지의 풍성한 자비와 한없는 신뢰가 드러나는 비유입니다.
그러니 부지런하다는 것은 욕심이 아니라
은총에 대한 믿음이요 성실입니다.
새벽을 열며
인천교구 사제연수를 마치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왔습니다. 어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사제연수를 떠나기 전에 모기 때문에 잠을 설친 것이 기억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트에 들려서 모기장 하나를 샀지요. 그리고는 기분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이제 모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하지만 바로 설치를 할 수 없었습니다. 방 청소를 비롯해서 이것저것 하다 보니 모기장 설치는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거든요.
밤늦은 시간, 모임을 마치고서 방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피곤해서 잠을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문득 낮에 사둔 모기장이 생각났습니다. 일주일 동안 방을 비웠으니, 만약 모기가 숨어 있다면 피에 굶주려 있었을 테니 제게 얼마나 사납게 덤비겠습니까? 하지만 꼼짝도 하기 싫을 정도로 움직이기가 싫었습니다. 빨리 잠을 자는 것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또 모기가 물어봐야 얼마나 물까 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지난번처럼 모기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는 것이 기억나면서, 피곤한 몸을 일으켜서 낮에 사둔 모기장을 꺼내어 설치를 했습니다.
간단하게 설치를 마치고는 모기장 안에 쏙 들어가서 잠을 잤습니다. 너무나 기분 좋은 잠을 잘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몸뚱이가 모기장 안에 있는 한, 모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지요.
제가 모기장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그리고 모기장 안으로 모기가 숨어 들어오지 않는 한, 모기에 물릴 염려는 없지요. 그런데 이 촘촘한 모기장이 쾌적한 잠을 보장하는 것처럼,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사는데 있어서 기분 좋고 쾌적함을 주는 것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얼마나 은총이며 감사할 일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이라는 울타리입니다. 주님이라는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어서 외부의 어려움들을 하나씩 이겨낼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울타리에는 믿음이라는 촘촘한 말뚝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서 외부의 어려움들을 막아주는 울타리가 점점 엉성해지고 부실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울타리 역할을 해주시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의 믿음 없음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등등……. 끊임없는 걱정으로 인해서 주님을 향한 믿음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나를 외면한다.’고 말하면서 주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만 있습니다. 그럴수록 울타리는 점점 엉성해지고 결국 나만 힘들어질 뿐입니다.
이제 우리들의 선택이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이제 나의 선택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요? 그럼으로 인해 나를 지키고 있는 주님이라는 울타리의 상태는 어떠한 것 같습니까?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빠다킹신부
우상 숭배
-박영봉 신부-
우상 숭배는 단지 이교(異敎)의 그릇된 예배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상 숭배는 신앙에 끊임없는 유혹이 됩니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이 아닌 것을
신격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잡신이나 마귀(예를 들어 악마 숭배), 권력,
쾌락, 인종, 조상, 국가, 재물 등 인간이 하느님 대신에 어떤 피조물을
숭배하고 공경한다면 이는 우상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마태 6,24)고
말씀하십니다.많은 순교자들이 ‘짐승’을 섬기지 않으려고,
짐승을 예배하는 것을 흉내 내는 것까지도 거부하여 죽어갔습니다.
우상 숭배는 하느님께서 유일한 주님이심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 숭배는 하느님과의 친교와 양립될 수 없습니다.
인간을 오직 이윤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는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돈을 섬기는 우상 숭배로 이끌며, 무신론의 확산을 돕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신뢰 회복
-엄재중-
살면서 점점 심각하게 느끼는 것은 먹고사는 일의 어려움이다. 월급은 해마다 아주 조금씩 인상되는 데 비해 물가는 왜 그리 빨리, 또 많이 오르는지. 아이들은 왜 그리 빨리빨리 크며 집값은 왜 그리 폭등하는지. 마흔을 넘기면서 가끔씩 전해지는 친구들의 부음은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런 내게 오늘 복음 의미는 무엇일까? 주님은 마치 절벽 끝을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버티고 있는 나에게 그것마저 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주님은 분명히 먹고 마시는 문제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먹고사는 문제와 당신을 섬기는 일이 양립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주님은 마치 당신이 안 계시는 것처럼 또는 그분께서 당신 자녀인 우리를 그대로 방치하실 분처럼 생각하는 나의 자세를 문제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먹고사는 문제가 마치 온통 내 힘만으로 가능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고방식 자체를 비판하시는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가 참으로 어렵고 중요한 일이란 것을 설마 너희의 창조주인 아버지께서 모르시겠는가?’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나를 그 노예가 되게 하고, 결국 하느님과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 하느님은 이런 나에게 그 집착의 손, 꼭 붙잡고 있는 손을 놓으라고 말씀하신다. 놓아라, 놓지 않으면 절대로 받을 수 없다. 무엇을 움켜쥔 손으로 다른 무엇을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오늘 주님의 말씀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다시 회복하라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보다 당신께서 나를 보내신 목적, 지금 당신께서 하시는 말씀에 먼저 귀기울이라는 것이다.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 박갑조 신부-
인생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목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 혹은 사람의 살아 있는 동안을 말합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습니까? 예전에 어르신들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내 하나 몬 무슨 걱정이 있겠노? 저 아들 묵일라꼬 이 고생 안카나!” 라고 말입니다. 우리네 사람은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래야 아니 할 수 없는 것이 인생길 아닙니까? 걱정하는 것을 어느 누가 취미로 건강에 좋아서 하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어르신들께서 자주 들리시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께서 “푹 쉬십시오. 가급적이면 스트레스 받지 마시고요! 그리고 음식 잘 잡수고, 잠 잘 주무시고요!” 라고 말입니다.
아! 그게 그래 쉽게 됩니까? 어르신들 그렇게 안하고 싶겠습니까? 그래서 어르신은 의료보험증을 들고 아침부터 오후까지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어르신께서 다닐 수 있는 의원을 쭉 둘러 내방하십니다. 물론 의사 선생님들께서 하시는 말씀의 대부분은 이미 외우고 계십니다. “어르신 어서오이소, 요즘 어때예? 좀 힘드시지예, 날씨 흐릴 때 더 하지예?” 등 말입니다. 그러나 이 상투적인 용어라 할지라도 필요없는 무가치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별 의미 없는 말투랄지라도 이 말의 뜻에 정감(情感)이 있기에 이 온정의 따뜻함으로 찬 기운이 도는 걱정을 데울 수 있다는 노인들의 내면의 신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 6,3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내일에 대해 ‘대책을 세우지 마라’ 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느님 당신께서 모두 다 마련하신다는 의미로 알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마태 6,32)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노인이 의사에게 신뢰를 둔다면 사람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는 순수한 신앙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린 생명일수록 보호자에게 온전한 의탁이 생명을 부지하는데 절대적이듯이, 오늘 현재 여기에서 모든 사건의 본질은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고 내어 맡기는 수고 곧 자신을 만족시키는 주체를 하느님을 어버이로, 주인으로 섬기는 본래전도(本來顚倒)의 노력이 바로 내면의 갈등 속에서 일어나는 그날의 고생이며 노고인 것입니다. 이 주도권을 본래대로 전도함의 연속이 부단함일 때 ‘충분하다’(마태 6,34)는 말씀입니다. 허면 어째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는 것이 고생인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살아 가는데 있어서 너무나 힘들 때 누가 대신 아파해 주었던가? 를 볼라치면 결국 아무리 친한 친구이고 가족일지라도 나의 정신과 육신의 병치레는 내가 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족에 대한 걱정은 가장의 몫이요, 자식에 대한 걱정은 부모의 몫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궁극적인 역할은 직접적인 관계에 놓인 장본인인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성안에 하느님이 어떤 직접적인 개입이 있으신가? 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오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어떻게 생명을 보존하고 가꾸시며 성장시키시는가를 말씀하시고, 또한 모든 만물의 주인이 이 세상(世上)의 어떠한 도예가보다도 더 섬세하고 면밀하게 보살피며 살갑게 하시는가를 말씀하시면서 이러한 자상하심의 능력이 바로 아버지이고, 참 주인이며, 하느님(마태 6,24)이심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겪는 고생과 하느님께서 나의 고뇌 안에서 어떤 보살핌을 하시는가를 연구하고 공부하며, 내가 주인이 아니라 이 결핍의 근원을 정화시켜 주십사고 맡기는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의 방식만으로는 도무지 믿을 수 없기에, 또 살아온 자신만의 방식으로는 도무지 확신이 서질 않기에 여기서 오는 갈등이 고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만히 있는 하늘의 새를 잡아다 놓고 말씀하시고 들에 핀 나리 꽃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솔로몬의 온갖 영화가 귀하냐? 들에서 핀 꽃이 귀하냐(마태 6,28-29)하면, 사실 우선적으로 와 닿는 것은 솔로몬의 지식과 재산과 권력이 더 귀하지요! 돈과 권력이 있으면, 대체로 인간사회에서는 안 되는 것보다 되는 것이 많고, 되는 것은 더 잘되고 말입니다. 그리고 못 배운 것 보다 많이 배운 것이 사람들 앞에서나 자신에게서도 더 자신감 있게 살 수 있잖습니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러한 모든 것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삶이 어디 이승만이 있다면야 누가 모르겠습니까만 사람의 욕심이 어디 한정이 있습니까? 이승뿐만 아니라 영원히 사별하고 싶지 않고 살고자 하는 것이 생명 안에 내재하고 있는 바람이요 희망이 인지상정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원주인이 목숨을 다루어야 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귀하다는 귀(貴)는 귀함 또는 값짐을 뜻하는데 참으로 귀한 것 중에 귀하고 온 우주의 모든 값진 것 보다 더 가치 있는분은 만물의 근원인 하느님께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 원래의 창조주께서 손수 어루만지셔야 원래 진면목이라 하며 창조 원래 의미가 드러나기 위해서 인간은 이승 살이를 하는 것이고, 건강과 솔로몬의 환경을 곁들여 주신다(마태 6,33)는 것입니다.
본래로 그날 그날 돌아가는 것이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이고 자기의 분수를 아는 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알아 모시고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생명’입니다.
-기정만신부-
제가 어렸을 적과 지금과 다른 것들이 많습니다만 어린 눈으로 바라볼 때 크게 바뀐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개를 집 밖이 아닌 집 안에서 키운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꽃이며 식물이 들녘에 더 많았는데 지금은 집 안에 더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꽃이 제일 예쁘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여러 가지 종류의 꽃 이름을 댑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론 들에 핀 꽃이 가장 아름답고 들에 핀 식물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그 이유는 들에 핀 꽃과 식물이 하느님께서 주고 계시고 원하는 ‘생명력’이 그 어느 것보다 강하기에 그렇습니다. 꽃시장을 몇 번 가 보았지만 재배되고 가꾸어진 꽃은 겉은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그 자체로 생명력을 보여주진 못합니다. 집 안에서 키우는 화초와 식물도 보기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주인의 관리가 조금만 소홀하면 금세 시들어 버립니다. 그만큼 생명력이 강하지 못해 그렇습니다. 이에 비해 들에 핀 꽃과 식물은 하느님이 주시는 공기와 태양, 때로는 강한 빗줄기와 강한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자신들의 생명을 강하게 키워 나갑니다.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무엇보다 ‘생명’입니다. 오늘 우리가 많은 수고를 했다 하더라도 그 안에 ‘생명’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사라지고 없어져 버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눈을 돌려 하느님이 주신 생명력을 뽐내는 들에 핀 한 송이의 꽃을 보며 우리의 삶도 ‘생명’을 키우고 나누는 삶이 되도록 겸손되게 오늘 하루의 삶을 주님 안에서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하늘에 나는 새를 보라.
-강영구신부-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라.
그대에게
창가에서 지저기는 새 소리를 들으면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새들은 이른 새벽부터 무엇을 노래할까요?
씨를 뿌리지 않아도, 그것을 거두어 곳간에 쌓아두지 않아도
먹여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렀을 것입니다.
예수 연구의 권위자 중 한 사람인 J.D.크로싼은 예수님은 농부였다고 주장합니다.
농부 예수의 눈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보입니다.
그분은 하늘에 나는 새들을 통해서 작은 생명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고 돌보시는
대자대비(大慈大悲)하신 하느님의 너그러운 손길을 느낍니다.
그분은 사람들의 발길에 밟히면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잡초 같은 들꽃을 통해서
그것들을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을 감지합니다.
당연히 그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무엇을 먹고 마시며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십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정작 사람들은 자신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잃고 염려하고 걱정하며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가슴 속에 살아계시는 하느님의 모상을 되찾게 되는 날
하늘에 나는 새들처럼 아름다운 노래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느님을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날
들에 피는 꽃들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운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당신의 오늘 하루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릴 수 있겠느냐?”
-양승국신부-
<자녀들을 위한 가장 좋은 유산>
저는 성장기에 있는 자녀를 둔 부모님들만 만나면 신신당부 드립니다. 제발 아이에게 목숨 걸지 마시라고. 아이 갖고 10달 동안 조신하게 지내셨지? 배 아프게 아이 낳으셨지. 자라면서 속은 또 얼마나 새까맣게 탔습니다. 아플 때 마다 들쳐 엎고 병원을 뛰어다닌 것도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리고 갖은 고초를 겪으시면서 아이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그만큼 하셨으면 저는 부모로서 할 일 다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그 어떤 동물이 18년, 19년, 20년이나 데리고 다니면서 입히고 먹이고 재우고 합니까? 물론 부모님들의 자식을 향한 걱정, 잘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다 그렇게 하는데, 나만 안하면 이상한 것 같다고 말씀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과한 것입니다. 부모님들도 이제 자녀로부터 좀 벗어나셔서 여유롭게 살 필요도 있지 않겠습니까? 부모님들 노후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녀에 대한 애정을 넘어 지나친 집착으로 인해 고생하시는 분들은 이제 그만 자녀를 자유롭게 놓아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구체적인 방법까지 제시해드립니다. 고등학교 딱 마치면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신경 딱 끄십시오. 용돈도 더 이상 주지 마십시오. 대학교 입학금과 1학기 등록금만 내주시고, 다음 학기부터는 모른 체 하십시오.
그렇게 해야 세상 쓴맛도 보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진한 밑바닥 생활을 해봐야 자생력도 독립심도 생겨나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 중에 가장 큰 것이 무엇일까? 저는 자주 생각합니다. 평생 걱정 없이 살 정도의 넉넉한 금액의 유산도 좋겠습니다. 평생 살아갈 도구를 챙겨주기 위한 교육적 투자도 중요합니다. 한 50평되는 아파트 하나 물려주는 것도 좋겠습니다. 한 2만평 정도 되는 대지를 물려줘도 좋아하겠지요.
그런데 그런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유산이 있습니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다보면 갖은 역경 앞에 서게 됩니다. 일이 잘 풀려나가다가도 한 순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지기도 합니다. 그 순간 좌절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다시금 일어설 줄 아는 낙관적인 인생관, 긍정적인 삶의 가치관을 지니게 해주는 것, 그것보다 더 큰 유산은 없습니다.
한 자녀 당 한 10억 정도 유산을 남겨두면 충분하겠지? 한 평생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겠지,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큰 오산입니다. 재산 있다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유산은 결국 신앙을 전수해주는 것입니다. 그냥 신앙이 아니라 제대로 된 신앙 말입니다. 살면서 고통이 다가올 때, 시련이 찾아올 때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신앙, 어떤 역경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런 낙관적인 삶을 유산으로 물려주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지나친 걱정을 자제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릴 수 있겠느냐?”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가장 큰 걱정은 아무래도 자녀들을 향한 걱정이겠지요. 어떻게 해서든 잘 풀려야 할텐데, 남보다는 나아야 할텐데,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게 살아가야 할텐데, 갖은 걱정에 밤잠 못 이루십니다. 그리고 부모님들 자신의 삶은 완전히 뒷전이고 자녀들을 위해 모든 것을 겁니다.
부모가 수명이 다 되어 임종 중에 있는데, 자녀들이 죽어가는 부모 앞에서 재산문제로 다투는 일, 한번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자주 봅니다.
자녀교육을 하실 때, 어떻게 해서든 남을 배려하고, 봉사하고, 사랑하는 인간을 만들려고 노력하신 것이 아니라 “돈이 최고다, 돈이면 다다, 어떻게 해서든 너는 남을 딛고 성공해야 한다, 너는 어떻게 해서든 최고가 되어야 한다”고 세뇌시킨 결과가 바로 죽어가는 부모 앞에서 유산 문제로 싸우는 것입니다.
부모가 임종할 때 자녀들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면 그 임종이 얼마나 행복한 임종이겠습니까?
“우리 부모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두려워 할 줄 알게, 하느님 사랑 느낄 수 있게,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신 부모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인간을 사랑할 줄 알고, 삶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우리 부모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있다가도 사라지는 것이 돈이라는 것, 돈에 목숨을 걸지 말라고 가르쳐주신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웰빙 유감
-김귀웅 신부 -
보통 각 성당은 대림절과 사순절에 특강을 마련합니다. 물론 여러 해 특강이
계속되어 좀 고루한 느낌이 들어 특강을 준비하는 신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하면 좀 더 많은 신자들이 특강을 듣게 할까 고민합니다. 아주 유명한 강사가 아니면 늘 성당에 나오는 고정 신자들만 강의에 참석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사순절도 아닌 보통 때에 뇌졸중과 치매 예방이라는 주제의 특강을 마련하였더니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물론 신자가 아닌 주변 지역 사람들도 많이
찾아주셨습니다. 성당 안에서조차 사람들의 우선적인 관심은 영적이고 내면적인
것이 아니라 건강과 같은 실제적인 가치들인 것 같아 씁쓸합니다. 요즘 온통
웰빙 일색입니다. 그냥 먹고 사는 것이 아니라 잘 먹고 건강하게 오래 살자는 데에 모든 사람의 관심이 쏠려 있습니다. 기존 먹거리보다 훨씬 비싸지만 건강에
좋다는 무수한 먹거리들이 새롭게 등장하여 불티나게 팔립니다. 운동기구에서부터 침대에 이르기까지 건강을 도와준다는 새로운 물건들이 텔레비전 광고시간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기 수련이나 요가 같은 것들 역시 철학은 없고 기능만 남아 돈벌이에만 사용될 뿐입니다. 그러나 이런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켜 충만한 기쁨으로 살아가게 하고, 인격적으로 더욱 성숙해서
너그럽게 지내며,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욱 증진시키는 것들이 아닐까요.
걱정하고 염려하지 말라
-김웅태 신부-
우리는 살아 나 가는데 있어서 자주 걱정을 하게되고 괴로워하는 수가 많습니다.
이 근심 걱정, 누가 일부러 하기 좋아 서 하겠습니까마는, 그것은 자기 자신이 혼자서 자신만을 믿고,
스스로 하느님이 되어서, 그 문제를 해 결 하려고 하는데서 온다고 하겠습니다.
즉, 나에게 어려운 일, 근심스러운 걱정스러운 일을 당할 때, 그 일을 해결하는 것을
내 힘으로 만이 할 수 있다는 데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 일을 도와 주시는 하느님이 계시기에, 그분과 함께 그분에게 의지하면서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염려할 필요가 없음을, 그리고 해도 소용이 없음을,
일곱 가지의 반대 이론을 들으시면서 말 씀하십니다.
1) 너희는 먹고 살 걱정에 근심이 쌓이지만, 자기 목숨을 한 시간인들 늘릴 수 있느냐 ?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려고 음식을 먹지만, 소화시키고 기운 차리게 하고, 살 힘을 내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숨을 하느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믿 는다면, 이 목숨을 이어 가는데 필요한 것도
그분이 염려하고 계시니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의지하며 살 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새"가 어떻게 살아 가는지 보라고 하십니다.
당장 굶어 죽어 도 먹을 걱정을 할 줄 모르고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창조주의 섭리대로
살고자만 하는 모습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3) 염려는 아무데도, 어떤 경우에도 소용이 없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염 려해도, 우리 키의 한치도 늘리지 못하는 처지에서 염려가 헛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상 무능하면서도 무엇인가 할 줄 아는 것처럼 염려하는 것은 헛된 것입니다.
4) 하느님은 꽃을 어떻게 자라게 하시 고, 어떤 모습으로 키우고 계시는가를 !
또 어떻게 꾸미시는가를 생각하여,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5)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은 우리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 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한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불신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염려는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6) 예수님은 염려와 걱정을 없애는 방법을 두 가지로 일러 주시는데,
첫째로 무엇보다도 하느님 나라와 자신이 의롭게 되는 것에 마음을 쓰라는 것 입니다.
우리가 근심중에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면, 걱정은 물러간다는 것입니 다.
내 생활 자체를 내가 지배하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뜻에 맡기고 할 바를 해 나갈 때,
염려는 없 어진다는 예수님의 확신입니다.
둘째로, 내일 걱정을 하지 말고, 하루 괴로움 은 당일에 겪는 것으로 걱정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의 생명도 어 떻게 될지 모르면서, 내일 걱정까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일, 내일 살아있지 못하다면, 네 자신의 것 이 아닌 남의 세상을 염려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날 그날에 충실하고 하느 님이 내일을 함께 하신다는 믿음과 함께 그분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믿음의 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구하시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은 덧붙여 받게 될 것 입니다."
(마태 6, 33)
보통, 사람들은 무엇보다 먼저 자기 생활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필수품들을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고 그것도 모자라 야근까지도 하며 오직 일에만 전념합니다.
그 일이 좋아 서 하는 사람은 드물겠지만 그 일을 통해서 얻어지는 노동의 댓가 때문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먹 고 사는 것이 문제가 되어 일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먹고 사는 데에
넉넉하면서도 재물을 모으려 는 욕심 때문에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혁신적인 사고방식을 제시하십니다.
즉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하라는 것입니 다.
자기자신을 바쳐 하느님을 추구하며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도록 최선을 다하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매일 매일 필요한 것을 보 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만을 위해 마음을 쓴다면, 그 때에는 주로 이 세상의 것들만을 추구하게 될 것이며,
드디어는 그것들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만이 그의 진정 한 관심거리가 될 때 그 사람의 마음 속에는 하느님 없이,
자기 자신의 힘에만 의존하려는 유혹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거듭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너희 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재물을 추구할 때, 그 재물이 당장은 그를 만족시 켜 주지만 하느님을 잃게 된 것이고,
하느님을 추구할 때에는 비록 재물은 없지만 그만큼 하느님께 의존 하고,
하느님을 소유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재물이 비록 넉넉치 못하더라도, 하느님께 마음을 두고 사는 생활, 하느님을 소유한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얻는 것 입니다.
신앙인들 중에는 하느님을 모시는 기쁨이 크기에, 세상 재물 에 마음을 두지 않고
마음 편하게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긴다'는 정신은 하루하루가 고된 생활 속에 엮어지는 사람들의 마음을 편하고
여유있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믿고 마음에 여유있는 삶을 가져봅시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 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일, 옷 입는 일에 신경쓰지 않았지만 언제나 행복하셨고
하느님과 일치된 기쁨속에 사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 의, 식, 주 문제에 신경을 쓰고 과소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먹는 것, 하루의 건강을 유 지하기 위해 적당히 먹는 것이 아니라 남은 굶어 죽는 데도
미식을 즐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 혓 바닥, 곰 발바닥, 꼬리곰탕 등 입는 것 - 적당히 단정하게 입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일각에서 는 잠옷 한 벌에 200만원하는 옷을 입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싼 옷만이 자신을 나타낼 수 있다고 생각하 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얼마나 불행합니까 ?
어떤 사람은 20,000짜리 옷을 입고도 품위가 유 지되는데 그는 200만원으로 꾸며야 품위가 유지된다면
얼마나 인간적으로 약한 것입니까 ?
주택문제 - 오늘날 집없는 사람도 많으며, 아파트 하나 마련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집없는 사람의 처지 를 생각하지는 않고 그것을 통해 돈을 벌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일 때 하느님 편이 아니라 재 물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의, 식, 주 그것은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수단에 불과 한 것입니다.
귀한 것은 우리의 몸이며 하느님과 함께 하는 마 음입니다.
인간이 이러한 것에 적절히 마음쓰고 하느님을 소유함으로써 얻 는 기쁨을 누릴 때 진정 행복한 것입니다.
마음에 욕심이 차 있으면 아무리 많은 재산도 항상 부족하고 그에게 행복을 주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안빈낙도의 정신', 여유있는 마음, 순리대로 사는 마음, 하느 님과 함께 하는 마음 입니다.
하루의 수고를 통해 입을 것, 잘 곳, 먹을 것을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 사드리고,
주신 재화를 하느님의 뜻대로 사용하는 여유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하루의 괴로움은 그날 겪는 것으로 족하다'하신 예수님의 말씀 은
우리에게 내일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훌륭한 미래를 위해,
미래 속의 계획을 위해, 오늘을 더욱 충실하게 살라는 말씀 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엔 하느님께 대한 강한 희망과 신뢰 가 내포된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 내일도 변함없이 주시는데 왜 내일이 없 는 것처럼 그 내일에 대해 걱정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루의 수고로움으로 우리에게 먹을 것, 입을 것, 잘 곳을 마련해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매일 충실하게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되도록 합시다. ♡
-권순호신부-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세가지 이야기 들려주겠습니다. 첫 번째는 어느 성인의 이야기입니다. 옛날 옛적에 유명한 성인이 한 분 사셨습니다. 성인의 성덕이 너무나 뛰어났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인의 모습을 보고 회개하여 하느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성인은 나이 들어 곧 이승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성인의 업적을 높게 보시고, 죽음을 앞 둔 성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너도 다른 사람들처럼 나이가 되어 이제 곧 죽어야 한다. 하지만 네가 100년을 더 산다면 그 동안 너를 보고 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나를 찾게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백 년을 더 살아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성인은 곰곰이 생각하더니, “그냥 제 명대로 살다가 죽으렵니다.”라고 하며 하느님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의아하게 생각한 하느님이 성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성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백 년을 더 산다면, 사람들이 하느님을 찾는 데 관심을 가지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백 년을 더 사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저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처음 몇 년 동안 영어를 익혀야 한다는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영어 교과서를 조금 더 보지 않고, 영어 회화 태이프를 틀어 놓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문득 오늘 복음이 떠 올랐습니다. “너희가 아무리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이라도 더 늘릴 수 있느냐?” 내가 아무리 걱정을 하더라도 오늘 안 된 영어가 당장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해 먼 나라에 와서 공부하고 있으면서, 저는 진정으로 구할 것,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는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날 밤 이후로 영어의 걱정이 저를 엄습할 때 저는 영어를 잘하기를 기도하기 보다는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을 구하도록 기도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세 번째는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남들 못지 않게 자랑할 것이 정말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전통 유대인 엘리트 교육을 받아 학식을 겸비하였고, 로마시민으로서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선포한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기 위해 흔히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만 것을 모두 쓰레기처럼 버렸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진정으로 자신이 구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만 얻으면 결국 다른 모든 것도 덤으로 얻게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자신처럼 다른 사람들도 또한 가장 값진 것을 구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다른 사람들이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보도록 자신이 가장 나약해지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면서 혹시 제사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많을 수 있습니다. 진정으로 구해야 할 것, 걱정해야 할 것을 걱정하지 못하고, 쓸 데 없는데 마음을 두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걱정한다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고, 비록 얻더라도 영원히 간직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믿음이 약한 저희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다른 모든 것도 곁들여 영원히 얻게 될 것이다.
<내일 일은 걱정하지 마라.>
-박상대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다.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함께 있으니, 하늘의 재물에 마음을 두라는 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요지(要旨)였다. 하늘에 재물을 쌓는 방법은 재물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쓰는 것"임을 우리는 알았다. 쓴다는 것을 아무렇게나 쓰는 것으로 알아들으면 안 된다. 여기서 재물을 쓴다는 것은 베푼다는 것이다. 따라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재물을 섬기는 것이고, 재물을 쓴다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된다. 선택은 자유다. 재물을 모으는 재미로 거기에 마음을 두고 살아감으로써 재물을 섬길 수도 있고, 있는 재물을 잘 사용함으로써 하느님을 섬길 수도 있다. 문제는 둘 다를 선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재물과 하느님을 적당히 조절하여 타협(妥協)과 화해(和解)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으니, 재물과 하느님을 아울러 섬길 수는 없는 것이다.
작금(昨今)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라. 오늘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다. 하느님보다는 황금을 더 섬기고, 황금이 생(生)의 모든 것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 의식주(衣食住), 즉 먹는 것, 입는 것, 사는 것에 가진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황금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황금으로 자신의 머리카락 색깔을 희게도 하고 검게도 하며, 또는 다른 색으로 바꾸기도 하고, 황금으로 자신을 입히며, 황금으로 자신의 모습을 더 자신 있게 바꾸며, 황금으로 멀쩡한 집을 뜯어고쳐 사치스럽게 꾸민다. 결국 사람들은 황금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곧 재물을 섬기는 사람이며, 재물에 종속된 사람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하다. 재물과 하느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예수께서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재물도 하느님도 사람의 전부(全部)를 원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시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황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황금만능주의 때문에 황금으로 인한 걱정 또한 많다. 있어도 걱정이고, 없어도 걱정이다. 따라서 재물에 마음을 두고 이를 섬기며 사는 사람에게는 걱정이 끊일 날이 없다. 하느님을 섬기는 자에게도 걱정은 있다. 사도 바울로에 의하면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까"(1고린 7,32.34) 하고 걱정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걱정이 무슨 대단한 걱정이겠는가?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다. 재물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지만 하느님은 당신을 섬기는 사람에게 자유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 자유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33절)을 추구하는 자유로움이며, 동시에 신앙인의 기쁨이다.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말씀중심)> : † 재물에 대한 걱정 †
오늘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재산관리면에서 두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이유와 일상에 필요한 재물에 대한 근심 걱정에 대한 주제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제복음에서 이미 묵상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과 물질관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 재물을 땅에 쌓아 두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 재물에 너무 집착 또는 탐닉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 재물을 하느님과 동시에 두주인으로 섬기는데 문제가 있다...입니다.
- 사람이 돈을 사랑한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하느님과 재물이라는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오늘복음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6,24입니다.
그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우리의 세상살이에서 돈을 포함한 재물의 비중, 위치가 얼마나 큰지를... 심지어 대중가요에도 '뭐니뭐니해도 Money지...라는 노래가 노래방에서 인기를 끌고 있답니다. 돈이라면 부모도 남편도 아내도지식도 버리는 사회를 우리는 지금 살아가고 있습니다. 황금을 돌같이 보라는 이야기를 했다가는 미친놈이라는 소리를 들을 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회에 나가보면 돈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 한푼도 없이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가는 나는 참 재주가 좋은 사람(?)인가 봅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는 안쓰고 사니까, 살아지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특수한 환경이니까.....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말씀은 우리같은 특수한 처지에 있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질중심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일상인들은 돈을 포함한 재물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돈이 우리 인생의 전부인양, 우리의 주인의 자리에까지 올라가 있는 모습도 종종 느낍니다. 주인이란 종을 마음대로 부리며 지배하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는 존재입니다.
성서에는 인간이 섬겨야 할 주인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 6,16의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남에게 내맡겨서 복종하면 곧 자기가 복종하는 그 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죄의 종이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종이 되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말입니다." 라고 바오로 사도는 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지으신 인간에게는 섬겨야 할 주인이 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이시고, 다른 한 주인은 인간의 탐심을 지배하는 재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어차피 이 두 주인 중 어느 한 주인을 택하여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섬김으로 하느님의 종이 되느냐? 아니면 물질을 섬김으로 재물(돈)의 종이 되느냐? 자신이 섬길 주인을 명백히 선택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1.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주님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주인이란 하느님과 재물을 가리킵니다. 재물은 사람의 마음을 지배하는 주인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전도서 10,19 에서는 "사람은 즐거우려고 잔치를 벌인다. 술이 있어야 살맛이 있다.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준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전도서 말씀은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렇다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솔로몬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인간사를 이야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하느님을 믿지 않고 재물, 여인 등을 우상으로 섬기면서 솔로몬 시대 이후 이스라엘이 망해가는 역사적 배경을 전도서가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놀복음에서 주님의 말씀은 주된 내용은 무엇이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우리의 향심하는 자세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여라"(마태 22,37)라는 말씀대로 하느님을 섬기고 있느냐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의 사랑이란 언제나 한곳에 집약, 칩착하기 마련입니다. 하나를 사랑하면 하나는 미워하거나 무관심하기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신앙 생활을 보면 하느님을 너무 무시하고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여기서 사랑이라는 말씀을 하실 때 아가파오( )란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사랑이란 말은 하느님이 죄인을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신 절대적인 사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하느님이 아닌 재물에 바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복음의 핵심내용입니다.
이상의 서론에서 말씀했듯이 우리는 하느님과 재물에 있어 어느 편을 사랑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태도를 나타내야 합니다. 물질을 섬기던가 하느님을 섬기던가 하느님 앞에 거짓 없는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재물이 있던지, 없던지, 잘살던지, 못살던지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고 하느님만을 섬기는 신앙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관점에서 오늘복음을 세부적으로 묵상하겠습니다.
2. 그리스도인의 걱정(마태 6,25-32)
그리스도인들에게 떨쳐 버리기 어려운 지난날의 습성들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병들어 가는 무서운 암적 존재가 바로 근심과 걱정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걱정에 대하여 많은 경고와 함께 조언을 주십니다. 걱정에 대한 경종은 걱정이란 백해무익하다는 것이고, 조언은 걱정해서는 안된다, 또는 걱정해 보았자 아무 의미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무엇때문에 걱정하는 것일까요? 근원적인 것을 따져 보면 의식주에 관한 것입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이 세 가지 문제는 인간 생활에 기본 요소들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듣고 우리 육신적인 생활에 관한 근본 문제에 대하여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1) 걱정은 왜 무익한 것인가?
성서에는 인간의 걱정은 무익한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인간은 자기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없다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마태 6,27)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걱정이란 말은 메리므나오( )로 근심한다, 염려한다, 관심을 가진다고 하는 뜻입니다. 걱정은 근심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기쁨을 가져가고 대신에 두려움을 안겨 주는 것입니다.
2) 사람은 자신의 머리카락 한 개도 희게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너는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나 검게 할 수 없다."(마태 5,36)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의 몸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일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이 하느님이 주관하시는 일에 걱정한다는 것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3) 인간은 자신의 생사 화복에 대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야훼께서는 사람의 생사를 쥐고 계시어 지하에 떨어뜨리기도 하시며 끌어올리기도 하신다. 야훼께서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가멸지게도 하시며 쓰러뜨리기도 하시고 일으키기도 하신다. 땅바닥에 쓰러진 천민을 일으켜 세우시며 잿더미에 뒹구는 빈민을 들어 높이셔서 귀인들과 한자리에 앉혀주시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삼상 2,6-8)고 하셨습니다. 다시말하면 사람이 자신의 건강, 가정, 사업 등에 대한 걱정은 결국은 자신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급기야는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이유가 그 시발이 세상에 대한 염려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2) 걱정은 왜 오는가?
주님은 걱정하는 일에 대하여 이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마태 6,30-32)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걱정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적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이 약하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1)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사람이 이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못할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어 그 마음속에 근심 걱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담대한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신실하시며 언제나 자기의 영광을 위해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사람은 아무 일에나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2) 하느님이 자기를 돌보고 계시다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의 믿음은 적은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걱정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형 에사오의 얼굴을 피하여 하란으로 피신해 가는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느님은 야곱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주다가 기어이 이리로 다시 데려오리라.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어줄 때까지 나는 네 곁을 떠나지 않으리라"9창세 28,15)고 하셨습니다.
이와같이 주님은 우리에게 내가 이 세상 끝날 까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것은 나를 돌보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위험한 길에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생활의 두려움에서 나의 방패가 되어 주시고 산성이 되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3)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신앙은 약한 믿음입니다. 인간의 걱정은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는데서 나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의 모든 염려에 대하여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을 의뢰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걱정에 대한 성서적인 해답은 그 걱정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베드로1서 5,7아세는 "여러분의 온갖 근심 걱정을 송두리째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여러분을 돌보십니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복음에서 보듯이 하느님은 걱정 많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거나 거두거나 곳간에 모아들이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 먹여주신다. 너희는 새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목숨을 한 시간인들 더 늘일 수 있겠느냐?
또 너희는 어찌하여 옷 걱정을 하느냐?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 입지 못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아멘)
3. 그리스도인이 걱정없이 복된 삶을 사는 방법(마태 6,33-34)
앞에서 묵상했듯이 이렇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시며 걱정을 알아서 해결해 주신다고 했으니,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의 생애 중에 그 무엇보다도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 일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모든 축복의 비결이 바로 이 복음의 짤막한 말씀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인이 먼저 구해야 할 것(복의 전제조건)
구약에는 이방인이란 말이 자주 나옵니다. 그러나 신약에도 이방인이란 말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주로 우리 주님이 사용하셨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구약의 이방인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들을 가리킬 때 이방인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신약에 와서는 하느님께 버려진 사람들을 이방인이라 부른 것입니다. 구약 시대이거나 신약 시대이거나 하느님의 백성과 이방인들 간의 생활 방법이 달라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들도 거룩하게 되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도 이곳에서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과 하느님의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구분되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태 6,31-32에서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곳'이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입는 일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의 목적은 단지 이 일에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일은 아담이 타락한 후, 그 마음에 하느님을 두기를 싫어하게 되면서부터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생활에서 무엇을 구하는 생활을 해야 하는 것입니까? 주님은 이 문제에 대하여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고 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만 그들의 육신의 욕구만 채우려는 일에 그들의 삶의 목적을 두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일에 그의 생의 목표가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방법이나 삶의 방향이나 목적에 있어서 그들과 커다란 차이를 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원칙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아주 평범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이 있습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라는 기본 전제를 이해하고 믿음으로 받아 드릴 때 그리스도 안에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신 약속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의식주 문제에 관한 모든 걱정을 해결하고 오히려 이 문제에 대한 더 풍성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원칙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을 먼저 구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고 하신 것입니다. '곁들여 받게해 준다'고 하신 말씀은 더욱 풍성하게 주시겠다는 약속이십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오늘도 의식주를 걱정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가?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활의 우선수위를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지 않는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복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인간적으로만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하느님은 인간적 방법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아니합니다. 오직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원하십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고 하셨습니다(마태 4,4).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이같은 하느님의 법칙을 따라 움직이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이 법칙을 무시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느님의 축복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먼저란 말은 프로토스( )로 첫 번째, 우선이란 뜻입니다. 구하라는 말은 찾는다, 얻으려고 한다, 가지고자 한다의 명령어로써 찾으라, 얻으라, 가지라는 뜻입니다.
(i) 하느님 나라를 구한다는 말은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생활입니다. 즉 하느님 나라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생활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ii) 다음에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iii) 다음에 우리의 희망을 하느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희망으로 삼고 우리의 생애를 살아가는 생활이 그 나라(하느님 나라)를 구하는 삶인 것입니다.
(iv) 하느님의 나라는 전도로서 확장되어 나갑니다. 전도로 많은 사람들을 하ㄴ,님께 인도하는 일은 그 나라를 구하는 일입니다. 다음에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것이란 그리스도의 의를 말합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의는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우리의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뢰하고 그 의를 덧입는 생활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생활에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는 일입니다. 이 의는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용서로 나타납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나타납니다.
이상에서 묵상했듯이 우리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 나갈 때 하느님도 없고 구원도 없으며 희망도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방법으로 살아가지 말고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생활"을 원하십니다. 우리가 이대로만 따르면 주님은 우리의 생애에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반드시 실현천해 주실 것입니다.(아멘).........◆
[두올묵상팀]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전례중심)> : † 하느님과 재물 †
오늘 산상설교의 테마는 어제 복음에 이어서 재물(財物)에 대한 말씀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재물에 대해 항상 근심 걱정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오늘복음 묵상을 하기 전에 이솝우화에 나오는‘배고픈 여우 이야기’를 먼저 소개합니다. 혹시 들은 기억이 나시는지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날 배가 무척이나 고팠던 여우는 담에 뚫린 조그만 구멍을 통해 포도밭에 들어가 배가 터지도록 포도를 따먹고는 너무 행복하였습니다. 하지만 불룩하게 솟은 배 때문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결국에는 배가 다 꺼지고 난 다음에야 그 구멍으로 다시 빠져 나올 수 있었다는, 그래서 처음처럼 다시 허기진 배를 움켜쥔 채 살고 있던 산 속으로 돌아가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먹을 것, 즉 재물을 걱정하는 여우의 마음입니다. 마치 우리의 모습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복음에서 예수님은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을 주십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사람들은 지나치게 재물에 대한 걱정을 하고 있다고 보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은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좀 더 심하게 표현하면 그런 마음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마치 어린 자녀들이 부모를 믿지 못하고 쓸데없는 세상 걱정을 하는 것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로니아로 귀양갔을 때의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여지없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는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버리셨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언자가 나타나서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보시기에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신들을 포기하고 있으며 너무도 빨리 실망해 버리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죄중에 빠졌다 해도 하느님은 우리를 내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으 시며, 아무리 우리가 실패했다 해도 절대로 단념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든지 용기를 가지고 일어서기를 원하시며, 어떤 최악의 경우에라도 당신께 전적으로 의탁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지 않고 쓸데없는 일에 자주 걱정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하느님을 불신하는 것이며 하느님께 모욕을 드리는 것입니다.
특히 오늘은 재물과 돈에 대해서 함께 묵상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돈과 재물이 너무 좋은 것이기 때문에 자칫 하느님과 혼동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돈과 재물은 대단히 좋은 것이지만 그러나 하느님보다 더 좋은 것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돈 밑에 사람이 있고 그 밑에 하느님이 계신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깁니다.
언젠가 TV를 보는데 무슨 연속극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장면은 그랬습니다. 시동생이 대문을 열고 들어오자 "왜 대문을 잠그지 않고 들어오느냐."고 형수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시동생은 "대문을 열었다고 해서 진정한 우리의 재물을 가져 갈 사람은 없다."는 대답을 합니다. 멋진 대답입니다. 그 시동생의 대답이 오래오래 제 귀에 남았습니다.
진정한 재물은 무엇입니까?
옛날에 의가 좋은 어떤 형제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물 속에 뭔가 번쩍 비치는 것이 있어서 건져 보니 커다란 황금이었습니다. 그 형제는 가난했기 때문에 대단히 기뻤습니다. 그러나 배가 강 한가운데에 이르자 형은 황금을 물 속에 던져 버렸습니다. 동생이 깜짝 놀랐습니다.
"형님,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동생은 너무도 안타까워서 형에게 따졌습니다. 형이 말했습니다. "내가 황금을 얻기 전에는 네가 나에게는 둘도 없는 아우요 소중한 보물이었다. 그러나 저 황금을 얻고 보니 갑자기 저 황금이 너보다 더 소중한 보물로 여겨져 마음이 내내 괴롭고 산란스러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동생도 "형님, 참 잘하셨습니다. 실은 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저 하찮은 황금 때문에 저도 형님을 오해하면서 미워하고 있었습니다."하면서 동기간의 소중한 우의를 잘 지켰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재물은, 그 자체로는 선입니다.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그분 보시기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재물이 하느님보다 높은 자리에 앉을 때 재물은 악이 되고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 다니다가 길을 잃고 신앙을 떠나서 결국 격심한 고통을 겪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Ⅰ디모6,10).
돈을 사랑하는 것이 결코 나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뜻에 맞는 일이며 상당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아름답고 멋진 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보다 돈이나 재물에 더 의존하고 또 하느님보다 돈이나 재물에 더 높은 가치를 둘 때 그 재물은 악이 되고 악의 근본이 됩니다. 신앙인은 절대로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 말에도 "잘 버는 것이 중요하지만 잘 쓰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세상의 재물이란 내가 소유하고 있다 해도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재산뿐만 아니라 내 가족, 내 육신, 내 생명까지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는 그저 잠시 맡고 있는 관리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맡겨져 있을 때 정말 유익하게 써야 합니다. 여기서 잘 관리했던 사람은 재물 때문에 복받습니다.
오늘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들어야 합니다. 여러분을 살리고 구원하고 그리고 행복을 주는 것은 결코 돈이나 재물이 아닙니다. 검소하게 살고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나눌 줄 알고 베풀 줄 아는 사람,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스스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재물에 너무 빠지지 말고 하느님을 참되게 믿고 섬기도록 합시다. ........◆
[두올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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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복음묶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