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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일 금요일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오 11, 25-30)
Take my yoke upon you and learn from me,
for I am meek and humble of heart;
and you will find rest for yourselves.
For my yoke is easy,
and my burden light."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은 오로지 주님께 봉헌된 백성이므로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에 기초를 두고 살아야 한다. 그것은 율법을 실천하고 약속에 충실하며 진실하신 하느님을 아는 것이다(제1독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속죄 제물로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 우리에게 베푸신 그 사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써 우리 안에 머무르며 우리 안에서 완성된다(제2독서). 누구나 삶의 등짐이 있고 멍에가 있다.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을 예수님께 배우고 성실히 살아가면 어느덧 짐은 가벼워지고 멍에는 편해진다.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덜어 주시고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어린 송아지가 어미젖을 갓 떼고 나면 목에 고삐를 매어 끌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얼마쯤 자라면 코를 뚫어서 코뚜레를 걸게 됩니다. 힘이 세진 송아지를 다루기 쉽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돌 반쯤 지나면 소는 멍에를 메는 훈련을 합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짐을 나르다가 멍에에 익숙해지면 본격적으로 크고 무거운 짐을 나르고 논밭을 갈게 됩니다.
이렇게 일소가 되어 죽을 때까지 워낭을 달고 멍에를 메고 일을 합니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농촌의 풍경이지만 지난날 우리 농촌의 일소들은 순하고 충직하게 자신의 멍에를 메고 일생을 하루같이 일하며 살았습니다. 일소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코뚜레와 워낭을 떼어 냅니다. 이로써 일터와 사람과 떼려야 뗄 수없이 엮여 있던 삶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렇게 소처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일소가 코뚜레를 걸고 워낭을 달고 살듯, 자신의 삶의 멍에를 묵묵히 메고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삶의 코뚜레와 워낭을 떼어 낼 수 있을까, 사는 동안은 피할 수 없는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나아갑니다.
어느 누군가는 요즘은 눈치 빠르고 남을 속이며 약삭빠른 사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기 삶의 멍에를 메고 소처럼 정직하고 우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들이 진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연과 사건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아가는 그들이 참으로 하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
어느 집에 딸이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마당에서 잘 보이는 동편에 오동나무를 심었습니다. 딸이 걷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어느 정도 자란 오동나무를 잘라 버립니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이상하였습니다. ‘그럴 바에야 심지를 말지.’
그러나 오동나무는 다시 자랐습니다. 잘려 나간 자리에 싹이 돋고 하늘을 향해 손을 벌렸습니다.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아버지는 오동나무를 또 잘랐습니다. 아내는 그러한 남편이 참으로 이상했지만 너무 진지한 모습에 입을 닫았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오동나무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하늘을 향해 자라났습니다.
혼기가 찬 딸이 시집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딸의 나이와 똑같은 그 오동나무를 밑동에서부터 완전히 베어 버렸습니다. 며칠 뒤 아버지는 시집갈 딸의 장롱을 만들어 주며 말하였습니다. “얘야, 두 번 잘라 준 다음 자란 오동나무야말로 진정 단단한 재목이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란 나무는 속이 비어 좋은 재목이 될 수 없단다.”
자식은 부모의 고통을 먹을 때 성숙해집니다. 부모의 아픔을 먹고 자란 자식은 빗나가지 않습니다. 나이가 든다고 절로 성숙해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조명준 신부-
수레나 쟁기를 끌기 위해 멍에가 씌워진 소나 말은 결코 편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멍에가 편하고 당신의 짐이 가볍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신학교 시절 동료 신학생이 영성지도 신부님에게
선물로 받았다며 보여준 작은 이콘 속에 담긴 그림이 아직도 인상 깊이
남아 있습니다. 그 그림은 ‘엘 그레코’라는 스페인 화가가 그린 ‘십자가를 안고
가시는 예수’라는 그림이었습니다.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멀리 하늘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커다란 눈동자에는 절망과 고통이 아닌 희망과 광휘로 가득합니다.
십자가를 항상 고통스럽고 힘든 것으로만 생각했던 저에게 그 그림은
사랑으로 안고 가는 십자가는 더 이상 고통과 시련만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마치 자녀들을 위한 온갖 수고와 희생을 사랑으로 기꺼이
지고 가는 부모님들의 사랑처럼 말입니다. 지혜롭다는 사람들과
슬기로운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지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인 우리에게 십자가의 사랑은 세상을 구원하는 참된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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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심과 묵주기도
- 이상각 신부(수원교구 남양성모성지)-
남양 성모성지에는 야트막한 야산을 따라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지름 0.7미터 크기의 돌 묵주알이 4.5미터 간격으로 20단이 놓여 있다. 이곳에 찾아와 묵주기도를 드리는 순례자들은 단순히 묵주알 위에 손을 올려놓는 것이 아니라, 두 팔을 활짝 벌려 묵주알을 끌어안거나 마치 속삭이듯이 묵주알에 고개를 묻고 기도드리곤 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저는 언제나 묵주기도를 바쳐왔습니다. 저의 모든 근심을 묵주기도에 의탁했으며 그 안에서 저는 언제나 커다란 위안을 얻었습니다.”(「동정마리아의 묵주기도」 1항)라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말씀처럼 많은 신자들은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묵주알 한 알 한 알에 자신의 근심과 걱정을 말씀드리며 위안과 평화를 얻는다.
우리는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예수님 생애의 스무 가지 신비를 묵상하게 된다. 묵주알 한 알 한 알마다 ‘은총이 가득하신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며 그 신비 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들어가다 보면 성모님은 예수께서 어떻게 사람이 되셨고 복음을 선포하셨으며 고통 받고 죽으셨는지, 그리고 영광스럽게 되셨는지를 한 폭의 그림처럼 우리 마음에 펼쳐 놓으신다. 그 그림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모든 말과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그분들의 마음을 만나게 된다. 그러한 만남은 우리 마음에도 사랑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며 또한 우리가 그분들을 본받도록 이끈다. 이처럼 묵주기도는 우리를 예수님과 성모님의 성심으로 인도하는 길이며, 우리와 그분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사랑의 끈이다.
묵주기도 20단 신비 안에는 예수님의 사랑이, 예수님의 성심이 분명히 드러난다. 묵주알 한 알 한 알은 우리에게 예수께서 해주신 사랑을 일깨워 주며 그 사랑의 선물에 감사하게 하고 우리 또한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도록 만들어 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묵주기도를 바쳐 달라고 요청하셨다.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모욕을 안겨드리는 사람들을 대신해 우리가 예수님과 성모님께 드리는 장미꽃다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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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랑과 구원의 상징인 예수성심
- 경규봉 신부-
예수님의 성심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상징이라고 믿었기에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이 교회 안에 있었다. 11세기에 이르러 많은 이들이 예수성심을 공경하였고, 특히 보나벤뚜라(1220-1274), 메히틸다(1241-1299), 젤뚜르다(1256-1302)와 같은 성인이 예수성심을 공경하였다. 17세기에 이르러 예수성심께 대한 공경이 공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성 요한 에우데스(1601-1680)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예수성심 공경이 세계적으로 보급된 것은 프랑스의 방문회(The Visitation Order) 수녀인 성녀 말가리다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내리신 예수성심의 메시지를 통해서였다. 예수님께서는 2년 반 동안 성녀에게 70회나 발현하시면서 예수성심 축일 제정에 관한 내용을 포함하여 당신 성심에 관한 것을 계시해 주셨다.
1856년에는 교황 비오 9세가 예수성심 공경을 권장하면서 예수성심 축일을 교회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축일 설정 100주년인 1956년에는 교황 비오 12세가 예수성심 공경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한 회칙(Haurietis aquas)을 발표함으로써 더욱 구체화하였다. 비오 12세는 이 회칙에서 “예수성심께 대한 신심은 그리스도교의 실질적인 신앙고백 그 전부이다.”라고 하였다. 예수성심 축일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게 되었다.
예수성심을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다. 우리 죄로 인하여 창에 찔리신 예수님의 심장은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우리 죄를 아파하시는 예수님의 인격을 상징한다. 성 베르나르도는 “창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성심은 속 깊이까지 열려, 그 자비의 깊은 현의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드러났다.”고 말하였다.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예수성심에서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생수가 흘러내렸음을 믿었고, 예수성심을 성령과 함께 초자연적 은총의 근원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아담의 늑방에서 하와가 탄생했듯이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늑방(심장)에서 새 하와인 교회가 탄생했다고 고백하였다.
성 보나벤뚜라는 “십자가 위에서 잠드신 그리스도의 늑방(심장)에서 교회가 생겨났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사람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419, 37)라는 성서 말씀이 성취되도록 하느님의 성의(聖意)는 한 병사가 창으로 그 거룩한 늑방(심장)을 헤쳐 열어 우리 구원의 대가인 피와 물이 흘러나오도록 했다. 그분 성심의 은밀한 샘에서 흘러나온 이 피와 물은 교회의 성사에 은총의 생명을 베풀 힘을 주었고, 이미 그리스도 안에 사는 이들에게는 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 게 하는 생명수가 되었다”(생명의 나무에서)고 말했다.
예수성심은 예수님의 가장 중요한 기관으로 사랑이 가득한 예수님의 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사랑은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절정에 이르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늑방(심장)에서 피와 물을 흘리심으로써 당신 사랑을 보이시고 교회를 구원하셨다. 피와 물이 흐르는 심장은 곧 인간 사랑과 인간 구원의 상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자들은 예수성심을 열심히 공경함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확고히 다지고 많은 냉담자를 회개시켰다.
오늘 예수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그리스도를 깨닫고 알기 위해 주의 생애, 수난, 성체를 깊이 묵상하면서 주의 성심을 사랑하도록 힘쓰자. 성심의 사랑은 특별히 성체성사에 담겨 있으니 성체 앞에서 조배드리고 묵상하고 기도함으로써 공경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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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성심
- 김율석 신부-
"누구는 마음이 좋다" 또 "누구는 마음이 고약해서 가까이 갈 수도 없다" 할 때, 그 "마음"이란 공부하는 책에서나 나오는 말이거나, 제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적인 용어가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우리 모두의 제각기 다른 살아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란, 한 인간의 성품의 샘이고, 행동의 바탕이고, 그 사람의 사람됨을 말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바로 그 사람의 인격과 품위를 안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씨는 어떠하며, 어떤 마음을 바라고 있습니까? 아마 내게 실수가 있을 때 상대방은 나에게 용서해 주는 마음, 아량이 넓은 마음을 바라고, 어려움이 있을 때는 이해해 주는 마음, 힘들 때는 도와주는 마음을 베풀어주었으면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한 마음보다는 겸손한 마음을, 거친 마음보다는 부드럽고 온화한 마음을, 좁은 소견에 이기심 가득 찬 마음보다는 무엇인가 헌신적이고 봉사해 주는 마음을, 사랑이 메마른 각박한 마음보다는 없는 속에서도 오고 갈 수 있는 정이 가득 찬 열린 마음을 더 바랄 것입니다.
그렇게 바라는 마음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남에게 바라기 전에 자신이 바라는 대로 남에게 먼저 해 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하십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마음을 마태오복음 11장 29절에서 표현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은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보면, 성부께 대해서는 절대적인 순명으로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의향대로 행하심이 당신의 음식이라고 하시면서 죽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따르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러한 마음이 우리 인간에 대해서는 "잃은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루가 9,10), "생명을 해하러 오지 아니하고 오직 구하기 위하여"(마태오 18,1), "심판이 아니라 오직 생명을 주기 위하여"(요한 12,47), "양들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또 풍성히 얻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을 바치시면서"(요한 10,10) 우리를 대하시는 마음입니다.
99마리의 양을 버려두시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메시는 마음이시며, 탕자를 찾으시며 조건없이 기꺼이 맞아들이시며 기다리시는 마음이며(루가 15장) 또한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의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시고자 하시는 마음이며,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사실상 예수님은 당신을 찾고 회개하는 죄인을 항상 따뜻하게 사랑으로 대해 주셨던 것입니다. 죄악중의 막달레나를, 탐관오리 중의 자캐오를 그렇게 대해 주셨고, 나임의 과부의 어려운 처지를 보고 동정의 눈물을 흘리셨고, 당신의 마음을 외면하는 예루살렘을 향하여서도 눈물을 흘리셨으며, 십자가의 수치스러운 죽음을 통해서 당신 목숨까지 우리 죄의 속량물로 내어주신 마음이며, 성체 성사 안에서 이제는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밀떡과 포도주 형상으로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그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예수님과 함께 지냈고, 그 말씀들을 듣고 봄으로써 예수가 누구인가를 체험한 사도 요한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힘있게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예수님 앞에 안심할 수 있고 다시 힘을 가질 수 있고, 새로운 삶을 찾고 받을 수 있고,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떠한가를 다시 한번 살펴보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마음을 우리도 가지고 다른 이들에게 베풀어야 하겠고, 그러한 마음으로 우리를 대해 주시는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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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가 필요한 사랑의 표현
- 이봉하 수사-
어떠한 사건에 있어서 증인이 없는 경우 해당 사건은 미궁에 빠지거나 사건 해결에 장시간을 필요로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건을 처리하는 사람들은 최대한 많은 증인을 확보한 상태에서 하나하나 기록하고 해결해갑니다. 그러나 세상에 어느 사건이든 증인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과 성장과정, 죽음과 부활 사건 안에도 많은 증인들이 있습니다. 그 증인들은 당시의 명망가들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지만 간혹 예수님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 중에서도 바른 증언을 한 사람이 있었음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골고타 언덕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생생하게 목격한 사람은 군인들입니다. 당시의 사회구조상 군인들도 백성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군대라는 특수 집단의 속성상 권력과 집단의 이익을 위해 사건 앞에서는 자의반 타의반 바른 증언이 아닌 위증을 하였을 것이지만, 복음에 나오는 군인은 이름 없는 증인으로 등장합니다. 또한 그 사람의 증언이 성경에 기록되고 ‘증언’이 ‘참되다’라고 반복을 합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으로 모순된 증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존재와 예수님에 대한 증인들 중 이름을 남기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하여 말 한마디 잘못해서 자신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군인의 용기와 증언은 오늘 우리 주위에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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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은총의 샘
-조욱현 신부-
초기 교회에서부터 예수성심에 대해 언급되었었는데 이는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이루는 한 구성 요소로서 였다. 예수성심은 예수의 심장만을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강생의 신비와 수난과 죽음, 성체성사 설정 등을 통하여 보여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을 말한다(참조: 마태 11,29). 특히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을 사랑과 은총의 샘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상에서 군인의 창에 찔리어 예수의 늑방에서 물과 피가 나온 것을(요한 19,34) 천상 보화의 창고에서 무수한 은혜가 쏟아져 나온 것에 비유하였다. 즉 심장에서 흘러내린 물은 영혼을 깨끗이 씻고 초자연적 생명을 부여하는 성세성사를 상징하며, 피는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게 하는 영혼의 양식인 성체성사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마치 하와가 아담의 늑방에서 나온 것처럼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예수의 늑방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13세기 이래로 독일의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아 성심 공경이 성하였다. 교황 비오 12세(1939-1958)의 회칙에서 “구세주의 상한 성심에서 구원의 성혈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탄생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예수성심은 하느님이면서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원의와 인식, 사랑과 정서, 감정의 중추이며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근원이며 사랑의 표현이다. 동시에 인간의 사랑의 응답을 바라시는 하느님의 원의이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축일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키도록 한 것은 이 축일이 성체성사와 밀접히 연관되기 때문이다. 13세기 이래로 예수성심의 공경이 성하였지만, 1673년 12월 27일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에게 예수께서 발현하시어 성심공경과 성심축일의 제정을 요청하시게 되어, 성심께 대한 신심이 공적으로 세상에 전파되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로 대축일로 지내오고 있다. 이 날은 또한 한국 주교회의는 사제성화의 날로 정하여 사제들이 완덕에로 나아가도록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잘 지키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며 철부지 어린 아이들은 율법을 알지도 못하고 지키지도 못하는 무리들이다. 철부지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다. 하느님께서는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예수님을 따르는 철부지와 같은 사람들에게는 계시해 주셨다. 바로 예수님 당신의 아들 자신을 통하여 이렇게 알려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알게된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 안에서 위안과 안식을 찾고 또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법은 우리가 실천하면, 그만큼 큰 기쁨과 위안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도 가지려 노력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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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절한 사랑의 샘
-김귀웅신부-
어느 청년이 아름다운 한 아가씨를 너무나 사랑했다지요. 그런데 그 아가씨는 얼굴과는 다르게 독한 마음을 가진 아가씨였다지요. 아가씨는 청년이 정말로 자기를 사랑하는지 확인해야겠다며 자기를 사랑한다면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자기 앞에 가져오라고 하였다는군요. 아아,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그 말대로 어머니의 심장을 꺼내어 두 손에 들고는 아가씨의 사랑을 얻게 된 기쁨에 달음질쳐서 아가씨에게로 향하였답니다. 그런데 너무 서두른 나머지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어머니의 심장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지요. “얘야, 다치지 않았니? 조심하거라.” 자기를 죽인 못난 아들에게조차도 어머니의 사랑 가득한 마음은 결코 줄어들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바로 그런 마음일 것입니다.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이들을 바라보며 “아버지,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한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군사의 창에 찔려 피와 물을 쏟으셨을 때 그 피와 물로 온 세상의 죄를 다 씻어 없애고 싶으셨던 것이 예수님의 마음일 것입니다. 또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시달리며 허덕이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애타 하셨던 분, 그래서 밤이 새도록 밀려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손을 대어 고쳐주셨던 분. 그분은 열절한 사랑의 샘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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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래아 호수처럼 나누는 삶으로
-이기양신부-
교회는 6월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드러내신 예수 성심(聖心)을 특별히 공경하는 달로 정하여 성대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첫 금요일인 오늘은 ‘예수 성심 대축일’이자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사제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마음을 닮기를 바라는 뜻에서 우리 천주 교회에서는 이 날을 사제 성화의 날로 정한 것 같습니다.
사제들의 고민 중의 하나가 바로 이것이지요.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지만 세상에서 살고, 또 사목을 하다보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닌 것이지요.
저는 오늘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참으로 좋은 공동체, 하느님의 뜻 안에서 목자와 양이 평화롭게 살수있는 공동체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가를 오랜 시간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제안을 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갈릴래아 호수를 닮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상도 정도의 크기 밖에 되지 않는 나라 이스라엘에는 우리가 잘 아는 갈릴래아 호수가 있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던 요르단 강이 있으며 죽음의 바다, 사해(死海)가 함께 있습니다. 그 작은 나라에 어떻게 전혀 다른 성질의 호수와 바다가 공존하는지 신비롭기만 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생명의 호수입니다. 이스라엘을 찾아가다 보면 누구나 깜짝 놀랄 일을 목격하게 됩니다. 이집트에서 죽 따라 들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오아시스가 나타나는데 그곳이 바로 이스라엘인 것이지요. 끝도 없는 사막에서 어느 순간 오아시스로 바뀌는 장면이 여간 놀라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오아시스를 만들어 내는 근원이 바로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갈릴래아는 바다라고도 불리지만 민물로써 분명 바다가 아닌 호수입니다. 지중해를 끼고 있는 골란고원으로부터 흘러내리는 빗물을 모두 받아서 호수를 이룹니다.
그래서 갈릴래아 호수는 고기들이 아주 풍부합니다. 그곳에서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께 불림을 받은 제자들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물고기가 많고 새들이 많으며 땅이 비옥한 이곳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명이 넘치는 휴양지로 가장 사랑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에 비해서 사해는 많이 떨어져 있지 않지만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지요. 염분이 많아서 수영을 못해도 가라 않지 않으며 그 주변에는 풀도 거의 자라지 못합니다. 대단히 삭막한 그곳에서는 주변도 같이 죽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금방 의아심을 갖게 됩니다. 왜 그렇게 작은 나라에서 갈릴래아 호수처럼 생명이 넘쳐서 누구나 사랑하는 생명의 호수가 되고, 사해처럼 아무도 살 수 없는 죽음의 바다가 되었는지 몹시 궁금해지는 것이지요.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갈릴래아 호수는 골란고원으로부터 끊임없이 흘러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다시 요르단 강으로 흘려 보냅니다. 넘치는 경우가 없지요. 계속해서 받아서 다시 내려보내고, 받아서 보내는 것을 반복합니다. 그에 반해서 사해는 요르단 강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기만 합니다.
저지대에 있는 사해는 물이 새어나갈 틈이 없습니다. 받는 대로 모두 가지고 있을 뿐이지요. 사막지대이기 때문에 물은 계속 증발하기만 할 뿐 흘러 내려가는 것은 없습니다. 계속 고여 있는 셈이지요.
이처럼 삶과 죽음의 차이는 아주 간단합니다. 나누면 살고 움켜쥐면 죽는 것입니다. 너무나도 명확하지요. 생명의 공동체를 만드는 열쇠는 나누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받은 것을 끊임없이 나눌 때 그때 나는 더욱 생명력 있게 살아 움직이며 넘치는 은총을 받는 것이지요. 나누면 나눌수록 생명은 넘쳐납니다.
우리 시대가 갈수록 죽음의 문화에 휩싸이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단절이 되며, 모두가 외로움 속에 헤매는 이유는 너나 없이 움켜쥐고만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간에도, 부모 자녀간에도, 형제간에도 나눌 줄 모르고 움켜쥐기만 하여서 모든 관계는 생명을 나눌 줄 모르는 무덤이 되어버렸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지요.
옛날 우리가 가난했던 시절에는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또 부모와 형제를 위해서 헌신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나누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던 그 시절은 상생의 문화와 생명이 흘러 넘치는 정겨운 시대였지요.
이것은 사회와 가정에서의 만이 아니라 성당에서도 똑같습니다. 우리 본당 공동체가 참으로 복음적인 공동체가 되어 서로 사이좋게 도움을 주고받으며 우애 있는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다면 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나누면 됩니다.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시간과 마음을 나누면 되는 것이지요. 칭찬과 격려의 말을 나누고 배려와 인내심을 나누면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제가 먼저 모범을 보이고 신자들이 함께 따라 할 때 교회는 하느님의 자비로우신 사랑을 드러내는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아 저는 여러분께 갈릴래아 호수처럼 나누며 살아가자고 다시 한 번 제안합니다. 누구나 가고 싶고 누구나 머무르고 싶어하며, 편안하고 생명이 넘치는 공동체를 우리는 이룰 수가 있습니다. 나누면 가능한 것이지요. 그러한 공동체를 위해서 목자는 헌신하고 또 헌신하는 목자를 위해서 신자들이 기도할 때 그 공동체는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일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가 우리 모두의 기도 속에 이러한 아름다운 공동체로 더욱 성장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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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길잡이: 우리 인간의 육체는 또한 그 영적인 상태와 깊이 연결되어있다. 놀랄 때는 "간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안타깝고 애처로울 때는 "심장이 찢어진다."고 말한다. 우리 인간을 위한 하느님은 끝없는 사랑과 그 사랑을 사랑으로 갚지 못하는 인간의 배신은 예수님의 성심을 무한히 아프게 하는 것이다.
-유영봉 몬시뇰-
1.예수 성심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샘이다.
6월은 예수 성심(聖心) 성월이다. 태양이 점점 붉어지는 6월이다. 우리 교회는 매월 특별한 신심을 강조하며 성월(聖月)을 보낸다. 교회사를 보면 각 시대마다 특별한 신심운동이 교회 안에 일어나고 교회를 쇄신시켰음을 알 수 있다.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 전 교회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맞게 된 것은 1673년 12월 27일 프랑스 방문회 수녀였던 성녀 마르가릿다 마리아 알라꼭(St. Margaret Mary Alacoque, 1647-1690)에게 예수님이 발현하면서부터 이다. 예수님은 마르가릿다 마리아 수녀에게 발현하셔서 당신의 불타는 성심을 보여주시면서 예수 성심 공경과, 성심축일 제정을 요청하셨다. 비오 9세 때(1856년)전 세계 교회에 예수성심 공경을 지시하고 예수성심 대축일을 제정하였다. 그 후 1889년 레오 13세 교황은 전 세계를 예수 성심께 봉헌하셨고, 1956년 '성심 대축일 제정 100주년'을 기념하여 비오 12세 교황은 예수 성심 공경회칙(Haurietis aquas)을 반포하였다. 2차 바디칸 공의회 이후 대 축일로 지내고 있다.
2.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이란?
어떤 사람은 "왜 교회가 예수님의 심장, 그 살덩이를 공경하는가?"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인간의 영적인 상태와 그 상태를 표현하는 인간의 육체는 깊이 연결되어있다. 놀랍고 무서울 때 "간이 떨어진다."고 하고, 못마땅해하고, 시샘을 하면 "배가 아프다." 고 한다. 그리고 안타깝고 애처로울 때에는 "심장이 찢어진다."고도 한다. 예수 성심은 단순히 예수의 심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은 그 심장을 우상화함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우리를 위한 속죄의 제물로 쏟으신, 인간에 대한 비할 데 없는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자는 것이다.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은 교회 내에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특별히 교부들은 예수 성심을 사랑과 은총의 샘으로 생각하였다. 십자가 위에 매달려 계실 때, "한 군사가 창으로 예수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 피와 물이 쏟아졌다."(요한19,34)는 사실을 묵상하면서, 천상의 보고(寶庫)에서 무수한 은총이 쏟아진 것으로 비유하였다. 일찍이 비오 12세께서는 "구세주의 상(傷)한 심장에서 구원의 성혈을 나누어주는 교회가 탄생하였다."고 하셨다. 예수 성심께 대한 공경은, 당신을 낮추시어 인간의 모습으로 강생(降生)하신 그 사랑과,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당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신 그 사랑, 성체성사로 매번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밥으로 주시는 사랑에 바탕을 두고 있다.
3. 인간에게 비는 하느님이시다
예수님은 성녀 마르가릿다 마리아에게 발현하셔서 당신의 불타는 성심을 보여주시면서 "냉대와 인류의 죄악으로 고통받고 있는 나의 성심을 위로해 달라."고 애원하셨다. 인간에게 애원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렇듯 사랑을 주시는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비할 데 없는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에 인격적으로 응답하고자할 때 비로소 참된 영성 생활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마르가릿다 마리아 수녀에게 매월 첫 목요일 성체를 현시하고 한시간 동안 조배하면서, 자신의 죄와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속죄하는 마음으로 예수 성심을 위로하며 공경하는 성시간(聖時間)을 갖고, 매월 첫 금요일에 미사 영성체 하기를 9개월 동안 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약속하셨다.
매월 하는 성시간(聖時間)의 의미를 알고, 좀더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참여하도록 하자. 영성체와 성체조배를 할 때마다 "나를 위로해 달라1"고 애원하시는 예수 성심께 위로와 찬미를 드리며 우리 자신부터 회개하도록 다짐하자. 우리의 도움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이웃 안에서 우리의 사랑을 목말라하시는 주님을 뵙고 섬기도록 하자.
오늘은 한국교회가 정한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하다. 사제는 '하느님의 사람'이다.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이것을 받고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다오"(호세2,21-22)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한 모든 사제들이 자신들을 봉헌한 그 서품 날의 순수한 열정을 지키며 기쁨과 보람의 삶을 살 수 있도록 기도하자.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이여,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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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한 마음, 편한 멍에
-김찬선신부-
“고생을 하고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너무도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어머니 같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선 첫 번째 말씀,
고생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오라는 말씀이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따듯하게 합니다.
‘오너라.’는 말씀은 지친 자녀를 ‘어서 오너라.’ 하시며 반겨 안으시는
어머니의 넉넉하고 따듯한 품이 느껴집니다.
‘모두’라는 말씀은 나 같은 사람도 빼놓지 않으시겠다는
주님의 의지가 느껴져 우리를 안심케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무거운 짐을 없애 주겠다.’
‘고생을 면하게 해 주겠다.’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주님께서도 어머니의 마음처럼
우리의 무거운 짐도 벗겨주시고, 고생도 없애주시고 싶어 하실 것이고,
그럼에도 벗겨주시지 않고, 없애주지 않으시는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알고 느낄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은 더 큰 사랑의 마음입니다.
짐을 벗겨주시는 마음도 사랑의 마음이지만
짐을 질 수 있는 능력을 키우시고자 하시는 마음이야말로
이를 악 무는 더 큰 사랑의 마음이겠지요.
주님께서는 다음으로 우리에게 ‘안식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무거운 짐을 지는 고생을 하기는 하지만
마음만은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시겠다는 것이지요.
그러시면서 어떻게 무거운 짐을 지면서 안식을 누릴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제시하십니다.
그 방식이란 주님이 짐을 지는 방식이지요.
십자가를 지셨던 주님의 방법이랄까요?
그리고 그것이 편한 멍에를 메는 것입니다.
멍에가 편하면 짐이 가벼워집니다.
배낭이 몸에 딱 맞아 편하면
무거운 짐을 가볍게 질 수 있음과 같습니다.
군에 있을 때 배낭이 불편하여 고생을 하다가
몸에 맞는 배낭을 메니
배낭에 많은 것을 집어넣고 구보를 하여도
훨씬 편하게 뛸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편한 멍에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지지요.
거칠고 거세게 반항하고 거부하는 마음은
작은 짐도 견디기 힘듭니다.
처음 목줄을 매는 개가
목줄을 거부하면 할수록 더 목이 옥죄는 것처럼.
그러나 온순하게 받아들이면
더 큰 짐도 힘들지만 견딜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견딤을 통해 더 큰 힘이 생깁니다.
힘들다는 것은 힘이 들어오는 것이고
힘이 들어와야지 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힘들고-힘내고의 역학 관계입니다.
겸손한 마음이면 더 편하게 더 많은 짐을 질 수 있겠습니다.
온유한 마음 이상으로
짐을 져야할 사람으로 자신을 여기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짐을 져야 할 사람으로 자신을 여기는 순간,
‘왜 이것이 나에게?!’라는 마음을 거두는 순간,
자기가 지는 짐은 짐 또는 부담이 아니라
반기는 것 또는 어여쁜 것이 되고
짐을 지는 행위는 노역이 아니라 사랑이 됩니다.
온유와 겸손이 바탕이 되는 사랑의 마음,
이것이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주님의 거룩한 마음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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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마음, 거룩한 마음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대에게
오늘은 예수성심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고 예수님과 같은 마음을 가지려고 기도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오늘은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교회와 백성들을 위해서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한 사제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도록 기도해주시겠습니까?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마음에 쌓아두었다가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마음에 쌓아두었다가 악한 것을 내놓는 것이 아니겠느냐?”(마태12,350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필립2,5)
불가(佛家)에서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一切唯心造라고.
당신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예수님이 됩니다.
당신이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당신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情)을 가지게 되면 병들고 가난한 이웃들의 아픔을 당신의 것으로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진 당신은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들을 바라보게 되고,
예수님의 손길로 이웃을 쓰다듬고,
예수님의 가슴으로 이웃과 형제들을 품어줄 수 있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예수님 되십시오!(一明)
그렇습니다, 아버지
-김효성 수녀-
며칠 전 들은 이야기다. 어느 탄광 마을에 한 소년이 있었다. 광부인 아버지가 늦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자 아들은 갱 입구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을 지키던 소장 아저씨가 “얘야, 누구를 기다리니?” 하고 묻자 소년은 “아버지요” 하고 대답했다. 그 사람이 다시 “광부들이 갱에서 나올 때는 석탄가루로 온몸이 검게 되어 네 아버지를 알아볼 수 없을 텐데…” 하였더니, 소년은 즉시 “네. 하지만 제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아버지는 저를 금방 알아보실 거예요”라고 대답하더란다. 이 이야기는 며칠간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렇습니다, 아버지!” 하시며 아버지와 깊은 통교를 드러내신다. 마치 마음이 통하는 두 사람이 서로 알아보며 나누는 눈길처럼 예수님은 선하신 아버지의 뜻을 절대적으로 알아차리시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던 철부지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서였다. 당시 사회에서 존경받던 바리사이들이나 학식이 있다는 율법학자들과 달리 별로 아는 것 없던 촌뜨기 제자들이 마침내 주님의 파견을 받아 마을로 가서 주님 나라를 선포하고 기뻐 돌아왔기 때문이었다.(루가 10,17 참고) 그래서 예수님은 철부지 제자들의 행위를 보고 아버지의 선하신 뜻을 더 명백히 확인하신다.
마태오복음에서 보면 예수님은 첫 전도부터 계속 설교하시며 무리와 제자들을 가르치신다.(5·6·7장) 참된 행복·율법·사랑·기도·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그리고 여러 기적들도 행하신다.(8,9장) 병자를 고치시고, 풍랑을 잠재우시고, 마귀를 쫓으신다. 또한 제자들을 사도로 파견하신다.(10장) 그러나 예수님이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시던 동네에서는 오히려 사람들이 회개를 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그 도시들을 저주까지 하신 뒤(11,20-24) 곧 이어 기도를 드리신다. “아버지밖에는 아들을 아는 이가 없고.”
주님의 아버지는 우리 같은 철부지도 알아보시는 아버지가 아닐까? 우리가 믿고 행하는 작은 활동에도 기뻐하시며 당신의 선한 뜻이 이루어졌음을 흐뭇해하시지 않을까? 갱에서 나온 온통 까맣게 된 아버지가 아들을 알아보듯이 ‘우리 아버지’도 우리 철부지들의 작은 기다림에 얼마나 기뻐 달려오실지! 소년의 이야기는 오늘도 나를 주님께 다가서게 격려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 -양승국신부-
<친애하는 신부님들께>
수도회에 첫발을 들여놓던 시절, 당시 제가 지니고 있었던 각오나 목표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꼭 성인(聖人)이 되자. 성인이 되는 것이 제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하루 온 종일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냈습니다. 주님께서도 그런 제 마음을 알아주셨던지 매일 주님 은총이 단비처럼 제게 내리더군요.
첫서원을 하던 무렵, 목표치가 눈에 ‘확’ 띄게 하향조정이 되었습니다. 첫 마음이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지금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수도생활의 연륜이 좀 더 쌓이면 나아지겠지? 열심히 노력하면 성인(聖人)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사제서품을 받던 무렵, 부끄럽지만, 목표치는 더욱 밑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성인(聖人)은 힘들겠구나. 그렇지만 아이들과 신자들에게 내 삶을 나눠주는 착한 목자는 되어야지”라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세월이 좀 더 흐르면, 나이를 좀 더 먹으면...이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5년, 1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더욱 부끄럽지요. 요즘 각오는 “적어도 후배들에게,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사람이 되지 말자. 어떻게 해서든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존재해야 할텐데...너무 비참하고 초라해지면 안될텐데...”하는 간절한 소망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거품이 제거된 제 모습은 참으로 비참하기만 합니다. 결국 의지할 곳은 하느님 밖에 없습니다.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대단하지도, 찬란하지도 않습니다. 뭔가 신비롭고, 뭔가 특별한 그 무엇이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사제서품을 통해서 한 사제의 삶이 예수님의 목자로 거듭나지만,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닌 나약함, 갖은 인간적 결함, 그간 받아온 상처, 앞으로 지고가게 될 십자가는 그대로 안고 사제생활을 시작합니다.
교우들은 사제들을 향해 초인(超人)을 기대하지만 우리 사제들은 교우들과 다름없는 똑 같은 인간입니다. 때로 휘황찬란한 세상의 유혹 앞에 맥없이 무너지기도 하고, 때로 너무도 부담스런 직무에서 훨훨 떠나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합니다.
그래서 사제들을 위한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사제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자들의 열렬한 기도입니다.
사제들의 인간적 부족함 앞에 실망할 때도 많겠지요. 사제들의 나약한 모습 앞에 슬픔도 크겠지요? 그럴 때 일수록 더 열심히 기도해주십시오.
차별대우 받고 미움 받고 자란 아이의 가슴속에는 깊은 상처만이 차곡차곡 쌓여갑니다. 그 아이에게서 남을 생각할 줄 알고, 이웃사랑을 실천할 줄 아는 신앙인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매일 손가락질 받고, 밥 먹듯이 비난만 당하는 사제는 점점 하느님과 멀어져갈 것입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더 잘 사랑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많이 받은 사제일수록 기도를 더 잘하는 사제, 그리스도를 닮은 사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사제 성화의 날을 맞아 한 평신도의 권고를 깊이 묵상해보았습니다.
“사제들이여, 여러분은 저희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서로를 사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안내해주기 위하여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입니다.
왜 여러분이 불안하고 불만족스러우며 분노에 차 있어야 합니까? 왜 다른 목장으로 눈길을 돌리십니까? 여러분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되어야 할 바로 그것, 곧 우리의 친구이며 스승, 치유자가 되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기대하시는 것, 곧 또 한분의 예수님이 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신원에 대한 걱정은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만족할 것이며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아닌 그 무엇이 되려는 마음을 더 이상 품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의혹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길잡이를 찾고 있는 혼란에 빠진 수많은 이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캐서린, ‘친애하는 신부님들께’, 가톨릭대학교 출판부 참조)
† 같은 물을 마셔 뱀은 독을, 벌을 꿀을 만든다. †
-박상대 신부-
고대 철학자들은 거의 모두가 "행위(行爲)는 본성(本性)을 따른다"(agere sequitur esse!)라는 명제에 의견을 같이 했다. 뿐만 아니라 중세기의 독일철학자들도 하나같이 "가지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다"(Was man nicht hat, das kann man nicht geben!)는 생각에 일치하였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겉으로 행하는 어떤 행위든 그것은 내면(內面)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람은 자기가 스스로 가지지 않은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후자(後者)를 굳이 유물론적으로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결국 사람은 본성에 따라 행동할 것이고, 무엇이든 스스로 가진 것을 남에게 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람이 어떤 마음을 가지던 마음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생각에 따라 사람은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는 생각이 달라지면 태도가 달라지고, 태도가 달라지면 습관이 바뀌며, 습관에 따라 운명이 좌우된다는 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도식(圖式)으로 설명하자면, 마음(heart) -> 생각(thinking) -> 태도(attitude) -> 행위(act) -> 습관(habit) -> 운명(destiny)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인간행동의 많은 부분은 거의 습관에 따라 행동하는데 습관은 곧 반복된 행위를 말한다. 행동하기 위해 이왕에 마음을 먹을 것이라면 좋은 마음을 먹는 편이 바람직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가 그것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타인이 나에게 좋은 마음을 먹도록 강제로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음의 문(門)에는 손잡이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며, 그것도 밖으로 나 있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나 있기 때문이다.
보통 문이란 손잡이가 안팎으로 나 있어 어느 쪽에서나 쉽게 열 수 있지만,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마음을 가진 자의 편에서만 열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나 자신만이 열어 보일 수 있는 마음의 좋음과 나쁨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한 사람의 마음이 좋고 나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밖에서는 손잡이가 없으니 열고 들어가 볼 수 없다. 그렇다고 남의 마음을 투시(透視)하기란 더더욱 어렵다. 결국 내 마음은 나만이 안다는 결론이다. 나 혼자 아는 마음이 좋은지 나쁜지는 자기 마음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양심(良心)에 비추어 봄으로써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방법이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양심이 올바르고 보편적이라면 문제는 없다.
그래서 독일의 철학자 칸트(1724-1804)는 자신의 저서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을 통하여 세인(世人)들에게 "너의 행위를 보편적 규범에 맞게 하라"고 주문했던 것이다. 자기 마음의 선과 악,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데 실패하는 경우는 보통 양심이 혼탁(混濁)하여 마음을 비추어 볼 수 없는 경우가 그렇다. 이럴 땐 낭패를 본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행위는 마음의 본성을 따르고, 자기 마음에 없는 것을 남에게 줄 수 없다고들 하니, 수행된 행동의 결과와 타인에게 주어진 것을 보고 그 원인이 되는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행동의 결과, 타인의 반응, 자신의 후감(後感) 등을 검증함으로써 마음을 알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행동에는 착오가, 반응에는 오해가 있기 마련이다. 또는 양자택일의 기로에서 고민하다 수행한 최선이 원치 않은 결과를 가져오는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시킬 수는 없다. 좋은 결과를 목적으로 나쁜 수단을 쓸 수는 없다는 말이다. 행위의 좋고 옳은 결과를 위해서는 늘 좋고 옳은 마음을 가지도록 요구되지만, 마음은 스스로가 가꾸어야 하며, 전적으로 자신이 열고 나가야 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선호하는 주거공간인 아파트나 관광지에 위치한 호텔은 같은 평수의 방이라도 전망에 따라 가격차가 상당히 나는 법이다. 똑같은 설계, 재료, 인테리어라 할지라도 방이 난 방향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동물농장"으로 잘 알려진 인도태생 영국인 조지 오웰(1903-1950)은 천재적인 머리를 가졌으나 식민역사의 죄책감과 부정적인 인생관 때문에 생긴 우울증과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인생을 마감해야 했다.
반면에 엘리너 루스벨트(1884-1962)는 어릴 때 고아가 되었으나 진취적인 인생관으로 20세에 루스벨트와 결혼하여 미국의 역대 대통령 부인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여성이 되었다. 그뿐이랴. 생후 19개월만에 눈, 귀, 입의 기능을 모두 잃고도 사물에 대한 진지한 마음과 밝은 생각으로 아름다운 인생을 꾸려나간 "3중고(三重苦)의 성녀(聖女)" 헬렌 켈러(1880 1968)도 있다. 1956년에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철학자 살리에즈(Sali ge)는 "이성을 가진 인간의 생각은 감동(感動), 아니면 독선(獨善)의 싹을 피운다"고 했다.
벌은 물을 마셔서 꿀을 만들고, 뱀은 물을 마셔서 독을 만든다는 말이 기막히게 들어맞는 순간이다. 감동과 독선, 바로 이 두 가지가 우리들 생활기록부의 양면성이다. 이는 우리들 생활기록부의 두 가지 서로 다른 문체이다. 감동은 사랑과 관심, 희생과 배려의 글씨체를, 독선은 미움과 무관심, 욕심과 배타의 글씨체를 구사한다.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지금보다 훨씬 달라질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 그분의 거룩한 마음을 기억하며 본받고자 하는 "예수성심 대축일"이다. 일찍이 어느 인간도 겪어보지 못했을 그런 무지막지한 고통을 이겨내며,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어린양"으로 아버지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예수님을 그 때 그 자리에서 지켜본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심(聖心)"을 모른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 성심을 자기 마음속 깊이 새겼고, 또 닮으려고 했던 사람들의 증언으로 복음서가 집필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졌다. 그래서 복음서의 말씀은 그분의 자신의 말씀과 행동이며, 그것은 그분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다. 교회는 일찍부터 예수님의 성심을 공경해 왔다. 이를 축일로 공경하기 시작한 것은 방문회의 수녀 성녀 마르가리타 마리아 알라콕(1647-1690)이 세상을 떠난 후부터였다. 10살 때 전신마비의 병을 얻은 마리아는 14살 때 기적적으로 치유되었고,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은혜와 예수님의 성심을 볼 수 있는 은혜를 함께 받았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랑으로 불타는 예수님의 성심을 죽을 때까지 외쳤던 성녀 마리아 덕분에 "예수성심축일"이 수도회와 프랑스 전역으로 확산되어 축일미사를 거행하였고, 교황 비오 9세(1846-1878)는 이를 대축일로 제정하여 전체교회에 공포하였으며, "그리스도의 성체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로 고정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95년부터 오늘 대축일을 "사제 성화의 날"로 지정하여 누구보다 사제들이 먼저 스승의 성심을 공경하고 닮아서 복음선포와 성사거행의 직무에 더욱 매진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오늘 우리는 한없이 풍요로우신 예수성심께 감사를 드리고, 나의 잘못과 죄로 상처받은 예수성심을 통회하는 마음으로 묵상해야 할 것이다.
루가복음 15,3-7은 바로 이러한 예수성심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세리와 죄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여들었고, 예수님은 애당초 그들을 위해 세상에 오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듣게 된다는 사실 자체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는 모욕적인 일이었고, 예수에게는 비난의 빌미가 된다.
이에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루가복음사가가 하느님의 크고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집약한 15장으로서, 잃은 양(4-7절), 잃은 은전(8-10절), 잃은 아들(11-32절)에 관한 비유말씀이다. 하느님은 잃은 것을 찾아 나서시는 분이며, 죄인들을 회개로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에게는 스캔들이 될지는 몰라도 하늘에서는 죄인의 회개와 잃은 것의 되찾음이 큰 잔치의 이유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이요, 세상이 주는 고통으로 아파하며 죄를 짓고 길을 잃고 헤매는 바로 나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성심이다. "걸음마를 가르치고, 팔에 안아 키워주고, 인정으로 매어 끌어주고, 사랑으로 묶어 이끌고, 젖먹이처럼 들어올려 볼에 비비기도 하며, 허리를 굽혀 입에 먹을 넣어주고, 죽을 것을 살려주시는"(호세 11,3-4) 예수 성심이여, 온 세상에서 찬미 받으소서...........◆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성심은 거룩한 심장 †
[예수성심 성월의 의미와 성심 신심의 목적]
교회는 "예수성심 대축일"이 있는 6월을 예수성심 성월로 제정해 예수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달로 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성심 성월에는 인간에 대한 예수님의 무한한 신적, 인간적 사랑을 묵상하고, 그 사랑에 합당한 기도와 희생 그리고 보속을 통해 조금이라도 보답하고자 다짐하는 달입니다.
전통적으로 교부들은 예수의 성심에서 세상을 살리는 구원의 생수가 흘러 내리고, 성령과 함께 예수의 마음을 초자연적 은총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담의 늑방(심장)에서 하와가 탄생했듯이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늑방에서 새 하와인 교회가 탄생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성심에서 나온 교회의 일원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예수 성심과 더욱 일치시키기 위해 특별히 성시간을 자주 드리고, 성월 기도로는 '예수 성심께 천하만민을 바치는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예수성심 신심의 목적은 한마디로 인간이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예수성심과 함께 또 예수성심을 통해 사랑으로 보답함으로써 첫째 계명(신명 6,5; 마태 22,37-38; 마르 12,29-30; 루가 10,27)을 더욱 효과적이고 온전하게 이행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 성심 신심은 단순히 느끼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나아가 증거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무한한 사랑, 목숨까지 바친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응답을 예수성심은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장 확실한 응답은 사랑의 실천이요 사랑의 보답입니다.
오늘은 예수성심 성월인 6월 중 예수 성심 대축일로 공경하는 날입니다.
성심이란 거룩한 심장이라는 말입니다.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 심장이라는 단어는 인간 주체, 곧 인간 자신을 의미합니다. 심장은 사랑의 상징으로 오늘날 모든 문화권에서 널리 통용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문화권에서 유래되어 보편화된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심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을 찾으면, "수고하고 짐진 여러분은 모두 나에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 나는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서 배우시오"(마태 11,28-2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때 마음을 의미하는 단어가 심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은 "군인 하나가 창으로 그 옆구리를 찔렀다. 그러자 곧 거기에서 피와 물이 흘러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심장이라는 단어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 사형 집행 제도를 보면 사형수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심장을 창으로 찌르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이 "그 옆구리를 찔렀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심장을 찔렀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거기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고 말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서에서 물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시오...생명수의 강이 그의 배에서 흘러나올 것입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소개한 다음 이 복음서는 이렇게 해설합니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영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7,37-39). 그렇다면 "피와 물이 나왔다"는 말은 예수님의 죽음과 더불어 성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하는 요한 복음서 고유의 표현입니다.
예수 성심에 대한 특수 신심은 17세기 프랑스에서 꽃피웠습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비오 9세와 레오 13세 두 분 교황의 영향으로 예수 성심 축일은 세계 교회를 위한 축일로 반포되었고, 성시간과 첫 금요일의 신심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시대 유럽에는 감상적 낭만주의가 인간 심성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감동하여 눈물을 잘 흘린다는 사실은 인간미 있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던 시대였습니다. 그 시기 프랑스의 전제 군주였던 루이 14세는 "짐이 국가"라고 말하면서 천하를 호령하였지만, 신하를 알현하는 중 고개를 돌려서 자주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 신앙이 돈독한 사람의 처신이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발생한 예수 성심 신심입니다.
그 시대 예수 성심 신심에 들어 있는 메시지는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보상하셨다는 것과 그것 때문에 어스러진 예수님의 성심에 대해서 우리가 보상해 드려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가시관이 둘러쳐지거나 화살이 꿰뚫은 심장이 그려진 성화를 보면서 예수님의 고통을 아파하고 보상하고자 하는 신심이었습니다. 신앙인은 자기를 위한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상처를 보상해 드리기 위해 성시간과 성금요일의 신심행위를 하였습니다. 19세기 가톨릭 교회 신심은 이런 성심을 주제로 하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시기에 창설된 수도회의 절대 다수가 예수 성심 혹은 성모 성심과 관련된 이름을 붙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의 감수성도 변합니다. 같은 하느님이고 같은 예수 그리스도이지만, 시대에 따라 사람의 신심 형태는 다릅니다. 시대적 감수성이 다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들에서 읽어내는 것도 다릅니다. 현대인은 사람의 마음을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행한 일들을 보고 그 사람의 마음가짐을 짐작할 뿐입니다. 오늘은 인간 마음을 직접 인식하려 하지 않습니다. 인간 마음을 지배하는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도 자기가 다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현대인입니다.
오늘 현대인은 예수님의 마음을 논하기보다는 예수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행동하셨는지를 관찰하고, 그 말씀과 행동을 발생시킨 마음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려 합니다. 오늘 우리는 느낌을 위주로 판단하는 낭만주의자들이 아닙니다. 어떤 일에 감동하고 눈물을 쉽게 흘리는 감상주의자들도 아닙니다. 그것은 흘러간 한 시대의 인간 심성이었습니다.
현대인은 복음서들이 남긴 예수님의 모습을 관찰하고 그분의 삶을 배우려 합니다. 복음서들은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대한 이야기들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하느님의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우리도 당신에게 배워서 같은 아버지의 자녀로 살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율법과 제도가 절대적이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은 하느님이 율법과 더불어 사람을 다스리고 지배할 권한도 주셨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단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자비하신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우리 삶 안에 살아 계셔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주장하듯이 하느님은 인간에게 율법을 주어놓고 그 준수를 지켜보다가 상도 주고 벌도 주는 분이 아니라, 무상으로 베푸시는 아버지라고 믿으셨습니다. 그런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을 통해서 인간 세상 안에 살아 계신다고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마리의 양도 버리지 않는 목자의 사랑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용서하고 병든 이를 고쳐 주면서 그것이 하느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닫도록 하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믿어야 하고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그 사랑을 실천합니다. "내가 명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7).
예수님과 더불어 그분의 삶을 배워 실천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실천은 인류 역사 안에 여러 형태의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순교로 피를 흘려 그 사랑이 어떤 치열한 베품인지를 보여주기도 하였고, 명상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어떤 현세적 버림을 요구하는지를 보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선교로 혹은 복지활동으로 그 사랑의 실천이 어떤 헌신을 요구하는지를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여러 형태의 사랑의 실천과 더불어 하느님은 인류 역사 안에 살아 계셨습니다.
오늘 예수 성심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느님이 그런 여러 형태의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면 우리 안에 자발적 봉사와 희생의 실천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 성심 대축일은 우리가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사랑이 예수라는 한 인물 안에 나타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두올묵상팀]
이것을 감추시고 (마태 11,25-30)
-유 광수신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보면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라는 말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다. 보통 우리들은"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에게 더 잘 드러내 보여주고 반대로 철부지들에게는 감추려고 한다. 왜냐하면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은 하나를 가르쳐 주어도 금방 알아들을 뿐 아니라 열 개를 알아들으니까 휠신 일하기가 좋고 능률도 많이 올라서 좋다. 반대로 철부지들은 아무리 가르쳐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일해놓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을 선호하게 되고 철부지들은 기피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와는 정 반대로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우리들 입장에서는 이상할 수 밖에 없다.
왜 그러셨을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그냥 하신 것이 아니라 당신 체험에서 우러나온 말씀이다. 예수님의 사명은 이 땅에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다. 그것은 어떤 위대한 기적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 즉 복음선포를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계획은 생각만큼 쉽게 이루워지지 않았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결코 당신의 복음선포가 당신 뜻대로 이루워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예수님 편에서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적도 행하셨고 나름대로 열심히 하셨지만 결과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어제 복음에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 20)라고 하였고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베싸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띠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 또 이어서 "너 가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까지 말씀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이 아무리 복음을 전하여도 그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든 원인이 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주로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가?
예수님의 체험에 의하면 그 사람들이 소위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가?
예수님은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 1,15)라고 선포하셨고 그 이후 계속해서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시면서 또 이런 사람 저런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다양하였다.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열두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한 체 예수님을 따르는 부류이다. 이들은 제자들이었지만 때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불평하고 다른 행동을 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많은 꾸중을 들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 가면서 배워서 마침내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
다른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무식하고 소외당한 이들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받아들이고 따른 세리와 고아들 과부들, 가난한 이들 즉 그 당시 사회에서 가장 버림받고 죄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비록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어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라고 자타가 인정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 당시 가장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로 인정받고 있는 이들이며 그래서 이들은 다른 사람을 판단 해주고 하느님의 율법을 가르쳐 주는 지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비판하고 거부한 사람들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시하였고 비난하였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들의 일관된 자세는 거부와 냉소이었다. 그렇지만 가장 버림받고 무식하고 가진 것이 없는 철부지에 속하는 과부와 가난한 이들,죄인 취급을 받고 있던 세리와 어린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음을 드러내 보여주는 이들은 바리사이파나 율법학들처럼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인 가난하고 소외당한 과부와 세리들과 같은 이들이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인 이미 자기들이 하느님의 율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은 받아들일 여유가 없다. 아니 그럴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이미 자기 것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다른 것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 일종의 교만이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가득차 있는 사람들로서 교만이라는 완고한 마음으로 굳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부지들은 자기 것이라고 고집할 것이 없다. 아직 철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의 어떤 사상이나 주관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얼마든지 받아들일 여유가 있고 사실 배고픈 이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얼마든지 새롭게 인격이 형성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마치 하느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진흙을 빗어 만드시고 그 안에 입김을 불어 넣으셨듯이 철부지 같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에 의해 새롭게 탄생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가장 복음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람들은 마찬가지로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교만한 이들이다. 스스로 하느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복음을 가장 잘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진리에 목말라하는 겸손한이들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전적으로 신뢰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저 자신이 가장 크게 느낀점은 나의 삶을 평가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는 분은 내가 아닌 다른 분 즉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분도 내가 아닌 예수님이시고 나를 지혜롭고 똑똑하다고 평가해주시는 분도 내가 아닌 예수님이시다라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자가 정말 슬기롭고 똑똑한 사람이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잣대로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자기가 똑똑한척 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모습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도 자신이요, 행복을 만들어 가는 것도 자기 자신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악인이나 선인이나 의로운이나 불의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고 햇빛을 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누구는 불행하고 누구는 행복하기를 바래서 선별해놓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모두가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에 모두를 사랑하시고 잘 되기를 바라시고 그래서 축복해주신다. 다만 그 축복을 우리가 얼마나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지혜로운 자들과 슬기로운 자들에게는 자기들의 지식과 능력을 믿기 때문에 또 그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신앙같은 것이나 복음을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웃웁게 보고 믿지 않겠지만 철부지 어린이와 같이 순수하고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잘 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드러내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모든지 축복도 받는 사람이 더 받는 것이고 받지 않는 사람은 굴러 들어온 축복도 발로 걷어 차버리기 때문에 아무런 축복을 받지 못한다.
우리가 정말로 행복해지려면 하느님의 말씀인 복음 앞에 철부지 어린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 가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철부지 어린이가 아빠에게 때를 쓰듯이 잘 못알아듣는 것이 있으면 알게 해달라고 떼를 써야 한다. 그러면 드러내 보여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소수의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사람 때문에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실 수 있고 기쁨과 보람을 맛보실 수 있으신 것이다. 당신의 말씀을 철부지 어린이와 같이 믿고 받아들이는 그 소수의 사람이 바로 오늘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고, 아들과 또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되도록 하자. 그래야 하느님의 말씀이 또 오늘 우리를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무거운 짐을 자기 혼자 짊어지고 가려고 하지 말고 즉 자기의 지혜와 능력으로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에게 가서 어떻게 짐을 지어야 하는지 배우도록 하자.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만이 예수님에게 가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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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복음묶음 감사합니다
내 자신을 성찰해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