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사진첩 / 문화재청
창덕궁엔 왜 벽화가 그려져 있을까?
□ 프롤로그
유네스코 선정 세계문화유산, 조선 건축과 조경예술의 백미 창덕궁!!! 그 창덕궁에도 벽화가 있다는데~~! 과연 누가 무엇 때문에 또 언제 그려 넣었을까? 창덕궁에 벽화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마침, 지난 6월 23일(목요일) 창덕궁에서 이 베일에 싸인 벽화를 문화재로 지정하기 위한 예비조사 겸 언론설명회 행사가 있다기에 찾아가 보았다.
□ 창덕궁 사무실에서의 짧은 기다림 조선왕조의 최고의 궁궐이 갖춘 위엄과 품격 앞에 더위도 기가 죽은 것일까?
오전 10시에 예정된 설명회에 참석하기 위해 지하철에 내려 창덕궁 매표소 앞에 이를 때 까지만 해도 햇살이 따갑다 여겨졌는데 창덕궁에 들어서니 외려 서늘하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최근 새로 단장한 창덕궁 사무실에 들어서니 최종덕 창덕궁 관리소장과 연웅 동산문화재과장 등이 먼저와 오늘 오실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곧이어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도착이 있었고, 뒤이어 창덕궁 벽화를 상세히 설명할 전문가들(김현숙, 최열, 김윤수)이 오시고 안휘준 문화재위원장과 언론사 기자들이 속속 도착하자 일행은 드디어 오전 10시, 희정당으로 출발 하였다.
□ 벽화는 언제, 왜, 누가 그려 넣었을까?
창덕궁에는 총 6점의 벽화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벽화들은 언제 어떻게 그려지게 된 것일까? 그 이유를 알아보았다. 지난 1917년 창덕궁에 큰 불이 났었다고 한다. 그때는 이미 조선황실의 권위는 무너져있었고 일제에 의해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궁을 조속히 복원하여 그 위엄을 갖추는 것은 조선황실의 마지막 자존심이었을까? 황실에서는 서둘러 궁궐의 전각을 복원하고 희정당과 대조전 경훈각 등의 내부엔 벽화를 그려 넣게 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의 흥미를 끄는 것은 이 벽화들을 그린 사람들이 이제 갓 스물의 젊은 화가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화가라 할 수 있는 심전 안중식의 제자들 이었다. 1911년, 심전(心田) 안중식과 소림(少琳) 조석진(趙錫晉)은 서화미술원을 통해 젊은 화원들을 양성하고 있었는데 그 곳을 통해 배출된 화원 1기생과 2기생이 그린 작품들이 바로 창덕궁의 전각에 걸린 벽화인 것이다.
※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 : 현대 한국미술은 국권피탈 이듬해인 1911년 전통회화 육성을 위하여 서화미술원(書畵美術院)이 창립되고, 조선 최후의 화원 화가 소림(少琳) 조석진(趙錫晉),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등이 초치되어 제자를 양성하게 되었다. 이 서화미술원은 8년 후에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으나 김은호(金殷鎬) ·이상범(李象範) ·노수현(盧壽鉉) 등 여러 대가를 배출하였다. 이들 전통화가들은 18년 서화협회(書畵協會)를 조직하여 활동의 기반으로 삼았으나, 22년 조선총독부의 선전(鮮展:조선미술전람회)이 열리고 서양화가 유입됨으로써 30년대에 이르러 신동양화라고도 할 수 있는 ‘교배양식(交配樣式)’이 주류가 되어 전통화도 무의식중에 그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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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인 공개의 순간! 벅찬 숨결로 다가오는 벽화들!!
이제 역사적인 순간이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나라에 문화재행정이 도입되고 원형복원과 보존위주의 문화재 관리가 시작된 이후 겨우 몇 차례 일부 전문가에게만 공개 된 적이 있다는 창덕궁의 벽화들!! 그 벽화들이 드디어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되는 순간인 것이다. 희정당(熙政堂)에 들어서자 문화재전문위원(근대문화재분과)인 김현숙 근대미술사학회 부회장의 새색시와도 같은 부끄러운(?) 설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양쪽 벽면에 그려진 벽화의 웅장함과 섬세함에 넋이 나가있는 참여자들은 이미 청중이 아닌 호기심에 충만한 탐험대일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난생처음 접하는 이 눈부신 광경에 어찌 혼을 빼앗기지 않겠는가?
□ 희정당(熙政堂)의 벽화들

[김규진, 총석정절경도, 195×880cm, 견본농채]

[김규진, 금강산만물초승경도, 195×880cm, 견본농채]
희정당 동·서벽 위에 있는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 195×880cm)>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 195×880cm)>는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 1868~1933)의 작품이다. 순종의 어명을 받고 금강산을 여행하면서 그린 초본을 바탕으로 한 이 두 실경산수화는 극진한 형사(形似)와 장식적 사실주의에 충실한 화법으로 그려졌다.
<총석정절경도>는 배를 타고 바다로 나와 해금강을 바라 본 광경으로 뒤로 원경의 산봉우리를 배경으로 깍아 지른 듯 바다에 솟아있는 절벽의 장엄한 모습을 병풍처럼 펼쳐놓았다. 거기에 넘실거리는 물결을 도안화된 방식으로 그렸고 해변을 때리는 파도는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화제(畵題)의 총석정(叢石亭)은 화면 중앙부분 푸른 산언덕 위에 여러 그루의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금강산만물초승경도>는 수많은 산봉우리와 끝없는 계곡의 변화, 가을빛이 완연한 수림과 곳곳의 폭포와 계류 등을 한눈에 조감할 수 있게 구성하여 금강산 일만이천봉이 다 담겨있는 듯한 사실감을 부여하고 있다. 장대한 구성과 화려하고 정교한 청록기법을 동원하여 정성을 다한 두 작품에서 김규진은 50대 화가의 필력과 화기(畵技)의 완숙함을 최대로 발휘하고 있다.
□ 대조전(大造殿)의 벽화들

[오일영·이용우, 봉황도, 197×579, 견본농채]

[김은호, 백학도, 197×579, 견본농채]
대조전의 동·서벽 위에 있는 봉황도(鳳凰圖, 197×579cm)와 백학도(白鶴圖, 197×579cm)는 희정당 벽화와 달리 화조도(花鳥圖)이다.
봉황도는 30대 초반의 오일영(吳一英, 1890~1960)과 10대 후반의 이용우(李用雨, 1904~1952)가 합작한 작품으로 왕과 왕비를 뜻하는 鳳과 凰 열 마리를 바다, 구름, 해, 폭포, 바위, 오동나무, 대나무, 난초, 작약 등과 함께 화려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렸다. 왼쪽의 망망한 바다 위 서운이 흐르는 하늘에는 붉은 해가 떠있는데 이는 서벽에 장식된 백학도의 밤경치(月景)와 대조를 이룬다.
백학도는 전형적인 궁중장식화의 전통화법과 주제에 충실한 대작으로 20대 후반의 김은호(金殷鎬, 1892~1979)가 그린 것이다. 동쪽벽면의 봉황도가 낮경치인 것에 화합하여 밤경치를 이루고 있다. 두 벽화의 해와 달은 왕비가 앉는 의자 양옆으로 나타나도록 화면구도를 맞추고 있기 때문에 백학도는 봉황도와 대조적으로 바다와 하늘이 오른쪽이고 왼쪽이 육지를 이루고 있다. 육지에는 암산 및 계류와 함께 청청한 노송을 포치시키고 그 주위로 대나무, 불로초, 작약 등을 장식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16마리의 백학이 바다에서 계류를 향해 날아들고 있는 장면은 아름다운 초월경을 펼쳐주고 있다. 장생불사의 염원을 상징하는 주제에 따라 엄격한 원체화풍(院體畵風)으로 심혈을 기울인 두 작품은 구도·필선·채색 등에서 화가들의 빈틈없는 기량을 보여준다.
□ 경훈각(景薰閣)의 벽화들

[노수현, 조일선관도, 184×526cm, 견본농채]

[이상범, 삼선관파도, 184×526cm, 견본농채]
경훈각의 동·서벽 위에 있는 조일선관도(朝日仙觀圖, 184×526cm)와 삼선관파도(三仙觀波圖, 184×526cm)는 중국의 전설을 그림으로 조형한 산수인물화이다.
조일선관도는 대담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진 청록산수로 20대 초의 노수현(盧壽鉉, 1899~1978)이 그린 작품이다. 오른쪽에 바다가 있고 그 위로 학 네 마리가 날고 있으며 학과 산 사이의 공간에는 붉은 해가 솟아 있다. 암산과 골짜기의 기이한 형태, 청록색의 농담변화, 짙은 색의 소나무 등이 어우러져 장식적인 화려함을 갖는다. 암산 사이로 보이는 집들과 파도의 표현은 형식적인 면을 보인다.
조일선관도와 짝을 이루는 삼선관파도도 맑은 녹색조가 압도적으로 쓰인 청록산수로 20대 초반의 이상범(李象範, 1897~1972)이 그렸다. 이 작품은 오른쪽에 있는 세 신선이 왼쪽의 바다를 보면서 서로 나이자량을 하는 이야기를 주제로 한 것으로 오원 장승업의 ‘삼인문년도’와 비슷한 발상의 그림이다. 두 작품은 뾰족한 각을 이루며 중첩된 암산과 수목, 여기저기 흩뿌려진 태점 등의 묘사뿐만 아니라 구도에서 유사성을 보이는데 이는 스승인 심전 안중식 화풍의 영향이 이들의 초기작품에 강하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 전문가들의 반응
하지만 이렇게 역사적이고 황홀했던 순간은 우리 눈과 귀와 마음을 너무도 빨리 스쳐지나갔다. 경훈각(景薰閣)까지의 모든 설명이 끝나고, 나름대로의 멋진 포즈와 제스쳐로 기념사진도 찍으며 또 금새 지나버린 아쉬움도 달래보며 왔던길을 되돌아 왔지만...인간의 마음이 너무 간사(?)한 탓인가...? 감흥이 처음만은 못한 것 같았다...(이는 필자만의 사견임!!) 한편 이 자리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어떤 느낌이었는지 그들의 반응을 정리해본다
ㅇ 안휘준 문화재위원장 - 근대 미술중 정말 중요한 작품들이다. 왕실의 요청에 의해 당대 최고의 작가들이 그려 넣은 그림이다. 작품의 질 또한 매우 훌륭하다. 예전에도 한번 볼 기회는 있었지만 오늘처럼 여유를 갖고 보기는 처음이다. 참으로 감명 깊은 자리였다.
ㅇ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 - 정말 탐나는 작품들이다. 이대로 고스란히 현대미술관으로 옮겨가고 싶은 심정이다.(웃음) 보존상태 또한 매우 양호하다.
ㅇ 유홍준 문화재청장 -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초동의 화가들이 그렸다는데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다. 과연 오늘날 20대 초반의 미술학도에게 궁궐 전각의 벽면에 그림을 그리라고 하면 이정도의 품격을 가진 그림이 나올 수 있을지 의문이다. 문화재청에서는 오늘의 이 기쁨을 전 국민이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 등 전각의 보수와 벽화에 대한 보전처리를 통해 이른시일 안에 일반에 개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 숨겨진 뒷 얘기들

이번 현장설명회에서는 아주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대조전(大造殿) 한켠에 암울하게 놓여있는 침대하나!! 바로 조선왕조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숨을 거두었다는 침대란다. 그리고 서로 싸운 사람이 함께 앉으면 화해 한다는 의자와 그때 사용하던 각종 서양식 가구들 도 볼 수 있었다. 이제는 낡아 헤진 이런 가구들을 보며, 한편으로 보면 조선왕실의 몰락은 현재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민주공화정 태동의 출발점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외세에 의해 이루어진 식민지배와 그것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너무도 처절하게 이루어 졌다는데 대해 씁쓸한 아쉬움을 느꼈다.
문화재청 이야기가 있는 사진첩에서
김시동
첫댓글 경훈각의 벽화들이 궁금합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어 기쁘고 벽화들이 멋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