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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2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 11, 20-24)
"Woe to you, Chorazin! Woe to you, Bethsaida!
.For if the mighty deeds done in your midst
had been done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long ago have repented in sackcloth and ashes.
But I tell you,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말씀의 초대
이집트에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남자 아이는 모조리 죽이라는 파라오의 명령이 내려졌다. 히브리인의 레위 집안에서 태어난 모세가 파라오의 딸에게 구출되어 왕실에서 길러진다. 모세는 성장하자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고, 결국 히브리 사람의 편을 들어 이집트인을 죽이고 미디안 땅으로 도망간다(제1독서).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그 축복을 나누어야 한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주님의 가르침과 은총이 충만히 내린 곳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귀를 막고 회개하지 않는 이 도시의 사람들을 준엄하게 꾸짖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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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들과 같이 위선을 일삼는 사람들과, 온갖 은혜를 입고도 회개하기는커녕 배신을 일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은 후자의 경우처럼 숱하게 은혜를 입고도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에 사는 사람들을 향해 있습니다.
이 도시들은 라삐들의 종교 교육이 성행하던 종교 도시였습니다. 특히 카파르나움은 육로와 수로의 교차점을 이루어 상업이 번창하였던 도시로 예수님께서 공생활 기간에 시몬 베드로의 집을 전교 활동의 근거지로 삼았을 만큼 선택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과 자기도취에 빠져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막고 하느님의 능력이 드러난 숱한 기적을 보고도 외면했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과 배운 것으로 특권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호되게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것과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마치 자신의 ‘인격’인 양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난한 이들의 인격과 신앙심마저도 자신들보다 낮은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벌거벗은 한 ‘존재’로 섰을 때 정말 가난한 이들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서 있을 자신이 있는지요?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주님 앞에서는 오히려 비천하고 가련할지도 모릅니다.
사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신 축복입니다. 우리가 능력이 있다고 한들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무엇 하나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있을는지요? 오히려 자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감사하고 나누며 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과 겸손함을 잃으면, 하느님께서 주신 축복을 가로챈 배신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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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푸셨던 고을들을 꾸짖으십니다.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입니다.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기적은 ‘하늘의 힘’입니다. 그런 축복을 받았다면 변화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세 도시는 움직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사치와 향락으로 역사에서 사라진 도시가 ‘소돔과 고모라’였습니다. 그 도시보다 못하다는 말씀입니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있었습니다. 동쪽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와 연결되었고, 북쪽은 터키의 ‘하란’을 거쳐 ‘니네베’에 닿아 있었습니다. 자연, 상인들이 들끓었고 도시는 화려했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이곳에 군대를 주둔시키며 이스라엘을 감시했습니다. 유다인들도 대규모 학교를 세우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세력을 키웠습니다.
그러니 도시는 커져 갔을 것입니다. 물자는 넘쳐 났고 젊은이들은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이 닿을 리 없습니다. 훗날 카파르나움은 시리아의 침공을 받고 파괴됩니다. 7세기부터는 ‘이슬람 제국’에 의해 폐허가 되어 로마 시대의 화려함은 사라지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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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사람이 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일에 재산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보다 더 인색할 때 이 말을 합니다. 우리 신앙인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을 더 많이 받고도 배은망덕한 경우에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과 몸이 불편한 사람들이 오히려 하느님께 더욱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모습을 종종 봅니다. 그러한 모습들을 보면서,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못하는 자신이 초라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남을 돕는 일에 우리는 언제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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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모세의 출현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그가 태어날 무렵 히브리의 사내아이는 출생 즉시 죽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었습니다. 부모는 모세를 버릴 수 없어 강에 띄워 놓았는데, 어느 날 궁중의 공주가 이를 발견하고는 곧장 데려갑니다.
극적인 장면입니다. 주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왕궁에서 자랐습니다. 당연히 궁중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지도자로서의 수업을 미리 한 셈입니다. 하느님의 섬세한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죽이고, 이로 말미암아 그를 비난하는 이들이 등장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는 등 엄청난 시련의 길을 걷게 됩니다. 축복만 계속되어서는 결코 하느님의 사람이 될 수 없는가 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양승국신부-
<회개의 첫 단계>
회개한다는 것, 회심한다는 것, 삶을 한번 총체적으로 바꿔본다는 것, 말이 쉽지 정말 어려운 숙제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 안에 한번 새롭게 출발해보자고 그토록 애를 써봤지만, 늘 제자리걸음입니다. 수도회 입회 후 지원기 때의 고백성사꺼리들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정말 바뀌기 힘든 것이 사람인 듯합니다. 아마도 죽을 때가 가까이 오면 바뀌려나 봅니다. 그래서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 때가 가까이 왔나보다, 라고 농담들 하지 않습니까?
환골탈퇴를 위한 뼈를 깎는 노력 없이, 하느님의 크신 은총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 회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끔씩 삶의 방향을 순식간에 180도 바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형제가 대형교통사고를 겪어 응급실로 실려 갔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신음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무의식중에 큰 강을 만납니다. 건너편에서 누군가가 빨리 건너오라고 손짓합니다. 그의 손짓에 따라 천천히 강을 건너는데, 갑자기 누군가 등 뒤에서 건너가지 말고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의식이 깨어납니다.
이렇게 죽음의 강을 건너가다가 다시 삶으로 돌아오신 분들, 크게 깨닫고, 크게 뉘우치고, 크게 회심해서 새 삶을 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정말 어려운 것이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도시 코라진과 벳사이다를 향해 독설을 던지십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돌아오라고 외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귀를 틀어막고 돌아서지 않습니다.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회개가 어려운 이유는 일련의 과정을 밟아야 하는데, 그 첫 번째 과정이 좀 어렵습니다. 회개는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리는 일, 하느님께로 발걸음을 돌리는 일인데, 그분에 대한 정확한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발길을 돌리겠습니까?
회개의 첫걸음은 하느님을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좋으신 분인가, 하느님이 얼마나 아름다운 분이신가, 하느님이 얼마나 나를 끔찍이도 생각하시는가, 하느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 한분씩 있을 것입니다.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친구, 진심으로 나를 아끼는 친구, 내게 좋은 것만 주려는 친구, 나를 향해 조금도 사심이 없는 친구, 그래서 힘들다가도 그만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다시금 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주는 친구, 그래서 늘 곁에 같이 있고 싶은 친구...
우리의 하느님은 우리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보다 백만 배, 천만배 더 좋으신 하느님이십니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우리를 잘 아시고, 자신보다 우리를 더 아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매일 죄 속에서 허덕임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우리를 향한 사랑의 손길을 펼치시는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 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 목숨조차도 바치시는 나만을 위한 희생의 하느님이십니다.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 그것이 회개의 첫걸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 첫 단추를 잘 꿰게 될 때, 회개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침묵 안에서 일어나는 기적
-이훈 신부-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기적의 결과로 일어나야 할 것은 바로 회개의
삶이라는 말로 다가옵니다. 바꾸어 말해서 우리가 회개의 삶을 살아갈 때
곧 매일의 삶에서 기적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초대로 느껴집니다.
마치도 우리는 기적이라는 표징을 보면 예수님을 믿을 것처럼 생각하고
기적이 일어났거나,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하는 곳을 무작정 찾아가고자
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기적은 매일의 미사성제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분이 나의 밥이 되기 위해 찢어지고, 나누어져 나에게 오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미사성제를 통해 매일의 기적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가장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미사성제를 통해 매일 매일 기적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영성체의 기적 안에서 침묵하시는 예수님이 한없이 고맙게 느껴집니다.
내 몸 안으로 들어오시면서 침묵하시는 예수님. 나와 목소리를 내어
대화하신다면 그 예수님을 나는 영할 수 있을까요?
침묵하시는 예수님이 고맙고, 매일의 기적에 감사드립니다.
어린이 같은 믿음
- 임원지 수녀-
현대 인간을 일러, “음속을 뛰어 넘고, 이동조차 힘들 만큼 기존 공간을 쓰레기 천지로 만들어 놓고는 새로운 ‘사이버 공간’을 발견해 놓은 인간”이라고 한 구절을 맥컬로우의 「위안」에서 읽었다. 그 표현이 너무 사실이어서 놀랬다.
생태 환경을 책임질 수 없게 만들어 가더니, 이제는 넓디넓게 사이버 공간을 만들어 휘젓는다. 과학 기술은 어디까지 갈까? 그래서 찌를 듯 높이 오르면 서 안하무인이고, 그러고도 성이 차지 않는다.
반면에 사이비 종교나 미신도 여전하다. 일전에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이사 때문에 아내와 다투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어느 스님이 북쪽으로 가면 안 좋다고 했다고, 그래서 아내가 새 아파트 이사를 반대하더니, 이사 날짜 때문에도 싸웠고, 어느 길로 돌아가야 한다고 해서 이삿짐센터와도 실랑이를 했단다. 극과 극 사이를 헤매는 몽매한 인간에게 구원의 길은 무엇일까?
피천득 선생에게 당신은 왜 하느님을 믿느냐고 물으니, “천국이 있으면 어떡해?” 그래서 믿는다고 대답하신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적어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은 함부로 살 수가 없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절망의 나날인지도 모른다. 단순하게 믿을 줄 알아서 어린이들은 행복하다. 반면에 겁도 많다.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이와 같이 되라고 당부하시는 듯싶다.
은총에 합당한 삶
-전삼용신부-
어렸을 때 읽었던 '연옥 실화'는 제 삶에 적지 않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연옥교리란 단지 천국과 지옥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 갈 사람도 이 세상에서 지은 죄가 있다면 그 죄를 보속하기 위해 지옥고통에 맞먹는 벌을 한시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천국에 들어 갈 정도만 되면 그만인 삶이 아니라 연옥 고통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최대한 완전해진 상태에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로마에서 공부하다보니 일명 연옥 성당이라고 불리는 곳에 들어가 보게 되었습니다. 그 성당에 들어가 보니 작은 박물관이 있었고 그 책에서 읽었던 증거들이 여럿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즉, 연옥 영혼이 이 세상에 나타나서 연옥 고통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고 또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청하며 남겨 놓은 검게 그을린 손자국이나 불자국, 불이 난 제대에 새겨진 연옥 영혼의 얼굴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보며 연옥도 그만큼 고통스러워 1분이 1년 같다는 말이 실감났습니다.
그 연옥 실화의 이야기 중에서, 한 신자가 큰돈을 사기를 쳐서 1년 정도의 보속기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수녀님이 침대 밑에 아주 작은 돈을 비상금으로 두고 있은 때가 있었는데 그 수녀님은 그 작은 돈 때문에 30년의 보속을 해야만 했습니다. 수녀님은 가난 서원을 하여 자신의 소유로 돈을 지닐 수 없음에도 하느님께 한 서약을 깼기 때문에 더 많이 보속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저는 참 정당한 판결이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적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은 죄지을 거리들이 더 많지만 수도자나 성직자로 사는 사람들은 그만큼 보호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죄를 지어도 벌은 더 크게 받아야 당연한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세 도시를 호되게 야단칩니다. 그 이유는 그 도시들에서 수많은 기적을 베풀어주셨지만 그 도시 사람들은 죄에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유황불로 멸망했던 소돔과 고모라에 그런 기적을 행했었다면 그 사람들은 벌써 회개하였고 그렇게 망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하시며 심판 때에 소돔과 고모라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많이 받은 사람은 그만큼 많이 내어놓아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가톨릭 신자들이 믿지 않는 신자들과 구별되게 살지 못한다면 결국엔 신자들이 비신자들보다 더 큰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신자들은 성체를 비롯하여 온갖 성사와 가르침들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회에서 보통 사람들 사는 것처럼 산다면 받은 만큼 내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젊은 사제들 중에 어떤 분들은 '나는 최대한 빨리 은퇴해서 좀 쉬며 편하게 살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디에 집을 짓겠다는 둥 구체적인 계획까지 짜고 있는 것을 보면 저도 젊은 사제지만 마음이 아픕니다.
그들은 사제로 사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께 큰 봉헌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제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받았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사제가 된 이후엔 그만큼 많이 내어놓아야 합니다. 보통 신자들보다 훨씬 더 내어놓아야 나중에 꾸지람을 덜 들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많이 받고도 그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들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성당에 미사 하러 가면서 한 수녀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수녀님은 허리가 아프셔서 수술까지 하시고 지금도 기도시간에 앉아있는 것도 힘들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더운 부엌에서 할머니들의 음식을 해 드리기 위해 일을 하십니다.
물론 하느님을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 심판을 받자면 저와 비교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그런 처지이고 평생 부엌에서 일만 해야 한다면 저는 그런 삶을 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고생하고도 뭐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저는 그런 일을 결코 못 할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 수녀님은 당신이 내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음에도 끊임없이 내어주며 살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심판하신다면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제가 그 수녀님만큼 노력하지 않고 내어놓지 못함을 더 꾸지람 하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에게 많은 은총을 주셨습니다. 누구는 많게 보이고 누구는 적게 보일지 몰라도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어떤 업적을 이루었느냐보다는 얼마만큼 그 은총에 보답하는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제나 수녀가 매일미사 참례하는 것이 평신도들과 비교할 것이 못 되는 것처럼, 우리 각자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은총으로 최대한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것을 결심해야겠습니다.
울리게 하소서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의 마음이 가까이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잘 해줬는데,
그렇게 애를 썼는데,
기적까지 행하면서 기대를 했는데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은 돌아서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 자기가 필요한 것만 쏙 받아먹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마음에도 없습니다.
주님의 마음이 괴심하고 허탈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안타깝고 참으로 괴로우실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애 쓴 것도 사실은 당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니 말입니다.
주님의 이런 복잡한 마음이 다 느껴지면서
다른 한 편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얼마 전 퇴회하려는 한 형제의 마음을 돌리려고
제 깐에는 애를 쓴다고 썼습니다.
그 얘기를 듣자마자 달려 가
시간을 가지며 천천히 식별하라고 설득을 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사랑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설득력이 있을까 만나기 전 궁리도 많이 했습니다.
제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안 될 것이기에 기도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결국은 나가 버렸습니다.
연민과 안타까운 마음도 있었지만
저는 예수님만큼 거룩하지 못해 괴심하고 허탈한 마음이 컸고
그 마음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저를 더 괴롭게 한 것은 제 능력이야 그렇다 치고
제가 최선을 다 하지 못해서 마음을 못 돌린 것이 아니었나,
저의 사랑이 지극하지 못해서 못 돌린 것은 아니었나,
내가 그 어떤 노력보다도 기도를 더 열심히 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아서 못 돌린 것은 아니었나 자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의 저에게 오늘 복음의 얘기는 위안이 되었습니다.
나의 정성과 노력 부족하고
사랑과 기도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예수님의 사랑으로도 못 돌리셨고
예수님의 기적으로도 못 돌리셨는데
내가 뭐 대단하다고 사람을 마음을 돌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돌렸어야 했다고 생각했는지,
그 교만함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위안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예수님도 못 돌립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 사람이 돌려야만 합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열매만 따 먹고 바뀔 마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사랑하여도 그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고
마음이 전혀 움직이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남 얘기가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은 제 마음도 돌리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저도 주님의 사랑 참으로 많이 받았어도
사랑에 감읍하지 않고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자그만 두드림에도 문을 여는 문지기와 같이
주님을 기다리다 마음을 열고
부드러운 터치에도 소리를 내는 예민한 현과 같이
주님의 사랑에 저의 사랑이 사랑을 소리내기를
오늘 이 아침, 기대하고 기도합니다.
신앙의 노블레스
-남상근 신부-
많이 받았기 때문에 축복이지만, 많이 받았기 때문에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혼쭐날 날이 온다고
경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의 도시였던 티로와 시돈을, 하느님의 계명에서
어긋나 있던 소돔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까지 하십니다.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 많은 은총을 얻어내고, 많은 사랑을 받았으면 갚음을 알아야지요.
뻔뻔하게 ‘받긴 했으나 돌려드릴 것은 없는 삶’이라면, 받은 것이 오히려
화가 될 것입니다. 먹기는 하였으나 도무지 제 몫을 못하는 이들에게
‘밥값도 못한다’고 지적하지 않습니까? 돌려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려드릴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당신의 살과 피를 아낌없이 내주셔서
우리를 살리시고 키우시고 거룩하게 하시지 않습니까? 당신의 전부를 받은
이들이 아닙니까?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크게 기대하십니다.
크게 돌려받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무한한 용서를 체험한 이들이 아닙니까?
이유 불문, 조건 불문으로 거듭 용서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크게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돌려드려서 그분을 영광스럽게 합시다.
배은망덕
-노성호 신부-
어느 특정 인물 때문에 공동체 전체가 책임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고을처럼 구성원 전체가 올바로 살지 못하여 그 고을 이름 자체가 저주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3킬로미터 떨어진 ‘코라진’과 베드로·안드레아·필립보의 고향이며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오는 입구 동쪽에 있는 ‘벳사이다’, 그리고 갈릴래아 호수 북쪽 어촌으로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었던 ‘카파르나움’은 호수 주변이다 보니 경제적으로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세 곳은 갈릴래아 호숫가를 전도의 활동 무대로 사용하셨던 예수님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곳이기에 그만큼 하느님의 말씀이 많이 선포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께서 공생활 중에 주로 거처하시면서 갈릴래아 및 이스라엘 각지를 순회하신 곳이기도 하다. 정리해 보면 이 세 곳은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면서 하느님의 축복도 많이 받은 고장이었다. 그런데 늘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모습으로 살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하게도 예수님의 종말 심판을 선고받게 된 것이다.
‘티로’와 ‘시돈’ 지방은 현재 레바논 공화국 지중해변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도시이며 퇴폐로 소문난 곳이고, ‘소돔’은 사해 남쪽에 있었던 전설적인 고을로, 남색을 일삼다가 유황불로 타버린 곳으로 유명하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고모라’도 이 고을들과 별 차이 없이 ‘죄’라는 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죄악이 만연한 곳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 고을이 티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불행하다는 평을 받았으니 그들의 행실이 어떠했을지 짐작하려는 것조차 두렵고 떨리는 것이 사실이다. 하느님의 축복을 많이 받고 있으면 그에 대해 감사하며 선행에 힘쓰고 하느님 마음에 들게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못하고 배은망덕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는 우리한테도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장 많이 듣는 신앙인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낫지 않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축복을 받는 자답게 늘 주님께 마음을 돌리고,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독서> :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준비하신 하느님
-경규봉 신부 -
레위 지파에 속하는 모세의 아버지 아므람은 고모인 요게벳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6,20). 요게벳은 잘생긴 모세를 3달 동안이나 숨겨서 기르다가 왕골상자 속에 모세를 뉘어 강가 갈대숲 속에 놓아두고, 누이 미리암으로 하여금 멀리서 지켜보도록 했다.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에 왔다가 모세를 발견하였다. 이집트의 유일한 젖줄이라 할 수 있는 나일 강은 고대 이집트인들에게 풍요와 건강을 제공하는 성역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이 강 유역에는 여인들을 위한 특별 구역을 마련하여 일종의 종교 의식으로서, 또는 다산과 안녕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목욕하도록 했다고 한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은 이 사실을 알고 모세를 강가에 띄워놓았던 것이다. 공주는 상자 속에 든 모세를 불쌍히 여겨 그를 구해내어 히브리인 유모를 구했는데, 모세의 어머니가 유모가 되어 모세를 길렀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강제노역에 시달린 나머지 자녀를 양육할 시간조차 얻기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요게벳은 양육비까지 받아가면서 모세를 기르게 되었으니, 하느님의 오묘하신 섭리와 요게벳의 지혜가 두드러진다. 아기가 꽤 자란 후 어머니는 아이를 공주에게 데려다주었고, 공주는 모세를 아들로 삼고 물에서 건져냈다고 하여 이름을 모세(히브리어로 건져내는 자라는 뜻)라고 불렀다.
그리하여 모세는 공주의 아들로서 철자법, 문법, 역사, 산술, 의학, 기하학, 천문학 등의 이집트 학문을 모두 배우며 훌륭하게 장성했다(사도 7,22-23). 장성한 모세는 늘 동족들이 당하는 고통스러운 강제노역을 염두에 두었으며, 마음 아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집트인이 히브리인을 때리는 것을 보고, 그를 살해하였다. 이튿날 이번에는 히브리인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보고 나무라다가 자신이 이집트인을 죽인 사실이 탄로되었음을 알고 파라오를 피해 미디안 땅으로 도망쳤다.
‘모우세스’란 이집트 식 이름은 ‘물에서 건져내어진 사람’이란 뜻으로 이집트 공주가 나일 강에서 건져낸 것을 기념하여 붙여준 이름이었다. 이러한 이집트 이름은 히브리 이름인 ‘모세’로 고쳐졌는데, 히브리어로는 ‘건져내는 사람’이란 뜻이다.
이러한 이름의 변화 속에는 하느님의 깊은 섭리가 담겨져 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서 부과하신 민족적 대사명이 모세란 이름 속에 한마디로 함축되어 있다. 즉 히브리 사내아이들에게 죽음의 강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일 강에서 건져져서 살아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종살이와 우상의 땅인 이집트에서 구출하여 죽음의 강 홍해에서 건져내야할 사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이집트 공주로 하여금 모세를 살려내도록 하셨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어린 시절에는 히브리인으로서의 교육을 충분히 받고, 어느 정도 자란 다음에는 이집트인의 모든 교육을 받도록 하셨다. 모세가 말과 행동으로 뛰어난 사람이 되고,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구해낼 수 있는 훌륭한 지도적 자질을 지니도록 하셨다. 또한 동족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의 마음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도록 하셨다.
모세는 동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으로 동족을 학대하는 이집트인을 죽임으로써 동족을 구하고자 했다. 자신의 생각으로, 인간적인 방법과 계획으로 구하고자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이는 그가 사람만을 의식하였을 뿐 공의로우신 심판관이신 하느님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이집트를 떠나 망명생활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그를 40년 동안 단련시키신다. 그로 하여금 하느님을 의지하고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방법에 따라 행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는 도구로 삼으신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를 이끄시고 단련시키시어 당신의 도구로 삼으시는 하느님이시다. 단련의 강도와 기간이 크고 길수록 더 큰 도구로 사용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인류구원이란 당신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처럼 준비하시고, 이끌어 가신다.
그러므로 때때로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실망하지 말자. 불의와 죄악이 넘쳐난다고 해도 실망하지 말자. 언젠가 하느님의 계획대로 행하는 도구가 되도록 훈련을 하고 단련을 받으며 주님의 도구가 되기를 기다리자. 조바심을 내고 안달하지 말고, 주님께서 쓰실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신앙인이 되자..........◆
배은망덕이 초래할 심판
-김주현 신부-
절친한 사이일수록 서로 예의를 지키고 더욱 더 서로를 존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할지라도 너무 막역하게 대하다 보면 서로 실수를 하게 되고 서로 간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면 이상하게도 서로의 사이가 멀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 자식간에 또한 친한 친구 사이일수록 금전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는 말에서도 그러한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가장 기적을 많이 행하신 동네에서 회개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시며 질타의 말씀을 하십니다.
팔레스티나 북부 지방에 있는 띠로와 시돈이라는 이방인의 도시는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으로 예언서에서 자주 경고를 받은 도시입니다.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는 신앙의 성조 아브라함이 살던 시대에 이미 타락하여 저주받은 도시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지구상에서 지워져 버린 도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이렇게 타락하여 멸망한 도시나 자주 예언자들의 목표물이 되었던 이방인의 도시들에서 기적을 행하였다면 틀림없이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예수님의 수많은 가르침과 기적들을 보고도 마귀 두목의 힘을 빌려서 마귀를 쫓는다고 삐쭉대던 유다인들과는 달리 예수님께 대한 깊은 신앙을 가지고 한 말씀만으로 자신의 종을 고칠 수 있음을 고백했던 저 백인대장은 다름 아닌 바로 로마의 군인, 곧 유다인들이 멸시하던 이방인이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 지방에서 많은 활동을 하시면서 많은 가르침과 기적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만큼 그 쪽 지방 사람들을 더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지방보다도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 지방과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으셨건만 진작 당신께서 사랑을 쏟아 부은 곳에서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더욱 친밀한 관계일수록 더욱 더 예를 갖추어 주님의 말씀에 귀기울여야할 그들이건만, 예수님의 많은 기적들을 보고도 기적들을 별것 아닌 정도로 넘겨 버렸는지도 모릅니다. 더욱 더 애정을 가지고 활동하셨던 지방들이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므로 주님은 더욱 더 화가 나셨던 것입니다.
사실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을 말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 어떤 그리스도교 신자들보다도 더 큰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고 있습니다.
먼저 다른 종파들에서는 없는 거룩한 화해의 성사를 통해 우리 자신들이 주님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또한 당신의 살을 내어놓으신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기념하는 미사성제 안에서 주님의 몸을 우리 몸에 모실 수 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총, 기쁨과 평화와 축복을 가득히 받고 있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더욱 더 우리 신앙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 역사를 통해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주님의 이 질타의 말씀에 더욱 더 귀 기울여야 했습니다.
중세기의 가톨릭교회 내에는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표양들이 가끔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복음에서의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더욱 더 엄중한 외침으로 들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코라진과 베싸이다야!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하신 주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보아야 하겠습시다.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주님의 가득한 사랑을 받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살아가면서 생활고에 쪼달리고 인간관계에 고통 받고 있다 하더라도 분명히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호강에 겨운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받으며 주님의 넘치는 기쁨과 평화와 축복을 받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문득 '주님 사랑 온 누리에'라는 개신교 복음성가의 가사가 떠오릅니다.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이곳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우리들 가운데 있기를 원합니다. 때로는 지치고 어려워도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고통이 내게 닥쳐와도 주님만을 사랑하리라. 주님의 축복이 이곳에 넘쳐 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이곳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가득히 받은 우리 모두는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움의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도록 다짐하면서 오늘 하루를 주님께 봉헌하도록 합시다. 감사합니다.........◆
급변하는 현실을 보면서
-남을우 -
오늘날 육체의 편안함과 장수를 갈구하는 우리 인간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배아복제·줄기세포·유전자 변형식품 등 생물의 이변이 신기하고 놀라우면서도 때로는 미래 인간 존재에 대해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어릴 적 읽은 ‘겨울철 딸기 구하기’와 같은 동화는 정말 옛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과일은 계절에 상관없이 원하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고, 그 크기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옛날 같으면 한입에 들어갈 딸기 크기가 칼로 잘라 먹어야 입 안에 넣을 수 있게 되지 않았는지요? 그런데 변형된 유전자로 생산된 음식물을 먹었을 때 우리 인체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걸까요?
급변하는 현실을 보면서 이것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맞갖는 일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혹여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한다는 휴머니티를 표방한 첨단 과학기술의 비윤리적 향방이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일까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민족이 행한 모세에 대한 불만, 하느님을 향한 원망 등으로 빚어진 일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시대에 나타난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마태 11,24)라고 하신 성서 말씀을 묵상하며 현재 일어나는 일들이 하느님 뜻에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모두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김만수 신부-
오늘 강론의 주제는 모두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주제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회개하지 않은 세 도시가 등장합니다. 코라진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위치한 고을이고 베싸이다는 북부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오는 입구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파르나움은 호수 어촌으로서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중 주로 이 집에 거처를 정하고 갈릴래아 및 이스라엘 각지의 순회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도시는 예수께서 기적도 많이 행한 사랑받은 도시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당신의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이 도시들을 꾸짖기 시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차라리)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이들 도시들을 저주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 전도 여행의 거점이었던 가파르나움마저 저주하십니다. “너에게 베푼 기적들을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여기 소돔은 사해 남쪽에 있던 전설적인 고을인데, 남색을 일삼다가 그만 유황불로 타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예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가파르나움을 저주하셨습니다.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특히 가파르나움에 보내는 예수님의 위협은 불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토록 강조하시는 회개가 왜 이처럼 중요한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회개는 구원과 직결됩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나 성자께서 이 세상에 강생하신 이유도 바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위한 첫쩨 조건이 바로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복음전파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회개하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신앙의 관문이며 구원받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회개한 무엇입니까? 회개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본연의 자기 자신을 깨닫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귀의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 있다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자기중심에서 탈피하여 하느님께 향하도록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기 위해서는 일생 동안 하느님을 향하는 회개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며, 이러한 방향에 맞추어 우리의 생활 전체를 끊임없이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라고 말한 세례자 요한의 호소대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의 삶이 오늘 복음에 나오는 세 개의 도시처럼 회개하지 아니하여 결국 주님의 저주의 삶으로 끝나버리고 만다면 우리의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들고 갖가지 어려운 삶 속에서도 언제나 끊임없이 회개의 생활로 주님을 향하는 기도의 열매, 이웃을 생각하는 사랑의 열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열매, 선행과 봉사의 열매, 희생과 절제의 열매,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어 항상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구원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이석희 신부-
어느날 아침 창밖을 보면서 "모든것들이 오늘 아침에는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군!풀밭은 그전보다 더 푸르고, 나무도 그전보다 더욱 청아하고, 꽃도 그전보다 더욱 아름답구나!" 하고 말하면서 새날을 맞이 한다면 그사람의 하루는 유쾌하고 즐거운 날이 될것입니다. 사실은 풀밭이 변한 것이 아니고 나무와 꽃이 변한것도 아니며, 다만 자신의 마음이 변화되어 온세상이 달라지게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것을 보면서 좋다고 말 할 수 없고 선한 것을 보면서 선하다고 말 할 수 없으며 주위에 펼쳐진 하느님의 은혜를 느끼지 못하는 우리의 굳어진 마음에 조금의 변화를 갖도록 노력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것입니다. 제대로 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갖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복음 말씀을 묵상합시다.
오늘 복음을 얼핏 보기에는 예수의 말씀과 기적들을 보고도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 사람들에게 화가 나시어 저주하시는 예수의 모습을 전해주는 듯 하지만 사실상은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슬픔이 베여있는 탄식의 말씀입니다. 예수의 활동이 펼쳐진 주 무대는 갈릴레아였고, 그중에서 유명한 도시 셋 즉 코라진,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이었습니다. 이 도시들은 랍비들의 종교 교육이 가장 성행하던 종교 도시 였기에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열려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도취와 오만으로 예수의 가르침을 외면하였습니다. 그들은 눈을 감고 빛을 보지 않았고, 귀는 틀어 막고 자기의 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이 도시들에서 많은 기적을 보여 주셨고, 그 기적을 보고서라도 회개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고개를 돌리고 돌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코라진은 후에 상처만 남았고, 베싸이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이름조차 역사에서 지워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은 선입견과 편견, 물질적 이익 때문에 볼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마음의 눈을 갖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반성의 시간을 갖게 합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준 은혜를 제대로 볼 줄 모르고 마음을 꼬집은 우화를 전할까 합니다.
어느날 여러 동물들이 창조되었을 때 하느님은 그 동물들을 모아놓고 그들의 몸에 맞는 것들을 선물로 붙여 주셨습니다. 새에게는 빨리 날 수 있는 날개를, 어떤 짐승에게는 뿔을, 추위에 견디도록 털을 각각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만은 털도, 뿔도, 날개도 어떤 선물도 받지 못하자 선물을 기다리던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가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내가 특별히 생각해서 준것에 대해서 깨닫지도 못하고 있구나, 나는 너에게 다른 동물들 보다 몇 배나 좋은 걸 주었단다. 그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들어 있어 모든 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사랑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말을 들은 인간은 그제야 받은 선물의 소중함을 깨닫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닫혀진 마음을 열고 주위를 바라본다면 하느님께 받은 은혜를 발견하게 되고 감사 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돌아섬이요, 회개이며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향해서 탄식하시는 예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지금까지 길들여진 삶의 방식과, 은혜로움을 잃어버린 마음으로는 새로운 아침을 맞이 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아름다우면 세상과 이웃이 새롭게 보입니다.
-장동현 신부-
성서에 나오는 고장 가운데 순례객이 거의 찾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갈릴래아 호수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교통이 불편해서,
또는 주요 성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온통 폐허뿐이기에, 볼 것도 없고 느낄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코라진이라는 곳입니다.
이곳은 예수께서 기적을 베풀고 설교하실 당시에 번창했던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대에 귀를 닫고 회개하기를 거절했습니다.
지금은 인적이 끊기고 쓰레기가 뒹구는 황무지가 되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폐허를 보면 예수님의 음성이 귓전을 때릴 것입니다.
‘너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 음성은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합니다.
값진 물건으로 치장하고 화려한 것으로 두른 이 몸, 이 인생의 끝은
어떤 모습으로 남을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먼지를 털어내면 어렵긴 하지만 간단한 질문만 남는다고 합니다.
착하게 살았느냐, 악했느냐. 그리고 잘살았느냐, 못살았느냐.
회개해야 합니다.
-배상희신부-
오늘 강론의 주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 가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제목의 유명한 인물 조각상이 있습니다. 이 조각상에 이런 이름이 붙은 데는 이런 내력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이 작품을 제작하던 조각가가 불행하게도 사고로 오른손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작업이 미완성인 채 끝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조각 작품이 한 손만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조각가는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었습니다.
왼손 하나만으로 끈질기게 작업을 계속하였습니다. 마침 내 작품이 완성되었습니다.
그것은 본래 작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훌륭했습니다.
이 조각상의 본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애칭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이 아닙니까?
우리는 때때로 험한 세상의 여정 가운데 넘어지고 방황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서서 길을 찾는 것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코라진아, 베싸이다야, 가파르나움아 화를 입으리라.
저주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토록 많은 기적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변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선포의 말씀이 참으로 인상 깊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단어가 빠져있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시선이 우리의 죄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변화되어 힘차게 생활하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많은 죄를 지으며 동시에 많은 허물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죄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변화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까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양승국신부-
<회개, 그 멀고도 험난한 여정>
이번 수해로 생명을 잃고, 가족을 잃고, 삶의 바탕을 잃고 망연자실해있는 이웃들을 떠올리면서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의 권고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한때 군인이었다가 수도자가 되고 투르의 주교가 된 마르티노 성인을 생각합니다. 아미앵 성문 앞에서 마르티노는 자기 외투의 절반을 잘라 가난한 사람에게 주었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께서는 몸소 그 외투를 입은 모습으로 마르티노의 꿈에 나타나시어 복음 말씀의 영원한 유효성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다...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오늘 복음의 주제가 회개인데, 회개는 결실을 수반해야 제대로 된 회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 회개의 결실로 피눈물 흘리며 슬퍼하고 있는 수재민들에게 작은 나눔이나마 실천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그래서 멸망이 예견되는 코라진과 베사이다, 카파르나움 사람들을 향해 강력한 경고의 말씀을 던지시는데, 안타까움, 속상함, 간절함이 긷든 말씀입니다.
사실 코라진과 베시아다, 가파르나움 사람들, 문제성이 많았던 도시들이었던 만큼 예수님께서 기울이셨던 정성도 각별했습니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예수님이셨기에, 자주 그곳을 들르셨고, 사람들을 만나셨고, 회개를 촉구하시며 복음 선포에 매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결과는 늘 초라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말씀과 메시아로서의 놀라운 행적을 접한 그 도시 사람들, 말씀을 들어보니, 자신들 눈앞에 벌어지는 기적과 치유활동을 바라보니, 확신도 섰습니다. 저분이야말로 메시아구나, 저분을 하느님으로 고백해야겠다, 삶을 바꿔봐야겠다고 다짐도 많이 했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세속의 재미’ ‘쾌락의 맛’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그들이었기에 그 발을 빼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회개를 향한 마음은 간절했지만 몸이 전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과 우상숭배, 하느님과 세상의 쾌락, 하느님과 극단적 이기주의적 삶의 방식 그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던 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목이 터져라 외쳐대셨지만, 최종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말았습니다.
회개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회개란 마음만으로, 계획만으로, 생각만으로,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단호함, 결연함, 확고부동함을 바탕으로 목숨 걸고 밀고 나가는 구체성이 요구됩니다.
회개는 평생 한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 먼 곳에 가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매일 매순간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내 구체적인 일상 한 가운데서, 매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웃들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흐트러졌던 마음을 모아 하느님께로 집중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매 순간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일이 회개입니다. 시시각각으로 산란해진 우리 삶을 하느님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회개입니다.
오늘 이 아침, 이 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회개의 구체적인 표현은 무엇일까요?
너무나도 명료합니다.
수재민들을 향한 진심어린 나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도움, 그리고 열렬한 기도겠지요.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길
-이기양 신부-
??도루묵?‘이라는 말을 아시는지요? 생선 중에 도루묵이라는 생선이 있지요. 생선이름이 도루묵이 된 데에는 유래가 있습니다. 조선 중엽 인조 때의 일입니다. 오랑캐가 한양 근처까지 쳐내려오자 왕 일행은 궁궐을 벗어나서 몽진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몽진 생활이 깊어지면서 준비한 식량도 거의 바닥이 나고 형편이 말이 아니게 되었지요. 그 때 인조가 머무르던 마을의 한 어부가 생선을 잡아서 진상을 했습니다. 요리해온 생선을 한 점 떼어 입에 넣어 본 임금은 입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는 맛있는 생선을 보고 ?’이렇게 맛있는 생선은 본 적이 없구나.?“ 감탄을 하며 어부를 데려오라고 청했습니다. 그리고 물었지요.
?’이 생선 이름이 무엇이냐??“
어부가 대답했습니다.
?’묵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생선을 묵이라고 불러서 되겠느냐? 앞으로는 은어라고 부르도록 해라.?“
임금님의 지시로 그 날부터 묵이라는 생선은 은어가 되었습니다.
그 후 전란이 끝나고 다시 궁으로 돌아온 임금은 옛날 생활로 돌아갔으나 식욕이 떨어져 기운을 통 차리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산해진미를 가져다 바쳐도 왕의 입맛은 돌아오지 않았지요. 그런 어느 날 불현듯 왕은 몽진 때 먹어본 은어가 생각이 나서 은어 요리를 청했습니다. 은어가 상에 올려지고 왕은 옛날 그 맛을 생각하면서 생선살을 떼어 입에 넣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맛이 형편없었습니다.
?’이 생선이 정말 옛날 그 은어가 맞느냐??“
화가 난 왕의 물음에 신하들이 쩔쩔매며 대답했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폐하.?“
?’은어는 무슨 은어, 도루묵이라고 해라!?“
이렇게 해서 ??도루묵?‘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좀 어렵고 부족해야 감사할 줄 압니다. 풍부하게 넘치기만 하면 감사할 줄 모른 채 불행해지지요. 더군다나 다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것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를 모른다면 그것이야말로 배은망덕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무척 화를 내시지요.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마태11,21.23)
저주에 가까운 말씀을 퍼부으시는데 이렇게 저주를 받은 세 도시는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화를 내셨을까요?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셨던 도시가 바로 이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11,20)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들을 가장 많이 보고 들었던 사람들이 이들 동네 사람들이었던 것이지요.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위치한 코라진, 또 북부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오는 입구 동쪽에 위치한 벳사이다, 그리고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웠다가 치유를 받았던 어촌 마을 카파르나움은 모두 갈릴래아 호수 주변에 위치하고 있어서 살기에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머무시면서 가장 많은 말씀과 기적을 행하셨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 세 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끝까지 예수님을 외면했지요. 많은 정성과 은혜를 베풀었는데도 회개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도시에 예수님께서 저주를 퍼부으셨고 실제로 이 도시들은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받은 은혜에 걸맞게 감사하고 나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 보면 받은 은혜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은총이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딴 짓을 하고 교만해지기 일쑤였지요.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앞 부분 몇 장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께서 부족함이 없이 모든 것을 다 채워주셨는데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마음으로 교만해져서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 결과 이 세상에서 힘들게 일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으로 전락하고 말았지요.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3,19)
또한 11장에는 바벨탑 사건이 나오지요.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하느님을 더 깊이 아는데 사용하지 않고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데 사용했습니다.
?’자, 성읍을 세우고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탑을 세워 이름을 날리자. 그렇게 해서 우리가 온 땅으로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세11,4)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풍요로운 도시였으나 타락의 극치를 이루었지요.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스스로가 잘 나서 풍요로운 줄 알았던 교만한 도시를 하느님께서는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당신이 계신 곳 하늘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유황과 불을 퍼부으셨다. 그리하여 그 성읍들과 온 들판과 그 성읍의 모든 주민, 그리고 땅 위에 자란 것들을 모두 멸망시키셨다.?“(창세19,24-25)
많이 받은 사람은 많이 내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저주에 가까운 화를 퍼부으신 이유는 그토록 많은 사랑과 가르침과 기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도시 사람들이 그에 걸맞은 회개의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어떤 시대보다도 풍요롭고 편리한 삶을 살고 있지만 그 어떤 시대보다도 불만이 많은 시대가 우리 시대입니다. 감사할 줄 모르고 만족할 줄 모르는 불행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지요.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르면 효도도 할 줄 모르고 부모 자식 간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지요. 감사하는 마음은 효도의 출발이자 신앙의 기초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받은 은총이 지속되지요.
우리 주위에는 은혜를 많이 받은 분들이 많습니다. 하느님께 감사 드리고 어려운 사람과 함께 나누는 모습을 보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특히 <성경 쓰기>, <100권 신심서적 읽기>, <기도학교>를 통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감사 드릴 일이지요. 그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야 은총이 지속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은 ??회개?‘와 ??감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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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가 된 이유>
-양승국신부-
오늘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혼쭐나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란 도시들은 과연 어떤 도시들이었을까요?
벳사이다는 요르단강이 티베리아 호수로 흘러들어가는 멋진 곳에 자리한 아름다운 도시였습니다. 코라진 역시 당대 대단했던 모습들이 몇몇 유적들을 통해서 남아있습니다. 카파르나움은 또 어떻습니까? 이곳에 건립된 회당과 율법학교는 유명했습니다.
이 세 도시는 접근성이 좋았습니다. 경제적으로 흥성했던 도시들이었습니다. ‘난다긴다’하는 학자들이 많이 살던 도시들이었습니다. 가방끈 긴 사람들이 많이 살던 도시들이었습니다. 많은 율법전문가들이 활동하던 도시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도시들이었기에 당연히 예수님께서도 자주 이 도시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수많은 기적도 베푸셨습니다. 하느님 은총이 강물처럼 흘러넘치던 도시들이었습니다.
이렇게 잘 나가던 도시들이었는데, 왜 예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을까요? 오늘날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폐허가 되었을까요?
그들이 지녔던 기득권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선입관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와 지식과 명예에 눈이 가려져 시대의 징표를 읽는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깊고도 깊은 타성의 늪으로부터 빠져나올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좋은 결심, 훌륭한 계획, 그럴 듯한 기도는 흘러넘쳤지만 정작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많은 은총을 넘치도록 받고 또 받았지만, 거기에 대해서 조금도 감사하지 못했었고, 오히려 배은망덕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가장 중요한 덕, 겸손의 덕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축일을 지내는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의 겸손은 유명합니다. 그는 수많은 프란치스코 수도자들의 최고 책임자, 총장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토마스 아퀴나스에 버금가는 대학자였습니다.
하루는 교황님께서 보나벤투라 신부님을 추기경으로 임명하셨습니다. 곧이어 교황님께서는 추기경의 임명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빨간 모자를 사람들을 통해서 보내셨습니다.
빨간 모자를 전달하기 위해 수도원에 도착해보니 보나벤투라 신부님은 설거지를 하고 계셨답니다. 신부님께서는 설거지를 마칠 때까지 빨간 모자를 나무에 잠시 걸어두라고 하셨다지요.
겸손의 덕은 모든 덕의 기본입니다. 겸손의 덕은 자신도 성화시키고 이웃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덕 중의 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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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회개와 너의 회개
- 조성숙 수녀-
어떻게 해야 완고한 나 자신, 아니면 다른 어떤 이의 마음을 회개시킬 수
있을까요? 놀라운 기적이 결코 사람들의 마음을 바꾸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급성백혈병으로
1년 정도 사실 수 있다는 진단을 받고 병상에 누워 계실 때 일입니다.
어머니는 우울해하시면서 지난 삶에서 고달팠던 시간들과 원망스런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을 자주 떠올리셨습니다. 평화롭게 임종을 맞으실 수
있도록 온갖 신앙의 말로 도움을 드리려고 했지만 어머니의 마음을 쉽게
바꿔놓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쯤 저는 수녀원 연례 피정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예전에 같은 공동체에 살면서 힘들게 지냈던 수녀님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이미 마음의 매듭들은 다 풀었지만 다시 한 번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피정이 끝나고 어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그 말씀을 드렸더니,
어머니는 뜻밖에도 “잘했다. 잘했다”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도 평생 마음을 묶어놓았던 친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고 당장 연락을 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잘 풀려갔고,
어머니는 편안하게 하느님 품으로 떠나셨습니다. 그때 제가 체험한 것은,
영적인 세계의 일은 이렇게 움직이는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를
회개시키기 위한 기도 속에는 나의 회개가 맞물려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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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워 하느님께로
- 기정희 수녀-
살면서 가장 많이 겪는 고통 중 하나는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일그러진 관계로 인해 마음고생을 하고 빗나간 길을 걷기도 한다. 사람의 인생은 관계의 연속이라 말할 수 있다. 그 관계 중 우리가 평생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관계가 바로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베드로는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과연 나는 어떤 대답을 할까?
나의 한평생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온갖 사건과 사람을 통해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 때로는 아니 계신 듯 숨어 계신 하느님…. 같은 하느님이시지만 우리 각자에게 체험되는 하느님은 다르다. 각 사람의 성격과 삶의 배경에 따라 체험이 다르기에 하느님을 보는 눈도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다양하게 체험하는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이시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그 사람만 보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자녀인 사람을 보는 것이기에 그들은 타인이 아니고 나의 이웃이다. 나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도록 허락된 사람들. 인디언 속담에 친구는 상대방의 고통을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고 했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짐을, 우리의 고통을 당신 친히 지고 가셨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빛 안에서만 구원과 생명을 얻는다.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 홀로 기도하시며 그분과 관계를 가지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과도 끊임없이 함께하셨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는 동시에 사람들과 함께하시면서 그분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무엇인지 그 관계의 조화를 보여주셨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을 꾸짖으신다.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회개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회복이며 사람과 사람의 관계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떨치고 하느님께 향하는 회개, 많이 받았기에 두려워할 줄 알고 축복과 은총을 체험했기에 갚을 줄 아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아낌없는 하느님의 사랑처럼 그렇게 나를 비워 하느님께 돌아서는 삶이 바로 그분이 원하시는 회개의 삶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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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균 신부 -
마태오 복음에 대한 성서신학자 정양모 신부의 주석을 보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낯선 마을들에 대한 개략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코라진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3㎞ 떨어진 마을이라고 합니다. 벳사이다는 북부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오는 입구 동쪽에 있는 어촌으로서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필립보의 고향(요한 1,44)이기도 합니다. 카파르나움은 갈릴래아 호수 북변 어촌으로서 거기에는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었(마르 1,29)다고 하지요. 예수님께서 공생활중 주로 그 집에 거처를 정하시고 갈릴래아를 비롯해서 이스라엘 각지에 순회전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한편 티로와 시돈은 현재 레바논 공화국 지중해변에 자리잡은 항구도시들로서 퇴폐하기로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이야기에 등장하는 죄악의 도시인 소돔과 소돔에 버금가는 이 두 도시는 오늘의 이야기에서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에 대한 불행 선언을 강조하는 소재로 등장합니다.
회개하지 않아서 불행한 도시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 예수님께서는 이 세 곳의 전도에 주력하셨지만, 결국 실패하셨던가 봅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의 태도를 되찾으라고 호소하면서 심혈을 기울이고 애쓰셨지만 이렇다 할 반향도 얻을 수 없었던 실망스런 마을들을 향하여 탄식처럼 불행을 선언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무척이나 눈물겹습니다. 또 한편으로 사랑이 많으신 분이라는 우리의 기대와 사뭇 다른 그분의 어조에 당혹스럽기도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오늘의 복음 낭독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은 마태오의 뒷이야기를 통해 반성을 해 봅니다. 마태오는 불행 선언에 뒤이어 예수님의 기도와 초대의 말씀을 끼워 놓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을 당신께로 초대하십니다.
당시에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자부하던 이들은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철부지처럼 어리석은 이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고 지키지도 못했던 이들이었고 그들은 고생하며 짐을 지고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득 오늘날 이 시대를 건너가는 우리는 무엇을 불행하다 생각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이 시대를 지혜롭고 슬기롭게 사는 길은 무엇인지 또 그 불행과 어떤 관계인지도 궁금해집니다. 이 시대에 그분은 우리에게 안식을 주실 수 있는지, 우리는 그분께 안식을 기대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경제가 관심의 초점인 시대입니다. 의식주와 관련된 모든 것이 온갖 이름으로 상품화되어 고가전략을 펼치며 새롭고 화려하게 포장되는 시대입니다. 그 모든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누릴 수 없음이 불행으로 여겨지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불황일 때조차도 재산을 불리는 법, 권력을 유지하는 법을 아는 것이 마치 그 옛날 이스라엘에서 율법을 아는 것처럼 지혜와 슬기로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늘어나는 시대입니다.
남들처럼 많은 돈을 버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이유로, 권력의 변두리에 있다는 이유로 무시되는 이들을 봅니다. 때로 가족들로부터도 무시를 당하는 가장들을 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것들을 해낼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세상이 만들어 놓은 표준에 못 미친다는 이유로 고생하며 짐을 져야 하는 이들을 봅니다.
죽음이 포기를 강요할 수 있는 것들을 통해서는 하늘나라의 신비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세상을 건너가는 동안 죽음이 오기 전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많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삶을 견디어 내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죽음이 찾아오면 포기되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은 물질을 행복의 핵심으로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물질의 결핍을 불행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삶의 기회가 얼마나 경이롭고 은혜로운 것인지 압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을 건너가는 동안 사랑을 귀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사랑을 길어내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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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
-김종근 신부-
주로 해외 오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나와 같은 선교사들이 자주 갖는 유혹(틀린 생각) 중에 하나는 ‘내가 지금 물설고 낯선 이곳에서 하는 것의 10분의 1만큼만이라도 내 나라에서 선교를 한다면 나도 성인 소리를 들을 텐데’라는 것이다. 특히 큰 기대 속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 어떤 일이 지지부진을 면하지 못하고 있거나 실패로 돌아갈 때면 이 유혹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이어서 반드시 따라오는 것이 그 일에 관계된 모든 이들에 대한 원망이다.
‘도와주기는커녕 반대하기만 하는 쳐다보기도 싫은 동료 선교사, 나의 훌륭한 생각을 이해조차 못하는 무식한 놈들, 희생·봉사정신은 없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놈들, 게으른 놈들, 이율배반적인 놈들`….’
내 탓은 없고, 사방이 온통 미운 놈 천지다. 이럴 때는 차라리 누구하고 실컷 싸우고 울기라도 하고 싶다. 이 유혹은 때때로 생각 차원을 넘어선다. 그래서 실제로 짐 보따리를 만지작만지작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런데 그후 몇 달이나 몇 년쯤 시간이 지난 후에 돌이켜보면 일을 그렇게 틀어지게 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나에게 있었음을 깨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일을 생각해 내고 준비하고 주도적으로 진행하였던 내가 바로 실패의 가장 큰 원인 제공자였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한번 허무해지는 순간이고 보따리 유혹이 다시 나를 살살 꼬드긴다. 그러나 유혹은 유혹일 뿐이니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한국에 돌아가서 10분의 1 운운하는 유혹에서 벗어나 지금 이 자리 선교지에서 정말 내 전부의 10분의 1만이라도 태우며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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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도시
-조욱현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 사람들에게 화가 나시어 저주하시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서상의 의미로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 자신이 모욕을 당했기 때문에 타오르는 듯한 분노를 품은 어조가 아니라 염려하여 애태우는 슬픔이 서린 탄식의 말씀이다.
그러면 소돔과 고모라의 죄보다도 더 약하다고 하신 코라진과 베싸이다의 죄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첫째로 그 지방에 대해 예수님께서 남달리 특별한 은혜를 베풀었지만 그것을 외면하고 망각한 죄이다. 즉, 다른 곳보다도 더 큰 하느님의 능력과 사랑을 보여주고 베풀었으나 그것을 저버림으로써 그에 반해서 실망시킨 죄이다. 다시 말해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이 코라진과 베싸이다 지방은 띠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많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슬픔과 탄식은 더 컸던 것이다. 두 번째, 그들의 죄는 그들이 무관심하다는 데에 있었다. 이 도시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공박도 하지 않았고 성밖으로 내쫓지도 않았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예수님께 대해 무관심한 태도였다.
현재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그러하지만 무관심만큼 상대를 더 깊숙이 괴롭히는 것은 없다. 바로 그러한 무관심의 죄가 예수님을 더욱 슬프게 했던 것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식의 말씀이 나온 것이다. 사랑을 남달리 누구에게 쏟았은데, 더 많은 편리와 특전을 베풀었는데, 그것을 받은 자가 그것에 무관심하다는 것이 그것을 준자에게 얼마나 괴롭고 실망이 되는지,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실감하는 일일 것이다. 무관심은 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일 수 있다. 미움은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 미움을 다시 좋아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지만, 무관심은 변화되기가 어려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가끔 그러나 무관심한 척 할 수 있다. 그것은 어떠한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보려고 하는 시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인관계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만나서 이야기를 하게되면 마음의 죄를 짓게 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게 될 수 있을 때, 일시적으로 그러한 자세를 취함으로써 우선 내 마음의 안정을 찾으며, 다시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려 하는 것은 우리가 삶 속에서 필요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시 마음을 열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다면 더 좋은 것은 없겠지만 말이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 앞에 어떠한가?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말씀을 들려 주셨고, 구원을 7성사를 주시어 더욱 많은 은혜를 베풀고 계시다. 그런데 거기에 응답하는 우리의 마음과 생활 자세는 과연 어떠한지?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이들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그리고 주님의 사랑에 우리도 언제나 긍정적으로 응답하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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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호신부-
사람은 누구나 자기인생이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인생이 성공하려면 먼저 분명한 목표를 세워야하고, 그 다음 목표달성을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향해 전력질주 해야 합니다. ‘승리의 월계관을 얻는 그 날까지......’
그런데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목표설정도 없고, 당연히 질주도 없습니다. 그러니 삶에 대한 이해도 없습니다.
신자로 사는 우리 인생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입니다. 구원이 내 삶의 유일하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것이 일생을 두고 내가 이룩해야할 절대 절명의 과업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위해 살다가, 이것으로 죽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을 위해 내 삶을 전력투구 해야합니다.
그런데 실상 구원이란 나 혼자의 힘만으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내가 비록 간절히 소망하고, 열심히 노력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내가 결정적으로 성취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그저 열렬히 바라고 간절히 원할 뿐이고, 겸손 되이 받을 뿐입니다.
구원은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께 있고 그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 분이 구원의 결정권자요 완성자이십니다. 따라서 내가 참으로 구원을 원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내 삶의 중심으로 삼아야 합니다. 구원의 열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내 인생의 중심으로 삼고 그 분께 모든 것을 걸어야 합니다. 나의 모든 자유, 기억, 지력, 의지, 소유한 이 모든 것을 내어 드려야 합니다. 그분께 생명을 걸고, 목을 걸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을 중심으로 삼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우뚝 서야 합니다.
그분이 내 인생의 중심이 될 때, 세상의 어떤 유혹과 시련, 절망과 고통 앞에서도 당당하고 자신 있게 바로 설 수 있습니다. 그분이 내 삶의 중심이 될 때, 늘 “안심하고, 진정하고, 정신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내 산성, 내 보루, 내 성채 되어 주시고, 당신 도성을 영원히 굳히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코라진과 가파르나움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어떤 분인지를 분명히 목격하고도, 그 분을 삶의 중심에 세우지 않았고, 그분께 인생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책임을 자신들이 직접 지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네 세상 삶이 계속하여 어렵고 힘이 듭니다. 미래도 불투명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실망하고 낙담하여 좌절하고 비관하기보다, 중심을 잡고, 우뚝 서서 이겨내야 합니다. 목표를 바로 하고, 삶의 중심을 더 구체화해야 합니다.
복음환호송을 권고합니다.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
내 인생 목표를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 그 중심에 굳건히 설 때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도성을 영원히 굳히셨도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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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늘에 오를 성싶으냐?
-김경식 몬시뇰-
예수께서는 복음을 전하여도 받아들이지 않는 도시를 향하여 “너는 화를 입으리라”(21)는 말씀으로 벌을 내리십니다.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는 협박인 동시에 재앙을 가져옵니다. 예수께서 행복선언을 하실 때 이미 구원이 구체화된 것과 같이 불행선언도 재앙이 구체화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BC1600경에 음탕한 죄로 유황과 불로 멸망하였습니다(창세 19,24).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보인 기적들을 이들에게 보였다면 그 도시가 아직 지구상에 남아있었을 것이고, 악명 높은 띠로와 시도 지방의 사람들에 보였다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가치를 외면하고 쾌락에 젖어들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고 자기에게 유익하면 진리이고, 그렇지 않으면 허위이고 사기라고 여깁니다. 자기의 잠재력을 개발하여 우주를 지배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종교가 하느님을 앞세워 자기개발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위주로 생각하고 생활합니다.
교회의 탓입니다. 복음을 전한다 하면서 기쁘게 살지 못한 탓입니다. 복음의 내용대로 나눔의 기쁨이고, 영적 기쁨이며, 영생이 주는 기쁨을 살았다면,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말초신경의 흥분으로 기쁨을 찾는 사람들에게 영적 세계의 기쁨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재물이나 명예나 권력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업적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예술이나 학문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뵙는 기쁨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기쁘게 아름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사람들이 복음은 참으로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하루의 첫 시간을 마음으로 깊은 감사와 찬미로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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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간곡한 사랑의 호소
-최승일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의 내용을 얼핏 보면 마치 예수님께서 코라진과 베싸이다에 저주를 내리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죄인을 단죄하러 오신 분이 아니시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저주의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오히려 구원을 외면하는 코라진과 베싸이다에 가던 길을 버리고 빨리 돌아서서 구원의 길로 들어오라는 주님의 간곡한 사랑의 호소인 것입니다. 띠로와 시돈, 악의 도시를 상징하는 소돔과 고모라도 주님의 구원의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보았더라면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를 하였을 것인데, 코라진과 베싸이다에서는 회개를 하지 않고 구원의 길로 들어서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들 도시가 잘못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었습니까? 이방인의 도시인 갈릴래아 읍내에 있는 이 도시들은 예수님을 내어 쫒지도 아니하였고 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도시 보다도 더 많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고, 더 많은 기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즉 더 많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에 감사할 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은망덕한 행위가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많은 은혜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을 몰랐고 또 주님이 하시는 일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배은망덕과 무관심 - 이것이 코라진과 베싸이다가 잘못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지금의 우리들은 어떠한지요? 주님께로부터 받은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제대로 잘 협조를 하고 있는지요? 이참에 한번 깊이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예전에 어느 본당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어느 비신자 자매님이 성당에 다니는 친구의 안내로 저를 만나러 왔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아주 잘 사시는 분이었고 또 자녀들도 다 공부를 잘하였답니다. 장남은 서울대학 의과를 졸업했는데 어느 날 의사생활이 하기 싫다고 미국 유학을 보내달라고 하며 경영학을 공부해서 아버지와 사업을 하겠다고 하였답니다. 그래서 돈이 많았기에 아들이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유학간 아들이 차를 사 달래서 차도 사주었는데,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참먹어러 나가던 길에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답니다. 마음이 괴로워 못 견디던 중 성당에 다니는 친구의 도움으로 저를 찾아 성당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부부지간에 열심히 교리공부를 하고 예비자이면서도 성체조배를 매주 정해진 시간에 열심히 하시다 드디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곧 본당에서 활동도 열심히 잘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이 참으로 인상적이었습니다. “신부님, 이렇게 좋은 신앙을 왜 이제야 알았는지 후회스럽습니다.r여태까지는 돈 많고 자식 공부 잘해서 행복한 줄 알았는데, 장남이 죽고 나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돈이 없었더라면 유학도 안 보냈고 차도 안 사 주었을 것이고 그랬으면 장남을 잃지도 않았을 테니, 돈이 원수같이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니 너무 평화롭고 행복합니다. 좀더 일찍 하느님을 알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주님의 사랑 안에 젖어 들지 못하고, 지금까지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도 모르고, 제 잘난 맛에 살면서 도무지 주님의 일에 무관심한 우리들에게서 지금 그 은혜를 거두어 가시어 주님의 은혜를 간절히 바라는 다른 사람에게로 넘겨주신다면 그들은 지금의 우리들 보다 훨씬 더 주님께 감사하며 보답하는 생활을 하지 않겠습니까? 마치 띠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 사람처럼 말입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빨리 당신에게로 돌아서기만을 기다리십니다. 그것도 가만히 앉아 기다리시는 것이 아니라 눈물을 흘리시며 제발 당신에게로 오라고 사랑의 호소를 하고 계십니다.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이제 우리들도 빨리 주님께로 돌아서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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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정말로 대단합니다. 하늘에 구멍이 났을까요? 왜 이렇게 비가 계속 오는지 모르겠네요. 그래서인지 요즘에는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비가 좋아’라고 말씀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워낙 이 비로 인해서 피해를 입으시는 분들이 너무나 많으니까요. 어제 성지에 봉사 나온 신학생들과 일을 하고 있는데, 그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해요.
“신부님, 이제는 해(태양) 좀 보고 싶어요. 처음에는 해가 너무 뜨거워서 흐린 날씨가 계속되었으면 했는데, 이렇게 계속 비만 오니까 이제는 해가 보고 싶네요.”
이 말에 저도 깊은 공감을 하게 되더군요. 전에는 피부가 시커멓게 탈까봐 태양 좀 뜨지 말라고, 또 태양이 뜨더라도 선크림을 발라서 타지 않도록 노력을 했거든요. 하지만 이제는 시커멓게 타도 좋으니까 제발 태양 좀 봤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들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태양이 뜨거울 때에는 비가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렇게 비가 오고 있을 때에는 뜨거운 태양이 보였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즉, 자기 좋은 데로만 이루어지길 바라지요.
이런 이기적인 우리들의 마음, 나만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우리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주님의 손길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주님께서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세요? 그래서 하느님의 외아드님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를 직접 짊어지시고 죽기까지 하십니다. 그런 예수님이셨는데, 이제 우리들에게 모든 관심을 거둬들였을까요?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을 지켜보고 계시며, 우리들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즉, 주님의 손길이 가득 담긴 기적을 우리 곁에서 계속해서 일으키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욕심, 이기심, 미움, 분노 등의 부정적인 나의 마음이 주님의 기적을 못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소와는 달리, 아주 격한 어조로 사람들에게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특별히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크게 화를 내십니다. 그래서 저주의 말씀까지도 하십니다.
이곳은 갈릴래아 호숫가 근처의 도시로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곳이었고, 예수님 제자들의 고향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주 활동 무대였기 때문에, 당연히 이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그 기적 자체에만 관심을 두면서, 그 기적 덕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 기적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외면하게 됩니다. 이렇게 변화되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한심하셨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화를 내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떨까요? 우리들에게 주신 그 많은 은총과 사랑에 대해서 우리들은 어떻게 응답하고 있었을까요? 우리 역시 이천년 전의 갈릴래야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요?
내 안에 부정적인 마음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그래서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의 화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 피해가 더 이상 없기를 기도합시다.
빠다킹신부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백남국 신부-
◆돌아보면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르겠습니다. 서품 피정 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오로지 베풀어 주신 하느님의 사랑밖에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서품상본에 ‘말로 다할 수 없는 선물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라는 구절을 적어넣으며 마지막까지 주님을 위해 살 것을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향한 그 마음이 얼마 가지 않아 타성과 게으름에 묻혀버리고 사제생활은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크나큰 사랑과 반복되는 배신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오늘 복음은 “심판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며, 사랑이 크면 그에 대한 심판도 무거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느님 앞에 설 때까지 이런 반복되는 삶의 습성에서 벗어날 자신이 없으니 어찌해야 하는지요. 그냥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기대를 걸며 혼자 앉아서 이렇게 중얼거려 봅니다. “하느님, 사실 한번 회개해서 마지막까지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신앙인으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학교에서도 선생님은 언제나 100점짜리를 가르치지만 학생들의 성적은 70점도 나오고 60점도 나오지 않습니까? 우리 삶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 잘 아시죠? 하느님, 60점만 넘으면 낙제를 면하듯이 우리 인생도 그렇게 해주십시오. 하느님, 제 능력으로는 당신 말씀 다 따르기가 벅찹니다. 그러니 그냥 낙제점만 면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아니, 저는 특히 사랑을 많이 받은 자니까 낙제점이 조금 높겠지요? 70점만 살게 해주시면 안 될까요?”
코라진아, 베싸이다야!
-강영구신부-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서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대에게
능소화(凌宵花)의 계절입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속에서도 능소화는 끊임없이 피고 떨어집니다.
햇볕 쨍한 날씨가 되면 좀 더 진한 분홍색으로 자태를 뽐내겠지만 굿은 날씨 때문인지 그렇지 못합니다. 옛날에는 능소화(凌宵花)를 양반꽃이라 했다는 군요. 상놈이나 평민의 집에는 이 꽃을 심을 수 없었답니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능소화는 꽃은 화려하지만 향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위험합니다. 꽃가루가 깨진 유리 조각처럼 생겼다는 군요.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각막을 손상시킬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능소화(凌宵花)는 멀찌감치 떨어져서 바라볼 꽃이지 가까이 할 꽃은 못됩니다.
아름답다고 무턱대고 다가가면 상처받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화려하지만 향기롭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기적(奇蹟)은 초자연적 신비스러운 사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감지(感知)할 수 있는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기적(奇蹟)입니다.
코라진과 베싸이다를 사랑하는 예수께서 수많은 기적(奇蹟)을 두 마을에서 행하십니다.
사랑 받는 것은 무엇이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코라진도 베싸이다도 사랑을 받기만 할 뿐 꽃도 피우지 않고 열매도 맺지 않습니다.
겉으로만 그럴듯할 뿐 코라진도 베싸이다도 뿌리 없는 나무였습니다.
화가 나신 예수께서 사랑 대신에 저주를 퍼붓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당신 삶의 가지 끝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피기를 바랍니다.(一明)
모두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김만수 신부-
오늘 강론의 주제는 모두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하고 말 것이라는 주제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회개하지 않은 세 도시가 등장합니다.
코라진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에 위치한 고을이고 베싸이다는 북부 요르단 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들어오는 입구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파르나움은 호수 어촌으로서
시몬 베 드로의 집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중 주로 이 집에 거처를 정하고 갈릴래아 및 이스라엘 각지 의 순회 전도를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도시는 예수께서 기적도 많이 행한 사랑받은 도시들이었습 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당신의 기적을 가장 많이 행하신 이 도시들을 꾸짖기 시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도시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코라 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차라리)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이들 도시들을 저주하였 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 전도 여행의 거점이었던 가파르나움마저 저주하십니다.
“너에게 베푼 기적들을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 있었을 것이다
(여기 소돔은 사해 남쪽에 있던 전설적인 고을인데, 남색을 일삼다가 그만 유황불로 타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예수께서는 회개하지 않은 가파르나움을 저주하셨습니다.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특히 가파르나움에 보내는 예수님의 위협은
불신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모두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이토록 강조하시 는 회개가 왜 이처럼 중요한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회개는 구원과 직결됩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나 성자께서 이 세상에 강생하신 이유도
바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을 위한 첫째 조건 이 바로 회개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복음전파를 시작하시면서 제일 먼저 ‘회개하라’는 말씀 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회개는 신앙의 관문이며 구원받기 위한 필수 조건 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회개한 무엇입니까 ?
회개란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본연의 자기 자신을 깨닫고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 하기 위하여
하느님께 귀의하는 것을 뜻합니다.
마치 탕 자가 아버지를 떠나 있다가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자기중심에서 탈피하여
하느님께 향하도록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하기 위해서는 일생 동안 하느님을 향하는 회개의 자세를 견지해야 하며,
이러한 방향에 맞추어 우리의 생활 전체를 끊임없이 이끌어가야 합니다.
그리하여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이라고 말한 세례자 요한의 호소대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생의 삶이 오 늘 복음에 나오는 세 개의 도시처럼 회개하지 아니하여 결국
주님의 저주의 삶으로 끝나버리고 만다면 우리의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힘들고 갖가지 어려운 삶 속에서도 언제나 끊임없이 회개의 생활로
주님을 향하는 기도의 열 매, 이웃을 생각하는 사랑의 열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열매,
선행과 봉사의 열매, 희생과 절제의 열매, 기쁨과 평 화의 열매를 맺어
항상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며 구원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멘. ♡
†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은?
-박상대 신부 -
마태오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께서 복음선포를 위해 12제자를 따로 선발하신 후, 그들에게 여장규칙과 선교지침을 담은 파견설교를 길게 하신 다음 실제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마르코와 루가는 12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비교적 간단한 여장규칙과 선교지침을 내려받고 곧바로 나갔으며, 얼마 후 다시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마르 6,12.30; 루가 9,6.10) 마르코와 루가가 이렇게 똑같이 12제자의 파견과 활동보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한 사실일 것인데, 마태오가 이를 빠뜨렸을 수도 있겠다.
하여간 마태오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속해서 갈릴래아 주변 마을들을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기적을 베푸신 것으로 보도한다.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예수께서 진정 메시아인지를 물어보게 한 질문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하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진정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다.’는 사실을 한층 강조하기 위한 마태오의 편집으로 볼 수 있다.(마태 11,2-19)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는 말씀을 어제 복음에서 떼 내어 오늘 복음과 연결해서 본다면, 예수께서 주시려는 ‘칼’은 분명 경고와 심판을 의미한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주변의 도시들, 즉 예수께서 지금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기적을 행하신 코라진(호수 북쪽 3Km), 베싸이다(호수 동편어촌), 가파르나움(호수 북편어촌)에 불행을 선언하신다.
이 불행선언은 곧 멸망의 경고요 심판이다. 이유는 당신께서 가장 기적을 많이 행하신 곳인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기적들을 차라리 죄악의 온상지였던 시돈과 띠로(당시 페니키아, 현재 레바논의 지중해 연안도시: 이사 23장; 예레 25,22; 에제 26-28장; 즈가 9,2-4; 요엘 4,4 참조)에 베풀었더라면 그들은 자루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며, 소돔에(창세 19장; 에제 16,48-50) 베풀었더라면 소돔이 유황불로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을 것이라고 넋두리를 하신다. 그리고는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의 도시들이 시돈, 띠로, 소돔의 도시들보다 훨씬 무거운 벌을 받을 것임을 예고하신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예언이다. 만약에 내가 직접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지방으로 옮겨가시고(19,1), 거기서 예리고를 거쳐(20,29) 예루살렘으로 상경할 때까지(21,1)는 줄곧 갈릴래아 주변 마을들을 선교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유년시절을 포함한 30년이라는 공생활 준비기간을 나자렛과 이곳 도시들에서 보냈다. 즉 예수님의 고향과도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 도시들이 오늘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맞아야 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어떤 도시와 마을도 오늘 복음의 불행선언을 남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일지 모르나 밤의 어둠이 죄악을 가리고 있으며, 그 속에는 불행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 어쩌면 이미 뿌리를 내렸을 지도 모른다.
“방배동아, 명동아, 남포동아 남천동아, 너희들이 하늘에 오를 성싶으냐? 웃기지 마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심판 날이 오면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불행선언을 맞았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이 띠로와 시돈보다 악한 죄악의 도시들이어서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맞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직접 보았으며,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기적의 은혜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지도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 순간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께 믿음을 가진다면 오늘의 불행선언은 곧 행복선언이 될 것이다.
흔히들 불행과 행복의 차이는 그리 멀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고 자기식대로의 행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고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불행하여라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세 지방 즉 코라진과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을 불행하다고 말씀하셨고 한편 띠로와 시돈 지방에 대한 애정을 나타내신 것을 볼 수 있다. 왜 예수님은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나움을 불행하다고 하셨을까?
도대체 그 지방에 무슨 기적을 행하셨길래 띠로와 시돈에서 그런 기적이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하셨을까? 왜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움에만 기적을 행하셨고 띠로와 시돈 지방에는 기적을 행하지 않으셨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한다. 우선 예수님이 코라진과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 지방에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 또 어떤 기적을 행하셨는지를 알아 보는 것이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코라진은 갈리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고을이며 베싸이다는 북부 요르단 강이 갈리래아 호수로 들어오는 입구 동쪽에 있는 어촌으로서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이기도 하다. 가파르나움은 호수 북변 어촌으로서 거기에는 시몬 베드로의 집이 있었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중 주로 그 집에 거처를 정하고 갈릴래아 및 이스라엘 각지의 순회전도를 하셨다.
어쨌든 마태오는 가파르나움을 예수님의 고을이라고 했다. 위에 언급된 세 지방은 모두 예수님이 전도 여행을 하셨던 곳이고 띠로와 시돈 지방은 이방인의 도시로서 예수님의 전도 여행이 미치지 못한 곳이다. 다시 말해서 코라진과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은 예수님이 직접 복음을 전한 곳이며 띠로와 시돈 지방은 예수님이 직접 복음을 전한 곳이 아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주력해서 직접 복음을 전한 세 지방에서의 복음 선포가 실패로 끝나셨다.
그렇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서 "불행하다"라는 말은 "주의해라, 슬프구나"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그토록 심혈을 기우려서 복음을 전하였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해서 슬프다, 안타깝다. 라는 뜻이다.
마치 부모가 자녀들에게 그토록 조심하라고 말했는데 말을 듣지 않고 사고가 났을 때 부모가 안타까워 하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불행하게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불행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늘 나라에 갈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었는 데도 듣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술을 그만 마시라고 말을 해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술을 마시면 결국 그 사람은 알콜 중독자가 되고 몸과 마음이 망가지고 병이 들어 불행하게 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그 많은 지방이 있지만 특별히 가파르나움 지방을 중심으로 복음 즉 하느님의 기쁨 소식을 전하셨으니 그 지방은 얼마나 축복을 받은 지방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니 얼마나 그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일인가? 오히려 이방인의 지방인 띠로와 시돈 지방에 그토록 열심히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셨다면 "그들은 아마도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라는 것이다.
코라진과 베싸이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이 불행한 것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복음만 전하신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기적들도 행하시면서 당신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그리고 사람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구세주이심을 드러내 보여 주셨지만 사람들이 그분을 알아보지 않았고 조금도 복음을 듣고 복음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회개의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받을 수 있는 축복을 또는 은총을 받지 못했으니 불행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는 것이다.
은총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특히 복음은 하느님의 크나큰 선물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서 인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신다.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 인간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 방향을 제시해주신다. 예수님은 복음을 통해 병든 인간이 어떻게 치유될 수 있는지 그 치유의 방법을 말씀하시고 또 말씀을 통해 직접적으로 치유시켜 주시고자 하신다.
복음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가장 큰 선물이며 축복이고 또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는 유일한 약이다. 그러나 평양감사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그만이라고 하듯이 예수님게서 아무리 큰 선물과 축복을 주시고자 하시더라고 그 축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축복이 축복이 될 수 없고 가장 큰 선물이 선물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이 행복해지려면 그리고 많은 축복과 은총을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복음을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여야 한다.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 각자의 자유 의지에 맡겨진 것이다. 복음 선포는 예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축복이고 선물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게 달려 있다.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고 축복인데 그것을 인간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불행일뿐 아니라 죄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원의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란 무엇인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진지하게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죄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우리가 잘 모르는 데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지 못하고 하느님이 주시고자 하는 큰 선물을 받지 못하고 하느님이 가르쳐주신 길로 가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직접 활동하셨을 때에 코라진과 베싸이다와 가파르나움에 복음을 전하셨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듯이 오늘 날에도 복음이 선포되고 있지만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거나 복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거나 또는 복음의 내용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천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축복을 받아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하느님의 선물임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 귀중한 선물을 하나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불행해지는 것이고 가난해지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접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신자라고 해서 다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니다. 비신자들보다 더 많이 복음을 듣고 알아들을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주어졌지만 이 큰 축복을 축복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 날에 오히려 비신자들보다도 더 깊고 깊은 저승에 떨어질 것이다. 비신자들이 우리처럼 복음을 접할 기회가 주어졌다면 아마도 우리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하고 더 올바르게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듯이"(마태 5, 45) 오늘도 예수님은 카톨릭 신자만이 아니라 모든 이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선포하신다. 신자라는 신원만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또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알아듣고 회개하여 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축복을 주시고 행복하게 해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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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축복을 주시고 행복하게 해주신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