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1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마태오 11,25-27)
"I give praise to you, Father, Lord of heaven and earth,
for although you have hidden these things
from the wise and the learned
you have revealed them to the childlike.
말씀의 초대
모세가 미디안 땅으로 도망가서 양 떼를 치다가 거룩한 산 호렙에서 불타는 떨기나무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부르심을 받는다. 이제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 지도자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기쁨에 넘쳐 기도하신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철부지 같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셨음을 감사드린다. 하느님의 일은 이렇게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는 천진한 어린이 같은 사람들에게서 이루어진다(복음).
☆☆☆
오늘의 묵상
제자들이 파견되어 나갔다가 싱글벙글 기뻐하며 돌아왔습니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없이 빈 몸으로 파견되었지만, 제자들은 주님의 능력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마귀들을 복종시켰기 때문입니다(루카 10,17 참조). 오늘날로 말하면 제자들이 ‘사목 실습’을 하고 돌아와서 어린이처럼 행복해하며 자신들의 체험을 예수님께 말씀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철부지 같았던 제자들을 현장으로 파견하시면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걱정하셨지만, 이제 그들이 아무 일 없이 사명을 마치고 돌아오자 예수님께서는 기쁨에 넘쳐 하느님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철부지처럼 주님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말할 때마다 “주님께서 하셨다.”라는 말 대신에, “내가”라는 말을 자주 하며 틈만 나면 자신을 내세웁니다. 우스갯소리지만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다니는 『성경』에는 4복음서는 없고 오로지 자신이 만든 제5복음서만 있다고 합니다. 바로 ‘내가 복음’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조심해야 할 것은 이렇게 자신의 ‘덫’에 걸려드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내’ 일을 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는 그곳에 안 계시고 오로지 나만 남게 됩니다.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지만 기쁨이 없고 공허한 마음이 드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을 하면서도 기쁨이 없다면, 스스로 주님의 일을 하는지 내 일을 하는지 정직하게 물어보면 됩니다.
☆☆☆
자연이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동물도 사람 대하는 것이 다르고 나무와 풀도 ‘옛날 모습’이 아니라고 합니다. 모두 인간의 자업자득입니다. 사료를 먹이며 가두어 키운 동물이 고운 눈빛으로 사람을 대할 리 없습니다. 비료와 농약에 시달리는 식물이 순한 느낌으로 다가올 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변화를 위해 노력합니다. 주님께서 주신 본래 모습을 되찾으려 애쓰며 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전과 똑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대해 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변해도 주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십니다. 사람에 대한 그분의 애정은 바뀌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는 이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의 ‘한결같으심’을 믿고 있는 이들을 ‘철부지’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소유가 많으면 달리 대접받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똑같이 대해 주십니다. 학식이 많아도 지위가 높아도 재물이 많거나 적어도 똑같이 대해 주십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이들이 진정 지혜로운 자들입니다. 우리는 ‘슬기로운 철부지’가 되어야 합니다.
☆☆☆
“아버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에서 철부지는 철없는 어린아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사실 그들은 철이 없었습니다. 스승님께서 수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데 ‘그날이 되면’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결코 당신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합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은돈 서른 닢에 스승님을 팔아넘깁니다. 이 모두가 철부지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믿으셨습니다. 그러기에 당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시고 아버지의 소명을 맡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넓디넓은 마음입니다.
철부지는 단순히 어린아이만이 아니라 ‘철없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세상눈에는 그렇게 보여도 주님 눈에는 아닐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판단해도 예수님의 판단은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지요? 권력에 기대거나 인맥을 찾거나 재물에 의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런 배경이 있어야 조직이 잘 돌아가고 탈이 없을 것이라 믿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다면 주님 앞에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철부지의 믿음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님 앞에서는 철부지가 아닐는지요?
☆☆☆
부모들은 자식들을 누구나 다 사랑하지만 특히 장애나 어려움을 지닌 자녀들을 더 사랑합니다. 측은한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개해 주시는 아버지 하느님 역시 그런 측은한 마음을 지닌 분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철부지와 작은 이들, 곧 보잘것없는 사람을 더욱 좋아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카인 대신 아벨을, 에사우 대신 야곱을 선택하십니다. 다윗의 여러 형제들 가운데 보잘것없는 다윗을 선택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똑똑한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 또는 사두가이들을 뽑지 않으시고, 세리나 어부 출신의 제자들을 선택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양승국신부-
<비빌 언덕도, 배경도 없던 철부지들>
성경에 의인(義人)이란 말이 가끔씩 등장합니다. 의인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는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는 사람, 저항의 선봉에 선 투쟁가 등, 강성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뜻은 다른 데 있습니다. 한자 옳을 의(義)를 분석해볼까요? 양(羊)자와 아(我)가 결합되어 있네요. 그러고 보니 의인이란 ‘내 안에 양(羊)있는 사람’입니다. 양이란 동물은 고분고분, 순종, 순수, 순결함, 순박함의 대명사입니다.
결국 의인이란 진리 앞에 자신을 활짝 개방시킬 여유가 있는 열린 사람, 예수님이란 새로운 가치관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관대한 사람, 부드러운 사람, 다시 말해서 마음이 순수하고 깨끗한 철부지들을 말합니다.
어제 예수님께서 신랄한 독설을 인정사정없이 퍼부으셨던 도시 코라진과 베사이다, 그 도시들에는 다른 도시들에 비해 율법학교, 회당들이 많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도시들은 당시 잘 나가던 율법학자들의 집결지였습니다. 가방끈 긴 사람들이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이 지니고 있던 지식은 산 지식에 아니라 죽은 지식이었습니다. 지도자요 학자로서 가장 중요한, 미래를 향한 열린 마음과 겸손함이 결여된 그들이었기에, 교만과 아집으로 눈이 먼 그들이었기에,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 아버지의 초대를 결정적으로 거절하는 큰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너무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한평생 목숨 걸고 하느님을 연구했지만, 따뜻하고 열린 가슴이 없었기에, 교만과 불손으로 눈이 가려져 있었기에,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하느님만 찾아 헤맸습니다. 평생에 걸친 그들의 공부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묘하게도 당대 내놓으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가난한 철부지들 앞에 더욱 자신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가난한 철부지들, 이 세상 그 어디 가도 믿을 구석 한 군데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빌 언덕도, 밀어줄 배경조차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저 황량한 들판에 홀로 서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보다 자연스럽게, 보다 쉽게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가진 것이 없다보니, 워낙 삶이 절박하다보니, 하느님의 도우심이, 하느님의 사랑이 더 간절했던 것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이 아니라 철부지들에게 드러내시는 하느님은 오늘 우리에게 크나큰 위로로 다가오십니다.
시련의 크기가 큰 만큼 오래지 않아 다가올 그분 사랑도 클 것입니다. 고통의 깊이가 깊은 만큼 하느님 은총과 축복도 커져만 갈 것입니다.
가난한 철부지인 우리들이 조금만 더 노력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 눈이 조금만 더 맑게 트인다면, 우리 영혼이 조금만 더 순수성을 회복한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크신 상급이 클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의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고통 그 한가운데 현존하심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들이 지루함의 연속이 아니라 신비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천국의 한 조각임을 알게 해주실 것입니다.
친구 예수님
-이훈 신부-
사전을 찾아보면 스승은 ‘자기를 가르쳐서 인도하는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을 인도하는 인도자가 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또한 사전에서
선생의 뜻은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나옵니다. 예수님은 또한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우리는 내가 이해한 대로 사람을 가르치려 하고,
누군가로부터 인도자나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가장
높은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섬기는 사람은
마음뿐 아니라 몸으로까지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사도들이 그들의 한 일과
가르쳤던 것을 보고하는 것은 스승으로 불리거나, 선생으로 대접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비와 사랑을 실천했음을
보고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하느님은 지혜롭다거나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달리 말해 선생이나 스승으로 불리는 사람들보다는 철부지 같은
어린아이들에게 벗으로 다가오십니다. 어린아이들의 기도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들은 ‘친구 예수님’이라는 말로 기도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 어린이들의
마음만큼 작은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친구이신 예수님을 만날 것입니다.
찬미 놀이
- 임원지 수녀-
예수님께서 “아버지”, 그리고 즉시 “하늘과 땅의 주님”이라고 부르신다. 이는 하느님이 세상 창조주라는 말씀이다. 모든 예술은 창작의 즐거움이요, 창조주와 나누어 가지는 기쁨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귀엽고, 아기도 자기 똥을 가지고 논다고 한다. 자기 작품인 것이다. 어느 의미로 창조요 주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삯꾼이 아니고 착한 목자가 되는 이유도 여기 있겠다. 집나간 탕자를 아버지는 가여워하지만, 형은 같은 젖 먹고 자랐으면서도 제 아우를 거부했다. 아버지와 형의 차이인 것 같다. 하느님께 이 온 우주가 얼마나 끔찍하시겠나. 죄로 더럽히는 것은 인간뿐이어서 하느님의 육화는 일어났는지 모른다.
어버이날 “우리 부모님”이라는 주제의 글쓰기에 어느 어린이가 이렇게 썼다. “우리 부모님이 참 고맙다. 우리 부모님이 안 계셨더라면 나는 고아로 태어날 뻔했다.” 아버지를 모르는 유복자라면 생각만 해도 서럽다. 우리가 하느님, 지존하신 그분의 자녀임을 알려주신 예수님, 그분 아니었으면 아빠도 모르는 유복자녀들이었겠다. 아버지께 대한 지극한 사랑을 복음서 곳곳에 드러내시는 아드님 예수님한테서 아버지께 대한 사랑을 배운다.
하늘과 땅의 주님께서 7월에도 많은 꽃들을 선물하셨다. 든든하게 여름을 지켜주는 무궁화·능소화·배롱나무와 자귀, 어느 거리엔 모감주도 꽃을 피웠으리라. 토끼풀·닭의장풀·며느리밑씻개 널려 피고, 짚신나물이 꽃대를 다듬으며, 대문 없는 집 주인의 뜰에는 나팔꽃·한련화·봉숭아·분꽃·백일홍·채송화가 잔잔하여 나비들이 나풀나풀 찾아오고, 붕어들이 노니는 못에 크고 작은 연꽃이 피는 이 때, 어린이 철부지들이 어울려서, 바삐 사는 어른들 몫까지 창조주 아버지 하느님 찬미 놀이를 하고, 이를 보시며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오늘 하루, 중세의 철학자이며 사상가인 성 보나벤투라와 함께 아버지 하느님을 어디서나 뵙고 싶다
사랑할 줄 알려면
-전삼용신부-
하느님을 제외하고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책이나 영화에서 '당신을 사랑해요.'라는 말 대신 '당신을 알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면 더 알게 되고 더 알게 되면 더 사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의 말을 굳이 들을 필요가 없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 아셨다고 요한복음은 전합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이심과 동시에 가장 완전하게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는 하느님을 얼마만큼 알고 이해하고 있을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따라서 사랑하는 만큼 하느님을 이해하고 또 하느님을 이해하는 만큼 사랑할 줄 압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사랑은 항상 유한하기에 이 세상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완전한 사랑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하느님을 안다고 착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 낸 것이 황금 송아지입니다. 황금 송아지는 처음부터 우상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하느님을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도 규정될 수 없듯이 사랑도 규정될 수 없고 죽기까지 우리에겐 미스터리로 남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온전히 진리를 이해할 수 없고 사랑을 깨달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죄로 인한 인간의 유한성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아버지를 완전하게 이 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느님께서는 아들에게 당신의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는 그만큼 완전하게 아들을 사랑하셨다는 뜻입니다. 아들도 아버지께 죽기까지 순종하며 자신을 비우셨듯이 아버지를 완전하게 사랑하십니다.
아들과 아버지가 서로 성령님 안에서 완전하게 사랑하여 한 몸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버지를 완전히 계시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람에게 당신의 성령님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만큼만 하느님을 드러내게 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당신 자신을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들어내 보이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스스로 똑똑하다고 하는 사람은 교만하여 그 안에 성령님이 들어 갈 자리가 없지만 어린이와 같이 깨끗한 사람은 자신을 성령으로 가득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로부터 모든 것, 즉 성령님을 충만히 받으셔서 아버지를 계시하실 수 있었던 것처럼 인간도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를 증거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성령님을 받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바로 그 안에 있는 '죄'입니다.
아무리 뛰어난 성경학자들도 읽고 쓸 줄도 몰랐던 시에나의 카타리나만큼 사랑이나 성경에 대해 깨닫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학자들은 성인들만큼 그 마음이 겸손하고 깨끗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성이 바탕이 되지 않은 학문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제가 살던 기숙사 철문은 센서로 작동을 합니다. 문 양쪽 벽에 센서가 있어서 차량이 통과했는지 안 했는지를 감지합니다. 그러나 가끔 비가 온 다음 날은 잘 작동을 하지 않습니다. 먼지가 센서에 붙어서 상대에서 보내는 빛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차에서 내려 손으로 센서에 묻은 먼지를 닦아냅니다. 그러면 다시 잘 작동합니다.
어린이와 같은 사람은 이와 같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빛을 가로막는 더러움에 물들지 않은 영혼을 의미합니다. 현대에 수많은 신학자들이 있지만 소화 데레사만큼 하느님과 사랑에 정통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그녀만큼 깨끗하고 어린 영혼을 지닌 학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철부지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이와 같이 단순하고 깨끗한 사람이 되어 사랑에 정통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행복하고 싶거든 어린이처럼 깨끗해집시다. 그러면 진리에 정통하고 또 그 진리를 드러내는 또 하나의 계시자, 그리스도가 될 것입니다.
한 마디
-김찬선신부-
오늘의 복음을 묵상할 때,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보나벤뚜라를 묵상할 때
지혜에 관한 한 마디 정의는,
지혜는 지식 더하기 겸손이다.
새벽을 열며
제가 즐겨보는 신문이 있습니다. 꽤 오랫동안 이 신문을 봐 왔기 때문에, 간석4동에 와서도 곧바로 이 신문을 구독했습니다. 특히 신문 배달을 빨리 해주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는 저로써는 딱 맞는 신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일찍 배달되던 신문이 조금씩 배달시간이 늦어지더군요. 사정이 있으려니 생각하고는 기다렸습니다. 5시에서 6시로, 6시에서 7시로, 그러더니 8시나 되어야 배달이 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날에는 물이 고여 있는 곳에 신문을 집어 던져서(고의로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전혀 보지 못한 경우도 몇 차례 되었지요. 아무튼 이러한 배송문제로 인해서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난 월요일, 신문이 오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전화했지요.
“***신문 간석지국이지요? 신문이 배달되지 않았거든요.”
“네. 확인해 보겠습니다.”
10시쯤, 신문을 가지러 성당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신문이 없었습니다. 기다렸다가 12시가 넘어서 다시 밖으로 나갔습니다. 역시 신문이 없었습니다. 다시 전화를 걸었습니다.
“***신문 간석지국이지요? 아직까지도 신문이 배달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언제 오는 것입니까?”
“1시쯤 갖다 드리려고요.”
“제가 조간신문을 보는 것이지, 석간신문을 보는 것입니까? 사실 제가 말을 하지 않아서 그렇지, 얼마나 불만이 많은 지 아십니까? 점점 늦게 배달되고, 가끔 물웅덩이에 신문이 빠져 있어서 볼 수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계속 그러면 저 신문 보지 않겠습니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리고는 뚝 끊어 버립니다. 너무나도 화가 나더군요. 그래서 ‘이 신문,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그 신문 본사로 전화를 걸어서,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모든 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직원이 제가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죄송합니다, 마음이 많이 상하셨지요? 얼마나 기분이 안 좋으셨겠어요? 정말로 죄송합니다.”를 반복해서 말하는 것이었어요. 참 이상한 것이 그 말을 한 마디 한 마디 들을 때마다, 제 안에 있는 화가 하나씩 풀리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신문을 해지하겠다고 결심하고 전화를 걸었지만,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해주세요.’라는 말만하고서 전화를 끊었지요.
사실 말 한마디로 상처를 받고, 또 반대로 말 한마디로 상처가 치유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할 때가 참으로 많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저 간단하게 용서를 청하는 말 한마디를 통해서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자신의 자존심과 이것저것 재는 마음 때문에 더욱 더 어렵게 만들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대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인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단순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다는 것인데요. 우리 역시 이 세상의 관점으로 똑똑한 사람이 되어 이것저것 재려하고 나를 드러내려고만 한다면 하느님의 뜻을 절대로 찾을 수 없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두가 어울려지는 사랑이 가득한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과연 내 행동으로 그 뜻이 이루어 질 수 있을까요?
조금이라도 잘못한 것이 있다면 먼저 용서를 청하세요.
빠다킹신부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양승국신부-
<단순함 안에 깃든 독특한 맛>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 ‘거리의 사회자’가 있습니다. 대단한 ‘말빨’로 인해 여기저기서 섭외가 쇄도한답니다. 그분이 강조하는 연설의 비법은 이렇습니다.
“듣는 사람을 존중하십시오. 그러면 쉬운 말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잘 들리는 말이 됩니다.”
한 글쓰기의 달인은 글 잘 쓰는 비법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글을 잘 쓰려면 미사여구, 유식한 단어를 써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쉬운 단어로도 얼마든지 좋은 책을 쓸 수 있습니다. 독자가 쉽게 이해하도록 글을 쓰려면 세 가지 요소가 중요합니다. 적절한 예제, 딱 맞는 비유, 핵심을 꿰뚫는 인용.”
간결함, 작음, 소박함, 편안함...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표현들입니다. 간결함, 군더더기가 없음, 요즘 아이들 표현에 따르면 ‘쌈빡함’ 그 안에 삶의 독특한 맛이 담겨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선호하셨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삶이 행복해지려면 너무 복잡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단순하게 생각하고, 때로 철없는 사람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그래야 삶이 편안해지고 기쁨이 찾아옵니다.
기쁨은 고통을 치유하는 힘입니다. 기쁨은 슬픔에서 벗어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기쁘게 사는 것은 가장 좋은 복음 선포입니다. 기쁜 얼굴은 하느님의 은총을 드러내는 가장 탁월한 표지입니다.
작고 단순한 삶의 대가(大家)가 있습니다. 소화 데레사 성녀입니다. 그녀의 평생에 걸친 소원은 작고 소박한 사람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내 성화의 도구는 바로 기쁨과 미소입니다. 나는 내가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에도 미소 지으며 감사드립니다. 많은 일들이 나를 억압할 때, 어렵고 불쾌한 일들이 내게 닥칠 때, 나는 조금도 슬픈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어려움에 미소로써 답합니다.”
사도 바오로 역시 아주 단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단순함 안에는 하느님께서 거하셨습니다. 당시의 이교도 설교가들은 해박한 지식, 철학적 고찰에 근거한 현란한 설교를 시도했지만, 바오로 사도의 설교는 늘 직설적이었고 단순했습니다.
사람이 위대한 것은 그가 비록 병들고, 늙고, 가난하더라도 그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배경에는 다른 무엇에 앞서 단순함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주님이 사람 뽑는 법
-남상근 신부-
예수님과 우리의 인선 조건은 많이 다릅니다.
우리는 똑똑한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부족해도 겸손한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세상일에 유능한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복음에 유능한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을 빛내주는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과감하게 결단하는 사람을 선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이 더디더라도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는 이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노라고 감탄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하십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느님의 돌보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감사하십니다.
무릇 비어 있어야 생명이 자라고, 빈틈없이 빽빽하면 숨쉴 수 없는데,
가득 차서 너무 똑똑하기만 한 나는 세상이 선호하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주님께서 원하시는 철부지일까요?
아버지를 통하여
-노성호 신부-
예수께서는 하느님아버지를 찾고 간절히 원했던 많은 사람에게 ‘나를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이고, 내가 하는 일이 곧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나를 알면 아버지를 알게 되는 것이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아버지와 당신의 관계를 정확하게 말씀해 주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도 그분을 느끼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여 자신들 앞에 계신 하느님을 두고도 저 멀리서 하느님을 찾으려고 했고, 하느님을 바라보면서도 하느님을 뵙게 해 달라고 청했다. 그때 예수님의 심정이 얼마나 답답하셨을지 짐작이 간다. 마음을 열면 우리 앞에 계신 하느님을 마주 뵐 수 있을 텐데,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사리 열리는 것은 아닌가 보다.
어느 날 우연히 아버지의 중학교 졸업 앨범을 봤다. 이곳저곳 펼치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찾고 있는데,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찾았던 아버지 얼굴은 없고 그 안에 내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닌가? 나와 똑같은 아버지의 중학교 때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하긴 아버지가 나를 닮으신 것이 아니라 내가 아버지를 닮은 것이라고 해야 맞는 말이겠지만`…. 그래서 옛 어른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틀린 게 없나 보다. ‘아들을 보면 그 아버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계속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하고, 그 아들이 또다시 태어날 아들에게 무엇인가를 전하고 이렇게 아버지는 세상에 당신 모습을 드러내신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예수께 전하신 모든 것이 이제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분의 자녀들인 우리도 그분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을우-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쌓은 경험과 사회 통념으로 형성된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들에게는 아직 그런 사고가 형성되어 있지 않아 사물 그대로, 본 그대로 마치 해면처럼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시야가 언제나 신선하지요.
주님께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마태 11,25)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배웠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은 자신의 주장이 제일이라고 생각할 뿐 아니라 부와 권세를 모두 가졌기 때문에 어렵고 힘든 사람, 자신의 주장을 선뜻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린이들은 순수하여 가장 바른 것을 압니다. 그리고 표현은 서투르지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줄 압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섭리를 이 세상에 펼치실 때 겉으로는 보잘것없고 가난하고 무력해 보이지만 마음이 어린이처럼 순수한 사람들을 택하신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가진 자의 오만이 없고 담담히 더 나은 세상을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무궁무진한 주님의 세계를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 나댄 일은 없었는지, 이 세상에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러 오신 주님을 내 세속적인 사고와 아집 안에 품고 주님을 모신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 이드로의 딸 시뽀라를 아내로 맞이하여 자녀를 낳고 그곳에서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는 목자가 되어 살았다.
-경규봉 신부-
어느 날 모세가 양떼를 이끌고 하느님의 산 호렙으로 갔더니, 주님의 천사가 가시덤불에서 불꽃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그가 그곳에 가까이 가자 하느님께서는 그를 부르신 후, 그에게 가까이 오지 말고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라고 말씀하신다. 모세와 함께 계시며, 힘이 되어주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어 당신을 예배하라고 말씀하신다.
이집트의 왕자였던 모세는 이제 미디안에서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돌보며 사는 식객이며, 일꾼으로 살았다. 당대 최고의 학문을 연마하고, 화려한 궁궐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하며, 이집트의 왕이 될 수도 있었던 그가 도망자가 되었고, 이드로의 식객이 되어 광야에서 양을 치는 천한 삶을 산 것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는 끝없는 추락이다. 더구나 그 기간이 약 40년이다(사도 7,30). 40년 동안 그가 겪은 고뇌가 얼마나 컸을까! 젊음의 치기로 인하여 저지른 단 한 번의 살인이 그의 인생 전체를 바꾸어 놓았으니, 후회와 통한의 감정이 얼마나 넘쳤겠는가! 자신의 인생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삶도 망쳤다고 생각할 때 후회막급이었을 것이다. 자신이 조금만 참고 때를 기다려 왕이 되었더라면, 그래서 이스라엘을 강제노역에서 해방시켰더라면 그들을 더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해주었을 터인데, 자신으로 인하여 그들이 더 큰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서 편안하게 잘 수도 없었을 것이다. 잠을 자다가도 몇 번씩 깨어나서 자신의 가슴을 치며 후회했을 것이다. 자신 안에서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그러한 감정들을 삭히며 살아가는데 4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기간 동안 궁궐에서의 호사스러움도 모두 잊었으며, 양을 치는 천한 목자로서 꿈도 야망도 모두 잊어버리고 그럭저럭 살았다. 비록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아내 시뽀라와 함께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고 오순도순 살았다. 40년이란 기간은 그의 젊음이 모두 소진되기에 충분한 기간이며, 인생을 깨닫고 통달할 수 있는 충분한 기간이다. 이제 그의 나이 여든이므로 그는 늙고 힘도 떨어졌다.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는 인간의 꾀와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깨달을 수 있는 나이였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꾀하는 모든 일들이 수포로 돌아간다는 점을 철저히 깨달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나 그 속에 하느님의 심오한 뜻이 숨겨져 있었다. 하느님께서는 40년이란 기간을 통해 모세로 하여금 하느님을 제외시킨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깨닫도록 하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모세로 하여금 당신 백성을 인도할 지도자로 만드시기 위하여 40년 동안 양들을 인도하는 목자로서 훈련을 시키신 것이다. 마치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세우시기 전에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종의 신분으로 집안일을 돌보게 하셨던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그처럼 준비시키셨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인간의 방법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의 방법을 따를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때가 되자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부르셨던 것이다.
모세는 40년 동안 자신을 삭히며 살았지만, 그 안에는 동족에 대한 사랑의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고, 동족을 해방시키기를 원하는 마음이 가슴 한 구석에는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시덤불에 붙은 불꽃을 보았고, 그곳 가까이 갔으며, 하느님의 부르심을 들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함께 계신 하느님, 자신의 힘이 되어주시는 하느님,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그처럼 모세를 철저히 준비시키시어 인간적인 방법과 잔꾀로서 살지 않도록 하시고, 오직 주님의 말씀에 따르며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르도록 준비시키시는 하느님이시다. 비록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너무나 긴 기간 동안 허송생활을 한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그 기간을 통해 당신 계획에 합당한 사람으로서 준비시키시고, 때가 이르면 당신의 계획을 따르도록 부르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인생을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거나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안달하지 말자. 모세가 40년의 기간을 허송생활 한 것처럼 느꼈겠지만,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그 기간이 필요하셨기에 그 기간을 주셨던 것임을 믿자. 자신이 원하는 때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를 기다리는 신앙인이 되자.
- 배상희신부-
말 안 듣는 아이들 야단치면서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저 녀석이 벌써 머리 좀 굵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네"
일단 나름대로의 사고방식이 굳어지고 나면
누가 뭐라고 해도 좀처럼 고치기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겠습니까.
아무 것도 묻어있지 않은 흰색 종이에 무슨 색을 칠하든 원래의 색깔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미 다른 바탕색이 칠해져 있는 종이는 제 색깔을 낼 수 없습니다.
내가 좀 안다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기 어렵습니다.
뭔가 새로운 진리가 밝혀져도 자기 고집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걸 놓기 아깝기 때문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데서 다시 찾아 나간다는 게 싫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집니다.
내 머리 속에 하느님은 이런 분이다.
딱 정해 놓고 내 마음대로 하느님을 조종하려고 합니다.
그런 하느님은 나 혼자 만의 하느님에 불과합니다.
진짜 하느님을 알아보려면 아무 것도 묻어 있지 않은 흰색종이 같은
어린이의 순수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자기 고집에 매여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목이 터져라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이들은 있는 그대로 예수님을 받아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을 그려나갑니다.
내 머리 속에서 내가 만들어 낸 하느님을 전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느님으로 내 마음을 채웁시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알고 있는 지식들, 내 일상에서 잠시 떠나 생각해 봅시다.
혹시 내 안에 나만의 하느님이 들어있지는 않은지 뒤돌아 봅시다.
내 지식이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된다면 그것은 나를 멸망으로 인도합니다. 참된 지식은 나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길입니다.오늘 하루 내 생각을 버리고 어린이처럼 주님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감추시고
-강호성 신부-
주일학교의 아이들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뭐가 그리도 궁금한 것이 많은지, 무슨 할 이야기가 그리도 많은지, 물어보고, 재잘대고, 쫄랑대고.....철부지 아이들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가 봅니다. 아니 그렇게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그놈들도 점점 학교교육에 익숙해지고 사회에 익숙해지면서 어른들처럼 복잡하게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비추어보면서 아이들이 그렇게 사회에 익숙해지고 똑똑해지는 것이 과연 행복한 일일까하고 부질없는 생각도 함께 해봅니다. 단순하게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아는 맘이 점점 사라지는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더불어 이 강론을 하고 있는 저에게도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나라의 신비가 똑똑하고 잘 아는 사람들에게 드러난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모르는 철부지 어린아이에게 드러나고 있다는 예수님의 기도말씀을 들었습니다. 이 기도는 아마, 하늘 나라의 신비와 복음을 많은 이들에게 보여 주시고 선포하신 후, 당신 스스로 느끼신 체험에서 나온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가끔씩 스승 그리스도의 얼굴을 상상해 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 쉼 없이 움직이며 외쳐대던 그 모습을 말입니다. 꾀죄죄하고 핏발이 선 눈과 힘줄이 붉어져 나왔을 목! 그렇게 열성을 다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보여주고 알렸건만 그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말씀을 연구하고 지키려던 그 똑똑한 사람들, 즉 바리사이들, 율사들이 가진 그 똑똑함과 그 오만함이 오히려 발목을 잡고, 눈과 귀를 막아버려서 아무 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아니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는 굳은 마음을 보시고 마음 아프게 하신 기도가 아닐까 합니다. 안다는 자들과 똑똑하다는 자들은 하느님 나라와 그 정의가 예수님을 통하여 현존하여 있음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충분히 가지고 누리고 있기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받아들이기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동안 살아왔던 그 모든 것들을 뒤집어엎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는 것이 아니니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그 영특함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많이 배운 것이 죄는 아닙니다. 많이 가진 것도 죄가 아닙니다. 오히려 세상을 살아가는 데 아주 필요한 요소입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가지고, 너무 많이 얻고 너무 많이 받으면 넉넉하고 차고 넘쳐흘러 영혼이 말라비틀어지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하느님 보다 앞에 서게 되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리게 됩니다. 하느님 보다 다른 것을 더 우선 할 때,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과 지식, 능력, 명예 등등 그 기득권들이 우선 할 때 하느님은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법입니다.
그에 비해 철부지 어린이는 받들 일 수 있는 맘이 있습니다. 어린이는 스스로는 자각하지 못해도 자신이 작고 미약하기에 부모에게, 웃어른에게 의지하려고 하며, 겸손 되이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복잡다단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고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어린이와 같은 그 겸손하고 단순한 맘을 지닌 사람들에게 하늘나라의 신비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결국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경험을 하고,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반대로 많이 배우지 못하고, 많이 가지지 못한 것들도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이 되든지 그 모든 것들을 가지고 하느님께 어떻게 다가서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가 가지고 살아온 그것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가린다면 과감하게 떨쳐내야 할 것입니다. 내가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고, 똑똑함이라 할지라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여 얻은 그것들을 가지고 과연 나는 내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쓰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 구원과 하늘의 신비를 알아듣고 행하여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겸손 되이 사용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분명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볼 때 어떠한 사람을 좋아하시면서, 누구를 위해서 성부께 감사기도를 올리셨는지 우리는 생활 속에 깊이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양승국신부-
<헤헤거리며 다시 아버지께로>
많은 아이들을 접해오면서 제 기억 속에 오래 남게 되는 아이들은 아무래도 ‘철부지’들이더군요. 철부지들의 특징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 틈만 나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사고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엄청 사람 힘들게 만듭니다. 때로 간을 콩알만 하게 만듭니다.
남의 집 초대형 수족관을 깨트려 집 전체를 물바다로 만드는가 하면, 고가의 식기 건조기를 넘어트려 못쓰게 만듭니다. 아직 사리분별이 명확치 않다보니 형들한테 늘 구박받습니다. 가만있으면 좋을 텐데 또 대들다가 신나게 얻어터져 달려옵니다. 결국 철부지와 살아가기란 엄청 피곤합니다. 늘 손길이 많이 갑니다. 신경도 많이 쓰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철부지들은 행복을 줍니다. 기쁨을 선사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솔직합니다. 큰 욕심도 없습니다. 이중적이지 않습니다.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속마음을 감추지 않고 있는 그대로 표현합니다. 정도 많습니다. 애정표현도 쉽게 합니다. 늘 졸졸 따라다닙니다. 틈만 나면 찾아옵니다. 집요하게 졸라댑니다. 찰거머리처럼 꼭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 모릅니다. 사람 엄청 괴롭힙니다. 그래서 엄청 혼도 납니다. 그러나 그뿐입니다. 단 몇 분도 지나지 않아 즉시 헤헤거리며 다시 다가옵니다. 결국 철부지로 인해 자식 키우는 재미가 생겨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특별한 가르침 하나를 선물로 주십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철부지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묵상해봅니다.
‘전혀 개념 없는’ ‘정신없이 사는’ ‘막 되먹은’ ‘예의도 뭣도 없는’ ‘분위기 파악이 전혀 안 되는’ 그런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성 안에서 이해를 시도해야 할 것입니다.
철부지들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무엇입니까?
늘 엄마를 졸졸 따라다닙니다. 틈만 나면 엄마를 찾아갑니다.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때 까지 집요하게 졸라댑니다. 엄마를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올려둡니다. 엄마만이 자신의 인생 전권을 지닌 절대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엄마에게 모든 것을 겁니다.
바로 이런 성향을 지닌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는 당신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고상한척, 유식한 척,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척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아버지 없이도 아무런 아쉬움 없이 잘 살아 갈수 있다고 여기는 ‘꽉 찬’ 사람, 잔뜩 자만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절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느님 앞에 늘 겸손하게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 나는 이렇게 나약하고 부족하니 아버지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는 사람, 아버지의 능력을 알기에 수시로 그분께로 나아가는 사람, 그분께 집요하게 매달리는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명확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지난날 우리가 지은 죄가 진홍빛같이 붉다 할지라도, 오늘 비록 우리가 큰 죄 속에 살아간다할지라도 절대로 상심하지 마십시오. 우울한 표정 짓지 마십시오.
철부지처럼 언제 그랬냐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헤헤거리며 주님께로 다시 나아가십시오. 활짝 웃으며 그분의 품으로 안기십시오. 주님께서는 그런 ‘철부지’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
현실의 공간 복음의 공간
-조성숙 수녀-
예수님께서는 이 짧은 단락 안에서 “아버지”라고 몇 번이나 부르며 환희의
찬가를 노래하십니다. 그 흥분된 기쁨이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그대로
전달됩니다. 지혜롭다는 자들보다 오히려 철부지들이 하느님을 안다는 것이
예수님께도 그토록 놀라운 일이었을까요? 언젠가부터 깨닫게 된 사실 중에
하나는 제 안에 두 세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실의 공간과 복음의
공간입니다. 복음의 공간 속에서는 예수님 말씀대로 작은 자, 섬기는 자가 되고
싶어 하지만, 현실로 돌아오면 즉시 다른 세상 버전으로 옮겨가 버립니다.
똑똑한 사람, 능력 있는 자가 되어 사람들 위에 서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깨주시는 스승 같은 분을 만났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그분은 사람들이 인정해주는 소위 내놓을 만한 ‘메이커’는
거의 갖지 못한 분이십니다. 작은 신앙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 철부지 같은 말투와 어린아이와 같은 그분의 눈빛에
저는 당황했습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에서 며칠을 머물면서
제 안에 “복음 말씀이 진짜구나!” 하는 놀라움이 커져갔습니다.
책을 통해 배워 안다는 사람에게서는 결코 배울 수 없었던 말씀들이
그제야 “아하!” 하면서 들려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사람들 안에서 여전히 힘 있고,
우리의 모순을 꿰뚫으며, 진리를 외치고 있었습니다.
†♡†♡†♡†♡†♡†♡†♡†♡†♡†♡†♡†♡†♡†♡†♡†♡†♡†♡†♡†♡†♡†♡†
기정희 수녀
- 기정희 수녀-
내가 사는 곳은 지적 장애인 50명이 생활하는 시설이다. 지능이 낮아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많지만 참 맑고 순수한 그들 안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곤 한다. 얼마 전 주일이었다. 신부님께서 미사 강론을 시작하며 “요즘 일어난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 무엇이지요?”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모두들 자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건을 다투어 말했다. 가족 중 한 사람이 손을 들더니 남대문 방화 사건이 근래 들어 가장 큰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부님이, 개인의 잘못이 국가적으로 너무나 큰 손실을 가져왔다는 뜻에서 그런 행동은 나쁜 일이라고 하셨다.
보편 지향 기도를 드릴 때였다. 평소와 같이 몇몇 가족은 자신에게 필요한 기도를 했고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앞서 남대문 방화 사건이 가장 큰 사건이라고 했던 친구가 너무나 간절하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하느님, 남대문에 불을 지른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잘못은 많이 했지만 용서해 주세요. 그런 일이 다시는 안 일어나게 해주세요. 불쌍한 할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갑자기 모두 숙연해졌다. 문제는 있으나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세상에서, 잘못한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니 남대문 방화자는 당연히 응징을 받아야 한다는 이분법적 사고에 경종을 울리는 그의 기도는 하느님의 목소리였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 마음이 얼마나 경직되어 있는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잊은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인지 되물어 보았다. 내면에서 울리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나의 사랑으로 사랑하느냐?’ 하고 물었다.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하느님의 신비가, 단순하고 이웃을 먼저 헤아리는 이 작은 이에게 드러나는 것을 본 그날 우리 장애인 가족이 더욱 빛나 보였다.
†♡†♡†♡†♡†♡†♡†♡†♡†♡†♡†♡†♡†♡†♡†♡†♡†♡†♡†♡†♡†♡†♡†
차라리 길을 물어라
-김찬선신부-
저는 관용적인 우리말을 씹어보는 것이 즐거움 중의 하나입니다.
무심코 쉽게 쓰는 우리말 안에 깊은 지혜가 담겨져 있고,
대단한 영성과 철학이 담겨져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지요.
“아는 게 병이야!”
“모르는 게 약이다.”
어찌하여 아는 게 병이고 모르는 게 약인가?
길을 가다보면 길을 섣불리 아는 게 병일 때가 많습니다.
아예 길을 모르면 아는 사람에게 물을 터인데
섣불리 아는 자기 지식에 의존해 가려다 헤맵니다.
옆에서 모르면 물어서 가라 해도 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고 하시고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도 하십니다.
또 다른 데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14,6)고 하십니다.
이 말을 통 털어 볼 때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보여줄 사람이 없고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고
알 수 없기에
우리는 반드시 길을 통해야 하고
길을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안다고 하는 사람이 묻겠습니까?
길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만 아쉽게도
알지 못하면서 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데 바로 그 짝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철부지처럼 겸손하고 단순하게
길을 물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합니까?
먼저 길이신 그분께서 손수 길을 계시해주시도록 물어야 합니다.
또 누구에게 길을 물어야 합니까?
길이신 그분께서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준 사람,
그래서 먼저 그 길을 간 사람에게 물어야 합니다.
성녀 글라라가 이에 대해 아주 적절한 가르침을 줍니다.
그는 유언에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들에게 ‘길’이 되셨는데,
그분의 연인이요 모방자인 우리 사부 성 프란치스코께서
말과 모범으로
이 ‘길’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며 가르쳐 주셨습니다.”고 회고합니다.
우리는 헛똑똑이가 되기보다
차라리 길을 묻는 철부지가 되는 편이 낫겠습니다.
†♡†♡†♡†♡†♡†♡†♡†♡†♡†♡†♡†♡†♡†♡†♡†♡†♡†♡†♡†♡†♡†♡†
하늘나라의 신비와 복음
-조욱현 신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하신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나라의 신비와 복음을 많은 이들에게 친히 보여주시고 선포하신 후, 당신 스스로 경험하여 느끼신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진정 예수님은 우리 구원의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셔서 들려주시고 하늘나라의 신비를 기적을 통해서 증거해 주셨지만, 그것을 보고, 들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마음 아프게 체험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그 안다는 사람들,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과연 어떠한 사람들인가? 여기서 예수님은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영특함" 그 자체를 죄로 보신 것이 아니라, 안다는 사람의, 똑똑하다는 사람의 그 알고 똑똑함을 예수님의 복음 앞에 내세우는 교만을 단죄하시는 말씀이다.
예수님 당시뿐 아니라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 앞에 사람이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앞세울 때 예수님의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고 하느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 말씀 앞에서는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한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서 복음의 말씀을 따지거나,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신앙의 문제를 지성으로 이해되지 않 는다고 할 때, 어떻게 그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리를 잡을 수 있겠는가?
어린 아이는 자신의 약함과 부족함을 알면서 부모에게, 웃어른에게 의지하려고 하며 혼자서 무엇을 결단하기보다 겸손 되이 부모와 웃어른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인 생활태도이다. 어린이의 눈을 보면 우리는 그 눈이 얼마나 맑은지를 알 수 있다. 이제 그 아이는 자기 눈에 비치는 대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세파에 시달리다 보면, 눈빛도 흐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말을 배우는 것도 그렇다. 그 아이는 많이 들은 말을 먼저 하기 시작한다. 그러기에 좋은 말을 가르치면 좋은 말을, 욕을 가르쳐 주면 욕을 하게되는 것이 아이이다. 무엇 하나 계산되지 않은 행동이 아이들에게서 나온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겸손하고 주님께 의지하려 하는 사람에게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 구원과 하늘나라의 신비를 보여주신 것을 감사드린다고 기도하시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내가 노력해서 배운 지혜이며 똑똑함이라고 할지라도 과연 나는 내 자신을 내세우기 위해서 사용하고 있지나 않은가? 혹은 구원과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아듣고 행하기 위하여 겸손 되이 사용하고 있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한다.
†♡†♡†♡†♡†♡†♡†♡†♡†♡†♡†♡†♡†♡†♡†♡†♡†♡†♡†♡†♡†♡†♡†
마푸체, 땅의 사람들
-김종근 신부-
중남미 대륙에는 많은 원주민 부족이 있다. 그들은 500여년 전 스페인·포르투갈을 선두로 한 유럽의 세력들이 밀려들기 전부터 고유의 훌륭한 역사와 아름다운 문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잉카 문명·마야 문명은 그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일부이다.
칠레 남부에는 마푸체라는 원주민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현대 문명과는 일정 거리를 두고, 여러 가지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들 고유의 언어와 문화 전통을 지키려 노력하고 있다. ‘땅의 사람들’이란 뜻의 부족 이름 그대로 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안데스 산맥의 풍부한 산림과 태평양의 다양한 수산자원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감자와 밀을 재배한다. 소나 말의 힘을 빌려 감자와 밀을 심고 나면 추수 때까지 할 일이 그리 많지 않다. 오직 농사에 적당한 날씨이기만을 바랄 뿐이다. 내가 땀을 흘려 열심히 일을 하여 씨를 뿌렸으니 이제 거두는 것은 하늘에 맡길 뿐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비를 내리고 햇볕을 주시며 바람을 움직이며 농사를 짓게 하는 어떤 큰 힘,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삶 속에서 ‘절대자’, ‘신’의 존재를 체험하면서 겸손하게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그들에게 다가가 그 큰 힘을 우리는 ‘하느님’이라고 한다고 설명하면, 금방 “아, 그렇군요. 아멘” 한다. 물이 스폰지를 빨아들이듯 그들은 하느님을 받아들인다. 아니, 이미 알고 있는 그 존재에 ‘하느님’이란 이름을 달아드린다. 교리공부를 못해도 성서 말씀 한마디 들어보지 못했어도 온몸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인다.
한국처럼 잘 짜인 성서공부 과정들, 야곱의 우물을 포함한 교회의 각종 인쇄물, 성지순례, 다양한 신심활동으로 바쁘고 지친 몸에는 하느님께서 쉴 자리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하느님이 아닌 내가 주체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스스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기에 굳이 하느님이 없어도 잘 굴러가기 때문이다.
‘세상을 누가 움직이는가? 나인가?, 하느님인가?’ 하느님은 나의 주님, 내 구원자, 내 생활의 모범답안이심을 숱하게 말하고 기도한다. 그러나 실제 생활은 말과는 다르게 똑똑한 내가 상황에 맞춰 적절하게 운용해 나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세상을 누가 움직이는가? 하느님인가, 나인가?’ 마푸체 사람들은 하느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가진 것이 없고, 한국에서는 하느님이 세상을 움직이시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내가 가진 것, 능력이 너무나 많다. 그런데 누가 더 행복한가
†♡†♡†♡†♡†♡†♡†♡†♡†♡†♡†♡†♡†♡†♡†♡†♡†♡†♡†♡†♡†♡†♡†
누가 아버지를 아는가?
-최승일 신부-
오늘 복음 말씀은 “누가 아버지를 아는가?”라는 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우리가 어떻게 해야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시고, 동시에 아버지 하느님을 아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 줍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하심으로써, 누가? 즉 어떤 사람이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 있는지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안다는 사람들”은 “예지의 소유자”라는 뜻이고, “똑똑하다는 사람들”은 “지혜와 재주가 뛰어난 사람, 어려움을 교묘하게 뚫고 나가는 사람”을 뜻하는 데, 여기서는 아버지의 계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만함에 눈이 멀어 아무것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소박한 사람들은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문턱에 가까이 와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알고 그 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데 있어서 “안다는 지식”과 “똑똑하다는 영특함” 그 자체를 죄로 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안다는 것과 똑똑하다는 것을 예수님의 복음 앞에 내세우는 교만함을 단죄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러한 경우는 예수님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매 한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 앞에 사람이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앞세울 때, 예수님의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복음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만일에 무식함과 우둔함으로 복음을 대한다면 잘못된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전에 어느 본당에서 가정방문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쉬고 있는 교우의 집을 방문하여 “이제 그만 쉬시고 다시 신앙생활 열심히 해 봅시다.”라고 권고하였더니 그 분의 말씀이 “신부님, 강요하지 마십시오. 나도 알만큼은 다 아는 사람입니다. 이것 보십시오. 이렇게 책도 여러 종류로 다 읽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천주교. 개신교, 불교, 회교에 관한 책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참 책을 많이 읽으시네요. 그래도 성당에는 나오셔야죠?”라고 다시 권했더니만, “신부님, 내가 이렇게 많이 공부를 하고 있어도 아직 성당에 나가야 할 필요성을 도무지 못 느낍니다. 좀 더 공부해 보고 필요성을 느끼면, 그 때 가서 나갈 테니 강요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우리 친적 가운데 신부도 있고 수녀도 있으니 아무 걱정 마십시오.”라고 말씀을 하시더군요. 저는 하도 기가 막혀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나왔습니다. “알았습니다. 그런데 형제님, 그러면 뭐하러 성당에 나와서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냥 성경책 한 권을 사다가 읽고, 하느님께 직접 ‘당신을 아버지로 모실테니 나를 당신 아들로 받아주십시오’하면 되지, 부러 성당에 나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었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자기 구원은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이지 친척 신부 수녀가 대신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랍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하고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년이 지나고 나서 그분이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어떻게 돌아가셨겠습니까? 자신이 고집하던 식으로 돌아가셨겠습니까? 그때는 유별나게 성당에 병자성사를 청하고서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그냥 그렇게 가시고 말았습니다. 이런 경우가 사목자로서 씁쓸한 맛을 보게 되는 경우입니다. 결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가고 마는 것을, 뭐가 그리 잘났고 똑똑하다고 하느님께 도전하다가 이렇게 생을 마쳐야 하는 것인지 생각에 생각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친애하는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예수님의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지만, 복음 앞에서는 배운 자나 못 배운 자나 누구를 막론하고 온전히 의지하는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도록 합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알 수가 있으며 동시에 우리는 그 아버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당신의 아들인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잘 관리하라고 맡겨 주신 선물이라 생각하면서,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마음, 즉 관리인의 자세로 겸손되이 자신의 시간이나 재능 그리고 재화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용할 수 있도록 합시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기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
참된 지혜와 슬기는 하늘로부터 옵니다.
-김대성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 자기 고백적인 감사의 기도를 드리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 즉 어제 복음에 해당되는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것이 단순한 감사의 기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도무지 회개하지 않는 코라진과 베싸이다 사람들을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이 기도에는 예수님 마음 속 깊은 곳의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감사기도의 형식으로 묘사되었지만 사실은, 아무리 가르치고 설명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드리지 않는 완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깊은 탄식인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누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어떤 눈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까? 어떤 눈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예수님을 끝까지 거부하고 배척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내가 낸데...내가 좀 잘하거든....내가 좀 알거든...내가 다른 사람들 보다는 낫거든....이렇게 자신의 생각과 판단과 고집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가르침을 올바로 받아들이고 배울 수 없습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그러나 사실은 가장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지혜롭다는 자가 아니라 실제로 슬기로운 사람,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 예수님의 목소리를 구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약합니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하며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는 사람입니다.
참된 지혜와 슬기는 하늘로부터 옵니다. 매일매일 내가 가진 지혜와 내가 가진 슬기를 버리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할 때 우리 안에서 하느님의 선하신 뜻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풍요로운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
새벽을 열며
어제도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요. 사실 저는 비가 오는 관계로 계속해서 운동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비만 오지 않으면 무조건 밖으로 나갈 생각을 했지요. 도중에 비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더군다나 어제는 성지에서 유일하게 쉬는 날인 화요일이거든요. 하지만 어제 역시 창밖으로 새벽부터 쉬지 않고 계속해서 비가 내리더군요. 이제는 비가 지긋지긋합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군요.
사실 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듣는 노래에서도 ‘비’에 대한 노래가 많은 것을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비를 좋아하는지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요즘처럼 계속해서 그리고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있는 이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겨울에 내리는 눈도 그렇지요. 눈이 오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하지만 이 눈이 폭설로 이어지면 어떨까요? 더군다나 저처럼 넓은 지역에 내린 눈을 직접 쓸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이라면, 과연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면서 강아지처럼 좋아할까요? 이렇게 자연의 적당함뿐만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도 적당함은 나를 더욱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든 많이 소유하는 것을 행복의 지름길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자들만이 행복한 사람일까요? 전 세계의 행복지수를 보았을 때, 부자나라의 국민들이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가장 못사는 나라의 국민들이 더 큰 행복지수를 보인다고 하지요. 또한 로또 복권에 맞은 사람들 중에서 행복한 삶을 꾸리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기사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네요.
이처럼 행복은 과한 것에 있지 않습니다. 적당할 때, 오히려 부족함을 느꼈을 때, 행복이 부족함을 채우러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닐까 싶네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감사드립니다.”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바치셨던 것이 아닐까요?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이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이 되길 원하겠지요. 그리고 이 모습이 완벽한 모습처럼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철부지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신다고 하니, 그렇다면 우리 모두 철부지 같이 못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하라는 말씀일까요?
그런 말씀이 아니지요. 인간 세상에서 완벽해 보이는 그 모습으로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 자신이 완벽하지 못하는 철부지 같다면 스스로를 낮추고 주님 뜻에 온전히 자신을 의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으며, 행복도 그 곁에서 우리와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을 지향하고 있었나요? 이 세상에서 완벽하다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을 지향하면서 교만 속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런 모습을 지향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앞에서는 가장 못난 철부지 어린이와 같은 모습으로, 가장 낮은 자세를 지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 모습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가장 완벽한 사람의 모습이며, 가장 행복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의 완벽함보다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완벽함을 추구합시다.
빠다킹 신부
-황영삼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의 말씀에 이어 마음이 닫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세고을을 떠나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아이와 같은 이들에게서 당신을 드러내시는 하느님 아버지께 감사드리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마태복음5장 산상설교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그러고 보니 마음이 가난하고, 철부지 어린이 같은 마음이 하느님을 만나는 열쇠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가난한 마음, 어린이 같은 마음은 무엇일까요?
법구경에 이런 비유가 있습니다. “녹은 쇠에서 생긴 것인데,
그 녹이 점점 쇠를 먹는다.” 상처입은 쇠에는 산화되어 금방 녹이 생깁니다.
그 녹은 점점 자라 어느새 돌아보면 쇠 전체가 녹이 슬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 입니다.
욕심과 거짓, 위선, 오만과 편견, 시기와 질투로 우리의 깨끗한 영혼과 마음은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처는 점점 커져 내 마음에는 빈자리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빈자리가 없다면 내 마음이 온통 나로 차있다면,
하느님은 더 이상 내 마음속에 머무실 수 없으십니다.
오늘 하루. 무언가로 가득차 있는 나를 발견한다면 조금의 빈자리를 만드십시오.
그것으로 내가 걱정과 근심에 사로잡혀있다면 조금 놓아두십시오.
잠시 그것들과 떨어져. 가난한 마음, 마음에 빈자리를 만들어보십시오.
그 빈자리를 통해 여러분과 함께 아파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실 것입니다.
그 빈자리를 통해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찾게 되실 것입니다.
그 빈자리를 통해 또 다른 세상이 보일 것입니다.
-백남국 신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본당에서 신자분들을 만나다 보면 참으로 열심히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바쁜 가운데서도 레지오를 하고, 재속회를 하고, 매일 기도를 드리러 성당에 나오십니다. 또한 각박한 경쟁 사회 속에서 살면서도 너그럽고 희생적이며, 동정심도 많은 우리 신자들입니다. 하느님을 아는 만큼 신앙인답게 사는 것이겠죠.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부라고 그들 앞에 하느님을 더 많이 아는 척 나서지만 사실 정말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제가 아니라 신자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딴에는 지혜롭고 슬기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는 당신 자신을 감추시고 가르쳐 주는 대로 당신을 믿고 따라오는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십니다. 이 말씀대로라면 주님 앞에서 조금 아는 지식으로 까불대지 말아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 됩니다. 신부 노릇 하려면 모르는 것도 아는 척, 게을러도 열심한 척, 믿음이 약해도 강한 척해야 합니다.
물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고, 부족한 것은 하느님께 맡기면서 사는 겸손한 사제가 존경받고 사목도 잘하겠지요. 그러나 저같이 어설픈 겸손쟁이는 금방 들통이 나고 말기에 그냥 아는 척, 열심한 척하면서 살아갑니다. 뭐, 그렇다고 착하고 성실한 우리 형제·자매님들께 사기를 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우리 착한 신자들, 저 때문에 실망시켜 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러는 것뿐이지요. 그러니 주님 눈 딱 감고 저같이 조금 안다고 껍죽거리는 사람한테도 당신을 드러내 주시면 안 될까요? 신자들 앞에 체면 좀 서게요.
-이석희 신부-
우리모두는 이상한 행동으로 바보짓을 하는 멍청이 영구를 기억합니다. 바보스럽고 멍청하기 그지 없는 그였지만, 아이들에게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른들 까지도 그의 행동을 흉내 내었고 잠시나마 잔잔한 웃음으로 또다른 영구가 되었습니다.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을 요구하는 사회적 요구에 지쳐버린 우리들에게 신선한 피난처가 되었으며, 새로운 자신감과 상대적 열등감에서 벗어나는 심리적 효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덧 영구는 나의 경쟁상대가 아닌 웃음을 전해주는 친구가 되어 있었고 잘 생기고 멋있는 어느 탈랜트 보다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 남게 되어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똑똑함으로 모든 것을 해결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작은 교훈을 영구에게서 발견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지나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을 언급하면서 외부적인 율법에 정통한 율법학자들과 보통사람들 보다는 다르다는 우월감으로 젖어있는 권세가들을 향해서 질타와 새로운 교훈을 제시합니다. 또한 하늘나라의 신비가 연약한 어린아이를 통해서 드러내시고자 하는 하느님의 심오한 지혜에 대한 찬미와 감사의 기도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의 기도는 똑똑하고 지혜로움으로 포장된 약삭빠름에 익숙하거나, 그것을 능력으로 착각하는 사람에게는 이해될 수 없지만, 단순함과 순수함이 어리석음으로 비쳐지는 이들에게는 위안과 기쁨으로 전해집니다.
예수께서 활동하시던 그시대 뿐만 아니라 지금도 예수의 복음 말씀 앞에 자신의 지혜를 내세우고 자신의 똑똑함을 내세울 때 복음은 그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다고 복음말씀이 무식함과 우둔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것은 아니며, 또 복음이 지혜와 영특함을 배척하는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복음 앞에서는 어린이와 같이 순수함과 신뢰하는 마음과 겸손한 자세가 우선적으로 그 바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신앙인의 자세는 신뢰와 받아들임입니다 신뢰와 겸손의 대명사는 바로 철부지 어린이들이며, 보잘 것 없는 약자들입니다. 약자를 통하여 하느님은 당신의 강함을 드러내시고, 알려주시고자 합니다.
육신의 아픔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이웃에게 불평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처지를 받아들이며, 하느님의 심오한 신비를 전해주는 작자 미상의 “어느 환자의 기도”를 소개 하고자 합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 출세의 길을 위해 건강과
힘을 원했으나, 당신은 제게 순명을 배우라고
나약함을 주셨습니다.
주님!
위대한 일을 하고 싶어 건강을 청했으나
당신은 보다 큰 선을 하게 하시려고 병고를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행복하게 살고 싶어 부귀함을 청했으나
당신은 내가 지혜로운 자가 되도록 가난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만인이 우러러 존경하는 자가 되고 싶어
명예를 청했으나, 당신은 나를 비참하게
만드시어 당신만을 필요로 하게 해주셨습니다.
주님!
홀로 있기가 외로워 우정을 청했으나,
당신은 세상의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넓은 마음을 주셨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에게서 내 삶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께 청했으나,
당신은 다른모든 이들을 즐겁게 해주어야
하는 삶의 길을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께 청한 것은 하나도 받지못했으나,
당신이 내게 바라던 그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동적이고 순수하고 모든 것을 내맡기는 신뢰가 물씬 풍겨나는 신앙고백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약삭빠름으로 유혹하지만, 어린아이같은 마음으로 거듭 태어나기를 간절히 하느님께 기도합시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보이셨나이다
-이기양 신부-
성실하게 노력하기보다는 허영에 들떠 살던 한 양봉업자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필리핀을 가게 된 양봉업자는 이 나라가 여름이 길고 겨울이라고 해도 한국의 초여름 같은 날씨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곳에서 양봉을 하면 한국에서보다 최소한 세 배는 벌겠다고 계산을 한 그는 한국의 벌을 가지고 필리핀으로 다시 들어갔지요. 예상대로 따뜻한 날씨에 꽃이 피는 기간이 길었으므로 그는 갖가지 종류의 꿀을 채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첫 해에 많은 이득을 보게 된 그는 더 많은 돈을 투자해서 대규모로 양봉을 시작했는데 다음 해에는 쫄딱 망하고 말았습니다. 일 년을 지낸 그의 벌들이 필리핀에는 겨울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겨울이 없는 나라에서 굳이 애써 꿀을 모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지요.
지혜로운 삶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노력할 생각은 하지 않고 허황되게 일확천금을 꿈꾸는 사람을 빗대어 나무라는 이야기지요. 말 그대로 잔머리를 굴리는 삶이 잘 될 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이렇게 기도하고 계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
사목자로 사목을 하다 보면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보다는 순수한 사람들이 하느님께 더 빨리 가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특히 안다는 사람과 똑똑하다는 사람이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갇혀 있으면 구제불능입니다. 그것처럼 변화되기 어려운 일도 없지요.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 너무 잘 알았고 쉼 없이 연구하고 노력하여 구세주가 언제 어디에서 나실 것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식으로만 알았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했지요. 오히려 자기들을 비판하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신 하느님을 ??신성모독죄?‘라는 죄목을 달아서 십자가에 처형하고 말았습니다. 그것도 불법으로 백성을 선동해서 하느님의 이름으로 처단을 했지요. 많이 안다는 자체가 오히려 무서운 악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잘 모르고 많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죄를 뉘우치며 용서를 청하고 믿음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그랬고 병자들이 그랬으며 심지어 회당장과 로마의 백인대장까지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믿고 따름으로써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체험을 얻어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나날이 새로워지지 않고 과거의 자기 경험과 지식의 틀 안에 갇혀버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지요. 저는 사람이 참 어리석은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 동시에 깨닫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새삼 숙고할 때가 있지요.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경험을 쌓고 지식을 습득하며 수십 년을 살아가지요.
그런데 인고의 세월이 흐르고 그래서 이제는 어느 정도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자기만의 성을 쌓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진리를 알려면 다시 내가 쌓은 그것을 깨부수는 일부터 해야 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쌓아온 자기의 지식과 경험을 깨부수지 않으면 옆에 계신 하느님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참 아이러니하지요? 그렇게 깨달으려고 노력하며 쌓아왔는데 그것을 다시 깨지 않으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니 말입니다. 그래서 깨우친다는 것은 열심히 노력하고 이만큼 배웠으니 이제 다 되었다라고 멈추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롭게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는 ??일일신(日日新)?‘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매일 새로워지지 않으면 과거의 지식과 경험은 미래의 걸림돌이 될 뿐이지요. 그것은 예비신자 교리를 해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아주 열심히 따라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지요. 성경을 읽으라고 했더니 한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신약성경을 열두 번이나 읽은 사람도 있습니다. ??평생 신앙 생활을 해 왔어도 한 번 읽을까 말까 한 사람이 태반인데 정말 그것이 가능할까??‘하며 믿지 못하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열심히 따라 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 사람이 바보여서 시키는 대로 한 것일까요? 아니지요. 그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싶은 열망에 어린아이처럼 그저 시키는 대로 열심히 한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 신자들과 함께 한 지난 5년 동안 하느님을 알게 해 주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언제나 심사숙고했습니다.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신앙 생활이란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쓰기>, <100권 신심서적 읽기>, <기도학교>, <사회복지시설 돕기> 등을 계획하고 실행했는데 하자는 대로 따라 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오늘 복음 말씀에 나오는 대로 어린이처럼 순수하게 믿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겸손해야 하지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내 것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남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하느님과 이웃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함께 계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고, 하느님을 체험하면 자유로워집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8,31-32)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유를 얻게 되지요. 진리이신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는 바탕은 역시 순수하게 믿고 따르며 그 말씀을 성실하게 실천할 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11,25-26)하고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셨지요. 저 역시 여러분이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믿고 복된 말씀을 실천하는 하루 하루를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지식과 주장으로 채워져 있는 사람은 완고한 바리사이들처럼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웃을 처단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순수하게 믿고 따르며 매일 매일 새롭게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과 이웃을 볼 줄 아는 혜안을 가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욕(無慾)의 지혜"
-이수철신부-
얼마 전 미사 중의 순간적 깨달음을 잊지 못합니다.
“아, 이제 기억력도 떨어지고...
머리 좋아지길 기대하긴 힘들겠구나.
머리 대신 마음 좋아지는 일에,
믿음, 희망, 사랑, 겸손, 지혜 등 덕목을 키워가는 데 힘써야 되겠구나.
나이 들어 조금씩 퇴화되어 가는 신체의 기능을 안타까워할게 아니라
속사람을 키워가야 되겠구나.
몸의 눈이 어두워 갈수록 마음의 눈을 밝게 해야 되겠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하느님 떠난 머리 좋은 똑똑한 바보들이 세상을 망치고 있습니다.
외적으로야 발전이지만
하느님의 눈으로는 한정적인 자원을 고갈시킴으로
자기 무덤을 파는 현대 문명입니다.
편리와 신속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삶이
알게 모르게 인간의 내면을 천박(淺薄)하게 만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 졌습니다.”
여기서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이 지칭하는 대상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입니다.
외관상 하자 없는 똑똑하고 유식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진정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탐욕이 마음의 눈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철부지들이 지칭하는 대상,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선 무욕의 사람들입니다.
알고 보면 여기서 철부지들은 실속의 본질을 사는 지혜로운 이들이요,
지혜롭고 슬기롭다는 자들은 허상을 사는 어리석은 자들입니다.
욕심이 사람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욕심 없어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보는 지혜입니다.
무욕의 지혜입니다.
탐욕 덩어리라 정의할 수 있을 만큼,
무한한 탐욕을 지닌 인간들입니다.
탐욕이 눈을 가려버려
학식의 유무에 상관없이 어리석은 사람들로 만듭니다.
똑똑한 머리와 그 많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눈을 가려 패가망신 하는 이들이나
노추(老醜)의 말년 인생 보내는 이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마음 가난한, 무욕의 겸손한 사람들이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도 이들을 알아주십니다.
공부나 머리 부족해도,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도달할 수 있는 목표입니다.
오늘 1독서에서
하느님 진노의 막대인 아시리아 임금이 왜 하느님으로부터 버림 받았습니까?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로 가득 찬 탐욕 때문이었습니다.
독서 중 확 눈에 띈 대목입니다.
“나는 내 손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었다.
나는 현명한 사람이기에 내 지혜로 이루었다.”
눈에 거슬리는 ‘내’라는 단어입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아시리아 임금은 나로 가득 찬 똑똑한 바보,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똑똑한 바보들에 대한 결론과도 같은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주님께서는
그 비대한 자들에게 질병을 보내어 야위게 하시리라.
마치 불로 태우듯 그 영화를 불꽃으로 태워버리시리라.”
아니 하느님을 잊고 끝없는 탐욕의 노예 되어 사는
모든 현대인들에 대한 예언과도 같은 말씀입니다.
무지(無智)한 현자,
무식한 유식의 철부지 사람들이 새 시대의 주인공들입니다.
문득 계간지 ‘녹색평론’ 89호 책
머리말 마지막 말이 화두처럼 남아있습니다.
“필요한 것은 진보가 아니라 개안(開眼) 혹은 회심(回心)이다.”
너무나 외적 진보라는 허상에 홀려 살고 있는 현대인들입니다.
진보가 아닌 개안, 혹은 회심의 철부지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이
우리를 무아의 겸손한, 무욕의 지혜로운 철부지 사람들로 만들어 줍니다.
아멘.
어린이가 되라
-강영구신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감사합니다.
그대에게
호수처럼 맑고 투명한 어린이의 눈을 보십시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춰볼 수 있는 어린이의 눈은 투명하고 평평한 거울입니다.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닫기 위해서는 어린이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오만과 아집으로 비뚤어진 눈으로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가식과 허위의식으로 흐려지고 때 묻은 눈으로 진리를 볼 수 없습니다.
어린이의 작고 붉은 입을 보십시오.
그 입에 기도와 노래가 담겨있고 진리가 있습니다.
어린이의 입에 거짓이 깃들 자리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바르게 기도하기 위해서,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하기 위해서(마태5,37), 이웃과 형제들을 사랑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어린이의 입을 가져야 합니다.
거짓말하고 욕하고, 남을 헐뜯고 이간질하며 악담하는 입은 지옥(地獄)의 입구(入口)입니다.
어린이의 작고 앙증맞은 두 손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쥔 것이 없지만 그 손에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고도 모자라서 헐떡이는 탐욕스러운 손으로는 행복을 움켜쥘 수 없습니다. 훔치고 빼앗고 때리고 죽이는 손으로는 지옥(地獄)을 만들 뿐입니다.
당신도 어린이가 되십시오.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요한3,3).
스스로 죽는 사람만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一明)
마산교구
† 교만과 겸손의 놀라운 차이점
-박상대 신부 -
오스트리아가 낳은 음악천재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4살 때 건반지도를 받고 5살 때 이미 소곡(小曲)을 작곡했던 그가 아버지의 슬하에서는 아무 걱정 없이 작곡과 공연으로 온 유럽을 다닐 수 있었지만, 26세에 콘스탄체와 결혼한 후 가정을 꾸리는 데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따랐다. 많은 빚더미에 가정형편이 쪼들리게 되자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 가정교습을 하기로 하였다.
모차르트의 명성에 걸맞게 많은 지원자들이 모여들었다. 모차르트는 모여든 문하생들을 두고 음악을 좀 아는 사람들과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두 그룹으로 갈랐다. 그리고는 음악을 좀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200 쉴링을, 전혀 모른다는 사람들에게는 월 100 쉴링을 교습비로 징수하였다. 200 쉴링을 내야하는 부모들이 항의하며 답변을 요구하자, 모차르트의 해명이 걸작이다. 음악을 좀 아는 사람을 가르치기가 모르는 사람보다 두 배나 어렵다는 것이었다.
오늘 복음은 찬양기도(25-26절)와 계시의 말씀(27절)으로 짜여 있는데, 이는 어록에서 따온 것이며 공관복음서에 수록된 유일한 예수님의 찬양기도이나 그 내용으로 미루어 감사기도라 해도 좋다.
다시말하면 어제복음에서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을 두고 불행을 선언(11,20-24)하신 예수께서 오늘은 아버지께 올리는 기도의 형식으로 감사의 환호를 부르신다.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좀 안다고 뻐기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감추시고 오히려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나타내 보이시니 참으로 기쁘고 감사할 일이라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불행선언을 맞은 대상인물과 오늘 감사환호의 대상인물을 비교해본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더욱 더 명확해진다. 코라진, 베싸이다, 가파르나움의 도시가 불행선언을 맞은 이유는 그곳에서 좀 안다고 뻐기고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백성의 지도자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거부하였다.
오늘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철부지 어린아이들이란 바로 그들로부터 철저히 소외되고 죄인으로 취급받던 가난한 이들, 못 배운 이들, 마귀 들린 자들, 온갖 병자들, 세리들, 창녀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사람의 아들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권능을 찬미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들은 다 같다. 하느님 앞에 인간은 다 같은 조건인데, 왜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어떤 인간은 하느님을 수용하는 것일까?
그 차이는 의외로 간단하다. 바로 교만과 겸손의 차이다. 교만은 거부를 낳고, 겸손은 수용을 낳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고 겸손과 수용의 표상인‘철부지 어린아이들’이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를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계시에 대한 통찰은 철저하게 아들 예수께 맡겨져 있으며, 아들이 택한 이들에게 유보되어 있다. 다행한 일은 예수께서 택하신 철부지 어린아이들 같은 사람들이 계시에 대한 수용성이 훨씬 크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가진 지식과 지혜는 철학(哲學)을 통하여 신(神)의 존재(存在)를 증명했다. 그러나 그 신(神)은 한낱 절대자(絶對者, Absolutum)일뿐, 이 분이 바로 구약의 야훼 하느님이시며, 신약의 예수님 안에 성령과 함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심을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하느님을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하느님만이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를 알려 주신다. 그래서 그분은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 즉 스스로 사람이 되는 육화(肉化)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누구든지 육화(肉化)되신 하느님,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하느님을 알 수 없다. 이제는 우리가 사람이 되신 예수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기뻐해야 하는 것이다.◆
모세의 성소...
-오상선신부-
에집트에서 한때
떵떵거렸던 모세가
동족을 괴롭히던 에집트인을 쳐죽이고는 도망을 간다.
억압받은 동족들을 멀리한 채
자신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평범한 가장으로 살고자 한다.
그래서 양떼를 먹이는 목동의 삶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모세는 하느님의 산이라 불리던 호렙 산 근처에 양떼에게
풀을 먹이러 갔다고 묘한 광경에 사로잡힌다.
이상한 떨기꽃에서 불길이 솟아나는데(신비체험)
하느님께서 부르신다(모세야!).
모세가 응답한다(예, 말씀하십시오!)
하느님 친히 자신의 신원을 밝히시며 파견의사를 전하신다
모세는 자신없어한다.
하느님께서 자신감을 불어넣어주신다(내가 네 힘이 되어 주겠다).
모세의 자신없음은 말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형 아론을 붙여주신다.
모세는 다시 동족들을 구하러 간다.
이스라엘의 영웅 모세가 성소를 받게 되는 과정이다.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소여정은 대부분 위의 과정을
밟게 된다.
우리의 성소도 마찬가지이다.
하느님의 파견보다 소시민적인 삶에 안주하려는 것이
대부분의 우리의 생각이다.
한때 수도자나 성직자가 되어볼까 생각도 해보다가
또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보자 생각도 해보다가
이런저런 부정적인 경험 때문에 포기하고 만다.
그냥 내 하나, 내 가정이나 꾸리며 살아야지 뭐,
내가 별순가?
그러던 어느날
나는 충격체험을 하게 된다.
그것이 피정이나 강론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사람에 대한 이야기 일 수도 있다.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이야기 일 수도 있고
직접적인 목격을 통한 것일 수도 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것이 내가 마음 깊이 원하던거야!
그렇지만 내가 뭐 별수있나?
마음 뿐이지 뭐...
먹고 살기도 힘든데...
이러한 순간에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불러주신다.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불러주신다.
내 이름을 사랑스러이 불러주신다.
<베드로, 바오로, 마리아, 데레사...>
나에게 말씀을 전해주시고자 하신다.
<예, 말씀하십시오!>
<예, 저 여기 있습니다!>
예언자들로부터 성직자, 수도자가 서품이나 서원 전에 호명이
될 때 응답하는 양식이다.
이렇게 들으려는 자세가 되었을 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계획을 말씀해 주신다.
내 능력과 한계를 벗어나는 듯한 말씀을 해 주신다.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다.
그래서 저는 못합니다.
저는 이러한 약점을 지니고 있고, 능력도 부족하고
죄인입니다.
당연하다.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소자로서
자격이 없다.
교회에서 무슨일을 맡기면 내가 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이 사람은 일을 시키면 안되는 사람이다.
하느님께서는
안다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을 감추시고 보잘 것없는 사람,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당신 뜻을 나타내 보이신다고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가!
그렇다!
당연히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부족함과 한계를 알고서 일을 맡기신다.
그래야만 당신의 권능이 더욱더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공로로 돌리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 친히 힘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너의 힘이 되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내가 너의 입술이 되어 주겠다>
모든 성소자는
하느님의 함께 하심의 약속이 있기에
성소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신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당연히 <예, 주님 말씀하십시오>하고 응답해야 하리라.
그리고 그분께서 맡기시고자 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귀기울여
들어야 하리라.
겸손되이 <주님, 저는 부족합니다> 하고 아뢰야 하리라.
그러면 그분께서는 <내가 너희 힘이 되어주겠다> 하실 것이다.
자, 주님의 힘을 믿고
오늘도 성소의 길에 정진하자.
성소는 수도자나 성직자만이 받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도록 불림 받은
것이다.
성소는 매일의 삶속에서 반복되어야만 한다.
수도자, 성직자라 하더라도 한번 받은 성소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매일 그분의 부르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나의 하느님, 나의 힘이시여!>
|
첫댓글 복음묶음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