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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5일 월요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야고보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로, 요한 사도의 형이다. 형제는 부친과 함께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주님의 제자로 선택되었다. 또한 두 사도는 기적의 자리에 늘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그분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42년경 예루살렘에서 참수된 야고보 사도는 사도로서는 첫 번째 순교자이다(사도 12,1-2 참조). 알패오의 아들인 야고보와 구별하여 ‘대 야고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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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한다.
(마태오 20,20-28)
whoever wishes to be great among you
shall be your servant;
whoever wishes to be first among you
shall be your slave.
말씀의 초대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는 엄청난 힘을 지닌 보물이 있다. 그것은 우리 몸이 흙으로 된 나약한 육신이지만 예수님의 죽음을 지님으로써 그분의 생명을 드러내기 때문이다(제1독서). 모든 민족들의 통치자들과 고관들은 세도를 부리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세상의 통치는 힘과 권력이지만 하느님의 통치는 섬김과 사랑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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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이해, 포용, 자기 낮춤이 선행된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 년이 걸렸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들려주신 인생 덕목의 한 대목입니다. 겸손한 사람이 훌륭한 일을 했을 때는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교만한 사람이 같은 일을 했을 때에는 오히려 시기와 질투가 생긴다고 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이 한국 교회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어른이 되실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이 하신 큰일보다 더 큰 겸손함을 지니셨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성인(聖人)과 범부(凡夫)의 차이를 물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범부는 세상을 이용하여 자신을 섬기려 하지만, 성인은 세상을 통하여 하느님을 섬기려 한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교회 안의 모든 구성원은 섬기고자 봉사직에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자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목표는 성인(聖人)이 되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는 수련은 섬기는 연습에서 시작됩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든 모든 사랑의 지식은, 섬김의 삶으로 비로소 가슴으로 내려와 따뜻하고 생생한 사랑이 됩니다. 내가 누구를 섬기고 살 때 하늘의 천사는 그 시간 나를 섬기고 돌보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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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스승님의 질문입니다. 스승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는 청원에 이렇게 반문하신 것입니다. 그 잔이 무엇인지요? 그 잔을 마시면 자연스레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되는 것인지요? ‘그 잔’은 고통의 잔입니다. 아픔의 잔이요 절제의 잔입니다. 자신을 포기하게 하는 잔입니다.
두 제자의 청원을 알게 되자 다른 제자들은 언짢아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나누지 않고 독식하려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습니다. 두 사도가 일부러 그러했던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순수하게 스승님 곁에 있고 싶다는 발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섭섭하게 할 수 있는 처신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타이르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고통 없이는 섬길 수 없습니다. 자신을 낮추지 않고 어떻게 다른 이를 받들 수 있을는지요?
자신보다 잘난 사람을 모시기는 그래도 괜찮습니다. 자신보다 못한 이를 공경하고 섬기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자신보다 악한 사람인데도 낮추고 받들어야 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 때문에’ 섬기고 낮추고 받들라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고통은 ‘살아 있는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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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는 도토리나무입니다. 야산 어디서나 볼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사람에게 이롭고도 흔한 것에는 ‘참’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참새는 흔하고 쉽게 잡을 수 있는 새입니다. 참꽃은 진달래로 약용입니다. 그러나 철쭉은 먹지 못했기에 개꽃이라 하였습니다.
참나무도 도토리 크기에 따라 구분됩니다. 갈참나무, 굴참나무, 졸참나무, 떡갈나무, 상수리나무입니다. 물론 하나같이 ‘도토리’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갈참나무는 그 나뭇잎을 짚신 위에 깔고 다녔기에 생긴 이름입니다. 떡갈나무는 잎으로 떡을 싸서 떡이 붙거나 쉬지 못하게 했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가장 흔한 것은 상수리나무이지요. 임진왜란 때 도망가던 선조는 도토리묵을 먹습니다. 그는 난이 끝나고 궁중에 돌아와서도 자주 먹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임금의 수라상에 자주 올랐다고 하여 상수리나무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하면 고마운 줄 모릅니다. 늘 그렇게 있는 줄 착각합니다. 우리는 묵묵히 일하는 분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줄어들면 조직은 제대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더라도 봉사자의 대열에 합류해야 합니다. 섬김의 생활을 실천해야 주님의 ‘참’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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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두 제자와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기적의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새 세상이 오면 자신의 두 아들을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단순 소박한 시골 어머니의 청원이나 다름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마음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그러기에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하시며 반문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이 모습을 고운 눈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열두 제자들은 세상 종말이 곧 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새 세상의 주인이 되고 자기들은 그분 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줄로 믿었습니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런 염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주실 때까지 제자들은 이러한 환상을 접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스승의 부활과 성령 강림을 체험한 뒤 그는 온전히 바뀌어 예수님의 뒤를 따라갑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야고보 사도는 헤로데 임금에게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스승의 예언을 떠올리며 예루살렘에서 참수의 칼을 받았을 것입니다.
섬기는 사람
- 박후임 목사-
갑자기 ‘아무도 2등은 기억하지 않는다.’라는 광고 문구가 생각난다. 1등이 아니면 도무지 살기 힘든 이 세상의 가치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나도 1등만을 요구하는 세상이 숨 막혀 이렇게 시골로 들어와 농사를 배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등, 3등… 꼴등도 어우러져 살고 싶은 바람으로. 하지만 시골 또한 보기 좋은 것으로 상품가치(돈)가 여겨지니 풀 약도 치고, 화학비료도 사용하여 그로 인해 땅을 죽이고, 물이 죽고, 그것을 먹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생각 없이 그냥 행하고 있다.
예수님께 와서 아들들의 장래를 청하는 어머니를 보니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의 여느 어머니와 다를 것이 없음을 본다. 이 땅의 많은 어머니가 사랑이라 는 이름으로,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지금 아이로 살지 못하고 공부를 잘하기위한 존재로 있게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의 장래는 하느님께 있다. 아이들의 장래는 아이들의 몫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찾아갈 때 힘이 생기고, 어른으로 자랄 수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어머니로 있으면 된다. 아이들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어머니의 자리에 굳건히 서서 아이들을 믿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며 최고의 선물이다. 높아지려 하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 많은 사물을 밟고 죽여야 하지만, 섬기는 것은 많은 사람을, 많은 사물을 사랑하고 살리는 것이다.
주님, 제 안에 첫째가 되고 싶어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마다 이 말씀을 기억하고, 제 안에 있는 욕구의 근원을 헤아려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하소서. 목숨까지 바쳐 섬기러 오신 당신을 기억하며 모두를 섬기게 하소서. 아멘.
죄의 악순환
-황지원 신부-
아프리카의 한 원시 부족에서는 사람이 죄를 지으면, 부족원들이 모두 모여
그 죄지은 사람을 둘러싸고 춤을 춥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의 잘못을
질책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씩 그 사람의 칭찬을 해준다고 합니다. 모든 부족원들이
한 마디씩 칭찬을 하고 좋은 말을 할 때까지 그 춤은 멈추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칭찬을 마쳤을 때 공동체는 다시 그 사람을 받아들이며 축제를
엽니다.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제자들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의 개국 공신이
되어 벼슬 한자리 바라는 마음이 너무 잘 들여다보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뿐만
아니라, 그 일을 알고 불쾌해 하는 제자들을 통해서도 숨겨져 있는
욕심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도 다른 사람의 부족함과
잘못을 감싸주고 안아주기보다, 잘못을 그 사람의 탓으로 돌리며 배척하는 모습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마귀는 한 사람을 죄짓게 하는 것보다, 그 한 사람의
죄를 통해 다른 사람들도 함께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을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죄의 악순환의 사슬을 끊고자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우리 위에 군림하시며
우리의 잘못을 심판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지고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죄의 악순환을 끊는 것은 단죄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지고 품어주는 마음에서 시작됨을 보여주십니다.
영적 명예욕
-전삼용신부-
사람의 욕망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것이 권력욕이라고 합니다. 돈도 있을 만큼 있고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손을 뻗히는 곳이 정치라고 합니다. 이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죄의 뿌리인 ‘교만’ 때문입니다.
사실 권력이나 명예, 인기 등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그것을 잃었을 때 선택하는 것이 자살임을 보면서 우리 안에 얼마나 높아지려는 욕망이 있는지 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제배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를 대동하고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합니다. 이에 다른 사도들도 화를 내는 것을 보면 그들도 어느 정도씩은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욕심이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께서 수난하고 죽으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누가 서로 높으냐며 다투기까지 한 것을 보면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복음을 읽은 어떤 신자 분들은 가끔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성인이 되려고 하는데 그런 생각을 갖는 게 잘못 된 건가요?’
성인은 하늘나라에서 찬란히 빛나는 자리를 차지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이 성인이 되어 높은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희망하는 것 때문에 그들을 나무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된 방법을 지적해 주십니다. 높이 되는 것은 예수님께 청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셔야 했던 고난의 잔을 마셔야하고 세상사람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 모범으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음을 강조하십니다.
소화 데레사의 꿈은 성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성녀가 되기를 바랐는지 몰라도 성녀가 되려는 희망을 갖고 언니들이 들어가 있는 갈멜 봉쇄수녀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습니다.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수도원에서 더 기다리라고 하자 그녀는 교황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그 때 교황님에게 특별 허락을 청하였습니다. 15세의 어린 나이에 수녀원에 들어가서 24세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그녀는 원했던 대로 성녀가 되었고 성녀 중에서도 큰 성녀가 되었습니다.
성인이 되어 하늘나라에서 빛나는 샛별처럼 빛나고 싶은 희망은 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것이 세상에서의 방법과는 반대로 낮아지고 부서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만이 다른 것입니다.
한 보좌 신부가 사고를 당하여 죽었습니다. 하느님은 그가 올바로 살지 않았기 때문에 지옥으로 보냈습니다. 지옥에 도착하여 혹독한 고통을 당하면서 눈을 들어 앞을 보았더니 자신의 주임 신부님이 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아니, 신부님께서 어떻게 지옥에...”
주임 신부님은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대며,
“쉿, 조용히 해. 저기 주교님도 계셔!”
사도들은 이 세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하늘나라에서까지 그렇게 되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황님도 낮은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지옥에 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비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낮출 줄 알았던 사람이지 어떤 지위에 있었느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높으신 분이신 이유는 하느님이시면서도 인간 가운데 가장 낮고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사람에게 순종하여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힐 만큼 겸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높으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성인이 되고자 하는 꿈을 꺾으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바른 방법을 통해 높아지기를 권고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야고보는 그의 희망을 접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잔을 마시기를 원하였고 사실 사도들 중 첫 번째로 순교하는 영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나라에서는 첫 째는 아닐지라도 아주 예수님과 가까운 곳에 앉아계십니다.
길을 가다가 만원을 주운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때부터 땅만 바라보고 다녔습니다. 평생 주운 것은 2만여 개의 핀과 돈 몇 푼, 그리고 구부정한 어깨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잃은 것이 있다면 푸른 하늘, 아름다운 별빛, 만나는 사람들의 미소와 애정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앙인이라면 모두가 성인이 되려는 목표를 지녀야합니다. 하느님나라도 높고 낮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노력하셔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셨다면 우리도 그 모범을 따라 우리 자신을 최대한 완성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겸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이 길로 초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인이 되기 위해 겸손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공동 운반자
-김찬선신부-
예수님의 제자 사랑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 해도 제자들을 잘 못 사랑하신 것이 아닐까?
저의 기준에서 볼 때 편애는 공동체를 망치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편애하신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그리고 오늘 축일을 지내는 야고보가 그들입니다.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릴 때와 타볼산의 거룩한 변모 때
주님께서는 이 세 제자만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야고보와 요한 두 형제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을 부탁합니다.
이번 상경 길에 주님이 권력을 차지하게 되면
그 세속 왕국의 2인자, 3인자 자리를 달라고 청탁합니다.
그러나 좀 더 신중히 생각해보면 그것만도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자를 겟세마니 동산에도 따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당신이 마셔야 할 잔, 독배를 마시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이 제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이고
그리고 그 독배를 같이 마시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복음 복음에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이들이 마실 수 있다고 대답하였는데
이 대답이 씨가 되어 이들도 독배를 마시게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사도들 중 제일 먼저 수난의 잔을 마신 사도지요.
묵상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특별한 사랑을 보이심은 당신의 도구로 쓰시기 위함인데,
당신의 특별한 도구란 당신 십자가를 져 나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아가며 유난히 더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되면,
나의 책임이 누구보다 무겁다고 느껴지면
하느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셔서
당신 십자가의 공동 운반자로 나를 뽑으셨다고 여겨야 할 것입니다.
요 며칠 건설 폐기물을 내오는 작업을 하였는데
계단을 오르면서 십자가를 진다는 마음으로 했습니다.
담가를 이용하여 둘이 같이 나르기도 했는데
담가의 한 쪽은 주님이
다른 한 쪽은 내가 지는 것이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새벽을 열며
이상하게도 아이들은 콩을 대체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밥에 콩이 들어있으면, 아이들은 인상을 쓰면서 하나씩 그 콩을 골라서 따로 빼어놓지요. 한번은 저 역시 이런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랬지요.
“콩이 얼마나 맛있는데, 그리고 그렇게 골라 놓으면 누가 먹니?”
그러자 그 꼬마가 아주 강한 어조로 말합니다.
“저는 콩밥이 싫어요.”
그런데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왜 이 밥이 콩밥이지? 콩보다 쌀이 더 많은데……. 따라서 당연히 쌀밥 아닌가?’
이 꼬마에게 싫어하는 콩이기 때문에, 콩보다 훨씬 많은(아마도 70% 이상은 쌀일 것입니다) 쌀은 보지 못하고 콩만 보이는 것이지요. 이것은 우리들의 삶과도 상당히 유사합니다. 사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많은 일을 겪는데 그중에서 나를 힘들게 하는 일들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나를 발전시키고, 나에게 미소를 가져다주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잘 보이지 않고, 나에게 아픔과 상처를 주는 힘들게 하는 일들만 눈에 띄는 것이지요.
하루를 생각해보세요. 나를 힘들게 했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아마 한두 개에 불과할 것입니다. 이제 반대로 내게 힘을 주었던 것들을 생각해보세요. 아침에 일어나서 깨끗하게 씻을 수 있는 것,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것, 누군가를 만나서 지식을 얻고 대화중에 웃음을 간직할 수 있었던 것, 텔레비전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서 새로운 재미와 흥미를 얻는 것, 피곤함을 풀 수 있는 잠을 자는 것 등등……. 하루의 삶에서 내게 유익한 것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 중 95%가 무난하게 지나가고 5%가 제대로 풀리지 않을 경우, 풀리지 않는 5%의 일을 생각하는 데에만 95%의 에너지를 쓰는 사람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행복할까요? 아마 늘 우울하고, 괴롭고, 짜증날걸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불안감과 부정적인 마음으로 힘들게 사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가지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지요. 이 점은 과거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세상의 종말이 얼마 안남은 것으로 생각했나 봅니다. 그래서 불안하고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세상의 종말이 되어 새로운 세상이 올 때, 세상의 주인이 되실 예수님 곁에서 높은 자리를 미리 예약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 말합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 말에 다른 제자들은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신들도 불안한 마음에 그 자리에 미리 예약하고 싶은데, 미리 선수를 친 것이니까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관점이 아닌 하느님의 관점을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관점인 불안하고 부정적인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관점인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낮아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한없이 낮아짐으로 인해서, 우리 모두를 구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역시 낮아질 때, 긍정적이고 희망의 메시지가 우리 마음에 언제나 함께 할 것입니다.
내게는 좋은 일만 일어난다는 자신감을 가집시다.
빠다킹신부
줄서기를 잘하자
-남상근 신부-
예수님 시대에도 인사 청탁과 로비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때도 치맛바람이
좀 불었던 듯합니다. 한자리 차지하고 싶은 암투도 발견됩니다.
한 명은 오른쪽에 한 명은 왼쪽에 앉아서 세도를 부리고 싶어서 어머니를
앞세워 예수님을 만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보면 자리 욕심과 성공의 욕망이 얼마나 끈질긴지를 알게 됩니다. 소위 ‘줄서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축일에 들리는 복음은 이렇게 별로 향기롭지 않은 적나라한
내용입니다. 성공을 위해 ‘ㄲ’으로 시작하는 6가지 요소가 필요하답니다.
꿈(비전), 깡(용기), 꾼(전문성), 꼴(외모), 끼(재능) 그리고 끈(연줄)이랍니다.
끈을 만들려고 양심도 자존심도 다 팔기도 합니다. 실력으로 모자라니
은밀한 뒷거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높은 이가 되려면, 첫째가 되고자 하면
섬기는 사람, 종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예수님과 인연을 맺으려면
봉투를 준비할 일이 아닙니다. 그분이 몸값으로 목숨바쳐 보여주신 것은
오로지 섬기는 사랑만이 참 권위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하나쯤 낮은 자리에 머무는 것이
참된 삶이라는 깨우침이었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기쁨
-임인자-
건강이 안 좋아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때론 중환자실에 입원할 때도 있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할 때마다 가족 걱정을 하고, 못다 한 일 걱정에 조바심을 칩니다. 건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들은 무슨 복을 타고나서 저렇게 건강하게 사나.’ 하고 부러움이 저절로 생깁니다. 그럴 때마다 친하게 지내는 스님께 문안전화를 드립니다. 스님은 직장암을 앓고 계시지만 여행도 많이 하고 사람들도 잘 챙기는 분입니다. “스님, 평안하시지요?” “우리 같은 사람은 더 나빠지지 않은 게 다행이지요. 병이랑 친구하고 지냅니다.” 목소리를 듣고 나면 남들보다 더 잘 살고, 남들보다 더 행복해야 한다고 욕심을 부렸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집니다. 암까지도 친구하며 지내는 스님은 죽음도 친구처럼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 스님을 뵐 때마다 나의 상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합니다.
늘 반복되는 일상이 지루하고 힘들 때가 많습니다. 때론 단순하게 반복되는 무엇인가를 계속하는 것이 큰 고문이라는 생각도 합니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또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이런 것들이 반복되다 보면 숨통이 막히는 것처럼 답답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큰일을 당하고 나면 이 작은 일상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아무 일 없이 가족들이 건강한 것도,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는 것도, 반가운 사람을 만나 차 한잔 마실 수 있는 것까지도.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을 누리고 살았는지,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나에게 축복이었는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새롭게 살게 되는 이 시간을 힘든 이웃과 함께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데 바치겠노라고 결심해 봅니다.
“무엇을 원하느냐?”는 말씀을 묵상하며 죽음도 일상처럼 저에게 편안하게 다가오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열심히 살아가다 보면 죽음이 오는 순간에도 평안할 수 있다고, 기쁘게 맞이할 수 있다고 가슴 깊이 받아들여 봅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의 사도 야고보
-경규봉 신부-
성 야고보 사도는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사도 요한의 형이다. 이들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로서 아버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중에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들은 주님께서 부르시자 곧 배를 버리고 아버지를 떠나 주님을 따름으로써 주님의 제자가 되었다(마태 4,21-22).
주님께서는 베드로, 요한과 함께 야고보를 특히 사랑하셨으며,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나(마르 5,37), 타볼 산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실 때(마태 17,1-9), 그리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실 때((마태 26,36-46) 등 중요한 순간에 이 세 제자와 함께 하셨다.
이들은 다른 제자들보다도 주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이 컸던 것이다. 주님께서 사마리아에서 냉대를 받자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루가 9,54) 하고 말하기도 하였다.
야고보 형제는 자신들이 주님을 사랑한 그 만큼 주님께 대한 요구도 컸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앉으실 때에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을 수 있기를 간절히 부탁하기도 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이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받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마르 10,35-41). 이처럼 주님께 대한 열정이 가득한 야고보 형제에게 주님께서는 천둥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셨다(마르 3,17).
야고보는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하여 예루살렘에서 참수를 당함으로써 사도로서는 첫 번째로 순교하였다(사도 12,1-2).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순교하기 전에 에스파니아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에스파니아의 갈리시아 지방으로 옮겨져 모셔졌다고 한다. 후일 이곳에 야고보 사도를 기리는 성당이 세워지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도시가 형성되었고, 이 도시는 유럽의 3대 순례지 중 하나가 되었다. 야고보 사도는 에스파니아의 수호성인이다.
우리로 하여금 주님 가까이로 인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주님을 향한 열정이다. 열정 없이는 주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열정은 우리 안에 있는 사념들을 불태워서 오직 한 가지 마음을 갖도록 해준다. 어떠한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 역시 열정이다. 주님을 향한 열정은 주님께 가까이 나가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들을 물리치고 이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준다.
사도 야고보는 열정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부르시자 배와 그물도 버리고, 삯꾼과 아버지까지 그대로 남겨둔 채 주님을 따랐다. 그가 중요한 순간에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나, 고난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대답한 것 역시 주님께 대한 열정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바로 그러한 열정으로 사도들 가운데 가장 먼저 순교하였다.
오늘 사도 야고보의 축일을 지내면서 무엇보다도 주님께 대한 열정이 우리 마음에 가득하기를 기도하자. 주님께 대한 열정으로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되는 모든 것들을 물리치도록 하자. 주님을 향한 열정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신앙인이 되자.........◆
주님처럼 죽을 수 있는 열정으로 살아간 성인
-채홍락 신부-
오늘은 제베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의 형제인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성서에 언급된 야고보 사도의 모습은 베드로와 안드레아 형제와 함께 항상 앞부분에 제시 되어 있습니다. 처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네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치유 현장에 예수님과 함께 있었고, 성전이 무너지는 종말이 언제 올는지에 대해 다른 제자들을 대표해서 묻기도 합니다.
야이로의 딸을 되살리는 기적을 지켜보았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의 순간을 목격했으며, 게쎄마니 동산에서 공포와 번민에 싸여 기도할 때에도 다른 제자들보다 더 예수님 가까이 있는 등 예수님의 활동에서 중요한 순간을 늘 함께 지낸 것으로 나타납니다.
한편 야고보의 아버지 제베대오는 삯꾼들을 부리고 있었고, 어머니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장소까지 따라다닌 행적으로 보아, 예수님 일행이 복음을 전하며 팔레스티나 일대를 다니실 때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런 까닭에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주님의 나라가 서면 저의 이 두 아들을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했던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는 듯합니다.
또한 야고보는 동생 요한과 함께 “보아네르게스 곧 천둥의 아들”로 불리었는데, 이는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의 기질이 ‘다혈질’이라서 붙여진 것으로 보입니다. 실제로 이 두 형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자, 하늘에서 불을 내려 그들을 불살라 버리자고 건의할 만큼 과격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반면 이런 다혈질은 예수님을 철저히 따르고자 하는 열망으로 승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 마시게 될 고난의 잔과 죽음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 선뜻 그러겠노라고 답변합니다. 이때 장담한 대로, 야고보는 신약성서가 12사도 중 명시적으로 분명하게 그 순교 사실을 기록한 첫 번째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신앙인인 우리는 언제나 십자가의 신비를 몸으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논리로 신앙을 바라봅니다. 신앙은 십자가의 논리로 밖에 설명될 수 없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나의 논리로 하느님의 논리를 꿰맞출 수는 없는 법이지요. 그것은 마치 인간인 우리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더러 우리를 섬겨달라고 때를 쓰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하든 못하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원하시는 방법으로 경직됨 없이 부드럽게 나를 개방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더 큰 신앙을 이룰 수 있는 모습이지요. 지금도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당신께 개방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단점까지도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되길 바라십니다. 마치 야고보 사도의 다혈질을 받아들여 주님처럼 죽을 수 있는 열망으로 승화시켜 주신 것처럼............◆
성 야고보 사도
-하화식 신부-
우리는 모두 욕망과 기대감을 갖고 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바람과 나자신의 인간적인 성취와 건강과 행복…. 인간이 얻고자 하는 많은 바람이 있기 마련인데 오늘 이야기는 두 아들에 관한 어머니의 마음이 특히 돋보인다. 주님께 무엇을 바라는가 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위한 청원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한 청원인가?
우리의 기도는 어느 선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나 자신도 많은 기도를 하면서 살아가지만 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고 물으실 때 나 자신을 위한 것에 집착하기가 일쑤였다. 그러나 살아갈수록 참된 믿음은 자신을 위한 청원보다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가 더 값지고 소중하며 참 기쁨을 얻는 지름길임을 깨닫게 된다.
부모의 마음이 바로 하느님의 마음을 닮았기 때문에 오늘 어머니의 청원은 참으로 진솔하고 솔직한 마음이라고 생각된다. 주님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더한층 높은 삶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며 으뜸과 종의 삶이 서로 교차하는 그 선에서 우리가 어느 쪽을 선택하는 의지가 작동되어야 하는지 매순간 부딪치게 된다.
남을 섬길 줄 아는 사람이 될 때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참 삶의 맛을 얻어 누리게 되지 않을까? 그럼 오늘 하루 중 어느 순간에 이런 삶을 살 수 있을 것인가? 오늘이 가장 소중한 날이라는 점을 잊지 말자.
-장동현 신부-
우리 학교 학생 전체와 함께 미사를 드릴 때의 일입니다.
관구장 신부님이 주례를 하고 저와 다른 신부님들이 옆에서 거들었습니다.
부탁을 받고 제가 복음낭독을 하였습니다. 복음낭독 후 저는 자리로 돌아오고
관구장 신부님이 강론대로 가셨습니다. 신부님 강론을 듣고 있다가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제가 주례석에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늘 윗자리에, 그리고 가운데에만 앉다보니 저도 모르게 그만 주례석에 떡하니
앉아버린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황급히 제자리를 찾아 앉는데 앞줄에 앉은
선생님들이 그 모습을 보고 막 웃어 조금 겸연쩍었습니다.
윗자리는 겸손의 자리입니다. 윗자리는 책임의 자리입니다. 윗자리는 고난과
희생의 첫째 자리입니다. 섬기는 사람의 자리이고 종의 자리입니다.
어린 나이에 일찍 높은 자리(?)에 앉게 되어 생긴 병치레를 했습니다.
자리의 본질을 잊은 값을 톡톡히 치른 에피소드였습니다.
‘아차!’ 하며 다시 한번 깨닫는 기회였습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정원순 신부-
◆오늘 복음에 보면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예수께 와서 주님의 나라가 서면 자신의 두 아들을 예수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이 말을 듣고 있던 다른 열 제자들이 그 형제를 보고 화를 냈다(마태 20,24)는 보도가 나온다. 이것은 제자들 사이에도 자리다툼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높은 자리에 오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올라가는 과정에 다른 사람에게 비인간적인 처신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정상 자리는 한 사람만 앉을 수 있다. 그러기에 올라가면 얼마 못 가서 내려와야 한다. 정상의 자리는 좁기 때문이다. 혼자 있어야 하기에 고독하기도 하다. 다른 사람이 앉을 자리가 없다.
이에 비하여 낮은 자리로 가면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앉을 자리도 많고 서로 다투기보다는 공존한다. 골짜기의 물, 크고 작은 지류의 강물, 하천은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바다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있기에 때문이다. 자기를 낮추면 사람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예수님 주변에 사람들이 많이 모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예수께서 겸손하셨기 때문이다.
낮아졌다면 아무것도 가릴 것이 없다. 누구와도 만날 수 있고 어디라도 갈 수 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낮아져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세상 을 품기 위해서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만 찾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하고만 자리를 함께하고 일을 하게 되면 그 사람의 생각과 시야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변화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넓어지고 낮아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바다처럼 모든 것을 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한다
-구경국 신부 -
꽤나 오래 전의 일입니다만 제가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에서 유학을 할 당시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기초신학을 담당하셨던 교수님은 봘터 케른이라는 신부님이셨습니다. 그 신부님께서는 매우 온화한 인품을 지니고 계셨을 뿐 아니라, 박사 학위를 두 개나 소지하신 재원이셨음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청소를 자진해서 담당할 정도로 겸손하셨던 분으로, 한국 신부, 신학생들에게 특히 많은 사랑을 보여주셨던 분으로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신부님의 인품에 호감을 가졌던 탓인지, 아니면 기초신학의 중요성 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국에서 온 십 삼사 명 정도의 신부 신학생들 중에서 기초신학을 공부하던 사람의 수가 동시에 무려 여섯 명이나 될 때가 있었습니다.
기초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기초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을 은근히 내비치는 마음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케른 신부님을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그들을 '케른 학파'라고 불렀고, 기초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 말에 약간의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납니다. 그런데 기초신학이 아닌 조직신학을 공부하고 있던 어떤 신학생이 하루는 무슨 심통이 났는지 그 말을 아주 강하게 부정하고 나섰습니다. "학파라는 것은 지향하는 것과 방법이 같아야 하는 것이지, 단지 한 교수님 밑에서 같은 시기에 공부하고 있다고 해서 형성되는 것은 아니야."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과부 마음은 홀아비가 잘 안다'는 속담을 굳이 들지 않는다 하더라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서로를 가깝게 느낄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단지 처해진 외적 상황이 비슷하다는 사실 하나에 의존하여 형성된 공동체는 영원할 수는 없습니다. 상황이 변한다거나 서로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갈등을 일으킬 경우 그 공동체는 해체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굳이 표현한다면 단지 외적으로 비슷한 상황에 처해진 사람들이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이익공동체'일 따름이지 결코 '운명공동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날 심통을 부렸던 그 신학생은 이러한 사실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적인 일치감에 의한 공동체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나섰던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운명공동체'를 형성시킬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 모두를 궁극적으로 일치시켜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해득실에 상관없이 오로지 한 마음으로 같은 것을 지향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외적인 상황에 달려있는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운명공동체는 우리가 같은 목적을 지향하고, 그것에 따른 우리들 삶의 형태가 닮을 경우에야 비로소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 의하면 우리는 다같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여야 하는 운명공동체에 속해져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에 방해가 되는 모든 요소는 제거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께서 하신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라는 말씀은 결코 예수께서 자신을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마리아의 존재를 부인하려는 것도 우리들이 우리의 형제들을 무시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이라는 절대적인 명제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한 마디로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것은 우리가 자신의 욕심을 가능한 한 억제하여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헌신, 봉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즉 다른 사람을 사랑하여 그 사람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은 어쩌다 한번쯤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우리의 생애를 걸고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잔을 마시고 하느님의 벗이 된 사람
-이기양 신부-
오늘은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열두 명의 사도를 뽑으셨는데 그 중의 한 분이 야고보 사도이지요.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사도입니다. 열두 명의 제자 중에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했던 세 제자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오늘 축일을 맞는 야고보 사도이지요. 요한과 야고보 사도는 형제지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셨던 것을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여주실 때에도 ?’엿새 뒤에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만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마태17,1)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근심과 번민에 싸여 기도하실 때에도 ?’베드로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셨?“(마태26,37)습니다
알다시피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 끝까지 자리를 지켰으나 똑같이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와 야고보는 자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특히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배반했었지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예수님께서 뽑으신 열두 명의 사도들은 똑똑하거나 판단력이 냉철하거나 인망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무식한 어부들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무식하고 절개도 없었으며 욕심에 가득 찬 제자들이 어떻게 그렇게 훌륭한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처음에는 똑똑하지도 못했고 절개도 없었던 제자들이 죽음 앞에서 당당하게 예수님을 증거하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사도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어떻게 그 모든 인간적인 약점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인간적으로 전혀 뛰어나지 않은 사람들이 초대교회의 초석이 되고 복음서를 쓰며,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가 있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어떻게 교육시키셨을까요? 오늘 우리는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야고보 사도와 제자들의 삶을 묵상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가 얼마나 속된 욕심을 품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가 있습니다. 사도의 어머니가 예수님을 찾아와 이렇게 간청하지요.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마태20,21)
욕심이 가득 차 있지요. 다른 제자들도 같았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고 화를 내며 먼저 선수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지요.
그런데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아들들의 출세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다른 제자들도 술렁거리는 이 와중에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으로 놀랐습니다. 전혀 나무라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20,26-28)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시지요. 그 후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는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며 실천으로 보여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13,3-5)
바로 이러한 실천적인 모습이 제자들을 변화시킨 핵심 요인이 되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인내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세 번씩이나 당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부활하신 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결코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나를 사랑하느냐??“(요한21,17)고 세 번씩이나 애정 어린 질문을 각별하게 던지심으로써 배반의 아픔을 사랑으로 감싸 주셨지요. 바로 이러한 실천적이고 사랑을 담아 인내하는 교육 방법이 제자들을 변화시켰던 것입니다. 서투르고 정리되지 않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도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담은 인내와 실천적인 교육 방법에 기인한 것이지요.
우리 대부분은 이렇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지요. 많은 부모들이 자녀를 다그치고 따지고 혼을 냅니다. 이러한 교육 방법은 속시원하고 그 결과가 당장은 눈에 보이는 것 같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하지요. 참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의 마음으로 참고 기다리는 인내에서 비롯됩니다.
아마도 교육자들은 매번 경험할 이러한 교육의 방법을 사목자인 저도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지금도 초등학생들이 여기 앉아있습니다만 유치부 어린이들이 처음 어린이 미사에 와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가히 오합지졸 그 자체입니다. 부모 밑에서 갖은 응석을 다 부리다가 성당에 와서 앉아 있으니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학년초에 보면 자는 놈, 옆 아이와 떠드는 놈, 우는 놈 등 갖거지 모습을 다 볼 수 있지요. 어린이들은 몸을 뒤틀고 움직이면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조용히 해. 자세가 그게 뭐야!?“하고 야단을 치면 깜짝 놀라서 정지한 채 쳐다보는데 그 시간이 딱 3초갑니다. 3초만 지나면 또 난리가 나지요. 그런데 방법을 달리 쓰면 영 다른 결과가 나옵니다. 미사가 끝나고 나면 유치부 어린이들을 향해 칭찬을 해 주는 것입니다.
?’오늘 유치부 어린이들이 제일 조용하고, 미사 태도도 정말 좋았어요.?“
자기들이 떠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아이들이 깜짝 놀라 서로 쳐다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유치부가 제일 조용했지요??“하고 물으면 대답을 못합니다. 두 세 번 물으면 서너 명이 모기 만한 소리로 ?’예.?“하고 대답하고 세 번 네 번 물어보아야 ?’네!?“하고 큰 소리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부터는 떠들지 않습니다. 역시 사람을 바꾸는 것은 야단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마음으로 칭찬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교육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내하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속 시원히 크게 야단 한 번 치고 싹 바뀌기를 바라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야고보 사도와 많은 제자들이 놀랍게 변화될 수 있었던 힘은 예수님이 지니고 계셨던 사랑과 인내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세속적인 욕심을 드러냈던 야고보 사도의 어머니와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인간적인 원의를 이해하시면서 끝까지 사랑으로 인내하시어 섬기는 자의 모습을 찾기까지 승화시켜주셨습니다. 오늘 하루도 많은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서 오는 크고 작은 고통과 부담을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대로 몸소 실천하고 사랑을 담고 기다리는 마음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양승국신부-
<공동체 쇄신과 성장의 비결>
오늘 복음은 그 누군가와 함께 부대끼며, 상처받고, 괴로워하며 그렇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큰 위안을 주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완벽하고 이상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제자공동체 역시 완벽하지도 이상적이지도 않았음을 오늘 복음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제자공동체 역시 너무나도 부족했고, 구성원 상호간에 마음이 맞지 않아 서로들 괴로워했었고, 때로 심각한 균열이 있었음이 확연하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숱한 공동체 가운데, 그나마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로 여겨지는 제자공동체 역시 문제가 있었습니다. 구성원들의 정화되지 않은 신앙, 자기중심주의, 이기주의, 세속주의로 인해 자주 티격태격했습니다.
서로간의 이권, 알력, 시기심, 질투심이 첨예한 대립각을 세웠습니다. 서로간의 경쟁심, 권력욕으로 치열한 심리전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은 야고보 사도 같은 경우도 보십시오. 어머니까지 동원해서 예수님께 인사 청탁을 강요합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서거든 ‘물 좋은’ 자리 하나를 미리 부탁드리고 있습니다. 그 표현이 너무도 노골적이고 직접적이어서 제 얼굴까지 다 후끈거립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다른 열 제자들이 또 가만있지 못하고 따집니다.
우리가 그리도 염원하고 꿈꾸는 완벽한 공동체는 이 세상 어디 가도 없습니다. 완벽한 상호일치, 완벽한 평화, 완벽한 친교, 완벽한 나눔과 섬김이 이루어지는 성화된 공동체는 ‘꿈’, 혹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본성상 부족한 인간들이 모인 공동체, 부족한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리도 부족했던 제자 공동체였지만, 머지않아 철저하게도 쇄신됩니다.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날로 거듭납니다. 끝도 없이 성장합니다.
그 배경이 무엇일까요?
제자공동체는 비록 부족했지만, 그 중심에 늘 스승 예수님께서 자리하고 계셨습니다. 제자공동체는 비록 형편없었지만, 매일 스승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제자공동체는 불안하고 늘 흔들렸지만 그럴 때 마다 스승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 스승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형제를 위해서 목숨까지 바치는 영웅적인 공동체로 새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야고보 사도의 신앙 여정 역시 예수님과 줄곧 함께였기에 비약적인 도약과 상승을 거듭할 수 있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활화산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심사숙고하지 않고 함부로 말을 해서 다른 제자들에게 상처도 주었습니다.
야고보는 다른 제자들보다 부유한 가문 출신이어서 그랬는지, 다른 제자들에 대한 우월감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런 연유로 ‘물 좋은 자리’를 청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후에도 야고보 사도는 어머니의 치맛바람을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야고보의 어머니는 이것저것 사들고 자주 예수님과 제자공동체를 찾았겠지요. 그런 과정에서 인사 청탁까지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제자공동체를 떠나지 않았기에, 늘 스승 예수님 가까이 머물렀기에, 그분 가르침에 자신의 전 생애를 맡겼기에 급격한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승에 따르면 야고보는 예수님 승천 이후 복음 선포를 위해 스페인까지 건너갔습니다. 백성들을 현혹시키던 헤르모게네스란 유명한 마술사와 용감하게도 정면 대결을 펼쳐서 승리하고 그를 회개시킵니다. 자신을 박해하던 요시아스란 율법학자를 개종시키기도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AD 44년경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예루살렘에서 참수 당함으로써 사도들 가운데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의 뛰어난 지도력과 복음 선포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열정, 깊은 신앙, 유다와 사마리아 전역에 널리 알려진 그의 이름에 위기감을 느낀 헤로데 아그리파는 야고보를 처형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입니다.
-이석희 신부-
오늘은 성야보고사도 축일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성야보고사도는 베싸이다 출신으로서 제배대오의 아들이며 요한사도의 형입니다. 또한 야고보사도도 베드로사도와 같이 갈릴레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예수님을 따르던 사도중의 한분이시며 훗날 열 두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유대인들의 돌에 맞아 순교하신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야보고 사도의 어머니는 훗날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실 때 두 아들인 야보고사도와 요한사도를 오른편과 왼편에 각각 자리 잡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자리가 갖고 있는 의미를 설명하시면서 함께 고난의 잔을 마셔야 함은 물론이고, 높은 이가 되고자 한다면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함을 설명하시면서 몸소 그 뜻을 실천하려고 오셨음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모든 어머니가 그러하듯 자식을 위해서 애쓰시는 모습이라고 이해 하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영광만을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단 야보고와 요한 사도의 어머니만이 아니라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고통 없는 영광을 기대하고, 단순히 축복과 기쁨만을 바라면서 하느님을 섬기고 따랐는지 반성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우화가 있습니다. 한 여인이 꿈을 꾸었는데 시장에 가서 새로 문을 연 가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게 주인은 다름 아닌 하느님이셨습니다. 이 가게에서 무엇을 파느냐고 여인이 묻자 하느님이 대답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가슴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팝니다.” 이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여인은 한참 생각 끝에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사기로 마음을 먹고 “마음의 평화와 사랑과 지혜와 행복 그리고 두려움으로 부터의 자유를 주십시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미안하지만 가게를 잘못 찾으신 거 같군요. 이 가계에선 열매를 팔지 않습니다. 오직 씨앗만 팔지요.”
실상 우리는 나의 삶에 좋은 것만을 주시기를 끊임없이 기도하고 바라면서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바람이 나에게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하느님을 원망하거나 멀리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과 이 우화는 그에 대한 반성의 기회를 준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하느님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바라는 것을 주시고 계십니다. 다만 그 바람의 시간과 장소가 우리의 생각과 다를 뿐입니다. 주시는 분께서 시간과 장소를 정하시는 것이지 받는 사람이 그것을 정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 생각에 따라 그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면 우리가 마셔야 할 잔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받을 그릇도 필요하지만 어려움과 십자가 고통을 받을 잔도 필요합니다. 축복의 그릇과 고난의 잔은 서로 상반된 관계가 아니라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고통없는 영광은 빛이 나지 않고 영광없는 고통은 우리에게 삶의 무게만 더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서 높은 가치를 알게 됩니다. 이것을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은 삶 전체를 통해서 섬기는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셨고 마침내 자신을 바쳐 우리를 높은 위치에 올려 놓으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자 하는 이들에게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희도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라고 말입니다. 용기를 내어서 "예, 마실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힘든 삶의 여정도 헤쳐 나갈 수 있으며, 그 분이 원하신 시간에 주시는 축복에도 깊은 감사를 드릴 수 있으며 늘 첫째가 되고자 하는 열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평화롭고 기쁘게 만들어 줍니다. 아멘.
진정한 봉사
-허영업 신부-
거리에서 일을 하는 청소부가 있었는데 하루 종일 자기 집 마당을
치우듯 항상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늘 미소를 머금은 채 땀을 흘리며 일하는
그가 청소하는 거리는 항상 깨끗했습니다. 어느 날 지나가던 사람이
“참 행복해 보이십니다. 이런 어렵고 궂은 일에 만족하십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제가 하는 청소일이 더러운 지구의 한 구석을
깨끗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 일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진정으로 첫째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냥 살지 않고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다른 이에게 도움을 주는 삶이어야 합니다.
인생을 보람 있고 가치 있게 사는 길이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삶처럼
더 멋지고 가치 있는 삶이 있을까요?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봉사하는
비천한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죽기까지 낮추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닮아서 겸손하게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하는 종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첫째의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낮은 곳에서 섬기기
-여상훈신부-
오늘 예수님 말씀이 전에 없이 준엄합니다. 당신을 따르려면 그분이 겪으실 처참한 죽음도 함께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백성 위에 군림하는 통치자, 세도를 부리는 고관대작들을 질타하십니다. 그리고 목숨을 바치는 것으로 너희를 섬길 테니 너희는 어떻게 하는 게 옳겠느냐고 태산 같은 요구를 하십니다. 달리 읽으면, 온 백성을 발 아래 둔 통치자와 고관대작들은 그 백성의 심사를 편하게 하기에 노심초사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꼭대기에 올려주면 섬기겠다는 사람들한테는 참 따르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언젠가 동료들과 겨울 산행을 하다가 폭설을 만나 강원도 어느 절에서 사흘을 갇혀 지낸 적이 있습니다. 밖으로 통하는 길이 끊긴 절은 적막했습니다. 연세 많으신 주지 스님과 서른쯤 되어 보이는 젊은 스님은 거의 불청객에 가까운 우리 일행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셨습니다. 먹이고 재우는 건 물론이고, 빨래하고 목욕할 물을 끓이는 것도 모자라 저녁마다 강정까지 한 소쿠리씩 주셨습니다. 셋째 날 오후에 보온병 하나 가득 꿀차를 넣어주고 돌아서시는 주지 스님께 일행 중 하나가 농담 삼아 여쭈었습니다. “아니, 주지 스님, 이러다 이 절 파산하겠습니다. 저희를 너무 모시는 것 아닌지요?” 흘낏 눈길을 주시는가 싶은데 퉁명스런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자네들이나 개나.” 아니, 이 무슨 말씀? 혹 대단한 선문답이라도 나누어 주신 것인가 싶어 흥미진진해진 우리는 젊은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강아지가 밥을 안 먹으면 노스님은 그놈을 방에 들여놓고 밥을 씹어 먹이시거든요. 생명 있는 모든 것을 극진히 섬기는 그분한테는 여러분이나 강아지나 똑같은 거겠지요.” 머리가 맑아지는 통쾌한 대답이었습니다.
목숨도 걸어야 하고, 체면 안 서게 보통 사람들의 땅으로 내려서서 그들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니 예수님 말씀 실천하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온통 그런 역설적인 요구로 가득합니다. 어린아이 같아야 천국이 허락되고, 가난하고 병든 이가 오히려 귀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섬기는 사람이 섬김을 받게 되고, 종으로 일하는 사람이 첫째가 된다고 하십니다. 당연하신 말씀 같지만 세속의 상식에서는 한참 먼 말씀이라 어렵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과 낮에 온 사람과 해질 무렵에 느지막이 출근한 사람이 모두 같은 임금을 받는다는 예수님 식 셈법 다음으로 어려운 말씀 아닌가요. 그래서 무조건 섬겨보겠다고 맘먹은 적도 있지만, 제게는 실천이 어려운 일입니다. 사랑이 부족해서 그럴 것입니다. 강아지를 불쌍히 여겨 극진히 모시다가 언젠가는 붓다의 경지에 오르셨을 스님이 부러운 시간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양승국신부-
<교회 내 권위에 대한 올바른 인식>
규모가 꽤 큰 단체 하나가 파행을 거듭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본 적이 있습니다. 파행의 가장 큰 원인은 구성원간의 분열이었습니다. 주도권 획득을 위해 벌이는 두 세력 간의 다툼은 그야말로 이전투구(泥田鬪狗)였습니다. 진흙탕 속에서 개 두 마리가 서로 물어뜯으며 뒹구는 모습과 어찌 그리 흡사하던지요.
이러한 분열과 다툼의 한 가운데 그 단체의 최고책임자의 그릇된 처신이 있더군요. 그는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었습니다. 또한 독선적이었습니다.
큰 단체의 최고 책임자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우선 큰 어른으로서 말을 좀 아껴야 좋지요. 문제가 생길 때 이 사람 말, 저 사람 말에 솔깃하지 말고, 한 걸음 물러나서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서로 화해할 수 있도록 중재도 하고, 격려도 하고, 그래야 정상이지요. 그런데 이분은 그게 잘 안됐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조직이 크다보니 자기 밑에 여러 중견간부들이 있는데, 그들도 자신들의 몫을 할 수 있도록, 상호보조성의 원리에 따라 권한에 대한 분배도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습니다.
다독거리고, 격려하고, 덕담이나 좀 해주면서 큰 물줄기만 잡아주면 되는데, 쫌생이처럼 이것 저 것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려니, 아랫사람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권위’란 글자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어떤 생각입니까? 일단 거부감, 부담감, 껄끄러움 등등 부정적 느낌이겠지요?
아마 우리가 너무나 오랜 세월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많은 고초를 겪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권위주의’와 ‘권위’는 엄연히 다른 의미입니다.
권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사전적 의미로는 이렇습니다.
‘어떤 한 사회적 존재가 다른 타자에 비해 우월적 가치를 소유한 자임이 사회적으로 승인되어 타자의 행위를 좌우할 수 있는 능력.’
이러한 권위가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 좀 더 특별한 색채를 지니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행사되는 권위의 원천은 한 개인이나 집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통용되는 권위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께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지니고 있는 크나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권위에 대한 그릇된 인식입니다. 그로 인해 교회 구성원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구성원들이 받는 상처 역시 심각합니다. 권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폐해입니다.
권위에 대한 타당하고 올바른 인식,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권위에 대한 적절한 인식은 다른 무엇에 앞서 성경으로부터 구해져야 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참목자로서 교회 공동체의 중심이 됩니다. 그분만이 유일하게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며 스스로를 전권을 지닌 존재로 선언할 수 있습니다. 그분만이 교회 공동체의 중심에 서계시며 그 누구도 그의 독보적인 존재론적 위상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권위는 공동체의 일치, 진실된 가르침과 전통의 보존, 교회 사명의 완수를 위해서만 행사되어야 합니다. 이 한계를 벗어나 무한하게 확장된 권위는 교회 각 구성원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체, 교회내의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손상시킬 것입니다.
사목자들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수제자 베드로에게 맡긴 양들은 예수님의 양들이었지 베드로의 양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너의 양들’을 돌보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의 양들’을 돌보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을 위한 목자는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따라서 그로부터 권위를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등한 존재론적 위상을 공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세상에 행사하시는 구원활동에 대한 직무를 위임받은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권위는 다른 목적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기 위한 수단임을 명백히 하고 계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생명 넘치는 술잔
-김찬선신부-
오늘의 첫 번째 독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 담긴
보물에 대한 얘기로 시작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간을 우선 그릇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무엇을 담는 그릇......
얼마나 적절하고도 심오한 비유인지 모릅니다.
저는 우리 인간을 표현할 다른 적절한 비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마더 데레사는 자신을 주님 손의 몽당연필이라고 하였는데
연필, 종이, 막대기, 몽둥이, 칼, 도마, 빗자루, 쓰레기통, 걸레, 촛불 등
어떤 것이 가장 적절할까 생각해봤는데
그릇처럼 적절한 비유가 없었습니다.
그릇은 우선 담는 것입니다.
무엇을 담는가, 이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독서의 말씀처럼 보물을 담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쓰레기와 똥물을 담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욕심으로 채우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온갖 쓰레기와 욕심을 비워내고 빈 그릇으로 있습니다.
그릇이란 결국 만족과 공허의 인간 존재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세속의 욕심으로 채우면 언젠가는 반듯이
스스로건 다른 사람에 의해서건
비워내야 하는 허무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러나 비울 때 채워지는 것이 그릇이고
궁극적으로는 보물로 채워지는 만족스런 그릇, 행복한 그릇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그릇은 그릇이로되 질그릇이라고 합니다.
귀한 그릇이 아니라는 뜻도 되고, 깨지기 쉬운 그릇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릇 자체로 고귀한 금으로 된 그릇이나 보석이 박힌 잔이 아닙니다.
존재 자체가 허약하기 이를 데 없고
담긴 내용물이 귀하지 않으면 그 자체로는 똥 그릇이 될 수도 있고
아무 쓸모가 없는 쓰레기일 수도 있습니다.
약하고 소박하더라도 보물을 담고 있다면 다행인데
그릇도 형편없고 담긴 것도 형편없을 수 있고
아예 아무 것도 담을 수 없게 깨어진 그릇일 수 있습니다.
깨어진 그릇, 똥 그릇, 보물단지 중에 우리는 지금 어떤 그릇일까요?
보물단지가 아니라 욕심으로 가득 찬 똥 그릇은 아닐까요?
욕심으로 차 있다면 어떤 욕심으로 가득 차 있을까요?
오늘의 야고보 사도처럼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을까요?
오늘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야고보에게 주님은
내가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물으십니다.
그리고 마실 수 있다고 장담하는 야고보에게 주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당신처럼 섬기라 하십니다.
그런데 형제들을 섬긴다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섬긴다는 것은 형제들 밑에 있는 것입니다.
위에서 형제들을 자기 입맛대로 좋다 나쁘다 평가하고
자기 입맛에 맞게 이렇게 저렇게 요구하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들의 입맛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고, 그리하여
수난의 쓴잔을 마시는 것입니다.
“에잇, 더러워서 못해 먹겠네!”하고
하인 노릇의 쓰디씀을 뱉어버리지 않고
모든 형제들을 받아들이고 받드는 것입니다.
이런 형제도 좋고, 저런 형제도 좋다고
어떤 요구를 어떻게 해와도 좋다고
형제들을 주인으로 받드는 것입니다.
형제들에 대해 뭐 저런 것이 있어 하고 쓰레기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주인님, 나의 보물로 받드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을 보잘 것 없는 질그릇으로 생각하며
그럼에도 귀한 형제들을 모시고 섬길 수 있음을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형제들을 보물로 여길 때,
내가 형제들을 예수 그리스도처럼 보물로 여길 때
사실은 전에 쓰레기 같던 형제들이 이제 나에게 보물이 되는 것이고
전에 쓰레기더미 가운데 살던 내가
이제 보물 가운데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형제를 섬기기 시작하면
질그릇 같은 내 안에 보물을 담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욕심을 부리며 살 때는 죽음이 자리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기를 죽이니 생명이 질그릇 안에 넘칩니다.
하느님의, 그리고 사람의 사람
-상지종신부-
모든 이는 낮은 자리 찾는 이를 겸손한 사람이라 칭찬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 앞에서 낮은 자리 찾는 것은 쉽습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모든 이는 봉사하는 이를 아름다운 사람이라 칭찬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 앞에서 봉사하는 것은 쉽습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봉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모든 이는 환한 웃음 짓는 이를 밝은 사람이라 칭찬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 앞에서 웃음 짖는 것은 쉽습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마음으로 웃는 것입니다.
모든 이는 다른 이를 위해 생명을 바치는 이를 고귀한 사람이라 칭찬합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는 것은 쉽습니다.
정작 어려운 것은 외롭지만 의로운 죽음을 사는 것입니다.
높여주는 이 없을 때 오히려 기쁘게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봉사한 적 없어요, 단지 삶일 뿐이지요'라며 수줍은 웃음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마음의 웃음이 자연스레 드러나 웃음 가득한 얼굴이 어색하지 않는 사람이,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 자신의 삶인 사람이,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사람의 사람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 참된 제자의 도 : 겸손과 섬김의 삶
-박상대 신부-
오늘은 12사도 중의 하나이며 성 요한 사도의 형인 야고보 사도의 축일입니다. 예수께서는 인류구원을 위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을 제자로 불러 당신을 따르게 하시고, 그 중에서 열 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시는데, 12사도의 이름은 시몬 베드로,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 야고보의 동기 요한,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 필립보, 바르톨로메오(나타나엘), 마태오, 토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타데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가리옷 사람 유다입니다.(마르 3,13-19; 마태 10,1-4; 요한 1,35-51 참조)
여기서 우리는 오늘 축일을 맞는 야고보성인과 5월 3일이 축일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성인을 구별하기 위하여 전자를 성 야고보(대), 후자를 성 야고보(소)로 구별합니다. 그는 베싸이다 태생으로 어부였던 아버지 제베대오와 어머니 살로메의 아들입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그물을 던지고 있던 시몬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를 제자로 삼으신 직후, 아버지 제베대오와 더불어 그물을 손질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제자로 삼았습니다.(마태 4,18-22)
야고보는 44년경 헤로데 아그리파 1세에 의해 참수됨으로써 12사도 중 첫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으며, 전승에 의하면 성인의 시신은 스페인의 산티아고 콤포스텔라에 안장되었고, 오늘날 여기에 대성전이 서 있습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야고보 사도는 애제자로 통하는 자기 동생 요한과 수제자인 베드로와 함께 셋이서 자주 등장합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마다 예수께서 이 세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가신 것을 보면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생각이 각별했던 모양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의 영광스럽게 변한 모습을 이들에게만 보여주셨고(마태 17,1-8; 마르 9,2-8; 루가 9,28-36),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도 예수께서는 이 세 사람과 그의 부모만 따로 데리고 방에 들어가 아이를 소생시키는 기적을 목격하게 하셨습니다.(마르 5,21-43; 마태 9,18-26; 루가 8,40-56) 뿐만 아니라 최후의 만찬을 거행하신 예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려가시어 게쎄마니 동산에서 고통과 번민에 싸여 기도하며 보내신 마지막 시간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마르 14,32-42; 마태 26,36-46; 루가 22,39-46)
마르코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보아네르게스"(천둥의 아들)란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하는데(마르3,17), 그 이유는 루가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날이 가까이 왔음을 아시고 예루살렘으로 상경하는 길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마을에 묵어가기 위하여 선발대를 보냈으나 거절당하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그들을 불살라 버릴까요?" 하고 묻습니다.(루가9,51-54) 물론 두 사람은 예수님께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었는데(루가9,55), 그 꾸지람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오늘 복음에도 거듭됩니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의 원전(마르 10,35-45)을 그대로 베낀 것인데, 딱 한 군데만 고쳤습니다. 즉, 마르코는 야고보와 요한이 직접 예수께 와서 도래할 주님의 나라에서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 자리를 각각 주시기를 청했다고 하지만, 마태오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어머니와 함께 와서는 어머니가 예수께 청을 드리는 것으로 고쳤습니다.
마르코와 마태오의 예수님 수난사를 종합하면 이 어머니의 이름은 살로메인데(마르 15,40; 마태 27,56), 왜 마태오는 느닷없이 죄 없는 어머니를 이 장면에 끌어넣었을까요?
그 이유는 의외로 간단한데, 마태오는 예수님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야고보와 요한의 체면을 생각하였고, 사도단 가운데서 그들이 차지하는 명예를 지켜주려 한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타 섞인 말씀은 어머니를 건너 뛰어 두 제자에게 향합니다.(22-23절) 또한 다른 열 제자들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화를 냅니다.(24절) 그렇다면 나머지 열 제자들이 화를 낸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문제의 발단은 사실상 앞서 간 복음에 있는데, 우선 "부자청년과 낙타와 바늘귀"(마태 19,16-26)의 대목을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예수께 자기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니 무엇을 받게 될 것인지를 묻자,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따랐으니 새 세상이 와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하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19,27-28)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 백 배의 상과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라고 했으니 제자들의 마음이 얼마나 들떠 있었고 뿌듯했겠습니까? 열 두 제자들은 제각기 속으로 주님의 좌우자리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태가 이쯤 되면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20,17-19)도 그들에겐 들리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모두를 불러놓고 참된 제자상을 가르치십니다. 참된 제자란 봉사하는 자이며, 종 중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 옥좌의 자리는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야고보 사도처럼 순교로 목숨을 내어놓은 후에 받게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참된 제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저 종으로서 봉사해야 하는 일만 있을 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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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복음묶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