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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러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
(마태오 13,47-53)
The Kingdom of heaven is
like a net thrown into the sea,
which collects fish of every kind.
When it is full they haul it ashore
and sit down to put what is good into buckets.
What is bad they throw away.
말씀의 초대
모세가 주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짓고 그 안에는 증언판이 담긴 궤를 들여 놓고 휘장으로 증언 궤를 가렸다. 그러자 구름이 장막을 덮는다.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시는 주님께서는 광야에서 성막을 통해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신다(제1독서). 밀밭에 가라지가 있는 것처럼 세상에는 종말 때까지 악인과 선인이 공존한다. 종말에 선인은 구원되고 악인은 멸망한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선을 택하고 악을 멀리하라고 가르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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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는 누구나 약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이 아니고 불완전한 피조물이기에 결핍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약점과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수없이 결심을 하고 다짐을 해도 작심삼일(作心三日)이라는 말이 있듯, 자신이 가진 악습이나 문제들을 고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문제를 없애려 하기보다 건강한 삶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 몸 안에는 수많은 해로운 바이러스들이 잠복해 있지만 몸이 건강하면 질병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수많은 결점들을 안고 살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고 좋은 점들을 살려 나가면 우리의 결점들은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배우자를 바라볼 때도, 이웃과 맺는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약점과 문제들이 더 잘 보입니다. 약점을 지적하고 고쳐 주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 사람을 더 나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칭찬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어서 그 사람 안에서 악의 세력이 일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선을 키워나가면 악은 저절로 힘을 잃고 맙니다. 우리가 이 땅에 하늘 나라를 세우려면 악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다는 선을 키워 나가려고 더욱 노력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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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말씀은 하늘 나라에 대한 비유입니다. 공로가 많아야 간다고 배운 곳입니다.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완벽한 이론’도 아닙니다. 하늘 나라의 판가름은 ‘주님의 뜻’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허락하셔야 가는 것이지, 우리가 정한 ‘법칙’에 의해 가는 것은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천국은 사람의 영역이 아닙니다. 온전히 하느님께 속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허락이 핵심입니다. 인간이 규칙을 정해 놓고 허락을 강요한다면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복음의 교훈은 이 사실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하늘 나라는 쟁취가 아니라 주님의 선물임을 기억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니 언제라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은 우선적으로 일치에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일치가 ‘그분 가르침’의 기본을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히 가족 안의 일치는 ‘세상에서 천국을’ 시작하는 첫걸음입니다.
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지난날 옳았던 것이 부정되기도 하고, ‘지난 시절’ 멀리했던 것들이 새로운 가치관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선택과 실천’에서 망설여지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그만큼 주님의 가르침이 절실한 시대입니다. ‘일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그분의 뜻은 우리를 인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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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은 끝판입니다. 한 단락이 끝나고 새판이 시작되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져 버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의인이겠습니까?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어부는 그물에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결정은 어부가 합니다. 종말의 결정권은 주님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좋은 고기는 싱싱한 고기입니다. 어부에게 만족감을 주는 고기입니다. 이웃에게 기쁨을 주는 이가 주님께도 기쁨을 드립니다.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가 주님께도 사랑받습니다.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받는 이가 마지막 날에 의인이 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종말은 점검의 날입니다. 사랑과 기쁨을 점검받는 날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는지, 얼마나 기쁘게 살았는지 점검받는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종말을 통하여 당신의 가르침을 마무리하실 것입니다. 세상에 가득 찬 당신의 뜻을 매듭짓고 새로운 세상을 여실 것입니다.
마무리를 위협적으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종말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우리 역시 제자들처럼 “예!” 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종말이 완성임을 고백하는 행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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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우리 사이는 창조주와 창조물의 관계입니다. 옹기장이와 옹기의 관계와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권한을 모두 장악하고 계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권리를 이렇게 옹호합니다. “작품이 제작자에게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는, 옹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한 덩이는 귀한 데 쓰는 그릇으로, 한 덩이는 천한 데 쓰는 그릇으로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로마 9,20-21)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제 재주로 만들기를 마음대로 해서, 만들고자 하면 만들고, 말려고 하면 말고, 크게 하려면 크게 하고, 작게 하려면 작게 하는’ 장인과도 같습니다(정약종의 ‘주교 요지’ 참조). 그러나 장난감을 가지고 놀다가 쉽게 부수어 버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분은 아니십니다. 오히려 당신께서 창조하신 것을 좋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당신께서 창조하신 인간을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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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들은 그물의 비유는 두려운 가르침입니다. 바다의 그물을 끌어 올려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버린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버려지는 고기와 같은 처지가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만치 오는 비를 미리 뛰어가 맞을 필요는 없습니다. 종말의 선택은 우리 몫이 아닌 까닭입니다. 주님께서 선택하시도록 올바르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의 교훈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연옥 종신형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돌아보아도 자신에게 너무한 판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명도 잘 지켰고, 하느님을 모독하거나 사람을 괴롭힌 일도 기억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저는 일생을 잘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기억나는 죄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연옥 종신형을 받아야 합니까?”
그에게 돌아온 답변은 이러하였습니다. “그래. 너는 네 말대로 일생 나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너는 사람들에게 있거나 없거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그게 네 잘못이다.”
하늘 나라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선택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의 뜻을 찾는 적극적인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그물이 끌어 올려졌을 때 우리가 그릇에 담겨지는 고기가 될지 버려지는 고기가 될지는 현실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양승국신부-
<괜찮은 횟감이 됩시다>
오늘 복음은 저희 같은 ‘꾼’들에게는 유난히 실감나게 다가오는 복음입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출조하지만, 설레는 마음을 충족시키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잘 이해 안 되는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회칼이며 도마며 초고추장이며, 매운탕에 넣을 갖은 양념들을 잔뜩 챙겨갈 때 치고 제대로 고기 잡히는 법이 없습니다.
의외로 그냥 바닷바람이나 한번 쐬고 오지, 하며 마음 비우고 나갔을 때 손맛을 톡톡히 보곤 합니다.
별로 재미를 못보고 있을 때, 더 속상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안 그래도 공치고 있어 잔뜩 우울해있는데, 지나가던 분이 빨리 지나가지 않고 뒷짐 지고 한참 쳐다봅니다. 그리고는 뭐가 좀 잡힙니까, 하고 묻습니다. 참으로 창피하고 난감합니다.
그래도 이런 분은 양반입니다. 어떤 분은 남의 허락도 없이 잔챙이만 몇 마리 들어있는 어망을 확 들쳐보며 ‘에게게!’ 하며 비웃습니다.
더 재수 없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복어새끼입니다. 이게 뭔가 하고 끌어올려보면 복어새끼입니다. 제 깐에 위협하느라 배를 있는 대로 잔뜩 부풀립니다. 23cm 미만의 우럭 잔챙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만 잔뜩 커서 회 떠봐야, 별로 먹을 게 없습니다.
이런 녀석들은 잡자마자 멀리 던져버립니다. 그럼 기다렸다는 듯이 갈매기들이 날아와서 잽싸게 채 가버립니다.
반대로 5-600g 정도 나가는 듬직한 감성돔이나 우럭, 솥뚜껑만한 광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합니다. 대견스럽기도 해서 몇 번이나 들어보고 쳐다보고, 나중에는 고이 아이스박스에 잘 챙겨 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똑같은 비유를 드십니다. 좋은 것들, 회 떠서 먹을 만한 녀석들, 매운탕이라도 끓이면 괜찮은 녀석들은 그릇에 담고, 별 볼일 없는 녀석들, 회감도 매운탕꺼리도 안 되는 녀석들, 독이 있어 잘못 먹었다가는 큰 일 날 녀석들, 이상하게 생겨서 검증 안 되는 녀석들은 죄다 던져버립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괜찮은 횟감이나 매운탕꺼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괜찮은 횟감이나 매운탕꺼리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노력이 어떤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부족해도 상관없습니다. 허물이 많아도 괜찮습니다. 지은 죄가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제의 나를 딛고 변화되고자 몸부림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과거의 나를 뒤로 하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어제의 나와 결별한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떠나 변화되고 쇄신되고 큰 물고기가 되기 위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장을 원하지만 본질적으로 변화되기를 두려워합니다.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을 원하지만 껍질을 깨는 아픔을 거부합니다. 익숙한 곳, 친숙한 대상을 선호하지 새로운 환경, 낯선 사람과의 만남, 새로운 세상에 대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다른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익숙한 문, 매일 다니는 문을 포기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마지막 날
-전삼용신부-
제가 아는 한 신부님께서 약속이 있어 나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사무실에서 전화가 와서 병자성사가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사제는 병자성사가 들어오면 자다가도 바로 나가야합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과 약속을 하고 나가시던 중이라 그 가정에 전화를 하여 사정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약속이 끝난 후 두 시간 정도 뒤에 가도 되겠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가족들은 상관없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위독해서 신청한 것이 아니라 가족이 다 모였기 때문에 신청한 것이니 나중에 오셔도 상관은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에 임박한 어떤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시간 뒤에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그 분이 임종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가족들이 그렇게 말한 것 때문에 마지막 성사를 받지 못하셨습니다. 가끔은 우리가 죽음의 시간을 예측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착각입니다.
미국의 한 설문조사에서 사람들에게 “앞으로 당신의 수명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 불쌍한 사람들을 돕겠다든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과 화해하겠다든가 하는 대답을 하였습니다. 집, 땅 등을 사거나 비자금을 조성한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실제로는 이 설문조사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바로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죽음의 시간을 은근히 뒤로 미루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았던 이태리의 한 자매님은 암에 걸려 3개월의 시간을 받았습니다. 그 분은 그 시간동안 병원에 있기를 거부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하루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그렇게 크게 아프지도 않고 2년 정도를 성녀처럼 살았습니다. 그분의 장례미사 때는 사람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시장님조차도 앉을 자리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에 그만큼 큰일을 하고 돌아가실 수 있었던 이유는 하루를 ‘나의 마지막 날’처럼 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마지막처럼 산다면 몇 배로 가치 있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심판은 어부가 고기를 그물로 잡아 그 잡힌 고기들을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나누어 좋은 고기는 추슬러 그릇에 담고 나쁜 고기들은 내버린다고 하였습니다. 곡식이야 익으면 단체로 수확을 하지만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은 성숙한 물고기를 비롯하여 송사리까지 걸려듭니다.
물고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었건 한 번 그물이 내리면 그 곳에 있는 고기들은 싹 잡힙니다. 예고도 없이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언제 그물이 들이닥치더라도 걱정할 것 없는 좋은 물고기로 살고있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심판관으로써 아무런 일도 하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미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나누어져 있기 때문에 천사들을 시켜 그들을 추려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심판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쌓아놓은 공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 내가 어떤 존재인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내가 아무리 봉사를 많이 했어도 지금 냉담자라면 지금까지 해 놓은 것들은 나의 구원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빨리 고해성사 보는 것이 유일한 길일 것입니다.
한 신학생이 집이 어려워져 신학교 등록금을 낼 돈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신학생은 밤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였습니다. 두 달을 해서 겨우 부족한 금액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몇 년이 흘러 이 신학생이 부제가 되었고 부제 실습으로 봉성체를 나가게 되었습니다.
한 폐암 말기 암 환자가 있어 그에게 병자성사를 해 주었는데 그 분이 아는 척을 하였습니다. 그 부제는 누군지 잘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 분이 이야기 해 주고서야 알았습니다.
그 분은 전에 아르바이트 하던 가게의 사장님이었고 신학생은 밤에만 일해서 몇 번 마주치지는 못했지만 그 때 그 학생이 너무 성실해서 그가 믿는 천주교를 믿어보기로 했고 지금 이렇게 죽기 직전에 그 학생을 다시 만나 병자성사를 받게 된 것입니다.
아마 그 때 이미 암이 그 분 속에서 자라나고 있었는지 모르고 그래서 주님께서 그 신학생을 그 분께 보내 주어 마지막 기회를 주셨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우리는 소중한 기회를 놓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의 그물이 나에게 들이닥친다 해도 내가 좋은 고기로 분리될 수 있도록 매일을 내 인생의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살아가야겠습니다.
바로 지금
-황지원 신부-
예수님과 함께한 제자들의 면면을 바라보면, 세상에서 크게 출세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 역시 대부분은
참으로 가난한 사람들, 세상에서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말씀은 그들에게 기쁜 소식이 되고 있고, 또한 하늘 나라의
시작은 그들에게 희망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그분께서 선포하신 하늘 나라는 우리의 이상이며 희망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 기쁨의 하늘 나라가 바로 지금입니까? 혹시 그 하늘 나라가 지금이 아닌,
언젠가 올 미래의 일로만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늘 나라는 온갖 물고기를 모아들이는 그물과 같습니다. 내가 기대하고
바라보는 그 순간에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시작하고, 결정하시는
순간에 우리에게 다가오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간을 항상 미루며
준비하지 못한 채 그분 앞에 다가서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참으로 사랑하고 기다리던 그분의 손에 모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그분 앞에 끌려가 서게 될지도 모릅니다. 하늘 나라는
나중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그분의 그물이 우리를
모아들이고 이끌어줍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 그분의 말씀이 지금의
우리에게 희망이 되고 기쁨이 되는 것, 그것이 하늘 나라의 그물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고, 지금 이곳에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사는 방법입니다.
순지르기
- 박후임 목사-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에 비유하면서 세상 끝 날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하신다. 그물이 바다 속에 있을 때는 그물 안에는 온갖 종류의 고기가 있지만 물가로 끌어올렸을 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된다는 말씀을 통해서 말씀을 듣는 이들에게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들여다보게 하신다. 지금이 곧 세상 끝 날이라는 자각으로 살아야 하늘나라를 사는 것이라고.
농사를 배운 지 4년이 되어가는 데도 서툰 것이 많다. 농사는 평생 배워야 하는 공부가 아닐까 싶다. 밭을 만들고 씨앗을 심는 것은 때만 잘 맞추면 그리 어렵지 않다. 내가 잘못하는 것은 바로 ‘순지르기’이다. 거의 모든 작물이 열매를 맺기 시작할 때 하는 것이 순지르기이다. 어떤 작물은 좋은 열매를 위해서 원순을 지르기(잘라내다) 하고, 어떤 작물은 곁순을 지르기도 한다. 이파리가 아깝다고 순지르기를 하지 않으면 튼실한 열매, 많은 열매는 기대할 수가 없다.
열매는 나중의 일이어서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순을 지르는 과정을 통해 열매를 볼 수 있다. 순지르기를 잘하는 것이 하늘나라를 사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자
-김찬선신부-
“세상 종말에도 그렇게 될 것이다.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저는 오늘 복음에 대해서 ‘맞다.’ 하는 느낌이 선뜻 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천사를 시켜서 한다지만 하느님이란 양반이 마지막 날에
쩨쩨하게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을 하나하나 가리는 짓이나 하실까?
그런 하느님이라면 저는 하느님으로 받들지도 믿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 부모도 못된 부모가 아니라면
잘 살고 잘 하는 자식은 들라 하고
그렇지 않은 자식은 집에 들이지 않는 그런 짓 하지 않으니
하느님은 절대로 그러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누구를 마다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않지요.
하늘나라,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염원과 갈망이 우리게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기득권자마냥
이미 얻은 것, 가진 것 놓지 않으려 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바람이 없습니다.
시큰둥, 이것이 우리의 트레이드 마크입니다.
지금 저희 수도원에 와서 일하시는 분들은 참으로 열심히 하십니다.
내 집 일처럼 성심성의(誠心誠意)껏 하십니다.
어제는 일을 끝마쳐 갈 무렵 내부공사의 책임자 되시는 분이
어질러 놓은 것 치우고 복도에 물걸레질을 하시는 것입니다.
작년부터 저희 수도원 일을 하기 시작하셨는데
그 이후로 전국에 있는 저희 수도원을 돌며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저희 형제들한테 교리도 배우고 영세도 받았습니다.
이 후 이분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고 계십니다.
부부 사이가 아주 좋아졌다고 합니다.
얼굴에 천국을 이미 살고 있음이 보입니다.
저희 일을 하면서 돈 벌 생각은 접어버린 듯 보입니다.
이분은 저희의 작은 사랑을 얼마나 큰 사랑으로 받아들이시는지
사랑을 표하기도 민망할 지경입니다.
이렇듯 새로움을 사시기에 율법학자 같은 저를 부끄럽게 합니다.
태양 아래 아무 새로운 것 없다 하며 도사인 척 하지만
이분에 비하면 저는 진정 늘 새로움을 사는 데 실패한 인생이지요.
그래서 주님은 오늘 복음에서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 것도 꺼내고 헌 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다”고 하시는데
옛날 것만 가득 들어차 있고 새 것은 없어
노상 나오는 것이 옛날 타령만 하는 늙은이가 되지 말고
새로움을 받아들이라고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옛것이 율법이라면
새로움은 다른 것이 아니고 사랑의 계명이겠지요.
늦게야 사랑을 배우고 깨달았지만
작은 사랑을 크게 받아들이고
위선 떨지 않고 사랑하는 이 분에게서
하느님께서 매일 새롭게 주시는 은총들을
새록새록 받아들이며 살라는 자극을 받으며 요즘은 살아갑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양승국신부-
<괜찮은 횟감이 됩시다>
오늘 복음은 저희 같은 ‘꾼’들에게는 유난히 실감나게 다가오는 복음입니다. 설레는 마음을 가득 안고 출조 하지만, 설레는 마음을 충족시키기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잘 이해 안 되는 희한한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회칼이며 도마며 초고추장이며, 매운탕에 넣을 갖은 양념들을 잔뜩 챙겨갈 때 치고 제대로 고기 잡히는 법이 없습니다.
의외로 그냥 바닷바람이나 한번 쐬고 오지, 하며 마음 비우고 나갔을 때 손맛을 톡톡히 보곤 합니다.
별로 재미를 못보고 있을 때, 더 속상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안 그래도 공치고 있어 잔뜩 우울해있는데, 지나가던 분이 빨리 지나가지 않고 뒷짐 지고 한참 쳐다봅니다. 그리고는 뭐가 좀 잡힙니까, 하고 묻습니다. 참으로 창피하고 난감합니다.
그래도 이런 분은 양반입니다. 어떤 분은 남의 허락도 없이 잔챙이만 몇 마리 들어있는 어망을 확 들쳐보며 ‘에게게!’ 하며 비웃습니다.
더 재수 없는 녀석들이 있습니다. 복어새끼입니다. 이게 뭔가 하고 끌어올려보면 복어새끼입니다. 제 깐에 위협하느라 배를 있는 대로 잔뜩 부풀립니다. 23cm 미만의 우럭 잔챙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머리만 잔뜩 커서 회 떠봐야, 별로 먹을 게 없습니다.
이런 녀석들은 잡자마자 멀리 던져버립니다. 그럼 기다렸다는 듯이 갈매기들이 날아와서 잽싸게 채 가버립니다.
반대로 5-600g 정도 나가는 듬직한 감성돔이나 우럭, 솥뚜껑만한 광어, 보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합니다. 대견스럽기도 해서 몇 번이나 들어보고 쳐다보고, 나중에는 고이 아이스박스에 잘 챙겨 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설명하시면서 똑같은 비유를 드십니다. 좋은 것들, 회 떠서 먹을 만한 녀석들, 매운탕이라도 끓이면 괜찮은 녀석들은 그릇에 담고, 별 볼일 없는 녀석들, 회감도 매운탕꺼리도 안 되는 녀석들, 독이 있어 잘못 먹었다가는 큰 일 날 녀석들, 이상하게 생겨서 검증 안 되는 녀석들은 죄다 던져버립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괜찮은 횟감이나 매운탕꺼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괜찮은 횟감이나 매운탕꺼리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노력이 어떤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부족해도 상관없습니다. 허물이 많아도 괜찮습니다. 지은 죄가 많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제의 나를 딛고 변화되고자 몸부림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과거의 나를 뒤로 하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최종적으로 회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어제의 나와 결별한다는 것입니다. 어제의 나를 떠나 변화되고 쇄신되고 큰 물고기가 되기 위해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성장을 원하지만 본질적으로 변화되기를 두려워합니다. 새로운 나로 거듭나는 것을 원하지만 껍질을 깨는 아픔을 거부합니다. 익숙한 곳, 친숙한 대상을 선호하지 새로운 환경, 낯선 사람과의 만남, 새로운 세상에 대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뼈를 깎는 아픔을 감수해야 합니다. 다른 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익숙한 문, 매일 다니는 문을 포기해야 합니다.
안전지대
-상지종신부-
전철이 역 구내로 들어오면 안내 방송이 나옵니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으니 승객 여러분은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지금은 이 안내 방송 멘트가 바뀌었습니다만, 예전의 이 멘트를 들으면서 항상 하나의 의문을 가졌습니다.
"안전선 밖으로"
안전하게 열차를 타려면 안전선 밖으로 나가야 한다? 안전선 안쪽이 안전한가? 아니면 안전선 바깥쪽이 안전한가? 안전선 안쪽이 안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안전선 밖은 열차가 들어오는 철로가 아닌가? 그렇다면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라는 안내 방송은 열차가 들어오는 철로로 달려들라는 말이 아닌가? 생각이 이 정도에 이르게 되면 끔찍한 상상을 하게 됩니다. 이 방송 멘트를 듣고 나서 철로로 달려들어 죽은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만의 하나 이 멘트에 따라 곧이 곧대로 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살아가면서 이런 저런 안전선을 많이 만납니다. 동시에 안전선 안쪽에 자리한 안전지대도 많이 만납니다. 전철역에 그어진 노란색 안전선이나 횡단보도 등 눈에 보이는 안전선이나 안전지대도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 사회나 단체의 구성원으로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교육이나 전통, 관습들도 이러한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비록 그것이 강요되는 것이든 자발적인 것이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안전지대 안에 꼼짝하지 않고 있는 것만으로 정말로 '완전한' 안전을 보장받는가라는 물음을 던져봅니다. 완전한 안전을 보장받지는 못해도 그래도 덜 위험하다는 생각까지는 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신앙 생활에 있어서만은 이 안전지대는 '덜 위험한 정도'도 되지 못합니다. 비록 신앙 생활이 여타의 생활과 분리될 수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신앙의 안전지대란 무엇일까요? 세례를 받는 것, 적어도 우리가 배운 바에 따르면 냉담하지 않고 신자로서의 의무를 잘 지키는 것 정도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 미사 거스르지 않고, 교무금 잘 내고, 조금 여유가 있어서 교회 단체에서 약간의 활동을 한다면 더 좋겠지요. 이 정도도면 훌륭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요? 오늘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들려주는 답은 분명히 "아니오"입니다.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린다."
그물 안에 있다고 기뻐하기에는 이릅니다. 나쁜 것은 내버려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세례를 받고, 미사 참례 잘 하고, 교무금 잘 내고, 단체 활동 하는 것을 가지고 신앙인으로서 자족하는 것이 마치 하늘 나라라는 그물 안에 있기에 기뻐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늘 나라라는 그물은 분명히 은총의 안전지대입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나 이 안에 머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은총으로 주어진 안전지대 안에 머물려는 각자의 힘겨운 노력이 있어야만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힘겨운 노력이란 선하게 살려는 몸짓입니다. 선한게 산다는 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 몸과 마음으로 실천하는 것이겠지요. 그렇기에 결국 하늘 나라라는 안전지대에 머무는 것은 나 혼자서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특별히 교회 안에서 잘 난 사람들(또는 잘 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자신은 충실한 신앙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따끔하게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특히 저처럼 사제로서 부르심받은 이들을 향한 하나의 사랑담긴 경고의 메시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제가 되었다고 해서 구원을 보장받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더 큰 책임감이 있기에 하늘 나라에 머물기 위해서 오히려 다른 형제 자매들보다 각고의 노력이 더 필요할 따름입니다. 조금은 두렵기도 합니다. 그래도 희망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한 사람도 잃지 않으려고 참된 구원의 길을 미리 알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의 참 뜻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뜻에 맞춰 자신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새벽을 열며
어떤 형제님께서 병자성사를 원한다는 연락을 사무장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저는 우선 지금 성체를 영하실 수 있는 지를 물은 뒤, 곧바로 구역장님 그리고 수녀님과 함께 성체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병원으로 가면서 구역장님께 이 분에 대한 사항을 전해 들었지요. 아파도 병원에 가시지 않다가 이번에 병원에 갔는데 간암 말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그리고 당신의 죽음에 대해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면서 이렇게 병자성사를 청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했고, 저는 곧바로 병자성사를 집전했습니다. 병자성사를 받는 형제님께서는 곁에 있는 제가 느낄 정도로 온 정성을 다해 주님께 기도하셨지요. 아무튼 병자성사가 끝나고 ‘힘내세요.’라는 말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 형제님께서 갑자기 제게 묻습니다.
“신부님, 김용호씨는 어디에 계십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저는 의아해하면서 “누구요? 김용호씨가 누구신데요?”라고 다시 반문을 했지요. 바로 그 순간 그 형제님이 누구인지를 알겠더군요. 제가 14년 전, 군대 제대 후 아르바이트를 주유소에서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주유소의 소장님으로 계셨던 분이 이 형제님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형제님이 물은 ‘김용호’씨는 저와 함께 일했던, 지금은 현재 신부님이 되어 파푸아뉴기니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계신 분을 말하는 것이었지요.
정말로 깜짝 놀랐습니다. 저는 그 주유소에서 딱 3개월만 일했거든요. 그것도 최근에 일한 것도 아닌 14년 전에 잠깐 일했을 뿐인데, 저를 기억하고 계시다는 사실 하나가 얼마나 놀라웠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순간 깊이 깨달은 것은 잠깐의 인연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기 때문에…….
만약 그 당시의 만남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면, 병원에서의 이 만남이 어떠했을까요? 아마 서로 어색한 만남이 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손을 잡고서 반가워할 수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요. 좋은 고기는 그릇에 담고 나쁜 고기는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처럼, 세상 종말에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극단적인 종말의 순간을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매 순간을 충실히 살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14년 전의 잠깐의 인연을 이렇게 다시 만나서 서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행동 하나가 미래에 있을 주님의 심판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은 또 다른 만남을 만들어 나갈 것입니다. 그 만남을 소홀히 하지 마십시오. 그 만남에서 꼭 나만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바로 주님의 사랑이 가득한 만남, 주님께서 원하시는 만남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한 나의 노력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좋은 만남을 만드세요.
빠다킹신부
그물의 비유
-임문철 신부-
어릴 적 새벽미사에 참례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바닷가에 들르면 밤새 수고한
어부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따치돔의 가시에 손을 찔려가며 그물에
걸린 물고기들을 떼어내는 일을 도와드리면 싱싱한 물고기 몇 마리를
아침 반찬으로 집에 가져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물에서 물고기를 다 떼어내면
어부들은 고급 어종들은 상자에 가지런히 담아 놓고, 잡어들은 다시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잡어들이 상한가를 칩니다. 제주 바다의
자랑이었던 다금바리, 북바리들도 다 양식을 하니, 웰빙을 찾는 이들은 이제
항생제 안 먹은 잡어들을 일부러 찾습니다. 예전엔 맛이 없다고,
걸리면 재수 없다고 투덜대며 버렸던 물고기들인데 요즘은 없어서 못 먹을
정도입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 그물에 걸린 저를 보시면서 어떤 생각을
하실까요? 하느님의 식탁에 오를 싱싱한 회 한 접시는 못 될지언정
쓰레기통으로 가서는 안 되지 않을까요? 오염 안 된 자연산 잡어는 못 되어도,
최소한 어묵공장으로는 보내져야 할 텐데 말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생명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인주 신부-
선택받은 생명이라 하면 마치 누구는 구원되고 누구는 안 되는 것인가 하고 의아해하겠지만, 생명은 다 귀하다. 다만 그 용도와 삶의 질에 따라 그 영역이 구분되는 것이라고 본다. 근본적으로 결정론이 있다 해도 그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지 인간이 왈가왈부할 사항은 아니라고 본다.
젊은 시절 필리핀에서 선교를 한 적이 있다. 갈릴래아 호수처럼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민다나오 섬의 이필이란 교구였는데, 지금도 그곳을 떠올리면 마음이 설렌다. 그곳 사람들의 대부분은 가난했고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았다. 물고기는 하느님이 주신 일용할 양식이었다.
한번은 그곳 사람들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 바다 한가운데서 밤을 보낸다길래 나도 그렇게 하겠노라고 공소 회장님과 약속했다. 공소 회장님은 예수님 시대의 베드로 사도 같은 분이었다. 그런데 내 복장을 본 공소 회장님이 머리를 갸우뚱하시며 안 되겠다는 사인을 보냈다. 가만있으면 중간이나 하지, 바닷가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는 나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데?’ 하며 오히려 난색을 표했다. 섬사람들의 행색은 초겨울 산행을 나가는 차림이었다. 도톰한 점퍼에 모자까지 쓴 것을 보며 ‘이 사람들이 한여름에 무슨 일이람?’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카누(쪽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뭍이 희미하게 보일락 말락 하는 곳에 코코넛나무로 만든 그물이 있었고, 우리는 배에서 내려 코코넛 기둥을 타고 올라가 약 50센티미터 될까 말까 한 공간에서 일을 했다. 곧 어둠이 내렸고, 그물을 내리자 제법 많은 고기가 잡혀 무척 신이 났다. 그렇게 여섯, 일곱 차례 그물을 내렸는데, 자정이 넘자 바닷바람이 여간 매서운 게 아니었다. ‘아! 이거였구나.’ 하면서도 말도 못하고 몸을 웅숭거리자 공소 회장님이 웃으며 입고 있던 외투 하나를 벗어주었다. 열대의 나라 바다 한가운데서 추위에 떨며 새벽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런 와중에도 그물을 올릴 때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졌고, 파닥거리는 싱싱한 멸치에 코코넛술 한 잔은 추위를 잊게 했다. “요놈은 구원받은 놈, 요놈은 저주받은 놈.” 하는 공소 회장님의 물고기 감별 솜씨는 베드로 사도를 능가하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도 버림 받는 물고기들을 보며 바로 저들을 구원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하며 중얼거리는데 동이 트고 있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다 구원해 주십시오.’ 하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감사를 드렸다.
무엇을 꺼낼까
-서현승 신부-
가끔 텔레비전에서 개신교의 예배 장면을 보게 됩니다. “구원받으셨습니까?” 하는
목사님의 질문에 “구원받았습니다” 하고 외치는 신도들의 대답이 인상적입니다. 동일한
질문을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요? 실제로
아무도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한 번 더 독촉하니 “글쎄요”가 전부였습니다.
사실 어렸을 적부터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것도 바로 ‘지옥’이나 ‘연옥’으로 연결된
‘죄의식’입니다.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더라도 상당한 기간 동안 연옥불로
고통을 받고나서야 천국에 오를 수 있다니, 판공성사 때마다 흔히들 고백하는
대로 ‘사는 게 죄’인 마당에야 누가 선뜻 구원받았다고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 말씀은 26절부터 50절까지 이어진 제자교육의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의 제자들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제자(13,52)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분명히 있게 될 것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지옥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기쁨을 강조하십니다. 말썽을 피우고는 깜깜해질
때까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으슥한 곳에 숨어 있던 꼬맹이 때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다지 큰일도 아니었는데, 날 찾아 헤매시는 어머니의
안타까움은 헤아리지 못하고 오로지 혼날 일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곳간에서 죄와 두려움의 옛것이 아니라,
은총과 기쁨의 새것을 꺼내보아야겠습니다.
물고기를 선별하는 비유
-장용진 신부-
바다엔 고기가 약 2만 여종이 살고 있으며 그 개체 수는 헤아릴 수도 없이 엄청나게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몸길이가 15m에 달하고 체중은 20톤이 넘는 세상에서 가장 큰 고래상어에서부터 몸길이가 8㎜밖에 안 되는 필리핀 부근에 산다는 왜망둥어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한 크기의 고기들이 살고 있습니다.
인류가 바다의 이런 모든 것들을 주요 식량 자원으로 이용한 지는 이미 오래 전의 일입니다.
그런 만큼 그것들을 잡는 방법도 다양하며 같은 어종이라 하더라도 지역에 따라서도 다른 방법으로 잡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지역과 문화에 따라서 같은 고기라 하더라도 그 조리 형태가 달랐으며 식용으로 하여 먹기도 하고 불길한 것이라고 하여 내다 버리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오늘 이런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드리는 이유는 이것을 통해 오늘 복음을 좀 더 잘 새겨듣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오늘 복음, 즉 하늘나라와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이 바다에서 온갖 것들을 잡으며 그것들을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으로 가르는 것에 비길 수 있다는 이 말씀을 들으면 두려움이나 무서움을 느끼게 됩니다. 천사들이 마지막 날에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는다고 하는데 당연히 무섭고 두려운 생각이 들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다에 관한 이야기로써 이 말씀을 이해하는 열쇠로 이용한다면 이 말씀은 더 이상 나쁜 소식이 아니라 기쁜 소식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한 나라의 고기 잡는 방법과 도구만을 생각하고 그들의 식생활과 조리 방법만을 생각한다면 못 잡는 고기도 많으며, 그물에 걸려든 고기 중에서 못 먹는 것으로 가려질 것이 많겠지만 온 인류를 상대로 하여 이를 생각해본다면 이 세상에 못 잡는 고기가 어디 있겠으며 못 먹는 고기가 또한 어디 있겠습니까!
하늘나라에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데도 똑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천사가 자신에게 주어진 기준에 의해서 한 사람을 안 좋은 쪽으로 선별하더라도 또 다른 천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또 다른 기준으로써 그를 좋은 쪽으로 선별할 것이므로 이런 과정 안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내버려지는 경우는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고기 잡는 방법이나 도구가 그만큼 다양하고 '너는 못 먹지만 나는 먹을 수 있는' 고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에, 그 보다도 더 다양하고 많은 인간들을 불러 들여야하는 하늘나라는 더 많은 선별 기준과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가 이럴진대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오늘'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세상 종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더 이상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기쁨을 가져다주는 복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차룡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그물의 비유를 통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을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린다. 세상 끝날 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그물의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에 악인이 판치는 세상과 교회에서 악인을 가려내어 순수하고 거룩한 하느님 백성으로 성별 할 수 없을까 하는 것이 바리사이파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의 주 관심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사이파사람들이 죄인이라고 소외시킨 사람들을 당신께로 모아들였으며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어울려 지내며 하느님 나라를 전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사이파사람들이 격분하였으며 왜 죄인들을 허용하고 순수한 공동체를 성별하지 않는가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자 오늘 예수님은 그물의 비유를 들려주며 해답을 제시하십니다.
어부가 던진 그물 안에는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걸려들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가려내는 일은 하느님이 해야 할 몫입니다. 그 이유는 첫째, 사람은 결코 가려내는 일을 완전히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볼 수 없고 잘못 판단하여 가라지와 함께 좋은 곡식도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하느님만이 ‘가리어 낼 때’를 정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때가 다 되어 그물이 가득 차고 ‘기한이 차야’ 심판이 이루어집니다. 아직도 회개의 기간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다음 철에 열매를 맺을 지도 모릅니다. 만일 그 때 가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때 베어 버리십시오.”(루가13,9)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신앙인은 자신의 일상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사람에게, 기회가 좋든 나쁘든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사람을 낚는 어부의 소임을 다하도록 불림 받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그물에 걸려든 우리 삶은 마지막 날에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선별될 운명에 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물에 걸려든 것 자체가 은총이요 축복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집에 초대되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느냐, 아니면 버려진 물고기처럼 땅바닥에 파닥거리다 멸망할 운명이냐 하는 양지택일의 길입니다. 결국 그것은 우리의 평소의 삶에 달려 있습니다. 이름만의 신자, 무늬만의 신자이냐, 혓바닥이나 발바닥만의 신자이냐 아니면 자신을 비우고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여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려질 운명의 시간은 반드시 옵니다.“ 세상 끝날에도 이와 같을 것이다. 천사들이 나타나 선한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는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처넣을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은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다.”(마태13,49-50) 이 말씀은 마치 마태오 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떨치며 모든 천사들을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왕좌에 앉게 되면 모든 민족들을 불러 놓고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그들을 갈라 양은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자리 잡게 할 것입니다.”(마태25,31-33)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가 가리어져 좋은 고기는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고기는 내버리듯이, 양과 염소 즉 의인과 악인도 마지막 심판 날에 가리어져 의인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고, 악인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쫓겨 날 운명에 처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심판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살아야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잣대는 사랑입니다.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예수님에게 해 준 것이라는 진리입니다. 내 형제가 바로 예수님이요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우리 이웃이 작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25.35-36)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습니다. 태어나자마자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로 가리어진다는 결정론에 빠질 위험이 있지만 어부이신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좋은 고기이기를 바라면서 그물을 던집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구원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영혼의 본향인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나라입니다.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니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마태25,34)라는 마태오 복음 말씀처럼 하느님 나라는 아버지께서 당신 자녀들을 위해 고맙게 배려해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눈이 멀고 귀와 마음이 닫혀 우리를 위해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하느님 나라의 선물을 잊고 세상 것에 마음이 팔려 죄악의 노예가 되고 원수 마귀의 노예가 되어 비뚤어진 생활로 살아왔으니 이제라도 정신을 차려 아버지 집을 향해 발길을 돌리는 회개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저희의 마음을 열어 주시어, 당신 아드님의 말씀을 귀담아듣게 하시어 저희를 위하여 준비한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구원의 은혜를 내려주소서. 아멘.”
-장동현 신부-
어부가 바다나 강에 그물을 던집니다. 바닥까지 훑으면 별의별 것이
다 걸려듭니다. 물고기와 조개류는 물론이려니와 불가사리처럼 쓸데없는 것도
걸립니다. 쓰레기가 걸리기도 합니다. 그러면 그물의 주인인 어부가 좋은 것은
추려 담고 나쁜 것은 내버립니다.
교회도 그물과 같아서 누구에게나 열려 있습니다. 처음부터 가려 담을 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 안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착한 사람과 고약한 사람, 열심한 사람과 나이롱 신자, 헌신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이 다 한데 섞여 있습니다.
성당에서 하는 말과 밖에서 하는 행동이 딴판인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팔아 장사하는 사람, 한자리 하려고, 표를 얻으려고 교회에 소속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자가 아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신앙이 흔들리거나 배 아파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의 주인께서 나중에 가려 담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교회의 이런 모습을 이미 말씀해주셨기 때문입니다.
- 이영훈 신부 -
하느님의 심판이란 어떤 것일까?
예수님께서는 가라지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다. 좋은 씨를 뿌린 밭에 어느 날 가라지 싹이 올라온다. 주인은 그것이 원수의 짓임을 알게 되었다. 종들이 그 가라지들을 뽑아 버리자고 말하지만, 집주인의 대답은 달랐다. 그 주인은 ‘아니다. 너희가 가라지들을 거두어 내다가 밀까지 함께 뽑을지도 모른다. 수확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수확 때 내가 일꾼들에게,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단으로 묶어 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으로 모아들이라고 하겠다.’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심판이란 바로 이 모습이다. 분노에 휩쓸려 가라지를 뽑아버리는 분이 아니라, 그래서 밀에게 상처를 주는 분이 아니라, 오히려 자비가 앞서는 분이시다. 밀이 다치지 않도록 정성을 다하시는 분이시다.
오늘 복음도 마찬가지다.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라는 말씀처럼, 어부는 좋은 물고기가 다치지 않도록 온 정신을 집중해서 물고기를 다룬다. 이렇듯 하느님의 심판은 분노와 응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비와 사랑이다. 그래서 심판이라는 단어보다는 오히려 ‘기다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요즘 신문과 방송 특히 인터넷을 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자기주장과 그로 인한 비방과 판단 더 나아가 완전히 소외시키는 경향이 너무나 강하다. 나름대로 이유를 들어 자신들의 주장을 말하지만, 그 안에는 자신과 자신의 신념만이 있을 뿐이다. 자기와 생각과 행동 양식이 다르면 그는 타협의 대상이 아니라, 완전히 소멸시켜야 할 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그가 상처를 입든 말든 그것은 관심에 대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상처를 입기를 조용히 기도한다.
우리는 하느님께 항상 용서받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하느님께 매 순간 용서받지 않는다면, 그때그때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신다면 우리 중 그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바로 하느님의 자비이며, 은총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으시기에 우리를 기다려 주신다. 좀 더 나은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커다란 은총을 받으면서 살아가는데, 우리는 왜 서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오히려 판단하고, 자신과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일까?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시기에 앞서 먼저 용서하시는데, 우리는 왜 서로를 심판하는가? 과연 우리가 진정 같은 형제자매를 심판할 자격이 있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을 판단하고 심판할 권한을 주시지 않았다. 오직 용서할 권한만을 우리에게 주셨다. 사랑할 권한만을 주셨다.
지금 우리 눈앞에 십자가가 있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는 예수님께서 양팔을 벌리고 계신다. 그리고 그 손과 발에는 못이 박혀져 있고, 머리에는 가시관이, 옆구리는 창으로 찔린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예수님께서 고통스러운 모습으로 우리 앞에 계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건 그 모습을 잊지 말고, 영원히 기억하라는 뜻이 아닐까? 그럼 그 모습에서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걸까? 그것은 바로 당신이 나 자신을 위해서,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또한 돌아가셨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이 아닐까? 그리고 우리 또한 남을 심판하기보다는 용서하라는 명령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용서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용서의 힘은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은총의 힘이다.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을 하느님께 청하도록 하자.
가려질 운명의 시간은 분명히 온다
- 이기양 신부-
하루는 냉담을 하고 있는 한 신자로부터 냉담하게 된 이유가 주변의 다른 신자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나는 성당에는 좋은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네요.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하면서 성당에 나오는지 실망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자기를 실망시킨 그 사람으로 인해 냉담할 마음이 생겼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사람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그가 참으로 안타까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많은 열심한 신자들과 성실하게 말없이 노력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놔두고 하필 그렇지 못한 사람 몇을 보고 전체를 평가하여 쉽게 실망을 하고, 심지어 하느님을 멀리하기까지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선한 사람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사람도 함께 공존하지요. 대부분 사람들은 선하게 열심히 살아가고자 노력하지만 간혹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고, 그런 사람들이 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힘들게 하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 우리의 불완전한 사회 모습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진 교회 공동체에도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또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그물이 가득 차자 사람들이 그것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렸다.?“(마태13,47-48)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선인과 악인이 구분될 것이라는 말씀이지요. 세상 심판에 하느님께서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시는데 선한 사람은 하늘 나라로 가고 악한 사람은 불구덩이에 던져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이 세상의 모습과 교회에서 가끔씩 보여지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상황에 실망을 하기도 하고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부족한 인간들끼리 서로 감싸고 좋은 것을 볼 줄 아는 마음이 더욱 필요한 것이지요.
논어에 ??삼인행(三人行)이면 필유아사(必有我師)?‘라는 공자님 말씀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걸어가면 그 중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될 만한 인물이 있다.?‘는 뜻이지요. 그렇습니다. 어디서든지 배울 수 있으며, 어떤 경우에라도 좋은 것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롭고 성장할 수 있는 사람이지요.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는 뜻하지 않게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 어려움이 단지 무의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성숙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음을 알고 노력한다면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도 눈물겨운 시련을 겪고 더욱 깊고 성숙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대학 유아교육과를 졸업하고 앞날이 온통 무지개 빛이었던 ??이지선?‘이라는 자매는 2000년 어느 날 교통사고로 온몸에 끔찍한 중화상을 입는 사고를 당합니다. 이년 여의 시간이 흐르고 책을 냈는데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온몸에 화상의 흔적이 남았지만 지금의 이 모습으로 살게 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으리라는 믿음, 그 끔찍한 사고에서 목숨을 건져주신 하느님께서 자신을 희망의 메시지가 되게 하시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을 쓰면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1인 10역을 해내는 엄지손가락으로 생활하고 글을 쓰면서는 엄지손가락을 온전히 남겨주신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눈썹이 없어 무엇이든 여과 없이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며 사람에게 이 작은 눈썹마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았고 막대기 같아져 버린 오른팔을 쓰면서 왜 하느님이 관절이 모두 구부러지도록 만드셨는지, 손이 귀까지 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온전치 못한 오른쪽 귓바퀴 덕분에 귓바퀴라는 게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느님이 정교하게 만들어주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잠시지만 다리에서 피부를 많이 떼어내 절뚝절뚝 걸으면서는 다리가 불편한 이들에게 걷는다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감히 내 작은 고통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백만 분의 일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고, 너무나 비천한 사람으로, 때로는 죄인으로, 얼굴도 이름도 없는 초라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그 기분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 테니까요.
몸은 이렇지만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임을 자부하며, 이런 몸이라도 전혀 부끄러운 마음을 품지 않게 해주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이런 몸이라도 사랑하고 써주시려는 하느님의 계획에 감사드리며… 저는 이렇게 삽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지선아, 사랑해」이레출판사, 본문 중에서)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악한 사람들 속에서도 또 많은 시련 속에서도 좋은 것을 볼 줄 알고, 그 어려움이 나를 성숙시키고 하느님을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헌신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그물
-이수철신부-
아침, 저녁의 서늘한 바람, 높고 푸른 하늘이 가을처럼 느껴집니다.
여름 안에 가을이 있는 것처럼, 삶 안에 죽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지혜로운 이들,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아갑니다.
욕심이나 환상(幻想)의 치유에
‘하느님 묵상’ ‘죽음 묵상’처럼 좋은 처방도 없습니다.
세상 그 누구도 하느님의 그물,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 앞에, 죽음 앞에는 모두가 평등합니다.
사실 죽음 있어
삶이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하느님 주신 귀한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한번 뿐이 없는 선물 인생, 아름답고 품위 있게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죽음에 대한 자각이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합니다.
매일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합니다.
탐욕에서 벗어나 하늘을 떠가는 흰 구름처럼 초연한 삶을 살게 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성 베네딕도의 말씀,
옛 사막 수도자들의 이구동성의 지혜로운 충고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도 하느님의 그물, 죽음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쳐놓은 그물과 같다 합니다.
세상 종말에 하느님은 바다에서 그물을 걷어 올리듯,
당신의 그물을 걷어 올려 의인들 가운데
악한 자들은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 버릴 것이라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 삶의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음을 봅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 안에 있다.”
예레미야를 통한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손 안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하늘나라의 제자가 된 율사처럼 지혜로운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좋은 분별의 지혜를 갖춘 집 주인과 같이 처신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입니다.
하느님이 옹기장이라면 우리는 진흙입니다.
묵묵히 하느님 뜻에 순종하면서
주님의 모습으로 아름답게 조각되는 우리들입니다.
얼마 전에 써놓은 ‘영원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글을 소개하면서
강론을 마칠까 합니다.
영원을 사는 사람들
언제나
거기 그 자리
오랜 세월
거친 파도에
깎이고 닦이고 파인
신비로운 모습
바위 같은 사람들
끊임없이 흘러가는
세월 물살
사람 물살
일 물살
사건 물살에
아무리 깎이고 닦이고 파여도
떠내려가지 않고
언제나
거기 그 자리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신비한 모습
바위 같은 사람들
움직임 중에도
움직이지 않는 중심에
깊이 뿌리내려
지금 여기서
영원을 사는
바위 같은 사람들
흐르는 건
사람이 아니라 세월일 뿐!
온갖 흐름의 물살들로
당신의 형상대로
평생
우리를 조각하시는 임이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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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신앙인의 길
-허영업 신부-
예수님은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또한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를 미워하고 내 목숨까지도 미워하라고
하시니 선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자신을 비하하거나 혐오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세상의 어떤 가치도 주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적극적인
가르침입니다. 신앙행위는 자신의 자유 의지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가신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으며,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물론 십자가의 삶은 인간적인 판단이나 사고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면 세상 속에서
고통과 수난의 길을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당장 어리석게
보일지라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위가 결국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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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그날이 오면
-여상훈-
◆“천사들이 나가 의인들 가운데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어 불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세상 종말에 관한 요한묵시록의 초현실적인 묘사를 떠올리는 섬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강렬하고도 실감나는 경고의 말씀은 어쩐지 좀 낯선 느낌입니다.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는다고 미사 때마다 고백하면서도 사실은 그 심판의 모습을 두고 깊이 생각해 본 적이 드물어서 그런 모양입니다. 하기야 성경의 묘사보다 더 끔찍한 참극을 이 지상에서 보고 겪은 인간들이니 ‘불구덩이’ 이야기의 충격이 반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의인’의 대열에 끼어들 자신이 없는 사람들에게 세상 종말은 더할 수 없이 두려운 시나리오입니다. 들을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게 만드는 모차르트 레퀴엠의 가사처럼 그 ‘진노의 날’에 온 세대가 바수어지고, ‘티끌로부터 부활한 죄인들이’ 영원한 처벌을 받는다니 말입니다. 모든 것이 기록된 책을 펼쳐 정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주님의 면전에 서면, 자비를 베푸시라는 애원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같은 동네 분으로 공사장에서 떨어져 전신마비로 오래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어머니와 함께 찾아뵙곤 했습니다. 어느 날 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둠 속에서 가쁜 숨소리가 들렸습니다. 아무래도 며칠 못 사시겠다는 어머니 이야기에 겁이 덜컥 났습니다. 어머니가 할아버지 손을 잡고 물었습니다. “돌아가시는 거 무서워요?” 할아버지는 겨우 눈을 뜨고 “무서워.” 하셨습니다. “걱정 마세요. 착하게 사셨으니 하느님 곁으로 가실 거예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가로저으시자 어머니가 다시 물었습니다. “쌓은 공덕이 없는 것 같아 그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있는 힘을 다해 고개를 끄덕이셨습니다. “평생 가난하고 병들어 살았으니 그걸 하느님께 바치기만 해도 다 용서받으실 겁니다.”
어머니의 그 이야기를 저는 내내 잊지 않습니다. 누구한테나 공로로 드릴 것이 있다고, 가난과 병고로도 자비를 구할 수 있다고 한 그 말씀이 얼마나 지혜롭게 여겨졌는지요. 당장 오늘부터 심판의 날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하겠지만 가난과 병고, 누명의 억울함과 작은 희생이라도 내세워 천사의 손을 피할 수 있으려나, 위로를 얻어 봅니다. 기록된 책에 남아 있을 제 악행이 아무래도 다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아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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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그물
-김찬선신부-
오늘로써 하늘나라의 비유가 끝이 납니다.
인간의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하늘나라를 설명하기 위해
마태오 복음은 이러저러한 비유를 13장 전체에 걸쳐 할애하였고
오늘은 하늘나라의 마지막 비유로 종말의 하늘나라를
고기잡이 그물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이왕 하늘나라를 고기잡이 그물질에 비유한다면
저는 그물의 구멍보다 큰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고
그물의 구멍보다 작은 것은 하늘나라 자격이 없다고 비유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말씀과 행적으로 잘 양육하셨으면
인간은 영적으로 성장에 성장을 거듭해 이제
치어에서 큰 고기로 성장해 있어야 하고,
영적으로 어느 정도 이상 성장해야
하늘나라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그물질 비유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온갖 종류의 고기를 다 모아들입니다.
고기의 종류와 크기를 따지지 않고 다 그물로 끌어 모읍니다.
어떻게 이해하면
남녀노소, 인종과 종교를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물을 끌어올린 다음
좋은 고기와 나쁜 고기를 가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이 좋은 고기이고
어떤 것이 나쁜 고기인지는 말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싱싱하고 활기 있는 고기가 좋은 고기이고
비리비리한 고기는 나쁜 고기인지,
아니면 알이 굵은 고기, 즉 영적으로 성장한 고기는 좋은 고기이고
잔고기는 나쁜 고기인지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사랑이시니 사랑 많은 고기는 좋은 고기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쁜 고기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의 그물은 사랑 측정기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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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어떤 할머니께서 자신의 집 앞에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그 할머니 앞으로 가서 물었습니다.
“할머니, 무슨 일이세요? 뭘 그렇게 찾고 계세요?”
할머니께서는 말씀하세요.
“내 바늘을 잃어버렸지 뭐람.”
사람들은 할머니와 함께 바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할머니, 날이 어두워지는데 어쩌죠? 곧 밤이 될 텐데, 이 넓은 길에서 어떻게 바늘을 찾을 수 있겠어요? 따라서 바늘을 어디에서 떨어뜨리셨는지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그러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할머니께서는 계속해서 땅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늘은 집 안에서 떨어뜨렸다네.”
“네? 그럼 이런 미친 짓이 어디 있어요? 집 안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놓곤 왜 밖에서 바늘을 찾으시는거에요?”
“그거야 여기가 밝기 때문이지. 집 안은 너무나 어두워.”
집 안이 어둡다고 바늘을 떨어뜨린 집 안이 아닌 밖에서만 바늘을 찾는다면 과연 찾을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가 없겠지요. 바늘을 떨어뜨린 곳에서 찾아야 바늘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들도 이런 모습을 취하고 있을 때가 너무나 많더라는 것입니다.
내 자신이 문제인데 왜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왜 이렇게 쳐다보면서 그들에 대한 판단과 단죄를 멈추지 않을까요? 그런 판단과 단죄가 자신의 구원을 위한 해결책이 될까요? 어쩌면 우리들의 눈이 밖에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으니까, 우리의 손이 밖에 있는 쉽게 집어 올릴 수 있으니까, 내 안보다는 바깥이 더 밝으니까, 그래서 밖에서만 구원과 진리를 찾으려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 종말 심판에 대한 말씀을 하시지요. 마치 좋은 것들을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리는 것처럼, 의인과 악한 이를 가려낼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사람이 의인일까요? 나의 변화를 위해서는 조금도 노력하지 않고 대신 다른 사람의 변화만을 주장하는 사람이 의인일까요? 또한 자신의 잘잘못은 전혀 바라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잘잘못만을 지적하는 사람이 의인일까요? 아니지요. 내 자신이 먼저 변화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내 자신의 잘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의인의 자리가 아니라 악인의 자리가 바로 내 자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과연 어떤 자리에 위치하고 있나요? 주님의 구원과 진리는 바로 내 마음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잘잘못을 이야기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
-박혜원-
◆초등학교 동창 모임이 있었다. 아름답지만 때로는 예고도 없이 불어닥친 거친 비바람 때문에 죽음의 고비를 넘기기도 하는, 거대한 바다 같은 인생 여정을 거쳐 우리는 중년이 되어 만났다. 어떤 이는 중후해졌고, 어떤 이는 머리가 벗겨져 어릴 때의 얼굴을 찾아내는 데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각자 살아온 과정도 다르고 현재 머물러 있는 곳도 달랐다.
우리가 다닌 학교는 시골의 아주 작은 학교여서, 동창생은 겨우 사십여 명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6년이라는 긴 시간을 같은 공간에서 동일한 체험을 함께 나눈, 순수했던 기억을 공유했기 때문에 숨길 것도 내세울 것도 없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들 나름대로 자기가 머물고 있는 삶의 자리를 하느님의 뜻으로 해석하고 감사하며, 각자의 역량에 따라 그 분량만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가 다닌 학교는 미션스쿨이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초등학교 교육을 통해 쳐놓은 하느님의 그물에 걸려든 것이다. 만남의 기쁨도 기쁨이지만 우리는 그 그물의 힘과 신비로움에 대해 오래 이야기했다.
갈릴래아 호수에는 여러 종류의 고기가 있다고 한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있고, 부정해서 못 먹는 고기도 있다. 일단 그물은 먹을 수 있든 없든 걸리는 고기는 모두 잡는다. 나누는 일은 그분의 몫이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손에 달려 있을 뿐이다. 하느님이 쳐놓은 그물에 내가 걸려들었듯이 나 역시 오늘, 세상을 향해 그물을 던져올려야 할 일이다.
추려 담고 버리기
-강영구신부-
+하늘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러 올리는 것에 비길 수 있다. 어부들은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은 추려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 버린다.
그대에게
인생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입니다.
당신은 오늘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더 잘 것인지 벌떡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할 것인지 갈등했겠지요. 아침밥을 먹으면서도 더 먹을 것인지 그만 숟가락을 놓을 것인지 갈등했을 것입니다.
인간(人間)은 하늘의 뜻(天命)을 따르겠다는 선한 의지와
동물적인 본성을 따르겠다는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존재입니다.
인간(人間)은 천사도 아니고 동물도 아닌 그 사이(間)에 있는 존재(人)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천사처럼 하늘나라(天國)를 누릴 가능성과
짐승이 되어 지옥(地獄)에 빠질 가능성이 함께 열려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선택하고 결단하는가에 따라서
천국(天國)이 열리기도 하고 지옥(地獄)이 열리기도 합니다.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아담은 인류 앞에 죽음과 고통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하늘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던 예수는 인류 앞에 생명과 천국의 문을 열어주었습니다.(로마5,15)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린 어부가 추려 담을 것과 버릴 것을 가려내듯이,
우리 인생살이도 무엇을 선택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지 끊임없이 결단하는 시간입니다.
천국(天國)도 지옥(地獄)도 자기하기 나름입니다.
당신의 오늘이 하늘나라를 누리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7개의 비유들 중 마지막인 <그물의 비유>로서 마태오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바다에 그물을 쳐서 온갖 것을 끌어올리는 것"(47절)에 비유하신다. 이 비유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와 친척간이다. 바다에 그물이 쳐져 있는 동안에는 온갖 것이 그물에 걸려드는 이치와 같이 수확 때까지는 같은 밭에서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게 된다. 그러나 추수 때에 밀과 가라지는 더 이상 함께 있을 수 없고 운명을 달리 하듯이, 그물을 끌어올리고 나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은 가려진다.(48절) 이미 율법이 명시하고 있듯이 식용이 금지된 것들은 따라 골라 아쉽지만 버려야 하는 것이다.(뱀장어, 메기 등: 레위 10,10-12 참조)
그러고 보면 오늘 복음의 <그물의 비유>는 종국에 펼쳐질 종말심판을 암시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최후의 심판 때에는 천사들이 심판관이신 인자(人子)의 명을 받들어 선인(善人)들 속에 끼어 있는 악인(惡人)들을 솎아낼 것이다. 악인들에게는 불구덩이가 그들의 무덤이 될 것이며, 거기서 하는 일은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것이다.(49-50절) 비유들을 다 알아들었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모두가 "예"라고 대답한다.(51절) 예수께서는 비유법을 통한 하늘나라 교육이 내심 잘 되었다고 흡족해 하신 모양이다. 제자들을 바로 "하늘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52절) 라고 칭하시니 말이다. 곳간에서 새 것을 꺼낸다는 것은 이제 새로이 등장한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을, 헌 것을 꺼낸다는 것은 구약의 말씀과 율법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해석하는 기준은 예수님의 정신이다. 예수님의 정신 또한 "모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
-유광수 신부-
어제 복음에 이어서 오늘도 하늘 나라에 대한 교육이 이어지고 있다. 오늘 복음에서는 하늘 나라를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다."고 하셨다. 하늘 나라가 그물과 같다니???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너희는 이것들을 다 깨달았느냐?"라고 물으셨듯이 이 비유의 뜻을 다 깨달았는가? 이 비유를 다 깨달아야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가 되고,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처음에 제자들을 부르실 때 베드로라는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아가 호수에 어망을 던지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하늘 나라란 고기를 잡는 그물이다. 무슨 고기를 잡는 그물인가? 하느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라는 넓은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사람들을 구해주는 그물이다. 깊은 바다에 빠져서 허우적 거리며 떠내려가는 사람들을 건져내어 살려내는 그물이다. 죽음의 바다에서 생명의 바다에로 건져내는 그물이다.
"배를 져어가자 희망의 나라로!" 라는 노래가 있듯이 절망의 바다에서 희망의 바다에로 건져내는 그물이다. 고통 중에 신음하고 있는 이들, 외로움 속에 몸부림치고 있는 이들, 마음이 허전해서 먼 하늘만 쳐다보고 있고, 여기 저기 방황하며 떠돌고 있는 이들,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이들, 과거의 깊은 상처를 안고 그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억눌려 있는 이들, 사랑에 목마른 이들 등을 건져내는 그물이다.
그 그물 안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고, 죄인도 있고 의인도 있다. 예수님이 치시는 그물에는 마치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라고 하셨듯이 이것 저것을 가리지 않고 "온갖 종류의 고기를"다 끌어 올리는 그물이다.
왜냐하면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라고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이를 구원하시는 것이 당신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예수님은 오늘도 그물을 쳐서 온갖 종류의 고기들을 모아들이신다.
예수님이 그물을 쳐서 모아들인 고기들을 물가로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모으고 나쁜 것들은 밖으로 던져 버리는 일은 우리의 몫이다. 우리들은 사람 낚는 어부들이다. 즉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일을 하기 위해 불러 주셨고 그 사명을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맡기셨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무엇이 좋은 것들이고 무엇이 나쁜 것들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식별의 능력이 없으면 좋은 것들을 나쁜 것이라 하고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나쁜 것들을 좋은 것이라 하여 모아들이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만이 할 수 있다.
"하늘 나라 교육을 받은 모든 율법학자는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비슷하다."라고 말씀하셨듯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아야 하고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내는 집주인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럼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낸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과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너울에 가리워져서 우둔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옛 계약의 글을 읽으면서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 너울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비로서 벗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모세의 율법을 읽을 때마다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너울로 가리워져 있습니다. 이 너울은 모세의 경우처럼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 갈 때에 비로서 벗겨 지게 되는 것입니다."(코후 3,14-16)
새것은 신약이요, 옛것은 구약이다. 구약은 신약을 통해서 비로서 너울이 벗겨 진다. 그러나 때로는 신약인 새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옛것인 구약을 들어 설명해주어야 알아들을 수가 있다.
예수님도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라고 말씀하셨듯이 구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의 빛을 받아야 하고 구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빛을 받아야 한다. 구약과 신약은 서로 상반된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하여 완성시켜 준다. 따라서 하늘 나라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란 구약과 신약을 올바로 배워서 신약을 설명하는데 필요하다면 구약을 꺼내고 구약을 보충하는데 신약이 필요하면 신약을 꺼내서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리스인이란 무엇보다도 구약과 신약을 모두 공부한 사람들로서 자기 곳간에 언제나 말씀으로 충만해있고 그래서 이런 사람을 만나면 이렇게 저런 사람을 만나면 저렇게 설명해줄 수 있을만큼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예수님이 그물을 쳐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끌어 올려 오면 앉아서 나쁜 것은 밖으로 내던져 버리게 하고 좋은 것은 모아서 더 좋게 만들어 주는 사람들이다.
오늘날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취약점은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가 부족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성당에는 다니지만 하늘나라에 대한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들은 많지 않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서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착각할 때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왔다가 떠나거나 냉담을 하게 된다. 왜 그런가? 그 사람에게 알맞게 즉 사람에 따라서 자기 곳간에서 새것도 꺼내고 옛것도 꺼낼 수 있는 능력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늘 나라 교육을 받은 율법학자가 부족한 것이 오늘 우리 교회의 취약점이라고 생각된다.
교회는 예수님이 그물을 쳐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끌어 올려오면 그들을 올바르게 하늘 나라 교육을 시켜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적어도 하늘 나라의 교육을 받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 교회는 점점 하늘 나라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가득찰 것이며 언제 어떤 신자라도 처음에 교회에 오는 사람을 만나서 새것고 꺼내주고 옛것도 꺼내 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 교회는 얼만 풍요로울까? 늘 사람들로 들끌을 것이고 양식은 충만하여 누구나 먹고 먹어도 늘 넘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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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님 저희들을 위해 만들어 놓으신 구원의 은혜를 내려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