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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서민들이 고단한 일상에서 한 끼 식사를 해결하던 곳은 어디였을까.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양을 지켜온 서민들의 맛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화려한 신식 건물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니 옛 사람들의 담소와 노랫가락이 들리는 듯했다. 오래된 맛집은 고향의 그리운 향수를 자극한다.
●100년
1902년~ 이문설농탕
1902년에 개업해 3대에 걸쳐 100년 동안 명맥을 지켜온 식당으로 서울에서는 ‘이문설렁탕’이 유일하다. 처음 20년은 탑골공원 자리에 있다가 공원이 만들어지면서 지금의 종로타워 뒤쪽으로 옮겼고, 얼마 전 재개발 때문에 한 블록 뒤쪽으로 또 한 번 자리를 옮겼다. ‘이문’이라는 이름은 한양을 지키는 문 중 ‘이문’이라는 성문터 가까이 있다고 해서 붙여진 것. 100년의 시간 동안 켜켜이 쌓인 손님들의 흔적은 이문설렁탕의 맛에 깊이를 더하는 재료가 되었다. 한때는 청년 김두한이 잠시 일을 하기도 했고, 김일성 주석이 한국에 오면 꼭 한번 먹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던 곳이다. 이 보다 더 특별한 사연도 있다. 1908년 태어나 어릴 때 단골이 된 후 99세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이곳을 찾아온 할아버지가 있었다. 과천에서 서울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힘겹게 오셨는데 그 정성에 감동해 할아버지가 90세가 된 후부터 음식값을 받지 않았고, 할아버지도 세상을 떠나기 전 “이문설렁탕에 고맙다는 말을 꼭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길 만큼 각별한 정을 나눴다고 한다. 장년이었던 사람이 어느새 할아버지가 되어 손주들과 함께 오고, 그 손주들이 성인이 되어 자녀들과 함께 찾는 곳. 이곳 설렁탕 한 그릇에는 맛과 사람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메뉴 설농탕 7천원, 도가니탕 1만1천원
영업시간 오전 8시~오후 10시
위치 서울 종로구 공평동 88
문의 02-733-6526
●80년
1932년~ 용금옥
옛날 코오롱빌딩 자리에서 시작해 80여 년간 추탕을 만들어온 ‘용금옥’. 이곳은 미꾸라지를 갈아 넣는 남도식이 아닌, 통째로 넣어 끓이는 서울식 추탕을 제대로 보여준다. 곱창과 양지머리로 육수를 우려내어 고춧가루를 풀고 두부와 유부를 넣어 씹는 맛을 더했다. 1954년 휴전회담 당시 월북했던 한 북한 통역관이 ‘용금옥’의 맛을 잊지 못하고 “지금도 용금옥이 무교동 그 자리에 있는가? 그곳의 추탕맛은 여전한가?” 하며 그리워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단골이었던 조병옥 박사가 암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기 전, 이곳의 추탕을 두 그릇이나 뚝딱하고 기력을 차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사대문 안의 유일한 추탕집이었던 이곳은 특히 이념과 사상이 이슈가 되었던 해방 후부터 줄곧 당대 문인과 언론인이 모여 토론을 벌였던 장이기도 했다. 조선, 동아, 서울일보 등 주요 일간지가 가까이 있었던 덕분에 모든 정보가 흘러드는 중심지 역할도 톡톡히 했다. 이곳을 찾았던 시인 정지용, 이만섭 전 국회의장 등 지식인들의 일화를 엮은 《용금옥 시대》라는 책이 나올 정도였다. ‘용금옥’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들의 밥심을 책임진 우리 역사의 숨은 주역이다.
메뉴 추탕 1만원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10시(평일), 오전 11시~오후 8시(주말·공휴일)
위치 서울 중구 다동 165-1
문의 02-777-1689
1925년~ 진아춘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시절 문리대와 의과대 앞에 있던 ‘진아춘’은 해방 전부터 1970년대 이전 학번들의 아지트였다. 당시 이곳의 짜장면은 주머니가 가벼운 지방 출신 학생들에게 값싸고 맛있는 유일한 음식이었다. 가게 안 구석에는 손목시계, 학생증, 도민증, 시민증 등이 수북이 쌓여 있었는데, 이는 학생들의 외상 담보였다. 당시는 다 같이 가난하던 시절이라 주인도 별말 없이 받고, 몇 달씩 묵묵히 기다려주었다. 그러던 ‘진아춘’이 80년대 초 돌연 문을 닫았다. 사람들은 배고픈 시절의 허기를 달래주던 짜장면을 더 이상 못 먹는다는 생각에 허전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다시 모습을 보인 것은 2000년. 옛 주인의 조카가 그 자리를 이은 것이다. 짜장면은 옛날 맛 그대로였다. 새우칠리, 탕수육, 깐풍기 맛도 변함없었다. ‘진아춘’의 짜장면을 그리워하던 이들에겐 더없는 희소식이었다. 이렇듯 이곳이 3대째 맛을 지켜올 수 있었던 것은 주방에 ‘객’을 두지 않았기 때문. 차근차근 배우며 한 계단씩 올라온 사람만 팬과 국자를 잡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옛 맛을 고스란히 이어온 ‘진아춘’만의 원칙이다.
메뉴 볶음짜장 7천원, 새우칠리소스 2만5천원(소), 3만5천원(대)
영업시간 오전 11시 30분~오후 3시, 오후 4시 30분~오후 9시
위치 서울 중구 명륜동 4가 66-2
문의 02-765-5688
●70년
1937년~ 청진옥
3대째 이어져온 해장국집, ‘청진옥’. 현재 주인의 할아버지가 지금의 종로구청 자리에서 좌판으로 시작했던 것이 그 출발점이다. 당시 그 일대에는 나무 땔감을 취급하는 큰 시장이 열렸고, 이곳을 오가는 나무꾼과 상인들의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 해장국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오가는 이들이 하나둘 늘면서 좌판은 건물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거기서 점차 규모를 키워나갔다. 이후 그 일대에 열댓 개의 해장국집이 생기면서 ‘해장국 골목’이 조성됐지만, 피맛골 재개발로 ‘청진옥’을 비롯한 여러 집들이 흩어지면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비록 자리는 옮겼지만 소뼈, 내장, 양지로 24시간 우린 육수에 우거지, 콩나물을 넣고 된장을 풀어 담백하게 끓여내는 조리법은 옛날 방식 그대로다. 재료를 공급받는 곳도 할아버지 때부터 거래해왔는데, 그곳도 2대째 이어지고 있다. 손님들도 ‘청진옥’과 함께 나이를 먹었다. 처음 간판을 내걸었을 때부터 찾아왔던 청년은 이제 100세가 넘은 할아버지가 되었다. 한때 김구 선생을 모시고 오기도 하고 어린 윤보선 전 대통령의 손을 잡고 데려오기도 했던 그는 거동이 불편한 지금도 옛 추억과 옛 맛을 잊지 못해 먼 길을 돌아 찾아온다고.
메뉴 해장국 8천원, 따구국 1만8천원
영업시간 24시간
위치 서울 종로구 청진동 92-60 르메이에르 1층
문의 02-735-1690
1943년~ 하동관
65년 전통의 하동관이 2007년 명동 입구 외환은행 뒤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수하동 옛터가 청계천 일대 도시재개발사업으로 철거되면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 창업주는 삼각동에서 나고 자란 서울토박이였고 그의 부인 역시 서울 북촌마을의 반갓집 딸로 태어나 북촌 양반촌과 궁중음식에 밝았다. 하동관 곰탕은 바로 그녀의 손맛에서 시작되었다. 서울 반가촌 전통방식의 하동관 곰탕은 한우 암소의 사골, 양지, 곱창, 대창, 양을 넣고 맛을 돋우기 위해 곤자소니(소의 창자 끝에 달린 기름기 많은 부분)를 넣는다. 상에 올릴 때는 양지 수육과 양포만 깔끔하게 얹어낸다. 창업주가 지인에게 가게를 넘긴 후에도 이 맛은 계속 이어졌고 지금은 그들의 며느리가 하동관의 솥을 지키고 있다. 다른 집처럼 뚝배기가 아닌 놋그릇에 담아내는 맑고 담백한 탕국은 감칠맛이 남다르다. 새콤달콤한 깍두기도 새우젓과 설탕을 넣어 순 서울식으로 만든 것이다.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알알이 맺힌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특히 하동관의 곰탕을 좋아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연초에 내·외무부 장관과 들러 곰탕을 앞에 두고 새해인사를 했고 종종 영부인과 함께 와서 한 그릇을 뚝딱하고 갔다. 친구들과 함께 왔다가 “음식값은 달아놔!” 하고 나간 뒤 세상을 떠난 김두한 의원의 이야기는 여전히 전설로 남아 있다.
메뉴 곰탕 1만원(보통), 1만2천원(특), 수육 4만원
영업시간 오전 7시~오후 4시 30분
위치 서울 중구 명동1가 10-4
문의 02-776-5656
1930년대~ 취천루
중국인이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은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일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군사 3천 명과 상인 40명을 보낸 것이 한국 화교사회 탄생의 시작이었다. 이들이 인천 선린동 다음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지역은 서울의 명동이다. 이유는 2세 교육을 위한 한성소학교가 명동 중심에 있었기 때문. 이를 기점으로 명동 일대에는 화교문화가 퍼지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30년 후 중국식 만두집인 ‘취천루’가 문을 열었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 정착한 한 화교가 지금의 자리에서 호떡과 만두를 만들어 팔기 시작한 이후 3대째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호떡을 팔지 않고 교자만두, 고기만두, 물만두만 만드는데, 이때 만두소에 들어가는 고기를 돼지고기와 소고기로 구분해 먹을 수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만두피의 두께도 확실히 다르다. 한국식 만두보다 중국식 만두의 피가 훨씬 두꺼워 퍽퍽하면서도 담백한 것이 특징이다. 70년간 중국식 만두를 만들어온 ‘취천루’는 옛 방식과 맛을 그대로 이어오면서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는 명동 상권의 오랜 터줏대감으로 남아 있다.
메뉴 고기만두·교자만두 7천원(돼지고기)/ 7천5백원(쇠고기), 물만두 8천원
영업시간 오전 11시~자정
위치 서울 중구 명동1가 76-3
문의 02-776-9358
●60년
1959년~ 대중옥
해방 3년 후부터 청계천 주변에 모습을 드러낸 해장국집 ‘대중옥’. 지금은 선대 사장의 며느리가 2대째 이어오고 있다. 한국전쟁 때 피난을 다녀온 후 청계천 주변 왕십리 일대에 자리를 잡은 가족은 시누이, 고모, 이모 등 대가족이 함께 모여 살았다. 집 주변에는 큰 우물이 있었는데, 근처 장안평, 능동, 중곡동 등의 주민들이 달구지에 무, 배추 등 채소를 싣고 와 이 우물에서 씻어 팔았다. 먼 길을 걸어왔던 이들은 당연히 배가 고팠고 이들이 먹는 도시락의 밥은 다 식어 차갑고 맛이 없었다. 식은 밥을 먹는 이들이 안쓰러웠던 아버지는 해장국 국물을 나눠주었는데 사람들로부터 사례를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해장국 장사를 시작했다. 가게 문을 열고 꽤 오랫동안 밥 없이 해장국 국물만 팔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곳의 해장국은 조금 특별하다. 소뼈와 우거지를 넣고 직접 담근 된장을 풀어 계속 끓이기 때문에 오전에는 맑고 담백한 맛이 나고 저녁이 될수록 진하고 깊은 맛이 난다. 따라서 입맛에 따라 해장국을 맛있게 먹으려면 시간대를 맞춰 가면 된다. 한양의 가난했던 역사가 만들어낸 ‘대중옥’. 하지만 이곳을 지나온 겹겹의 시간과 사람들의 흔적은 머지않아 사라질 예정이다. 재개발 때문이다. 단순히 음식을 파는 곳이 아니라 서민들의 애환과 이야기가 녹아 있는 오래된 식당이 이제 한 줌의 재가 되어 추억으로만 떠올려야 한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메뉴 해장국 5천원, 추탕 7천원
영업시간 24시간
위치 서울 성동구 하왕십리1동 17 모노포스 102동
문의 02-2293-2322
1946년~ 우래옥
1900년대는 전깃불도 없고 난방시설도 변변치 못해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다 늦은 밤 온돌이 식으면 밤에 군불을 때기 위해 잠에서 깼는데, 이때 출출해진 배를 달래기 위해 밤참으로 먹었던 것이 냉면이었다. 특히 평양에서는 추운 환경에 맞춰 꿩이나 닭으로 우린 육수로 김치를 담갔는데, 차갑게 언 김치 국물에 메밀면을 말아 먹던 것이 평양식 냉면의 시초다. 평양에서 즐겨 먹던 냉면이 생각나 1946년, 장원일 씨는 을지로 한 귀퉁이 자택에서 냉면을 만들었다. 지금은 시장이 들어서 있지만 당시만 해도 그곳은 주택가였다. 그러던 중 피난을 가게 되었고, 마산에서도 잠시 평양냉면 장사를 하다가 전쟁이 끝나고 돌아와 본격적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우래옥’이라는 이름도 ‘피난 갔다가 다시 왔다’는 뜻. 처음에는 손님이 너무 없어 ‘如山一器 110환’이라고 써 붙여놓았다. ‘산처럼 높이 쌓여 있는 냉면이 한 그릇에 110환’이라는 뜻으로, 가게 앞 기찻길을 지나는 손님의 발걸음을 부들기 위한 일종의 홍보문구였다. ‘우래옥’의 냉면에는 순수 고기 육수만 사용하기 때문에 보통 냉면보다 맛이 심심한 편이다. 따로 준비되어 있는 식초와 겨자를 알맞게 넣어 각자 입맛에 맞춰 먹어야 한다. 평양의 맛을 그대로 이어가는 몇 안 되는 곳이라 그런지 식당에는 흰머리가 성성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띈다.
메뉴 전통평양냉면· 전통평양비빔냉면 1만1천원
영업시간 오전 11시 30분~오후 9시 30분
위치 서울 중구 주교동 127-2
문의 02-2265-0151
1952년~ 송죽장
일제시대, 당시 19세였던 청년은 중국 산둥에서 외삼촌이 있는 한국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중국식 음식점을 운영하던 외삼촌을 따라 요리도 배우고 장사도 배웠다. 시간이 흘러 그 청년은 1952년, 영등포에 조그만 식당을 차렸다. 당시 영등포, 신길동 일대에는 중국인과 화교가 많았는데, 그들을 위한 중국요리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소나무나 대나무처럼 오래도록 변함없는 식당이 되길 소망하며 ‘송죽장’이라고 이름을 지었고, 그 이름처럼 60년 넘게 변함없는 맛을 이어가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단골손님도 변해갔다. 처음에는 화교와 중국인들로 붐비다가 근처에 방림방제, 크라운맥주 등 회사와 공장이 들어서면서 그곳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많이 찾아왔다. 한때는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에게 맥주를 지원하기 위해 밤샘작업을 하던 크라운맥주 직원들에게 50인분가량을 배달하기도 했고, 외환위기 당시에는 주머니가 가벼워진 이들이 한숨을 풀어내던 곳이기도 했다. 비교적 저렴한 술안주 때문에 그리고 술 먹은 다음 날 해장을 위해서였다. 이때 만들어진것이 해삼, 복어, 가리비 등 각종 해산물에 청양고추를 가득 넣은 고추삼선짬뽕과 고추쟁반짜장이다. 칼칼한 국물을 한 사발 들이키면 잠시나마 현실의 팍팍함을 잊을 수 있는 위로가 되는 음식이었다.
메뉴 삼선고추짬뽕 8천5백원, 고추쟁반짜장 1만1천원(2인 이상)
영업시간 오전 11시~오후 10시
위치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4가 55-4
문의 02-2678-1323
●50년
1958년~스칸디나비안 클럽
‘스칸디나비안 클럽’은 한국전쟁의 산물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유럽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은 전쟁 부상자를 위해 의료단을 파견했고, 휴전협정이 이뤄진 뒤에도 피폐해진 한국의 보건을 재건하기 위해 의료지원을 계속했다. 전후 정부는 이들을 위한 의료시설 마련을 위해 국립의료원을 세웠고, 그 옆에 북유럽 의료진을 위해 구내식당을 마련했는데 그것이 바로 ‘스칸디나비안 클럽’이다. 건물 입구에는 뷔르겔의 ‘농가의 결혼잔치’ 벽화가 있고 내부에는 국왕 내외의 사진과 의료진들의 활약상이 담겨 있어 북유럽의 흔적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다. 80년대에는 고위 간부들의 회의 장소로 애용되었고, 박정희 전 대통령 사단이 회의를 가졌던 테이블은 아직도 같은 자리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다. 국내 최초의 뷔페음식점이자 북유럽 음식을 시작한 곳인 만큼 비트에 절인 청어절임, 훈제 장어, 연어구이, 소와 닭의 간을 구운 리버페이스트 등 생소한 스칸디나비아 음식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모든 훈제요리는 식당에 처음 문을 열 때부터 사용해온 북유럽식 참나무 오븐으로 구워 전통의 깊이를 더한다.
메뉴 점심 2만4천원(평일), 2만5천원(주말), 저녁은 항상 2만7천원
영업시간 점심 정오~오후 2시(평일), 정오~오후 3시(주말), 저녁 오후 6시~
오후 9시 30분(평일), 오후 6시 30분~ 오후 9시 30분(주말)
위치 서울 중구 을지로6가 18-79 국립의료원 별관 옆
문의 02-2265-9964
1953년~ 연남 서서갈비
한국전쟁 휴전 말기, 당시 신촌은 집이 서너 채뿐이었고 호랑이가 살고 있는 산골마을이었다. 그 시절 신촌에 조그만 술집이 문을 열었으니, 지금의 ‘연남 서서갈비’의 모체다. 전쟁 당시 아내와 딸을 잃은 가장이 어린 아들과 함께 생업을 위해 작은 도매상을 시작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이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시절. 고단한 삶을 달래기 위해 술 한잔 기울이고 싶지만 편히 앉아 호화스럽게 마시는 요정은 갈 수 없는 서민들을 위한 곳이었다. 온종일 일하며 온몸을 새까맣게 그을린 노동자들이 주전자를 들고 오면 술을 공급하는 식. 처음에는 술만 팔다가 손님이 늘면서 돼지고기와 북어구이를 안주로 간단히 준비했는데 뜻밖에 반응이 좋았다. 그러다 1960년대부터 갈비를 시작했다. 전후의 배고픔에 시달리던 이들은 세월이 흘러 돈을 모으기 시작했고 하나둘씩 자가용도 사고 아파트에 살면서 입맛이 달라졌고, 돼지고기보다 쇠고기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음식을 서서 먹게 된 것은 옛날 막걸리를 팔던 목로주점의 형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연탄과 드럼통은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이 집의 상징이다. 드럼통은 전후에 미군이 길거리에 버린 것들을 가져다 쓴 것인데, 불을 피우는 드럼통 하나에도 서울의 지난날이 그대로 스며 있다.
메뉴 서서갈비 1만4천원
영업시간 정오~오후 10시
위치 서울 마포구 노고산동 74-69 벽산광화문시대 1층
문의 02-716-2520
1956년~ 열차집
한국전쟁 이후 바로 터를 잡고 빈대떡을 부치기 시작한 ‘열차집’. 교보문고 뒤 삼청동에서 내려오는 개천쯤에서 이곳의 역사가 시작됐다. 창업주의 집과 친척 집 사이 좁은 골목 공간을 이용한 것. 그 모양이 길고 좁은 것이 마치 열차 같다고 해서 ‘열차집’이라고 이름 지었다. 1956년에 문을 연 창업주가 1976년 같은 동네 친구에게 가게를 넘기면서 피맛골로 이사했고, 많은 언론인과 교육자들이 퇴근 후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 찾아오면서 피맛골의 대명사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얼마 전 피맛골 재개발로 인해 또 한 번 이사를 해야 했는데, 지난 세월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지키고 싶어 오래 전부터 써오던 철판, 식탁, 의자, 접시까지 모두 그대로 가져왔다. 전과 같아야 오랫동안 찾아온 손님들이 섭섭해 하지 않을 것 같다는 주인장의 생각 때문이다. ‘열차집’은 빈대떡이 특별하다. 녹두가루에 돼지고기 고명이 올라간 빈대떡과 함께 어리굴젓을 얹어 먹는 것. 심심할 수 있는 빈대떡에 짭짜름하고 시원한 어리굴젓이 깊은 맛을 더한다. 이 맛을 잊지 못해 미국으로 이민가기 전날 가게에 들러 한 아름 포장해간 손님도 있을 정도.
메뉴 빈대떡, 해물파전
영업시간 오전 8시 30분~새벽 1시
위치 서울 종로구 공평동 130-1
문의 02-734-2849
/ 여성조선
취재 조한별 | 사진 신승희·박종혁·김민우
첫댓글 좋은정보~~감사합니다....^^**
어...서서갈비네여 ㅎㅎㅎ 저 어릴때 동네에서 많이 본건데 ~~`